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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문보살십주제구단결경 제8권
22. 등자품(等慈品)
[등자 삼매의 신족의 힘]
그때에 최승(最勝)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떻게 보살은 등자삼매(等慈三昧)에 들어가서 삼천대천세계의 인음(人陰)ㆍ신음(神陰)과 모든 용(龍)이며 귀신의 경계의 한 몸, 두 몸과 백천 몸에 이르기까지 두루 관하나이까?
어떻게 보살은 신족의 힘으로써 한 부처님의 국토로부터 다른 한 부처님의 국토에 이르기까지 마치 사람이 허공에 놀 듯하고 또한 걸림이 없나이까?”
그때에 세존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정수 삼매]
“잘했다. 이 물음은 매우 기특하고 매우 기특하도다. 나는 이제 너를 위하여 그 뜻을 알기 쉽게 연설하리니,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서 잘 생각할지어다.
모든 법은 텅 비고 고요하여 본래부터 없으며 도(道)의 온갖 지혜를 이루고서 찾아도 역시 그 자취는 없느니라.
보살이 정(定)의 정수삼매에 들어가서 삼천대천세계의 안에 있는 중생으로서 형상이 있는 무리를 두루 관찰하고,
5음으로 이루어진 몸이 생기는 것과 소멸하는 것에 대하여 어디서부터 생기고 어디서부터 소멸하는가를 관찰하며,
다시 공계(空界)의 지ㆍ수ㆍ화ㆍ풍에 들어가서 낱낱이 분별하여도 마침내 존재하는 것이 없으니,
법이 생기면 곧 생기고 법이 소멸하면 곧 소멸하느니라.
[부동 삼매]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옛날 나는 아득히 먼 오래 전에 보살의 도를 닦으면서 선정의 한결같은 뜻으로 마음을 붙잡아 어지럽지 않고 부동(不動)삼매에 들어가 한이 없고 수량 없고 헤아릴 수 없는 허공의 중생들을 관하여 그 형류(形類)에 따라 그들을 교화하고,
그 안의 중생이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이 있거나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이 없거나,
애욕(愛欲)에 뜻이 있거나 애욕에 뜻이 없거나,
성내는 마음이 있거나 성내는 마음이 없거나,
보살은 권혜(權慧)로써 종류에 따라 들어가 형상을 그들과 함께하고 온갖 것을 알맞게 하여 마음이 정의(定意)에 들어 끝내 어수선하거나 뒤섞임이 없으며,
손가락을 튀기는 잠깐 동안에 백천의 모든 부처님 국토에 들어가,
혹은 법성혜관(法性慧觀)으로써 교화하고,
혹은 공법(空法)과 고(苦)ㆍ공(空)ㆍ비상(非常)의 바른 법으로써 인도하기도 하나니,
보살이 교화한 바는 또한 끝이 없고 10선(善)의 행으로써 가르쳐 주느니라.
[보살의 10선의 행]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먼저 국토를 청정하게 하되 그 공(功)을 헤아리지 않고,
그 지혜를 알기 쉽게 연설하되 걸림이 없음을 밝게 알며,
도수(道樹) 아래 앉아 마음에 겁약(怯弱)함이 없고,
악마를 항복시키고 삿된 뜻[邪趣]을 알게 하며,
노니는 경계에서 사람을 제도함이 한량없고,
마음은 마치 지계(地界)와 같이 인욕하여 동요하지 않으며,
근문(根門)의 어렵거나 쉬운 모양을 분별하고,
순숙(純熟)한 행으로 짐작(斟酌)하지 않음이 없으며,
낱낱이 음(陰)ㆍ지(持)ㆍ입(入)을 분별하여 색(色)ㆍ통(痛)ㆍ상(想)ㆍ행(行)ㆍ식(識)을 행하고,
안의 6정(情)을 관하고 밖의 6진(塵)을 버리며,
눈이 빛깔을 보아도 안식(眼識)을 일으키지 않나니,
바깥의 빛깔과 안의 식[內識]은 모두 다 허무(虛無)한 줄 분명히 알거늘 빛깔이 무엇을 위하여 안식이 있게 되겠느냐?
또 귀가 소리를 들어도 이식(耳識)을 일으키지 않나니,
바깥의 소리와 안의 식은 모두 다 허무한 줄 분명히 알거늘, 소리는 무엇을 위하여 이식이 있게 되겠느냐?
또 코가 냄새를 맡아도 비식(鼻識)을 일으키지 않나니,
바깥의 냄새와 안의 식은 모두 다 허무한 줄 분명히 알거늘, 냄새는 무엇을 위하여 비식이 있게 되겠느냐?
또 혀가 맛을 알아도 설식(舌識)을 일으키지 않나니,
바깥의 맛과 안의 식은 모두 다 허무한 줄 분명히 알거늘, 맛은 무엇을 위하여 설식이 있게 되겠느냐?
