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편
환난과 확신 시편 3:1-3
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2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2. 그의 적들은 매우 사악했다. 그들은 그를 대적하여 일어섰고 그를 괴롭히려 했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라 그들은 그의 영혼에 대해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1) 즉 그들은 다윗의 종들과 신하들이 이처럼 그를 버리고 그를 돕지 않았으므로 하나님도 그를 버리셨고 그의 주장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그를 사곡한 자와 악한 자로 간주하고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그의 환난을 경멸하고 그것을 나쁘게 해석했던 것이다.
(2) 그들은 하나님이 그를 구제할 능력이 없는 자로 여기고 불평스럽게 비방했다. “그의 위험이 너무 커서 하나님 자신도 그를 도울 수 없다” 이스라엘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인간에게 전능자도 다스릴 수 없는 강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큰 불신이 있다는 것은 이상스러운 일이다.
(3)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확신을 흔들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의 위로를 단념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나의 영혼에게 그렇게 말했나이다” 이와 같이 영혼이라고 풀이할 수도 있다. 그들이 그로부터 그 토대를 빼앗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에 대해 나쁜 견해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그를 그 무엇보다도 가장 슬프게 했다. 그 단순한 시험이 “그의 몸의 가시”가 되어, 아니 “그의 뼈 속의 칼”이 되어 그를 고전케 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도움을 얻지 못하게 된다는 그 생각만으로라도 매우 두려워진다. “나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보다 그들을 더욱 괴롭히는 것은 없다. 다윗은 하나님께 와서 히스기야가 여호와 앞에서 랍사게의 불경스러운 편지를 펼친 것과 같이, 그의 대적들이 그에 대한 말한 것을 하나님께 전하고 있다. “그들이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그러나 주님, 그것은 사실이라면 저는 파멸입니다. 그들은 내 영혼에게 저는 하나님께 구원을 얻지 못한다.(그 단어는 그렇게 나와 있다)하나이다. 그러나 주여, 주께서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35:3) 그리고 그것이 나를 기쁘게 할 것이고, 합당할 때에 그들을 잠잠케 하리라고 이르소서”
이 호소에 그는 “셀라”를 덧붙이고 있는데 그것은 시편 책에 약 칠십 번 정도 나와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다윗 시대에 시편이 노래될 때 덧붙여지는 음악으로 보고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엄숙한 정지를 명령하는 음부로 보고 있다. 즉 “셀라”를 “그것을 주목하라” 또는 “거기에서 멈추고 잠시 생각해 보라”로 해석한다. 여기에서 그들은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셀라)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것은 “잠시 이러한 것에 대해 생각하라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리로다! 이처럼 사악한 암시를 걷우어라”라고 해석할 수 있다.
첫댓글 메튜헨리 목사의 성경 해석 설교를 읽다보면. 아쉬운 점은
본문 시편 3장 2절"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이 상황에서)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니이다." 를
자꾸만 다윗의 일상사와 연결지어 해석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메튜헨리 목사의 영적 시각의 한계가 거기까지인가 봅니다.
사실은 마태복음 27장의 상황과 연결지어 해석해야 합니다.
39절," 지나가는 자들은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신의 아들이어든..
네 힘으로 저 자신이 처한 환경을 구원하고..즉 벗어나서 그 못박혀있는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려므나..그러면 우리가 널 믿겠노라..
41절 " 그들과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즉 많은 사람을 병마에서 해방되게 해주고..죽은 자도 살려주었지만..정작 제 자신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는구나!..
합니다.
조롱하여 가로되 " 그가 참 이스라엘의 왕이로다..지금 십자가에서 네 스스로 내려와보라..그리하면 우리가 널 메시야로 믿겠노라..합니다.
또 " 그가 성부 하나님을 신뢰하니..성부 하나님이 원하시면..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늘 하던 말이 ' 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도다 '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능욕하더라..모욕하더라..
이 대목에서 우리는 뭘 깨달아야 합니까?
왜 시편 3장 2절이 기록되어 있고.
