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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장엄경론 제6권
13. 홍법품(弘法品)[1]
[법으로써 남을 위하여 연설함]
[釋] 이미 구하는 법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법으로써 남을 위하여 연설함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얻기 어렵고 또한 견고하지 아니하나
중생들의 괴로움을 애민하여 항상 기쁘게 베푼다.
하물며 법으로써 세간을 이롭게 하니
증장함이 또한 다함없다.
[釋] 이 게송은 먼저 법의 간탐을 막은 것이다.
‘얻기 어렵고 또한 견고하지 않다’ 함은 이른바 몸과 목숨과 재물이다.
‘중생들의 괴로움을 애민하여 항상 기쁘게 베푼다’고 함은
보살이 오히려 항상 이 세 가지의 견고하지 않은 법을 버려서 괴로움과 액을 받는 여러 중생에게 베풀어야 하니, 그것은 자비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하물며 법으로써 세간을 이롭게 하니 증장함이 또한 다함없다’고 함은
어찌 하물며 큰 법을 얻기가 어렵지 않다면 간탐을 내겠는가?
그러기에 보살은 마땅히 이 법으로써 세간을 널리 이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법이 증장함을 얻기 또한 다함없기 때문이다.
[법의 이익]
이미 법의 간탐을 막았으니,
다음에는 법의 이익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자기의 증득은 말할 것 없고
중생들을 인접하여 법의 성품을 말하니
법신은 적멸한 입이기에
자비의 흐름이 큰 구렁이가 빨아들일 듯하다.
[釋] ‘자기의 증득은 말할 것 없고 중생들을 인접하여 법의 성품을 말한다’고 함은 세존께서 자신이 중득하신 법은 말씀하지 않으셨으니, 그것은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중생들을 인접하시어서 다시 방편으로써 법의 성품을 말씀하셨다.
[문] 무엇을 일러 방편이라 합니까?
[답] 법신은 적멸한 입이기에 자비의 흐름이 큰 구렁이가 빨아들일 듯하다고 함은,
모든 부처님은 법의 성품으로써 몸을 삼고 적멸로써 입을 삼았으니, 지극히 넓고 청정하여서 두 가지의 장애를 벗어났다.
그러나 큰 자비로써 가르침의 그물을 흘려 내어 중생들을 인접하는 것이,
비유하면 큰 구렁이가 입을 벌리고 침을 토해 내면서 여러 물건들을 빨아들이듯이
모든 부처님도 몸과 입과 자비로써 중생들을 인접하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
그것은 큰 자비가 다함없어 필경의 경지에 이르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수행은 과를 얻기 때문에
수행과 말씀은 뜻이 없지 않다.
다만 들음과 듣지 않음에
수행과 말씀은 곧 이치가 없다.
[釋] ‘수행은 과를 얻기 때문에 수행과 말씀은 뜻이 없지 않다’고 함은
모든 부처님께서 방편으로써 자신이 증득한 것을 말씀하시어 세간을 인접하신다.
그러기에 능히 행하는 자는 닦는 힘이 자재하여서 과를 얻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 수행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뜻이 없지 않다.
‘다만 들음과 듣지 않음에 수행과 말씀은 이치가 없다’고 함은
만일 다만 법을 듣고 참뜻을 보게 되면 그 수행은 이익이 없을 것이요,
만일 법을 듣지 아니하고 수행에 들어감을 얻으면 그 말은 이익이 없을 것이다.
[설법의 차별]
이미 설법의 이익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설법의 차별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아함의 설법과 증득의 말은
입으로 하는 것이요, 신통의 힘으로 말하는 것이다.
신통의 힘은 상호(相好)와
나머지의 색과 허공이다.
[釋] 모든 보살의 설법에는 두 가지의 차별이 있다.
하나는 아함(阿含)의 설법이니 이른바 입의 힘으로써 말한 것이요,
또 하나는 증득한 말이니 이른바 신통의 힘으로써 말하는 것이다.
신통의 말에는 다시 여러 가지가 있으니,
혹은 상호(相好)로 말하고 혹은 수림(樹林)으로 말하고 혹은 악기(樂器)로 말하고 혹은 공중에서 말하는 것들이다.
