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휘는 종수(호는 몽오 혹은 진솔, 시호는 문충)이고 본관은 청풍이다. 공의 묘소 좌현에 있는 증 정부인 안동권씨의 6대손이시다.
본래의 묘소는 하남시 감북동 산 156-1에 있었으나, 2015년3월 본 장소로 청풍김씨판서공휘인백파 종회에서천장을 하였다
공의 초상화에는 정조가 쓴 어찬글이 있는데
“조정에 있을 때는 홀로 대의를 맡았고, 초야에 있을 때에는 치진(緇塵, 세속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았네. 이는 이른바 행적이 우뚝하고 마음이 허허(비운듯한)로워 탕탕(치우침이 없는)한 사람이 아닌가 ?”
(立朝獨任大儀在野 不染緇塵是所謂迹 突兀心空簜底人耶)
(입조독임대의재야 불염치진시소위적 돌올심공탕저인아)
정조어찰첩(1797년 1월 26일)에 "일전에 몽상(夢相)을 만났더니, 그의 지론이 서둘지 아니함이 내 맘과 똑 같았다. 경도 그의 이야기를 들었는가? 대사헌의 무리가 백 번 상소한들 몽상의 한 마디만 못할 뿐이다." 라고 하였다.
2009년 2월 심환지가 쓴 정조어찰첩의 발견 및 해석은, 정조시대 정치적 양상을 정조와 정통보수와의 극한적 대립구도로만, 이해하려는 기존의 식민사관에서 탈피하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정조어찰첩으로 우리는 당시 정치적 상황이나 문화적 상황에 대한 다양한 재해석이 가능하게 되었고, 이로써 17, 18세기 조선시대 전반에 대한 이해까지 전면적인 수정을 요구받게 되었다.
공은 어린 시절 정조에게 임금은 통치자이기도 하지만, 스승이라는 군사론(君師論)을 제공한 스승이었으며, 왕위계승의 대의명분을 제공한 동지이자 반려자였다. 정조는 공을 통해 정통보수와 사림에 이르기까지, 통치자로서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순차적으로 실현해 나갈 수 있었다. 궁극적으로 왕권의 강화와 안정을 공과 함께 이루어 나갈 수 있었다.
공은 청렴과 명예를 이상적 가치로 삼고 군신간(君臣間) 바른 역할정립과 사림정치(士林政治) 구현을 통해 왕도정치를 완성하고자 했던 청명류(淸名流)의 일원으로서 그 정신을 평생 간직하며 살았다.
공은 정조 왕위계승에 대한 정당성 확보와 정통성 제공을 위한 역할을 담당하는 한편, 그 모든 과정을 기록한 명의록(明義錄) 초안을 작성함으로써, 정조 재위 전 기간 동안 실질적 의리(義理)의 주인(主人)으로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에 정조는 왕위계승과 왕권초기 위급하고 긴박했던 시절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지켜줬던 동덕회(同德會 김종수, 서명선, 정민시, 홍국영) 멤버들을 매년 불러 그 어려웠던 시절을 함께 회상하였다.
특별히 공에 대한 정조의 신뢰를 가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은, 정조 자신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4대장(훈련원, 어영청, 내금위, 총융청)과 좌우포도대장을 모두 파면시키고, 자신의 뜻을 가장 잘 헤아리는 공에게, 4대장과 좌우포도대장을 겸직하게 하여 1명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방과 수도방위를 모두 담당하는 사상초유의 인사를 단행하기도 하였다.
학자이며 관료이신 공은 조선시대 최고의 관청인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이면서, 국학인 유학 교육기관인 성균관 대사성과 성균관사를 겸임함으로써 명실 공히 3관의 수장, 문형(文衡)으로 관.학계를 공식적으로 대표하였는데, 공은 세번의 문형을 역임하면서 정조의 꿈을 보필하여 공에게 정조는 봉조하에 봉하였다.
한번은 화산에 행차하시는 정조께서 사근행궁에 도착하여서는 좌상을 보시고 "저 앞에 보이는 산이 무엇이오"하고 물으니 좌상께서 말씀하시길 "저희 선영이 있는 산으로 오봉산이라고 합니다. 저 곳에 선영을 모신 후에 재상이 연거푸 나와서 명당이라고 이야기들 합니다" 하니 정조께서 "그럼 저 봉우리 중에 좌상의 봉우리가 하나 있는 것이요?" 하시며 웃으셨다고 합니다.
