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벩송과 똥께덱(Joseph de Tonquédec, 1868-1962)
** 벩송과 카톨릭 ***
* 똥께덱(Joseph de Tonquédec, 1868-1962)(à 93 ans), 프랑스 제수이트 신부, 신학자, 파리교수 공식 구마사(1924 à 1962), 벩송 철학(Philosophie bergsonienne, 1936), 자연의 철학(La philosophie de la nature, 1956) [- 프랑위키(fr.Wiki)에서 그의 소개는 한 문장 밖에 없다. 저술에서도 1936년 작품이외에는 벩송에 관한 것이 없다. (48SLH)]
이 흥미로운 신부는 벩송의 창조적 진화에 딴지를 걸었던 모양이다(1908). 바르텔미 르미-마돌의 견해에 따르면, 똥께덱 때문에 이 작품이 교황청 인덱스에 올라갔다기보다, 내가 보기에는 마리땅(Jacques Maritain, 1882-1973)의 벩송에 대한 비판의 책 벩송의 철학: 비판적 연구(La Philosophie bergsonienne: études critiques 1913) 때문에 1914년에 금서목록에 올랐을 것으로 보인다. (48SLG)
** 한 가지 더 이 신부가 벩송에게 보낸 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고, 벩송이 보낸 편지 두 통만 남아있다.
*** 마리땅(Jacques Maritain, 1882-1973)은 프랑스 철학자. 토마스주의자. 1904년 라이사와 결혼. 뻬기의 권고로 벩송 강의 듣다. 1906년 부인과 함께 블르와(Léon Bloy, 1846-1917)[도미니끄파 교인]를 대부로 하여 카톨릭으로 개종. 1911년부터 극우파인 프랑스 행동(l'Action française)을 지지하고 모라와 가까이 지낸다. 벩송 비판서인 벩송의 철학: 비판적 연구(La Philosophie bergsonienne: études critiques 1913), 바티칸주재 프랑스대사(1945-1948)를 지낸다. 프랑스 장교이자 작가인 프시샤리(Ernest Psichari 1883-1914)[도미니끄 수도자]와 가깝게 지낸다. 벩송에서 토마스 아퀴나스: 형이상학과 도덕론 시론(De Bergson à Thomas d'Aquin, Essais de Métaphysique et de Morale(New York 1944 Paris 1947) / 스피노자에도 이런 사례가 있다. 1675(마흔셋)년에 버그(Albert Burgh, s.d.)로부터 악의에 찬 편지를 받는다. 버그는 1673년에 로마로 갔다가 카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웃음(1900)을 제외하고 그의 저작은 교황청의 금서 목록에 들어간다. [이 목록은 1968년 인종편견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더 이상 목록을 만들지 않았다. 1968년까지 그의 저작들은 금서 목록에 죽 올라있었다.] / [쟈끄 마리땅이 쓴 벩송의 철학: 비판적 연구(La Philosophie bergsonienne: études critiques 1913)의 심한 비판으로 근거를 삼았을 것이다. / 이에 대해 뻬기가 강하게 반대하였다. 뻬기는 벩송과 벩송철학에 관한 노트(Note sur M. Bergson et la philosophie bergsonienne, 1914)를 썼다. (48RMJ)]
벩송은 고등학교시절과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친 교수들에게 영향을 거의 입지 않았다.
고등학교에서 방자맹 오베(Benjamin Aubé, 1826–1887)[카톨릭]
그리고 ENS의 올레-라프륀(Léon Ollé-Laprune, 1839-1898)[카톨릭 신자]
이들로부터 어떠한 철학적 영향을 받지 않았다. 브트루도 마찬가지이다.
직접배우지 않은 라슐리에와 라베송의 영향을 입었다.
