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호가리(1)
돈호가리 / 운해 김종억
온통 굴 껍데기로 뒤집어쓴 큰 바위 두 개와 작은 바위들! 물 빠지면 바위 한 개, 찰랑찰랑 바닷물이 차오르면 그림 같은 바위 2개!. 바위 꼭대기에는 적응력 강한 해초들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어 썰물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섬의 모습은 그런대로 살풍경하지는 않다. 해수 간만의 차가 심한 이곳에서 밀물이 해변에 꽉 차오르면 그 바위는 절반이 바닷물에 잠겨 한 폭의 수채화로 변한다. 특히, 석양이 붉게 물들면 바닷물에 길게 그림자 드리운 작은 섬의 모습은 가히 환상적으로 아름다웠다. 잔잔하게 물결치는 고요 속에 붉은 석양을 등지고 애잔하게 일렁이는 그 바위섬을 우리는 돈호가리라고 불렀다.
썰물 때에는 그 전모가 드러나는 초미니 무인도 돈호가리!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에 기울어진 집안 사정으로 중촌에서 백련골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인천 영종도가 섬이라고는 하지만 내가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던 중촌에서는 일 년에 몇 번, 부모님을 따라 인천에 나갈 때나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일년에 한번 작약도나 송산 백구지로 가을 소풍 갈 때, 그리고 여름에 아버지를 따라 사두질 갈 때, 형 따라 또는 친구들과 가끔 어울려 망둥이 낚시질하러 갈 때를 제외하고는 바다를 가깝게 접해 본적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주 어릴 적에는 그곳에 살면서도 그곳이 섬이라기보다는 그저 한가로운 전원, 평범한 농촌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산과 들, 논과 밭이 광활하게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었다. 섬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백련골로 이사를 하면서 나는 바다를 아주 가까이서 접하고 살게 되었다. 아버님께서는 바다가 훤히 바라다보이는 산자락 언덕 위에 터를 닦아 아담한 초가삼간(草家三竿) 한 채를 지으셨다. 창문을 열면 바다가 시원하게 바라보이고, 스쳐 가는 바람에 갯내음이 물씬물씬 풍긴다. 엄동설한(嚴冬雪寒) 문풍지 울어대는 소리는 오죽하던가! 사실 이곳은 영종도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 도회지(都會地)인 인천에 한 번이라도 나올라치면 반나절은 족히 걸리는 바닷가 오지 마을이었다.
곱고 하얀 모래가 끝없이 펼쳐져 있고, 모래사장 따라 양귀비보다 더 빨간 해당화 꽃이 군데군데 무더기로 흐드러지게 피어있었으며, 사시사철 파도치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바다에서 시원하게 부는 바람에 실려 온 갯내음은 언제나 신선하게 코끝을 간지럽혔다. 동네 아이들과 생소한 환경에 푹 빠져서 신나게 모래사장을 쏘다니면서 서서히 이곳 생활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모래사장 군데군데 피어있는 해당화는 가까이서 보면 장미처럼 가시가 달려있으며, 꽃이 지고 나면 오렌지색 열매가 달렸는데, 크기는 꼭 큰 대추 알만한 것이 볼수록 예뻤다. 동네 아이들이 그것을 한 움큼 따서 나에게 내밀며 먹어보라고 했다. 그래서 날름 받아먹었는데, 달콤하기도 하거니와 신선한 향기가 좋긴 하였지만, 먹고 난 후에 꺼끌꺼끌한 씨앗이 목에 걸려 캑! 캑! 거리는 내 모습을 보고 동네 아이들이 일제히 까르르 웃었다.
백련 골에는 모두 세집이 옹기종기 살았는데, 우리 집이 이사함으로 네 집이 되었다. 하루 두 번 썰물 때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다래끼 하나씩 옆에 끼고 호미나 굴 따는 봉(기구)을 들고 서둘러 바닷가로 일제히 나갔다. 물론 나도 따라 나갔다. 그곳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분들은 어렵지 않게 낙지와 주꾸미, 소라며 조개들을 캐고 굴을 쪼아 열심히 담고 있었지만, 매사에 서투른 나는 그저 그 사람들 꽁무니만 따라다니기 바쁘고 잡는 데는 꽝이었다. 푹푹 빠지는 개펄에 다리 옮기기 조차 힘들어하며 온몸은 물론 얼굴까지도 개흙을 묻히고 다녔다.
