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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칠언율시(七言律)
무흘사를 찾아가서(訪武屹寺)
파리 떼 덤비고 날씨 무더워 짜증이 나기에
멀리 푸른 바다의 만 리 물가가 생각이 나네
장평마을 정자나무 아래에서 들판을 바라보고
무흘사 연하 속에서 다시 누각에 오른다
풀이 창문을 가려 낮에도 어둑하고
거미가 집 지은 탑엔 얼마나 세월 흘렀는가
인간 세상에 흥망성쇠가 허다하였으니
그 실정을 안다면 눈물이 절로 흐르리
벗들과 구중산에 올라(與諸益登九重山)
솔숲 사이 앉았노라니 선방보다 나아
술을 사러 먼 마을에 간들 어떠리
바위 그림자 빈산은 함께 그윽하고
물소리 속에 오늘 또 황혼이 저무네
파도가 섬을 물어뜯어도 뼈대는 남았고
귀신들이 사람을 침노해도 끝내 넋은 있네
시상이 무궁한데 하물며 가절佳節임에야
붉은 단풍 고운 국화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청암사수도암에 올라(上靑岩寺修道庵)
평지도 걷기 어렵고 산길 오르긴 매우 더뎌
장성한 시절이 많이 남지 않았기에 두렵구나
바다에서 구슬을 찾는183) 솜씨는 이미 버렸고
명산에서 약초 캐자던 기약도 저버렸어라
깊은 골짜기에 눈이 휘날려 구름은 바위에 구르고
늙은 등나무에 바람이 불고 달빛은 가지에 밝아라
절간은 그림처럼 곱고 중은 말이 없는데
경쇠 소리 속에 향 연기만 피어오르네
수도암을 찾아가서(訪修道庵)
산길을 오르고 올라 선경을 찾아오니
고요한 가운데 진인은 도를 깨달았어라
반쪽 방문으로 보이는 강산에 이목이 나뉘고
빈 난간에 뜬 은하수는 병풍 위에 오르네
법당 곁 소나무는 세월이 흘러 용이 늙겠고184)
내 낀 바위는 하늘에 솟아 푸른 귀신인 듯185)
죽은 승려 너무도 애통해186) 우두커니 섰노라니
구름과 새 지나가고 저편 숲이 어둑하여라
옥과군 관음사 수익 스님에게 주다(贈玉果觀音寺修益師)
머나먼 타향이라 길손의 마음 처량한데
고사高士께서 이 강당으로 나를 찾아 주셨구려
간격이 없는 두 마음은 비록 달과 같지만
이별하는 지금 머리털 흰 것을 어이하리오
눈길 가는 곳은 붕새처럼 천 리 장도이지만
고개 돌리매 꿈속의 개미굴 만방이 분주해라187)
3척 거문고에 이제 지음知音이 없으리니188)
절류折柳189)라 이별 노래를 연주해 본들 어떠리
영호당에게 화답하다(和映湖堂)
만사가 부질없이 흐르는 백 년 인생
도리어 여관에서 잠시 머무는 것 같아라
향 연기 그윽한 곳에서 세상 잊으렸더니
청조가 날아오더니 문득 신선이 오셨구려190)
물든 국화 고운 단풍에 가을빛 저물고
뜬구름 흐르는 물은 석양 가에 있구려
예전에도 바삐 이별했는데 지금 또 이별이라
산중에서 백발의 두 사람 마주하고 슬퍼하네
송광사 금명당에게 화답하다(和松廣寺錦溟堂)
뵙고 보니 어리御李191)가 늦은 것이 부끄럽구려
조계산 위에 뜬 달이 창문을 비출 때로세
구슬을 찾은 망상罔象192)은 본래 실존이 아니니
꿈속에 들어갔던 진생陳生193)은 필경 누구인가
연하 낀 이곳 명승지를 찾아와서
송백의 세한歲寒 가지194)를 보고자 하였네
총림에 절로 고명한 분이 계시니
현묘한 법을 단연코 크게 피시리라
송광사 월화 강백과 함께 화엄사로 가는 도중에 입으로 불러 읊다(松廣寺月和講伯同行華嚴路中口號)
보고 듣는 것마다 풍경이 더욱 새로워
맑은 흥 바랄 뿐이니 속진을 어이 싫어하랴
바위에 안개가 끼니 나뉘는 광경이 괴이하고
마을은 숲 속에 감춰져 그림 같은 경치 참되네
밭두둑에 개는 앉아서 나물 캐는 여인 따르고
개울가 비둘기는 때로 밭가는 농부 곁에 지저귄다
나무꾼 노래 한 곡조 석양 저편에서 들리는데
온화한 모습 산들은 담담히 구름 속에 들어갔네
또(又)
몇 번이나 높은 재 넘고 깊은 시내 건넜던가
더딘 걸음으로 먼 길 앞서 가지 못해 부끄럽네
높은 나무에 찬 내 끼고 봄날 빨리 따스하며
엷은 구름에 외로운 새는 석양 가에 있구나
떠도는 길손이 무단히 몸만 늙어 가니
술 취한 몸 세상 밖에 잠이나 잔들 어떠리
주흥은 다하지 않았고 게다가 고사高士와 마시니
풍류는 꾸밈없이 천진한 본성에 맡겨야겠네
또(又)
발 씻고 갓끈 씻는 건 청탁淸濁에 맡기노니195)
더구나 덧없는 인생은 한바탕 꿈 같은 것을
맑은 물 담담한 산에 경치는 많고
한가한 구름 지는 석양은 고금의 정일레
들판에 맑은 안개 끌며 외로운 흰 새 날고
봄날 우거진 대숲 속에 큰 마을이 있어라
시상은 무궁한 데다 술 마셔 취하노니
숲 저편 어드매에 주막집 깃발이 보이느뇨
공림사公林寺
길을 걸어서 공림사 첩첩산중에 이르니
여기 절간은 그야말로 별천지로세
옥 봉우리는 높이 푸른 이내 아래 솟았고
옛 불전은 향내 그윽하고 대낮에 한가롭네
짧은 지팡이 걸어 두고 이곳에서 늙을거나
일대사는 마쳤건만 누구와 함께 돌아갈꼬
아까워라 시냇물은 속세로 흘러가니
서글피 와서 이끼 낀 바위에 앉았노라
沃川花日浦
몇 번이나 주막 지나고 서루196)를 지났던가
평평한 잔디밭에 앉아서 유유자적 쉬노라
산은 바위 높이려고 깎아지른 듯 섰고
물은 큰 고기 받아들이려 넓고 깊이 흐른다
푸른 연기 어지러이 이니 강촌의 저녁이요
시원한 바람소리 들려오니 들판 나무에 가을일레
임천에 그림자 떨어뜨리는 속리산의 달이
노년에도 유랑하는 이 중을 안타까워할 테지
定慧寺
덕숭산 위 그윽한 정혜사 경내
사바세계 세월은 만년이 흘렀어라
이 절은 친숙하니 전생에 왔던 곳이요
잣나무에 마음 공하니 오랜 세월 흘렀구나
부귀하던 집 문 앞에 유수가 흘러가고
제왕의 도읍 위에는 백운이 떠 있어라197)
제군들이여 장자 호접이 진여의 일이니198)
나도 이제부터 진흙탕에 꼬리 끌며 노니리라199)
동짓날 상순에 도하리 서당에서 강계200)에 부친 시(至月上浣在都下里書塾寄江界韻)
일없이 무심히 서당에 앉아서
반평생 영욕을 거울에 비춰 보노라
3월에도 꽃이 안 피어 봄은 아직 이르고