[내가 보기에, 경험 형이상학의 개념을 이때부터 가지고 있었다. 그 중요성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것이다. 대학 시절에 이미 ENS에서는 칸트파들[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으로 되어 있어서 별 흥미를 갖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라슐리에와 라베송에게 더 많은 흥미를 가졌을 것이다. / 나도 동양철학의 노론파, 공일파와 숭미파로 되어 있던 서울대철학과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흥미있는 것은 박홍규를 따르는 윤구병이 있고, 동철에는 이규성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보다 가까이 접근하지 못했디만 하성대 선배가 있었다. (48WMH)]
# ***Me 766-767, 964-965, 1614, 1622
* Me 766-767.
- 1908년 5월 12일 벩송이 똥께덱에게 보낸 편지
// 번역할 것 ... 중요하다...
[벩송의 스피노자의 학설 이용과 존경은 여기에서도 등장한다. 카톨릭 신자와 다투지 않으려면 스피노자를 이야기 하면서 벗어나면 될 것이다. 신 즉 자연이고 자연은 세계를 만들었으며 게다가 여러 생명체들을 만들었고 그 중에 인간도 만들었다. 그 인간의 자연의 흐름을 깨달은 유일한 현존자이다. ... (48SLG)]
* Me 964-965,
1912년 2월 20일 벩송이 똥께덱에게 보낸 편지
이 모든 것으로부터 신의 관념은 분명하게 구별되어 나타난다. 그것은 창조적이고 자유롭고, 물질과 생명을 동시에 생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의 창조 노력은 종의 진화에 의해서 그리고 인간적 인격성의 구축에 의해서 생명의 측면에서 계속된다. 따라서 이 모든 것으로부터 일원론과 범심론일반에 대한 반박도 분명해진다. 그러나 이 결론을 훨씬 더 정확하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 이상을 말하기 위하여 아주 다른 종류의 문제들에, 즉 도덕적 문제들에 접근해야할 것이다. 나는 이 주제들을 대해 출판할 어떤 확신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 나는 만일 나의 다른 작업들의 결과물들만큼이나 증명할 수 있거나 또는 “제시할 수 있는” 결과물이 나에게 나타나기에 이른다면, 그것을 해볼 것이다. 이 행간에서 내가 말하고자 한 모든 것은 곁에 젖혀 둘 것이고, 심지어는 내가 생각하는 한에서 철학 밖에 둘 것이다. 내가 보기에 철학은 잘 규정된 방법에 따라 구성되는 어떤 것이며, 이 방법덕분에 어떤 다른 본성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실증과학의 객관성만큼이나 객관성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Me 964)
* Me 1614
- {1908년 5월 12일 벩송이 똥께덱에게 보낸 편지}에서 벩송이 표시한 창조적 진화의 쪽수를 전집의 쪽수로 표시하여 찾아 가도록 해 놓았다. 지
* Me 1622
-1622: p. 1322 1920년 4월 28일 편지.
이것은 르장드르가 쓴 「벩송씨의 새책, “정신적 에너지”에 관한 논평」(“정신적 에너지” 1920년 1월 1일 출간)이라는 논문으로부터 “” 쪽 주에 ㅁdfm를 qpfrthd이
- Me 1322에는 벩송이 1920년 4월 28일에 슈발리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 이 역사 주는 1919년 ES이 나오고 난 뒤에 반향들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 1322쪽 에는 똥께덱에 대한 것은 없다.
벩송이 슈발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성(intelligence)와 예지(intellect)를 구별하는데, 전자는 칸트식으로, 후자는 자신이 붙인다면 직관과 가깝다는 것이다. 전자는 물질을 사고하는 추론적 기능이고, 후자는 정신을 향하는 직관이라 한다.