돈호가리를 중심으로 그 일대는 자연산 굴이며 소라, 바위 밑에 숨은 게를 비롯한 잡을 거리가 많아 동네 사람들은 물론이고 옆 마을(은골, 젓개 등) 사람들까지도 몰려와 법석을 떨곤 하였는데, 그럴 땐 돈호가리 전체에 울긋불긋 사람 꽃이 피곤하였다.
그곳으로 이사한 후 얼마 있다가 사라호 태풍이 몰아닥친 적이 있었다. 폭풍우를 동반한 날씨가 연일 계속되더니 드디어 엄청난 비와 바람, 해일이 몰려와 전국적으로 수많은 수재민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라디오에서는 연일 수재민의 발생과 인명 피해, 재산 피해를 시간마다 긴급뉴스로 보도하였다. 특히 사리(조수 간만의 차가 가장 많을 때) 때에 당한 일이라 해일에 의한 피해는 엄청났다.
개펄을 물막이하여 만든 간척지 논의 석축이 무너져 한창 자라고 있는 볏논에 바닷물이 쓸려 들어와 피땀 흘려 지은 농사를 송두리째 망치는 깊은 아픔을 동반하기도 하였다.
몇 날을 퍼붓던 비가 개자 언제 그랬냐는 듯 해가 반짝하고 났다. 동네 어른들이 논이며 밭으로 피해 상황을 살피러 간 사이에 동네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모래사장으로 달려나갔다. 모래사장에는 생활용품 쓰레기들을 비롯한 잡다한 부유물들이 많이 떠밀려 있었다. 통째로 뽑힌 채 떠밀려온 나무와 각종 스티로폼… 갑자기 한 아이가 큰소리를 질렀다. 돼지가 떠밀렸다! 우르르 몰려가 보니 중간 크기의 돼지 한 마리가 모진 사투 끝에 모래장술 에 떠밀려 있었다. 그날 저녁 동네는 돼지고기 파티가 열려 집집마다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그물을 준비하시고 중학생인 형과 나를 불렀다. 나와 형은 아버지를 따라 개펄로 나갔다. 돈호가리 옆 갯고랑 양쪽으로 말뚝을 치고 그물을 맸다. 3父子는 두 시간 이상 낑낑거리며 그물을 맸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때는 사리 때라 얼마 후에 물이 밀어 방죽 논 석축까지 찰랑찰랑 차올랐다. 물 빠지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해는 지고 어슴푸레 반달이 떠올랐다. 아버지께서는 따라오너라!하시고는 앞서 나가셨다. 형과 나는 고기 담을 그릇을 챙겨 아버지를 따라 개펄로 나갔다. 우리가 발을 옮길 때마다 번쩍번쩍 불이 튀었다. 그것이 고기(생선) 비늘이라느니, 인(燐)이라느니 두런두런 이야기하면서 낮에 매어둔 그물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물에 도착하자 우리는 탄성을 질렀다.와!… 달빛에 비춘 갯고랑에서 비늘이 번쩍였번쩍였다. 물이 빠지면서 갯고랑에 매어둔 그물에는 그야말로 고기가 바글바글 들끓었다. 고기가 퍼덕일 때마다 달빛에 비늘이 반사되어 번쩍번쩍 빛을 발하고 있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가득 잡은 고기를 낑낑대며 짊어지고 집으로 왔는데, 고기의 이름이 숭어의 새끼인 동아라고 하였다. 양이 많으니 일부는 소금에 절여 말리고 나머지는 몇 날 며칠을 숭숭 무 썰어 넣고 끓인 동아매운탕 포식을 하였으며 그리고도 남는 것은 숯불에 소금 뿌려 굽기도 하고 기름에 튀겨 먹기도 하였다. 그해 여름 우리는 두고두고 동아의 담백하고 개운한 맛으로 식욕을 돋웠다.
돈호가리 오른쪽으로 멀리 노량섬과 누에섬이 머리를 베고 누워있었다. 노량섬과 누에섬은 썰물, 밀물과 관계없이 걸어서는 갈 수 없는 곳, 배를 타야만 갈 수 있는 무인도이다. 노량 섬은 아직도 가보지는 못했지만 멀리서 보면 한여름에는 나무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늘 신선하고 신비스러운 느낌까지 들어 언젠가는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섬이다. 그 옆의 누에섬은 마치 누에가 고개를 바짝 쳐들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눈만 뜨고 일어나면 바다가 한눈에 바라보이고 수평선 너머 작은 배들이 들락거리는가 하면, 그림처럼 떠 있는 노량섬과 누에섬을 바라보면서 나의 소년 시절은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