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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센구미(新選組) 는 바쿠마츠(幕末) 수도 교토의 치안을 담당한 '막부의 국가경찰조직' 이라고 할수 있는데,
당시 일본은 1853년 메튜 페리제독의 쿠로후네의 출현과 '일미화친조약日米和親条約 니치베이 와신 죠야쿠) 또는 '카나가와 조약(神奈川条約)' 과 몇 년후의 미국과의 '일미수호통상조약(日米修好通商条約(니치베이 슈코 츄쇼 죠야쿠, 해리스 조약)' 을 맺으면서 외국에 무기력한 막부에 대항하는 세력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들 중 '손노조이(尊皇攘夷)' 의 기치를 내걸고 일어선 토바쿠하(倒幕派) 가 있었는데(반면 아이즈번 등에는 사바쿠하(佐幕派 에도 말기, 막부의 존손을 지지한 파. 신센구미도 좌막파) 도 존재했다.), 이 손노조이를 내건 급진세력들이 조정의 수도였던 교토에서 살인과 폭력 등을 일삼기 시작했다.
이에 1863년 도쿠가와 바쿠후는 이런 움직임을 저지할 목적으로 명목상의 지휘자로 마츠다이라 타다토시의 지휘 아래에 실제로는 키요카와 하치로(淸河 八郞) 가 이끄는 234 명의 로닌으로 구성된 '로시구미(浪士組)' 를 조직한다.
로시구미(浪士組) 의 공식적인 임무는 교토로 가는 도쿠가와 바쿠후 제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德川 家茂 1846-1866) 의 보호에 있었는데, 이 로시구미(i浪士組) 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도쿠가와 정부에서 지원을 했다. 하지만 키요카와 하치로의 속셈은 단지 덴노를 위해 일할 로닌을 모집하는 것이었고, 그는 이를 교토에 도착해서 밝힌다.
바쿠후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려 했던 곤도 이사미 무리들은 속은 것.
기요카와와 로시구미 일행은 곧 에도로 귀환하는데, 이에 세리자와 카모, 곤도 이사미(13명) 등 24명의 무사들은 쇼군을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교토에 잔류한다.
신토쿠지(新德寺)
키요카와 하치로(淸河 八郞) 가 에도에서 '로시구미(浪士組)' 이끌고 교토에 도착하여 머문 곳.
신토쿠지(新德寺)
키요카와 하치로(淸河 八郞) 가 에도에서 '로시구미(浪士組)' 이끌고 교토에 도착하여 머문 곳.
1863년 2월 23일, 교토에 도착한 세리자와 카모(芹沢 鴨) 와 그의 부대원들은 야기 겐노조(八木 源之丞 応迅) 의 저택에 머물고, 곤도 이사미(近藤 勇) 와 그의 부대원들은 마에카와 쇼지(旧前川邸) 의 저택에 머문다(후에 이곳에서 야마나기 케이스케(山南 敬助) 가 셋푸쿠(切腹_ 를 행한다).
2월 24일, 키요카와 하치로(淸河 八郞) 는 신센구미를 이 곳 신토쿠지(新徳寺) 로 소집한다.
교토에 남은 신센구미 조원들은 처음에는 그들이 주둔한 중앙 교토의 교외지역인 미부마을의 이름을 따서 '미부의 로닌' 이란 뜻으로 '미부로시구미(壬生浪士組 또는 미부로시壬生浪士, 세이추로시구미精忠浪士組 라고도 함)' 또는 '미부로(壬生浪)' 를 설립하게 되고, 다른 로닌들은 에도로 돌아가 쇼나이한(庄內藩) 의 지원 아래 신쵸구미(新徴組) 를 설립한다.
미부로(壬生浪) 는 처음에는 교토 사람들에게 웃음거리로 여겨졌으나 교토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유신지사(維新志士) 들을 베어, 그 명성은 곧 퇴색되었지만,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미부의 늑대들(壬生狼 발음은 같은 미부로)' 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이들 신센구미(이때는 미부로壬生浪) 는 막부말기의 혼란 속에서 정작 활동한 기간이, 결성에서 부터 히지카타 토시조의 죽음까지 불과 6년에 불과하다.
신센구미가 교토의 미부데라(壬生寺) 에 주둔하고 있을 당시 본부로 사용한
마에카와 쇼지의 저택(旧前川邸) 입구
신센구미가 교토의 미부데라(壬生寺) 에 주둔하고 있을 당시 본부로 사용한
마에카와 쇼지의 저택(旧前川邸).
신센구미 훈련장소로 사용되었던 미부데라(壬生寺)
이곳의 묘지에 미부로(壬生浪) 의 대원들이 묻혀있다.
'니시 혼간지(西本願寺)'
1864년, 신센구미(新選組) 는 이곳 '니시 혼간지(西本願寺)' 로 본부를 옮긴다.
