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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아비달마집론 제7권
2. 결택분(決擇分)
2.3. 득품 ②
[10현관(現觀)]
현관(現觀)의 건립이란 무엇입니까?
간략하게 열 종류가 있으니,
법현관(法現觀)ㆍ의현관(義現觀)ㆍ진현관(眞現觀)ㆍ후현관(後現觀)ㆍ보현관(寶現觀)ㆍ불행현관(不行現觀)ㆍ구경현관(究竟現觀)ㆍ성문현관(聲聞現觀)ㆍ독각현관(獨覺現觀)ㆍ보살현관(菩薩現觀)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법현관입니까?
여러 진제의 증상법(增上法)에서 이미 상품의 청정한 신승해(信勝解)를 성취하고 그것에 대한 신심에 따라 행하는 것[隨信行]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의현관입니까?
여러 진제의 증상법에서 이미 상품의 청정한 제찰법인(諦察法忍)을 성취하여 그 신심에 따라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같은 인혜(忍慧)로써 순결택분의 지위에 머무르게 된다.
이것은 세 종류의 여리작의(如理作意)에 연유하여 그 인식이 가능해지기[顯發] 때문이다.
또 세 가지 품(品)을 이루게 되니, 상연품(上軟品)ㆍ상중품(上中品)ㆍ상상품(上上品)이다.
어떠한 것이 진현관입니까?
견도위의 열여섯 가지 심찰나의 지위에 있는 모든 성도를 이미 성취한 것을 가리킨다.
또 견도위 가운데에서는 현관변(現觀變)을 체득하여 진제를 안립하기에 세속지(世俗智)가 현전하지 않으나, 수도위에서 이 같은 세속지가 다시금 현전된다.
어떠한 것이 후현관입니까?
일체의 수도를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보현관입니까?
부처님을 증정(證淨)하고, 정법을 증정하고, 스님들을 증정하는 것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불행현관입니까?
이미 무작율의(無作律義)를 증득하였기에, 비록 유학(有學)의 지위에 머물러 있더라도
“내가 지금 나락가도(那落迦道)를 이미 다하였고, 방생도(傍生道)를 이미 다하였고, 아귀도(餓鬼道)를 이미 다하였다.
악취(惡趣)로 거꾸로 떨어지는 업이 이미 다하였으니, 내가 다시 악취업(惡趣業)을 지어 악취의 이숙(異熟)을 받지 않겠다”라고 다짐하는 것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구경현관입니까?
도제 가운데에서 구경도를 해설한 것과 같다.
어떠한 것이 성문현관입니까?
앞에서 해설한 일곱 종류의 현관을 다른 사람의 음성을 통해 듣고 나서야 증득하기 때문에 성문현관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독각현관입니까?
앞에서 해설한 일곱 종류의 현관을 다른 사람의 음성을 듣지 않고서도 증득하기 때문에 독각현관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보살현관입니까?
여러 보살이 앞에서 해설한 일곱 종류의 현관 가운데에서 인혜(忍慧)의 수습을 일으켰으나 이를 증득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보살도의 극희지(極喜地) 가운데에서 모든 보살도의 정성결정(正性決定)에 들어가는 것을 보살현관이라 이름한다.
성문현관과 보살현관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습니까?
간략하게 해설하면 열한 종류가 있으니,
경계차별(境界差別)ㆍ임지(任持)차별ㆍ통달(通達)차별ㆍ서원(誓願)차별ㆍ출리(出離)차별ㆍ섭수(攝受)차별ㆍ건립(建立)차별ㆍ권속(眷屬)차별ㆍ승생(勝生)차별ㆍ생(生)차별ㆍ과(果)차별을 가리킨다.
이 같은 과보의 차별에는 또 열 가지가 있으니,
전의(轉依)차별ㆍ공덕원만(功德圓滿)차별ㆍ5상(相)차별ㆍ삼신(三身)차별ㆍ열반(涅槃)차별ㆍ증득화합지용(證得和合智用)차별ㆍ장청정(障淸淨)차별ㆍ화합작업(和合作業)차별ㆍ방편시현(方便示現)차별ㆍ성등정각입반열반(成等正覺入般涅槃)차별ㆍ5종발제(種拔濟)차별과 여러 무량(無量) 등의 가장 수승한 공덕이다.
