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불신이 팽배하고 국가 지도력의 빈곤을 개탄하는 소리가 높다. 진정으로 국익을 위해 헌신하는 지도자상이 그립기만 한 요즘.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회장 김정렴)는 지난 9월 1일 임방현 전 청와대 특보를 초청,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제27회 조찬강연회를 베풀었다.
임방현 전 특보는 ‘왜 박정희 대통령을 잊지 못하는가?’ 제하의 강연을 통해 70년대 박 대통령을 보좌하면서 겪은 실화들과 가까이서 지켜본 대통령의 인간적인 모습을 공개하고, 아울러 박 대통령의 역사적 위상에 대한 자신의 소견을 피력하였다.
이번 강연회는 오늘의 대한민국이 어떻게 성장해 왔고, 역사를 만들어가는 큰 지도자의 모습은 어떠하며, 또 오늘의 우리가 어떤 정신을 계승해 미래로 가야 하는지를 가늠해 보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에 앞서 김정렴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재직 시절 청와대에 대통령 특별보좌관 제도를 두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1969년 미국이 닉슨독트린을 발표하고 주한미군 철수를 일방적으로 통보하자 국가적 충격이 컸는데, 그로 하여 김정렴 실장은 특별보좌관 제도 신설을 대통령에게 건의하게 됐다고 말했다.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선 국가경영을 강화해야 하고, 그러자면 대통령을 보좌하는 안보와 경제 등 각 부문의 ‘아이디어 뱅크’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
김정렴 실장은 대통령의 재가로 각 부문의 인사들을 추천했는데, 당시 한국일보에 재직중이던 임방현 논설위원의 경우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지명해 기용됐다고 밝히면서, 사회담당 특보와 청와대 대변인으로 10년 가까이 박 대통령을 보좌한 임방현씨를 소개했다.
다음은 임방현 전 특보의 강연 녹취록 전문이다. 이 강연 동영상은 박정희대통령인터넷기념관
왜 지금도 박정희인가
▲임방현 전 특보는 6,70년대 자기가 겪은 실화를 설득력 있는 화술로 풀어내면서, 해박한 지식과 논리적인 관점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역사적 의미를 정리해, 듣는 이들의 강한 공명(共鳴)을 자아냈다. ⓒ 좋아하는 사람들
▲강연회가 열린 세종문화회관 세종홀 전경. ⓒ 좋아하는 사람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른 시간에 나와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방금 김정렴 회장님이 말씀하시는 것(청와대 특별보좌관제 신설과 임방현 특보의 발탁 배경에 관한 이야기 : 편집자 주) 저도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과분하게 소개해 주신 것에 대해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아침 모임에 나와서 얘기 좀 해달라는 말씀을 듣고 처음에 걱정이 앞서더군요. 저도 나이가 좀 들어서 이런 모임에 별로 참석하는 일이 없고 강의를 해본 일도 그렇게 자주 있는 편이 아닙니다. 어떤 걱정인가 하면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고는 얘기를 엉뚱하게 하더라, 이렇게 되면 어떡하나 걱정이 앞섰습니다.
그 걱정과 동시에 한국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놨던 격동의 연대, 그 시절에 젊은 한 신문기자가 어떻게 박정희 대통령이란 분을 주목하게 됐고, 또 관심을 쏟다 보니까 매료를 당하게 됐고, 또 보좌하는 일을 맡게 됐으며,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80고개를 넘은 지금 이 늙은이도 때때로 생각하는 게 박 대통령으로 이렇게 지내고 있는가 하는 곡절을 가감없이 털어놓고 말씀 드리는 것이 어떨까, 이렇게 생각이 미치게 됐어요.
활자로 역사를 기술하는 것을 저는 역사의 뼈대라고 생각합니다. 골격입니다. 그런데 체험자들이 때에 따라서 자기가 겪었던 일, 자기가 모셨던 분의 경험담을 구술(口述) 토로하고 또는 이것을 기록하는 것이 무엇이냐. 제가 보기에 역사에 살을 입히는 작업이 아닌가. 역사의 육화(肉化) 작업이다. 저는 그렇게 불러 봅니다.
골격만 가지고는 체온이 느껴지지 않아요. 그래서 살을 입히고 체온이 통하게 하고 이런 것에 조그만한 일조가 된다면 제가 무릅쓰고 나가서 솔직히 말씀을 드려야 되겠다, 이렇게 마음먹고 나왔습니다. 아무쪼록 편하게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5.16 전의 혼란과 빈곤
제가 장기영 사장이 아주 정력적으로 리드했던 한국일보에서 논설을 쓰기 시작한 것이 1960년이었습니다. 4.19 직후였어요. 1년 지나자 5.16이 일어났습니다. 그 당시의 혼란상이야 얘기할 필요도 없습니다만 4.19의 후과(後果)로 분에 넘치는 의석을 갖게 된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은 배가 너무 불러 가지고 견제와 균형을 갖추려면 이 많은 의석을 갈라야 되겠다, 이래서 신파와 구파로 갈라지게 됐어요. 그로 하여 정국이 중심을 잃게 되자 사회 각 방면에서 참으로 데모의 물결, 고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통계 숫자를 들여다보면 하루에 전국 여기저기서 일어난 것이 수백건은 보통입니다. 1천건이 넘는 날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 대학을 나와서 취직할 곳이 없는 젊은이들의 대량실업, 보릿고개의 대중빈곤, 이런 혼란 속에서 일부 대학생들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이렇게 날뛰는 사례가 있었습니다. 이미 60년 이런 현상을 관찰하면서 미국에서 콜론보고서(Colon Report)라는 것이 나왔습니다. 그때 아마 당시 ‘사상계’라는 잡지에서 소개한 것으로 압니다. 요점은 이렇게 혼란과 빈곤의 악순환이 계속되다가는 한국에서도 여타 신흥국가와 같이 군사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이런 전망을 내놨어요.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긴 말씀은 생략하고요.
‘조국 근대화’, 젊은 기자의 감성을 촉발시키다
그래서 63년에 민정이양 선거를 맞이하게 됐습니다. 그때 집권층의 후보는 박정희 장군, 야당 후보는 말씀 안드려도 다 아시는 분이고, 이래서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최고회의 의장으로 장군의 신분이었죠. (박정희 장군은 1963년 8월 30일 전역을 하고 그해 10월 15일에 치른 제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 당선됐음 : 편집자 주)
이 분이 내세우기를 민족적 민주주의, 그리고 조국의 근대화, 장차 한국적 민주주의 개념으로 발전합니다만, 이런 선거 구호를 내걸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자 야당 인사들은 엉뚱하게도 사상논쟁으로 맞섰어요. 왜냐하면 그들이 4.19를 초래했던 그 구태의연한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믿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걸 해야 되는데 민족적 민주주의가 뭐냐, 이렇게 사상논쟁을 제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외국공관 앞에 가서 데모를 해요. 이러한 속에서 지식인 사회에서는 그래도 어떻게 군복(軍服)이 정치를 하느냐 그래도 민복(民服)이 낫다, 이러한 기성 관념이 팽배했던 시절이라고 봅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5천년 역사에 일찍이 근대화ㆍ개혁ㆍ산업혁명을 일으키자는 것을 정치의 목표로 내세웠던 적이 없습니다.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젊은 신문기자의 감성을 촉발했습니다. 저는 그래서 지식인 사회에 통념처럼 횡행했던 민복이 군복보다 낫다면서 외국 대사관 앞에 가서 데모하는 것을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면 이 선거를 앞둔 세력의 대결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제 눈에는 근대화를 지향하는 새역사 추진세력과 수구세력의 대결이 아닌가. 역사의 겉옷만 보는 것이 아니고 몸체를 중심으로 볼 적에는 과연 한국의 민주주의가 어째서 안됐고 또 무엇을 해야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느냐 하는 이런 작업이야말로 초미의 과제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왜 장관들이 외제차를 타느냐?”
그후 세월이 흘렀습니다. 기록을 보니까 1964년에 우리도 자동차를 국산화해야 할 게 아니냐 하는 산업진흥의 대강이 발표됩니다.
