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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6월3일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이 막막한 사막 한 가운데 있는 기름진 곳, 뜨거운 열풍과 모래 바람으로 생물이 살아갈 수 없는 모래땅에서 물과 나무그늘과 과일열매가 풍성한 곳, 열기와 갈증과 허기로 숨이 넘어가기 직전의 여행자가 또 다시 길을 떠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곳, 그것이 내가 생각하고 있던 오아시스의 이미지였다. 그런데 호탄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지도 상의 호탄에는 곤륜산 꼭대기의 빙하가 흘러내리는 물이 두 개의 강으로 흐르고 있었는데, 그 강가에서 나는 옥은 호탄의 명물이며 중국 내에서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품질이 좋은 옥으로 손꼽힐 뿐 아니라, 풍요로운 논농사를 가능케 하는 관개수로의 자원이 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도시 외곽으로 나갔을 때는 그 이야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논이 많았고, 마을마다 흐르고 있는 관개수로의 물은 깊고 풍부해보였다. 또한 키가 높은 호도나무와 굵은 살구나무들이 가로수로 자라고 있고 집집마다 포도나무 울타리가 그늘을 이루고 있어 다른 오아시스 도시보다 풍요로워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의 질 좋은 호도와 포도는 싱싱한 과일과 함께 호탄지역을 세계적인 장수마을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막 내부 쪽에 형성된 지리적 영향 탓인지 그 어느 곳보다 웨이우얼족 고유의 생활양식이 더 잘 유지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루무치에서 출발하는 신장지역의 열차는 카스가 종점이었다. 그래서 버스를 타야했는데 나는 떠나기 전날 다음 날 낮에 출발하는 버스표룰 예매했다. 예전 같으면 경비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야간 침대버스를 탔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의 신장 여행 동안에는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낮에 이동하면서 주위 경치를 보고 밤에는 푹 쉬었다. 그것은 줄곧 나를 따라다니고 있는 요통 때문이기도 했는데, 어느 새 느긋한 여행의 맛을 즐기고 있었다.
떠나는 날 아침, 나는 500키로가 넘는 버스 여행을 위해 평소보다 열심히 스트레칭을 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장시간 버스에 앉아가는 일을 과연 무사히 견딜 수 있을까 염려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염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카스를 출발한 버스는 타클라마칸 사막 가장자리의 잘 닦여진 공로를 달렸다. 버스 안의 승객들은 맨 앞 좌석에 앉은 나와 곁에 앉은 한족 여자만 빼고 나면 모두 그 지역의 웨이우얼족 사람들이었다. 46살의 한족 여인은 강소성의 소주에 살고 있는데 이틀 전 집을 떠나 호탄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먼저 말을 걸었다. 그녀는 호탄에서 주로 각종 악세사리와 여러 가지 잡화 등을 사다가 소주에 있는 자신의 가게에서 팔고 있다고 했다. 그녀의 첫 인상은 매우 야무지고 깐깐해 보였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까무잡잡한 피부에 주금깨가 많은 모습은 나와 비슷하기도 했다. 나는 우리 둘이 함께 앉아있는 것을 본 사람들은 우리를 자매로 여기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실없는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그녀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나자 자신의 고장에 대해 많은 자랑을 했다. 중국에서 최고로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이니 언제고 한번 꼭 다녀가라는 말을 거듭 되풀이 했는데, 그런 그녀의 태도는 중국인 특유의 자긍심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그리고 다른 중국인들과 달리 그녀가 나에게 갖는 관심은 한국인이어서가 아니라 여자 혼자 여행한다는 사실 때문인 듯 했다. 다행히 그녀는 표준말을 사용하고 있어서 그녀와 함께 앉아가는 것이 중국어를 공부하는 좋은 시간이 되었고, 자칫 지루했을지도 모르는 버스 여행에 좋은 말동무가 되었다. 그러나 지루했을 수도 있는 버스 여행을 짧게 만들어 준 것은 그녀 뿐 아니었다.
