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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관련 성경절 풀이
영혼불멸인가 부활인가
∙심각하고 혼란스러운 문제 / 16
∙영혼이 불멸하는 것처럼 되어있는 성경절들 / 16
∙영혼불멸의 성경절로 사용되는 몇 가지 사례들 / 17
∙영혼[영]으로 사용되는 신구약의 원어들과 그 의미 / 18
∙오해되고 있는 성경절 풀이 / 19
- 죽으면 신이 하늘로 가는가? / 19
- 제단 아래 있는 영혼들은 무엇인가? / 20
- 몸을 떠나 있는다는 것의 의미는? / 21
- 재림시에 누구를 데려오시는 것인가? / 21
-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는가? / 22
-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 / 23
-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는가? / 23
- 옥에 있는 영들은 무엇인가? / 24
∙십자가 옆의 강도는 낙원에 갔는가 / 25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는 실화인가 / 26
심각하고 혼란스러운 문제
•편견과 고정관념의 문제사람의 생각과 판단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과 상식과 고정관념 등 다양한 요소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같은 사물에 대해서도 그 느낌은 천차만별이다. 동그라미를 보았을 때, 시인은 달을 생각할 것이며 운동 선수는 공을 연상할 것이고, 수학 선생은 원의 면적을 계산해 보려고 할 것이다. / 마찬가지 원리로,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은 이미 오랜 세월을 통하여 굳어진, 영혼은 불멸이라는 고정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볼 때에 모든 개념을 영혼불멸이라는 틀에 맞추어 놓고 생각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지난 과에서 공부했듯이, 영혼불멸 사상은 분명히 성경에 나온 것이 아니고 헬라의 철학 사상이었으며, 종교암흑시대 동안에 교리화된 비성서적 관념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고 할만큼 중요한 부활의 신앙과는 정면 배치되는 가르침인데도 불구하고 좀처럼 머리 속에서 영혼불멸 사상이 지워지지 않고 않고 있는 것은 참으로 신비스러운 일이다. 인간의 고정 관념이란 이렇게도 무서운 것이다.
•성경의 대답은 분명하다성경의 내용 중에 마치 영혼이 별개로 존재하는 것럼 생각나게 하는 구절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그것은 번역상의 문제, 혹은 고정관념이나 편견의 문제이지, 성경 전체는 언제나 동일하게 분명한 답변을 갖는다. 영혼은 결코 별개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며, 인간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소멸되었다가, 부활과 함께 다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과에서는 주로, 성경에서 영혼이 불멸하는 것처럼 오해될만한 부분들, 혹은 영혼멸절의 관점에서 올바른 해석이 필요한 몇 성경절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영혼이 불멸하는 것처럼 되어 있는 성경절들
•종교개혁 시대 이후의 번역이미 설명한대로 성경의 원어는 히브리어[구약]와 헬라어[신약]이다. 모든 성경은 필사(筆寫)와 번역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 성경의 번역 사업은 주로 종교 개혁 시대 이후로 크게 발전되었는데, 1000년 이상 가톨릭의 지배를 받아왔기 때문에 번역자들이 영혼불멸 사상과 교리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번역자 중에는 틴데일이나 루터와 같이 영혼불멸 사상을 철저히 배격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번역자들은 그 영향권 아래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번역자들의 사상 문제그래서 그들은 성경 원어를 취급함에 있어서 자신들의 기존 개념, 즉 영혼은 불멸한다는 사상에 기초하여 번역하는 용어를 선택하였던 것이다. 성경을 번역할 때에는 현재 사용되는 교회의 관습이나 용어보다는 성경 원문의 뜻을 충분히 반영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마땅히 “침례”라고 번역해야 하는 부분을 여전히 “세례”로 사용하는 것도 그 하나의 사례이다.
영혼불멸의 성경절로 사용되는 몇 가지 사례들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가?
[마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태복음 10장은 주로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핍박에 대한 말씀이다. 핍박자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육체적 고통을 가할 수는 있으나, 신앙심은 빼앗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다. 사람은 인간의 정신이나 신앙심을 말살시킬 수 없지만, 하나님을 그것까지도 멸하신다. 문맥상으로 볼 때에, 마태복음 10장 28절의 말씀은 하나님에 의해서 영혼도 멸절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실상, 위의 말씀에서 ‘영혼’[프쉬케]이라는 말은 ‘마음’ 혹은 ‘정신’으로 번역되어야 타당하다. 사도행전 14장 2절과 마태복음 26장 38절에서는 ‘프쉬케’라는 단어를 ‘마음’으로 번역하였다.