산 위 바위엔 눈 덮여 여름에도 추워라
깊은 산골 싫지 않으니 내가 늙은 줄 알겠고201)
서신은 어이 갑자기 끊겼소 그대 안부 궁금하오
장부는 속박을 안 받는 게 절로 좋으니
흥이 나면 찾아오는 것도 어렵지 않겠지
또(又)
멀리서 면가정202) 난간 위를 생각하노니
난간 가의 경치는 예전보다 더 좋은가요
비가 장미를 적시니 붉은 뺨이 젖고
바람이 버들에 이니 푸른 허리 차가우리
술 취한 뒤 시 지어 다시금 읊조리고
한가하니 모든 일 평안하지 않음이 없네
서신을 부치거든 강성203)의 즐거움 말하지 마오
탕자의 마음이 산골에 안주하기 어려워지리니
갑산 길에 들어서서 강계 아득포령을 넘으며(入甲山路踰江界牙得浦嶺)
세상에 남금204)을 쌓아 둔 게 무에 귀하랴
물외의 한가로운 흉금이 좋은 것을
자세히 송백 우거진 깊은 골짜기들 보니
점차 올라가는 연하는 만 길이나 깊구나
기이한 꽃들은 봄날의 빛을 변치 않았고
이상한 새는 태고 적 소리로 우는구나
백발 드리운 채 속진을 헤매는 길손이
어이 이곳에 깃들어 심신을 고요히 쉴꼬
장진을 지나는 길에(長津路上)
인가를 열 번 만나면 아홉이 빈 집
첩첩 봉우리들엔 새 울고 시내엔 물고기
먼지 묻은 삿갓은 소반 같고 맨발로 걸으며
동여맨 치마는 그물처럼 낡은 채 호미질 하누나
부엌 곁에 쇠죽 먹이니 땔나무와 쇠똥 섞였고
나무 엮어 벽 만드니 목책이 집이 되네
곤궁한 생계란 이루 말할 수 없으니
옥촉玉燭205)이 어이하면 이런 집들을 비출꼬
장진강을 지나며 세쌍둥이를 보다(過長津江見三胎子)
유월 바람소리가 쇠를 움직이듯 세차니
장진강 가에서 옷깃이 싸늘하구나
세쌍둥이는 참으로 보기 드무니
지팡이 짚고 먼 길을 찾아본들 어떠리
들판 가득한 풀들은 모두 시든 빛이요
진종일 덕담을 들을 사람이 없구나206)
사방 돌아보며 읊조리다 시상에 잠기노니
나의 이 마음속을 그 누가 알꼬
서회書懷
변방에 머문 것 애초에 잘못 생각했노니
고향 생각 천 갈래를 어이 다 형언하리오
늙고 병들어도 산골 인연 물리치기 어렵고
문장을 누가 구하랴 초개처럼 가벼이 여긴다
반쪽 하늘 구름 걷히니 층층 봉우리 푸르고
깊은 골짜기 바람 이니 낙엽이 지는 소리
본래 돌아가지 않았을 뿐 돌아가면 되는 것을
동산에 가득한 소나무와 국화207)를 좋이 보련만
또(又)
늙은 주모 장사치와 어울려 지내노니
도회韜晦208)에는 원래 둥글둥글한 게 좋은 법
저물지 않아 불빛이 가니 산의 표범 내려오는 게고209)
깊은 가을바람이 몰아치니 변방 기러기가 돌아오누나
인간 세상 보배인 금옥도 탐내지 않거니와
물외物外의 한가로운 연하煙霞 세계도 잊었노라
초탈하여 의심 없어 마음이 자득自得한 것은
단지 예전에 현묘한 관문을 보았기 때문일세210)
창평211)의 빗장수 양씨에게 답하다(答昌平粱梳商)
가물대는 등잔불 앞에 그대와 함께 앉아
상전벽해처럼 덧없는 세월을 가련해 하노라
뜬구름처럼 영외에서 온 이 사람은
낙엽 소리 속에서 학동들을 벗한다오
산골은 추워서 얼음과 눈이 허리까지 쌓이고
세상은 혼란해 오랑캐 먼지가 시야에 가득해라
천 리 먼 길을 부디 조심해 가시오
변방에서 못 돌아가는 이 늙은이는 부끄럽구려
강계 종남면에서 이여성李汝盛에게 화답하다(江界終南面和李汝盛)
풍진 속에 다행히 이 몸을 지탱하여
늘그막에 걸림 없이 마음대로 소요하노라
천 촌락에는 날이 따스해 제비 어지러이 날고
태고산에는 날씨가 추워 꾀꼬리 울음 더디네
강가의 풀에 본래 길손이 꿈꾸느니212)
벗과 만나서 촌 막걸리 마신들 어떠리
하고 많은 영고성쇠 이제야 깨달았으니
흰 구름 깊은 곳으로 그대 찾아왔노라
이 교사와 밤에 읊다(與李敎師夜吟)
황망한 세상사 실로 지탱하기 어려워
취할 때 취하고 깰 때 깨며 그럭저럭 사노라
강가의 봄꿈에 그리워한 지 오래였는데
종남終南213)의 서재에서 이 만남이 더뎠어라
첩첩 산은 적적하고 등잔불만 밝은데
흐르는 물 하염없듯 백발이 다가오네
어이하면 대궐 문을 밀치고 들어가
「하동부河東賦」214)를 올려 한번 말해 볼거나
심회를 쓰다(書懷)
백구와 부평초처럼 정처 없는 몸이라
어디에서 역력히 이내 마음 말할거나
말을 잃은 게 복이 아닐지 어이 알리오215)
학은 돌아갔는데 어이 신선 배우지 않느뇨94
산 공기는 쇠처럼 찬데 바람은 만 골짜기에 불며
눈꽃은 솜처럼 흰데 달은 천 가지를 비춘다
노중련이 바다 밟았던216) 건 어려운 일 아니나
부모님 고향을 떠남에 걸음걸음 더디어라217)
제야(除夕)
온갖 생각에 암울한 마음 어이 말로 표현하랴
산은 깊고 눈은 차가운 곳 한 서재로세
지난해 청명에는 강계읍에 있었고
올해 제야에는 갑산 마을에 머문다
이윽고 고향이 꿈속에 먼저 들어오니
뜻하지 않게 울적한 객수客愁를 잠시 잊노라
등잔불 가물가물 떠들썩하던 소리도 조용해지니
이웃 닭 울음 기다리느라 몇 번이나 방문 기대었나
설날(元旦)
소리 없는 하늘218)에 감히 호소하노니
오운五雲219) 떠 있는 어느 곳에서 어가에 절할거나
설날에도 타향에 있는 몸 스스로 가련하지만
변방 산골 예의 좋아하는 마을이라 다행일세
연초에 햇살이 퍼지니 정양하기에 좋고
역질 물리치느라 도소주를 남김없이 기울인다
아이들은 나라의 한을 알지 못하고서
거리에서 떠들썩하게 피리와 북 울리네
우연히 읊다(偶吟)
섶에 불이 붙으면 꺼지기 어렵나니
골취삼220) 속에서 세월만 깊어 가누나
꽃술과 꼭지는 천주天柱221)인 듯하고
산의 정령 나무 요괴가 불심을 증명한다
시방 허공의 본원에 구름은 펼쳐지고
한 껍질 안 사바세계에 비가 내린다
미진을 못 깨뜨리면 경의 뜻 안 드러나
양등삼천222)은 실로 찾기 어려우리
[1]
물 긷고 향 피워서 복을 빌면서
마귀 굴속에서 나귀 해 보낸다
몇 겁 동안 약상223) 신세 물속의 거품
이 몸이 불 속에 핀 연꽃임을 문득 알겠네
소를 모는 것이 오대산 성인224)임을 누가 알리오
북을 치는 여암 선인225)을 만나기 어려워라
망념을 잊은 한 생각이 도리어 구속받는 것