언제부터인지 버스 안에는 줄곧 4박자의 라르고 신장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타악기와 연주되는 음악이 애잔하면서도 힘 있고 어딘가 몽환적인 느낌이 감미롭기까지 했다.
이곳 음악이 참 좋네요.
그러자 한족 여인은 거침없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소주 음악이 최고다.
이어서 자신의 지방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또 다시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매우 귀에 익은 음악이 들렸다. 귀 기울여 들어보니, 보아의 랩이 아닌가, 너무나 반가워 뒤를 돌아보니 서글서글한 눈매의 웨이우얼 청년이 나를 향해 자신의 핸드폰을 들어 보이며 활짝 웃었다. 아마도 우리의 이야기가 그에게까지 들린 모양이었다. 보아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곳은 바로 청년의 핸드폰이었다.
나는 마치 고향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웨이우얼족 남자들은 왜 이렇게 한결같이 멋진 거야!
내가 그를 향해 두 손을 높이 흔들어대자 조금 전까지 조용하던 버스 안이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와 웃음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사람들은 저마다 보아의 노래를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버스 기사마저 합세했다. 그가 싱글거리며 음악을 바꾼 것이다. 새롭게 흘러나오는 한국음악은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노래였지만 음악이야 말로 만국공통어가 아닌가. 나도 그들을 따라 흥얼거리다 보니, 어느 사이에 버스 안의 분위기가 야유회장처럼 화기애애해졌다. 부드러운 심성과 낙천적인 그들의 성품 속에서 나는 우리의 서로 다른 국적과 외양이나 나이 차를 뛰어넘고 있었다. 어린애다운 순수함과 순전무구한 호기심으로 충분히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다는 것, 그것은 흔치 않은 일일 것이다. 나는 그 어울림 속에서 내 주위 사람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들은 그것을 드러낼 기회를 놓치며 살아가거나, 너무 오래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아예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라는 생각에 한껏 아쉬움을 느끼며.
버스는 쿤룬산맥의 설산과 모래폭풍이 회오리로 솟구치는 황량한 모래벌판 사이의 길을 달렸다. 뜨거운 햇살 속의 그 풍경들이 때로는 마치 꿈 속의 장면처럼 아득하고 흐릿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길에서 두 사람을 보았다.
정오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사막이 한창 뜨거워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 열기 속에서 도로 옆에 집채만한 트럭을 세운 채 건장한 남자가 빨간 천을 깔아놓고 카스 쪽을 향해 열심히 절을 하고 있었다. 버스가 남자를 순식간에 스쳐지나갔지만 그의 모습이 오래도록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의 기도 내용은 무엇일까? 허허벌판의 사막 한 가운데서 뜨거운 햇살을 고스란히 받으며 무릎을 꿇어 절을 하던 그의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 같았다.
또 한 사람을 본 것은 석양 무렵이었다.
인적이라곤 태고 이후 없었을 것 같은 그 황량한 사막에 어느 새 해가 뉘엿뉘엿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남자가 자전거 패달을 열심히 돌리며 버스 앞에서 달리고 있었다. 자전거 뒷자리에는 두 개의 짐가방까지 늘어진 채 실려 있었는데, 막막한 사막 한가운데를 자전거로 달리고 있는 그가 나로서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땅에서 불쑥 솟아난 것도 아닐 텐데 도대체 어디서 출발했고 어디까지 가는 것일까, 그는 필경 해가 지기 전에 민가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언제까지 자전거 패달을 돌리고 어디쯤에서 멈추어 그 밤을 보내게 될지 호탄에 도착할 즈음에는 내가 본 것이 헛것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버스는 중간에 휴게소도 없는 길을 8시간이나 계속 달렸다. 하지만 나는 그 길이 지루하지 않았다. 고질적인 내 요통마저도 뜨겁고 하얀 사막의 매력에 빠져 바람난 여자처럼 창밖의 어딘가로 떠나버린 것 같았다. 떠날 때의 염려는 기우였고 호탄까지의 버스 여행은 짧게만 여겨졌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함께 그 길을 왔던 사람들의 선한 심성과 낙천적인 성격 탓이었을 것이다.