그때 제 고등학교 동기 동창생 하나가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사업가로 변신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아주 친한 사이입니다. 자주 내왕하게 됐어요. 한일협정이 65년에 타결이 되고 60년대 후반으로 기억합니다. 그 친구 여기 오면 같이 술도 먹고 토론도 했습니다. 이 친구 말이 한국에 오면 눈에 뵈는 것이 있다, 왜 장관들이 외국차를 타고 다니느냐, 가난한 나라가 자동차도 변변치 못한 나라가, 일본 대신들은 절대 그런 법 없다, 전부 일본 국산 차 탄다, 이러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죠, 아마 국산차가 막 시발 단계이고 성능이 그만 못한 점이 있을 것이다. 그랬더니 아니다, 그렇게 성능이 떨어져서 일찍 고물이 된다 하더라도 장관이 외제차 한대를 타는 동안에 국산차 두대를 갈아타면 어떠냐, 이렇게 제게 얘기를 해요. 아무리 친구 얘기지만 들으면서 작은 충격을 받고 그 말이 옳구나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청와대 공보비서실에서는 신문사 논설위원과 대학교수들 중에 몇몇 분을 초청해서 널리 여론을 청취하는 그런 관행이 있었습니다. 대변인 혹은 비서실장도 나와서 이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그랬습니다. 부정기적으로 모이고 멤버가 일정한 것도 아닌데 저도 그런 자리에 자주 불려나가곤 했어요. (교수와 언론인으로 구성된 ‘수요회’ 또는 ‘목요회’로 불린 여론 자문단. 공보수석 주재로 청와대 내에서 회의를 가졌으며 그 내용은 보고서로 정리해 박 대통령에게 전달됐음 : 편집자 주)
그 자리에서 여러가지 토론이 오가는 가운데 제가 그 얘기를 했습니다. 내 친구가 장관들의 외제차를 보고 이렇게 말하더라. 나도 동감이다. 이걸 대통령께 올려달라. 비서관이 부지런히 기록을 해요. 그리곤 그 일을 잊어버렸지요.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아마도 보름이 넘지 않았을 겁니다. 신문에 기사가 나기를 대통령 지시로 장관을 비롯해서 고위 공무원들은 바로 차를 바꾸라는 명령이 떨어졌어요. 세관에 미처 포장도 뜯지 않은 외제차를 쓰지 못하고 그대로 팔게 됐어요. 아 박 대통령이 이런 분이구나, 논설을 쓰는 기자 하나가 제안을 하면 그것이 옳고, 나라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바로 실천을 하는 지도자가 박 대통령이구나, 이렇게 제가 아주 깊은 감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미국에서 조국의 근대적인 모습을 갈망하며
또 세월이 흐릅니다. 제가 66년에서 67년까지 미국 하버드대학의 니만 펠로우십(Nieman Fellowship, 미국과 전세계 언론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수 프로그램 : 편집자 주)에 뽑혀가지고 1년 공부를 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1년 짧은 기간이니 공부를 열심히 해야죠. 그때 키신저도 강의하고 있었어요. 이것저것 짧은 영어지만 열심히 들었습니다. 연수생들은 학점을 따야 하는 의무 같은 것도 없고, 교수 식당에도 출입하게 하고, 아주 대우를 잘해요.
그러나 기간이 지나니까 논문을 한편씩 적어내라, 이렇게 됐습니다. 제가 그동안 읽었던 책들, 신문기자할 때부터 머리에 붙어다니는 화두(話頭)―이 나라가 언제쯤 이런 봉건적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언제쯤 우리나라에 근대적인 시민이 출현할까―이런 생각을 곁들여 가지고 이런 제목으로 논문을 썼습니다. ‘발전도상국가에 있어서의 정치 지도세력과 지식인의 관계’, 그리고 부제는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와 영미형(英美型) 기능 지식인의 비교연구’ 이게 제목입니다.
서투르게 타자쳐서 완성해서 냈어요. 귀국을 앞둔 시점에 연세가 연만하고 아주 참 진중하게 연구, 강의하는 페인소드라는 교수가 있었습니다. 이 분이 저를 찾아요. 갔더니 제 논문을 돌려줍니다. 받아서 표지를 보니까 거기에 코멘트가 있어요. “대단히 사려깊은 논문이다(very thoughtful essay)” 그렇게 썼어요. 학점 비슷한 평가를 A마이너스 그렇게 줬어요. 대단히 기뻤습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을 이 교수가 알아주고 또 하버드에 와서 1년 짧은 공부를 했는데 참 보람이 있다. 이렇게 느꼈습니다.
후진 정치체제와 선진 감각의 군 엘리트 집단에 주목
논문의 요점을 말씀드리면 먼저 라틴아메리카,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 많은 신생 독립국가에서 나타나는 기성 정치인과 군(軍)의 관계입니다. 그것에 관해 제가 주목한 책이 있습니다. 신생국 정치발전을 주로 연구했던 시카고대학의 유명한 학자 에드워드 쉴즈 교수가 쓴 책인데 거기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신생 독립국가에서 기성 정치 엘리트가 군대 의존 없이 공공질서를 능히 유지하고 국민에게 조국의 비전을 제시하고 이렇게 하는 사회에서는 군(軍)의 장교집단이 감히 우리가 정치에 뛰어들어야만 된다, 그래야 나라가 잘 된다, 이런 유혹을 느끼지 않는다. 그렇게 써 있어요.
그걸 발견하고 무릎을 딱 쳤죠. 아 그렇구나. 이게 주제의 하납니다. 그 말을 뒤집으면 만약 기성 정치인들이 그런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적에는 근대화 감각에 일찍 눈을 뜬 군의 엘리트들이, 우리나라 경우만 해도 1만명의 장교들이 미국에 가서 연구를 했고 군사학뿐 아니라 20세기 미국의 선진 문물을 접하고 멀리 조국의 뒤떨어진 현실을 생각할 때 안되겠다 무언가 돌파구를 마련해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다는 얘기가 됩니다.
▲군사 유학 시절의 박정희 준장(왼쪽). 6.25전쟁 전후로 한국군의 현대화를 위해 핵심 장교들의 미국 연수 프로그램이 실시되어 1954년 당시 박정희 준장도 미 오클라호마주 포트실 포병학교에서 6개월간 유학 생활을 했다. ⓒ 자료 사진
한국에서 근대화 혁명이 성공하려면
또 하나가 지식인의 유형 분석이 있어요. 하나가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라는 겁니다. 인텔리겐치아 뜻은 잘 아시겠습니다만 반대로 생각하는 지식인, 체제를 부정하는 지식인, 혁명을 일으키고자 하는 지식인 이러한 독특한 뜻을 가지는 말입니다.
‘쯔아’로 불리는 제정 러시아에서 국제화는 멀고 압박은 우심해지고 이런 속에서 러시아 사람들이 나폴레옹전쟁이 끝난 파리에 처음으로 갑니다. 나폴레옹이 쫓겨난 뒤에 개선문에 가봤습니다. 그때부터 눈에 들어오는 선진 서구문물에 자극이 얼마나 심했던지는 충분히 상상이 갑니다. 또 제정 러시아에서 귀족 자제들을 뽑아서 유학을 보냈어요. 가서 군사학을 연구하고 오거라 했지만 공부가 하나만 되는 겁니까. 거기서 공부하다 보니 자유인권 사상 여러가지를 몸에 지니고 돌아와요. 이런 것이 모이고 모여서 1917년의 러시아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이런 뜻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일찍이 산업혁명을 겪었던 영국사회, 근대화 과정을 2백년 또는 그 이상 거슬러 올라와서 발족했던 이런 나라들 또는 신대륙 미국의 문명 속에서 자란 지식인들은 그와 다른 유형입니다. 학자들의 책 속에서는 그들을 테크니컬 인텔리겐치아(Technical Intelligentsia)라고 쓰고 있습니다.
과연 그렇구나. 우리 대한민국의 대학생들, 저는 그 논문에서 대학생들을 준지식인이라고 적었습니다. 기성 지식인이 아니에요. 지식인이 되기 위해 저수지에 지식의 물을 담고 있는 준지식인이다. 이런 사람들의 성향이 어떤가, 성정이 어떤가. 아마도 영미형보다는 러시아형에 가까운 게 아닐까. 식민지 통치에 신음했고 또 해방 후에 모진 풍파 속에서 좌우 대립 이런 걸 보고 국토가 양단이 되고 이런 속에서 자란 지식인들은 어쩐지 부정심, 거부심 이런 것들이 강한 게 아닌가.
그러면 신생국가에서 비록 근대화를 내세운 군대 장교집단이 돌파구를 마련했지만 이 기나긴 근대화 도정을 어떻게 이끌고 나갈 것인가. 제 소견으로는 정치 지도세력과 기능 지식인의 악수가 필요하다. 이래야만 근대화 혁명이 성공한다. 이런 줄거리로 논문을 썼던 것입니다.
이것을 주로 그분의 강의를 많이 들었고 지도교수에 해당하는 페인소드 교수가 평가해 주었다는 것을 대단히 마음 속에 흡족히 느끼면서 귀국했습니다.
조국이 그리운 교포들
당시 미국에 우리 교포가 아주 적었어요. 보스턴 지역에 한국 음식점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 세월이었어요. 교민들이 적어서 외롭고, 또 그럴수록 조국이 그립고 고향이 그립습니다. 조국의 그리운 맛을 느끼고 싶은데 요즘에 하버드에 임 아무개라는 사람이 와 있다는 게 알려졌나 봅니다. 한국에서 오는 지식인들은 정부를 몹시 비판하고 깎아내리는데 그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얘기가 들리는 겁니다. 이 사람을 한번 초청하자. 그 분들이 주말에 보스턴대학의 교실을 빌려서 예배를 봐요. 저는 종교를 갖지 못했습니다만 그때 초청이 왔어요.