[르장드르(Magdeleine Legendre, 1889-1973), 첫결혼 Marx 둘째 결혼 Paz. 프랑스 여성 기자, 작가, 공산주의 운동에서 인권운동가.] est une journaliste française, écrivain et militante dans des mouvements politiques et de défense des droits de l’Hom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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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 신부, 로메이에: Me 359, 1507, 1589, 1625,
로메이에(Blaise Romeyer, 1882-1954) 신부. 네오토미즘, 모리스 블롱델의 종교 철학(La Philosophie religieuse de Maurice Blondel, 1943) / La liberté humaine d'après Henri Bergson. In Revue néo-scolastique de philosophie, vol. 35, no 38, 1933, pp. 190-219 / Me 359, 1507, 1589, 1625, / [흥미로운 것은 마리땅(Jacques Maritain, 1882-1973)과 같은 나이다. 이 둘 벩송의 공격조로 해서, 벩송의 저작이 “교리성” 금서목록에 오르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48WMD)]
* Me 359,
- 1895 7월 30일 : Le bon sens et les etudes classiques 시상식 연설을 했는데
로메이에는 클레르몽 페랑에서 이 글을 1947년에 다시 실었다고 한다. [그 이외 그에 관한 내용은 없다.](48SLG)
* Me 1507,
- 1933년 3월 24일 벩송이 블레즈 로메이에에게 보낸 편지.
[로메이에(Blaise Romeyer, s.d.), Morale et religion chez Bergson, Archives de philosophie, IX, III, pp. 283-317, 1932. 논문에 대한 답신이다. 로메이에는 이것을 Blaise Romeyer, Autour du problème de la philosophie chretienne, Archives de philosophie, X, IV, 1934, p.2, note 2. 여기에 벩송의 편지 날자가 명시되어 있다.]
나는 당신이 내가 도달했던 변신론의 주제에 대해 행한 [비판적?] 유보사항들을 잘 이해한다. 나는 이 변신론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한 첫째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보기에, 철학은 자체의 자원들(ses seules ressources)만을 가지고, 다시 말하면 추론의 도움을 받은 경험들을 가지고, 신학이 행한 만큼 멀리, 또는 더 멀리도 살 수 없을 것 같다. 신학은 계시위에 근거되어 있고, 그리고 이 때에 신앙에 호소하기도 한다. 철학과 신학사이에서, 이런 이유 때문에 필연적으로 간격이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철학 속에다가 철학적 방법으로써 그 당시까지 철학으로부터 배제되었던 신비주의를 도입함으로써 간격을 줄였다고 생각한다. (Me 1507)
* Me 1589,
- 1939년 8월 7일 벩송이 로메이에 에게 보낸 편지 [1947년 Archives de philosophie, XVII, p. 46에 실린 것이다]
[벩송 80주년 생일과 연관있는 편지이다.
1939년도 10월 18일도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 나의 친구들은 .. 80주년... 나의 긴 생애에서 나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과분한 존경을 받았다.. .. 다른 한편 나는 완전히 은퇴했다. .. 탁월한 격률에 따르면 그의 삶과 그의 죽음 사이에 간격이 있다고 이해한다는 ... 당신은 당신 기도 속에 나를 잊지 않고 있다고 말하는데 대해 감동 먹었다... (Me 1589)
* Me 1625,
로메이에가 1932년 논문을 쓴데 대한 답으로 1933년에 편지를 보냈는데, 그는 1947년에 다시 썼다는 것을 고증하고 있다.
Blaise Romeyer, Morale et religion chez Bergson, Archives de philosophie, IX, III, pp. 283-317, Blaise Romeyer, Bergson et bergsonisme: Caractéristiques religieuses du spiritualisme de Bergson, Archives de philosophie, XVII, I, p. 31, 1947.]
카톨릭 참조 인물
### 블르와(Léon Bloy, 1846-1917) 벩송 인덱스에는 없음 ***
블르와(Léon Bloy, 1846-1917)[도미니끄파: 이 자료는 어디서 나왔을까? 마리땅에서 나왔을 것이다] [도미니끄파 교인?]