봄새가 울어 나그네 잠을 깨우누나
[2]
평소의 뜻이 그윽한 산을 좋아하여
일찍이 이 암자 찾아와 가을을 보냈었지
긴긴 날 경치 구경할 제 저물녘 새는 돌아오고
속진의 만사 꿈 같은데 조각구름은 흘러간다
화악산 저편으로 북쪽 하늘은 멀고
홍양洪陽226) 저 앞에 서쪽 바다 떠 있어라
풍광은 예와 같은데 내가 다시 와서
몇 구절 시로 옛날 놀던 곳을 읊노라
[3]
그윽한 숲 속에 비 피해 몸 숨기니
서늘한 한기가 일어 여름이 가을 같네
시골 늙은이는 딱한 몰골 중을 불쌍히 여기고
학동들은 부질없이 느긋한 나를 비웃는구나
가야산227) 빛은 구름 속에서 젖고
나박천228) 소리는 들길 위에 들리네
이번 길 이미 저물고 옷차림도 후줄근하니
암자에 들어가서 자고 내일 노닐어야겠다
[4]
영화와 고생 겪어 보니 똑같이 신고라
가야산 속에서 그윽한 경치를 찾노라
새는 노래하고 꽃은 웃으니 마음은 무한하고
달은 밝고 바람은 맑으니 도는 가난하지 않네
하물며 유성維城229)의 장엄한 세계가 있어
응당 황극皇極230)을 가지고 중생을 구제하리니
이제부터 누더기 한 벌 겹겹이 기워 입고
산을 내려오지 않고 이 몸 늙어 가리라
[5]
몇 번이나 벌레 울고 새 노래했던가
안타까워라 세월은 물처럼 흘러가네
내가 용을 베는231) 줄 아는 것 나뿐인데
묻노니 그대 고양이 그리는232) 건 어떠한가
허공이 이미 무너져 모든 세계 고요하니
산수에서 거듭 많은 부처님을 보노라
착한 벗이 지성스레 가르침을 청하니
부디 일념이 사마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오
[6]
거처하기 좋은 맑은 세계 하나 있으니
아득한 공겁 이전에 이미 이뤄져 있었네
목녀와 석인은 마음이 본래 진실하고
별과 등잔 가물대도 허망한 것 아니지
봄빛 물든 사바세계로 곡하며 오고
푸른 허공 고금 밖으로 웃으며 들어간다
범부와 성인 한 덩어리였다 도로 나뉘니
벗을 찾아 함께 머묾에 흥이 적지 않아라
감회가 있어(有感)
머리 긁적이며 떠나는 그대 생각하노니
만류해도 안 되니 이내 마음 시름겹구려
눈 덮인 길에 탁발하느라 고생하였고
얼음판 길에 술 가져오는 것 가련하였지
현실에서 마땅한 도리를 알지 못한다면
지극히 오묘한 도를 어찌 찾을 수 있으랴
염량세태 세상을 이미 다 겪고 보니
산은 스스로 푸르고 물은 스스로 흐르는 것을
우연히 읊다(偶吟)
풀무로 온갖 방법 써서 정련하건만233)
도가 어찌 밖에 있으리오
하늘에 꽂힌 산을 보고도 무문인無文印을 알지
못하지만흐르는 물을 내맡겨 두니 무여無餘234)에는 익숙하여라
지위에 안 앉은들 누가 권세 지위가 없다 하랴
몸 잃었어도 애초에 사람 사는 곳 떠난 게 아니지
손을 놓고 돌아오니235) 바로 이것이니236)
감히 보장하노니 행인들이여 주저하지 말라
또(又)
부처니 마구니니 모두 쉬지 못하니
신령한 기봉은 모두 수중의 낚싯바늘237)에 있어라
붉은 꽃 밟는 해골은 깊은 봄날에 웃고
흰 머리털 어린 아기는 겁석238)보다 오래 살았네
어젯밤 꿈 허망하고 내일도 그러하니
이 마음 깨닫지 못하고 밖으로 무엇을 찾는고
안타까워라 모든 일 끝내 예측할 수 없으니
이별 앞에 감정이 복받치고 시름겹구려
인풍루239)에 앉아 판상板上의 시에 차운하다(坐仁風樓次板上韻)
강계 땅 석양에 강가 누각에 앉았노라니
강가 버들은 안개 같고 강물은 흐르누나
술 반쯤 취한 사내 이 무슨 세계인가
거문고 속 꽃과 달은 절로 봄가을이로세
산의 구름은 비를 끌어 처마 끝에 날리고
강의 새는 물고기 물고 난간에 오르네
덧없는 세상 다난하고 몸마저 병들었으니
심상한 오랑캐 피리소리에 시름이 이누나
또(又)
서쪽 변방 지키는 웅진에 높은 누각이라
유유한 지난 일에 세월은 얼마나 흘렀는가
별들이 그림자 흔드는 밤에 산보하고
제격鶗鴃이 꽃 꺾는240) 가을에 홀로 시 읊노라
물은 바다로 이어져 천 구비 요란하고
산은 요동으로 들어가 만 봉우리 솟았네
난간에 기대어 긴 휘파람 불고 섰노니
장부에게 어찌 한가로운 시름이 있으랴
박리순과 회포를 풀다(與朴利淳叙懷)
연하 그윽한 곳에 솔숲이 서늘하니
땅에 가득한 맑은 빛 자세히 보노라
부귀는 뜬구름 같아 바라는 바 아니니
초야에 묻혀 세상 잊는 게 무에 어려우랴
집 생각에 머리털은 가을 들어 부쩍 세고
나라 걱정에 일편단심은 늙을수록 더해라
신선술을 배우려 학을 따라가고 싶지만
임금님 생각하니 터무니없는 생각일 뿐
포청동 이 선생에게 화답하다(和捕廳洞李先生)
기국器局이 그대 같은 이 산처럼 무거우니
온갖 일로 바쁜 중에도 방 안이 고요해라
고을이 추우니 술 힘으로 오래 취하기 어렵고
세상 혼란하니 시 명성은 한가할 때보다 더해라
바람이 적막한 강을 치니 국면이 위태하고
달은 황량한 변새에 흐르고 높은 봉우리 적어라
한성은 아득히 멀어 천여 리 길이니
서글퍼라 이번 길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
김담여·김소산·오하천과 단란히 모여(與金淡如金小山吳荷川團會)
시국 위태함과 몸 늙음 모두 근심스러운데
우연히 한가한 틈에 오늘 즐겁게 노누나
반쪽 방문 너머로 산들은 면목을 남겨 두었고
외로운 성에 깊이 쌓인 눈은 의관에까지 오르네
부러워라 그대는 학과 매화를 처자식으로241) 은거하거늘
부끄러워라 나는 바람 옷에 물 패옥242)이라 빈한하다오
하늘에 석양이 질 때까지 술을 마시고
술 취해 그대 시축을 가지고 재삼 보노라
최문화에게 화답하다(和崔文華)
시국 걱정에 외진 곳 찾아와도 흥이 없어
지금 얼마나 멀리 얼음길을 밟고서 왔던고
하늘 아래 덧없는 인생은 끝내 운수가 있고
술동이 앞에 백발의 몸은 무능함이 안타까워라
숲이 황량한 옛 성곽에 시 읊는 소리 새로 들리고
깎아지른 벼랑 차가운 돌길에 석양이 비치네
뉘 알랴 이번 길에 화제가 되었던 것이
맑은 향기가 훗날 더욱더 세상에 알려질지
황린리 노상에서 입으로 불러 읊다(黃麟里路中口號)
황린리 노상에서 다시 상념에 잠기노니