신센구미(新選組) 는 "새로 조직된 부대" 라는 뜻으로, 신센구미의 최초의 지휘자는 세리자와 카모(芹沢 鴨) 와 곤도 이사미(近藤 勇), 그리고 니이미 니시키(新見錦) 였다.
1863년 6월, 세리자와 파와 곤도 파의 경쟁으로 이 두명이 신센구미의 국장이 되었다. 4월에 니이미 니시키도 국장이 되었으니 이는 잠정적인 조치였다.
신센구미의 오리지날 멤버 세리자와 카모(芹沢 鴨) 피규어.
곤도 이사미(近藤 勇 1834-1868)
다음은 초창기 신센구미 간부 조직도
세리자와 무리: 세리자와 카모(芹沢 鴨), 니이미 니시키(新見錦), 히라야마 고로(平山 五郞)
히라마 쥬스케(平間 重助), 노구치 켄지(野口 健司), 아라야 신고로()
사에키 마타사부로(佐伯 又三郞)
콘도 무리: 콘도 이사미(近藤 勇). 히지카타 토시조(土方 歳三), 이노우에 겐자부로(井上 源三郞),
오키타 소지(沖田 総司), 나가쿠라 신파치(永倉 新八), 사이토 하지메(齊藤 一)
하라다 사노스케(原田 左之助), 토도 헤이스케(藤堂 平助), 야마나미 케이스케(山南 敬助)
토노우치 무리: 토노우치 요시오, 이에사조 츠구오, 아비루 아이사부로, 네기시 유잔
하지만 토노우치 요시오와 그의 부대원들은 제거되고, 신센구미는 세리자와의 미토 파(水戶派) 와 곤도 이사미의 시에이칸 파(試衛館派 에도 시내에있었던 곤도집안의 검술도장), 두 파만이 남게 되는데, 이 두 무리 모두 교토 인근의 미부에 주둔한다.
이들은 도쿠가와 바쿠후의 교토수호직에 있던 아이즈한(會津藩) 번주 마츠다이라 카타모리(松平 容保) 에 서신을 보내 교토의 치안을 유지하고 도쿠가와 바쿠후에 대항하는 손노조이 파들을 탄압, 검거하고 교토의 치안을 유지하도록 허가를 해줄 것을 요구하는데, 이는 수락된다.
이 당시, 조슈는 외세배척, 즉 조이(攘夷) 를 외치며 덴노와 조정을 장악하며 바쿠후와 대립하고 있었는데,
조정을 움직여 수세기 동안의 전례를 깨고 덴노가(코메이 덴노) 나라의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나서게 한다.
이것이 바로 1863년 4월11일 공표한 오랑캐를 쫒아 내라는 "조이 지코 노 쵸쿠메이(攘夷実行の勅命) 이다.
이로 인해 바쿠후도 압박을 받게되어 외국과의 관계를 끊는다고 공표하고, 이 공문이 1863년 6월에 외국공사관으로 전달된다.
이에 조슈 진영에서는 자신들의 뜻대로 바쿠후가 움직이자 의기양양해졌고, 덴노의 칙령을 믿고 자신들의 조이(攘夷) 의 의지를 알리겠다며 오바를 하는데, 1963년 조슈의 시모노세키(下関市) 해협을 지나던 미국상선에 포격을 한다.
이 사건으로 조슈는 외국세력은 물론, 바쿠후 뿐만아니고 기회만 보고 있던 사쓰마까지 자극하게 된다.
이에 조슈와 경쟁관계에 있던 사쓰마와 바쿠후는 서로 손을 잡고 '고부갓타이(公武合體)' 를 맺고,
1863년 8월 18일, 당시 바쿠후 편이었던 아이즈한(會津藩) 과 사쓰마한(薩摩藩) 을 비롯한 고부갓타이파는 교토를 습격하여 조슈한(長州藩) 의 군대를 교토의 황실에서 몰러나게 하는데 성공하는데, 이를
'8.18 정변' 이라 하며, 이로 인해 조슈는 실각하고 조정의 세력은 사쓰마가 차지하게 된다.
이 '8.18 정변' 에 신센구미, 즉 미부로시구미의 모든 조직원이 아이즈군을 도우러 출동되었고, 조슈군을 몰아내기 위해 황실의 문들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교토에서는 정치판도에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덴노를 등에 업고 실세를 잡았던 反 도쿠가와 세력인 조슈가 물러나고, 친도쿠가와 세력인 아이즈한(會津藩) 이 떠오르게 된 것이다.
이에 미부로구시미는 그 공을 인정받아 마츠다이라 카타모리(松平 容保 아이즈한 번주) 로 부터 새로운 이름으로 "신센구미(新選組)" 라는 명칭을 받게 된다.