[설법의 성취]
이미 설법의 차별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설법의 성취를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두려움 없음과 의심을 끊음과
믿게 함과 또한 실지를 나타냄,
이와 같이 여러 보살의
말하는 것이 성취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釋] 여러 보살의 설법이 성취되는 데는 네 가지의 뜻이 있다.
첫째는 두려움 없음이요,
둘째는 의심을 끊는 것이요,
셋째는 믿게 하는 것이요,
넷째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니,
범천왕문경(梵天王問經)에서 말하기를
“보살에게 네 가지의 법이 구족하여야 넓고 큰 법의 보시를 능히 여는 것이다.
무엇을 네 가지라 하는가?
첫째는 미묘한 법을 포섭하여 다스림이요,
둘째는 자신의 지혜가 밝고 깨끗한 것이요,
셋째는 착한 대장부(大丈夫)의 업을 짓는 것이요,
넷째는 염오됨과 청정한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 첫째는 보고 들음이 많은 것이니 두려움 없음을 얻기 때문이요,
둘째는 지혜가 큰 것이니 의심을 능히 끊기 때문이요,
셋째는 이름과 이익을 의지하지 않음이니 남이 믿어 받게 함이요,
넷째는 세제와 제일의제를 통달함으로 말미암아 능히 두 가지의 진실을 나타내어 이른바 염오의 모양의 진실과 청정한 모양의 진실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아름다운 말과 취함을 벗어남과
물러섬이 없음과 다하지 않음이 없음과
가지가지와 서로 응함과
알도록 함과 이익을 구하지 않음
두루 교수함과
다시 성취함을 말한다.
[釋] ‘아름다운 말’이라 함은 남이 성내고 꾸짖을 때에 악하게 갚지 않는 것이다.
‘취함을 벗어난다’고 함에서 취하는 데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남이 칭찬할 때에 취함이요,
또 하나는 자기가 성취할 때에 취함이니,
이른바 집과 남녀 간의 색과 재산 등을 성취하면 좋아하고 기뻐함을 내기 때문이다.
‘벗어난다’고 함은 이와 같은 두 가지의 취함에서 마음이 멸하기 때문이다.
‘물러섬이 없다’고 함은 게으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하지 않음이 없다’고 함은 법의 간탐에서 벗어나 일체를 설하기 때문이다.
‘가지가지’라 함은 거듭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 응한다’고 함은 현량(現量)과 비량(比量)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알게 한다’고 함은 글자와 글귀를 알도록 하는 것이다.
‘이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함은 재산과 이익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게 하는 것이다.
‘두루 교수한다’고 함은 3승(乘)에 고루 입히기 때문이다.
[말의 성취]
이미 설법의 성취를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말의 성취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세밀하지 아니함과 조화(調和)와
선교(善巧)와 명료(明了)와
근기에 응함과 또한 구함을 여읨과
분량(分量)과 다함없음이다.
[釋] ‘세밀하지 않다’고 함은 도중(徒衆)에 두루 가득하기 때문이고
‘조화한다’고 함은 뜻에 즐겁고 맞기 때문이며,
‘선교하다’고 함은 글자와 글귀를 열어 보이기를 분명하게 하기 때문이며
‘명료하다’고 함은 쉽게 이해하게 하기 때문이며
‘근기에 응한다’고 함은 알맞게 따라 설하기 때문이며
‘구함을 여읜다’고 함은 이름과 이익을 위하여 설하지 아니함이며
‘분량’이라고 함은 즐겁게 들어 싫어함이 없기 때문이며
‘다함이 없다’고 함은 가히 궁구(窮求)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글자의 성취]
이미 말의 성취를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글자의 성취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이름을 들고 뜻을 해석하며
승(乘)을 따르고 또한 부드럽고 연하다.
쉽게 이해하고 근기에 응하여
출리(出離)함을 수순하기 때문이다.
[釋] ‘이름을 든다’고 함은 여러 글자와 글귀가 서로 응하여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뜻을 해석한다’고 함은 여러 글자와 글귀를 풀어 말하여 이치에 어긋나지 않게 함이다.