어떠한 현관에서 후현관(後現觀)을 수렴하게 됩니까?
구경현관이다.
구경현관을 수렴하는 것에는 어떠한 것이 있습니까?
무량(無量)ㆍ해탈(解脫)ㆍ승처(勝處)ㆍ변처(遍處)ㆍ무쟁(無諍)ㆍ원지(願智)ㆍ무애해(無礙解)ㆍ신통(神通)ㆍ상수호(相隨好)ㆍ청정(淸淨)ㆍ역(力)ㆍ무외(無畏)ㆍ염주(念住)ㆍ불호(不護)ㆍ무망실법(無忘失法)ㆍ영단습기(永斷習氣)ㆍ대비(大悲)ㆍ불공불법(不共佛法)ㆍ일체종묘지(一切種妙智)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 같은 공덕은 여러 계경 가운데에서 거듭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4무량]
여기서 무량이란 4무량(無量)을 가리키는 것이다.
자무량(慈無量)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해서 모든 유정에게 즐거움을 여의지 않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 의요에 머무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이니,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비무량(悲無量)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해서 모든 유정을 괴로움에서 벗겨주는 것을 가리킨다.
그 의요에 머무는 바가 구족한 가운데서의 정이나 혜이니,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희무량(喜無量)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해서 모든 유정이 즐거움을 여의지 않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 의요에 머무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이니,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사무량(捨無量)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해서 모든 유정을 이롭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 의요에 머무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 정이나 혜이니,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8해탈]
여기서 해탈이란 여덟 가지 해탈을 가리킨다.
‘유색(有色)에서 여러 가지 색을 관찰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면서도 내적으로는 그 보는 것을 굴복시키지 못한 자의 색상(色想)이거나 또는 현재 그 소견되는 것에 안립한 자의 색상이다.
그 소견되는 색을 관찰해서 머무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 및 그것에 상응하는 모든 심ㆍ심소를 가리킨다.
이는 해탈에 이르기까지의 변화장(變化障)이다.
‘무색상(無色想)에서 외부의 여러 가지 색을 관찰하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면서도 내적으로는 그 보는 것을 이미 굴복시킨 자의 색상이나 또는 현재 그 소견되는 것에 안립한 자의 색상이다.
그 소견되는 색을 관찰해서 머무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이니,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정해탈(淨解脫)을 신작증(身作證)하여 구족하게 머무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해서 내적으로 청정하고 부정한 갖가지 색에 처해서 전전상대상(展轉相待想)ㆍ전전상입상(展轉相入想)ㆍ전전일미상(展轉一味想)을 이미 성취한 까닭이다.
그 머무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이니,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해탈에 이르기까지의 청정과 부정함이 변화해서 번뇌가 생겨나고 일어나는 장애이다.
무변공처해탈(無邊空處解脫)이란 무엇입니까?
해탈에 순응해서 무변공처에 머무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무변공처의 해탈에서처럼 무변식처(無邊識處)ㆍ무소유처(無所有處)ㆍ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해탈도 이와 같다. 해탈에 이르기까지 장애에 걸리지 않고 적정(寂靜)해탈하는 것이다.
‘상(想)과 수(受)가 멸하는 해탈[想受滅解脫]’이란 무엇입니까?
비상비비상처의 해탈에 의지하는 것을 가리킨다.
진(眞)해탈에 엇비슷하게 머무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심ㆍ심소가 소멸돼서 상과 수가 소멸된 그러한 장애[想受滅障]에서 해탈하는 것이다.
[8승처]
승처란 여덟 가지 승처를 가리킨다.
앞의 네 가지 승처는 이분해탈(二分解脫: 二解脫)에 기인하여 건립되고,
나중의 네 가지 승처는 일분해탈(一分解脫: 一解脫)에 기인해서 건립된다.
여기서의 해탈이란 그 소연(所緣)을 사량(思量)으로 해탈하는 것[意解]이고,
승처는 그 소연을 수승하게 굴복시키는 것으로, 자유로이 전향하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유정수법(有情數法)과 비유정수(非有情數)에 의지해서 그 색의 적고 많음을 말하는 것이고,
청정하고 부정한 것에 의지해서 그 색의 좋고 나쁨을 말하는 것이고,
인간계와 천상에 의지해서 그 색의 열등함과 우수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 밖의 것은 해탈 가운데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그 소연을 수승하게 굴복시키는 까닭에 승처라고 이름한다.