도탄에 빠진 백성들 지금 다 같은 모양일세
쑥대머리로 베틀에 앉아 새벽 서리 내리도록 베 짜고
땔나무 하느라 갈라 터진 손으로 빗속에 숲에서 낫질하네
누군들 부모 없으랴만 전란의 고통 근심스럽고
설령 전답이 있은들 아전들이 침탈하누나
모든 것 잊으려 해도 천일주243)를 구하기 어려우니
시름겨운 이 마음을 누가 억누를 수 있으리오
진평리에서 최문화와 이별하며(津坪里別崔文華)
세상에 살면서 마음 알아주는 벗이 귀한 법
떠나가면 이내 발길 몇 번이나 다시 찾아올까
비록 뜬구름이야 아침저녁으로 변하지만
고금에 변치 않는 청산이 어찌 없으리오
여름에 무성한 숲은 솔의 푸름이 아니요
봄에 지저귀는 새소린 학의 울음과 다르지
적적한 양쪽 강변의 밤에
석별의 정으로 다시금 시를 짓는다오
영변의 신시장을 지나며(過寧邊新市場)
시 읊고 술 마시며 호걸인 양 뽐내며
신시장 중에서 나그네 회포를 달래노라
큰물은 아득히 멀리 천 리를 달려가고
큰 봉우리 높이 솟았고 벼랑들은 가파르네
하늘에 닿을 도덕을 뉘라서 우러러보랴
바다와 같은 문장은 말하지 않아도 안다네
질곡과 같은 영욕은 모두 떨쳐 버리니
반생을 짝하고 살 구름과 학이 절로 넉넉해라
오수산 아래에서 눈 내리는 밤 감회가 있어(烏首山下雪夜有感)
오수산에 눈 깊이 쌓여 다시 갈 길 멈추노니
친척과는 어느 해에나 묵은 정담을 나눌꼬244)
서쪽에 달 지니 첩첩 산골에 새벽이 밝아 오고
북풍은 높은 나무에 불어 한겨울에 울어댄다
문장은 비록 해박하지만 황금은 떨어졌고245)
세상 경영할 길은 없고 백발만 생겨나누나
관솔불 꺼져 가는 밤에 늦도록 술 마시고
문 열고 길게 휘파람 부니 마음 추스르기 어렵구나
신덕재에서 김일련과 회포를 읊다(新德齋與金日連咏懷)
신덕재에 머물러 취한 노래를 부르니
쓸쓸한 이 몸은 다정한 접대에 매우 감사하오
백화는 어이하여 아직 봄꿈이 남았느뇨
만사는 본래 모두 겁파에 휩쓸려 가거늘
비좁은 달팽이 뿔246) 위에 돌집을 만들었고
둥그런 밝은 달은 안개 낀 삿갓 모양이어라
변새에 구름은 흐릿하고 오랑캐 먼지 이는데
그대 같은 지기와 이제 어이 이별할꼬
김소산의 서재에서(於金小山書幌)
걸음걸음 무단히 동쪽 서쪽 오가면서
반궁泮宮247) 높은 곳에서 가을바람에 만났지
얄밉게도 못된 풀은 뽑아도 다시 푸르고
안타깝게도 좋은 꽃은 떨어졌어도 붉구나
하늘의 구름 그림자는 외로운 성 위요
진종일 강물 소리는 첩첩산중에 들린다
또한 밝은 달은 떴고 술이 깬 밤에
어이 시 얘기를 그대와 나눌 수 있을꼬
공귀리에서 벗들에게 화답하다(公貴里和諸益)
유유한 발길이 다시 이 집에 이르니
어진 인품 뛰어난 문장은 세상에 드물어라
다 같이 고생하며 나라를 자기 집처럼 여겼고
온갖 풍상 다 겪으며 임금을 내 몸처럼 사랑했지
산은 추워 암혈에는 해가 지나도 눈 쌓였고
동네는 깊숙해 초가집 처마엔 종일 구름 덮였네
이 해도 흘러갔는데 늙고 병들었으니
머나먼 타향에서 정든 벗 이별하기 몹시 어렵구나
[1]
그대들과 함께 회포를 얘기하노니
반평생 겪은 염량세태에 모든 상념이 비었네
며칠 밤 꿈속의 넋은 속진의 굴레를 벗어나
내 낀 숲 속 외로운 마을에서 시를 읊노라
흥망에 감회 있으니 요동 학248)이 생각나고
화복은 알기 어려워 변새 노인249)을 생각한다
군자는 마음 안정하라 성인이 경계하셨으니
원래 영달을 구하지 않거늘 곤궁할 게 있으랴
[2]
앉아 있음에 작은 창 있은들 어떠리
맑고 시원한 강물 소리 듣는 것도 기뻐라
술 한 병 놓고 마주하니 청산은 만 겹이요
천 리 먼 길 돌아오니 한 쌍의 백발 노인일세
술에 병들어 근래 나랏일 잊으려 했더니
신선 찾아온 이곳에서 다시 고을 다스리네250)
서늘한 대자리 담백한 나물 위안이 되니
서울에 살 때의 생각을 잊고 싶어라
[3]
술 마시고 시 지으며 질탕하게 노니
들끓는 풍진세상인들 우릴 어떻게 하리오
동풍은 점차 산들의 눈을 녹이니
훗날 마침내 만리의 파도를 이룰 테지
마음 통하는 사이인데 이제 이별하지만
흥이 일면 다시금 찾아올 수 있으리
숲 속의 집은 청량하여 속진과 머니
덕분에 상전벽해에 머리털 세는 것 잊노라
[4]
신학문과 구학문 모두 희미하니
통음하여 세상 시비를 모두 잊노라
구불구불한 창자 속 갈증을 그치게 하고
여윈 겨드랑이에 마치 날개가 돋혀 나는 듯
병든 상수리나무가 서리 맞아 늙는 게 슬프더니
신령한 싹이 비를 맞아 돋아나는 게 기쁘구나
주머니 속에 든 보배로운 비결 뉘라서 알리오
때때로 가벼운 육수의六銖衣251)를 걸친 듯해라
[5]
얼음은 긴 강을 덮었고 눈은 누대에 가득해
2월에 공귀리 마을로 다시 찾아오노라
햇살이 화창하니 봄을 노래할 만하고
홍안을 다시 얻으니 늙어도 술 마심직해라
친구의 우정은 천금처럼 고귀하고
요동 변새에 행장은 하나의 나막신뿐
우리가 즐거운 일 없음을 하늘이 안타까워하여
연월을 남겨 주어 우리 함께 서성이노라
[6]
며칠이 잠시 동안인 양 지나가 버려
그대 시 얘기 듣느라 떠도는 신세 잊었노라
긴 물가에 백구와 은거할 맹서252) 없지 않거늘
명산에서 약을 캐리라던 기약 잊을 수 있으랴
골짜기에 맑은 날 눈 내리고 구름은 바위에 구르며
늙은 등나무에 바람은 불고 달빛은 나뭇가지에 밝아라
가사 좋은 운수 만나 영달한다 하더라도
지금 모든 것 잊고 어리석게 사느니만 하랴
[7]
그대의 뜻과 절개는 천 봉우리처럼 높으니
그대의 마음과 간장은 큰 종처럼 클 테지
하늘의 뜻은 어이하여 태평한 시절 적은고
세상길은 원래 험난한 곳이 겹겹이로세
섬돌을 감도는 맑은 시냇물 소리 옥처럼 맑고
마루에 비쳐 드는 푸른 봉우리는 칼날을 꽂은 듯
나를 아끼는 마음 두텁고 나를 생각함이 간절한데
찾아와 모심이 태반은 게으른 게 스스로 부끄럽네
[8]
백대토록 속진이 영영 침노하지 않느니
푸른 소나무는 늘 몰현금을 연주하누나
지은 시는 높은 소리로 읊음이 마땅하지만
술 마실 땐 조금씩 따라서 마신들 어떠리
봄눈 속에서 동자는 장작을 쪼개고
석양이 지는 산속에 여자애는 물 긷는다
