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화수경 제6권
20. 구법품[2]
[많이 들음과 많이 듣는 방편]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법을 구하기 위하여 많이 들음과 많이 듣는 방편을 꼭 배워야 하나니,
무엇이 많이 들음과 많이 듣는 방편인가?
사리불이여, 그 많이 들음이라 함은 남에게서 듣는 것이요,
많이 듣는 방편이라 함은 스스로 생각하여 헤아리고 한마음을 오로지하여 바르게 생각하는 것이니라.
남에게서 듣는다는 것은 여러 부처님의 설하신 순도(順道)의 말씀이시니,
이른바 수다라(修多羅)ㆍ기야(祗夜)ㆍ사가라나[闍伽羅那]ㆍ가타(伽陀)ㆍ우타나(優陀那)ㆍ니타나(尼陀那)ㆍ아파타나(阿波陀那)ㆍ이제위다가(伊帝渭多伽)ㆍ사다가(闍多伽)ㆍ광경(廣經)ㆍ미증유경(未曾有經)ㆍ우바제사(優婆提舍)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남에게서 듣는 순도의 말씀이라 하느니라.
무엇을 생각하여 헤아리고 한마음을 오로지하여 바르게 생각하는 것이라 하는가?
법방편에서 5음(陰)ㆍ12입(入)ㆍ18계(界)ㆍ12인연(因緣), 인연으로 나는 법을 잘 알아서
‘이것은 희다[白], 이것은 검다[黑], 이것은 좋고 이것은 더럽다’라고
분별하고 가려내어 모두 법성(法性), 법상(法相), 법위(法位)에 들어간다.
이와 같이 통달한 것을 바른 생각[正念]이라 이름하느니라.
사리불이여, 여래는 방편으로서 5음을 연설하였지만 5음이 아니며, 12입과 18계를 설하였지만 계(界)도 입(入)도 아니다.
12인연을 설하였지만 인연이 아니며,
법이 인연 따라 만나고 설하였지만 일정한 상[定相]이 없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설하였느니라.
이런 까닭에 너희들은 마땅히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말아라.
범부는 지혜가 없어 말에만 따르거니와 지혜 있는 이는 뜻을 따르느니라.
[말과 뜻]
사리불이여, 무엇을 말[言說]이라 이르는가?
갖은 언음(言音) 문자(文字)의 차별은 모양을 취하여 추구하면 알 수 있고, 식별할 수 있고, 볼 수 있고, 끊을 수 있고, 증득할 수 있고, 닦을 수 있다.
모양이 있는 것, 모양이 없는 것, 심(心), 심수(心數)에 따라 의심할 만한 곳이 여기에 있고 저기에 있다고 분별하여 보여 주는 이와 같은 법은 모두 말이라 이름하느니라.
사리불이여, 무엇을 뜻이라 이르는가?
말로 보여 주는 것, 이것을 뜻이라 이름한다. 만일 뜻을 분별하면 곧 말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이런 까닭에 사리불이여, 꼭 알아 두라. 뜻은 말로 할 수 없다.
이 뜻을 쓴 까닭에 내가 경 가운데 설하기를
‘여래는 세간과 함께 다투지 않지만 세간은 나와 다툰다’고 하였느니라.
사리불이여, 오직 여래만이 능히 방편으로 음(陰)ㆍ계(界)ㆍ입(入)ㆍ12인연과 인연 따라 나는 법을 설하시고, 나머지 사람은 능히 설할 수 없느니라.
사리불이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과 선택법(選擇法)은 다툼이 없느니라.
[법과 선택]
어떤 것을 법이라 이르며, 어떠한 것이 선택인가?
사리불이여, 눈이 곧 법이며 귀ㆍ코ㆍ혀ㆍ몸ㆍ뜻이 곧 법이다.
왜냐하면 이 눈은 지난 때와 오는 때에 오히려 공(空)이어든 하물며 현재이겠느냐?
왜냐하면 눈의 성품이 스스로 이러하므로 이름하여 법이라 하고 귀ㆍ코ㆍ혀ㆍ몸ㆍ뜻도 지나간 때와 오는 때에 오히려 공이어든 하물며 현재이겠느냐?
왜냐하면 뜻의 성품이 스스로 이러하므로 이름하여 법이라 한다.
어떤 것이 선택인가?
눈을 선택한다는 것은 눈은 인연을 좇아 났으므로 공하여 정한 상(相)이 없다.
만일 정한 상이 있으면 마땅히 눈에서 눈을 얻을 것이다.
만일 눈에서 눈을 얻으면 곧 두 눈이 있다.
이와 같이하여 또한 안에 보는 이가 있으리니, 이러한 허물이 있다.
귀ㆍ코ㆍ혀ㆍ몸ㆍ뜻도 이와 같으니,
이렇게 선택하는 것을 법의 눈[法眼]이라고 이름하느니라.
[눈의 붙인 이름과 눈과 눈의 법]
이러한 뜻 가운데서 바른 소견의 대사(大士)는 눈의 붙인 이름과 눈과 눈의 법을 마땅히 관찰하여야 한다.
이 세 가지 일 가운데 어느 것이 실다운 것인가?
이와 같이 세 가지 일이 모두 공인 줄 알면 말만 있고 하나도 진실한 것은 없느니라.
왜냐하면 여러 가지 말은 모두 이 식처(識處)이다.
식의 아는 법은 모두 이 세간(世間)인데, 만일 세간의 법으로서 출세간(出世間)이 아니라면, 세간을 뛰어나지 못함은 곧 외도(外道)의 뜻이다.
