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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가정 체험수기] 우수상-경상도 아지매 아키 | ||||||||||
우리의 공통어는 중국어였지만 1년만 어학연수를 한 우리의 중국어 실력은 뻔했다. 다행히 양쪽 집안에서 반대 없이 일이 잘 진행이 되었는데 상견례 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우리 부모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내가 중국어로 번역하면 남편이 그 중국어를 한국어로 고쳐서 부모님께 전달하는 식으로 왠지 레크리에이션에서 흔히 본 '전달게임' 같았다. 아마 100% 아니 70%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다. 양가 부모님의 직접적인 의논이 불가능했던 것이 우리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자세한 얘기도 없이 한국·일본의 복잡한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아주 편한 결혼식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해서 대구에 시집온 나는 시할머님, 시부모님, 시동생과의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한국에 시집오기 전 몇 달은 학원에서 한국어를 배웠지만 나를 힘들게 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이 바로 경상도 사투리였다. 어느 날 할머니께서 “무리 갖고 오라”고 하셨는데 무리가 뭔지 모르는 나는 부엌에서 헤매다가 물을 갖다 드렸다. 그런데 무리는 사투리로 오이였던 것이다. 간장은 '지룽' '소이장', 부엌은 '정지', '괴안타', '뭐라 카노?', '천지 삐까리' 등등 학원에서 배워보지 못한 말들을 많이 배웠다. 이런 일도 있었다. 제사 때 큰어머님이랑 날씨 얘기를 하며 “어제는 엄전나게 더웠어요”라고 했더니 큰어머님께서 막 웃으셨다. 그래서 “왜 그렇게 웃으세요?”라고 물었더니 “네가 아까 ‘존나게 더웠다’고 해서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웠나 싶어 웃었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 당시 나는 'ㅈ'과 'ㅊ' 'ㅉ' 발음을 잘 구별 못했다. 그리고 '존나게'라는 말 자체도 몰랐고 그것이 상스러운 말이라는 것도 당연히 몰랐다. 그 이후 발음에 신경 써서 말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친구도 없었던 나는 바늘 가는 데 실 가듯이 시어머님 가시는 곳을 따라다녔다. 서문시장에 가면 쭈그려 앉아 수제비를 먹고 칠성시장에 가면 보리밥, 대구시내 시장을 누벼 다니면서 떡볶이, 납작만두, 호떡 등의 길거리 음식 맛도 다 보았다. 심지어는 어머님 계모임에까지도 따라갔다. 늘 어머님이랑 다녀서 그런지 우리의 얼굴은 점점 닮아가서 우리를 보는 사람들이 고부간이 아닌 모녀지간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렇게 해서 나의 사투리는 날마다 늘어가고 한국생활에 잘 적응해 가고 있었다. 그 사이에 우리 부부에겐 딸 아들이 생겼고, 한국에서 말하는 200점짜리 엄마로서 행복한 나날을 꿈꾸던 나에게 큰 시련이 내려졌다. 둘째 아이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 행복했던 생활이 아주 우울하게 느껴졌다. 산후우울증으로 시작된 우울증이 점점 심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 자신은 한국생활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몸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향수병을 앓았던 것일까? 아니면 시댁식구들은 아주 잘 해주셨지만 늘 크고 작은 긴장 속에 살고 있다가 분가하면서 그 긴장이 풀렸던 것일까? 그리고 보수적인 대구에서는 아직 아들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은 가운데 다행히 둘째는 아들을 낳아서 안심했던 것도 원인의 하나였던 것일까!? 하여튼 이 우울증 때문에 항상 나의 머릿속을 지배했던 것은 '죽음'뿐이었고 그런 생각뿐이었던 나는 가족을 돌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 생활이 몇 달 지난 어느 날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해 나는 목숨까지 끊으려고 했다. 그제야 남편은 문제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다.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인 남편은 말수가 적고 표현을 잘 안 하는 편이었다. 특별한 취미도 없었던 그는 퇴근하고 저녁을 먹으면 바로 자기 방에 들어가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하루 중 우리 부부간의 대화시간은 10분도 안 되었을 것이다. 그게 너무 섭섭했던 나는 남편에게 “제발 내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만 이라도 옆에 앉아서 얘기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렇지만 내 말에 귀 기울여 주지 않고 남편은 밥을 먹고 나면 바로 자리를 떠났다. 