또 몸이 닿임[細滑]을 알아도 안다는 생각[識想]을 일으키지 않나니,
바깥의 갱락(更樂)과 안의 식은 모두 다 허무한 줄 분명히 알거늘, 세활은 무엇을 위하여 신식(身識)이 있게 되겠느냐?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보살은 정(定)에 들어가서 낱낱이 분별하여 종류에 따라 교화하되 혹은 언교로써 하기도 하고, 혹은 신족으로써 하기도 하며 혹은 권혜(權慧)로써 하기도 하나니, 종류에 따라 들어가되 걸림이 없느니라.
[중생을 교화하는 열 가지 법]
이때에 보살은 다시 열 가지 법(法)으로써 중생을 가르치며 교화하느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첫째 혜근(慧根)이 두루 갖추어지고 정의(定意)가 어지럽지 않으며,
둘째 각의(覺意)가 견고하여 지혜를 연설하되 걸림이 없으며,
셋째 도품(道品)을 널리 펴 드날리되 의취(義趣)를 완전히 갖추며,
넷째 몸매[相]가 현묘하고 고요하며 온갖 맵시[衆好]가 빠지지 않은 것을 알며,
다섯째 도(道)와 도 아닌[非道] 것을 알아서 허무한 것인 줄 분명히 알며,
여섯째 뜻에 법륜을 숭앙하고 가르치되 게으르지 않으며,
일곱째 보살도를 행하되 자기의 몸은 돌보지 않으며,
여덟째 비록 중생을 제도한다 하더라도 제도함이 있는 것을 보지 않으며,
아홉째 안팎이 공하여[內外空] 하나요 둘이 없다는 것을 알며,
열째 신체(身體)를 분별하고 교화가 있는 것을 보지 않느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법을 두루 갖추어서 곧 모든 부처님의 국토를 돌아다니되 한 부처님 국토로부터 다른 한 부처님 국토에 이르러도 역시 모든 부처님 세존을 일찍이 여읨이 없는 것이니라.
[갖가지 총지]
보살은 모든 총지문을 생각하고 닦아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총지인가?
모든 법의 인가(印可)총지이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온갖 법에서 모든 허망한 생각을 버리느니라.
또 보광(普光)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온갖 것을 평등하게 사랑하고 뒤바뀐 생각을 품지 않느니라.
또 혜명(慧明)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청정하지 못한 국토를 청정하게 할 수 있느니라.
또 조요(照曜)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모든 어지러운 뜻에서 다 티끌의 가림[塵翳]이 없게 되느니라.
또 의변(義辯)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온갖 행을 익혀 관하고 정(定)에 들어가 동요하지 않느니라.
또 법변(法辯)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구의(句義)를 분별하되 차례를 잃지 않느니라.
또 향변(響辯)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음향을 관찰하며 종류에 따라 제도하느니라.
또 응변(應辯)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모든 것에 꼭 알맞고 온갖 행을 완전히 갖추느니라.
또 의지(意止)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진로(塵勞)와 결박(結縛)이 영원히 쉬어 일어나지 않느니라.
또 의단(意斷)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모든 법을 미세하게 살피되 역시 망설임[猶豫]이 없느니라.
또 신족(神足)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세간에서 백천 겁을 지나도록 오래 사느니라.
또 근본(根本)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근문(根門)의 흥쇠(興衰)를 분별하여 변하지 않게 되느니라.
또 역세(力勢)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금강의 몸[金剛體]을 닦아서 무너뜨릴 수 있는 이가 없느니라.
또 각의(覺意)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모든 법을 알기 쉽게 연설하여 온갖 것을 깨우치느니라.
또 도품(道品)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삼세 인연 법의 근본을 관하여 환히 아느니라.
또 정의(定意)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모든 산란한 생각[亂想]에서 도(道)를 품고 오는 까닭이니라.
또 권혜(權慧)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꼭 알맞게 하되 견줄 데 없고 역시 깨닫는 이가 없느니라.
또 보시(布施)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세 가지 일[事]이 모두 있는 바가 없는 줄 아느니라.
또 지계(持戒)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계율을 닦는 이나 깨뜨린 이를 보지 않게 되느니라.
또 인욕(忍辱)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성을 내는 것과 참는 것과 어지러운 생각을 보지 않느니라.
또 정진(精進)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정진하는 일과 게으른 것을 보지 않느니라.
또 정수(正受)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굉장히 큰 소리로 천둥이 울려도 옷의 털조차도 곤두서지 않느니라.
또 혜공(慧空)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식이 온 지혜[萬智]를 받아들여 알고 널리 연설하되 걸림이 없느니라.
또 무애(無碍)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모든 통혜(通慧)에서 걸림이 없느니라
또 광원(曠遠)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비록 백천의 몸이 되었다 하더라도 도로 합하여 하나로 만드느니라.
또 교수(敎授)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바른 법을 가르치되 말이 번거롭거나 겹치지 않느니라.
또 부사의(不思議)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아라한이나 벽지불이 미칠 바가 아니니라.
또 도수(道樹)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는 이는 세계를 장엄하되 모든 부처님을 떠나지 않느니라.