제가 사양치 않고 갔습니다. 가서 제 생각을 얘기했어요. 뒤에 들리는 그 분들의 얘기를 듣고 참으로 보람이 있었다 이렇게 느꼈습니다. 그렇게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어요.
신문사를 떠나 청와대로
돌아와서 하루는 신문사 논설회의가 끝나서 논설위원들이 일어나 각기 방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장기영 사장이 잠깐 저를 불러요. 보더니 어제 각하를 뵈었는데 아무래도 당신을 데려갈 것 같다, 만약 그런 연락이 오거든 먼저 나를 만나시오, 나한테 얘기하쇼, 그러는 겁니다.
참 이상하구나. 제가 그런 데 전혀 관심도 없고 매력도 없는 일개 서생인데 어째서 그런 말이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다가 제가 불려간 곳이 바로 이 앞에 계시는 김정렴 비서실장 앞입니다. 그 말씀(청와대 특별보좌관 임명 : 편집자 주)을 듣고 장기영 사장과 약속이 있기 때문에 잠깐 말미를 주십시오 하고 물러났다가 이렇게 제 논설 쓰는 생활 10년이 끝나게 됐습니다.
제가 받은 직책은 사회담당 특별보좌관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집무실이 비서실이 쓰던 신관 2층 한가운데 있었어요. 그리고 특별보좌관들이 같은 2층에 각기 방을 배정받고 지냈습니다.
첫날 대통령이 일동을 모아놓고 초대면 상견례 같은 걸 하면서 말씀하시는데 여러분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 3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두번째 행정부가 어떻게 운영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세번째 국내 특히 외국 간행물 수없이 많은데 그걸 읽다가 내가 알아야 되겠다고 생각되는 게 있으면 빼지 말고 올리시오, 하시기에 그게 우리의 책무다 그렇게 알았습니다. 그때가 1970년 12월 한겨울이었습니다.
가까이서 본 박 대통령의 첫 인상
▲박 대통령 가족의 한때. 임방현 특보가 청와대 근무를 시작할 무렵인 1970년 12월 11일에 찍은 모습이다. ⓒ 정부기록사진집
이듬해로 넘어가 아직 겨울, 해가 일찍 지는 관계로 퇴근시간이 앞당겨져 있습니다. 제가 지시받은 검토사항이 있었습니다. 검토해서 보고를 올려야지 해서 보고서를 완성하고 시계를 보니까 5시 전이에요. 그러면 내일로 미룰 게 아니라 이 보고를 올리고 퇴근해야겠다.
보고서를 끼고 대통령이 집무하시는 방, 서재라고도 불렀죠. 가서 노크를 하니까 거기를 지키고 있던 여직원 둘이 각하께서 퇴청하셨다고 그렇게 얘기를 해요. 그러면 물러나야 되는데 제가 선머슴이에요. 눈치없이 백면서생으로 살아온 이 젊은이가 그러면 각하께서 어디 계시냐고 물었죠. 여기서 복도를 따라 두 방쯤 지나면 거기 계실 거라고, 순진하게 일러주는 겁니다. 그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그 방 앞에 가서 똑똑 노크를 했어요. 안에 인기척이 나더니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려서 조심스럽게 문을 땄죠. 문을 여는 순간 주춤했습니다. 저녁 드실 시간은 아직 안됐는데 라운드 테이블에 전 가족이 모여 계세요.
아이쿠 실례했습니다. 보고서는 내일 올리겠습니다. 그랬는데 저쪽에서 박 대통령이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십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과객도 끼니때가 되면 식사를 대접하는데 들어오라고 하시기에 꾸벅꾸벅 들어갔습니다. 영부인 육 여사께서 벌떡 일어나시더니 일가족이 모여앉은 틈에 자리를 마련하고 의자를 갖다놓아 주십니다.
앉았더니, 접시를 들고 반찬을 이것저것, 멀리 있는 것까지 골고루 담아 주시면서 많이 드시라고 하시더니, 다음에는 자녀들을 일으켜 세우고 이 분이 이번에 특별보좌관으로 오신 임 아무개 선생님이라고 인사하라고…아이고, 이런 장면에 봉착해 밥이 제대로 넘어갑니까. 하여튼 먹는 둥 마는 둥 끝내고 실례하겠습니다, 보고는 내일 드리겠습니다, 하니 대통령께서 아니, 보고서는 놓고 가라고 하시는 겁니다. 첫 보고가 그런 양상으로 끝났습니다.
사무실로 돌아가는데 마음에 뜨거운 기운과 충격이 있어요. 아 내가 좋아했던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분은 그 체질이, 기질이 100% 한국 순종이구나. 한국인 토종이다. 제가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이렇게 청와대 생활이 시작이 됐습니다.
한국 교과서에 ‘한국’이 없다
그래서 무슨 일을 했느냐. 아까 제 사무실 말씀을 했죠. 대통령 집무실이 가운데 있으면 이쪽에 그냥 닫혀 있는 문이 함께 있는 거기가 제 방이에요. 배치하다 보니 그렇게 된 모양입니다. 저도 그때까지 몰랐습니다. 그 문이 열리는 줄 몰랐습니다.
어느날 열심히 책상에서 일하고 있는데 툭 하고 갑자기 그 문이 열리고 대통령이 불쑥 들어오시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벌떡 일어나서 아이쿠 웬일이시냐고 인사를 했더니 이렇게 뒷짐을 지시고 왔다갔다 걸으시면서, 내가 멀지 않아 72년 3월 전국교육자대회를 해야겠소, 거기서 내가 할 연설문 이걸 좀 만들어주쇼, 이렇게 말씀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하고 열심히 초안을 만들었습니다. 아무리 지시를 바로 받았다 해도 특별보좌관 특히 제가 존경하는 박종홍 선생님이 교육문화 담당으로 계신데 일방적으로 할 수가 없어 중의(衆議)에 붙인다고 보좌관 회의를 열어 거기에 상정을 했어요. 검토 또 검토하고 정서를 했습니다. 그리고 박종홍 선생님을 방으로 찾아뵙고 여차여차해서 이것을 만들었습니다만 이 보고만큼은 선생님이 올려주십시오, 이렇게 했던 걸 기억을 합니다.
그래서 72년 3월에 대구실내체육관에서 전국에서 각급 교육기관 관계자와 학교 교직원 8천명이 모이는 대대적인 전국교육자대회가 있었습니다.
71년에 키신저가 중국을 비밀방문했어요. 72년에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습니다. 국내에서는 71년에 국가비상사태 선언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긴장된 정국 속에서 박 대통령이 생각하시는 것은 우리 교육이 대단히 중요하다, 보좌관들은 각급 해당 교과서를 수집해서 내용을 분석해 봐라. 지시하는 동시에 우리 교육자들의 의식개혁이 절실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초유의 대규모 교육자대회를 열었던 것입니다.
그때 제가 쓴 원고의 초점은 국적있는 교육이었습니다. 교과서를 뜯어 보니까 이건 어디 중국 학생이 배워도 그만, 러시아 학생이 배워도 그만, 미국 학생이 배워도 그만인 이런 교과서에요. 조국이 당면한 냉엄한 현실이, 우리가 각자 풀어야 할 과제 이런 게 없어요. 이것이 박 대통령의 뜻이었구나 이렇게 다시한번 느꼈던 것입니다.
▲(좌)해방 후 최대 규모로 열린 전국교육자대회 소식을 전하는 1972년 3월 24일자 동아일보. 박 대통령은 치사를 통해 “우리 교육이 외국 것을 무조건 모방하고 추종해온 풍조를 버리고 이제는 국가 현실과 올바른 국가관에 입각한 ‘국적 있는 교육’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1973년에 출간된 임방현 특보의 저서 〈근대화와 지식인〉.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국이 처한 현실에 걸맞는 지식인의 역할과 사명감을 기술하고 있다. ⓒ 자료 사진
“내 동생 같은 그대들에게 터놓고 말하고 싶어 왔노라”
그 다음에 72년 10월 17일 유신 선포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외의 여러가지는 다 생략하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외로워 보여요. 유신 선포의 충격으로 한동안은 조용했습니다. 여야도 조용하고 그러더니 시기가 몇달 지나니까 다시 소요가 일기 시작해요. 반유신 데모로 대학가가 소연(騷然)하고 이래서 모시는 대통령이 아주 외롭게 느껴져요.
가만히 생각하니까 안되겠다. 특별보좌관이란 직책이 책상에서 책을 읽고 있서도 그만, 지시가 떨어지면 그것을 하면 되는 그것만이 아닐 거다. 나 같은 사람이 여기 와서 녹을 먹게 됐으면 뭔가 내 머리를 짜서 대통령과 나라를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될 게 아니냐. 궁리 끝에 전국 대학을 순회해야겠다고 저 혼자 생각했습니다. 그 계획안을 만들어서 대통령께 보여드렸습니다. 쭈욱 보시더니 아 그럼 이 사무실 일은 어떡할라구. 염려 마십시오. 제가 3일을 나가고 3일은 여기서 일하겠습니다. 이래서 재가를 받았어요.
