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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가아발다라보경 제2권
14. 여러 망상자성과 자상ㆍ공상의 견해를 벗어남
이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를 위해 있음[有]과 없음[無], 같음[一]과 다름[異], 함께함[俱]과 함께하지 않음[不俱], 있지 않음[非有]과 없지 않음[非無], 상(常)과 무상(無常)을 벗어나는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모든 외도가 행하지 않는 것과 자각성지가 행하는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망상인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벗어나 제일(第一)의 진실한 뜻에 들어가는 모든 지위의 상속과 점차(漸次),
상상(上上)으로 증진하는 청정한 모습과 여래지상(如來地相)의 개발(開發)함이 없는 본원(本願),
갖가지 색깔로 나타나는 마니 구슬의 경계와 같은 끝없는 상(相)과 행(行),
자기 마음에서 나타난 세계의 부분적 모습인 일체 모든 법을 말씀해 주십시오.
저와 나머지 다른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은 여러 망상자성(妄想自性)과 자상ㆍ공상의 견해를 벗어나고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모든 안락함을 다 갖추어 충만하게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옳은 말이다. 옳은 말이다. 네가 나에게 이와 같은 이치를 묻는 것은 일체 모든 하늘과 세상 사람들에게 많은 안락을 주려 하고 많은 이익을 주려 하며, 가엾이 여기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들어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내가 너를 위해 분별하여 설명하리라.”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거룩하신 세존이시여,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심량(心量)이 어리석은 범부는 안팎의 성품을 취하여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常)과 무상(無常)에 의지하니, 이는 자성의 훈습된 인[習因]으로 망상에 계착하는 것이다.
마치 사슴 떼가 갈증에 시달리다가 봄에 아지랑이를 보고 물이라고 생각하고는 미친 듯이 달리며 물이 아닌 줄 모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어리석은 범부도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된 망상에 훈습된 3독(毒) 때문에 그 마음을 태우고 물질의 경계를 즐거워한다. 그
리하여 생기고 머물고 없어짐을 보고 안팎의 성품을 취하여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常)과 무상(無常)과 같은 생각에 떨어져 망견(妄見)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인다.
마치 건달바신(乾闥婆神)이 허공에 환상으로 만들어 놓은 성(城)을 보고 어리석은 사람이 무지하여 진짜 성이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이것은 끝없는 옛날부터 습기로 계착한 생각이 나타난 것이지, 그 성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외도는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된 습기로 계착하여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常)과 무상(無常)의 견해에 의지하므로 자심(自心)의 현량(現量)임을 확실히 알지 못한다.
마치 어떤 사람이 남녀ㆍ코끼리ㆍ말ㆍ수레가 오가고 성(城)ㆍ읍(邑)ㆍ정원ㆍ숲ㆍ산ㆍ강ㆍ연못 등 갖가지로 장엄한 곳에 자신이 들어간 꿈을 꾸고는 깬 뒤에 기억해 내는 것과 같다.
대혜야, 네 생각에는 어떠하냐? 이와 같이 전에 꾼 꿈을 기억하여 생각하고 버리지 않으면 영리하다고 하겠느냐?”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범부는 악견(惡見)에 갇혀 있고, 외도는 지혜로우나 꿈처럼 자심의 현량임을 알지 못해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常)과 무상(無常)의 견해에 의지한다. 마치 그림에 그려진 사람처럼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데 저 어리석은 범부들은 높다거나 낮다는 생각을 한다.
이와 같이 미래의 외도도 악견과 습기가 충만하여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常)과 무상(無常)의 견해에 의지하여 스스로 무너지고 남도 무너뜨릴 것이다.
그 밖에 유(有)와 무(無)를 벗어난 무생(無生)을 주장하는 자들 역시 ‘없다[無]’고 말하며 인과(因果)의 견해를 비방하고, 선의 근본을 뽑아버리며, 청청한 인을 파괴할 것이다.