또 항마(降魔)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뜻을 지님이 견고하여 마음이 기울거나 빗나가지 않느니라.
또 용상(容相)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낱낱의 모든 상(相)에는 백천의 복이 이르느니라.
또 중호(衆好)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상호와 영락(瓔珞)이 몸을 따르는 것을 보지 않느니라.
또 광요(光曜)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백천의 광명에서 변화가 한량없는 것을 보느니라.
또 도인(度人)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비록 중생을 제도한다 하더라도 역시 제도한 것이 없느니라.
또 광혜(廣慧)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뜻이 허공과 같아 치우치거나 좁은 것이 없느니라.
또 도의(道意)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열반을 생각하지 않고 또한 유(有)에 집착하지도 않느니라.
또 멸도(滅度)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소멸이나 생기는 것이 있음을 보지 않느니라.
또 청정(淸淨)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티끌[塵埃]이 청정함으로써 다함이나 다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또 무고(無苦)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괴로움과 괴로움이 없는 것을 알므로 고제(苦諦)라 하느니라.
또 생습(生習)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습(習) 본래의 뜻[本意]과 연(緣)이 다 텅 비어 없음[虛無]을 분명히 아느니라.
또 멸진(滅盡)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습의 진로(塵勞)가 소멸하고 다시는 또한 짓지 않느니라.
또 성도(聖道)총지가 있나니, 무위(無爲)요 영원히 고요한 열반에 편히 처하느니라.
또 지관(止觀)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미묘한 법[妙法]과 흥쇠(興衰)가 향하는 바를 관하여 환히 아느니라.
또 공장(空藏)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깊은 법요에서 걸릴 것이 없느니라.
또 법관(法觀)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모든 법을 관하여 알고 모든 것이 다 주인[主]이 없음을 아느니라.
또 정성(淨聲)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입으로 하는 말이 부드러워 마치 범천(梵天)의 소리와 같으니라.
또 칭가(稱可)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사람에게 말을 하면 다 그들의 마음과 뜻에 맞느니라.
또 등의(等意)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따뜻하고 윤택하고 막힘없이 통하며 말이 걸리지 않느니라.
또 유처(遊處)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가르쳐 교계(敎誡)할 것에 손상하는 바가 없느니라.
또 위요(威曜)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대중에 있으나 역시 겁내거나 나약하지 않느니라.
또 분신(奮迅)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사자처럼 외치게[獅子吼] 되므로 날던 새도 떨어지고 달리던 짐승도 엎드리느니라.
또 계율(戒律)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온갖 깨치기 어려운 중생을 항복받느니라.
또 취도(趣道)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열반에는 일어나거나 소멸하는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아느니라.
또 법성(法性)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모든 아첨하는 사람에게 진실한 도[眞道]를 보게 하느니라.
또 식의(息意)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교만을 일으켜 사람들에게 젠 체[自大]하지 않느니라.
또 통달(通達)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그의 거룩한 지혜를 들으면 법의 가르침[法敎]을 잃지 않느니라.
또 흥경(興敬)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곧 뽐내는 마음을 버리고 모든 부처님을 받들어 섬기느니라.
또 공계(空界)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점차로 본래부터 청정하고 고요한 법계에 들어가느니라.
또 무애(無碍)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의궤(儀軌)를 통달함으로써 모든 법의 근본을 아느니라.
또 무량(無量)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옛날에 연설한 바가 역시 한이 없고 끝이 없느니라.
또 강기(强記)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문자를 분별하고 법의 취향(趣向)을 아느니라.
또 구경(究竟)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사람의 본성과 법계가 역시 청정하다는 것을 아느니라.
또 난멸(難滅)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중생은 청정하여 안팎이 텅 비고 고요하다는 것을 깨쳐 아느니라.
또 무제(無際)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본래부터 없고[本無] 본래부터 없다는 것도 또한 없는 것인 줄 아느니라.
또 영락(瓔珞)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연설한 바의 경법(經法)에 걸림이 없느니라.
또 묘요(妙要)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다한[盡] 데에서 다함이 없고 또한 다한 것을 보지도 않느니라.
또 분별(分別)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이승으로서는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니니라.
또 여래(如來)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중생이 적막한 도[寂寞道]로 나아가는 것을 깨치느니라.
또 십지(十地)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항시 머무름이 없음[無住]을 연설하고 또한 머무르는 것을 보지도 않느니라.
또 음종(陰種)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몸의 근본[身本]을 분별하여 염착(染着)을 일으키지 않느니라.
또 적막(寂寞)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비유하면 마치 부르는 소리[呼聲]에 또한 음향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또 식성(識性)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모두 잘 사유하고 문자에 집착하지 않느니라.
또 요본(了本)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언어도 없고 설명도 없고 교계(敎戒)도 없느니라.
또 문자(文字)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스스로 전생 일[宿命]을 아나니, 어디서부터 온 것임을 아느니라.
또 법륜(法輪)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뜻[意]도 없고 생각[想]도 없고 또한 신식(神識)도 없느니라.