•예수님의 영혼은 어디로 갔는가?
[마 27: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예수께서 돌아가시는 이 장면에서, 숨이 끊어지는 순간을 ‘영혼’이 떠났다는 말로 표현했으나, 이것은 원문과는 맞지 않는 번역이다.
▸이 성경절에서 ‘영혼’이라고 번역된 낱말의 원어는 ‘프뉴마’로서 ‘숨’이나 ‘바람’이라는 뜻이다.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숨을 거두셨다”로 올바르게 번역해 놓았다. “예수께서 다시 한번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영혼[영]으로 사용되는 신구약의 원어들과 그 의미
•구약성경의 생기:루아흐구약 성경에 389회 사용되었는데, 원래의 뜻은 “호흡” “바람” “기운”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번역할 때에는 번역자의 주관과 문맥에 따라 “성령” “호흡” “생기” “기운” “정신” “마음” “신”(神, spirit), "영“(靈) 등으로 번역되어 성경의 독자들은 혼란을 갖게 된다.
[”루아흐“ 번역의 사례] 전 12:7 ”신“(神) / 시 146:4 ”호흡“ / 겔 37:5 ”생기“ / 시 104:3 ”호흡 / 욥 27:3 “기운”(이 번역을 전도서 12장 7절에서처럼 “신”으로 번역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의 신은 내 코에 있느니라”) / 전도서 3장 19절에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동일한 호흡(루아흐)”이 있고 모두 같은 모양으로 죽는다고 표현했다.
•신약성경의 생기:프뉴마구약의 “루아흐”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된 신약의 단어는 “프뉴마”이며 385회 쓰였다. “성령” (악한)“영” “마음(심령)” “정신” “바람” “영혼” 등으로 번역되어 있다.
[“프뉴마” 번역의 사례] 마 4:1 “성령” / 마 5:3 “심령” / 마 12:43 “귀신” / 마 27:50; 행 7:59 “영혼” / 막 8:12; 고전 16:18 “마음” / 눅 8:55 “영” / 요 3:8 “바람” / 모든 번역 중에, 그것이 인간과 관련되어 사용된 경우에는 불멸이거나 죽은 뒤 몸을 떠나 어떤 의식을 갖는 것으로 표현된 곳은 한 곳도 없다.
•구약 성경의 생령:네페슈이 말은, “생령” “영혼” 등으로 번역되어 구약에 754회 나오는데(비슷한 의미로 쓰여진 ‘네솨마’도 25회 나옴), 그 중에 22회는 새, 물고기, 짐승 등을 가리켰으며, 7회는 사람과 짐승을 동시에 가리켰다. 원래는 “호흡” “생명” 등의 뜻을 가지고 있으나, “영혼”이라고 번역된 경우가 가장 많다.
[“네페슈” 번역의 사례] 창 9:4; 시 56:7 “생명” / 창 12:13 “목숨” / 창 14:21 “사람” / 창 27:25; 레 26:15 “마음” / 창 35:18; 시 57:5 “혼” / 레 11:46 “기어다니는 것” / 레 24:18 “짐승” / 민 6:6 “체(體)” / 민 9:6 “시체” / 시 49:16; 62:6 “영혼” / 레위기 17:11절에 “생명”으로 번역된 것을, 만약 “영혼”으로 번역한다면, “육체의 영혼(생명)은 피에 있음이라”로 읽어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구약에서 “네페슈”가 사용될 때에는 주로 사람이나 동물이나 살아있는 생명체 혹은 생명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며, 인간 속에 있는 어떤 독립적인 본질로서 죽을 때 몸을 떠나서 별개로 존재하는 무슨 귀신같은 불멸의 혼백이 아니다.
•신약 성경의 생령:프쉬케살아있는 ‘생명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쉬케”인데 신약 성경에 105회 사용되었다. “생명”, “마음”, “영혼” “사람” “목숨”등으로 번역되었다.