행정원 한명 데리고 제 차로 전국을 돌았습니다. 서울은 물론이고 전국 20여개 대학을 돌았습니다.
냉랭하게 맞이하는 대학, 겉으로는 그래도 친절하게 맞아주는 대학도 있습니다. 연세대학 같은 경우는 저를 맞이하기는 해야겠는데 혼자 강당을 내주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던지 김동길 교수를 내세워 둘이 연설하게 만들었습니다.
김동길 교수는 전공했던 링컨대통령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치 이런 얘기를 강조했습니다. 저는 이 난국에 처해서 박정희 대통령의 근대화 이념, 한국적 민주주의가 무엇을 뜻하느냐. 우리 대학생들은 준지식인으로서 부지런히 실력을 쌓아서 지식인이 될, 이 사회를 이끄는 지도자가 될 사람이 아니냐. 내 동생 같은 사람들이다. 이렇게 터놓고 얘기를 했습니다. 끝나고 돌아가려고 하는데 벌써 방송에 나와요. 거두절미하고 아주 묘한 대목만 꺼내 방송을 하는 겁니다.
다녀온 뒤에 보고서를 올리면 박정희 대통령은 특보 한 사람이 올린 보고서지만 이걸 아주 자세히 보시면서 밑줄을 그으시고 어떤 대목에서는 줄을 밖으로 꺼내서 여백에다 ‘可歎’, 개탄스럽다는 생각도 붙이시고, 또는 관계부처에 이것을 보내라 이런 지시도 적어주십니다. 이렇게 해서 한 시기를 넘겼습니다.
“대통령과 새마을 지도자 사이에는 관료적인 장애가 없다”
그 다음 새마을 특강, 빼놓을 수 없는 기억입니다. 새마을운동을 70년에 시작하고 72년, 3년께 새마을연수원이 발족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첫마디가 새마을운동은 참선(參禪)하는 정신으로 해야 한다. 4H운동도 있었고 여러 가지 농촌개발운동이 있었고 지역사회개발이라 해서 국제적으로 커뮤니티 디벨로프먼트(Community Developmen) 이런 학문도 와 있었어요. 그러나 기술지도, 농기구 관리 이런 건 다음 문제다. 흙 묻히고 땀 흘리는 그 마을 주민들의 지지를 받는 그런 지도자를 엄선해 가지고 참선하는 기분으로 훈련을 해야 발전할 수 있다. 그리고 대통령과 새마을 지도자 사이에 관료적인 장애를 넣지 말라. 이런 지시가 있었어요. 참으로 옳은 지시였다고 지금도 가끔 회상을 합니다.
벌써 오랜 옛날이라 많이들 잊으셨겠지만 그때 70년부터 시멘트 수출이 잠시 저조할 때가 있었어요. 전국 3만3천여 마을에 시멘트 3백35포씩을 골고루 나눠줬어요. 1년 후 71년 대통령 초도순시를 수행해 저희가 내무부에 들어가 앉아 들어보니까 1년간의 새마을사업 결산을 하고 평가를 하는데 가차없이 하는 겁니다. 우선자 우선 지원이다. 앞서가는 마을을 집중지원하라. 해서 3만3천 마을이 1만6천5백으로 줄어듭니다. 반절로 줄어들어요. 여기에 다시 시멘트 5백포와 플러스 철근 1톤씩을 무상공급합니다.
흙 묻히고 땀 흘리는 지도자, 그리고 그와 마주 통하는 길을 스스로 열어주는 박 대통령, 이러한 지도력과 잘살아 보겠다는 한맺힌 열망이 불붙어서 오늘날 새마을운동이 세계적인 개발전략으로 굳게 자리잡고 있지 않습니까.
미국의 랜드연구소(RAND Corporation)는 중국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은 뭐냐, 박정희 근대화의 카피다,이렇게 평가를 했습니다.
그 시절 새마을연수원, 거기를 여기 계시는 박진환 특보(새마을운동 실무를 담당하고 있던 경제담당 특별보좌관 : 편집자 주)와 열심히 매주마다 강의하러 같이 다녔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빼먹으면 안된다. 대통령이 어떤 정신으로 추진하시는 사업인데 이거 열심히 해야 한다. 나름으로 젊은 기분에 열심히 뛰었던 이런 기억을 말씀 드립니다.
▲대통령과 새마을 일꾼 사이에는 거리가 없다. 노타이 오픈칼라 차림의 박 대통령이 1976년 7월 6일 새마을연수원을 방문해 연수생들과 함께 점심으로 콩국수를 먹고 있다. ⓒ 국가기록원
새마을 노래 작사하고 “이은상 선생에게 감수 좀 받아오게”
73년에 새마을운동이 자극을 주었던지 유엔 주관하에 뉴델리에서 세계지역개발대회가 있었어요. 각국에서 모여들었습니다. 갑자기 거기를 다녀오라는 대통령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새마을운동 주제로 제 짧은 영어지만 연설을 했습니다.
대통령은 그때 돌아오는 길에 월남에 들러 오너라. 이세호 사령관이 우리 장병들을 지휘할 때입니다. 이렇게 자세히 지시를 하세요. 73년이면 이미 철수를 앞두고 있을 때입니다. 가서 우리 장병들을 만나보고 대통령의 뜻을 전했습니다. 이렇게 자상한 지시를 하시는 분입니다.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새마을 노래 박정희 대통령 작사 작곡이란 것 모르는 사람 없습니다. 가사는 처음에 3절이었어요. 4절이 없었습니다.
어느날 부르시더니 원고를 주시면서 내가 새마을 노래를 작사해 보았는데 이은상 선생에게 감수를 좀 받아와. 받아들고 열심히 뛰었죠. 노산 선생 본래 제가 좀 알아요. 선생님, 각하께서 이걸 좀 감수해 주시라고 합니다. 받아서 쭈욱 훑어보시더니 아니야. 여기다 더 말을 붙이면 사족(蛇足)이다. 그대로 얼마나 쉬운 말이고 얼마나 좋은가. 그대로 갖다 올려라. 이렇게 해서 새마을 노래가 방방곡곡에 울려퍼지게 됐습니다.
▲박 대통령의 새마을 노래 작사 과정을 말해주는 원고. 썼다가 고치면서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 자료 사진
73년에 새마을운동이 궤도에 오르고 소문이 자자하자 광주에서 제1회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를 열게 됐습니다. 대통령이 참석하시고 새마을 지도자들의 체험담을 듣는 분위기는 무슨 명사 강연이 문제가 아니에요. 그 흙 묻히고 땀 흘리는 그들의 피눈물나는 고충, 경험담 이것이 주조(主調)를 이룹니다. 밤에는 각기 숙소에서 테이블을 에워싸고 앉아 토론을 해요. 활발하게 합니다. 이걸 연수원 측에서 자세히 기록을 해서 보고서를 올려요. 대통령이 다 보십니다.
이러한 대통령의 노력으로 새마을운동이 뿌리를 내리고 세계로 퍼지게 되었다는 이것을 제 특보 시절에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내 몸가짐은 추상같이, 남에겐 봄바람처럼
다음에는 대변인 시절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제가 경호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식당은 본래 경호실용으로 있었겠습니다만 대학, 신문사에서 온 백면서생들이(특별보좌관들을 가리킴 : 편집자 주) 밖으로 점심 먹으러 다니기가 불편할 거다. 경호실에 지시해서 2층에다 식당을 깨끗하게 리모델링해 차렸어요, 메뉴도 호텔에 주문해서 한동안은 공짜로 먹었습니다. 후에 실비대로 지원하게 됐어요.
여기서 밥 먹고 있는데 전화가 따르릉 울리더니 저를 바꿔줘요. 받아보니 대통령 목소리에요. 이번에 대변인을 맡아주시오. 아이쿠! 의외였지만 그러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맡았습니다. 이렇게 그 안에서 직책을 옮기게 됐던 것입니다.
또 어느날 인터폰으로 부르세요. 부지런히 쫓아 올라갔더니 저기 책이 쌓여 있는 테이블로 가시더니 그 밑바닥에서 조그만 종이쪽지 하나를 꺼내십니다. 1단 신문기사를 스크랩한 겁니다. 그걸 제게 주십니다. 읽어보니까 저기 구파발 훨씬 지나 변두리에 살던 무명 노언론인 한 사람이 죽은 거예요. 그런데 그 유족이 바로 길에 나앉게 됐어요. 그걸 보시고 신문을 오려두었던 겁니다. 박 대통령 하시는 말씀이 서울시장에게 얘기해서 시영아파트 하나 주선해 주면 어떨까. 참 고마운 말씀이죠.