또 감로(甘露)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강(講)하고 독송[誦]하고 설법하는 데에 역시 걸림이 없느니라.
또 심입(深入)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낱낱이 4구(句)를 분별하여 뜻[義]이 합치느니라.
또 법당(法幢)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의리(義理)를 깨달아 알고 법의 근본[法本]을 분명히 아느니라.
또 무진(無盡)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본제(本際)를 궁구하여 통달하되 권속을 여의지 않느니라.
또 등각(等覺)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언제나 한량없고 집착이 없는 정법을 항상 강론하느니라.
또 제법(諸法)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모든 법을 완미하고 익혀 차서(次緖)를 잃지 않느니라.
또 홍서(弘誓)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지혜에는 모두가 역순(逆順)이 없음을 분명히 아느니라.
또 선권(善權)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종류에 따라 알맞게 교화하되 겁약(怯弱)의 마음을 품지 않느니라.
또 도혜(道慧)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정법(頂法)을 분별하여 도무극을 닦느니라.
또 환화(幻化)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법계가 안팎의 성품[內外性]이 없음을 분별하느니라.
또 중음(中陰)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계시는 소굴에 사느니라.
또 도량(道場)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시방 세계의 국토가 금빛처럼 환히 빛나느니라.
또 항마(降魔)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온갖 외도(外道)들이 항복하지 않는 자가 없느니라.
또 자수(自守)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몸과 입과 뜻을 수호하면서도 수호함이 있는 것을 보지 않느니라.
또 설법(說法)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법의 근본[法本]을 완전히 갖추고 결루(缺漏)한 바가 없느니라.
또 자용(自用)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한량없는 중생들의 마음과 뜻을 자세히 살피느니라.
또 은근(慇懃)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방편과 연설한 바가 도검(道檢)에 들게 하느니라.
또 유화(流化)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모든 지혜를 분별하고 옛적과 지금에 집착하지 않느니라.
또 유순(柔順)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법을 받되 싫증냄이 없고 또한 성내거나 미혹됨이 없느니라.
또 진덕(進德)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모든 법의 근본에서 모두 다 있는 바가 없느니라.
또 색상(色像)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그가 현상을 본 것이 있으면 일찍이 잊어버리는 일이 없느니라.
또 성문(聲聞)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모든 법의 한량없는 것을 견주고 헤아리되 집착이 없느니라.
또 고순(苦順)총지가 있나니, 보살로서 이 총지를 얻은 이는 법의 맛[法味]을 듣고 채취하되 평등하여 둘이 없게 되느니라.”
그때에 세존께서 이 총지 법문을 연설하실 때에 12억 나술(那術)의 사람들이 모두 믿음을 다한[盡信] 불기법인(不起法忍)을 얻었으며, 다시 헤아릴 수 없는 중생들이 모두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의 뜻[無上正眞道意]을 내었다.
이때에 세존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행하는 일은 불가사의하니 이것은 아라한이나 벽지불로서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등자(等慈)삼매정의정수의 감동한 바와 위신(威神)으로 능히 그러하니라.
이 때문에 대승의 계율[大乘律]을 연설하여 바른 교화[正化]로써 인도하고 법의 옷을 입히는 것이니라.”
이때에 최승이 나아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훌륭하고 훌륭하시며 쾌히 이런 말씀을 해주셨나이다.
모든 법은 본말(本末)이 없다는 것을 익히면, 법성은 텅 비어 없고 고요한 줄 분명히 알며 낱낱이 분별하여도 모두가 텅 비고 모두 고요하니,
대승으로 연설한 바가 널리 온갖 것에 미치고 보살의 행을 들으면 목숨을 마친 뒤에는 모두가 광인(曠忍)세계에 나게 되겠습니다.”
그때에 모인 대중들이 다 망설이면서 그 부처님의 국토를 보고 싶어하자, 여래는 신감(神鑒)으로 곧 중생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아시고, 곧 신족으로써 정수리에서 광명을 내어 널리 삼천대천세계를 비추시고 그 광인의 한량없는 국토까지 미치게 하셨다.
그 광인세계에 계신 부처님의 명호는 무진(無盡)이셨고, 총지를 수순하여 지니시되 오래도록 잘 기억하여 잊지 않으셨고, 자못 특이한 법이 항시 앞에 있었으며,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겁으로부터 모든 부처님께 공양올리고 도법(道法)을 쌓고 모으셨기에 저절로 이 위없는 등정각을 얻기에 이르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10주]
“마땅히 10주(住)를 생각하며 수행해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첫째 법계를 분별하여 허무(虛無)한 것인 줄 분명히 알고,
둘째 몸은 텅 비고 고요하여 안팎이 주인이 없는 줄 알며,
셋째 4대로 깨닫는 뜻[覺意]은 의지하거나 남음이 있지 않고,
넷째 온갖 법이 멸도하는 것을 보지 않으며,
다섯째 몸ㆍ입ㆍ뜻의 행은 고요하되 머무르지 않고,
여섯째 계율[戒]을 지키되 계율도 없고 또한 계율을 깨뜨리지도 않으며,
일곱째 방일(放逸)한 행이 없고 마음을 단속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으며,
여덟째 서원으로 도(道)를 이루되 본래의 뜻[本志]을 버리지 않으며,
아홉째 부사의한 법으로써 깨치기 어려운 이를 제도하며,
열째 온갖 행이 청정하여 행하는 바가 무섭지 않느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수행할 열 가지 법의 근본이니라.