호탄에 도착했을 때는 신장시각의 늦은 11시가 다 되어 이미 어둑해진 후였다. 터미널 옆의 교통빈관 숙박료는 예상외로 비쌌고 허티엔 빈관은 몇 블록이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잠시 망설이고 있는데, 버스에 내린 후 줄곧 나를 떠나지 않고 있던 한족 여인이 자신이 단골로 정해놓고 묵는다는 숙소로 함께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녀를 따라 터미널 건너편의 빙관으로 갔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2인실 방에 들었다. 나로서는 경비절감을 위해 그녀와 같은 방을 사용하기로 한 것인데, 침대 위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여인은 ‘어떻게 자신을 믿고 같은 방에 들었느냐’고 물었다. 아마도 자신과 같은 방에 묵기로 한 나의 결정이 그녀로서는 뜻밖이었던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말투에서 자신을 믿어준 사람에 대한 신뢰와 반가움을 느낄 수 있었다.
숙소에 짐을 두고 혼자 빙관을 나왔다. 카스에서 불과 500미터 남짓 동남쪽으로 온 것 뿐인데 해가 생각보다 빨리 지는 곳 같았다. 길거리의 한 식당에 들어가 만둣국으로 저녁을 먹은 다음, 지도도 구할 겸 거리 구경을 나섰다. 그러나 가까이 지나가는 사람의 얼굴도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길거리가 어두워져 지도도 구하지 못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여인은 그때까지 깨어 있다가 내가 들어가자 마치 나를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왔던 사람처럼 반색하며 맞아주었다. 그러면서 호텔에 물이 나오지 않으니 화장실에서 물을 받아와 방에서 씻으라며 어디선가 프라스틱 용기를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나는 번거롭기도 하고 귀찮아져서 씻지도 않고 그냥 잠자리에 들었다.
6월 4일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 눈을 뜨니 한족 여인은 불만이 가득 찬 얼굴로 앉아있다. 그러다가 나를 보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불평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간 밤은 씻지를 못해 잠자리가 편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무척 잘 자더군요. 매일 저녁에는 물이 안 나온대요. 예전에는 그렇치 않았는데, 무슨 공사 중이라나 봐요. 나는 새벽에 겨우 세수만 하고 저녁에 씻을 물과 양치물은 미리 받아두었어요. 웨이우얼 족은 정말 지저분해요.
그녀의 볼멘 소리에 상관없이 나는 숙면 덕에 기분이 상쾌했다.
당신 때문에 싼 방에 들었고 잠도 잘 잤어요. 고마워요. 그래서 오늘 저녁은 내가 당신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요.
여인은 몹시 기뻐했다. 그녀는 자신이 사려고 했던 물품들을 구입하기 위해 일찍부터 장으로 나갔다.
혼자 숙소를 나와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한 나는 신화서점에 가서 지도를 사고 과일과 물도 챙긴 후 시외버스 터미널 방향으로 향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별안간 회오리 바람이 불어오면서 사방이 잿빛 구름 속으로 변해버렸다. 그것이 그 유명한 모래바람 카라브란이었다. 태양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주위는 합삭처럼 어두워졌는데 금방이라도 폭풍우가 들이닥칠 것처럼 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모래바람이 몰아쳤다. 나는 수건을 꺼내어 머리에 뒤집어쓰고 선글라스도 꼈다. 모래돌풍은 시커먼 괴물같았다. 눈을 뜰 수도, 숨을 쉴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을 에워싸는 잿빛 모래바람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발에 힘을 단단히 주고 꼼짝 안하고 제 자리에 선 채 그 돌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견디는 일 뿐이었다. 다행히 그 시간이 길지 않았다. 잠시 후 바람의 세력이 약해졌고, 나는 그제서야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마침 근처에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었고 내가 올라타자 이내 버스가 출발했다. 버스에 앉아 거리를 내다보니 모래에 뒤덮힌 도시가 방금 발굴된 유적 터 같았다. 그런데도 내가 혼비백산 했던 것과 달리 현지인들의 표정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사람들 같다. 예사로운 일인 듯 과일을 파는 노점상들은 과일의 먼지를 털어내고 낭을 굽는 사람들은 여전히 낭을 굽고 꺼내고 있었다.