바로 시장에게 전화했어요. 구자춘 시장으로 기억합니다. 구 시장이 알겠다고 그랬는데 일주일이 지나도 반응이 없는 겁니다. 그럴 분이 아닌데 이상하다. 기다리다 못해 제가 전화를 걸었습니다. 구 시장 말이 아이고 이거 큰일났소. 이런저런 마련을 해서 성사 직전에 어느 부인이 시장을 찾아왔더랍니다. 나도 부인이니 나도 주시오 그러는 겁니다. 이러니 이 곤욕을 내가 어떻게 해결합니까. 그래서 보고를 못올리고 이러고 있노라고. 각하께 그대로 보고를 드리니 각하께서 얼굴을 모로 돌리고 씨익 실소를 하십니다. 그래 알았어 하고 없던 일로 끝내고 말았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오석천, 노산 이은상 선생 등 언론계의 중진 원로들에게 제가 대통령 심부름 많이 다녔습니다. 심연섭씨라고 있어요. 일찍이 베레모 쓰고 파이프 물고 우리나라 신문에서 칼럼이라는 것을 맨먼저 시작한 사람입니다. 이 분이 불행히도 말년에 설암(舌癌)이 걸려 가지고 입원해 있는데 그것까지 어떻게 알고 계세요. 그러면서 금고에서 누런 봉투를 하나를 꺼내주시면서 문병 갔다 오라고…. 이런 심부름을 적지 않게 했습니다.
또 한번은 청와대 출입기자 중의 하나가 장기결근을 해요. 몸이 아픈데 대단히 중태였어요. 거기도 갔다오라고…. 다행히 완쾌가 되고 뒤에 크게 출세했는데 그 사람을 얼마 전에 만났습니다. 제 손을 붙들고 그때를 잊지 못한다고 얘기합니다.
속정이 깊은 분이 박정희 대통령이에요. 겉은 위엄이 있고 속은 따뜻하고…. 박 대통령이 즐겨 쓰는 좌우명이 여러가지가 있겠습니다만, 그 중에 지기추상(持己秋霜)이요 대인춘풍(待人春風)이라고 그 말씀하시는 걸 직접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몸가짐은 추상같이 하고 남을 대하기를 봄바람같이 한다. 아주 명심하게 됩니다.
어느날은 연설문 관계로 말씀을 하시면서 중국의 이런 시가 있지 않은가. 무슨 시입니까. 종일 망혜죽장 (芒鞋竹杖) 짚고 봄을 찾아 산야를 헤매다가 피곤한 몸으로 돌아와 툇마루에 턱 걸터앉았는데 저만치 마당 모퉁이에 나무 하나 있고 매화꽃이 피어 있으니 그게 바로 봄 아닌가. 그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 그런 시가 있을 거라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몰랐습니다. 그후에 찾아봤습니다. 있습니다. 저로서는 예사롭지 않은 감동을 받는 겁니다.
강철봉이 휘어지는 ‘일필휘지’
일본에 산케이신문 계통에 후지텔레비전이 있습니다. 지금도 있습니다. 상업방송으로 큰 방송입니다. 세계 1백여 국가원수를 인터뷰하고 다니는 카네타카 카오루라는 나이 지긋한 여기자가 있었습니다.
한국에 찾아왔어요. 박 대통령을 뵙게 해 달라. 대통령께 보고를 드리니까 홍보나 자기선전 같은 건 수줍어서 별로 좋아하지 않으세요. 제가 열심히 말씀을 드렸죠. 대통령은 근엄하시고 무섭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드리는 것도 제 책무입니다. 그랬더니 해보라고 하십니다.
여기자가 왔습니다. 어떤 장면을 연출했느냐 하면 휘호 쓰시는 겁니다. 우리 박 대통령께서 붓글씨를 잘 쓰시잖아요.
오석천 선생이 내가 문명갔을 때 벌떡 일어나 한 얘기가 있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체구는 작으신 분인데 글씨 쓰는 걸 보면 강철봉을 땅에다 박고 그것을 힘껏 휘어서 획을 긋는 것과 같다.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고 느꼈어요. 그래서 휘호하시는 장면을 카네타카 기자가 카메라에 담고 가서 일본과 세계에 방영하면 좋겠다고 간청을 드려서 그 장면을 만들게 됐어요.
서재, 글씨 쓰는 방에서 굵은 붓을 가지고 이렇게 서서 쓰시는데 묵을 흐뭇하게 묻히더니 힘차게 내려 쓰는데 그 글귀가 무슨 뜻인고 하니 ‘몸은 이름과 더불어 함께 묻히지만 강하(江河)는 만고(萬古)에 흐른다’ 이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웅혼(雄渾)한 기상입니까. 박 대통령 시정(詩情)이 풍부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래서 제가 욕심냈던 작품을 한번 연출했다, 이렇게 스스로 만족을 했습니다.
〈불사조 한국〉
그 다음에는 호주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마이클 키온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어떻게 관심을 가졌던지 70년대 전반부터 한국을 두번이나 왔어요. 경북 구미까지 가서 대통령 생가도 다 스케치하고 그때도 박 대통령을 한번 만난 기록이 있어요. 그래서 취재노트가 가득한데 마무리를 위해 한국에 와서 저하고 알게 됐어요. 박 대통령께 그 사람이 마무리를 하러 왔다는 말씀을 드리고 제가 뒷바라지를 해서 원고를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유능한 인물인데 술이 과해요. 술 한번 먹었다 하면 며칠은 놀아요. 얼르고 달래고 그래서 마침내 탈고해서 책이 나왔어요. 그 책을 며칠 전에 열어봤어요. 키온 그 사람이 76년에 와서 77년까지 있어서 책을 끝냈거든요, 76년 가을날 서재에서 박정희 대통령하고 면담한 적이 있어요. 제가 추천하기 전의 면담인 것 같습니다. 그때 박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을 그렇게 많이 설명하시더라고 적혀 있습니다. 결론은 옛날에는 우리 한국에서 면장ㆍ읍장들이 가만히 앉아 있으면 농민들이 찾아가서 진정도 하고 그랬다. 지금은 달라지고 있다. 면장ㆍ읍장이 농민을 찾아간다. 이렇게 박정희 대통령 자기가 시작하고 있다. 앞으로 더 달라질 것이다. 박 대통령이 제일 좋아하고 즐겨하시는 새마을 시찰, 몰라보게 달라지는 농촌마을의 충격적인 모습이 거기 나옵니다.
저는 한국어로 바로 번역을 하도록 해서, 작고했습니다만 김모 교수에게 부탁해서 바로 한국어판을 냈어요. 제목은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원래 영문판 제목은 〈코리안 피닉스(Korean Phoenix, 불사조 한국)〉에요. 그리고 ‘잿더미에서 일어난 나라’ 이게 부제입니다. 책을 출판하는데 국내 출판만 가지고는 안되죠. 주로 외국 사람이 보도록 만든 책이거든요. 그래서 미국의 유명한 다국적 출판사 프렌티스홀(Prentice Hall)사 거기서 나왔습니다.
책을 내기만 하면 뭐합니까. 이걸 널리 알리는 것이 목적이죠. 그래서 각하께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시간을 내서 미국에 출장을 가겠습니다. 왜. 출판기념회를 성대히 해야겠습니다. 제 복안은 뉴욕에 가서 출판기념회를 성대히 하고 그 길로 워싱턴에 가서 백악관 대변인을 만나야겠습니다. 이렇게 보고를 드렸더니 좋다고 하셨는데…
▲(좌)마이클 키온의 〈코리안 피닉스(Korean Phoenix, 불사조 한국)〉는 외국인에 의해 네번째로 나온 박 대통령 전기다. 한국의 근대화 과정을 중점적으로 기술하고 이 과정에 투영된 박 대통령의 리더십을 부각하고 있다. ⓒ 자료 사진 (우)1976년 8월 30일 박 대통령 따님 근혜씨가 마이클 키온씨를 접견하고 그의 취재에 응하는 모습. ⓒ 국가기록원
박정희 vs 카터의 한판 대결
그랬는데 카터 방한 일정이 잡힌 거예요. 79년 6월입니다. 카터 대변인 이름이 조디 파웰인데 따라오지 않겠어요.
카터라는 사람은 인권 전도사 대통령이라고 그러죠, 하도 인권 인권했기 때문에. 김포공항에 내리자 마자 호스트 국(國)의 의사와 상관없이 동두천인가 거기 미군부대 가서 잤죠.
대단히 긴장된 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미국 카터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그 골치아픈 철군 문제가 테이블에 나오지 않게 하라고 주한 대사관에 지시했다고 그래요. 박정희 대통령은 이게 천재일우의 기회다. 벼르고 벼르고 그때 당당히 주장할 것을 많이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철군이 부당하는 얘기를 역설 또 역설 카터가 듣기 싫도록 했습니다.