만일 외도의 뜻이면 곧 불설(佛說)은 아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말씀은 출세간에 있는데 출세간법은 곧 말이 없는 것으로서 말의 길이 끊어졌고[言語道斷], 마음의 갈 곳이 없어졌느니라[心行處滅].
이런 까닭에 여래는 다시 말씀하시더라도 집착한 데가 없으며, 또한 결정하여 눈의 모양을 분별하지도 않느니라.
[유분[분별 있음]]
착하고[善] 착하지 않은 업의 인연에 따라 나니, 왜냐하면 눈은 이 유분(有分)인데,
무엇을 유분이라 말하는가?
12인연으로 말미암아 3유(有)를 나게 하느니라.
사리불이여, 무슨 까닭으로 이름을 유분이라 하느냐?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마땅히 이와 같은 눈을 얻으리라’고 하여
갖가지로 분별하여 눈의 과보를 좋아하고 즐거워하여 여러 티끌을 받으며,
눈에 애착하여
‘이것이 나다. 눈은 이것이 아소(我所)다’라 한다.
그러므로 유분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소멸하였다가 또다시 치연(熾然)한다.
온갖 고뇌를 아(我)ㆍ아소(我所)라 일러서 두 변(邊)에 떨어져 있으므로 유분이라 이름하느니라.
[유분의 비유, 구릿쇠 그릇의 소리]
사리불이여, 비유하자면 구리쇠 그릇을 쳐서 소리가 났으면,
그대는 이 소리가 밖에서 왔다고 하겠느냐? 안에서 있다 왔다고 하겠느냐?”
사리불이 답하여 말하였다.
“부처님이시여, 이 소리는 다만 여러 인연을 따라 있는 것이지,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이 여러 가지 인연의 법에 벌써 통달하였느냐?”
“아니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소리는 본래 있는 것이 없다. 다만 여러 가지 인연을 가자[假]하여 귀를 속여 미혹하게 하는 것일 뿐이니라. 이리하여 범부는 공한 눈 가운데서 탐내고 애착하느니라.
눈 가운데 눈의 상(相)을 얻을 수 없는데, 이와 같이 탐내고 애착할 것 없는 것 추구함을 선택이라 이름한다.
이른바 눈도 없고 또한 눈의 상도 없다. 귀ㆍ코ㆍ혀ㆍ몸ㆍ뜻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이때에 부처님께서 이 뜻을 밝히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비록 눈이 무상(無常)하다 말하지만
눈은 있는 것 아니네.
눈이 만일 없다면
무엇이 무상한 것이 되랴?
비록 귀가 무상하다고 말하지만
귀는 있는 것 아니네.
귀가 만일 없다면
무엇이 무상한 것이 되랴?
비록 코가 무상하다 말하지만
코는 있는 것 아니네.
코가 만일 없다면
무엇이 무상한 것이 되랴?
비록 혀가 무상하다 말하지만
혀는 있는 것 아니네.
혀가 만일 없다면
무엇이 무상한 것이 되랴?
비록 몸이 무상하다 말하지만
몸은 있는 것이 아니네.
몸이 만일 없다면
무엇이 무상한 것이 되랴?
비록 뜻이 무상하다 말하지만
뜻이 있는 것 아니네.
뜻이 만일 없다면
무엇이 무상한 것이 되랴?
이 12입(入)에 따르는 까닭에
12의 이름 있네.
만일 12의 이름 따르면
12입 마땅히 있으리.
지ㆍ수ㆍ화ㆍ풍으로 말미암아
화합한 까닭에 사람이라 이름해
범부의 명자(名字) 따르는 것
마치 개가 기와나 돌을 좇듯이.
어떤 사람 이름을 따르지 않고
아(我)도 분별하지 않으며
나는 다만 붙인 이름이라 알면
이 사람은 적멸 얻었네.
적멸 가운데 법으로서
적멸이라 이름할 이 없어
이렇게 말 없음을 설하니
말 없음이 곧 적멸이네.
이 법 가운데는 가는 것 없고
또한 가는 이도 없네.
누구든지 이것에 통달하면
적멸의 상을 알리.
만일 마음 가는 곳을 없애고
말의 길을 끊고
나도 없고 중생도 없게 되면
이를 일러 적멸이라 하네.
있는 것과 없는 것 분별치 않으니
이 분별 또한 공이네.
만일 마음에 열반을 생각하면
이 마음도 또한 있는 것 아닐세.
법에서 먼 것 보지 않고
가까운 것도 보지 않아
이 지혜의 눈 얻은 이는
적멸의 뜻 스스로 아네.
어떤 사람 이 법 듣고
바르게 관찰하는 이는
온갖 의심 반드시 끊고
어리석고 어두움 다 없애리.
의심 없고 뉘우침도 없으니
적멸하여 두려움도 없네.
결정코 실상에 머무르니
법에 걸릴 것 없네.
보살마하살은
미혹의 그물 능히 스스로 없애고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까닭에
법 가운데 의심 끊었네.
훌륭하고 묘한 논(論)으로써
법의 실상 나타내 보여
여러 희론(戱論) 없애버리니
너희들은 의심치 말라.
말이란 모두 다투는 것
이것 때문에 나쁜 갈래에 떨어져
누구든지 여기에 탐착하면
바른 법 연설하기 감당 못해.
이러함을 뜻에 따른다고 이름하니
근심 걱정 없애고
위없는 도에도 가까우니
이 뜻을 능히 행하는 까닭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