[10변처]
변처란 열 가지 변처를 가리킨다.
그 소연이 두루 가득하기 때문에 변처라고 이름한다.
그 두루 가득함에 머무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 및 그것에 상응하는 심ㆍ심소를 변처라 이름한다.
어째서 변처에 지위(地位) 등을 건립하게 됩니까?
이 같은 변처에 기인해서 소의색(所依色)과 능의색(能依色)이 모두 두루 가득함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그 밖의 것은 해탈을 해설한 그대로이다.
모두 이 같은 변처에서 해탈을 온전하게 이루게 되는 것이다.
무쟁(無諍)이란 정려에 의지해서 다른 사람이 일으키는 번뇌를 잘 방어하는 것이다. 그 머무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 및 그에 상응하는 모든 심ㆍ심소를 가리킨다.
원지(願智)란 정려에 의지하여 그 소지(所知)를 깨닫고자 하는 서원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4무애(無礙)]
무애해(無礙解)란 네 가지 무애해를 가리킨다.
법무애해(法無礙解)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여 일체법의 명수(名數)에 관한 차별이 걸림 없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의무애해(義無礙解)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여 여러 상(想)과 의취(意趣)가 걸림 없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훈사무애해(訓詞無礙解)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여 여러 지방의 말소리와 여러 가지 제법의 언설을 새겨 풀이하는 것이 걸림 없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변재무애해(辯才無礙解)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여 제법의 차별이 걸림 없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6신통]
신통이란 무엇입니까?
여섯 가지 신통을 가리킨다.
신경통(神境通)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여 신변(神變)의 위덕(威德)이 걸림 없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 및 그에 상응하는 심ㆍ심소를 가리킨다.
천이통(天耳通)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여 갖가지 음성을 듣는 위덕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심차별통(心差別通)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여 다른 유정의 심행(心行)에 대한 차별을 인식하는[入] 위덕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숙주수념통(宿住隨念通)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여 전제(前際)에서 행한 바를 회상하는 위덕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사생통(死生通)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여 유정이 죽고 사는 차별의 관찰이 걸림 없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누진통(漏盡通)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여 누(漏)가 다하는 지혜의 위덕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상수호(相隨好)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여 그 모양을 아름답게 꾸며서 나타내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 및 그에 상응하는 모든 심ㆍ심소 및 그곳에서 일어난 이숙을 가리킨다.
[4청정]
청정이란 무엇입니까?
네 가지 청정을 가리키는 것이다.
의지청정(依止淸淨)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여 그 의지하려는 바에 따라 취하고 머무르고 버리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 및 그에 상응하는 모든 심ㆍ심소를 가리킨다.
경계청정(境界淸淨)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여 그 바라는 경계에 따라 변화하는 지혜가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심청정(心淸淨)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여 그 삼마지문(三摩地門)의 자재를 강구하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지청정(智淸淨)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여 그 다라니문(陀羅尼門)의 임지(任持)를 간구하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10력(力)]
역이란 여래의 10력(力)을 가리키는 것이다.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여 일체의 온갖 합당하고[處] 합당하지 못한 것[非處]을 가려내는 지혜가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 및 그에 상응하는 모든 심ㆍ심소를 가리킨다.
자업지력(自業智力)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여 일체의 온갖 업의 이숙을 가려내는 지혜가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그 밖의 역(力)은 그에 따라 숙지하면 된다.
[4무외]
무외란 무엇입니까?
네 가지 무외를 가리킨다.
정등각무외(正等覺無畏)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해서 자리문(自利門)에 연유한 일체종소지(一切種所知)의 경계를 바르고 평등하게 깨우쳤다고 자칭하는, 그 덕호(德號)의 건립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 및 그에 상응하는 심ㆍ심소를 가리킨다.
누진무외(漏盡無畏)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해서 자리문에 연유한 일체종(一切種)의 누(漏)가 다했다고 자칭하는, 그 덕호의 건립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 및 그 밖의 앞에서 해설한 것을 가리킨다.