‘승(乘)을 따른다’고 함은 승을 따라 여러 글자와 글귀가 3승(乘)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부드럽고 연하다’고 함은 어려움을 떠나도 여러 글자와 글귀가 음성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쉽게 이해한다’고 함은 여러 글자와 글귀를 모아서 뜻을 얻음을 쉽게 하기 때문이다.
‘근기에 응한다’고 함은 중생에 응하여 여러 글자와 글귀가 근기를 따라 맞게 하기 때문이다.
‘출리(出離)한다’고 함은 여러 글자와 글귀에 있지 아니하고 열반을 향하기 때문이다.
‘수순한다’고 함은 여러 글자와 글귀를 바로 행해서 여덟 가지의 성스러운 도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보살이 글자를 성취하여
전과 같이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음성에는 예순 가지가 있으니
이것을 여래의 일이라고 말한다.
[釋] 여래에게는 예순 가지의 사의할 수 없는 음성이 있다.
『불비밀경(佛秘密經)』에 적정혜여래(寂靜慧如來)께서 예순 가지 음성의 말씀을 구족하셨으니, 이른바 윤택(潤澤)함과 유연(柔軟)함과 가의(可意)와 의요(意樂)와 청정(淸淨) 등이라고 이와 같이 자세히 말하였다.
이 가운데서 윤택한 음성이라 함은 중생들의 선근을 능히 가지고 조섭하기 때문이다.
유연한 음성이라 함은 현전(現前)에 법을 듣고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가의(可意)의 음성이라 함은 알맞은 뜻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의요(意樂)의 음성이라 함은 좋은 글자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청정한 음성이라 함은 더 위가 없이 세상에 출현하신 후에 얻기 때문이다.
무구(無垢)의 음성이라 함은 모든 미혹과 습기(習氣)가 서로 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명량(明亮)한 음성이라 함은 글자와 글귀를 쉽게 이해하기 때문이다.
선력(善力)의 음성이라 함은 공덕을 구족하여서 여러 외도들의 악하고 삿된 견해를 깨뜨리기 때문이다.
요문(樂聞)의 음성이라 함은 출리(出離)함을 믿어 순종하기 때문이다.
부절(不絶)의 음성이라 함은 일체의 외도들이 능히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조복(調伏)의 음성이라 함은 탐심 등의 번뇌를 능히 대치하기 때문이다.
무자(無刺)의 음성이라 함은 계율을 제정하여 방편을 즐기기 때문이다.
불삽(不澁)의 음성이라 함은 계를 범한 사람으로 하여금 바로 출리함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선조(善調)의 음성이라 함은 교화하고 교수하기 때문이다.
열이(悅耳)의 음성이라 함은 어지러운 마음을 대치하기 때문이다.
신의(身倚)의 음성이라 함은 능히 삼마제(三摩提)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심료(心了)의 음성이라 함은 능히 비발사나(毗鉢舍那)를 끌어내기 때문이다.
심희(心喜)의 음성이라 함은 의심을 잘 끊기 때문이다.
희락생(喜樂生)의 음성이라 함은 결정적으로 삿된 것을 뽑아버리기 때문이다.
무열뇌(無熱惱)의 음성이라 함은 믿어 받아서 회의하지 아니함이다.
능지지(能持智)의 음성이라 함은 들음으로써 지혜를 성취하여 그에 머물러 의지하기 때문이다.
능지해(能持解)의 음성이라 함은 생각함으로써 지혜를 성취하여 그에 머물러 의지하기 때문이다.
불은부(不隱覆)의 음성이라 함은 법을 간탐하지 않고 설하기 때문이다.
가애(可愛)의 음성이라 함은 자기를 이익되게 하는 과를 얻도록 하기 때문이다.
갈앙(渴仰)의 음성이라 함은 이미 과를 얻은 사람이 깊이 원하고 좋아하기 때문이다.
교칙(敎勅)의 음성이라 함은 사의할 수 없는 법을 바르게 말하기 때문이다.