산골은 깊고 민심은 순박해 청한하니
이 고을에서 이 마음을 기르길 바라노라
희천253) 두첩사에 앉아서(坐熙川頭疊寺)
≺무생곡≻254) 노래 한 곡조를 부르니
대천사계에 온통 금빛 물결이 일어난다
뉘라서 대도는 사람과 멀지 않다 했느뇨255)
덧없는 인생이 꿈과 같음을 어이하리오
긴긴 날 산의 빛은 맑게 자리에 들어오고
먼 마을의 숲 그림자는 어지러이 비탈에 이어졌네
잡아 보면 낱낱이 다 참된 본래면목인 것을
무엇하러 시비를 따져 부처와 마구니를 구별하랴
동짓날에 벽동 창명학교에서 박형관 및 다른 벗들과 함께(冬至日碧潼暢明學校朴亨觀與諸益)
뜻밖에도 좋은 인연으로 학교를 찾아와서
좋은 시편 무릎을 치며 읊으니 뺨에 향기가 이누나
송창에 자리 만드니 기대앉을 만하고
산나물 소반에 오르니 담황색이 좋아라
집안에 들어앉아 수레 만드니 그대 뜻은 멀고256)
곤궁한 길에 삽을 메니257)길손의 회포는 많아라
동포로 사랑하고 벗으로 우정이 간절한데
게다가 이별하는 터라 술 한잔을 함께 비운다
봉천대에 노닐며(遊奉天臺)
멍하니 세상사 잊고 불문을 찾아와서
깊은 산속에서 사슴들과 함께 어울린다
공자의 임금에 충성하는 예를 일찍 행했고
석가의 세상 벗어난 글을 늦게 깨달았네
깊은 산골에 봄이 오니 온갖 새들은 지저귀고
빈 물가에 날이 따스하니 돌아가는 구름 적어라
늙은 중이 밥을 지어 은근한 정으로 대접하니
희사喜捨의 남은 풍속이 가상하다 할 만하구나
임 상사에게 화답하다(和林上舍)
만사는 덧없고 흰 머리털만 가득한데
세상에 쓰이지 못한 채 병만 침노하누나
술병 놓고 자연 속에서 다행히 마주하니
천 마디 말로 금옥의 소리258) 낸들 어떠리
햇살 따스한 강촌에는 버들가지 하늘거리고
봄이 온 산속에는 기이한 새들이 지저귄다
그대와 동과同科259)한 터라 우정이 간절하니
관하關河에서 머무는 마음 떠나는 마음 슬프구나
하청동에서 오하천과 단란히 만나(河淸洞與吳荷川團會)
고사인 하천의 집 산속에 있으니
5월이라 외진 마을에 시냇물만 흐른다
인간 세상 득실에 누가 새옹의 말을 알리오
10년 부침浮沈에 나는 강가의 백구 벗하노라
게으른 구름이 지붕 위에 나는 한가로운 대낮
짙은 나무 그늘이 창을 가려 가을처럼 서늘하네
거문고 연주하고 시 읊고 시 읊고는 술 마시니
나그네 시름을 잠시 동안이나마 잊을 만하여라
[1]
고요히 살면서 성현의 공부를 배우니
백 대의 속세 풍진이 이곳에 이르지 못했네
설사 흐릴 때 있더라도 마음의 달과 같고
매사에 온화하니 덕은 훈풍과 같아라
떼 지어 풀숲에서 우는 푸른 개구리 소리
긴긴 밤 등잔에 날아드는 붉은 나비의 날개
부귀공명에 그릇 집착해 몸 이미 늙었는데
주인께서 내 마음 알아주니 매우 고맙구려
[2]
벗이 나란히 찾아오니 10리 길이 빛나누나
희미한 하청재 안에서 함께 앉아 있노라
꽃은 비록 나무에서 져도 새는 지저귀고
돌은 혹 벼랑에서 구르고 물은 나는 듯해라
좋은 시 그득한 술로 마음껏 즐기지만
마음은 젊어도 머리털 센 것이야 어이하리오
이 성대에 산속에 은거하도록 해 주셨으니
도문에서 고기 씹는260) 것이 무에 부러우랴
[3]
푸른 버들 하늘거리고 제비 꾀꼬리 날고
작은 집 서늘하여 누각보다 못하지 않구나
천하의 분주한 사람들 모두 꿈속의 일
술을 마시며 취하는 것 마음으로 바란다
두견새 울타리 곁에서 울어 청산은 깊고
꽃은 뜰에서 지니 한낮이 그윽하여라
풍광이 이와 같고 좋은 벗과 함께하니
하청재에 잠시 머물러 본들 어떠리
[4]
어느새 그네 뛰는 단오가 새로 오니
깊은 산의 꾀꼬리가 나와 이웃하누나
누운 송아지는 방초의 꿈을 비로소 깨고
우는 새는 오히려 낙화의 봄을 호소하는 듯
변방 땅을 거닐다가 술자리에 머무르니
맑은 흉금 벗들과 속진 밖에서 사귀노라
시가 소리 맑고 거문고 소리 울리니
속진의 고해 아득한데 오늘은 이곳 손님일세
[5]
하천이 사는 집은 경치도 좋은데
5월에 여기서 시주와 거문고를 즐긴다
노란 꾀꼬리 소리 속에 제비가 날아오고
푸른 버들 그림자 속에 긴 시내 흐르네
마음은 백일을 따르니 맑기가 물과 같고
눈은 청산에 들어가니 아련하기 안개 같네
아녀자들은 단오날 성묘의 슬픔 모르고
저마다 분단장하고서 왁자지껄 노는구나
上院庵與荷川叙舊
머리털은 희어도 눈은 푸른빛261)이라
진종일 닫혀 있는 송문을 보니 반갑구나
불경의 참된 글은 예전에 절에서 읽었고
백구와 어울려 놀며 물가에 은거해 사노라
그대를 보니 이곳에 맑은 인연이 많구려
사바세계에서 그 누가 큰 꿈을 깨리오262)
시냇가 버들 점차 푸르고 산새는 지저귀는데
벗과 손을 잡고서 장단정長短亭263)에 오르노라
또(又)
벼슬살이 시절 늘 꿈에 들어와 놀라노니
만년에야 잘못 깨닫고 산골에 은거하였지
심신은 이미 청산의 무거움을 배웠고
세월은 덧없이 흘러 백발이 흩날리누나
흉년 걱정에 쌀밥이 목에 넘어가지 않고
나라 근심에 평상에 누워도 편안하지 않네
노년이라 감개한 심정이 많으니
등잔 아래서 하염없이 마주하노라
또(又)
고요히 거처하는 게 참으로 도의 근원이니
과일도 향기로우려면 뿌리를 북돋워야 하는 법
새들이 나무에 지저귈 때 시인을 방문하고
풀들이 바람에 눕듯이264) 성인을 배운다
문 닫고 한가로이 누워서 그대는 무슨 꿈을 꾸느뇨
시축 가지고 시 적는 나도 꿈속의 사람일세
상원암에서 경을 읽는 소리를 들으니
고해의 온갖 시끄러운 일들을 잠시 잊겠네
임인규에게 화답하다(和林麟奎)
효성은 복이 되고 복은 돌아오나니
하늘의 상제가 지상의 일을 다 듣는 법
그대 대붕처럼 장차 날개를 펼 것임을 알겠지만
나는 반쯤 썩은 상수리나무265) 같음을 어이하리오
얇은 얼음 섞인 물은 푸르면서도 얕고
잔설은 가지 끝에 남고 꽃은 피지 않았네
날 저문 강가 마을에 진흙길 미끄러운데
고마워라 친구는 술잔을 들어서 권하누나
김낙주와 그의 아우 치주에게 화답하다 이들의 아버지 김형익과는 예전부터 알던 사이였는데 다시 오니 이미 세상을 떠났다.(和金駱胄與其弟駞胄與其父金亨益有舊, 而重來則已化.)
