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도론 1권
4.7. 제4선
181. 그가 제3선으로부터 출정하여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면서 禪의 구성요소들을 반조할 때 행복이 거칠게 나타나고 평온한 느낌과 마음의 하나됨이 고요하게 나타나면,
그 거친 구성요소를 버리고 고요한 구성요소를 얻기 위하여 바로 그 표상에 대해 ‘빠타위(땅), 빠타위’하면서 계속해서 마음에 잡도리한다.
그러면 ‘막 제4선이 일어나려는’ [그 순간에] 잠재의식을 끊고 그 땅의 까시나를 대상으로 의문전향이 일어난다.
그 다음에 그 대상에 네 번 혹은 다섯 번 속행이 일어난다.
그들 가운데 마지막 하나가 색계의 속행이고 제4선에 속한다.
나머지는 이미 그 종류를 설했고 욕계의 것이다.(§74)
182. 그러나 이것이 차이점이다.
행복한 느낌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서 반복하는 조건으로 조건이 되지 않는다.
제4선에서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반드시 일어난다.
그러므로 그 [속행의 마음]들이 평온한 느낌과 결합한다.
오직 평온과 결합하기 때문에 여기서 희열이 사라진다.
183. 이때에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소멸하였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 제4선에 들어 머문다.(Mbh.245)”
이와 같이 그는 하나의 구성요소를 버렸고, 두 가지 구성요소들을 가지며, 세 가지로 좋고, 열 가지 특징을 가지고,
땅의 까시나를 가진 제4선을 얻는다.
184.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육체적인 행복과 육체적인 괴로움을 버리고,
‘그 이전에 이미’: 제4선의 순간이 아닌, 그 이전에 반드시.
‘기쁨과 슬픔을 소멸하였으므로’: 정신적인 행복과 정신적인 괴로움이라는 이 둘을 그 이전에 이미 소멸하였으므로, 버렸으므로.
185. 언제 그들을 버리는가?
네 가지 禪들에 근접하는 순간에 버린다.
기쁨은 제4선의 근접순간에 버려진다.
괴로움과 슬픔과 행복은 각각 초선과 제2선과 제3선의 근접순간에 버려진다.
이와 같이 이들을 버리는 순서대로 설하지는 않았지만 「인드리야 위방가(根分別)」(Vbh.122)에서 기능(根)들의 개요를 설한 순서에 따라 여기서 설한 행복과 괴로움과 기쁨과 슬픔의 버림을 알아야 한다.
186. [이와 같이 물을지도 모른다.]
‘만약 이들이 오직 각각의 禪의 근접순간에 버려진다면 왜 [아래의 인용문에서 말하기를] 오직 그 禪에서 소멸한다고 했는가? 즉,
“일어난 괴로움의 기능은 어디서 남김없이 소멸하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있고 … 초선(初禪)에 들어 머문다.
일어난 괴로움의 기능은 여기서 남김없이 소멸한다.
일어난 정신적 고통의 기능은 어디서 [남김없이 소멸하는가?
… 제2선에서] … 일어난 즐거움의 기능은 어디서 [남김없이 소멸하는가?
… 제3선에서] … 일어난 기쁨의 기능은 어디서 남김없이 소멸하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소멸하였으므로 … 제4선에 들어 머문다.
일어난 기쁨의 기능은 여기서 남김없이 소멸한다.(S.v.213-15)”라고.’[대답한다.] 완전한(atisaya) 소멸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초선 등에서 완전히 소멸하기 때문이다. 근접의 순간에도 소멸하지만 완전히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187. 여러 가지 전향을 가진 초선의 근접에서 비록 괴로움의 기능이 소멸했다하더라도 파리와 모기 등에게 물리거나 혹은 불편한 자리로 인한 피로로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본삼매에서는 그렇지 않다. 혹은 근접삼매에서 그들이 소멸했다하더라도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다. 반대의 [기능인 행복에] 의해 파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삼매에서는 희열의 충만으로 온 몸이 행복에 흠뻑 젖어있다. 온 몸이 행복에 흠뻑 젖어있는 사람에게 괴로움의 기능은 완전히 소멸한다. 반대의 [기능에 의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188. 여러 가지 전향을 가진 제2선의 근접에서 정신적 고통의 기능을 버렸다하더라도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조건으로 몸이 피로하거나 마음이 상할 때 정신적 고통의 기능이 일어난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을 때 그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있는 곳에서는 그것은 일어난다. 제2선의 근접에서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은 가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곳에서는 다시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2선에서는 그렇지 않다. 조건이 버려졌기 때문이다.
189. 마찬가지로 제3선의 근접에서 즐거움의 기능을 버렸더라도 희열과 [함께한 마음에서] 생긴 수승한 물질로 충만한 몸을 가진 사람에게 즐거움의 기능은 다시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3선에서는 그렇지 않다. 제3선에서는 행복의 조건인 희열이 완전히 소멸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제4선의 근접에서 기쁨의 기능을 버렸더라도 가깝기 때문에, 또 본삼매를 얻은 평온이 없어 완전하게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기쁨의 기능은] 다시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4선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일어난 괴로움의 기능이 여기서 남김없이 소멸한다고 각각의 경우에 ‘남김없이(aparisesaṁ)’라는단어를사용했다.
190. 이와 같이 물을지도 모른다.
‘만약 각 禪의 근접에서 이 느낌들이 버려진다면 무슨 이유로 여기 [제4선에] 모아놓았는가?’라고.
[대답한다.]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라는 것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말한다. 그것은 미세하여 알기 어렵고, 쉽게 이해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사나운 황소를 바로 잡을 수 없을 때 그 소를 쉽게 잡기 위해 목동은 모든 소를 우리 속에 몰아넣은 뒤 한 마리씩 내 보내면서 그 황소의 차례가 되면
‘이놈이다. 이놈을 잡아라.’고 소리치면서 그것을 잡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세존께서도 알기 쉽게 하기 위해 [다섯 가지] 느낌을 모두 [여기에] 모아놓으셨다.