영해(令解)의 음성이라 함은 사의(思議)할 법을 바르게 설하기 때문이다.
상응(相應)의 음성이라 함은 경험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유익(有益)의 음성이라 함은 그의 응함과 같이 가르쳐 보여서 인도하기 때문이다.
이중(離重)의 음성이라 함은 헛되이 설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자의 음성이라 함은 외도들이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코끼리의 음성이라 함은 크게 떨치기 때문이다.
번개[雷]의 음성이라 함은 깊고 멀기 때문이다.
용의 음성이라 함은 믿고 받들게 하기 때문이다.
긴나라(緊那羅)의 음성이라 함은 노랫소리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가릉빈가(迦陵頻伽)의 음성이라 함은 음운(音韻)이 맑고 맑기 때문이다.
범성(梵聲)이라 함은 멀리 나아가 퍼지기 때문이다.
명명조(命命鳥)의 음성이라 함은 처음부터 길상(吉祥)을 얻어서 모든 일을 이루기 때문이다.
천왕(天王)의 음성이라 함은 감히 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천고(天鼓)의 음성이라 함은 마(魔)를 처음부터 깨뜨리기 때문이다.
이만(離慢)의 음성이라 함은 칭찬하거나 헐뜯어도 마음을 높이지 않기 때문이다.
입일체(入一切)의 음성이라 함은 비가라론(毗伽羅論) 등 모든 갈래의 모양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부정(離不正)의 음성이라 함은 기억하여 잊지 않기 때문이다.
응시(應時)의 음성이라 함은 교화하는 일이 항시 일어나기 때문이다.
무수(無羞)의 음성이라 함은 이양(利養)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포(不怖)의 음성이라 함은 창피함과 부끄러움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환희(歡喜)의 음성이라 함은 들어도 싫지 않기 때문이다.
수사(隨捨)의 음성이라 함은 일체의 밝은 곳에 선교(善巧)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선우(善友)의 음성이라 함은 일체 중생들의 이익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상류(常流)의 음성이라 함은 서로 이어서 끊기지 않기 때문이다.
엄식(嚴飾)의 음성이라 함은 가지가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만족(滿足)의 음성이라 함은 한 음성에서 한량없는 음성으로 법을 설하기 때문이다.
중생근희(衆生根喜)의 음성이라 함은 한 마디 말에 한량없는 뜻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불훼자(不毁訾)의 음성이라 함은 세운 뜻을 믿고 순종하기 때문이다.
부증감(不增減)의 음성이라 함은 때와 양(量)에 응해서 설하기 때문이다.
부조급(不躁急)의 음성이라 함은 빨리빨리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변일체(遍一切)의 음성이라 함은 멀거나 가까이 있는 무리들이 똑같이 의지하기 때문이다.
일체종성취(一切種成就)의 음성이라 함은 세간의 법과 뜻을 다 비유를 써서 알게 하기 때문이다.
[설법의 큼]
이미 글자의 성취됨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설법의 큼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열어 연설하고 시설하며
건립하고 아울러 통틀어 들고
별도로 말하며 의심을 끊게 하여
간략함과 자세함을 다 알게 한다.
[釋] ‘열어 연설한다’고 함은 이른바 언설이다.
‘시설한다’고 함은 이른바 여러 글귀이다.
‘건립한다’고 함은 서로 잘 응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분별하여 열어 보이고 그 순서대로 통틀어 들고 다시 별도로 말하는 것이다.
‘의심을 끊음’이란 의미를 가볍고 생활 가까이에서 들어 알기 쉽게 풀어줌으로써 듣는 자가 설법 가운데에서 결정을 얻게 하는 것이다.
‘간략히 함’이라 함은 한 번 설하는 것인데 영리한 근기의 사람은 속히 알기 때문이다.
‘자세히 함’이란 거듭 말하는 것이니 그래야 둔한 근기의 사람이 이해하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말하는 자와 말하는 내용과
받아들이는 자의 3륜(輪)이 청정해야 하며
다시 여덟 가지의 허물을 여읜
말하는 자의 청정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釋] 말하는 자와 말하는 내용과 받아들이는 자의 3륜(輪)이 청정하다고 함에서
어떤 것들을 3륜이라고 하는가?
