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 티엔 위안
수직으로 낙하하는 매화 향기는 장마에 젖지 않는다
바람에 기울어진 우산 위에 머뭇거리는 빗방울은
실크로드를 여행하고 싶어 한다
젖는 것은 발치에서 사라진 지평선뿐
산은 바람의 메아리를 숨기고
스펀지처럼 빗물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인다
나뭇잎은 맘껏 빗방울을 맞으며 푸른색을 더해간다
하늘 구석에 틀어박힌 태양은 제 알몸이 드러나기를 애타게 기다린다
곰팡이가 슬그머니 달 뒤편으로 퍼져가는 동안
썩은 나무는 버섯의 형태를 구상하고 있다 (한성례 옮김)
[단상] 중국 시인 티엔 위안(田原, 1965~)의 시집 『돌의 기억』(자음과모음, 2011)의 서시격인 「장마」를 읽는다. “수직으로 낙하하는 매화 향기는 장마에 젖지 않는다” 는 이 아름다운 아포리아의 도입부에 나는 오래 시선이 머문다. 긴 장마에 젖지 않는 것이 어디 있을까마는, 꽃의 향기는 비에도 젖지 않고 바람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꽃 중에서도 梅花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가. 검은 나무와 흰 꽃이 한몸인 매화에서 새로운 것은 오래된 것. “오래된 것은 언어 이전의 태고적 감각이자 인간 내면의 始原”(파스칼 키냐르, 『옛날에 대하여』)이라는 사실. 놀라운 것은 이만이 아니다. 빗줄기가 아닌 매화 향기가 수직으로 낙하한다는 시인의 상상력이 그것. 그리고도 남는 것은 매화의 고결한 빛과 향기가 허공이 아니라 대지와 인간을 향해 있다는 진실이다. 도합 여덟 개의 명사와 주어들(매화-향기, 빗방울, 젖는 것, 산, 나뭇잎, 태양, 곰팡이, 썩은-나무)의 상태와 행위로 이루어진 이 시에서 매화 향기 말고 바람에 기울어진 우산, 아니 그 위에 머뭇거리는 빗방울은 두려움이나 주저도 없이 먼 길을 떠난다. 머뭇거리다 떨어지면서 서로 엇갈려 부딪치는 비의 방울방울이 ‘우연과 변화의 근원’으로서 ‘클리나멘’(Clinamen)이라면, 실크로드를 여행하고 싶어하는 빗방울은 동경과 방황의 기지(機智)에 속한다.
한편, 우리는 슬픔에 젖고 추억에 젖고 문화에 젖고 일상에 젖는다. 이 경우 ‘젖는다는 것’은 단순히 물기로 인해 축축해지는 물리적 현상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대상을 온전히 받아들여 내면 속으로 깊숙이 스며드는 것이다. 배어들고 번지는 것, 새로운 감정이나 분위기에 깊이 빠져드는 것이다. 이 젖고 스미고 배이며 번지고 빠져드는 것이야말로 서정시의 근본 감정이 아니던가. 장마로 발끝까지 차오른 빗물 혹은 안개로 인해 (지평선의) 경계는 발치에서 사라지고 없다. 천지간 비와 안개 뿐. 산은 바람의 메아리마저 숨긴 채 빗물을 송두리째 빨아들이고, 나뭇잎은 생기가 돌며 푸르름을 더해 간다. 이제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마음 속 태양은 구름 뒤에서 드러나리라. 썩은 나무엔 버섯이 자라리라. 장마의 일상을 감각적이고 역동적으로 표현한 이 시에서 장마라는 어둠 속에서도 썩은 나무의 몸과 품을 빌려 버섯을 구상하는 생의 낙관은 어디서 오는가. 이방인으로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티엔 위안의 삶(현재 일본 도호쿠대 교수. 일본에서 가장 권위있는 시문학상-H씨상 수상)에서 새로운 희망을 본다. 장마라는, 장미의 빛이 발현되는 순간이다. 이제 곧 장마가 시작되리라. 창가에서 나는 세계의 슬픔과 리듬을 읽으리라. (김상환)
첫댓글 수고 많습니다. 젖음의 미학, 귀한 글 감상 잘 했습니다
빗줄기가 아닌 매화 향기가 수직으로 낙하한다는 시인의 상상력이 그것. 그리고도 남는 것은 매화의 고결한 빛과 향기가 허공이 아니라 대지와 인간을 향해 있다는 진실이다. - 한편, 우리는 슬픔에 젖고 추억에 젖고 문화에 젖고 일상에 젖는다. 이 경우 ‘젖는다는 것’은 단순히 물기로 인해 축축해지는 물리적 현상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대상을 온전히 받아들여 내면 속으로 깊숙이 스며드는 것이다. - 시적 상상력은 무지개와 같다. 김상환 평론가의 약평은 촌철살인이다. 내면 깊숙이 젖는 것이 어디 시뿐이랴, 천지간이 모두 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