버스는 관개수로를 따라 이어진 비포장도로를 두어 시간이나 달린 후 종점에 도착했다.
차 안에서는 차체 밑과 창문 틈으로 들어온 매캐한 흙먼지가 버스가 멈출 때까지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슬람여인처럼 수건을 얼굴전체에 뒤집어쓰고 눈만 빼꼼이 내놓고 앉아있어야 했다. 그리고도 종점에 내리자마자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느라 경황이 없었다.
마을은 인적 하나 없이 조용했다. 햇살은 모든 것들을 금방이라도 미이라로 만들 것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생명 있는 것들은 그 햇살을 피해 어딘가에 숨어서 숨을 죽이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자, 가게 앞의 나무 그늘 진 곳에 앉아있던 남자가 나에게 시선을 두었지만 햇살에 눈이 부신 듯했다. 그는 나를 발견했을 때부터 줄곧 나를 주시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나와 함께 버스에서 내려 앞에 가고 있던 두 여인이 어느 집 앞에 멈추었다. 그러더니 집 앞의 수도꼭지(웨이우얼족 식당 앞에는 손씻는 곳이 있다)에서 손을 씻고 발이 드리워진 곳으로 들어간다. 간판은 없었지만 냄새가 흘러나오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식당인 것 같았다. 나도 그녀들 뒤를 따라 들어갔는데, 실내가 어둑해서 마치 극장 안에 막 들어갔을 때처럼 주위를 살피지 못한 채 잠시 당황스러웠다. 그러다가 이내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눈만 내놓은 채 온 몸을 천으로 감싼 여인이 두 여인에게는 찻물을 따라 주는데 나에 대해서는 그냥 힐끗 한번 쳐다보고 나가버렸다. 나는 잠시 앉아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 근처의 탁자에서 주전자와 찻잔을 챙겨들고 내 자리로 돌아와 물을 따라놓고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나에게 전혀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말했다.
라미엔 주세요.
하지만 여자는 여전히 나에게 대꾸도 하지 않더니, 잠시 후 밖의 평상에 앉아있는 남자를 불렀다. 그제야 남자가 들어와 나에게 다가왔다.
라미엔 주세요,
다시 한번 똑 같이 주문했다. 그러자 남자가 여자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 그제야 여자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마 그녀는 나를 한족으로 여겼던 것 같다. 한족에 대해 심한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
식당 안은 어두침침했다. 나는 국수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밖으로 나와 가게 앞의 수박장사에게 수박을 샀다. 1개 2원이란다. 반쪽만 살 수 있는가 물어보자 남자는 작은 것을 들어 보였다. 1원짜리 수박을 사서 가게 안으로 갖고 들어왔다. 그리고 여자에게 숟갈을 부탁하여 얻은 후 수저로 수박을 파 먹기 시작했다. 마침 점심 시각인 모양이었다. 한 무리의 남자들이 들어오더니 나를 피하듯 텅 비어있는 내 앞과 옆자리를 놔두고 뒤편 탁자에 겨우 엉덩이만 걸치는 형태로 왁자지껄하며 비좁게 모여 앉는다. 아무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빨리 식사를 끝내고 자리를 비워주는 일일 것만 같았다.