서서히 자신들의 이름을 알리게 되는 신센구미는 내부에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실세를 차지하려는 세리자와파와 곤도파의 갈등이었다.
그런데,
1863년 6월, 세리자와 카모(芹沢 鴨) 는 유곽 스미야(角屋) 에서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린다. 하필이면 도쿠가와 행정장관이 불만을 토로하고, 이 일에 대해 전 신센구미 대원들이 모여 대칙을 논의하게 된다.
세리자와는 인사불성이 되어 유곽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하녀들을 폭행하기 까지 했다고..-..-;;
2층의 오기노마(扇の間 부채방) 에는 아직까지 세리자와가 남긴 칼자국이 있단다.거기에다가 세리자와 카모(芹沢 鴨) 와 그의 부대원들, 그리고 니이미 니시키는 오사카에서 스모(相撲) 선수들과 싸움이 붙어 10명을 베어 죽이고, 교토에서는 자신들에게 보호비를 안준다고 비단가게인 야마토야를 불질렀다.
아이러니하게도 신센구미의 이름아래 세리자와와 니이미가 행한 무분별한 행동들은 이들이 교토에서 치안유지를 할때 오히려 사람들이 이들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고 한다.
어쨋거나이러한 세리자와의 만행을 보다 못한 당시 교토치안담당인 교토 슈고쇼쿠(京都守護職) 마츠다이라 카타모리(松平 容保) 와 신센구미의 곤도 이사미(近藤 勇), 그리고 히지카라 토시조(土方 歳三) 는 자신들의 평판과 신센구미의 존속에도 문제가 되는 사안이라, 세리자와 카모(芹沢 鴨) 를 치기로 결정한다.
1863년 10월 19일, 니이미 니시키는 스모선수들과의 싸움으로 인해 계급이 강등되고 히지카타와 야마나시는 그에게 세푸쿠(切腹) 를 강요하였다. 그로부터 2주가 안되어 세리자와는 마츠다이라 카타모리의 명령으로 곤도파에게 암살당한다.
곤도 이사미와 히치키타 토시조는 스미야(角屋) 에서 세리자와 카모와 그의 참모 히라야마 고로(平山五郞) 와 히라마 쥬스케(平間 重助) 를 위한 연회를 열고 이들을 몹시 취하게 한다.
연회가 끝나고 한밤중, 신센구미 부대원들이 세리자와가 머무는 야기 겐노조(八木 源之丞 応迅) 의 저택으로 가서 잠을 자고 있던 세리자와를 급습, 암살한다.
유곽 '스미야(角屋)' 내부세리자와 카모(芹沢 鴨) 가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린 곳.
2층의 오기노마(扇の間 부채방) 에는 아직까지 세리자와가 남긴 칼자국이 있단다.
스미야(角屋) 내부
이곳에서 사이고 타카모리(西郷 隆盛) 와 사카모토 료마(坂本 龍馬) 가 만나 상인들로부터 거사에 쓸 자금을 받곤 했단다.
스미야(角屋) 내부
야기 겐노조(八木 源之丞 応迅) 저택
세리자와 카모(芹沢 鴨) 와 그의 정부 오우메, 그리고 히라야마 고리오(平山 五郞) 가 암살 당한 곳(1863년 9월 18일).
세리자와 카모가 암살당한 방안에는 칼자국들이 남아 있다고..
세리자와 카모와 히라야마 고리오는 미부데라(壬生寺) 에 몯혀 있다고 한다.
야기 겐노조(八木 源之丞 応迅) 저택
세리자와 카모(芹沢 鴨) 와 그의 정부 오우메, 그리고 히라야마 고리오(平山 五郞) 가 암살 당한 곳(1863년 9월 18일).
세리자와 카모가 암살당한 방안에는 칼자국들이 남아 있다고..
세리자와 카모와 히라야마 고리오는 미부데라(壬生寺) 에 몯혀 있다고 한다.
미부데라(壬生寺) 에 있는 세리자와 카모의 묘
곤도파는 세리자와 일파를 숙청하고 난 뒤에 조직 명칭을 '신센구미(新選組)' 로 바꾼다.
신센구미는 당시 막부의 권력이 미치지 않고 손노파와 도바쿠(倒幕) 파의 본거지였던 교토의 치안을 담당하였으며, 그들의 일은 경찰과 같았는데, 이들은 특히 유신지사들에게 자비가 없이 극악무도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또한 극도로 엄격한 내부규율로, 할복이나 처형에 의해 희생된 대원들이 전체 사망자의 절반을 차지했다고한다.
그리고
이들 신센구미(新選組) 의 이름을 교토 전역에 떨치게 되는 사건인 '이케다야 지켄(池田屋事件)' 가 일어난다.