마리땅(Jacques Maritain, 1882-1973) 프랑스 철학자. 토마스주의자. 1904년 라이사와 결혼. 뻬기의 권고로 벩송 강의 듣다. 마리땅은 라이사와 1906년에 블르와를 대부로 하여 카톨릭으로 개종했다.
* 블르와(Léon Bloy, 1846-1917) 소설가이며, 수필가이며 유명한 논쟁가였다. Le Désespéré, 1887), Sueur de sang, 1893), 유태인들의 구원(Le Salut par les Juifs(1892), édition nouvelle revue et modifiée par l'auteur(Joseph Victorion et Cie, 1906, rééd. Édition Kontre Kulture 2013), Méditations d'un solitaire en 1916 (1917), Les Funérailles du naturalisme, 2001) (posthume)
그는 도로교량 공무원이며 프랑마송이었던 아버지(Jean-Baptiste Bloy, s.d.)와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어머니(Anne-Marie Carreau)사이에서 일곱 아들의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고등학교 올라갈 때 재수를 했는데, 그의 일기에 의하면 그때 비극을 쓰려고 했고, 그 당시에 카톨릭으로부터 멀어졌다. 1864년(열여덟) 아버지의 권고로 [아버지 계통의] 직장인 되었고, 그 당시에 화가가 되려고 예술학교(l'École des beaux-arts)에 등록했으며, 혁명적 사회주의와 반성직자들과 자주 어울렸다. 1868년(스물둘)에 소설가이며 기자인 오르빌리(Jules Amédée Barbey d’Aurevilly, 1808-1889)[카톨릭, 왕당파, 반혁명파]를 알았으며, 나중에(1873)에 다시 만나, 1874년(서른 둘)에 그의 비서가 되었다. 1877년(서른셋) 부모가 죽고 삶이 뒤바뀐다. 우연히 창녀인 룰레(Anne-Marie Roulé, s.d.)를 만나, 1878년에 개종하면서 정념에서 신비적 모험으로 바뀌었다. 이런 와중에 신부 무와드레(l'abbé Tardif de Moidrey, s.d.)를 만났다. 1900년(쉰넷) 드레퓌스 사건 중에는 중도적 입장에 있었다고 한다. 1904년(쉰여덟) 몽마르뜨르에서 그는 화가 루오(Georges Rouault)를 사귀고, 마리땅 부부(Jacques Maritain et Raïssa Maritain)를 개종시키고 대부가 되었고, 작곡가 오릭(Georges Auric)도 알게 되었다. 일차대전에 대하여 쟌다크와 독일(Jeanne d'Arc et l'Allemagne, 1915), 묵시록의 문턱에서(Au seuil de l'Apocalypse, 1916), Les Méditations d'un solitaire en 1916 et Dans les Ténèbres (posthume, 1918).를 썼다.
<1846년 두 어린이에게 나타난 성처녀 마리아를 기념하는 라살레뜨(Notre-Dame de La Salette)> <드뤼몽(Édouard Drumont, 1844-1917)이 쓴 팜플렛 유태계 프랑스(La France juive)(1886) 자비로 출판. 이것은 반유태주의 작품이다. 이 작품의 응답으로 블르와는 유태인들의 구원(Le Salut par les Juifs(1892)을 썼다. - [참조: 드레퓌스 사건(l'affaire Dreyfus 1894–1906) 1894년 9월].
* 삶에서는 럭비공 같은 블르와는 뻬기와는 직접적 연관이 없는 것 같고, 그래서 벩송과도 엮이지 않은 것 같다. 블르와는 좋게 말하자면 전통을 따르는 온순한 애국자인 것 같다. 마리땅을 개종시켰다는 것은 그래도 의문으로 남는다.