마을의 도로는 일자로 뻗어나가 있었고, 그 길을 중심으로 마을이 이루어져 있었다. 식당을 나온 나는 포만감에 더욱 느려진 걸음으로 버스가 지나온 곳을 거슬러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아름드리 고목의 뽕나무들과 살구나무들이 가로수로 자라고 있었으며 모래바람을 막아주는 무성한 포플라나무 사이에 은신처처럼 네모난 흙벽돌집들이 들어앉아 있었다. 집들은 나뭇가지로 기둥을 세우고 벽을 엮은 후 흙을 발라 지은 모습이 겉에 확연히 드러나 있었는데 그런 모습들은 지붕만 네모나지 않았다면 이제는 사라진 우리네 시골의 흙집과 다를 것 없어 보였다. 집집마다 포도넝쿨이 등나무처럼 그늘을 만들며 울타리로, 마당의 채양으로 자라고 있었다. 햇살이 뜨겁게 내려퍼붓고 걸을 때마다 흙먼지가 발밑에서 폴폴 일어나는 신작로를 나는 마치 옛 고향 마을에 돌아온 사람처럼 느긋하게 걸었다.
그러다가 한 초등학교 앞에 도착했는데, 마침 하교 시간인지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학교 안으로 들어가다가 그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갇힌 꼴이 되어버렸다. 문제는 사진기였다.
마침 교문을 나오는 한 아이의 사진을 찍었는데 이것을 본 다른 아이들이 아우성을 지르며 몰려든 것이다. 그들은 제각각 각양각색의 포즈를 잡으며 내 앞에서 난리법석을 피웠다. 수줍거나 낯을 가리는 기색이 없었다. 나는 잠시 세월을 거슬러 올라 내 유년 시절의 또래들 속에 섞여버린 듯 했다. 뽕나무 위로 냉큼 올라가 소리를 지르는 소녀, 교문 창살에 매달리며 독보적인 자세와 함께 타잔의 소리를 내지르는 사내아이, 어디론가로 큰 소리를 외치며 친구를 부르러 가는 아이, 자전거로 묘기를 부리는 아이, 수줍거나 연약한 아이들은 그저 뒷전에서 눈치만 볼 뿐이었다. 나는 마치 축제마당에 있는 것처럼 모든 아이들에게 골고루 사진을 찍어주며 그들의 특별한 환대를 받았다.
때 아닌 축제장을 아쉽게 끝내고 아이들을 빠져나와 걷다가 한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자신의 집 앞에서 아이를 안은 채 벌써부터 내가 학교에서 아이들 속에 묻혀있던 것을 멀리서 지켜보았던 그녀는 나에게 친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용기를 내어 그녀의 집을 기웃거렸다. 내가 집안 구경을 할 수 있느냐고 말을 건네자 그녀는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며 흔쾌한 표정으로 앞서 들어갔다. 그러더니 집안의 여기 저기를 안내해 주고 각 방들은 문까지 열어보여 주었다. 살림살이는 간소했지만 방의 벽과 바닥에 깔고 걸쳐놓은 카펫들은 크고 화려했다. 그녀도 내 카메라 앞에서 활짝 웃었다. 포즈를 취한 후 카메라를 드려다 본 그녀는 자신의 친구를 데려와도 되겠냐고 물었다. 내가 좋다고 하자 급한 발걸음으로 나간 그녀는 한참 후에 여러 여자들과 나타났다. 단지 찍히기만 하는 것인데도 얼굴표정이 꽃처럼 피어나고 큰 손님을 맞이한 것처럼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녀들의 태도에 나는 민망하기까지 했다.
여인의 집을 나와 다시 신작로를 걷기 시작했다.
버스가 지나가다가 내 앞에 멈추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손을 내젓자 운전기사는 한번 씨익 웃어주고 버스는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사라져갔다. 먼지에 뒤범벅이 되어 숨을 고르고 있는데, 길가의 뽕나무 아래 수풀 속에서 한 남자가 공처럼 불쑥 튀여나왔다. 얼떨결에 니하오!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남자는 마치 동네 사람이라도 되는 양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어디 가냐?