에도시대 말기, 교토는 손노조이(尊皇攘夷) 를 외치며 서양오랑캐들을 몰아내자는 급진적인 사고를 가진 로닌들, 특히 조슈한과 도사한의 로닌들이 모여들었다. 또한 덴노를 낀 조정의 아이즈와 사쓰마와 이에 대항하는 기존의 권력의 실세인 도쿠가와 바쿠후 간의 갈등 또한 커져만 가고 있던 시기였는데.
이에 각자 다른 정치적 이념을 가진 로닌들은 서로 암살을 일삼고, 이에 민심 또한 흉흉해지고 있던터에,
바쿠후는 신센구미(新選組) 와 같은 집단을 조직하게 하였고, 이들은 손노조이 시시(志士) 들을 체포하거나 암살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당시 덴노측의 이신시시(維新志士) 들은 대부분 조슈한(長州藩) 출신들로 그들은 이케다야(池田屋) 에서
주로 모임을 가졌는데, 바로 이곳에서 그들은 교토방화를 모의한다.
하지만 이들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전, 1964년 6월 5일, 신센구미의 타케다 칸류우사이(武田 観柳齊) 가 이신시시 중 한 명인 후루타카 슌타로(古高 俊太郞) 를 붙잡아 신센구미의 거처인 마에카와 저택으로 끌고가서 고문을 한다. 고문을 한 사람은 히지카타 토시조(土方 歳三) 로, 그는 후루타카를 거꾸로 매달고 발꿈치로 부터 약 15cm 구멍을 파고 들어가 거기에 촛농을 떨어뜨리는 잔인한 고문을 했다고 한다.
후루타카 슌타로(古高 俊太郞) 은 결국 손노조이 지사들은 교토에 불을 질러 민심을 흉흉하게 하고 바쿠후의 무능함을 알리고자 했으며, 당시 교토의 치안을 담당하였던 아이즈한의 다이묘인 마츠다이라 카타모리를 납치하려고 했다며 조슈한(長州藩) 의 손노파 시시(志士) 와 로닌들의 계획에 대해 실토하고 모임 장소를 발설한다. 그곳이 바로 이케다야 여관(池田屋) 으로, 이케다야 지켄(池田屋事件) 이 일어나는 장소이다.
이에 1864년 7월 8일, 곤도 이사미는 신센구미 대원들을 이끌고 이케다야로 향하고 곧이어 히지카타 조가 따른다.
역사학자들은 과연 지사들이 실제로 교토를 불지르려고 했는지에 대해, 잡힌 포로 단 한명(후루카타) 한테 나온 진술 밖에 없고, 그것도 바쿠후측의 기록에만 나와 있어서 그 진위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다.
후루카타는 이후 하마구리 정변 때 감옥에서 살해당하는데, 이케다야에 있던 키도 타카요시(木戶 孝允) 란 자가 몇 년 뒤에 자신들은 후루카타를 구할 방법을 논하기 위해 모였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쨋거나
신센구미는 모임을 가지고 있던 조슈출신이 중심인 지사들을 이케다야에서 덮치는데, 격렬한 전투 끝에
8명의 지사가 죽고 23명이 체포되었다.
이 싸움에서 신센구미 대원은 한 명만이 사망하였다고 하고, 나중에 이떄 입은 부상으로 두 명이 더 사망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조장이 되는 오키타 소지가 지병인 폐결핵 떄문인지 아닌진 확실치 않지만 이 격투에서 주저 앉았다고 한다. 이 부분은 각종 만화에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다.
이 사건으로 신센구미는 교토에서 힘있는 조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고, 손노조이 지사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
'이케다야 지켄(池田屋事件)' 을 묘사한 액션피겨
토도 헤이스케(藤堂 平助), 나가쿠라 신파치(永倉 新八), 사이토 하지메(齊藤 一),
다케다 간류사이(武田 観柳齊 사쓰만한과 내통하여 사이토 하지메에게 암살 당함),
이노우에 겐자부로(井上 源三郞), 하라다 사노스케(原田 左之助),
이케다야 여관(池田屋) 실내
이케다야 여관(池田屋) 실내
이케다야 사건으로 이케다야는 부숴지고, 세월이 흘러 그 곳에 빠찡코 가게가 들어섰는데, 올해 3월에 문을 닫고, 2009년 7월, 신센구미 테마를 가진 이자카야가 문을 열었다고 한다.
오늘날 이케다야 자리에 있는 이자카야.
이케다야 여관(池田屋) 자리에 있는 기념안내판.
1864년, 교토를 방화로부터 구한 이들 신센구미의 활약은 이케다야 지켄(池田屋事件) 이라 불리우며, 이들을 하루아침에 유명하게 만들었으며, 신병이 줄을 이었다.
