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반야바라밀경 파취착불괴가명론 하권
22. 여래는 어떤 중생도 제도하신 적이 없다
다시 의심하여 말하였다.
“만약 여래께서 중생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면, 어째서 다른 교파들과 더불어 서로 차이가 없이 경에서
‘내가 선지식이 되었기 때문에 한량없는 중생을 태어나는 등의 모든 고통에서 다 해탈시킨다’라는 말을 했는가?”
그러므로 이런 의심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
경에 이르기를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께서 ‘내가 중생들을 제도했다’라는 생각을 할 것이라고 여기느냐?
여래께서는 실제로 어떤 중생도 제도하신 적이 없느니라”라는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이다.
‘중생이 없다’는 것은 제일의(第一義)이기 때문이고,
또한 큰 자비의 마음으로 자기 자신과 똑같이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다.
만약 실제로 여래와 다른 중생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제도해야 할 대상이 되기 때문에 여래에게도 곧 나라는 등의 네 가지 집착이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내가 능히 중생을 제도한다고 보면 이것은 아취(我取)가 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나라는 등에 집착하려고 하지 않는가?
경에 이르기를
“나라는 것에 대한 집착은 여래께서 집착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고 하였다.
‘아니다’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른바 선하지 않다는 말이다.
어떤 것이 착하지 않은 것인가?
모든 중생을 얽어매어 생사(生死)에 머물게 하는 까닭이다.
또한 ‘아니다’라는 것은 실체와 성품이 없다는 뜻이다.
여기엔 또 어떤 뜻이 있는가?
취할 대상도 없고 나 또한 취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니, 나라는 등의 집착은 얻을 만한 실체가 없다.
무엇 때문에 나라는 집착을 버리는 것이 집착이 아니라고 말하는가?
모든 범부들은 전도되어 망령되게 집착하므로 집착이 아니라고 말하여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경에서
“다만 무지(無智)한 범부생(凡夫生)이 망령되게 집착한다”라는 이와 같이 말한 것과 같다.
아직 성인의 지위를 증득하지 못한 사람들이 각각 나라는 데에 봉착해 차별된 생각을 내므로 범부생(凡夫生)이라고 말한다.
그는 곧 비생(非生)이며 불선생(不善生)이기 때문이니, 설하는 사람이 착하지 못하면 비인(非人)이 된다.
또 법은 인연을 따라 일어날 뿐 내가 조작함이 없기 때문에 비생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범부생이라고 말한 것은 세속을 따라 말한 것이다.
모든 중생들은 부처님의 색신(色身)에 대하여 대부분 집착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런 까닭에 다시 색신은 성품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서른두 가지 상호를 성취한 것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느냐?
전륜성왕(轉輪聖王)도 마땅히 곧 여래일 것이니라”라는 이러한 말을 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색(色) 등의 몸에서 법신(法身)의 이치를 깨닫게 하고 이 법을 받아 지니는 시간이 쉬워지게 하려 하였다.
그런 까닭에 게송을 설하였다.
만약 색상(色相)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고 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니
여래를 보지 못할 것이니라.
여래는 법(法)으로 된 몸이니
다만 마땅히 법성(法性)만을 관찰할 것이나
법성은 보이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또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색상으로써 나를 보려고 한다’는 것 등은 그 뜻이 무엇인가?
밝고 빛나는 상호를 보고 부처를 보았다고 말하고, 경전 등의 문자를 듣고 받아 지니고서는 나는 이것을 따라서 여래를 얻으리라고 말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 사람은 말한다.
“상호의 몸과 언설의 몸을 반연하여 닦고 익히면 마땅히 번뇌를 끊을 수 있을까?”
이런 의심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 경에 말하였다.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사람이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이 뜻은 무엇인가?
색(色)이나 문자(文字)는 그 성품이 진실하지 못하니 그 가운데 집착하면 이것은 삿된 도가 된다. 그러므로 이런 도를 행하면서 어떻게 부처를 볼 수 있겠느냐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볼 수 있겠는가?
경에 이르기를
“여래는 법으로 된 몸이니 다만 마땅히 법의 성품만을 관찰하라”고 하였다.
‘법의 성품’이란 이른바 공(空)한 성품이니, 자성(自性)도 없고 생성(生性)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곧 모든 부처님의 제일의(第一義)의 몸이니 만약 이것을 보면 부처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마치 경에서
“생겨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것이 바로 여래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십만송경(十萬頌經)』에서도 또 말하기를
“자씨(慈氏)가 공한 성품을 보면 이것을 여래를 보았다고 한다”라고 하였고,
『살차경(薩遮經)』에서는 또 말하기를
“집착 없는 것을 보면 이것을 부처를 보았다고 한다”고 하였다.
“만약 집착함이 없어야 부처를 볼 수 있다고 말한다면 법성(法性)을 반연하는 것은 장차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서 깨끗한 지혜의 마음으로써 법성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법성을 깨달아 알아야 할까?”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경에 이르기를
“법성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또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법성의 이치에서는 어떤 한 물건도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으니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저 지혜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대왕이여, 모든 법성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모든 물질이 의지하는 것과 같지만 그 체성(體性)은 물질이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물질이 없는 것도 아니다.
능히 그 가운데에서 적연(寂然)히 아는 것이 없는 것을 이름하여 깨달아 안다고 말한다”고 하였다.
‘이름하여 안다’고 하는 것은 속제를 따라 말로 설명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