장법무외(障法無畏)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해서 이타문(利他門)에 연유한 일체종의 장외법(障畏法)을 연설한다고 자칭하는, 그 덕호의 건립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출고도무외(出苦道無畏)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해서 이타문에 연유한 일체종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도법(道法)을 연설한다고 자칭하는, 그 덕호의 건립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3념주(念住)]
염주란 바로 삼념주(三念住)를 가리킨다.
대중을 거느리는 때에 일체종의 잡염(雜染)이 현행(現行)하지 않음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3불호(不護)]
불호란 바로 3불호(不護)를 가리킨다.
그 가르치고 싶은 대로 가르치고 훈계하는 방편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무망실법(無忘失法)]
무망실법(無忘失法)이란 대중을 거느리는 때에 일체종에 처해서 그 행위나 언사를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영단습기(永斷習氣)]
영단습기(永斷習氣)란 일체지자(一切智者)가 일체지(一切智)의 소작(所作)이 아닌 것의 불현행(不現行)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대비(大悲)]
대비(大悲)란 바로 무간지옥의 괴로움 경계를 연해서 그 한량없는 연민에 머무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18불공불법(不共佛法)]
불공불법(不共佛法)이란 열여덟 가지의 불공불법을 가리킨다.
공통되지 않은 신ㆍ어ㆍ의, 3업이 청정하게 구족한 가운데에서나,
소의 및 그 과근(果根)이 성취하지도 퇴보하지도 않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나, 또 공통되지 않은 업의 현행이 구족한 가운데에서나,
또 공통되지 않은 지혜에 머무르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일체종묘지(一切種妙智)]
일체종묘지(一切種妙智)란 온ㆍ계ㆍ처에 있어 일체종묘지의 성품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공덕과 업]
이 같은 공덕을 인발(引發)하는 것은 어떠한 것입니까?
청정한 제4정려에 의지해서 외도나 성문이나 보살 등이 4무량(無量)과 5신통(神通)을 인발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 대부분은 제4정려의 변제정(邊際定)에서 성문이나 보살 등이 인발시키는 그 밖의 공덕이다.
어떠한 원인에서 이와 같은 공덕이 인발됩니까?
정려에 의지하여 사유를 되풀이하는 것이니, 그 건립된 법에 따르기 때문이다.
이 같은 따위의 공덕에는 간략하게 두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가 현전에서 스스로 그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고,
두 번째가 그 자성에 안정되게 머무는 것이다.
‘현전에서 스스로 그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란 세간을 벗어난 후에 얻어지는 세속지를 그 바탕으로 삼는 것이고,
‘자성에 안정되게 머무는 것’이란 세간을 벗어나는 지혜의 쓰임새로 그 바탕을 삼는 것이다.
무량은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소치장(所治障)을 버리게 하는 동정심에 머무는 까닭에, 복덕의 자량을 속히 원만하게 해서 유정들로 하여금 마음속으로 싫증나지 않도록 성숙시키는 것이다.
해탈은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일의 변화를 인발시켜서 청정하거나 부정한 변화에 처해서도 어려움이 없도록 하여 적정해탈에 어려움 없이 제일가는 적정의 성스러운 머무름에 능히 머물게 되는 것이다.
승해(勝解)에 기인해서 사유하는 까닭이다.
승처는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앞서의 해탈에 소연하는 경계를 자유로이 전향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그 소연을 수승하게 굴복시키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변처는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해탈의 소연을 잘 처리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 두루 가득함이 널리 퍼지게 되기 때문이다.
무쟁은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그 말을 듣고는 모두 설득당하는 것을 가리킨다.
다른 이를 아끼고 보살피는 마음이 아주 뛰어나기 때문이고, 또 그 감응하는 바에 따라 말을 하기 때문이다.
원지는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과거ㆍ미래ㆍ현재의 3세(世)를 잘 기별(記)하기에 일체 세간이 진심으로 공경하는 것을 가리킨다.
일체의 중생을 멀리하는 것에 기인해서 도리어 중생에게 추앙받기 때문이다.
무애해는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좋은 설법으로 중생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일체의 의심 내는 그물을 끊어 버리기 때문이다.
신통은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신업과 어업으로 그 마음을 기별해서 중생을 널리 제도하여 성스러운 가르침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을 가리킨다.
유정의 모든 심행 및 그 과거ㆍ현재ㆍ미래를 잘 숙지해서 그 감응하는 바에 따라 가르쳐 영원히 출리하게 하는 것이다.