(48SLH)
# 다른 간접연관자.
사제 뿌제(Guillaume Pouget, 1847-1933) 라자리스트 신부(Les lazaristes sont les membres (frères ou prêtres) de la congrégation de la Mission) 라자리스트 파는 파리외방 선교회(제스위트)와 다른 방식으로, 튀니지, 오트만 제국, 중국 선교에 힘을 쓴다. 뿌제는 벩송을 따르는 쟈크 슈발리에와 오랜 우정을 나누었다. 그는 학계와 연계되어 있는데, 슈발리에(Jacques Chevalier), 기똥(Jean Guitton), 말레그(Joseph Malègue), 무니에(Emmanuel Mounier), 마르셀(Gabriel Marcel), ou encore 구이에(Henri Gouhier), 헤르츠(Robert Hertz) …
- 벩송의 잡문집에 뿌제가 등장하기 않는다.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던 것 같다. 슈발리에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벩송과 면담들(Entretiens avec Bergson, 1959,(p. 295 (27 mars 1939)에서
Henri Bergson confia à Jacques Chevalier ce qu'il pensait du Père Pouget : « C'était un homme extraordinaire. L'impression qu'il me fit demeure une impression unique. Quand on pense à un homme comme celui-là, à une vie comme celle-là, il est triste de penser qu'un tel homme n'a pas été soutenu et qu'il n'a pas été mis à la place qui devait être la sienne. Mais on sentait bien, rien qu'à le voir, qu'il était insensible à ce genre de tristesse. D'autres l'avaient pour lui : lui-même était, pour l'éprouver, transporté trop au-dessus de lui-même. » - Jacques Chevalier, Entretiens avec Bergson, Paris, Plon, 1959, p. 295 (27 mars 1939).
### 끌레리삭(Humbert Clérissac, 1864-1914), 본명 레오폴드(Baptiste Placide Léopold) 도미니끄파 성직자이며 ‘프랑스 행동(l'Action française)’에 가까운 클레리삭(Humbert Clérissac, 1864-1914)[도미니끄파]의 영향과 마리땅의 영향으로 카톨릭으로 개종한다. 끌레리삭은 1908년 이래로 마리땅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1913년부터 마리땅은 끌레리삭을 프시샤리를 만나게 했다. 프리샤리는 결국 도미니끄 신자회(tiers-ordre dominicain)에 들어간다.
1903년 도미니끄 수도원이 해산된 후, 런던에 수도원을 세우려 시도했으나 좌초했다. 해산 이유는 프랑스 좌파급진주의자이며 신앙 장관(Ministre des cultes)인 에밀 꽁브(Émile, Justin, Louis Combes, 1835-1921)의 반성직자법(les lois anticléricales) 때문이라 한다. 그는 법령으로(1901 et 1904 sur le droit des associations et la liberté d'enseignement des congrégations religieuses) 교회의 사립교육과 여러 수도원 제도를 정비하였다. 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승리했다. <2 500 établissements d'enseignement privés sont fermés, mais certaines congrégations (les soeurs des pauvres, les religieuses hospitalières, les cistersien, les trappistes, les religieuses contemplatives et les missionaires) restent autorisées.>
(48SLH)
### 프시샤리(Ernest Psichari 1883-1914) 잡문집에 없음
프랑스 장교이자 작가인 프시샤리(Ernest Psichari 1883-1914)[31살] [도미니끄 재가교인]
- 프시샤리(Ernest Psichari 1883-1914) 애국주의자, 생애 마지막에 카톨릭으로 개종했다.
아버지(Jean Psichari, Γιάννης Ψυχάρης 1854-1929)는 키오스 출신으로 그리스 문헌학 교수였고, 어머니(Noémie Psichari, 1862-1943)는 에르네스트 르낭의 딸이다. 바깔로레아를 마친 1900년(열일곱)에 쟈끄 마리땅을 만났고, 1903년 소르본에서 철학 학부를 마치고, 그리고 꼴레쥬드 프랑스 벩송의 강의를 들었다. 그런데 1901년 뻬기를 만났으며, 이 당시에(19살) 그는 자신보다 7살 위인 마리땅(Jacques Maritain, 1882-1973)의 누나(Jeanne Maritain)를 만나 사랑에 빠졌는데,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그가 약을 먹고 죽으려 했는데 그의 친구 르뀔(Maurice Reclus, 1883-1972)[역사가 정치가]이 구해주었고, 다시 총으로 자살하려 했을 때도 그 친구가 구해준다. 그는 1903년 11월 병력의무를 시작하게 되고, 식민지 군대에서 그는 반유대주의를 던지고, 국가주의 우파로 돌아서며, 바레스(Maurice Barrès)와 서신교환을 한다.