남편이 내가 우울증에 걸린 것이 자기 탓도 있다고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던 것인지 그때부터는 늘 내 곁을 지켜주며 끊임없이 격려해 주었다. 남편이 회사에 갈 때는 시어머님께서, 그리고 가끔 친정 부모님께서도 한국까지 오셔서 번갈아 가면서 나와 아이들을 돌봐 주셨다. 병이 완치되는 데 거의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온 식구가 너무 힘들었지만 얻은 것도 있었다. 내가 힘들 때 나 몰라라 하지 않고 진심으로 나를 생각해서 도와주는 가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힘이 들어도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 그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도…. 그 시련을 겪었던 나에게는 예상치 못한 일들도 기다리고 있었다. 작년에 '대구·경북 외국인 한국어 말하기 대회'가 실시되었는데 거기에 나가서 내가 해왔던 한국생활에 대해 스피치를 했더니 놀랍게도 우수상을 탔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어느 방송국의 의뢰를 받아 휴먼 다큐멘터리 프로에서 TV 출연까지 하게 되었다. 우리 시부모님께서는 38년 전에 결혼하셨지만 그때는 힘들었던 시절이라 제대로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셨다. 그것을 늘 안타깝게 생각했었고, 내가 아팠을 때 친딸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나에게 잘 해주셨던 시부모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우리는 그 촬영 중에 웨딩사진을 찍는 일을 계획해서 올해 환갑을 맞이하시는 시부모님께 그것을 선물로 드렸다. 그리고 2년 전에 결혼 10주년을 맞이했던 우리도 꽃단장해서 가족사진을 찍었다. 국제결혼…. 이주민 100만 명 시대가 된 대한민국에서는 특별한 일은 아니다. 이제 어느 지방에 가도, TV를 봐도 흔히 외국사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직 한국에서는 외국사람에 대한 편견이 뿌리 깊게 남아 있다. 특히 한일 간의 안타까운 역사 때문에 반일 감정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 큰아이가 고학년이 되어서 사회 시간에 역사에 대해 배우게 되면서 그런 갈등이 종종 있었다. “일본 새끼야! 네 엄마는 일본 사람이니까 일본에 가라~”라는 말을 듣고 와서 우리 딸은 집에서 엉엉 울었다. 평상시에는 아무 문제 없이 학교생활을 잘하고 있지만 독도문제 등 한일 간의 갈등이 끊이지 않아 그럴 때면 안 좋은 말들을 듣게 된다. 일본이 한국에 대해 했던 일들은 용서받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나쁜 일을 했기 때문에 일본 사람은 나쁘다!” 같은 교육은 앞으로 글로벌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는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 같다! 며칠 전에 뉴스에서 일본 의사 봉사단이 방한해서 옛날에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피폭했던 사람과 그 2세들을 치료하는 것을 보았다. 모든 일본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모른 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를 모두 알고 있는 입장으로서 일본에 가면 한국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친구와 이웃들에게 한국을 바로 알리고, 한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일본어를 가르치는 봉사를 하면서 일본문화와 국민성에 대해 얘기해주고 한국 사람이 오해하고,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을 바로 알리는, 양국 간의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비록 나의 힘은 작지만 이런 작은 노력의 씨앗이 언젠가는 큰 꽃을 피우고 한국과 일본이 '가깝고 먼 나라'가 아닌 '가깝고 가까운 이웃 나라'로서 서로 이해하고 힘을 모아 앞으로 겪는 문제들을 같이 해결해 나갔으면 한다. 그리고 두 나라 간의 교류는 물론 미래를 짊어진 아이들이 손잡고 웃을 수 있는 그런 날들이 오기를 바란다. 아이가 유치원, 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동네 아이 엄마들에게 먼저 인사하면서 친해졌고, 요즘에는 동네 아줌마들과 오봉산에 올라 운동도 하면서 수다도 떨고 아직 몰랐던 한국 문화와 관습에 대해 배우고, 아이들 교육에 대한 정보도 얻고 있다. 울긋불긋한 단풍 길을 걸으며 문득 씩씩한 대한민국 경상도 아지매가 되어 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외쳐본다. 경상도 아지매 아키 파이팅!! 이나오카 아키(일본·대구시 북구 침산3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