[“프쉬케” 번역의 사례] 마 6:25; 눅 9:24; 요 10:11 “목숨” / 마 26:38 “마음” / 눅 1:46; 행 2:27; 히 6:19 “영혼” / 눅 9:56 “생명” / 행 2:43 “사람” / 롬 2:9 “영”
•영혼관련 단어 1658회 사용“영혼”으로 많이 번역된 위의 단어들은 신구약 전체에 1658회 등장한다. 그러나 어느 한 곳도 그것이 사람이 죽을 때 몸을 떠나서 별개로 존재하는 것으로 쓰여진 곳은 없다. 이러한 단어들은 마땅히, 호흡, 숨, 살아있는 생물, 사람, 마음, (감정을 표현하는)인격체, 문맥에 따라서는 성령, 악령 등으로 번역되어야 하는 것인데, 영혼불멸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번역할 경우에는 자주 그것이 마치 불멸인 것처럼 번역을 하여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을 뿐이지, 성경 자체에는 영혼불멸의 사상은 그림자도 나타나지 않는다.
오해되고 있는 성경절 풀이
1. 사람이 죽으면 그 신(神)은 하나님께로 간다고 하지 않았는가?
[전 12:7]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神)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설명
여기에서 신(神)은 히브리어로 “루아흐”인데 이것은 본래 “바람”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호흡”이나 “생명”이다. 실제 이 말은 언제나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활동하는 이성적인 존재에게만 사용되며 “루아흐”가 ‘스스로 존재하는 그 어떤 것’으로는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현대어 성경(성서교재간행사, 1991년)에서는 “그 때가 되면 흙에서 온 네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네 생명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번역하였다. / 만일 ‘루아흐’를 “영혼”으로 번역한다면 욥기 27장 3절의 “나의 생명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기운(루아흐)이 내 코에 있느니라”는 말씀에서, “영혼”이 코에 있다는 우스운 말이 되고 만다. / 히브리 문체에서 “호흡이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관용적 표현이지, 영혼이 분리된다는 사상은 전혀 아니다. 한국말 표현에도 죽음에 대한 묘사가 얼마든지 다양하게 있다. “돌아가셨다” “소천하였다” “숨을 거두었다” “사망하였다” “숟가락 놓으셨다” 등
2. 계시록 6장의 제단아래 영혼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계 6:9,10]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설명
본문의 내용이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것이다. 창세 이후로 순교한 모든 사람의 영혼들이 제단 아래 모여 있다는 것은 순리적인 생각이 아니다. 그리고, 11절에는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셨는데, 육체가 없는 영혼들에게 두루마기가 필요하겠는가? “두루마기”가 상징이라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의미로 쓰여진 구절이다. / 여기에서 “제단”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성전에서 양을 잡아 제사 드릴 때, 그 희생 제물의 피를 제단 아래 쏟는 의식이 있었고(레 4:7), 제물은 제단에서 불살랐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희생당하고 순교당한 사람들을 비유하여 사용한 표현이다. 이것은 “아우의 핏소리가…호소”(창 4:10)한다든지, “삯이 소리지른다”(약 5:4)든지,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계 16:7)고 한다든지 하는 것과 같이 하나의 의인화(擬人化)된 표현이다.
핏소리가 하나님께 호소한다든지, 순교자들이 자신들의 피에 대하여 신원하여 주기를 호소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순교자들의 죽음을 주목하고 계시며,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하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해 있음을 의인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대체로 순교자들은 순교할 때에 박해자들을 저주하거나 원망하거나 탄원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처럼 저들을 위해서 기도했다(행 7:60).
3. 사도 바울이 몸을 떠나 있기를 원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고후 5:8]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설명
이 성경절과 전후 문맥은 현대어 성경(성서교재간행사, 1991년)에 보면 더 이해하기 쉽게 되어 있다. 바울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육체가 죽으면 하늘에 있는 새로운 몸, 곧 영원한 집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5장 2~4절을 보면 “우리는 이미 이 세상살이에 지쳐 신음하며 새 옷을 갈아입듯 하늘의 몸을 입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그것은 우리가 몸이 없는 영으로만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이 몸을 입고 살아가면서 힘들어 신음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새로운 몸 입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그리하여 이 죽을 몸이 영원한 생명을 덧입기를 바라는 것입니다”고 되어 있다.