상수호(相隨好)는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잠깐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마음속에 깨끗한 신심을 내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청정은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이것의 세력이 기인하여 생유(生有)를 취하는 것에서 그 즐기는 바에 따르게 되기 때문이다.
또 1겁을 머물기도 하고, 또 겁이 끝난 다음에까지 머물기도 하고, 또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행하기도 하고, 또 제법에 처해서 자유로이 전향하기도 하고, 또 여러 정에 처해서 전향하기도 하고, 또 모든 부처님의 정법을 다시 임지하기도 한다.
역(力)은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인과가 없다거나 인과를 거부하는 논리를 배척하고자 논리를 세우는 것을 가리킨다.
전도되지 않도록 자세히 해설해서 도가 생겨나도록 증상시키고,
일체 유정의 심행이 깨달음에 들어가도록 법품(法品)을 바로 설법하고,
수면경계(隨眠境界)의 자량을 의요케 해서 미래세에 출리하게 하고,
또 그 감응하는 바에 따라 결정된 수승한 도를 자세히 설하여 모든 마군을 항복받고 일체의 문답을 잘 분석하는 것이다.
무외(無畏)는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대중 가운데 처해서 스스로 자신이 큰 스승임을 일깨워 일체의 삿된 외도를 물리치는 것이다.
염주(念住)는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능히 불염오(不染汚)로써 대중을 수렴하여 거두는 것을 가리킨다.
불호(不護)는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끊임없이 가르치고 훈계해서 따르는 대중을 교화하는 것이다.
무망실법(無忘失法)은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일체의 불사(佛事)를 저버리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영단습기(永斷習氣)는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모든 번뇌를 여의었기에 그 번뇌에서 만들어진 일의 업이 엇비슷하게라도 드러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대비(大悲)는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낮과 밤의 여섯때에 세간을 두루 관찰하는 것을 가리킨다.
불공불법(不共佛法)은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신ㆍ어ㆍ의, 3업이 청정함에 연유해서 이미 성취한 것이 퇴보하지 않는 것으로, 행하거나 머물거나 일체의 성문도(聲聞道)와 독각도(獨覺道)를 지혜로 비춰서 엄폐시키는 것이다.
일체종묘지는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능히 일체 유정의 모든 의심 내는 그물을 끊어서 바른 법안(法眼)을 오래도록 머물게 하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유정으로서 미처 성숙하지 못한 자는 성숙하게 하고, 이미 성숙된 자는 해탈하게 하는 것이다.
위에서 해설한 현관위(現觀位) 가운데에서 증득한 다음에 다시 수승한 품도에 나아가는 때에는 앞서 성취한 열등한 품지의 도를 버리게 된다.
또 이 같은 때에 고집(苦集)을 끊고 무여의열반계의 지위(地位)에서 증득을 이루는 것이다.
성문이나 연각은 일체의 성도에 있어서 그 버려야 할 바를 잠깐 사이라도 버리지 않는 바가 없기에 보살도(菩薩道)라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 보살 등을 ‘선근이 가없는 분’ 또는 ‘공덕이 가없는 분’이라고 일컫게 된다.
어째서 여러 가지 무기사(無記事)를 건립하게 됩니까?
그가 질문한 바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질문한 바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합니까?
인과를 벗어나서 그 선악[染淨]에만 감응하는 사량처(思量處)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인연에서 보살이 초승이생위(超昇離生位)에 이미 들어갔더라도 예류(預流)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 머무는 바 없이 도를 성취하는 것이 기인해서 줄곧 예류과로 향하는 행을 성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떠한 인연으로 일래(一來)도 아니게 됩니까?
모든 유(有) 가운데에서 한없는 생을 받기 때문이다.
어떠한 인연으로 불환(不還)도 아니게 됩니까?
정려에 안주해서 욕계에 환생(還生)하기 때문이다.
또 여러 보살들은 제현관(諦現觀)을 이미 성취하였더라도 십지의 수도위에서 소지장(所知障)의 대치도(對治道)만을 닦고 번뇌장(煩惱障)의 대치도는 닦지 않는다.