호탄 시내 간다.
마차타고 가라.
괜찮다. 그냥 걸어가겠다.
한 사십은 족히 되어보이는 남자는 내가 한참이나 가서 뒤돌아 보자 그때까지 나를 지켜보고 있다가 되돌아오라는 손짓을 해댔다. 이미 그의 얼굴 윤곽은 알아 볼 수 없었지만 그 모습은 마치 한양으로 아들을 떠나보내는 늙은 에미의 것처럼 여겨졌다. 비록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이고 있는 길이었지만 높고 푸른 하늘을 양쪽으로 드넓게 펼쳐진 논과 아름드리로 자라고 있는 뽕나무와 유실수로 심어진 가로수 그늘을 따라 걷다보니, 시골 외갓집 가는 길의 방죽길이 나오고, 어릴 적 살던 영등포의 신작로도 나오고, 김제 망해사로 가던 길도 나타났다. 그렇게 걷다 그만 옥이 많이 난다는 강에는 가지 못했다.
그날 저녁 숙소에 돌아오니, 한족 여인은 그날 사온 물건들을 한 아름 펼쳐놓고 정리하고 있었다. 주로 악세사리와 일용잡화였다. 그녀가 대강의 짐정리를 마치자 우리는 함께 외출했다. 그러나 한족 식당은 흔하지 않아서 몇 블록이나 걸어다녀 찾아다닌 끝에 한족 식당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식당 안에 들어가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때였다.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 뜻밖의 사람을 보게 되었다.
카스에 도착한 다음날이었다. 지도를 구하러 신화서점에 갔었는데, 그때 그 서점 안에서 유난한 모습의 한 남자가 책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무릎 아래부터 발목까지 꼭 달라붙은 일본군복 같은 복장차림이었는데 몹시 낡고 초라한 그의 행색과 깡마른 모습이 영화에서 본 일본군 패장병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던 것이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나는 묘한 연민과 향수마저 느꼈고, 호기심에 끌려 한동안 훔쳐보듯 그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하기도 했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랬던 그를 여러 날이 지나 그곳으로부터 한참이나 떨어진 호탄, 그것도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 외곽지역의 식당에서 보게 된 것이다. 나는 그를 다시 유심히 지켜보았다. 예전에 비해 그의 옷매무새는 단정하고 깔끔했다. 하지만 식당 앞에 서 있는 그의 얼굴 표정은 여전히 영락없는 패잔병의 모습이었다. 구걸하러 갔으나 잔뜩 얻어맞기만 하고 초주검이 된 채 쫓겨난 가엾은 짐승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옷에 달라붙은 먼지 때문인지 그의 옷은 무척 낡아보였고, 스치기만 해도 그 먼지와 함께 천 조각도 부스스 떨어져 내릴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의 하는 양을 식당 안에서 그저 바라만 보았는데, 문밖에서 주인과 몇 마디 주고받더니 그는 그냥 발길을 돌려 돌아가려고 했다. 나는 그제야 황급히 밖으로 나가 그를 불렀다.
안녕하세요? 카스에서 당신을 본 적이 있어요.
그는 눈동자의 초점도 흐릿했고 말 한마디 하는 것도 힘에 버거운 듯 그저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지금 이곳에서 저녁을 먹으려고 하는데 당신은 어디로 가는 건가요?
그는 매우 더듬거리며 중국어로 말했다.
국수를 먹으려고 했는데 안 된다고 해서 그냥 가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함께 저녁을 먹자고 권했다.
그래요? 나는 밥을 먹고 싶어서 일부러 한족 식당을 찾아 이곳에 왔어요. 괜찮다면 나와 함께 이곳에서 밥 먹을래요? 마침 친구도 한명 있어요.