앞서 주한미군 자체 내에서부터 반발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싱글로브 참모장이 철군 안된다고 주장했다가 뒤에 워싱턴에 불려가서 해임됐어요. 이런 긴박한 국면입니다.
그런 과정에 카터 대변인 파웰이 저에게 쪽지를 보냈어요. 여기 와서 나를 좀 보고 가야 되겠는데 자기 보스가 저렇게 움직이니 별 도리 없지 않은가. 그래서 미안하다는 뜻으로 쪽지를 보낸 겁니다.
1차회담이 매우 싸늘하게 끝났는데 그대로 헤어질 수 없어서 외교부장관을 비롯해서 여러 사람이 열심히 일을 해가지고 예정에 없는 2차회담을 하기로 됐어요. 거기서 상호 체면이 설 만큼 타결이 된 걸로 기억을 합니다.
그 후일담이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이렇게 말씀하세요, 어 그날 만찬장에서 우리 근혜가 참 수고했어. 따님을 그렇게 은근히 자랑하세요. 수줍어하는 얼굴로. 만찬 분위기를 완화하느라고 어지간히 마음을 썼구나 하는 정황을 제가 짐작을 했습니다.
▲한미 1차 정상회담이 있었던 1979년 6월 30일 저녁 청와대 영빈관에서 베풀어진 만찬석상에서 박 대통령과 근혜씨가 카터 대통령 내외와 건배를 하고 있다. ⓒ 국가기록원
모욕적인 친서를 보냈던 카터, 끝내 철군을 포기하다
1979년 10월 4일에 우리 국회는 김영삼 의원 당시 야당 총재를 제명조치했어요. 시국이 긴박합니다.
그때 마침 79년 10월 18일에 한미 양국이 번갈아하면서 개최하는 한미안보협의회가 있었어요. 브라운 국방장관이 여기 미리 와 있었어요.
18일자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카터 대통령의 친서를 수교했다는 기록을 제가 봤어요. 아마 그때로 기억이 됩니다.
어느날 제 책상 위에 편지가 와 있어요. 이게 뭔가 하고 보니까 대통령께서 내려보내신 겁니다. 뜯어 봤어요. you are excellency, 존칭을 제대로 쓰고 서두 첫마디가 뭐냐 하면 I am not threaten you, 나는 지금 각하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봤습니다.
세상에, 이런 문구를 친서에 쓸 수가 있나! 대통령께서 오죽 마음이 상했으면 이런 문구를 대변인 당신도 보라고 내려보내셨겠는가. 이렇게 생각이 들더라고요. 한참 생각하다가 그 편지를 들고 올라갔습니다.
잘 읽어봤습니다. 각하, 재가를 받은 미국 출장계획을 취소하겠습니다. 어 그래? 오래 전에 약속이 된 건데 곤란하지 않을까. 그럼 뉴욕 가서 출판기념회만 보고 그냥 오지 워싱턴은 가지 말고. 아닙니다. 제가 대통령께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특보실에도 같이 있었던 유능한 외교관 김용식 대사가 주미대사로 가 있었어요. 카터 왔을 때 여기도 오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분이 계시니까 염려 마시라고 했습니다. 제가 못간다고 연락을 하고 김용식 대사님을 호스트로 해서 행사를 차질없이 치르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니까 그제서야 마지못해 그렇게 하라고 끄떡끄덕하시더라고요.
그때 저는 카터 대통령이 철군을 지랫대 삼아서 소위 인권과, 야당 상대의 정치에 대해 얼마나 압력을 가하고 있는지를 그런 친서를 통해 절감했습니다. 그 압력 속에서 박 대통령의 심중이 얼마나 괴로웠을까.
당정 연석회의에서 참으로 적막같이 침잠된 분위기를 깨는 대통령의 첫마디가 정 미군을 빼겠으면 빼라고 해라, 이거였습니다. 그 대신 우리는 자주국방을 오지게 추진하겠다. 이것을 기자들에게 브리핑해서 기사가 났어요.
장기영 사장을 얼마 후에 만났더니 그때 그 기사를 보고 나도 눈시울이 뜨거웠다고 그렇게 얘기를 하세요. 이것이 카터 방문에 가려진 양국간의 긴장이었고 뒤에 카터 대통령이 철군 계획을 포기함으로써 환원이 됐습니다만 이런 곡절을 내가 대변인 시절에 근무하면서 잊지 못하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하야’ 복선이 깔린 개헌 구상
78년에 박정희 대통령께서 유신헌법에 의한 2기 대통령 당선이 됐어요. 박경원 전 내무부장관이 통일주체국민회의 사무총장으로 있었어요. 당선증을 갖고 들어왔어요, 당선자에게 제정하려고.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무슨 세레모니 같은 건 필요없고 그 집무실에서 그때 김정렴 실장님도 계셨고 최규하 특보도 계셨고 몇사람 둘러선 가운데 서서 박경원 총장이 드리는 걸 간단히 받았어요.
그리고 돌아서서 독백처럼 말씀하세요. 아 이거 혼자 나와서 1등하니까 쑥스럽구만. 그러시더니 우리들을 방 모퉁이에 있는 테이블에 가서 앉게 하고 바로 입을 여세요. 내가 80년대에 들어가면 바로 개헌을 해야갰소. 귀가 쫑긋했습니다. 첫째 유신정우회를 3분의2 이하로 축소하겠소. 직능대표인데 원내 안정세력 운운하니까 대폭 감축하고 두번째 대통령 후보는 정당 공천 없이 자연인으로 등록하게 되어 있는 게 헌법 조항인데 이것도 안되겠소. 정당 공천을 하고 등록하도록 해야겠소. 세번째 토론 없이 찬반만 투표한다 이렇게 돼 있었죠. 이것도 고쳐서 활발하게 상호 토론하고 연설할 수 있게 고쳐야겠소. 그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 말씀을 하실 적에 거기 이어지는 구상이 대통령의 흉중에는 얼마나 깊이깊이 들어 있을까. 이렇게 저는 추측을 했습니다. 그후에 여러가지 트집들이 나온 것을 알아요. 그러나 그 이상은 모릅니다. 제가 보기에는 대통령 선출 조항을 고쳐놓고 또한번 할 이런 대통령이 아니에요. 심중에 대단한 결심이 비장돼 있었을 것이다, 그런 느낌을 받고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1979년 1월 31일 강원도 삼척에서 열린 포항-삼척간 동해고속화도로 준공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이 해안 초소 앞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잠시 묵상에 잠긴 모습이다. ⓒ 국가기록원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놓은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은 이제 역사와 세계인의 뇌리에 각인돼 있습니다. 한국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놓은 대통령이죠. 이건 제가 모셨다고 해서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생각도 그러하실 거고 세계의 이름있는 정치인ㆍ지식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평가하지 않습니까. 제가 좀 자료를 뒤적여 보니까 한이 없이 많아요. 이 자리에 갖고 나오려니 이거 시간 관계로 도저히 안되겠어요.
저는 첫째 박정희 대통령은 혁명가였다고 감히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흔히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는 잘했는데 정치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구정치적인 발상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유민주주의의 겉옷을 볼 게 아니라 먼저 자유민주주의를 걸쳐 입을 몸통을 키워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 시절이 어떤 시절이었습니까. 국가건설이라는 대동맥에서 역사를 보지 않고 몸에 걸친 옷과 같은 겉꾸밈의 제도에 집착해서 어떻게 국가발전을 하겠다는 겁니까. 자유민주주의에 걸맞는 국가의 몸통을 키워야 한다는 것, 바로 이게 박 대통령의 집요한 신념이었다고 저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보세요. 새마을운동이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고 경제건설의 효과가 눈에 보이게 나타나면서 1967년 1억불 수출이 1977년 목표를 앞당겨 1백억불 수출 1백배로 껑충 뛰어오릅니다. 지금 수출이 얼마입니까. 금년 예상으로 왕복 1조를 돌파한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 바탕이 어디입니까. 그 바탕을 누가 놓았습니까.
한일협정, 월남파병 모두 반대했던 겁니다. 지식인들, 교수들, 신문기자들 반대했고, 오죽하면 고독한 대통령이 독방에서 밤새 고민고민을 거듭해 그 이튿날 아침이면 담배 재떨이에 꽁초가 수북했다는 것, 다 아는 사실입니다. 할 것은 해야 한다. 한일협정, 월남파병이 무엇이었습니까. 한국이 세계만방을 향해서 문을 활짝 연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오늘날 알 만한 분들은 다 그래요. 고속도로 아이고 그거 없었으면 어떻게 살 뻔했어. 포항제철 그거 아니었으면 또 어쩔 뻔했어. 그 돈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청구권자금 아닙니까. 그중에 주요 부문이 무상 3억, 공공차관 2억 그리고 민간차관 1억 플러스 알파, 이것이 그 밑천의 귀중한 일부가 됐다는 걸 모르는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 지식사회에서는 6.3데모한 것 그것만 기억하고 민족정기만 부르짖지 그것이 국가발전에 어떻게 밑거름이 됐는가, 누가 이 어려운 결단을 했던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고속도로, 중화학공업 등 고독한 경세가(經世家)의 탁월한 전략
저는 두번째로 박정희 대통령은 경세(經世)를 했다. 세상을 경영할 줄 아는 분이었다고 이렇게 기억을 합니다. 경제를 앞세워서 실사구시의 노선을 추구한 분이 박정희 대통령입니다. 저도 그 정신을 본받고자 대변인실 큰 칠판 모서리에 실사구시를 백묵으로 써놓고 조석으로 봤습니다.