성직자이며 ‘프랑스 행동’에 가까운 클레리삭(Humbert Clérissac, 1864-1914)[도미니끄파]의 영향과 마리땅의 영향으로 카톨릭으로 개종한다. 끌레리삭은 1908년 이래로 마리땅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1913년부터 마리땅은 끌레리삭을 프시샤리를 만나게 했다. 프리샤리는 결국 도미니끄 신자회(tiers-ordre dominicain)에 들어간다.
(48SLH).
*** 로메이에(Blaise Romeyer, 1882-1954)
* 로메이에(Blaise Romeyer, 1882-1954) 신부. 네오토미즘, 모리스 블롱델의 종교 철학(La Philosophie religieuse de Maurice Blondel, 1943) / La liberté humaine d'après Henri Bergson. In Revue néo-scolastique de philosophie, vol. 35, no 38, 1933, pp. 190-219 / Me 359, 1507, 1589, 1625, / [흥미로운 것은 마리땅(Jacques Maritain, 1882-1973)과 같은 나이다. 이 둘 벩송의 공격조로 해서, 벩송의 저작이 “교리성” 금서목록에 오르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48W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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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리베(Régis Jolivet, 1891-1966) 프랑스 철학자. 카톨릭 사제, 1932년 리용카톨릭대학 철학부 교수. 크리스트교 실존주의에 관심, 1914년 사제 서품. 1929년 La notion de substance. Essai historique et critique sur le développement des doctrines, d'Aristote à nos jours로 문학 박사학위. 벩송주의에 관한 시론(Essai sur le bergsonisme, 1931), 키에르케골에서 사르뜨르까지 실존주의 학설들(Les doctrines existentialistes de Kierkegaard à J.-P. Sartre, 1948 (48T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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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이에뜨(Xavier Tilliette, 1921-) 프랑스 제수이트 사제, 철학자, 철학사가, 신학자. 발(Jean Wahl)과 쟝켈레비치(Vladimir Jankélévitch)의 제자이다. 셀링과 야스퍼스 전문가이다. 철학자들의 크리스트(Le Christ des philosophes(3권. 1974-1976) 제3권에 벩송에 관한 것이 들어 있다. (48TLD)
* 교황청의 교황칙령이 벩송의 “창조적 진화”를 단죄하는 직접적인 원인은 아닐 것이다.
제258대 교황 선출(8월 4일), 9일 취임. 비오10세(Pie X, en latin Pius X, en italien Pio X, Giuseppe Melchiorre Sarto 1835-1914)(79세) 재위 1903-1914.