신선조는 의외로 정치적인 암살은 많이 하지는 않았는데. 이케다야 사건같은 정치적인 사건의 배후에는 아이즈번의 의도가 섞인것이 대부분이었다.(사이토 하지메가 신선조에서는 중진이면서도 조금 겉도는 묘한 위치에 있으며, 암살에 자주 발을 들이민 것은 아이즈번의 스파이였던 사이토 하지메 자신의 입장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이 사건으로 신센구미는 교토가 불바다가 되는 것을 막았지만, 결국 조슈한은 후에 '하마구리고몬의 변(蛤御門の 變 1864년 7월)' 을 일으키고, 그떄 교토에 불을 질러 교토의 1/3이 불에 탄다.
이 사건에서 아이즈한(会津藩 오늘날 일본 혼슈本州 동쪽 지역) 과 사쓰마한이 황궁의 수비를 맡았는데, 조슈는 사쓰마가 주축이 된 고부갓타이파 군대에 패해 쫒겨나고, 조슈는 조적(朝敵) 으로 규정된다.
바쿠후군은 조슈의 이런 군사적행동에 대해 1864년 9월 첫번째 조슈정벌을 가게 되는 것이다.(전편 참조)
참고: http://blog.naver.com/beetle55/100092420480
하마구리 고몬 노 헨(蛤御門の 變) 또는 킨몬 노 헨(禁門の 變)
당시 불에 탄 부분을 표시한 지도
하마구리 고몬(蛤御門)
다음은 덴노가 살았던(메이지 이신 전까지)
교토황궁인 '교토고쇼(京都御所)'
교토고쇼의 출입문 중 '켄레이몬(建礼門)'
키타다이몬(北大門)
나라의 중대한 의식을 행하는 시신덴(紫宸殿)
이곳에 덴노의 상징인 국화가 새겨져 있는 옥좌가 있다고 한다.
교토황궁의 정원과 연못이 있는 '오이케니와(御池庭)'
그후. 당시까지 아이즈한(會津藩) 의 후원을 받던 신센구미는 바쿠후 직속 신하가 되어 바쿠후군으로 활동하다가, 당시 손노를 외치며 메이지 덴노를 내세우며 도쿠가와 바쿠후에 반란을 일으킨 삿쵸동맹 중심의 신정부와 마지막 세력싸움을 벌인 '보신전쟁(戊辰戰爭 1968-1969)' 에 참가, 신센구미가 치안을 담당하고 있던 후시미에서 벌어진 1867년 토바 후시미 전쟁에 참가하여 21명이 전사한다.
후시미(伏見) 에 집결한 아이즈(會津藩) 군대
신센구미는 이 부대와 합류해 싸운다.
1868년 1월 27일, 에도를 출발한 도쿠가와 바쿠후 군대는 교토의 남쪽관문인 토바와 후시미에서 삿쵸동맹군과 격돌한다. 이것이 "토바-후시미전투(鳥羽-伏見の戰い 토바-후시미노 타타카이)" 다.
하지만 요시노부의 바쿠후의 군대는 프랑스군의 훈련을 받았다고는 하나 아직까지 중세 일본의 사무라이 복장과 무기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이에 반해 근대화된 신무기와 군대로 무장한 정부군, 즉 삿쵸동맹군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다군다나, 삿쵸동맹군은 덴노의 황실군임을 증명하는 칸군(官軍) 깃발을 들고, 이름뿐이지만 덴노의 친척인 닌나지노미야 요시아키(小松宮彰仁親王 코마츠노미야 아키히토 신노 1846-1903) 가 사령관으로 출정을 해서 명분상으로도 쇼군측 병사들의 사기를 꺾기에 충분했다.
도쿠가와 바쿠후 군대는 후시미와 토바에서 사쓰마와 조슈 그리고 도사 군대에게 패하고, 결국 2월 2일,
칸군(官軍) 에게 도쿠가와 바쿠후의 오사카성이 함락당하고, 2월 7일,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카이요마루(開陽丸) 호를 타고 에도로 향한다.
불타고 있는 오사카성을 바라보며 에도로 퇴각하는 도쿠가와 요시노부
토바-후시미전투(鳥羽-伏見の戰い) 는 그 규모에 비해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도쿠가와 바쿠후의 명성과 사기는 크게 꺾였으며, 그떄까지만해도 중립을 지키던 많은 다이묘들이 점차 덴노쪽으로 돌아섰으며 자신들의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군대원조까지 하는 것.