꾀꼬리는 날지 않고 제비는 둥지 짓는데
이 티끌세상 호접의 꿈처럼 아련하여라
버들 저편 푸른 산 곁에 새로 모내기하고
안개 속 드문드문한 집들에 석양이 지누나
벗은 한번 떠나 천고의 옛사람이 되었고
먼 길손이 다시 오니 어진 두 아들 있구나
눈에 가득한 변새의 구름에 술자리 저물고
등공리登公里에서 애련한 시를 읊조리노라
흥유촌에서 김유근에게 화답하다 본래 충청도 홍주 갈산에 살다가 이곳에 온 지 10년이 되었다고한다. 예전에 경성에서 만난 적이 있다.(興有村和金有根本居忠淸道洪州葛山, 而來留此地十年云.有舊於京城.)
빗소리 벌레 소리 들리는 강가 누각에서
천 리 밖 고향 생각에 머리가 무거워지려네
만사는 구름 같으니 어느 것이 진실한가
백 년 평생 물처럼 가니 이내 삶 덧없어라
만남은 애써도 어려워 지금까지 늦어졌고
이별은 무단히 찾아와 몇 해가 지났던가
부모 살던 고향은 성인도 소중히 여겼으니266)
타향에 오래 머물지 말고 어서 돌아가시구려
김담여에게 화답하다(和金淡如)
우리 세 사람 우정은 백붕267)보다 더 값져
나란히 앉아 술 취해 노래 부른들 어떠리
안연顔淵의 즐거움268) 늘 바라니 가난해도 좋고
기국杞國의 근심269)은 비록 간절하나 늙음을 어이하리오
상재桑梓가 아득히 멀리 있으니 마음이 슬프고
청명을 머나먼 타향에서 보내니 더욱 처량해라270)
만약 동풍이 불어 꽃이 나무에 가득 피면
원컨대 술을 강물처럼 빚어 마시고 싶어라
두문동에서 강봉헌에게 화답하다(杜門洞和姜鳳軒)
근년 들어 학문은 동양 서양이 뒤섞여
성인의 바른 뜻이 이취泥醉한 듯 흐려졌어라271)
다행히 은자를 마주하니 마음은 속세와 멀어지고
선경을 찾아가는 길에 얘기를 서로 주고받는다
뜬구름 그림자 너머로 푸른 물가가 가까이 뵈고
두견새 울음 속에서 흰 머리털은 늘어만 간다
벼슬길에선 형벌이 없단 말 듣지 못했으니
삿갓 쓰고 물가에서 낚시하는 그대가 부럽구려
위원渭原272)에서 서울 사는 유진구에게 화답하다『삼강록三綱錄』을 가져왔다고 한다.(渭原和京居劉震九持三綱錄來云)
천 리 밖 타향에서 나이 잊고 사귀노니
첩첩산중 가을날 작은 정자 곁이로세
전대 돈을 다 털어도 계속 술 마시기 어렵고
물가 집에 구분이 있어 각자 자는 게 서글프네
무한한 임천에는 은일의 선비들 많으니
우연히 이곳 찾아온 것 또한 인연일세
어이하면 세상길의 저 많은 사람들을
모두 천성대로 즐거이 이곳에 살게 할꼬
위원에서 송의징에게 화답하다(渭原和宋儀徵)
나무꾼 집 이웃에는 낚시꾼 집이요
위성渭城에서 길손들이 동서로 다니누나
두 해 동안 낙척한 신세 내가 방종한 게고
한나절 동안 그대와 함께 정담을 나누노라
해가 높이 뜨니 빈 방에 흰빛이 생기고273)
얼음 언 후미진 곳에는 꽃이 피지 않았네
이번 이별은 애틋해 몹시 슬프고 허전하니
원컨대 약속 지키고 원컨대 풍족하시길
한학순에게 화답하다(和韓鶴淳)
언덕의 버들은 하늘대고 냇가엔 물안개
창평 땅에서 길손은 서재를 방문하였어라
날 맑건만 높은 산은 비를 머금었고
봄 저물어도 깊은 숲엔 가을처럼 서늘해라
좋은 시구 읊조리매 흥을 도울 만하니
술병에 술은 부족해도 시름 잊을 만해라
어이하면 암혈에 사는 이름 없는 선비를
천문을 두드려 척오尺五의 거리에 머물게 할꼬274)
장사윤에게 화답하다(和張士允)
문장은 명성이 있고 행실도 아름다운데
연하烟霞 깊은 산골에서 신선처럼 사누나
나그네는 이미 풍진의 길을 걷거늘
명사는 또 어이 적막한 물가에 사느뇨
땅에 흩날리는 버들솜에 골짜기 흐릿하고
반공에 부는 솔바람에 숲 속 집 서늘해라
만남은 늦었어도 우정은 오랜 친구 같기에
관하에서 이별하려니 마음이 슬프구려
김수호에게 화답하다(和金守鎬)
학을 찾고 구름 찾아 세상 밖에 돌아오니
분망한 세상 풍진은 겹겹 산들에 막혔어라
신선이 사는 곳은 어드매에 있느뇨
과연 현인이 이곳에 살고 있구려
깊은 숲은 적막하여 새는 아직 안 울고
냇물들은 바삐 흐르건만 백로는 한가해라
가슴속 회포를 읊느라 괴로이 읊조리며
나도 모르게 밤 깊도록 창에 기대앉았노라
박영상에게 화답하다(和朴瑛祥)
신평에 오니 저녁연기가 피어오르는데
선생은 흰 구름 속 기둥에 기대어 섰네
이미 성학聖學275)에 깊은 경지를 얻었고
게다가 문장에도 크게 명성이 있어라
시냇가 밭들은 흐름을 따라 비스듬하고
바위산 발치 처마는 골짜기 띠고 기울었네
그대 같은 동지를 만난 게 늦었으니
한번 요동 변방에 와 너무도 기쁘구려
오남사를 구경하면서(遊午南寺)
고해의 영고성쇠 바람처럼 덧없는 것
오남사 가는 길에 취하여 동서로 오락가락
석 달을 술 취했다 깼다 하며 보냈는데
제천276)은 흡사 그림 속의 풍경과 같구나
몇 군데 구름은 영겁을 지나도록 희고
장기간 내리는 꽃비277)는 누각 위에 붉어라
어이하면 저 고해를 헤매는 사람들을
모두 불문에 들여서 색공色空278)을 깨닫게 할꼬
송평리 서숙에서 김응삼에게 화답하다(松坪里書塾和金應三)
아득한 들판 길 가슴을 열어젖히기 좋으니
송평리는 그야말로 그림 속의 풍경일세
그윽한 숲에 햇살 따스하니 맑은 안개 가늘고
황량한 산에 봄이 오니 온갖 새들이 날아오네
풍상에 허름한 옷 걸쳤으니 내 잘못 살았음을 알겠고
문을 닫고서 글을 읽으니 그대의 재주에 감탄했다오
벗끼리 서로 위로함에 정이 많으니
세상 근심하는 마음을 잠시나마 잊노라
김영항과 김담여에게 화답하다(和金英抗與金淡如)
천년 요동 변방 땅 이 성의 누대에서
나그네 가슴속 회포를 한번 열어젖힌다
예전 친분 이미 깊고 새로운 뜻 있으며
붉은 꽃 비록 졌어도 녹음이 돌아오누나
청산이 눈에 가득하니 시구가 됨직하고
백발에 마음 한가로워 다시 술잔 드노라
맑은 노래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오니
무하유향無何有鄕279) 속에서 가고 옴을 잊노라
벗들과 자북사280)에 올라(與諸益上子北寺)
꽃비가 내리는 넓은 절간은 그윽하니
나무꾼이나 신선이 오는 속세 밖 세계일세
범 싸움 풀어놓고281) 바위 곁 소나무 석장 걸고
옷을 산사에 걸어 두니 깃드는 새가 보이네