1907 Pascendi Dominici Gregis, 8 septembre 1907, contre les erreurs du modernisme
그는 1907년 교황칙령(l'encyclique Pascendi)에서 소위 “근대주의”를 65개 명제로 단죄했다. 정식명칭 "Pascendi Dominici Gregis"인 이 칙령의 부제는 “모더니즘 오류에 관한 교황 성비오 10세의 회칙서한(Lettre encyclique du pape saint Pie X sur les erreurs du modernisme”이다. - [이 단죄의 칙령은 내재주의와 불가지론을 단죄했다. 이는 베르그송과 블롱델을 이어받는 라베르톤니에르(Le père Lucien Laberthonnière 1860-1932) 포함되었을 것이다. 베르그송의 후학인 르화(Edouard Le Roy 1870-1954)도 포함될 것이고, 초기 실용주의 입장인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도 포함될 것이다. 실용주의가 도구주의로 변전되는 경향에는 크리스트교의 영향이 클 것으로 추측된다. 베버의 자본주의적 경향을 띤 크리스트교는 이 칙령과 같은 궤를 가는 것인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44PMG)] / [막스 베버 (Max Weber, 1864-1920) 독일의 법률가, 정치가, 정치학자 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1904) 연도상 연관이 있을 것도 같은데 ..(48SLH)] ,
* 종교성에 대하여,
- 크리스트 종교의 성직자들 중에서 솔직한 이들은 인간의 삶이 슬프다는 것을 느끼는 것일 것이다. 이를 슬픔, 회의, 비관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한 조직(카톨릭)을 믿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그런데 그 행복은 믿는다고 하는 사고의 순간이지 삶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차라리 스토아학자들처럼 인간의 삶, 생명은 슬프고 기쁘고가 없는 어떤 기준(원칙, 법률)을 먼저 두게 되면 자신의 행위가 좋은 지 나쁜지, 또는 감동이 되는지 안되는지를 판별하게 된다. 생성을 즐거움과 환희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부속된 고통, 잘못, 오해도 받아들이면 사는 것이, 마치 질병을 안고 살듯이, 솔직하고 담백하게 사는 것이 될 것이다. 성직자들, 특히 수도자들은 그들 자신은 그렇게 산다고 하는데, 세속 또는 사바세계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게 신자들에게 위안을 주려한다. 내가 보기에 위안을 줄 필요없고, 그들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면서 신자들에게 보게 하는 것이다. 그들자신이 조직에 매여 있으면서 신자도 매여있고, 그들 자신들이 자유롭게 수도하며 소박하게 살면, 신자들도 그렇게 살 것이다. 아바 게가 아들에게 똑바로 걸으라고 설교하였는데, 아들이 아빠보고 한번 걸어보라고 하고는 웃으면서 놀러나갔다고 한다. (48TKG)
## *** 인베르1311마냉
마녱(Etienne Magnin, s.d.)
빠리 카톨릭대학 신부
[(Étienne MAGNIN, 21 mai 1881 à Mardore (Rhône), 29 juillet 1917) 아님] /
- 참조 1.***
<글모음집에 누락된 편지글들 중 먼저 주목할 만한 것은 1922년 발표된 <철학자는 어떻게 글을 써야하는가?>라는 글이다. 이 글은 신세계(Monde nouveau)지가 연재하고 있던 기획물로서 철학자의 언어사용에 대한 일련의 질문에 베르그손이 장문의 편지 형식으로 답한 글이다. 베르그손은 철학자들이 세부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많은 경우 전문 용어를 사용해왔지만 데까르뜨와 말브랑슈의 예에서 보듯이 프랑스의 철학적 전통이 일상 용어를 사용하여 철학을 해왔음을 강조한다. 또한 철학자들이 동일한 용어에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함으로서 일어나는 혼돈을 예로 들며 철학 용어의 통일 내지 정의 문제에 대하여 제기한 질문에는 “이성(raison)” 과 “∼주의(-isme)”와 같은 용어의 예를 들면서 모든 사상은 그 사상 나름의 배경이 있으므로 한 철학자가 쓰는 용어는 항상 그 철학의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파악할 수밖에 없음을 강조했다. 혼돈을 피한다는 목적으로 매번 새로운 전문 용어를 만들 수도 없으며 또한 그것이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결국 한 사상의 명료성은 전문 용어들의 창조와 사용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용어를 사용하는 철학자의 사유의 명료성에 달려있다. 베르그손은 프랑스 철학회가 20 여 년 전부터 준비해온 철학용어사전의 예를 들며 이 사전이 철학 용어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철학자의 작품을 읽고 그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라고 결론을 맺고 있다.>/
<또 다른 글은 1932년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의 출판 후 베르그손이 빠리 카톨릭대학의 교수를 지낸 에띠엔 마녱(Etienne Magnin) 신부와 가진 인터뷰이다. 이 글은 인터뷰이니 만큼 베르그손이 직접 쓴 텍스트가 아니다. 그러나 이 대화록이 카톨릭 생활(Vie catholique)지에 발표되기 전에 베르그손이 그 내용을 살펴본 만큼 사료로의 가치가 충분하다. 이 대화는 정적종교나 신비주의와 같은 두 원천과 직접 관련 있는 주제 뿐 아니라 자신의 철학의 형성 과정과 방법론에 대하여서도 설명한다.> (유지석 “베르그손 철학의 문헌학적 접근 ― 새 문헌의 발간과 그 의의 ―”, 2006)
- 참조2. ****
카이절링(Hermann von Keyserling (1880-1946) 독일 철학자.
