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성촌은 충북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 경남 창녕군 대합면 주매리, 경남 창녕군 이방면 안리, 평남 대동군 율리면 남당리, 평남 평원군 검산면 검서리 등이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장연노씨는 2000년에는 총 2,672가구 8,394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현재 인구분포는 서울 1,946명, 부산 920명, 대구 739명, 인천 342명, 광주 15명, 대전 157명, 울산 158명, 경기 1,741명, 강원 182명, 충북 1,031명, 충남 158명, 전북 26명, 전남 31명, 경북 298명, 경남 635명, 제주 15명이다.
서울, 경기, 충북 지역에 많이 살고 있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문과 7명]
1. 盧尙欽(노상흠) (1607 丁未生) : 文科 孝宗8年(1657) 式年試 丙科
2. 盧尙賢(노상현) (1610 庚戌生) : 文科 仁祖11年(1633) 式年試 丙科
3. 盧壯(노장) (1842 壬寅生) : 文科 高宗22年(1885) 別試 丙科
4. 盧仁振(노인진) (1579 己卯生) : 文科 仁祖2年(1624) 式年試 丙科
5. 盧后卨(노후설) (1600 庚子生) : 文科 仁祖8年(1630) 式年試 丙科
6. 盧尙義(노상의) (1610 庚戌生) : 文科 仁祖8年(1630) 式年試 乙科
7. 盧大敏(노대민) (1565 乙丑生) : 文科 光海君4年(1612) 式年試 丙科
[무과 1명]
1. 盧元益(노원익) (1565 乙丑生) : 武科 孝宗2年(1651) 別試 丙科
[사마시(진사,생원) 19명]
1. 盧尙欽(노상흠) (1607 丁未生) : 司馬試 孝宗2年(1651) 式年試 二等
2. 盧警來(노경래) (1639 己卯生) : 司馬試 顯宗14年(1673) 式年試 二等
장연(長淵)은 황해도에 있는 지명이다. 고구려 시대부터 장연 또는 장담으로 불리웠다.
장연노씨는 광산노씨와 근원이 같다. 시조 노 구(盧坵)는 고려조 한림학사로 장연백(長淵伯)에 봉해졌다. 노 구는 중국 당나라 선종 때 한림학사를 지낸 노 수(盧穗)의 넷째 아들이다.
노 수는 중국 범양(范陽) 땅의 화족(華族)이었으나 조정의 시기를 사는 바람에 화를 피해 아들 8형제와 함께 신라 말기에 우리나라에 와 처음 평안북도 정주 땅에 정착했다.
그 뒤 8형제가 모두 문과에 올라 진사가 되었고, 각기 분봉(分封)되었다. 이 때 노 구는 장연백(長淵伯)이 되었다. 그러나 장연을 본관으로 삼기는 그의 아들 노안필(盧安弼)이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어 거란족을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연강(淵康,장연의 옛이름)군(君)에 봉해짐으로써 시작된다
노구의 아들 노안필(盧安弼)도 문하시중으로 장강(장연)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장연으로 했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7세손 노단(盧旦)이 있다. 그는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를 거쳐 예부상서와 좌·우복야를 지내고 참지정사에 이르렀다. 최충과 함께 사숙(私熟)을 열어 후진교육에 힘써 많은 인재를 배출했는데 이를 12공도(公徒)의 하나인 광헌공도(匡憲公徒)라 하였다.
고려조에는 모두 12개의 사학(私學)이 있었으며, 사숙(私塾) 또는 공도(公徒)라고 했다. 공도의 시초는 1055년(문종 9) 문하시중(오늘날의 수상)을 지낸 최충이 설립한 구재학당(九齋學堂.후에 문헌공도)에서 비롯됐다.
이는 당시 국학(國學.국자감)이 유명무실한데서 비롯됐다. 그래서 학업 지망생이나 과거 응시자가 권위 있는 유학자가 세운 사학으로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개경에 세운 사숙이 12개에 이르러 그 권위는 관학(官學)인 국자감을 능가하였다. 그 뒤 점차 과거 준비를 하는 예비학교와 같이 되었다. 12개의 사숙 가운데 하나가 바로 노단이 세운 광헌공도이다. 노단은 학문이 깊고 덕망이 높은 관리로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말년(1084년경)에 경상북도 청도로 내려와 운문동에 대비암을 짓고 그곳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수도에 전념하였다.
나라에서는 노단의 업적과 공헌을 인정하고 운문동 안팍 땅 40리의 넓은 땅을 하사했다.
지금도 이곳에서는 노정승보(盧政丞洑), 노정승들(盧政丞野), 노정승우물(盧政丞井)이라 부르고 있다. 주민들은 1년에 한차례씩 노정승에게 제사를 올리고 있다. 노단의 후손 가운데는 인물이 많이 나왔다. 고려 공민왕 때 정승을 거쳐 대광보국숭록대부에 오른 노명신(盧命臣)도 노단의 후손이다.
노명신은 아들 3형제를 두었다. 이들이 모두 현달하여 장연노씨의 3대 산맥을 이루었다. 맏아들 노국주(盧國柱)는 충목왕조에서 이부판사를 지내고 창녕 월미촌으로 이거했다. 둘째 노태주(盧台柱)는 호군(護軍)을 역임했다.
셋째 아들 노성주(盧誠柱)는 문하평장사에 올라 크게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노찬(盧贊)은 문하시중과 판전리사사를 역임하여 가문을 대표했다. 노단 이후 300여년이 지난 뒤 노국주 대에 이르러 산천경개가 좋은 경남 창령군 고암면 상월미로 이사를 했다. 노국주의 아들 노변소(盧抃素)는 고암의 소곡에 도거정자(道居亭子)를 짓고 은거하면서 부모봉양과 후학지도에 힘썼다. 그 정자 터에 바로 소곡서당(蘇谷書堂)이 서있다.
노국주의 아우 노태주는 벼슬에서 물러난 후 평양의 외성밖에 낙향하였고, 둘째 아우 노성주는 충북 괴산으로 각각 낙향하여 600여년이 지난 오늘에 까지 세거(世居)하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 노씨(盧氏)의 도시조는 노수(盧穗)이다. 그는 중국 범양 출신으로 당나라 한림학사를 지냈다. 877년(신라 헌강왕 3)에 난을 피하여 아들 아홉 형제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로 이주하였다.
처음에 평안도 정주 능리촌에 정착했다가 용강쌍제촌으로 옮겨 뿌리를 내렸다. 이것이 우리나라 노씨(盧氏)의 시작이다.
그 후 아들 아홉 형제가 고려조에서 벼슬을 지내며 나라에 공을 세워 각각 봉군이 되었다. 해는 광주백, 오는 교하백 지는 풍천백, 구는 장연백, 만은 안동백, 곤은 안강백, 증은 연일백, 판은 평양백, 원은 곡산백으로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은 봉군받은 고을 이름을 각각 관향으로 삼았고, 교하백 오의 후손에서 신창, 광주백 해의 후손에서 해주, 경주는 안강백 곤의 후손에서, 만경은 평양백 판의 후손에서 분파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밖에 용성. 영광. 동성. 선산. 함평. 청도 등을 포함하여 59본까지 문헌에 전해지나 모두가 동조동근의 분파라는 것이 통설이다. 이렇게 뿌리를 내린 노씨는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 꾸준히 번성을 누려오면서 비교적 많은 인물이 배출되어 명문의 대열에 올랐다.
근대에 와서도 각계에 인물을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전남 광주시에서 10여리 떨어진 오치동 부근의 삼각산 기슭에는 도시조 수와 아홉 형제들의 비석을 정렬한 삼릉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