송아지는 키워서 잡아야 돼. 대통령 말씀입니다. 이제 좀 살기가 나아지니까 굶는 사람 없어지니까 야당을 비롯해 여기저기서 복지, 분배를 해야지 그때만 해도 벌써 그런 소리합니다. 고속도로를 한다니까 뭐라고 반대했습니까. 하기는 세계은행도 경제성 없다고 돈 빌려주기를 거절했죠. 여러 견적을 내보니 대통령 생각에 다 비싸요. 정주영 회장 불러 가지고 물어보니까 당시 킬로당 1억이면 된다고 그래서 맡겼다고 말씀하세요.
고속도로, 포스코도, 새마을사업도, 73년에 선포된 중화학공업도 물론입니다. 중화학공업을 이렇게 말씀하세요. 무슨 저 외국의 예처럼 후발 선진국이 된 예컨대 일본처럼 국가 권력과 국영으로 군수공장을 짓는 게 아니다. 그동안 경제발전 과정에서 커진 기업들에게 그 특성에 맞게 협의를 해서 하나씩 맡기면 된다. 평시에는 수출제일주의로 열심히 만들어 팔고, 유사시에는 군수산업으로 전환하면 된다. 이게 효율성이다. 어떻습니까. 경세가의 머리 아닙니까.
▲중화학공업은 방위산업과 연결된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1977년 4월 14일 창원공업기지의 방위산업체를 시찰 중인 박 대통령이 국산 포를 점검하고 있다. ⓒ 국가기록원
수출제일주의, 그리고 70년 들어서 커진 국력의 여력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돌보기 시작한 농촌 새마을운동, 키스트 창설, 중화학공업 선언, 이 일련의 획기적인 대역사(大役事)들은 한민족의 우렁찬 서사시(敍事詩)다. 이렇게 저는 머리에 그려봅니다.
고속도로 한다고 그럴 적에 그 돈 있으면 가난한 농촌에 골고루 나눠주면 되지 않겠느냐. 야당이 주장했던 거예요. 기공식 현장에 벌렁 드러누워서 반대했던 겁니다. 또 대통령을 지낸 어떤 사람은 고속도로가 누워 있었길래 망정이지 아파트처럼 서 있었다면 스무번도 더 무너졌을 것이다. 이렇게 비아냥거렸어요. 지금 뭐라고 그럽니까. 이거 없이는 어떻게 살 수 있었는지 상상이 안돼요. 기록을 보니 고속도로가 스무번도 더 무너졌을 것이라고 말했던 그 분도 그때 자기 생각이 짧았노라 실토했다고 그러더군요.
작년에 우리 수출이 세계 7위했다고 그러지요. 금년에는 이대로 가면 5위 내지 6위를 한다고 그럽디다. 자세한 숫자는 생략하고요, 이렇게 박력있게 가속도가 붙어서 전진 또 전진해온 밑바탕이 어디냐.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양날의 선택〉
호주 국립대학에 김형아라는 여자 교수가 있어요. 이 분의 책이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 선포하고 중화학공업 선언하고 밀고 나갈 때, 박 대통령 스스로 이리 잡아도 손을 베고 저리 잡아도 손을 벤다. 양날의 선택을 했다. 이런 결심을 했다. 역사를 길게 펼쳐놓고 볼 적에 반대론자들이 과연 탄압이라고 하는 유신 조치 없이 이 대사업이 되었겠는가. 김형아 교수의 질문은 거기 있어요.
이 분이 유신 시절에 대학가의 소연한 움직임 속에서 실망을 하고 고국을 떠났노라, 그렇게 책에 쓰여 있어요. 이 분이 박사 논문을 쓰게 되어 박 대통령과 공업화, 이걸 잡아봤는데 자료를 모으고 또 사람 많이 만나서 얘기를 들어볼수록 국내에서 듣던 평하고는 정반대에요. 충격을 받았어요. 아 그렇구나. 더 열심히 자료를 모았어요. 그래서 박사 논문도 그걸로 썼고 이걸 증보해서 우리나라에서 2005년에 책으로 나왔어요. 그 당시에 제가 다 읽어봤습니다.
박 대통령을 일컬어 흔히 비판론자들은 경제는 7이고 정치는 3이라고 하잖아요. 그거는 형식논리다. 단순 양분화다. 역사를 변증법적으로 깊이깊이 통찰할 때 박 대통령이 이룩한 빛나는 업적 그 밑바탕에는 그들이 말하는 과(過)가 있고 또 그들이 말하는 과를 파고파고 들어가보면 그 속에 빛나는 공(功)이 있다. 이렇게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 옳은 역사 해석이 아닌가, 이렇게 역설하고 있습니다.
▲(좌)70년대의 유신정치와 중화학공업을 양날의 칼에 비유, 필요불가결한 선택이었음을 역설한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 ⓒ 자료 사진 (우)호주 국립대 김형아 교수는 수차례 국내를 내왕하며 전현직 주요인사들을 만나 그들의 생생한 체험담을 통해 풍부한 연구 자료를 얻어냈다. 사진은 김 교수가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년 1월 29일 김종필 국무총리를 면담하고 기념촬영한 모습. ⓒ e영상역사관
“은퇴하면 새마을 강연하며 돌아다니고 싶어”
박정희 대통령의 말년을 회상합니다. 74년에 영부인 돌아가시고 혼자 사신 세월이 5년이에요. 얼마나 고적(孤寂)한 세월이었겠습니까. 그걸 내색 않으시는 분입니다.
좋아했던 막걸리. 막걸리에다 맥주를 타서 쇠젓가락으로 휘휘 저어가면서 이걸 ‘비탁’이라고 말씀하세요. (맥주 영어 발음 ‘비어’와 ‘탁주’ 막걸리의 첫자를 따서 합친 말 : 편집자 주) 문경 초등학교에서 교사하실 적에 그때 그렇게 자셨다고 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하면 내가 6.3사태 때 어떻게 그걸 이겨냈는지 모르겠어. 지금 같으면 못할 거야 그거. 이렇게 말씀하시는 나이가 됐어요.
제가 청와대 가서 초기 단계만 해도 기동차 타고 새마을 시찰하고 오며 가며 차중에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나보고 장기집권이네 독재네 이렇게 말하지. 60년대 서독에 가보니까 농촌이 소학교 아이들 동화책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아름다워. 우리 농촌이 그렇게 될 때까지는 내가 일을 더해야겠다. 얼마나 패기만만했는지.
말년의 연세가 지금 기준으로 보면 문제도 아니죠. 노인이라고 할 수가 없죠. 그 당시만 해도 옛날인 것 같아요. 돌아가신 게 우리 나이로 63세 아닙니까. 그때 어떻게 극복했나 모르겠어. 또 어떤 때는 그래 강하면 부러지는 거지. 이런 말씀을 하세요. 심중에 어떤 생각이 있었는지 추측할 뿐입니다.
또 내가 은퇴하면 가끔 새마을 강연을 하면서 돌아다니면 좋겠어. 이런 소회도 피력하시고. 아이구 하시는 말씀이 재정을 투입해 예산을 몽땅 써서 집중 개발을 해놓으면 그런 고장일수록 선거 때 야당 표가 많이 나온단 말야. 이런 말씀을 하세요. 근대화, 산업화의 패러독스겠죠. 다 알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구름도 자고 가는 추풍령고개에서
돌아가시기 전 79년 10월에 경주 보문단지에서 재경 외교관들을 초청해서 파티를 했어요. 왜 했냐 하면 봄철에 청와대를 오픈해서 서울에 있는 외국 대사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벚꽃놀이같이 즐겨왔는데 74년 육 여사 사건 난 뒤에 그 모임이 없어졌어요. 이걸 대사들이 못내 아쉬워한다는 얘기가 대통령 귀에 들어갔어요. 무슨 대안이 없을까 하다가 마침내 결정한 것이 보문단지로 초청하자 그렇게 된 겁니다.
▲박 대통령은 1979년 10월 11일 주한 외교사절을 보문단지로 초청, 리셉션을 베풀어 격려하고 우의를 다졌다. 사진은 보문단지 모임에서 대통령과 근혜씨가 외교사절들과 인사를 나누는 장면. ⓒ 국가기록원
각하 지시로 보문단지에서 하루를 즐기고 거기서 1박(泊)하며 대접하기로 하고 박 대통령과 본부 요원은 올라왔어요.