<글모음집의 출판 이전에 발표되었으나 전집에 누락 된 글들 중 살펴 볼 문헌은 베르그손이 카이절링(Keyserling) 백작과 프레졸리니(Prezzolini)에 보낸 편지이다. 카이절링은 잘 알려진 철학자는 아니지만 쇼펜하우어, 니체, 베르그손 그리고 인도 사상 등의 영향을 받았고 이성과 과학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생의 개념과 직관을 강조하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카이절링이 1906년 자신의 책을 베르그손에게 보내면서 시작되었고 베르그손은 감사의 말과 더불어 카이절링의 사상에 호의적인 답장을 한다. 카이절링은 계속해서 자신의 저서나 논문을 베르그손에 보내고 베르그손은 카이절링의 관점에 공감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카이절링은 1907년 뮌헨의 “알게마이네 자이퉁(Allge- meine Zeitung)”지에 베르그손에 관해 매우 호의적인 글을 쓰기도 했다. 두 철학자는 1910년 빠리에서 처음 대면하여 다양한 철학적 문제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카이절링이 베르그손에게 철학사 연구를 위한 조언을 구할 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가까워진다. 베르그손도 자신의 편지에서 여러 번 카이절링의 사상에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 1911년 볼로뉴에서 열린 국제철학대회에 두 사람은 함께 참석하였고 카이절링은 베르그손과 독일의 생기론 철학자인 한스 드리쉬(Hans Driesch)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베르그손은 카이절링의 발표 논문이 도덕과 형이상학지(Revue de Métaphysique et de Morale)에 실릴 수 있도록 주선한다. 1913년 베르그손이 런던에서 심리연구회(Society for psychological research)의 회장으로 취임하고 이를 기념하여 <살아있는 것의 환영(Fantômes de vivants)>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을 때도 축하하기 위하여 직접 참석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당시의 많은 프랑스와 독일의 지식인들 사이에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두 사람의 관계는 전쟁 이데올로기의 선전이 난무하는 가운데 급속히 냉각되었고 두 사람의 접촉은 끊어지고 만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카이절링이 1932년 다시 베르그손에게 자신의 저서를 보내면서 두 사람간의 서신 교환이 다시 이루어지지만 예전의 관계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베르그손의 편지글은 두 철학자의 인간적 관계를 잘 드러내 주지만 그들 사이의 직접적인 사상적 영향을 알아내기엔 한계가 있다. 일반적으로 카이절링의 철학은 베르그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되고 베르그손, 딜타이, 셸러, 카이절링을 함께 묶어 생철학의 범주로 분류하기도 한다. 반면에 베르그손에 대한 카이절링의 직접적 영향은 미미한 것처럼 보인다. 만일 있다고 한다면 인도 사상에 심취했던 카이절링의 글이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을 준비하던 베르그손에게 약간의 도움이 되었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 (유지석 “베르그손 철학의 문헌학적 접근 ― 새 문헌의 발간과 그 의의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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