[열 가지 법의 이름]
또 보살은 다음에 열 가지 법의 이름[號]을 익혀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첫째 계율이 갖추어지고 청정하여 방일한 행이 없고,
둘째 듣고 은혜를 베풂으로써 법계를 무너뜨리지 않으며,
셋째 음(陰)ㆍ입(入)을 분별하여 텅 비고 고요한 것인 줄 분명히 알고,
넷째 네 가지 비상(非常)은 모두 다 닳아 없어지는 데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며,
다섯째 18난(難)으로 음(陰)ㆍ지(持)ㆍ입(入)의 병(病)을 알고,
여섯째 서원을 두루 갖추고, 일곱째 모든 부처님께서 칭찬을 더하시며,
일곱째 아직 근(根)을 세우지 못한 중생에게 무위(無爲)에 편안히 있게 하고,
여덟째 보살이 선정에 들어가면 어지럽게 할 수 있는 이가 없으며,
아홉째 안팎의 모든 행을 두루 관하고,
열째 몸은 본래부터 스스로 나고 없어지는[生滅] 모양이라고 관하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법을 생각하고 수행하여 곧 스스로 최정각(最正覺)을 이루기에 이르는 것이니라.
[갖가지 삼매]
또 보살은 다시 정(定)의 정수삼매를 익혀야 하느니라. 이른바 삼매라 함은 등관(等觀)삼매이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혜관(慧觀)을 건립하여 방일하지 않게 되느니라.
또 섭의(攝意)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온갖 번뇌[結]를 능히 다잡아 속박되거나 집착하지 않게 하느니라.
또 호계(護戒)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몸ㆍ입ㆍ뜻을 수호하여 진로(塵勞)가 생기지 않느니라.
또 평등(平等)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뜻이 마치 허공과 같아서, 두 생각[二想]을 일으키지 않느니라.
또 대보(大寶)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7각의(覺意)의 다함 없는 보배를 연설하느니라.
또 도수(道樹)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도(道)의 꽃이 활짝 피어 보는 이마다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느니라.
또 해량(海量)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이승으로서는 어림쳐서 헤아릴 것이 아니니라.
또 입실(入室)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깊고 고요한 법장(法藏)을 짐작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또 월광(月光)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널리 모든 부처님께로 오가면서 돌아다니고 노니느니라.
또 월명(月明)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두루 온갖 것에 비추어 광명을 받지 않음이 없게 하느니라.
또 현감(玄鑒)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삼세를 분명히 알아 일어나거나 소멸하는 법이 없느니라.
또 무증애(無憎愛)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원수를 평등하게 보는 것이 마치 갓난아이같이 보느니라.
또 대애(大哀)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모든 중생들 보기를 마치 아버지와 같고 어머니와 같이 보느니라.
또 비자(悲慈)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모든 중생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것이 비오듯 하느니라.
또 민애(愍哀)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또한 나[吾我]와 사람[人]과 수명(壽命)이 없느니라.
또 무상(無想)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곧 위없는 법륜을 능히 굴리느니라.
또 행고(行苦)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아승기겁(阿僧祇劫) 동안에 쌓은 그 공이 헛되지 않느니라.
또 건력혜계(建力慧戒)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나의 청정한 행을 보지 않느니라.
또 이신(離身)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계박(繫縛)을 여의고 버리되 또한 계율을 깨뜨리지도 않느니라.
또 오아(吾我)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저 언덕[彼岸]에 대하여 또한 물들거나 집착함이 없느니라.
또 현통(玄通)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법을 말하고 인욕하되 고요하거나 고요하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또 청백(淸白)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맑고 깨끗한 행을 사유하고 분별하느니라.
또 상응(相應)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상응한 법을 함께하나 일어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의 정수삼매이니라.
다른 지방의 모든 부처님 국토에 가 노닐고 모든 부처님 세존을 받들어 섬기고 공양올리되 또한 두려워하지도 않고 어려워하는 바도 없느니라.
설령 몸이 무너져 그 가운데서 목숨을 마치며 마디마다 갈갈이 찢어진다 하여도,
스스로가 그의 몸은 풀이나 나무나 담이나 벽과 같은 것이라고 관하여,
물들거나 집착을 일으키지 않고 인욕을 행하며,
나쁜 말을 들어도 근심하지 않고,
비록 즐거움을 만난다 하더라도 역시 기뻐하지 않으며,
그 언교를 찾아보아도 또한 처소가 없고,
말한 바도 역시 본말이 없는 것이라고 깨달아 알며,
본래 없다[本無]는 그 마음조차도 다 진실이 없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의 청정한 정의[淸淨定意]이니라.