뛰어난 법을 구하는 자라면 멀리 버리고 떠나면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저들은 나다, 남이다, 함께 있는 것이다 하는 견해로 있다거나 없다는 망상을 일으켜 건립과 비방에 떨어졌으니, 그 악견으로 분명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마치 눈병이 난 사람이 눈에 아른거리는 머리카락[垂髮]을 보고선 여러 사람들에게 ‘너희도 이것을 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눈병에 아른거리는 머리카락은 필경에 성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성품이 없는 것도 아니니, 보기도 하고 보지 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외도는 망견(妄見)으로 희망하여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常)과 무상(無常)의 견해에 의지해 정법(正法)을 비방하며 자기도 무너지고 남도 무너뜨린다.
이는 마치 불을 돌렸을 때 생기는 바퀴 모양[火輪]은 바퀴가 아닌데 어리석은 범부는 바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으니, 지혜로운 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외도는 악견으로 희망하여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과 무상이라는 생각에 의지해, 모든 성품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이는 마치 물거품이 보배 구슬인 마니(摩尼)와 비슷하다고, 어리석고 지혜가 없는 사람이 마니 보배라 생각하고선 계착해서 쫓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저 물거품은 마니 보배도 아니고 마니 보배가 아닌 것도 아니니, 취하기도 하고 취하지 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외도들은 망상과 습기에 훈습된 악견으로 무소유(無所有)인데도 ‘생겼다’고 말하고, 연(緣)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없어졌다’고 말한다.
또 대혜야, 어떤 외도는 세 가지 양(量)과 5분론(分論)을 각각 건립한 뒤에 성지(聖智)를 스스로 깨달아 두 가지 자성을 벗어나게 되었다고 하지만, 일에 있어서 성품이 있다는 망상을 지어 계착한다.
대혜야, 심ㆍ의ㆍ의식과 몸과 마음이 변화되고, 자기 마음에 나타난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지는 모든 망상이 끊어져야 여래지(如來地)의 자각성지(自覺聖智)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그것에 대해서 성품이라거나 성품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다시 수행자가 이와 같은 경계를 성품이라거나 성품이 아니라고 하여 받아들이는 생각을 한다면, 그는 곧 장양(長養)을 취하는 것이며,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을 취하는 것이다.
대혜야, 만약 저 성자성(性自性)은 공상(共相)이라고 말한다면, 모두 화불(化佛)의 말이지 법불(法佛)의 말은 아니다.
또 모든 설명은 어리석은 범부가 희망하는 소견으로 생긴 것이다.
따로 자성으로 나아가는 법을 건립해, 성지(聖智)의 자각삼매(自覺三昧)를 얻어 즐겁게 머무는 사람을 위해 분별하여 드러내 보이는 것은 아니다.
이는 마치 물에 나무의 그림자가 나타나는 것과 같으니, 그것은 그림자도 아니고 그림자가 아닌 것도 아니며 나무 형태도 아니고 나무 형태가 아닌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외도의 견해는 습기에 훈습된 망상으로 계착하여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常)과 무상(無常)이라는 생각에 의지하는 것으로서 자심의 현량임을 알지 못한다.
이는 마치 맑은 거울이 연(緣)을 따라 모든 물질의 형상을 나타내지만 망상이 없는 것과 같다. 그것은 형상도 아니며 형상이 아닌 것도 아닌데, 형상과 형상 아닌 것을 보는 망상의 어리석은 범부는 형상이라 생각한다.
이와 같이 외도는 악견(惡見)으로 자기 마음에 형상이 나타난 것을 망상으로 계착하여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과 무상의 견해에 의지한다.
이는 마치 바람과 물이 화합하여 소리가 나는 것과 같으니, 그것은 성품도 아니고 성품 아닌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외도는 악견과 망상으로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과 무상의 견해에 의지한다.