17, 18세기는 14~5세기 중세 르네상스 이후, 다시 한 번 인류의 지성이 크게 발전했던 시기이다. 유럽 대륙에서는 프랑스 대혁명이 그 신호탄이 되었고, 신대륙 아메리카는 독립선언과 함께, 21세기 절대 강국으로서의 자리매김을 이미 시작하고 있었다. 아시아 또한 서구 식민제국주의 침탈이 경제발전의 논리로 적용되지 않았다면, 자생적 기반을 확보할 만한 역사와 문화를 꽃 피울 수 있는 시기였다.
특별히, 조선 18세기 영·정조 시대는 정치. 철학. 경제. 문화 등 모든 사회사상적 측면에서 가장 활발하게 발전을 이룩했던 시기이다. 당쟁으로 폄하되었던 정치시스템은 공론(公論)이 가장 활성화 된 시기로, 서구철학의 발전의 근본을 이루는 이성과 경험을 리(理)와 기(氣)로 ,철학과 사상적 측면에서는 중국보다 오히려 더 심도 깊게 다루어지고 있었다. 한양을 중심으로 한 북학의 발전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 부분인데 정조와 몽오공, 번암 채제공의 죽음이 동시에 겹친 불운만 아니었더라면, 정치. 경제. 문화적 측면에서 선진강국으로의 진입을 예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공은 신임사화(1720년)로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가 유배를 당하고, 본인 또한 청명류 사건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 유배를 당하면서까지, 청류로서 의리와 고고한 학자로서의 모습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인물이라, 정조는 그를 평생의 스승이자 정치적 동료로서, 의리의 주인임을 강조하였고 사대부들의 모범으로 삼고자 했다. (동덕회 멤버, 명의록의 실질적 주인, 동원13학사 등)
정조는 공을 정치적 특별한 동료로서 한편으로는, 철학과 사상을 함께 공유하는 벗으로 삼아 모든 일을 함께 추진하였다. 등극의 정통성과 대의명분을 몽오공을 통해 확립케 하였으며, 자신이 추진해 나가는 일련의 굵직굵직한 일들 뒤에는 항상 몽오공과 함께 하였다.
공은 평생을 청빈하게 지내서 비가 새는 초가집에 살았다 한다. 정조는 너무나도 청빈한 그를 항상 가슴 아프게 생각해 그에게, 늘 어머니에게 쓸 약과 먹을 것을 하사하였다. 또한 그는 지방으로 파견되는 관리들에게 반드시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거친밥을 먹여 보냈는데 이는, 백성의 배고픔을 잊지 않도록 하게 하는, 그의 애민정신(愛民精神)의 발로였다.
공은 평소 청렴하시어서 가산이 초가집 한칸이라 손자 휘 동선(東善)이 근무하던, 포천관아에서 눈을 감으셨는데, 정조는 “몽오(夢梧)의 기슭, 정림(靜林)의 길”이라 하여 직접 제문을 내렸다고 한다.
공은 자신의 비문에 적힐 내용도 그저 몽오산인(夢梧山人)이면 족하다고 하여, 시호도 없는 간소한 묘소를 종손에게 지시하였다. 건립연대 1800년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공이 스스로 지으시고, 석봉 한호(石峯 韓濠)의 글자로 집자하였으며, 후면에 손자 휘 동선(東善)의 추록이 있는데, 고려시대 명필인 유공권(柳公權)의 글자를 집자하였다.
공은 산수를 좋아하고 권력을 멀리하셨는데, 정조는 이런 공을 더욱 애틋하게 챙기시어 사후에는 공과 함께 종묘에 배향되셨다. 또한 양주사당과 울진 평해사당에 모셨으며, 남해 죽봉서원과 진도의 봉암서원에 배향되어있다.
실질적 의리의 주인, 명의록 작성
문형, 규장각을 통한 인재양성 (규장각 제학, 규장각학사지서)
4대장과 좌우포도대장 겸임
수원화성의 건설 목적과 대의를 수행
(화성기적비 및 화성성역의궤 편찬, 유네스코)
단호그룹 (이인상 이윤영), 동원아회 (동원13학사)
현손 인구 씀
====================================================================================================
정조가 내린 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