거기에다가 권세를 되찾겠다는 도쿠가와 바쿠후의 야망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그리고 바로 도쿠가와 바쿠후 통치의 상징인 그 오사카성(大阪城) 이 관군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여기의 도쿠가와 바쿠후 말기의 격동기는 전편을 참고하시고
여기서 삿쵸동맹이 나오는데,
조적으로 찍혔던 조슈한은 이전에 사쓰마가 그랬듯이 서양의 신무기와 군대에게 혼쭐이 나고 생각을 고쳐먹게 되어 양이를 버리고 개국을 외치며 그 명분으로 도바쿠(討幕) 를 외치며,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사쓰마와 동맹을 맺게 된다.
그러면 조슈를 적으로 삼던 신센구미는,.? 할 일이 없어지게 됐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삿쵸동맹은 덴노를 등에 업은 세력이라 이젠 조정(삿쵸 포함) 대 바쿠후가 된 것.
당연히 바쿠후의 하급조직인 신센구미는 조정의 적이 되어 버리고, 바쿠후도 교토에서 이래저래 찍혀있던 신센구미를 내친다...
이런걸 보고 낙동강 오리알이라고 하는거지..
신센구미는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 慶喜 1837-1913) 가 물러난 후 얼마 안있어, 여전히 도쿠가와 바쿠후에 충성을 하며 와카도시요리(若年寄) 인 나가이 나오유키(永井 尚志) 의 감독하에 조용히 교토를 떠났다
딜레마란 이런걸 두고 하는 말이겠지.
덴노군임을 표시하는 기를 들고 나온 관군을 상대로 싸우자니, 덴노에게 대항하는 것이 되고,
요런 기를 들고 오는 삿쵸동맹군.
그래도 신센구미는 도쿠가와 바쿠후를 위해 충심으로 싸운다.
보신전쟁 중 신센구미가 참가한 또 하나의 유명한 전투 중 하나가 '코슈-카츠누마 전투(甲州勝沼の戰い)' 로
토마-후시미 전투에 이어 1868년 3월 29일에 일어난다.
토바-후시미 전투에서 바쿠후군을 무찌른 관군(조슈, 사쓰마, 도사한) 은 셋으로 나누어져 세개의 주요 도로인 토카이도(東海道), 나카센도(中山道), 그리고 호쿠리쿠도(北陸道), 이 세 개의 주요도로를 타고 도쿠가와 바쿠후의 수도인 에도로 향한다.
힌편 역시 토바-후시미 전투 이후 자신의 부대를 데리고 에도로 향하던 신센구미(新選組) 국장 곤도 이사미(近藤 勇) 는 바쿠후군 사령관 카츠 카이슈(勝 海舟) 와 만나고, 곤도는 그떄까지 살아남은 대원들로 새로운 부대를 만드는데, 이를 '코요 침부타이(甲陽鎮撫隊)' 라 부른다.
이들은 관군과 야마나시(山梨県) 의 고코슈(甲州市) 에서 10배애 달하는 관군과 싸웠으나 179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배한다.
곤도를 포함한 이 전투의 생존자는 사가마 지방을 거쳐 아직 도쿠가와 바쿠후의 사무라이들인 하타모토(旗本) 들이 있는 아이즈(會津) 로 간다.
코슈-카츠누마 전투(甲州勝沼の戰い) 에서 도사(土佐藩) 군과 맞서고 있는 바쿠후측 신센구미 국장
콘도 이사미(近藤 勇 1834-1868)
붉은 색 '샤구마(赤熊)' 가발을 쓰고 있는 병사들은 도사한(土佐藩) 출신 병사들.
이 전투에서 가까스로 탈출했지만 곤도 이사미는 치바의 나가레야마에서 붙잡힌다. 그는 본인의 바램과는 상관없이(본인은 할복을 원했으나 끝까지 죄인 취급을 받음) 1868년 4월 25일 신센구미의 국장 곤도 이사미는 참수당하고 만다.
코슈-카츠누마 전투(甲州勝沼の戰い) 는 보신전쟁 중 혼슈 중심지역에서 벌어진 가장 중요한 마지막 군사행동이었으며, 신센구미 국장 곤도 이사미의 죽음은 도쿠가와 바쿠후 추종자들에게 큰 혼란을 가져왔으며 결국 도쿠가와 바쿠후가 이듬 해에 유혈사태 없이 에도성을 열고 항복하게 하는데 기여한다.
코슈-카츠누마 전투(甲州勝沼の戰い) 이후 참수를 당한 곤도 이사미(1868년 신문)
그의 목은 이렇게 교토의 대로변에 공개 되었다고..
미부데라(壬生寺) 에 있는 곤도 이사미 흉상
관군을 이끄는 사이고 타카모리는 코슈카츠누마 전투(甲州勝沼の戰い) 등을 승리로 이끌면서 일본의 동쪽과 북쪽으로 진군, 결국은 1868년 5월, 에도를 포위하고 바쿠후의 육군대신 카츠 카이슈(勝 海舟) 에게 무조건적 항복을 받아낸다.