그는 비록 어지러운 마음이나 마음에 맺힌 바가 없다 하더라도 또한 이것에도 있지 않고 또 저것에도 있지 않으며, 안팎의 법에서 모두 다 청정하나니,
이 같은 관(觀)으로써 인욕을 삼느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몸과 입과 뜻이 청정하며 혜인(慧忍)을 건립하는 것이니라.
또 최승아, 보살마하살은 다시 정진의 정의(定意)를 수행하여 모든 선한 법을 자라게 하고 새어 없어지는 바가 없으며,
그 법계를 관하되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으며, 무루의 혜관(慧觀)으로써 법의 주장[法御]을 삼아야 하느니라.
다시 사유하고 관찰하되 세간의 법에 의지하면,
모든 법은 성취하는 것이 있고 성취하지 못하는 것을 보지 않으며,
바른 진리와 뒤바뀐 것도 보지 않고 따르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며, 또한 거취(去就)도 없나니,
이것이 바로 모든 보살마하살의 값진 보배가 쌓인 다함 없는 창고[藏]여서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법이 어디에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보지 않으며,
와도 또한 처소가 없고 가도 또한 자취가 없느니라.
현성의 8도(道)는 모든 법의 으뜸[首]이며 낱낱이 현성의 4제를 분별하여 뒤바뀌고 허망한 생각의 행을 버리고 여의며,
사람들을 위하여 설법하되 막히는 바가 없고, 중생은 공허하여 진실이 없는 줄 분명히 알며,
모든 법을 미루어 찾아도 역시 얻을 수 없느니라.
그렇게 된 까닭은 법과 법이 서로 생기고 법과 법이 서로 소멸하기 때문이니라.
사람은 법을 여의지 못하고 법도 사람을 여의지 못하며,
사람은 스스로 공허하여 고요하고 법도 역시 공허하여 고요하며,
마치 사람이 자연(自然)인 것처럼 법도 역시 자연이며,
자연인 줄 알아야 비로소 위없는 바르고 참된 행[無上正眞行]과 상응하여 곧 부처님 법의 다함 없는 행을 체득하느니라.
그 어떤 이가 법을 구할 적에, 만일 구한 것으로써 바야흐로 구하게 된다면 삼세에 집착도 없고 더러움에 물드는 일도 없으며, 그로써 구하는 것이요,
이것을 구하고 나면 역시 얻는 바도 없고 또한 잃는 바도 없나니,
이것이 바로 최승아, 보살마하살이 미묘한 지혜로 정진하는 행을 건립하는 것이니라.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은 다시 선정(禪定)의 행으로 정수삼매를 사유해야 하나니,
법은 계를 깨뜨리지 않고 또한 둘이라고 보지도 않으며,
또한 성취하지도 않고 성취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선정에 대하여 정수(正受)로써 모든 정(定)에서 어지러운 생각[亂想]을 일으키지 않으며,
모든 법에서 생각하는 것도 없고 또한 놓아 버리는 것도 없으며,
안팎은 모두 다 주인[主]이 없다고 환히 아느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의 한 뜻의 정수[一意正受]이며 선정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니라.
또 다시 합하여 모인 것도 보지 않고 모든 경계를 버리되 버리거나 여읜 것도 없으며,
행하되 선정에 집착하는 것도 없고 뜻은 어려움이 없는 데로 나아가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법을 세우지도 않고 법을 여의지도 않으며,
언제나 하나의 뜻으로써 모든 법이 자연(自然)인 것이니라.
그러므로 모든 법을 환히 알아 나고 없어진다는 생각[生滅想]이 없으며,
몸도 아니요 마음으로 헤아릴 수 있는 바도 아니며,
정의(定意)를 사유하되 평등하여 둘이 없고 뜻하는 성품[志性]이 향하는 바에 상응하고 상응하지 않는 것도 없고 또한 상응한 것도 보지 않는 것이니라.
12인연의 근본을 분별하되 행(行)이 연(緣)이 되어 치(癡)가 있고,
치가 연이 되어 식(識)이 있으며,
식이 연이 되어 명색(名色)이 있고,
명색이 연이 되어 6입(入)이 있으며,
6입이 연이 되어 갱락(更樂)이 있고,
갱락이 연이 되어 유(有)가 있으며,
유가 연이 되어 애(愛)가 있고,
애가 연이 되어 수(受)가 있으며,
수가 연이 되어 생(生)이 있고,
생이 연이 되어 사(死)와 수우고뇌(愁憂苦惱)가 있어 헤아릴 수 없나니,
요점을 들어 말하면 다섯 가지 성음의 몸[五盛陰身]은 위태하고 무른 형상이라 오래도록 보존할 수 없느니라.