이와 같이 모아놓은 느낌들을 보이신 뒤.
‘행복도 아니고, 괴로움도 아니고, 기쁨도 아니고, 슬픔도 아닌, 이것이 바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고 파악할 수 있게 하셨다.
191. 그리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마음의 해탈(心解脫)의 조건을 보이시기 위해서 이 느낌들을 설하셨다고 알아야 한다. 괴로움을 버림 등이 이것의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마음의 해탈을 얻기 위한 네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도반이여, 여기 비구가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소멸하였으므로 … 제4선에 들어 머뭅니다.
도반이여, 이들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마음의 해탈을 얻기 위한 네 가지 조건입니다.(M.i.296)”
192. 혹은 유시견 등은 그 이전의 도에서 이미 버렸지만 세 번째 도(불환도)를 찬탄하기 위해 그곳에서 버렸다고 언급했다.(§155)
이와 같이 이 제4선을 찬탄하기 그들을 여기서 언급했다고 알아야 한다.
혹은 조건을 없애버렸기 때문에 여기 [제4선에서] 탐욕과 성냄을 아주 멀리 여의었음을 보이기 위해 이들을 설했다고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서 행복은 기쁨에서 조건이 되고, 기쁨은 탐욕에게, 괴로움은 슬픔에게, 슬픔은 성냄에게 조건이 된다.
행복 들을 없애 버려서 제4선에서 탐욕과 성냄이 그 조건과 함께 멸했기 때문에 멀리 여의었다고 한 것이다.
193.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괴로움이 없기 때문에 괴롭지 않음(adukkha)이고, 즐거움이 없기 때문에 즐겁지 않음(asukha)이다.
이 단어로 괴로움과 즐거움(행복)의 반대인 세 번째 느낌을 나타낸다.
[이 술어는] 단지 괴로움과 즐거움(행복)이 없는 것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세 번째 느낌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은 평온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원하거나 원하지 않음의 반대인 [중립인데, 대상을] 경험하는 특징을 가진다.
중립적인 역할을 한다. 분명하지 않음으로 나타난다. 즐거움(행복)의 소멸이 가까운 원인이라고 알아야 한다.
194.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
평온에서 생긴 마음챙김의 청정함. 이 禪에서 마음챙김은 지극히 청정하다.
이 마음챙김의 청정함은 평온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고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이라고 했다.
『위방가』에서도 설하셨다.
“이 마음챙김은 평온 때문에 맑고 청정하고 깨끗해졌기 때문에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하다’고 한다.(Vbh.261)”
여기서 마음챙김을 청정하게 하는 그 평온은 뜻으로는 중립(tatra-majjhattatā)의 [마음부수]라고 알아야 한다.
그것은 오직 마음챙김만 청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모든 법들을 청정하게 한다.
그러나 마음챙김을 상수(上首)로 하여 가르침을 설했다.
195. 물론 평온은 낮은 세 가지 禪 가운데에도 있다.
그러나 마치 낮에도 초승달은 있지만 태양의 빛으로 가려져있고, 부드러운 것으로도 자신과 동류이고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것으로도 자신과 동류인 밤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청정하지 않고 깨끗하지 않는 것처럼,
중립인 평온의 초승달도 일으킨 생각 등의 자신과 반대가 되는 법들의 빛에 가려져있고,
자신과 동류인 평온한 느낌이라는 밤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초선 등의 분류에서도 있지만 청정하지 않다. 그것이 청정하지 않기 때문에 낮에 청정하지 않은 초승달의 빛처럼 함께 생긴 마음챙김 등도 청정하지 않다.
그러므로 그 [처음의 세 禪] 가운데 어느 하나도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하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으킨 생각 등의 자신과 반대되는 법들의 빛에 가리지 않고, 자신과 동류인 평온한 느낌이라는 밤을 얻었기 때문에 이 중립인 평온의 초승달은 지극히 청정하다.
이것이 청정하기 때문에 청정한 달빛처럼 함께 생긴 마음챙김 등도 청정하고 깨끗하다.
그러므로 오직 이 [제4선을]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하다’고 설했다고 알아야 한다.
196. ‘제4’:
숫자의 순서에 따라서 제4(네 번째)라 했고, 이것은 ‘네 번째에 증득한다’고 해서 제4라 한다.
197. ‘하나의 구성요소를 버렸고, 두 가지 구성요소들을 가지며’:
여기서 기쁨을 버림이 하나의 구성요소를 버림이라고 알아야 한다.
이 기쁨은 한 인식과정 이전의 속행인 근접에서 버려진다.
그러므로 이것은 ‘버려진 구성요소’라고 한다. 평온한 느낌과 마음의 하나됨이라는 이 두 가지가 일어남이 두 가지 구성요소를 가짐이라고 알아야 한다.
나머지 초선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이것이 넷으로 분류한 禪(사종선)에 대한 설명이다.
180. 이와 같이 이것을 얻었을 때에도 앞서 설한 방법대로 다섯 가지 자유자재를 얻은 뒤 익숙한 제3선으로부터 출정한다.
이 증득(等至)은 희열이라는 적과 가깝기 때문에 또 행복이 거칠기 때문에 구성요소가 힘이 없다고 거기서 결정을 본다.
“행복이라는 그곳에 있는 마음의 현상은 거칠게 나타난다.(D.i.37)”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제4선을 고요하다고 마음에 잡도리하여 제3선에 대한 집착을 종식시킨 뒤 제4선을 얻기 위해 수행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