첫째는 말하는 자이니, 이른바 여러 부처님과 보살들이다.
둘째는 말하는 내용이니, 이른바 총체적인 말함과 이름과 글자 등 여러 가지이다.
셋째는 받아들이는 자이니, 이른바 앞에서 말한 간략한 말을 듣고 이해하는 자와 자세한 말을 듣고서야 이해하는 자들이다.
다시 여덟 가지의 허물을 벗어난 말하는 자의 청정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는 것은
곧 말하는 자가 청정하여 여덟 가지의 허물과 실수를 벗어남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문] 어떤 것들을 여덟 가지라 합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게으르고 이해하지 못하고
청함을 거절하고 뜻을 열지 못하고
의심을 끊어 주지 못하며
끊는다고 하여도 견고하지 못하고
싫어하여 물러서고 인색함 등
이와 같은 여덟 가지의 허물이
모든 부처님에게는 그 체가 없기에
그러기에 위없는 설법을 한다네.
[釋] 여덟 가지의 허물이라 함은,
첫째는 게으름이요,
둘째는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셋째는 청함을 거절하고,
넷째는 뜻을 열지 못하고,
다섯째는 의심을 끊어 주지 못하고,
여섯째는 의심을 끊어 준다고 하여도 결정적이 아니고,
일곱째는 마음에 싫어함이 있어 물러서서 일체의 때에 설하지 않고,
여덟째는 인색함이 있어 다 열어 보이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은 이와 같은 여덟 가지의 허물을 다 멀리 여의었다.
그러기에 위가 없는 설법을 이룬다.
[뜻이 성취됨]
이미 설법의 큼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뜻이 성취됨을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하다.
이 법은 때를 따라 착하고
믿음과 기쁨과 깨달음의 인이다.
뜻이 바르고 말이 교묘하여
능히 네 가지의 범행(梵行)을 연다.
[釋] ‘이 법은 때를 따라 착하고 믿음과 기쁨과 깨달음의 인’이라 함에서 때를 따라 착하다고 함은,
이른바 처음과 중간과 뒤의 착함이니
그 순서대로 들음과 생각함과 닦음의 때에, 믿음의 인이 되고, 기쁨의 인이 되고, 깨달음의 인이 된다.
깨달음의 인이 된다고 함은 정(定)의 마음으로 이 법의 도리를 관찰하여 여실(如實)한 지혜를 얻기 때문이다.
‘뜻이 바르고 말이 교묘하여 능히 네 가지의 범행을 연다’고 함에서
뜻이 바르다고 함은, 이른바 착한 뜻이요, 묘한 뜻이어서 세제(世諦)와 제일의제와 서로 응하기 때문이다.
말이 교묘하다고 함은 이른바 쉽게 받아들이고 쉽게 알아서 문장이 나타나고 뜻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능히 네 가지의 범행을 열어 보인다.
어떤 것들을 네 가지라고 합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남과 함께 서로 응하지 아니함과
갖추어 삼계(三界)의 미혹을 끊음과
자기 성품과 무구(無垢)이니
이와 같은 행을 네 가지라 한다.
[釋] ‘네 가지의 범행’이라 함은
첫째는 독(獨)이요, 둘째는 만(滿)이요, 셋째는 청(淸)이요, 넷째는 백(白)이다.
‘남과 함께 서로 응하지 아니함’이란 독(獨)의 뜻이다. 이 행으로 말미암아 외도(外道)들과 함께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갖추어 삼계의 미혹을 끊는다’고 함은 만(滿)의 뜻이다. 이 행으로 말미암아 갖추어 삼계의 번뇌를 끊기 때문이다.
‘자기의 성품’이라 함은 청(淸)의 뜻이다. 이 행으로 말미암아 무루(無漏)인 자기의 성품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무구(無垢)’라 함은 백(白)의 뜻이다. 이 행으로 말미암아 누진신(漏盡身)의 종류에 있어서 무구의 청정함을 얻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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