보살은 이때에 평등하고 본래부터 없음[本無]을 행하며,
색(色)ㆍ통(痛)ㆍ상(想)ㆍ행(行)ㆍ식(識)을 분별하되 모두 다 텅 비고 고요한 것인 줄 분명히 알며,
다시 정수(正受)로써 본래 청정한 법에 대하여 역시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고,
또한 색(色)과 색을 알고 색이 없다는 것도 보지 않고 온갖 뒤바뀐 행을 제도하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의 선정일의(禪定一意)로 이것은 아라한이나 벽지불로서는 미칠 바가 아니니라.
외도가 다섯 가지 신통으로 비록 한량없이 산다 하더라도 신족을 잃음을 말미암아 구경(究竟)에는 이르지 못하거니와,
선정을 닦는 사람의 정수삼매는 한 겁 동안 살고 다시 한 겁을 더 사는 것은 어렵지 않으며,
선정을 얻음으로써 지혜 위에 뛰어나서 진로(塵勞)를 버리고 허망한 소견을 일으키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도에 뜻을 두고 원하는 것이며,
중생을 깨우치고 교화하되 형상을 따라 알맞게 하고 병을 따라 약을 주는 것이니라.
다시 공한 성품의 혜관(慧觀)으로써 등자삼매에 들어가 두루 삼천대천세계를 관하여 차츰차츰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모든 부처님 국토에 이르러 제도해야 할 중생을 모두 다 해탈하게 하나니,
이것은 곧 여래의 선정 정수이며 모든 사람들까지 멸도에 이르게 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등자정의(等慈定意)를 세우는 것으로 제도하는 바가 한량없고 헤아릴 수도 없느니라.
최승아, 이것이 여래의 신덕(神德)은 아스라하게 높음이 이와 같다고 하는 것이니라.
[법을 관하다]
법을 관찰하려 하면 마땅히 혜안(慧眼)으로써 해야 하나니,
또한 육안(肉眼)도 아니고 또한 천안(天眼)도 아니며,
또한 아라한이나 벽지불이 볼 바도 아니니라.
모든 법을 관함으로써 모든 법이 고요한 줄 알고 모든 법이 청정한 줄 알며,
모든 법이 텅 빈 것인 줄 알고 모든 법이 안정한 줄 아니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의 한이 없고 수량 없는 큰 서원의 마음이며,
행도 없고 처소도 없고 또한 들어가는 바도 없는 모든 법의 적연(寂然)한 것이고,
정(定)에 든 이만이 익힐 바요 산란한 이로서 행할 바가 아니니라.
모든 법을 널리 관하되 모두 다 그와 같이 하나니, 이와 같이 관하는 것이 바로 법관(法觀)이니라.
법관의 보살은 모든 법의 귀착하는 바를 보지 않고, 그는 법을 관함이 있으나 도량을 궐(闕)하여 구경에 이르지 못하고, 정법으로써는 정의(定意)를 이루지 못한다는 이러한 종류는 분별하지 않느니라.
보살은 마땅히 허망한 소견을 제거하여 구하는 것도 없고 취하는 것도 없으며,
또한 멋대로 바꾸어 중대한 복[重福]을 받기를 바라지도 않아야 하며,
안팎의 법은 모두 다 텅 비고 고요한 것인 줄 아느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등자삼매에 들어가서 모든 법이 다 있는 바가 없다고 관하여 아는 것이니,
그로써 있는 바가 없어야 법을 본다[見法]고 이름하느니라.
법을 본다고 함은 아(我)도 없고 인(人)도 없고 수명(壽命)도 없는 것으로,
이 모두는 임시로 붙인 이름이요 진실한 법이 아니며,
유위(有爲)의 법이요 무위(無爲)의 경계가 아니니,
무위의 경계는 유위의 법이 아니니라.
보살은 유위ㆍ무위와 유루ㆍ무루와 상(常)ㆍ비상(非常)과, 아ㆍ인ㆍ수명이 모두 다 있는 바가 없는 줄 이해하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정의(定意)란 생멸이 없는 법[無生滅法]임을 분별하는 것이니라.
가령 보살이 모든 법의 모양을 관하되, 온갖 모양은 텅 비고 고요하여 둘이 없는 줄 알고 또한 둘을 보지도 않으며, 둘과 둘이 없는 것을 알아야 곧 정의(定意)에 상응하나니,
뒤바뀐 법에 대하여 아무것도 없는 줄 알고,
바른 것이 있어서 도(道)에 향한다고도 보지 않고,
삿된 것이 있어서 모든 소견을 향하게 된다고도 보지 않으며,
대개 중생의 한량없는 지혜에서 모두가 대애(大哀)를 일으켜 부처님의 경계를 청정하게 하고 부처님의 국토를 청정하게 하며,
한 부처님 국토로부터 한 부처님 국토에 이르러 모든 부처님 세존을 받들어 섬기고 공양올리느니라.
또 신통과 밝은 지혜의 관(觀)으로써 삼천대천세계를 널리 살피되,
어떤 중생이 모든 근(根)이 순수하게 성숙하였으나 성현을 만나지 못하여 3도(途)에 떨어져 있으면, 이때에 보살은 반드시 머물러 구제하여 조락(彫落)하지 않게 하느니라.