청정한 산사 천연하여 마음 달이 비추거늘
갈림길에선 어이하여 흰 머리털이 느는가282)
고해에 빠진 것은 그대와 내가 같으니
그 언제나 영산에서 법음을 들어 깨달을꼬
또(又)
노쇠한 몸 산을 오르기는 더욱 힘들건만
단지 신선 같은 벗들과 옥난간에 기대고 싶어서지
요동 변새에 시를 남겼으니 그대는 학인 듯하고283)
향산의 결사에 왔으니 나 또한 승려인 셈일세284)
하계의 중생들은 뉘라서 꿈을 깨리오
1천 강에 달 비치니 법등法燈을 전할 만해라
지금 이 나라 땅은 불 속처럼 더운 여름이니
원컨대 자비의 구름 곳곳에 덮어 주소서
위원에서 이택룡에게 화답하다(渭原和李澤龍)
해를 지나도록 변방 고을을 다니건만
남아가 세상에 살면서 이름 없는 게 부끄럽네
몇 번이나 물가에 백구의 꿈 꾸었던가
게다가 깊은 산속에는 두견새 소리 들리는 것을
성세라 뽕나무 삼도 비와 이슬에 젖으니285)
은자는 오는 길손을 반가이 맞이하누나
세상 풍진은 적적하고 몸은 한가로운데
나물이 소반에 오르고 술은 병에 그득해라
또(又)
방 안엔 서책들이 동서에 널려 있으니
고사의 청한한 생활 세상에 둘도 없으리
외로운 학은 그 어느 때나 늙으려나
속세 홍진은 이 산골에는 들어오지 못하네
마음 비추는 건 오직 송라에 뜬 달이요
얼굴에 불어오는 버들의 바람도 좋아라
진종일 나란히 앉아서 만사를 다 잊으니
몇 곡조 어부 젓대 소리 석양에 들리네
벗들에게 화답하다(和諸益)
그대는 난초를 허리에 찼고286) 나도 그러해
머나먼 타향에서 누구보다 우정이 각별해라
박옥이 매우 좋으니 그릇이 될 만하고287)
골짜기 꾀꼬리는 서로 부르고 가지로 옮겨 간다288)
노래와 젓대 소리 들리는 저무는 물가는 한 폭 그림
연하 낀 높은 누각에는 새로 지은 시를 읊누나
시국은 마음 쓰이나 아무래도 운수에 달린 것
맑은 경치를 구경하면서 잔에 가득한 술 기울인다
김용선에게 화답하다(和金用宣)
속세 홍진이 벽라의碧蘿衣289)를 물들이지 못하나니
오직 진종일 자욱한 연하만이 있을 뿐일세
나는 무능하니 마침내 날개 드리울290) 것을 알지만
그대는 어인 일로 사립문을 닫고 칩거하느뇨
깊은 산에서 술병 들고 가니 꾀꼬리가 있고
버들이 푸른 긴 길에는 가랑비가 날린다
손가락 꼽아 보니 영고성쇠는 모두 헛된 꿈
어이하면 햇살 맑은 이곳에서 함께 살 수 있을꼬
벗들과 함께 북문루291)에 올라與諸益上北門樓(與諸益上北門樓)
만 섬 시름 답답한 가슴을 풀지 못했는데
다행히 벗들을 따라 잠시 즐겁게 노닌다
하늘엔 구름이 떠 있고 외로운 성 고요한데
5월이라 강물 소리만 첩첩산중에 차가워라
대인은 이 읍을 다스리며 풍류로 술 마시고
지친 길손은 누각에 올라 잠시 의관을 잊는다
버들은 우거져 석양에 풍광이 좋으니
한가로운 경치를 눈 부비고 보노라
강장에 와서(遊講場)
상전벽해 변하는 세상이야 세월에 맡겨 두고
그대와 나란히 걸으며 세상 시비를 잊노라
고목이 바람 맞으니 빗긴 햇살이 새어 나오고
청산에 비가 지나가니 빠른 우레가 나누나
나무꾼 형은 도끼 메고서 소를 몰아 돌아오고
고기 잡던 아우는 낚싯대와 그물 들고 돌아온다
세상을 피해 사는 은자는 그윽한 정취가 많으니
속진 속을 벗어나지 못한 내가 부끄럽구려
해암과 초당에 앉아서 운을 뽑아 선 자를 얻다(與海岩坐草堂得仙字)
초가집은 청량하고 연기는 가늘게 피어오르는데
허리춤엔 생선 어깨엔 사슴고기 메고 와 술자리 연다
서검書劍은 부질없어 청운의 벼슬길에 꿈과 같으니292)
백발의 몸 술 취하여 무슨 마음이 있으랴
첩첩 푸른 산중 나무 끝에는 석양이 빗기고
멀리 휘도는 시냇가에는 방초가 우거졌어라
그윽하고 질탕한 천애의 이 길손이
며칠 동안 이 집에서 지선地仙과 벗한다오
또(又)
시화에 능하고 행실은 더욱 좋으니
마침내 관서에서 독보적인 분을 보았네
뜰 앞에 흐르는 물이 거울처럼 맑고
뜬구름 같은 세상길 깁처럼 가벼워라
소반에 약초 좋으니 어찌 고기를 찾으랴
손으로 찬 샘물 움켜 마시니 차가 필요 없네
학과 원숭이 벗할293) 뿐 세상사 부질없어
수레 대신 천천히 걸어294) 농사 얘기하러 이웃에 가네
또(又)
행형색색 경치들은 이루 다 구경하기 어려워
골짜기와 봉우리 반석과 못에 폭포도 있어라
시인이 이 골짜기 왔을 때 꽃이 환히 피었고
유람객 떠난 뒤 산에는 새들이 즐겁구나
속진을 씻고 버들 찾아오니 못가에 실 이루었고
나막신295) 움직여 등라를 따라오니 반석에 얽혔구나
옥을 부수는 듯한 폭포 소리 자주 귀에 들어오니
한가한 중에 갖가지 아취가 많이 있어라
낮잠(午枕)
이 초가집에 올 줄 생각이나 했으랴
예전에는 대궐 곁 높은 집에 살았었지
유서 깊은 국경 강산은 못 보던 풍경이요
황량한 마을에 모기 빈대가 옷을 파고드네
가난하지 병들지 않은 원자는 본받기 어렵고296)
취하여 깨지 않는 완 공阮公297)을 또한 배우노라
낮잠 중에 무단히 호접이 되어 날아가 보니
고향 동산에 꽃과 버들이 꿈속에 향기롭더라
시습재에 걸린 판상의 시에 차운하다(次時習齋板上韵)
시습時習이란 좋은 이름의 서숙을 열었으니
새처럼 자주 날도록298) 후생들을 훈육하리라
묘향산에 뜬 달이 문을 맑고 서늘히 비추고
압록강 구름은 누대에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누나
서검書劍을 익히는 반평생 그대는 옥을 안고 있었고299)
온 세상에 풍진이 이는 이때 나는 술잔을 멈춘다
성현이 한 일들은 서책이 남아 있으니
아 너희 어른과 아이들은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해암과 밤중에 앉아서(與海岩夜坐)
화분의 난초 뜰의 접시꽃이 서재를 짝하였나니
반소매 차림으로 시원하게 물소리를 듣노라
늙으매 사람 마음이 잔도棧道처럼 위태한 줄 알겠고
공부하니 성인의 교화가 역말보다 신속함300)을 알겠네
강산은 다함이 없는데 문장은 느낌이 있고
천지는 멈추기 어려운데 세월은 흘러가네
고맙게도 선생이 후의를 많이 베풀어 주시어
상전벽해 겪어 온 나그네 회포를 잊겠구려