하지만 바쿠후의 항복 이후에도 저항을 하는 무리들이 있어, 1868년 7월 4일, 우에노 전쟁(上野戰爭) 에서 관군과 바쿠후군은 격돌하지만 바쿠후군은 패배한다.
그리고
그 중 바쿠후군이 신정부군에 최후의 저항을 한 '하코다테 전쟁(箱館戰爭)' 에서 신센구미는 저항하였지만, 결국 신정부군에 항복하며 해산되고 만다.
오키타 소지는 7월에 병사하고, 옛 바쿠후군과 합류할 것을 주장했던 히지카타 토시조와 아이즈에 남아 싸울 것을 주장한 야마구치 지로(사이토 하지메) 는 결별한다.
히지카타 토시조는 몇 안되는 호위를 거느리고 옛 바쿠후군에 참가하였고, 아이즈에 유일하게 남은 야마구치 지로(사이토 하지메) 가 신센구미의 대장이 되었지만, 결국 전투에 패배하고 센다이에서 신정부군에 항복한다.
히지카타는 북쪽으로 가서 에조 공화국(蝦夷共和國) 군대에 들어간다. 이 당시 신센구미는 힘을 키우고 그 수도 100여명에 달하게 된다. 하지만 1869년 5월 히지카타 토시조는 전사하고, 나가이 나오유키(永井 尚志) 가 신센구미를 맡아 지휘하였지만, 결국 신정부군에 항복하게 되는데, 히지카타 토시조의 죽음을 실질적인 신센구미의 종말 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히치카타 토시조(土方 歳三 1835-1869)
신센구미 후쿠쇼(副長) 로 실질적인 2인자.
신센구미는 몰락했지만 나가쿠라 신파치(永倉 新八), 사이토 하지메(齊藤 一), 그리고 시마다 카이(島田 魁) 와 같은 핵심멤버들은 생존하였는데, 훗 날 타카기 테이사쿠 같은 인물은 중요한 직책까지 올라간다.
홋카이도 하코다테 전쟁(函館戰爭の図) 을 묘사한 그림(1880년경 그림).
왼쪽부터 에노모토(킨지로) 타케아키(榎本 武揚 1836-1908. 당시 해국제독), 오토리 케이스케(大鳥 圭介 1833-1911), 마츠다이라 타로(松平 太郞 1839-1909).
그리고 노란색 옷을 입은 사무라이가 바로 신센구미(新選組) 의 2인자였던 히지카타 토시조(土方 歳三 1835-1869) 란다.
이 전투에서 총을 맞고 전사한다.
흰바지의 프랑스군인들이 기병대 뒤쪽으로 보인다.
오른쪽은 근대식 군복을 입은 관군으로, '샤구마(赤熊)' 가발을 쓴 병사들은 도사한(土佐藩) 병사들이고, '하구마(白熊)' 가발을 쓴 이들은 조슈 병사들, 그리고 '코구마(黑熊)' 가발을 쓴 이들은 사쓰마 출신 병사들이다.
신센구미(新選組) 의 검술이었던 텐넨리신류(天然理心流) 는 농무지렁이 검술이라 불리면서 형식에 얽메이지 않았다고 한다. 신센구미의 전술은 3인1조가 기본으로 항상 다수의 입장을 상정하고 싸우는것을 기본으로 했다. 일대일로 싸워서 검의 강함을 겨루는 것이 아니라 교토의 수호를 위해서 역적을 토벌하는 입장이었던 신센구미는 길의 양쪽을 막거나 혹은 다리의 양쪽을 막고 싸우는 것을 특기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신센구미는 가장 번성할 때는 부대원의 수가 3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 시대까지만 해도 일본에서는 아주 엄격한 계급제를 실시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도쿠가와 바쿠후 시절 사무라이출신이 아닌 농부나 상인 출신이 가입을 한 첫 사무라이 집단이었으며, 이에 사무라이가 되고 싶어하는 자들이나 정치에 관심이 많은 자들이 많이 가입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신센구미 조직원의 대부분이 비사무라이 출신인 것은 아니었고, 106명의 신센구미 조직원 중에(당시 총 인원은 302명) 87명이 사무라이였으며. 농부가 8명, 그리고 상인 3명에 의사와 선직자가 각 3명, 그리고 장인이 둘 있었다고 한다.
특히 조장을 맡은 야마나미(山南) 나 오키타(沖田), 나가쿠라(永倉), 그리고 하라다(原田) 같은 인물들은 모두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난 자들이었다.