만약 보리를 성취하였을 때 번뇌장과 소지장을 잠깐 사이에 끊는다면, 바로 잠깐 사이에 아라한이나 여래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여러 보살이 일체의 번뇌를 영구히 끊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같은 번뇌는 마치 주문이나 약으로 굴복된 여러 독사처럼 일체 번뇌의 허물을 일으키지 않는 것과도 같고,
일체지(一切地) 가운데에서 마치 아라한이 번뇌를 이미 끊어버린 것과도 같은 것이다.
또 여러 보살이 소지경(所知境)에 있어서 선교(善巧)를 닦아야 하고,
여러 방편에 있어서 그 선교를 닦아야 하고,
허망분별(虛妄分別)에 처해서 선교를 닦아야 하고,
무분별에 있어 선교(善巧)를 닦아야 하고,
때때로 연근(練根)을 닦아야 한다.
[6소지경(所知境)]
소지경(所知境)이란 무엇입니까?
간략하게 여섯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가 미혹하여 어지러운 것[迷亂]이고,
두 번째가 그 소의에 미혹하여 어지러운 것[迷亂所依]이고,
세 번째가 그 소의에 미혹하여 어지럽지 않은 것[不迷亂所依]이고,
네 번째가 미혹하여 어지럽거나 미혹하여 어지럽지도 않는 것[迷亂不迷亂]이고,
다섯 번째가 미혹하여 어지럽지 않은 것[不迷亂]이고,
여섯 번째가 미혹하여 어지럽지 않은 것의 등류[不迷亂等流]이다.
[선교의 방편 네 종류]
선교의 방편이란 무엇입니까?
간략하게 네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가 유정을 성숙시키는 방편선교이고,
두 번째가 불법을 원만케 하는 방편선교이고,
세 번째가 속히 신통과 지혜를 증득하는 방편선교이고,
네 번째가 그 도를 닦는 것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방편선교이다.
[허망분별(1)]
허망분별이란 무엇입니까?
간략하게 열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가 근본에 대한 분별이고,
두 번째가 그 모양에 대한 분별이고,
세 번째가 그 모양이 드러난다는 분별[相顯現分別]이고,
네 번째가 그 모양이 변해서 달라진다는 분별[相變異分別]이고,
다섯 번째가 그 모양의 드러남이 변해서 이숙된다는 분별[相顯現變異分別]이고,
여섯 번째가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분별[他人分別]이고,
일곱 번째가 실답지 않은 분별[不如理分別]이고,
여덟 번째가 실다운 분별[如理分別]이고,
아홉 번째가 집착하는 분별[執着分別]이고,
열 번째가 산란분별(散亂分別)이다.
[허망분별(2)]
또 다시 열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가 성품이 없다는 분별[無性分別]이고,
두 번째가 성품이 있다는 분별[有性分別]이고,
세 번째가 차츰 늘어난다는 분별[增益分別]이고,
네 번째가 줄어든다는 분별[損減分別]이고,
다섯 번째가 성품이 동일하다는 분별[一性分別]이고,
여섯 번째가 성품이 각각 다르다는 분별[異性分別]이고,
일곱 번째가 자성분별(自性分別)이고,
여덟 번째가 차별분별(差別分別)이고,
아홉 번째가 수명의분별(隨名義分別)이고,
열 번째가 수의명분별(隨義名分別)이다.
[무분별]
무분별이란 무엇입니까?
간략하게 세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가 지족무분별(知足無分別)이고,
두 번째가 무전도무분별(無顚倒無分別)이고,
세 번째가 무희론무분별(無戱論無分別)이다.
이와 같은 세 종류의 이생과 성문과 보살은 그 차제에 따라 그 모양을 숙지해야 한다.
‘무희론무분별’은 다시 다섯 가지 모양을 여의는 것이니,
첫 번째가 무작의(無作意)가 아니기 때문이고,
두 번째가 초과작의(超過作意)가 아니기 때문이고,
세 번째가 적정이 아니기 때문이고,
네 번째가 자성이 아니기 때문이고,
다섯 번째가 소연에 있어서 가행을 짓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소연에 있어서 가행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일컫는 경우에, 만약 여러 보살의 성품이 이근기라면, 어떻게 다시 연근행(練根行)을 닦는다고 하겠습니까?
이근기 가운데에서의 연근기(軟根機)에 의지하기에 다시 이근기 가운데의 중근기를 인발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또 이근기 가운데의 중근기에 의지하기에 이근기 가운데의 이근기를 인발시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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