그는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흔쾌히 나를 따라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셋이서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물론 그는 나를 알리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맨 처음에는 중국어로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어눌한 중국어를 포기하고 수첩을 꺼내어 필담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중국어 문장은 놀라울 정도로 완벽했다.
나는 42살이고 일본악기연주자다. 일본에는 한국인 친구들이 많다. 나는 일본에서 한국과 중국인의 재판을 응원했다.
그의 글을 보며 나는 일본에 대한 일부 한국인과 중국인의 거부감을 그가 의식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부터 여행을 시작하셨어요?.
내가 중국어로 묻자 그는 필담으로 적어내려갔다.
자전거로 산동-산서-닝하-감숙-신장으로 왔다. 그리고 하밀과 투루판을 거쳐 이곳에 왔다. 이번 여행은 6개월 예정으로 떠났다. 오늘은 24키로 떨어진 묵옥에 다녀왔다. 앞으로 이곳에서 3-4일 묵은 후 버스로 우루무치로 갈 예정이다.
다소 긴 문장을 그는 머뭇거림 없이 적어 내려갔다.
그러면 카스에서 이곳까지 자전거로 왔단 말인가요?
그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내 앞의 그가 바로 어제 내가 호탄에 오는 사막 길에서 본 자전거 탄 사람이었던 것이다. 산동에서 이곳까지 줄곧 자전거로 온 사람에게 불과 500키로의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나는 그저 놀랍기만 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묵옥이라면 오늘 나도 다녀온 곳이었다. 나는 그저 지도를 보고 강줄기를 따라 들어간 것인데 그는 어떻게 그곳에 가게 되었을까? 하지만 더 묻지 않았다.
그는 피곤과 허기에 지쳐 거의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밥이 나오자 주위 사람들을 아랑곳하지도 않고 그야말로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밥 공기를 금방 비웠다. 그리고 내가 한 그릇 더 드실래요? 라고 묻자 그는 순한 어린애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가 끝난 후에도 우리는 맥주잔을 기울이며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신장 음악에 빠져 신장 지역 구석구석의 오지를 찾아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 지역의 생활과 문화를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이 그 지역 사람들의 음악을 깊이 이해하는 일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이 느끼고 있는 그 지역 음악의 아름다움과 신비함에 대해 함께 나누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몇 마디 말보다 그의 깊은 눈빛과 남루한 행색, 낡은 노트에 글을 적어 내려가는 그의 어깨 등에서 그가 마음을 쏟고 있는 음악에 대한 강한 열정이 느껴질 때는 그가 존경스럽기도 했다. 웨이우얼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은 참으로 뜨거웠다. 그는 이번 여행 중 가는 곳마다 그 지방의 시디를 산 것이 80개나 된다고 말했는데, 그때의 그는 마치 어린애처럼 흥분된 표정이 되었고 얼굴에서는 광채마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과 마주 앉아있는 것 같았다.
그는 중국어는 잘 하지 못했지만 알아듣기는 했다. 그래서 내가 중국어로 말하면 그는 필담으로 적는 식이었다. 그는 나의 중국어를 대견하게 여기는 듯 어디서 배웠느냐고 묻기도 했다, ‘당신이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음악을 깊이 알게 되었듯, 나 역시 길에서 배웠어요라고 말하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국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경험을 한 것 같았다.
‘2005년 대련에서 자전거로 심양을 거쳐 단동까지 간 후 배를 타고 인천에 간 다음 다시 자전거로 속초를 거쳐 부산까지 갔었는데 설악산이 매우 아름다웠다, 앞으로 북한의 금강산에 가고 싶다’고도 했다.
그와 한족 여자는 줄곧 필담으로 대화를 했다. 한족여자를 향하여 함께 묶고 있느냐 묻자 여자는 소주에서 산다고 적어주었다. 그러자 남자는 이후 소주에 간 후 상해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가고 싶다고 써내려가기도 했지만 때로는 중국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는 한족 여자에게 묻기도 했다.