이케다야 사건 이후의 신센구미 서열
쿄쿠초(局長): 곤도 이사미(近藤 勇), 텐넨 리신류(天然理心流) 4대째 사범소쵸(総長): 야마나키 케이스케(山南 敬助)후쿠쵸(副長): 히지카타 토시조(土方 歳三)
산보(参謀 군사軍士): 이토 카시타로
구미쵸(組長):
1. 오키타 소지(沖田 総司 검술 사범)
2. 나가쿠라 신파치(永倉 新八 검술 사범)
3. 사이토 하지메(齊藤 一검술 사범)
4. 마츠바라 츄지(유술 사범)
5. 타케다 칸류사이(병법 지도)
6. 이노우에 겐자부로(井上 源三郞)
7. 타니 산주로(창술 사범)
8. 토도 헤이스케(藤堂 平助)
9. 스즈키 미키사부로(鈴木 三樹三郞)
10. 하라다 사노스케(原田 左之助)
스파이: 시마다 카이(島田 魁), 야마자키 스스무(山崎 烝)
또한 신센구미는 로닌들의 집단이었던 관계로 더욱 규율을 엄격하게 했는데, 규칙 강령은 대부분이 히지카타 토시조(土方 歳三) 가 썼으며, 구체적인 명시가 없는 추상적인 표현의 강령을 어겼을 시는 곤도와 히지카타의 재량에 의해 죄의 경중이 결정되는 바가 많았다고 한다.
강령은 다섯 개 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다음을 금했다:
11. 부시도(武士道) 에 어긋나게 행동하지 말 것.
12. 신센구미를 떠나지 말 것.
13. 사적으로 돈을 모으지 말 것.
14. 다른 이들의 논쟁에 끼어들지 말 것.
15. 사적인 싸움에 연관되지 말 것.
이 중 어떤 강령이라도 위반할 시에는 세푸쿠(切腹) 로 그 죄를 물었고, 거기에다가 다음과 같은 규칙도 있었다:
16. 한 조의 조장이 전투 시 치명적인 부상을 입으면, 조의 모든 조원은 끝까지 싸우고, 그 자리에서 모두 죽어야 한다.
17. 죽을 확율이 매우 높은 전투라 하더라도, 조장의 시페 이외에는 죽은 자의 시체를 회수해서는 안된다.
이 중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대목은 바로: "신센구미 조원이 직무이건 아니건 싸움에 연관이 되었을 때, 자신이 상처를 입고 적을 죽이지 못하여 적을 도망가게 하면, 등에 부상을 입혔더라도 세푸쿠를 명한다"
히지카타는 신센구미의 조원들이 무사도의 이념을 잘 행하도록 매우 엄격한 규율을 만들었으며, 조직 내에서 두려움을 느끼게하여 히지카타와 곤도의 명령을 따르도록 했다.
이 강령들로 인해 백명이 넘는 전문 무사들로 이루어진 신센구미는 그토록 강하고 두려움을 주는 조직으로 각인될 수 있었고, 각 조원은 공식적인 허가와 함께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살인 등을 행한 것이다.
몇 명이 강령을 어겨서 세푸쿠를 행하도록 하였고 몇은 스파이짓을 하다가 잡혀서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또한
신센구미는 그들의 독특한 복장으로 전투 중에 눈에 쉽게 띄었는데, 이는 신센구미 국장이었던 세리자와 카모(芹沢 鴨) 가 고안한 디자인으로 기본적인 복장은 하오리(羽織) 와 하카마(袴) 그리고 키모노(着物) 로 이루어져 있고, 타스키 라는 흰 끈을 가슴에서 등쪽으로 묶고 다녔다.
타스키는 팔을 움직일 때 키모노의 소매가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영화 같은데 보면 사무라이가 결투를 하기 전에 끈을 꺼내 입에 물고 양쪽 어깨죽지 밑으로 돌려 늘어진 소매를 어께쪽에 올려 붙게하고 칼을 뽑아들고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용도.
신센구미의 복장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이 바로 아사기이로(浅葱色, 옅은 청색) 색의 겉옷인 하오리(羽織) 다.
하오리 소매는 "하얀 산모양의 줄무늬" 가 들어가 있어서, 대개 사무라이들의 복장으로 쓰이는 밤섹이나, 검은색 또는 회색과는 다르게 마치 빛을 내는 효과를 낸다. 그리고 이러한 신센구미의 복장은 전투 시에
한 편임을 쉽게 알게 해줄 뿐만 아니라 적에게 시각적으로 위압감을 주었다.
사진은 2004년 NHK 드라마로 제작 방영된 '신센구미(新選組)'
그리고
출동 시 신센구미(新選組) 임을 알리는 깃발
'誠'
신센구미의 훈련장소로 사용되었던 미부데라(壬生寺)
이곳에 미부로의 대원들 중 일부가 묻혀있다.
세리자와 카모, 나가쿠라 신파치, 오키타 소지, 사이토 하지메, 히지카타 토시조 의 핸드폰줄 피규어인형.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