바울은 죽음에 굴복하는 지금의 육체를 벗고, 영원한 집 곧 영원한 육체를 언제 갖게 되기를 소망하고 있었는가? 죽은 직후인가? 아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5:52~54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바울은 재림의 때에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몸을 떠나”는 일은 죽음을 뜻하고, “주와 함께 거하는” 일은 재림의 때에 죽은 자가 썩지 않을 몸으로 부활하고 살아있는 자들이 홀연히 죽지 않을 몸으로 변화될 때 성취될 것이다.
4. 구원받은 영혼이 하늘에 없다면, 예수께서 재림하실 누구를 데리고 오시겠다는 것인가?
[살전 4:14]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설명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을 데리고 오시겠다고 하셨다. 만약에 예수께서 구원받은 영혼들을 데리고 오신다면, 하늘에서 영혼들이 자고 있다는 말이 되어 전혀 의미가 통하지 않게 된다. 그러면 이것은 무슨 말인가? “데리고 오시리라”는 말은 헬라어로 ‘악쎄이’(αζει)이다. 사전에서 이 단어의 뜻을 찾아보면 ‘가다’ ‘데리고 가다’ ‘인도하다’ ‘데리고 가다’ ‘안내하다’ '데리고 오다'등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악쎄이(αζει)는 아고(αγω)의 미래 직설법 능동태 3인칭 단수형임]
그러므로 문맥에 맞추어 성경을 번역하려면 ‘악쎄이’는 “데리고 가시리라”로 번역해야 합당하다. 현대어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이미 죽어서 세상을 떠난 모든 그리스도인도 하나님께서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가실 것을 믿습니다”
5. 전도서에는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간다고 하지 않았는가?
[전 3:21]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설명
본문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고 되어 있다. “누가 알랴”는 말은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다. 공동번역은 “사람의 숨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숨은 땅 속으로 내려간다고 누가 장담하랴”라고 번역했고, 현대어 성경은 “인간의 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영은 저 깊은 땅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누가 지신 있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번역하였다. / 여기에서 “혼”은 “루아흐”인데, [공동번역]에는 “숨”이라는 말로 올바르게 번역되어 있다. 만일 이것이 ‘죽은 사람의 혼’이라면 짐승도 혼이 있다는 말이 되고 땅 속에는 짐승의 혼이 가득하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이 되고 만다.
문맥을 잘 살펴보면 18절에서 사람이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하심이라”고 하였고, 20절에는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라고 한 다음에, 위의 성경절이 나온다. 이것은 사람과 짐승의 숨이 각기 다른 곳으로 간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면서 죽기는 일반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 다음 과에서 다시 설명을 하겠지만, 짐승은 단지 짐승같은 기능을 하도록 만들어졌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된 후,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신뢰하여 그분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진 다음, 하나님이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으시므로 각각의 기능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생기만 빠지면 짐승이나 사람이나 그 본래의 재료인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6.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이란 무엇인가?
[빌 1:23,24]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설명
이 편지서는 바울이 로마에 1차 투옥되었을 때 감옥에서 쓴 편지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자기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2차 투옥시에 기록한 디모데후서 4장 6절을 보면,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 감옥에 있는 동안에는 언제나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이에 끼였"다고 하는 것은, 곧 죽을 수도 있고 혹시 살 수도 있음을 뜻하는 것인데, 바울 자신은 어떻게 되든지 별 지장이 없으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니라”고 한 것은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바울이 살아있는 것이 더 큰 용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울은 언제 주와 함께 있게 될 것인지를 누구보다도 확실히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가 기록한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8절에서 “주께서…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였다. 바울은 분명히 말한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금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6~19). 만일 사람이 죽어서 그 영혼이 즉시 하늘에 갔다면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데리러 오시는 재림의 때부터 주와 함께 있게 될 것이다. 바울은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말한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8).
7.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벧전 4:6]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설명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베드로의 말은 그 당시 죽어있던 사람들에게도 생전에 복음이 전파되었다(유엥겔리스데, 단순과거형)는 것을 의미한다.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한다는 것은, 죽음으로 한 번 심판을 받았지만,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영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다시 살 수 있다는 소망이 있다는 것이다. [공동번역] 성경에는 좀 더 이해하기 쉬운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육체로는 인간이 받는 심판을 받았지만 영적으로는 하느님을 따라 살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벧전 4:6) /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에게는 멸망의 형벌이 임할 것이다(살후 1:7~9).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잠’이라고 부른다. 죄된 육신으로는 사람을 따라 죽었으나, 살아 생전에 복음을 받아들였으니 영적으로는 심판 시에 하나님을 따라 불멸의 몸으로 살 수 있다는 뜻이다.