소주는 광동어로 말하느냐?
아니다. 보통화다. 소주는 오래된 문화의 성이다. 소주 사람들의 음식은 맵고 달고 맛있다. 일본인도 맵고 달게 먹지 않는가?
나는 매운 음식을 잘 못 먹는다. 그런데 한국 요리는 매우 맵더라.
그는 알코올 기운과 식곤증으로 눈동자의 초점이 점점 흐려지는 듯했다. 아마도 몹시 피곤한 모양이었다. 어느 순간 우리가 헤어지자는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그는 고개를 꾸벅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도 그는 너무 지쳐서 헤어지는 인사도 잊은 듯 보였다. 하지만 일본인이 줄곧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앉아있던 한족 여자는 그가 사라지자 ‘밥과 술까지 먹고도 고맙다는 말도 없이 그냥 갔다’고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만난 것이 참으로 신기하게 여겨졌고, 그와 함께 보낸 저녁 시간을 오래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날 맥주가 3병, 밥 4공기, 요리 세 가지 등으로 이루어진 우리 세 사람의 저녁 식사 값은 32위엔 이었다. 32원, 우리나라 돈으로 불과 4천원이다. 그만한 액수로 부자처럼 푸짐한 만찬을 베풀 수 있다니, 역시 중국은 좋은 나라였다.
6월 5일
다음날 호탄을 출발하기 전에 고성을 돌아보기로 했다. 현지인 말로는 고성까지 150키로나 되고 3시간이나 걸리는 곳이라 하여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터미널로 나갔다. 우선 오후에 우루무치로 떠나는 버스 표를 미리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터미널에 도착하여 버스표를 손에 넣고 보니, 내가 말하던 시각의 표가 아니었다. 그 일로 실랑이를 벌이게 되었다.
내가 말한 것은 신장 시각 11시인데 이 표는 그게 아니다.
그 시각에 떠나는 것은 없다.
방금 전에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 버스로는 사막을 구경할 수 없으니 바꿔 달라,
그럼 20원을 더 내라.
그럴 수 없다. 네 잘못인데 왜 내가 수수료를 내어야하느냐,
매표원과 말씨름을 벌이고 있는데 한 남자가 다가와 중재를 나섰다.
이 차가 더 좋고 민풍에 가서 저녁을 먹어도 사막을 구경할 수 있다.
차가 나빠도 상관없다. 나는 사막을 보고 싶다.
네가 탈 차는 맨 앞좌석이라 사막을 더 잘 볼 수 있다.
사실 화도 나고 답답했지만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과 협상을 하거나 내 권리를 관철시키는 것은 무리였다. 나는 할 수 없이 낮에 떠나는 표를 들고 돌아섰다. 그나마 서두르면 고성을 돌아볼 수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그렇게 고성으로 향했지만 버스를 두 번씩이나 잘못 타고 헤매는 바람에 길에서 시간을 보내고 결국 그 마저 포기하고 돌아서야했다.
베낭을 찾으러 숙소에 돌아오니 물건을 사러 갔던 한족 여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에는 그녀가 구해온 가방과 스카프와 음반과 커다란 돌등이 쌓여있었다. 그녀가 소주로 갖고 가서 팔 물건이었다. 그녀는 내가 떠나기 전에 나와 함께 점심을 먹으려고 부랴 부랴 서둘러 왔다고 말했다. 그런 그녀가 고마웠다. 그녀가 잘 아는 식당이라며 찾아간 곳에서 우리는 자매처럼 수다스럽게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후 그녀는 우루무치 가는 버스 안에서 먹으라며 도시락까지 사서 내 손에 들려주었다. 그러나 그 도시락은 먹지 못했다. 우루무치로 가는 타클라마칸 횡단 버스 안에서 나는 심한 위통과 설사에 시달리느라 물도 먹지 못 한 채 옆 좌석에 있던 모자에게 주어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