태백산 눈꽃산행기 (1567미터)
우리 민족의 수호산이자 설산이 되어 있는 태백산 눈꽃산행을 하기 위하여 미명에 집을 나서서 6시에 대구를 출발하여 중앙고속도로를 달려서 안동휴게소에서 구수한 우거지국으로 아침을 먹고 영주를 지나 봉화로 들어서니 산야가 흰옷을 입은 설국이 되어 있었는데 심신도 탈속한듯 순백의 세계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백두대간의 능선상에 솟아오른 태백산은 강원도 태백시와 경북 봉화군의 경계에 있으며 국토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 산이기에 우리 민족의 영산으로서 “크고 밝은 뫼”란 뜻으로 산이 온통 흰자갈로 되어 있어서 쳐다보면 흰눈이 쌓인것처럼 밝게 빛난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신라시대부터 북악으로서 토함산(동악), 계룡산(서악), 지리산(남악), 팔공산(중악)과 함께 오악에 속하며 그 이전인 아득한 옛날부터 성소로 여기는 산으로서 하늘에 제사를 모시는 천제단이 이산에 있는것만으로 범상한 산이 아닌것을 짐작하게 만들고 있었다.
유일사 입구에서부터 산행을 시작하였는데 수십센티미터 높이의 눈이 쌓여서 정상까지 이어졌는데 밟으면 뾰드득거리는 소리가 도시에서 눈구경을 하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눈뿐만 아니라 귀까지 즐겁게 하였는데 조선 중기의 내노라 하는 선비들인 송강 정철과 오성 이항복,한음 이덕형이 술잔을 기울이면서 담론하기를 “대보름달 아래에서 나는 다듬방망이 소리가 좋더라”고 하니 “가을밤 깊은 밤에 선비의 낭낭한 글 읽는 소리가 좋더라”고 할때에 “무엇보다도 동방화촉 아래에서 새색시의 속옷 벗는 소리가 좋더라”는 소리에 모두들 백미라며 박장대소를 하였다고 하는데 어릴적의 고향의 소리뿐만 아니라 아득한 태초부터 이어져오는 소리일것이다.
봄꽃이 힘찬 새생명을 잉태하는 꽃이기에 좋다고는 하나 한겨울의 설화도 햇볓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아른거리니 마치 만년설이 쌓여 있는 희말라야에라도 온듯한 느낌이었으며 아래의 낙엽송에서부터 자작나무, 참나무, 백양나무등 설화의 모양도 제각각인바 정상 가까이에 있는 수천년을 이어온듯한 거대하고도 후덕한 주목나무 군락을 보니 유구히 이어져오는 민족혼을 느낄수 있었다.
3시간정도 걸려서 정상인 장군봉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아스라이 펼쳐지고 있는 수천수만의 산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태백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을 향해 뻗어나간 산줄기들이 유장하게 끝없이 구비쳐 흐르는 모습은 마치 넘실대는 바닷물이나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럼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사방 몇백리에 걸쳐서 우뚝우뚝 솟아오른 산봉우리들이 이처럼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니 과시 산의 머리라 일컬을만 하고 환웅천왕을 모시는 천제단이 여기에 있는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고 환웅은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해 이땅에 왔다고 하였으니 홍익인간의 깊은 뜻과 잘 어울리는 이산에 환웅천왕을 모시는 성소가 자리잡게 된것은 당연한 귀결이리라.
모두 흰눈이 덮힌 원근 산악들을 감상한후 천원지방사상에 의거하여 위에는 둥글게 아래에는 네모나게 쌓은 천제단밑 양지바른 곳에서 점심을 먹은후 당골로 하산을 하였는데 곧 태백산의 산신이자 대왕으로 모서져 있는 단종비각이 나왔는데 세종의 원손이자 문종의 원자로서 큰 꿈을 펼쳐보지도 못한채 영월땅에서 한많은 세상을 등진 단종대왕의 한이 여기에 스며 있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자 한성부윤을 지낸 추익한이라는 이고을의 선비가 머루, 다래를 따서 자주 진상을 했는데 어느날 꿈에 실과를 진상차 영월로 가는 도중에 곤룡포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태백산으로 오는 단종을 만나게 되었는바 추익한이 이상히 여겨 단종 계신곳에 도착해보니 그날 세상을 떠나신 것이었다. 단종이 세상을 떠난뒤 태백산 산신령이 되었다고 전하여지고 그후 주민들은 단종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500여년동안 매해 음력 9월3일 제를 모시고 있다고 하는데 많은 한을 간직하신 단종대왕께서는 산행객들의 애도에 고혼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세종조에 북방개척등의 공이 많은 중신인 김종서와 황보인등의 정승들과 대신들을 참살하고 끝내 왕위까지 빼앗은 수양대군! 그렇게까지 해서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결국 내란의 수괴인 수양대군(세조)도 문둥병에 걸리고 두 번이나 국구를 지내고 권세를 누린 한명회도 연산군대에 이르러 부관참시가 되어서 두번 죽음을 당했으니 이것도 역사의 순환일진데 춘추필법을 떠나서도 다시는 한명회같은 아류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수양대군을 꾸짖으면서 고문당하면서 죽어간 성삼문등의 충신들은 영원한 귀감으로서 꽃다운 이름이 만대후에도 빛날것이다.