최소 인원만 철수하기로 하고 또 차량 댓수를 줄이려고 저는 차지철 경호실장 차를 탔어요. 차 실장 옆에 타고, 앞에는 지금 고인 된 전속부관이 탔습니다.
추풍령에 당도하기 전에 차 실장이 자꾸 어디로 전화를 하라고 그러는 겁니다. 마침내 전화 연결이 돼서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까 국회에서 김영삼 제명이 진행중이었나 봐요. 의사진행이 어떻게 되는지 차지철 실장이 궁금해서 국회 국방위원장하고 통화를 하는 겁니다. 어떤 대답을 듣고 조금 마음이 놓이는지 전화기를 놓더군요.
그러고 추풍령에 와서 잠깐 쉬어 가자 해서 조그만 방에 들어가 쉬었어요. 갑자기 차지철 경호실장이 아주 엄숙한 목소리로 각하, 지금이야말로 진짜 정치를 할 때입니다, 이런 얘기를 해요. 제가 듣고 깜짝 놀랐죠. 수문장(守門將) 같은 걸 맡은 사람이 엉뚱하게 무슨 진짜 정치를 운운하는지 저는 속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분위기였다는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식탁에 고개를 묻으며 “나는 괜찮아”
이렇게 해서 마지막 날이 옵니다. 셋째로 저는 박 대통령은 영웅이었다, 이렇게 봅니다. 혁명가, 경세가, 영웅이었다. 로마의 줄리어스 시저가 양아들처럼 귀여워했던 부르터스의 칼에 쓰러질 때 “너마저” 이렇게 한마디했다고 적혀 있죠.
박정희 대통령 마지막 식탁에 고개를 묻으면서 “나는 괜찮아”…나는 이 얘기가 더 절실합니다.
시간과의 싸움을 한 분이 박 대통령이에요. 자기가 생각하는 가난 추방은 이미 됐고, 우리나라가 부쩍 일어서는 민족중흥을 해야겠다, 또 북한 김일성에게는 부전승(不戰勝)을 해야겠다, 싸우지 않고 무릎을 꿇게 하고야 말겠다는 이런 생각으로 장대한 계획이 있어 그것을 시간과의 싸움이었다고 저는 보는 겁니다. 이것이 국민과 야당에게는 달리 보일수 있는 거죠. 딴은 그럴 수 있는 거죠. 시간과의 싸움을 하다가 마침내 영웅은 쓰러졌다. 이것이 10.26이었다고 보는 겁니다.
삽교천에 가는 그날 아침 저는 의전수석실에 일찌감치 올라가 대기하고 있었어요. 출발 직전이라 차지철씨도 그 방에 와 있었는데 어디서 전화가 왔어요. 차지철을 바꿔 주니까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전화가 온 거예요. 옆에서 저쪽 소리가 거의 들려요.
거기 삽교천 인근에 KBS 당진송신소가 있어요. 대북방송을 하는데 출력이 약해서 출력을 증가하는 공사가 있었어요. 이 공사가 낙성되는 게 마침 그날이었습니다. 그러니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으로서는 수행 책임을 맡고 있는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나도 거기 가면 안되냐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차 실장이 아주 단호한 목소리로 안된다고 딱 잘라요. 정보부장은 그런 데 나오는 게 아니라고 훈계조로 얘기하는 겁니다. 참 이상하다. 어째 그런 문답이 있을 수 있을까.
돌아오는 길입니다. 아산 근처에 오니까 2호기가 먼저 앞장서서 가라고 전화가 왔어요. 이상하다. 이런 전례가 없었는데. 명령대로 2호기가 먼저 갔죠. (헬리콥터 1호기에는 박 대통령, 2호기에 청와대 참모진, 3호기에 경호원들이 타고 귀경 중이었고, 박 대통령은 제2종합제철 후보지로 거론되던 아산만 일대와 충무공의 현충사를 공중시찰하기 위해 2호기를 먼저 보낸 것임 : 편집자 주)
청와대에 도착해서 일행이 도열해서 1호기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상식으로 봐서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 아직도 안와요. 그래서 모두 이상하다 이상하다. 걱정도 되고. 그러던 끝에 폭음을 울리며 헬기가 도착했어요. 대통령이 내리셨어요, 도열해 있던 참모들이 꿉벅 인사를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여름에 쓰는 그 모자를 이렇게 손으로 벗어 들고 인사를 받습니다. 제가 여러 차례 수행하면서 보았지만 현충사, 충무공의 한산도 사당 같은 데를 시찰하면 거기 오가는 촌로(村老)들과 많이 마주칩니다. 그 분들이 보니까 어이구, 대통령이거든요. 다가와서 아주 친근하게 인사를 합니다. 안녕하시냐고. 박 대통령 한번도 모자 쓴 채로 답례하는 법이 없습니다. 꼭 손으로 모자를 벗고 마주 인사합니다.
▲환영 인사에 답례하는 박 대통령. 1979년 8월 30일 전남 순청시청에 들러 수해 현황 및 복구 상황을 보고받은 박 대통령이 시민들의 환영 인사에 중절모를 벗어 들고 답례하고 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충남, 전남북 및 경남 일대의 수해 지역을 잇따라 시찰하는 강행군을 계속하면서 이재민들을 위로하고 복구작업에 나서고 있는 관계관들을 격려했다. ⓒ 국가기록원
이러한 대통령. 새마을운동에 감격의 눈시울을 적시면서 새마을 노래 4절이 필요하다고 다시 써넣은 대통령. 우리 모두 힘차게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우자. 이것을 이 나라 구석구석에 정(情)과 예지를 발휘해서 알리는 대통령. 그래서 저는 박정희 대통령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계를 향한 새로운 한반도 시대를 바라보며
끝으로, 제가 아주 마음에 드는 외국 사람들의 박정희 대통령 평을 읽어 보겠습니다.
카터 대통령의 수석비서관을 지낸 오버 홀트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해요. 2005년의 글입니다.
“박정희의 근대화 성공으로 중산층이 창출이 되고 이것이 한국 민주주의의 토대가 됐다. 박정희야말로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
그 다음에 하버드대학의 명예교수로 있는 에즈라 보겔. 이 교수 최근에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저서를 냈어요. 출판기념회 자리에서 이렇게 얘기했어요.
“박정희가 없었으면 오늘날의 한국도 없다. 박정희는 헌신적이었고 개인적으로 깨끗했으며 열심히 일했다. 그는 국가에 일신을 바친 리더였다. 터키의 아타튀르크, 중국의 덩샤오핑, 한국의 박정희는 매우 비슷한 사람들이다. 모두 군인 출신으로 근대화를 이루어냈고, 엄청난 애국심과 강한 비전을 가지고 경제발전을 일구어냈다.”
▲남북의 경제력 차이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위성사진. 박 대통령은 분단 시대를 마감할 수 있는 국력과 민족적 자신감을 남겨줌으로써 세계를 향해 새로운 한반도 시대를 열어갈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놓았다. ⓒ 자료 사진
아시아의 리더라고 하는 싱가포르의 리콴유 수상. 박 대통령 돌아가시기 직전에 한국을 방문해서 정상회담을 했어요. 삽교천 행사 후 오찬하는 자리에서(10월 26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을 마치고 당진송신소를 거쳐 도고호텔에서 오찬을 했음 : 편집자 주) 그때 리콴유 그 분이 정상회담에서 이런 걸 아주 역설하더라고 대통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뭐냐 하면 공산당하고 싸울 적에는 절대 양보 타협해선 안된다. 최후의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싸워야 한다. 이게 리콴유 수상의 마지막 박 대통령에 대한 권고였다고 합니다. 그 리콴유 수상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시아에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위대한 세 지도자로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 중국의 덩샤오핑, 그리고 한국의 박정희를 꼽고 싶다. 오직 일에만 집중하고 평가는 훗날의 역사에 맡기는 지도자였다.”
노산 이은상 선생은 말합니다. “한국 역사에 세 분의 위인이 있다. 세종대왕이요 충무공이요 박정희 대통령이다. 앞의 두 분 업적을 합해도 박 대통령의 업적을 능가할 수 없다.”
빈곤 추방, 보릿고개 추방, 그리고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해서 김일성에게 부전승하겠다. 손자병법에서 최고의 병술로 치는 부전승, 싸우지 않고 이기는 이 전술 목적을 달성한 분이 박정희 대통령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지금까지 왜 그 분을 잊지 못하는지, 잊을 수 없는지를 두서없이 말씀드렸습니다만 저와 우리 마음뿐만 아닙니다. 그립고 아쉬워 되새김해 보고, 그래서 더욱 잊지 못하는 온국민의 간절한 마음을 모아 박정희 대통령에게 바치는 말씀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