이는 마치 초목이 없는 대지에 뜨거운 아지랑이가 실개천처럼 흐르고, 일렁이는 파도나 구름이 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그것은 성품이 아니며 성품 아닌 것도 아니니, 탐할 것이 없는 것을 탐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어리석은 범부는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된 습기에 훈습된 망상으로 계착하여 생기고 머물고 없어짐,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과 무상에 의지하여 스스로 머무는 문(門)을 반연하니, 역시 저 뜨거운 아지랑이를 일렁이는 파도로 보는 것과 같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주술의 기능을 일으켜 무정물[非衆生數]로 비사사(毘舍闍) 귀신을 방편으로 합성하여 움직이고 말하고 행동하게 하면 어리석은 범부는 망상으로 오고 간다고 계착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외도는 악견으로 희망하여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常)과 무상(無常)의 견해에 의지하니, 희론(戱論)에 계착된 것이며, 진실한 건립이 아니다.
대혜야, 그러므로 자각성지(自覺聖智)를 얻으려면 생기고 머물고 없어짐,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과 무상 등의 악견(惡見)과 망상을 벗어나야 한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환(幻)과 꿈, 물에 비친 나무 그림자 같고
눈병에 아른거리는 머리카락, 더운 날 아지랑이 같으니
이와 같이 3유(有)를 관찰하면
구경(究竟)에 해탈을 얻으리라.
마치 목마른 사슴의 생각과 같으니
동요하며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사슴은 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물이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식(識)의 종자가
동요하여 나타난 경계에
어리석은 범부는 망상을 일으키니
마치 가리개에 가려진 것과 같다.
끝없는 옛날부터 태어나고 죽으며
성품을 계착하여 성품으로 받아들였으니
쐐기로 쐐기를 빼는 것처럼
탐욕으로 받아들인 것 버리고 벗어나라.
주술로 움직이는 환(幻)과 같고
뜬구름ㆍ꿈ㆍ번개와 같으니
이와 같이 관찰하면 해탈을 얻어
영원히 세 가지 상속 끊어지리라.
그것들은 만들어진 일 없으니
허공의 아지랑이 같다.
이와 같이 모든 법 알면
곧 안 것도 없으리라.
언교(言敎)는 가명(假名)이며
그 역시 상(相)이 없으나
거기에서 망상 일으키니
음(陰)과 행(行)은 눈병에 아른거리는 머리카락 같다.
그림이나 눈병에 아른거리는 머리카락, 환(幻)
꿈이나 건달바성(乾闥婆城)
불을 돌렸을 때 생기는 바퀴[火輪], 더운 날 아지랑이 같아
없는 것인데도 중생에겐 나타난다.
상(常)과 무상(無常)과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역시 그러하여
끝없는 옛날부터 허물이 상속한 것이니
어리석은 범부의 어리석은 망상이다.
명경수(明鏡水)처럼 깨끗한 눈과
마니(摩尼)의 묘한 보배 구슬
그 가운데 온갖 색이 나타나지만
실은 어떤 것도 없다.
나타나는 모든 성품
그림이나 더운 날 아지랑이 같고
나타나는 온갖 여러 가지 물질
꿈과 같아 무소유(無所有)이다.
“또 대혜야, 여래의 설법은 다음과 같은 네 구(句)를 벗어난다.
그것은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常)과 무상(無常)이다.
유(有)와 무(無)의 건립과 비방을 벗어나 진제(眞諦)ㆍ연기(緣起)ㆍ도(道)ㆍ멸(滅)ㆍ해탈(解脫)을 분별하고 결집하니, 여래의 설법은 이것을 으뜸으로 한다. 성품[性]이 아니고 자재(自在)도 아니며, 무인(無因)도 아니고 미진(微塵)도 아니며, 시(時)도 아니고 자성상속(自性相續)을 설법하는 것도 아니다.
또 대혜야, 번뇌와 이염(爾炎)의 장애를 없애기 위한 까닭이다.
이는 마치 상주(商主)가 있지도 않은 108구(句)를 차례로 건립하여 모든 수레와 모든 땅의 모습을 잘 분별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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