비각 바로 옆의 망경사는 천제단으로 가는 산행객들의 쉼터 역할을 하는 곳으로 해발 1,500미터의 우리나라 사찰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라 652년에 자장이 창건하였는데 자장이 인근 정암사에서 말년을 보내던중 이곳에 문수보살 석상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암자를 지어 그 석상을 모셨으며 신라시대부터 매년 시월 천제단에서 제사를 올릴때 천수로 사용하고 있는 용정이 있는데 사시사철 맑고 시원한 물이 철철 넘쳐흐르며 물맛이 좋아서 한국 명수 100선에 선정되기도 한 곳이었다.
또 태백산은 강들의 고향이자 뿌리로서 태백시내 한가운데 있는 황지는 한반도 남쪽에서 가장 긴 낙동강 1,300리의 발원지로 이 연못에서 솟아나는 물은 드넓은 영남평야를 도도히 흘러 남해에 이르고 태백시 금대봉 기슭에 위치한 검룡소는 정선군 나전리 함수머리에서 오대산 우통수의 물줄기와 합류해 한강으로 이어지는데 옛날 서해에 살던 이무기가 용이 되고자 한강을 거슬러 가장 먼 연못을 찾아갔는데 이곳에 이르러 연못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부림친 자국이 검룡소에서 쏟아지는 폭포라는 전설이며 또 동해로 흐르는 오십천은 삼수령에서 발원을 하니 어찌 태백을 예사 산이라 하리요.
4.4킬로미터에 이르는 산길을 내려오니 당골 입구에 단군 성전이 세워져 있었는데 삼한시대에는 이곳이 신성불가침지역으로서 소도가 있었으며 지금도 그 지명이 남아 있다고 하는데 태백문화원에서는 “당초의 소도는 태백산밑의 좁은 지역에 국한되었던것이 아니라 소도동을 비롯하여 황지동, 장성동, 동점동등 구문소안쪽의 땅전체가 소도지역이었으며 그 중심지는 황지지역이었다고 전해주고 있었다.
광장에는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부터 10일간 태백산눈꽃축제가 개막되어서 수많은 인파가 모여 들었으며 석탄박물관이 눈에 들어왔는데 20세기 태백의 역사에서 “검은 황금”혹은 “검은 노다지”로 불리던 석탄을 빼놓고는 이야기할수 없을 정도인데 석탄은 1920년경 장해룡이라는 사람이 금천골 먹돌배기의 개울가에서 처음 발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이곳은 석탄이 발견되기 전에도 땅이 검었고 비가 오면 계곡물도 검은색으로 변하여 예부터 “거무내”라고 했다는 곳인데 그가 석탄덩어리를 면장 책상위에 놓아둔것이 일본인 기사 눈이 띄어 태백에 탄광이 들어서게 되었고 탄광도시로 탈바꿈하게 된 계기였다고 전한다.
그후 광복이 되고 산업사회로 본격 진입하면서 석탄개발이 활성화되어 전국에서 노다지를 좇는 수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넘어 들어와서 무려 12만명이 넘는 인구가 흘러 들어왔고 이들은 태백, 함백, 연화, 백병산등의 산자락을 파헤치면서 “불을 일으키는 검은 돌”을 캐내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몸을 따뜻하게 녹여 주었으며 그리하여 태백은 60,70년대에는 “지나는 개도 입에 만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흥청거렸고 호황을 누렸다고 하며 태백에 시가지가 형성되고 1981년에 장성,황지읍이 삼척군에서 갈라져나와 태백시로 승격된것은 오로지 탄광덕분이었는데 수십년의 호황기가 지난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 대부분의 탄광이 문을 닫게 되었고 광부들도 썰물처럼 빠져나가서 지금은 사택들이 대부분 빈집이라고 하였다.
해가 질때쯤 태백을 나와서 노루재를 지나 봉화에 들어서니 저녁때가 되어서 박상선대구산악회장의 찬조로 동해해물탕식당에서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시원하고도 얼큰한 해물탕으로 저녁을 든든하게 먹고 대구로 향했는데 우리나라의 어느 산보다 대륙적인 기상을 풍겨주는 융숭한 덕성을 간직한 육산이며 흰옷을 입은 태백산은 한민족 정신의 뿌리요 근원지라고 할수 있는 산이었다.
첫댓글 좋은 곳을 문학적 감각으로 어루 만지며 다니시는 친구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