마태복음 27장 20절~44절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예수께서 자기를 조롱하는 자들, 즉 너가 신의 아들이라면 스스로 풀고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널 메시야로 믿겠노라 하는 사람들에게 " 자 . 봐라. 하시며..십자가에 못 박힌 상태에서 풀고 내려와서 보여주고는 다시 못 박힌 위치로 돌아간다면..어떻게 하렵니까?
그려면 예수를 그들의 왕으로..메시야로..주인으로..구세주로 받아들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그렇게 되지 아니할 것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들의 악한 마음 심보를 아십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면서 " 너희가 주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 즉 예수를 자기의 구세주로..왕으로..메시야로 영접하게 되는 신앙은
뭘 육신적인 눈으로 목격하고..확인하고 믿는 것이 아니랍니다.
오직 영적 실체를 만지는 것입니다.
영적 상황을 고려하기에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메시야로..왕으로 받아들입니다
영적 상황. 영적인 세계를 고려하여 그 당시 상황을 봅시다.
"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고 외치던 민중은 누구의 말을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까?" 악마입니다. 악마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입에서 그런 말을 내밷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실체를 아십니다.
너희들이 아니라..너희들 속에 악마가 그런 목소리를 높이고 있구나..하십니다.
이렇게 하늘의 세계에 시각으로 사는 신앙인은 현실적인..즉 육신의 시야에 보이는 현상에 따라 액션을 취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곧잘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열왕기하 6장에 엘리사의 불말과 불병거 사건이 나옵니다.
17절에 엘리사가 "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하건데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하옵소서..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은 육신의 눈에 보이는 현상대로 상황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며 액션을 취할 뿐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하늘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매우 분주합니다.
천사들은 성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려고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재빨리 그를 건져낼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은 고요하게 정적만 흐르고 있습니다.
악마는 그 졸개들과 함께 광란의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할지라도 예수는 믿었습니다. 자기를 육체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시리라 하신 선지자들의 성경 기록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의연히 대처합니다.
만사가 성경에 기록된 예언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안절부절 하지도 않습니다. 그 상황이 더 악화되게 하려고 부추기는 목격자들의 말에 부화뇌동하지 않습니다.
영으로 사는 사람은 이러합니다.
육으로 사는 사람들이 도저히 수긍하기 힘든 상황 대처를 합니다.
상황은 점점 나빠져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영으로 사는 사람은
육신의 눈에 보이는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십자가에 달려 있던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
당신들도 그것만 바라보고..현실을 사십시오.
그러면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전 매일매일. 매순간 순간마다 십자가에 달려 계신 내주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 때 내가 현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을 해야하는지 교훈을 받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있으라 하신 자리에 있으면..만사가..아버지의 뚯하신대로 다음 상황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민중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했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여..당신은 현재 어려움 가운데에 처해 있습니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 하늘이 허락한 것입니다.
그 환경이 주는 교훈을 가르쳐준 후에는 곧 물러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왜 십자가에 못박혀 있습니까?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죽어야 다시 살릴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자신도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만사가 하늘의 뜻대로 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대중이 아무리 웅성거려도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을겁니다.
마귀가 아무리 인간들을 부추겨 충동질하여도..그 뜻대로 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이러한 관념의 세계에 푹 빠져 있습니다.
상황을 보지 말고 상황의 저 뒷편에 하늘의 세계를 바라보십시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장 1절~ 에서 " 거기를 주목하라..거기에는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합니다
저는 자주 환경이 어려워도 절 주의 몸된 교회를 일으키려는 의지를 사탄이..상황이..절 좌절시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 상황의 다음에 전개될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걷기 때문입니다.
예수처럼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과 창피함. 체면이 다 깍임. 좌절의식 중에
계셨지만..현 상황을 보지 아니하였습니다.
바로 시편 3장 2절의 다음 구절을 읽어보십시오.
" 주는 나의 머리를 드시는 분이십니다 " 합니다.
사람들이여..이 상황을 보는 사람들이여 내가 망할 것 같아도 곧 회복할 것이다..
내가 섬기는 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이다..합니다
이런 기대감..이런 믿음으로 삽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그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