8. 예수께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벧전 3:18~20] “(18)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20)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설명
(18절) “육체로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 살리심을 받으셨으니”이것은 결코 예수의 ‘영’이 살아났다는 말이 아니다. 영혼불멸의 이론대로라면, ‘영’은 죽지 않기 때문에 다시 살아날 필요도 없다. ‘죽음’은 인간 세계의 일이지만 ‘부활’은 영적인 세계, 즉 하나님의 세계에 속하는 일이다. 그런 뜻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설명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부활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9).
(19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20절)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이 내용을 잘못 생각하면, 예수께서 돌아가신 직후에 ‘영’으로, 연옥이나 지옥에 가서 노아 시대에 멸망당하여 지옥에서 고통받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 그러나, 우선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예수의 ‘영’이 별도로 활동하신다는 것은 다른 성경의 내용과 조화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이 한번 죽으면 그 후에 심판이 있을 뿐이지, 죽은 후에 다시 복음을 듣고 회개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히 9:27). /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문맥상으로 ‘저’는 예수님이다. ‘옥’은 무엇인가? 헬라어로 ‘휠라케’라고 하는 이 말은 흔히 생각하는 ‘지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감옥“ 혹은 ”갇힘“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것은 흔히 이 ‘죄악 세상’을 지칭하여 사용하는 단어이다. 사단이 이 세상에 갇혀 있다가 잠시 풀려난 상태를 계시록 20장 7절에서는 ”옥에서 놓여 나와서“라고 표현하였다. ”영으로“ ”영들에게“라는 말에서 ”영“은 헬라어로 ‘프뉴마’인데 ”성령“ ”마음(심령)“ 등으로도 얼마든지 해석될 수 있는 낱말이다. / 이와 같은 의미를 적용하여 위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은 뜻으로 풀이된다. ”예수께서 노아 당시에 성령(영)의 역사를 통하여 죄악 세상(옥)에 처해 있는 사람들의 심령(영)에 복음을 전했으나 모든 사람들이 거절하고 노아의 여덟 식구만 구원을 받았다.“ / ”전파하시니라“는 말의 원어는 ‘케루소’의 과거형인 ‘에케룩센’이며 ”전파하셨느니라“가 더 정확한 해석이다.
[말씀의 배경] 베드로전서는 소아시아 지역의 시험받는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기록된 편지서이다. 그 당시 교회는 외부의 박해와 내부의 시련으로 고통 중에 있었다. 악인들이 득세하고 의인들이 고난당하는 것처럼 보였다. 충성스러운 주의 백성들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위로한 후, 노아 시대의 예를 들어, 구원의 복음을 듣고도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에게는 준엄한 심판이 있을 것을 경고하며(벧전 4:5,6; 벧후 2:5~10), 끝까지 인내할 것을 격려하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 옆의 강도는 낙원에 갔는가?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강도의 요청강도가 예수님께 요청한 내용이 무엇이었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 영어성경(Today's English Version)에서는 이렇게 번역되었다. “Remember me, Jesus, when you come as King!"(예수님, 당신이 왕으로 오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공동번역] 성경에도 동일한 내용이 나온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 강도는 죽자마자 당장 영혼을 천당으로 인도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왕으로서 이 땅에 오실 때에 구원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언제 그분이 왕으로 오시는가? 그것은 분명히 재림의 날이다.
•“오늘”이 내용에서 “오늘”이라고 하는 부사는 헬라어 문법상 “내가” 앞에 두어서 “오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고 해야 마땅한 것이다. 구원을 요청한 강도의 소원을 당장 응답해 주시겠다고 한 것이지, 그 날 바로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갈 것이라는 약속이 전혀 아니다. / 예수님 자신도 그 날 낙원 혹은 천국에 올라가지 않으신 것이 확실하다. 그분이 부활하신 후, 무덤에 달려온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요 20:17). /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서 구원받은 강도는 분명히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일어나 구원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는 실화인가?
[눅 16:19~31]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23,24절).
•실화라고 가정할 경우의 문제점들이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영혼 불멸을 믿는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실화로 생각한다. 이 비유를 문자적으로 적용되는 실화로 생각할 경우에 많은 문제점들이 발생하게 된다. 다음의 몇 가지 문제점들과 함께 이 이야기의 실상을 살펴보자
① 아브라함의 품구원받은 의인들이 모두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간다면, 아브라함 이전에 구원받은 의인들은 어디로 갔는가? 그리고 고통받는 악인들이 아브라함에게 탄원을 해야 하는가?