혹은 또 이때에 보살 달사(達士)는 중생을 제도하고 겸하여 다시 인연을 짓되 두루 돌아다니고 오가며 그 공(功)이 헛되지 않게 하기도 하며,
손가락을 튀기는 동안에 백천의 정수정의(正受定意)에 노닐면서 혜관(慧觀)을 세워 모든 공덕을 닦느니라.
[바라밀]
만일 보시를 행할 때면 하늘과 사람의 근본을 헤아리되,
또한 보시한 것도 없고 세 가지 일[事]이 모두 다 있는 바가 없다고 아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보살이 보시에 상응한다고 하느니라.
만일 또 보살이 계율[律]로써 가르치고 타이르되 계를 범하고 율을 금한다는 것도 있는 바가 없는 줄 알고 계와 계가 아닌 것도 없어야 비로소 계에 상응하느니라.
혹은 또 보살이 항시 인욕을 행하되 인욕을 행한 이를 보면 그를 대신하여 기뻐하고,
설령 성을 낸 이를 만난다 하여도 근심 걱정을 품지 않으며,
성냄이나 인욕이 다 있는 바가 없어서 또한 하나, 둘이거나 백천에 이르거나 하는 것도 아니니,
인욕과 인욕이 없는 것을 알아야 비로소 인욕에 상응하느니라.
또 보살은 언제나 정진을 행하되 기뻐하고, 설령 게으른 이를 만난다 하여도 원망하지 않으며,
게으름과 정진은 하나요 둘이 아니고 또한 둘이 있지도 않으며,
또한 정진이 있지도 않고 또한 게으름이 있지도 않는 줄 아나니,
정진과 게으름은 텅 비고 고요한 줄 알아야 비로소 정진에 상응하느니라.
또 보살은 다니거나 앉거나 간에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선정정수(禪定正受)에 일찍이 이지러지는 일이 없으며,
하늘에서 천둥을 치고 땅이 진동하여 온갖 음향이 한꺼번에 일어난다 하여도 마음을 오로지 한곳으로만 쓰는지라 보살의 마음을 바꾸거나 동요시킬 수 있는 것은 없으며,
안정과 산란은 다 있는 바가 없다고 아나니,
정(定)과 정이 없는 것을 알아야 비로소 정의(定意)에 상응하느니라.
또 보살은 지혜가 윤택함으로써 바로 많은 사람에 미치게 하고 온갖 기틀[萬機]을 거두어들여 알맞게 함이 방소가 없으며,
거침없이 통달하여 연설하되 부처님의 가르침을 훼방하지 않고,
평등한 혜관(慧觀)으로 어진 이와 어리석은 이를 보지 않으며,
지혜가 있고 지혜가 없는 것과, 어리석고 미혹된 것은 모두 있는 바가 없는 줄 알며,
또한 있는 것도 보지 않고 없는 것도 보지 않으며,
있고 없는 것이 다 텅 비어 공하고 고요하여 둘이 없다고 아나니,
이것을 바로 보살이 지혜에 상응한다 하느니라.
이와 같이 모든 법의 모양은 청정하여 또한 모양을 보지도 않고 모양이 있지 않은 것도 아니며,
모양이나 모양이 없는 줄 알아야 비로소 상호를 이루고 중생을 제도하여 무위의 언덕[無爲岸]에 이르느니라.
또 보살은 다시 공정(空定)에 들어가 허공계에 노닐되 낱낱이 허공계의 중생을 분별하여,
혹은 언교로써, 혹은 신족으로써, 혹은 광명의 모양으로써, 혹은 고행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널리 그 중생으로 하여금 도검(道檢)에 들 수 있게 하느니라.
또 보살은 무상(無相)의 법을 행하되 모양에 대한 집착과 뒤바뀐 행을 제거하며,
다시 다른 지방의 모든 부처님 국토에 노닐 적에도 항시 무상하여 변하거나 바뀌지 않는 법으로써 중생을 가르치고 교화하여 널리 무위(無爲)에 이르게 하느니라.
또 보살은 무원(無願)을 행하되 삼계(三界)에서 유(有)를 받는 과보를 구하지 않으며,
사람을 의지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상호에 집착하지도 않으며,
안팎의 5음의 성패(成敗)로서의 색ㆍ통ㆍ상ㆍ행ㆍ식과 외진(外塵)ㆍ내입(內入)을 분별하되, 낱낱이 텅 비어서 진실하지 않다는 것을 분별하느니라.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보살 대사는 큰 서원을 일으켜 중생들을 제도하되 제도함이 있는 것을 보지 않나니,
오히려 중생조차도 없거든 하물며 제도하는 이가 있겠느냐?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등자정의(等慈定意)를 건립하여 널리 중생으로 하여금 혜근(慧根)을 체득하게 하는 것이니라.”
그때에 세존께서 이 등자품(等慈品)을 말씀하실 때에, 14나술(那術)의 사람들이 모두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의 뜻을 내었으며, 8천의 보살이 곧 그 자리에서 등자삼매를 체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