② 눈, 손가락, 혀영혼이란 사실 별도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믿는 사람들의 생각처럼 영혼이 존재한다고 가정해보자. 영혼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탈 것이 없다. 뜨거움을 느끼는 감각도 없다. 몸이 아니기 때문에 눈이나 손가락이나 혀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이야기다. 영혼이 지옥에서 탄다는 말을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매우 허망한 이야기에 불과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③ 아브라함의 품과 음부 사이그 두 장소 사이의 거리가 손가락에 물을 찍어서 혀를 서늘하게 해 줄 수 있고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거리라면, 가족들이 양쪽으로 나누어졌을 경우 아브라함의 품도 생지옥에 불과할 것이다.
④ 실화가 아닌 비유이것은, 이집트에서 발견된 한 파피루스를 통해서, 예수님 당시 민중들이 익히 알고 있던 이집트의 민속 설화였음이 밝혀져 있다. 사실 누가복음 15장과 16장은 잃은 양, 잃은 은전, 탕자, 청지기, 부자와 나사로 등의 여러 가지 비유들이 연속적으로 나타나 있다. / [잃은 양의 비유]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 [탕자의 비유]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 [청지기의 비유]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한 부자가 있어…"
⑤ 나사로라고 하는 이름설화나 우화 속에 이름이 들어있다고 해서 그것이 실화라는 것은 너무 지나친 비약이다. 흥부와 놀부 이름이 있다고 해서 그 이야기가 실화가 아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름들 때문에 소설이 실화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 중에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이 있었다(눅 16:14).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사용하심으로 당시 부자들의 고정관념, 즉 부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이 축복의 결과이므로 구원이 보장되어 있는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저주를 받은 것이므로 구원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릇된 생각을 고쳐주시려고 한 것이다.
•기차 안에서 어느 목사님과 천주교인의 대화
“선생님, 담배를 무척 좋아하시는군요” /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선생은 담배를 안 태우시나요?” / “예, 저는 목사입니다. 그래서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 “아, 그렇습니까? 이거, 참 실례를 많이 했습니다.” -담배를 끔 / “나는 천주교인입니다. 신부님들은 담배를 피우시던데요.” / “예, 신부님들은 담배도 피우고, 술도 드시고 그러지요. 그러나 우리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목사 뿐 아니라 일반 신자들에게도 그렇게 하지 않도록 가르칩니다.” / “예, 그렇군요. 그런데 나는 말입니다. 성당에는 나가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거든요.” / “그러세요. 무슨 문제입니까?” /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천당을 가서 행복하게 영원히 산다고 하지 않습니까?” / “천주교나 일반 개신교에서 그렇게 가르치지요.” / “그런데 말입니다. 나는 일하다가 높은데서 떨어져 머리를 다쳐서 병원에 입원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인사불성이 되어서 아무 의식이 없었습니다. 내가 의식을 회복했을 때는 벌써 며칠이 지났더군요. 그런데 그 의식이 없던 며칠 간에 대하여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었거든요.” / “당연하지요.” /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죽었는데, 영혼이라는 것이 의식을 가지고 산다는 말입니까? 내가 아직 숨이 붙어 있을 때도 의식이 없으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 “선생님 의문이 참 합리적인 의문입니다. 오늘 저의 대답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인사불성이 되어도 아무 것도 모르는데, 죽었는데 어떻게 무엇을 알 수 있다는 말입니까’ 라는 의문은 올바른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죽으면 아무 것도 모르고,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그 죽은 자들을 부활시켜서 하늘 나라로 데리고 간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과 부활을 믿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후에 그 영혼이 천당이나 지옥에 가서 행복이나 고통을 누리며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는 말은 성경과는 전혀 다른 가르침입니다. 앞으로 신부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어떻게 말하는지 그것을 잘 연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확실한 답을 얻을 것입니다.”
[전 9:5]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
[욥 14:20,21] 주께서 사람을 영영히 이기셔서 떠나게 하시며 그의 얼굴 빛을 변하게 하시고 쫓아 보내시오니 그 아들이 존귀하나 그가 알지 못하며 비천하나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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