운파의 별장을 찾아서운파는 기생의 이름이다.(訪雲坡林庄雲坡妓名)
뜻밖에 만난 이 인연 하늘이 정한 것이라
향긋한 쪽머리는 뒤따르고 할관鶡冠301)은 앞에 있구나
양대陽臺의 구름과 비302)는 아침저녁으로 사랑스럽고
양대陽臺의 구름과 비303)는 아침저녁으로 사랑스럽고
낙포洛浦의 기러기와 용은 경쾌하고 유순하여라304)
잎이 시든 황량한 숲에 긴 여름은 저물고
엷은 안개 낀 시냇물은 옛 성 가에 흐르네
이별이 아쉬워 머뭇거리며 술병을 다 비우노니
덧없는 삶에 이 술자리 여생에 감회가 이누나
중복날 시습재에서 술을 마시며(中庚日時習齋小酌)
삼복에 쾌청한 마루에서 술을 마시노니
속된 관리가 어찌 은일한 선비 모임에 끼리오305)
우연히 마음 통하는 벗 만나니 맑기가 물 같고306)
마음의 향취를 말하려니 향기롭기 난초와 같네307)
옹기 술병 두루마리 족자는 이 서재에 어울리고
약초에 진귀한 닭고기가 별미로 소반에 올랐어라
농사지으며 살도록 이곳을 반 나누어 준다면308)
그대를 따라 여기서 평안히 여생을 보내리라
금천관에 노닐며(遊錦川舘)
옛사람이 창설하여 이 누관이 있는데
허물어진 담장 썩은 서까래에 세월을 느낀다
만사가 바람 따라가니 어느 것이 진실한가
백 년 평생 흐르는 물 같아 이 생애 덧없어라
새는 좋은 소리로 산모퉁이에서 울고
구름은 스스로 무심히 나무 위로 나온다
나의 벗 해암에게 기이한 그림이 있어
잠시 베개에 기댄 채 나그네 시름 잊노라
일해정사에서 술을 마시며일해는 김박언의 호이다.(一海精舍小酌一海金泊彥號也)
세상에 처신 우뚝하여 산봉우리 못지않지만
떨어진 꽃이 물에 흘러가듯 유연히 살아가네
외로운 가슴속에 보배가 감춰진 줄 뉘 알리오
좌중의 사람들 속에서 푸른 솔처럼 우뚝한 자태
방금 사온 술에는 꽃향기가 풍겨나고
서재 난간에 기대자 굵은 빗방울 떨어지네
일해는 응당 마음으로 허여한 선비 알리라
이 길손이 마주하고 앉으매 정이 하염없어라
북문 밖을 나와 박 상사朴上舍를 방문하다포산·소산·매은도 함께 모였다.(出北門外訪朴舍苞山·小山·梅隱同會.)
세상의 영고성쇠 떨치고 취한 채 세월 보내노니
바윗가 단풍 울타리 밑 국화는 고성 가일세
천 리 밖에서 벗이 찾아온 것은 우연이요
가을에 들판을 바라보니 참으로 쓸쓸하여라
나무 곁에 서 있는 집은 깊은 변새 땅이요
강 저편의 사람과 말은 석양에 가는구나
생각해 보면 속진의 인연은 머리 긁적일 만해
어드매 청산에서 이 몸 편안히 잠들거나
밤중에 앉아서(夜坐)
강주江州에서 8년 동안 옷 한 벌로 지냈는데
얼음과 눈 덮인 외로운 마을에 찾아와 주어 고맙네
일은 절름발이 나귀 같아 멈춘 채 달리지 못하고
마음은 둔한 새 같아 날개를 들어도 날기 어려워라
얕게 깊게 따르는 술잔이 모두 정겨운 모습
길고 짧은 창가의 등잔도 세상 기심機心일세309)
알지 못하겠네 중니仲尼는 필경 무엇을 하였던가
희경의 끈 세 번 끊어진 것도 결국 운수인 게지310)
인풍루에서 저물녘에 조망하다(仁風樓晩眺)
강가 누각의 가을 경치 비단보다 얇은데
벼슬길에 이곳에 들러 몇 번이나 노닐었던가
외로운 돛단배 그림자 가에 버들가지 가늘고
짧은 퉁소 소리 속에 푸른 산이 많아라
고읍의 황량한 풍경에서 기상을 보고
한 사람 분노한 말에 풍파를 알겠구나
진주 돌아오고311) 석종유가 다시 난312) 상서 사실 아니니
바로 태평성대를 칭송하고 노래한 것일 뿐이지
남문루南門樓
푸른 나무에 꾀꼬리 울고 해는 뉘엿뉘엿
이 여름날 남문루에 와서 앉아 있노라
끊어진 비석은 적막하게 풀숲에 뒹굴고
덩굴풀들은 축축 드리워 몇 가지에 올랐어라
유서 깊은 변새의 고을이라 감개가 많으니
덧없는 인생에 이날 회포를 누를 수 있으랴
강산은 비단과 같고 산에 해는 저물 제
술잔 잡고 서로 보면서 상념이 하염없어라
남문루에 올라(登南門樓)
구름과 안개 낀 긴 물가 그림처럼 펼쳐져
한가로이 난간에 기대니 마음이 상쾌하여라
숲이 울타리 가려 집들은 숨어 있고
비가 봉우리를 씻으니 면목이 다가오는 듯
일은 풍상을 겪어 온 터 누각에 시운이 있고
마음은 질탕하고자 하여 연거푸 술잔을 드노라
고요한 객창 가에서 소일할 만한데
어드매 나그네가 ≺낙매곡落梅曲≻313)을 연주하느뇨
또(又)
거친 시 서툰 솜씨라 흥은 일지 않지만
다만 낱낱이 천연한 본심에서 나온 것이라오
침침한 눈에 뵈는 먼 마을은 숲에 가려져 있고
지팡이 짚고 가니 무너진 성첩은 반이 논밭이어라
누각은 맑은데 제비 꼬리는 산을 따라 멀리 날고
들판은 저물 제 안개는 나무에 올라가 걸렸구나
지난날 그 주모를 오늘 다시 만났으니
이곳에서 좋은 인연 끝없어 이어졌으면
수자리 서러 간 사내의 아내(征婦)
푸른 대숲에 달이 뜨려 하는데
옥관玉關314)은 어드매뇨 잠들기 어려워라
박명 때문 아니건만 온갖 시름 다 생기니
낭군님 위해서라면 만 번 죽어도 좋으리
규방에 촛불은 꺼져도 이부자리는 멀고
분단장도 소용없어 거울만 속절없이 밝아라
우는 비둘기 새끼 치는 제비는 외려 다복해
함께 날고 한 둥지에 살며 정이 끝이 없구나
야학촌野鶴村
한번 나들이하여 성 동쪽으로 나오니
야학촌 앞에서 해는 한낮이 못 되었어라
집을 둘러싼 푸른 풀은 간밤의 비에 젖었고
논밭에 이어진 벼와 기장엔 가을바람이 분다
가을비는 한가로이 우거진 풀숲에 잠자거늘
맑은 날 제비는 무슨 마음에 푸른 하늘 오르나
시골 노인이 손님을 잘 접대할 줄 아니
소반에 붉고 푸른 과일과 채소가 쌓였어라
북루北樓
반평생 심사는 푸른 하늘에 맡겨 두노니
백발의 몸으로 강성에서 쓸쓸히 사노라
우뚝한 것은 천 겹의 산들이요
가는 것이 이 같은 건 만 리의 시내일세315)
담장 모서리에 부는 산들바람은 먼 나무로 가고
비늘처럼 늘어선 기와지붕엔 맑은 연기 오른다
먼 친지도 다행히 오고 이웃의 친구도 있으니
맑은 흥취가 응당 여기에 있음을 알겠어라
소산의 정원 정자에 앉아(坐小山園亭)
유유한 정자 위에 흉금이 맑아지니
꾀꼬리 소린 더디어도 제비도 지저귀네
작은 회나무 긴 가지는 푸른 일산 이루고
기이한 풀 나란한 꽃받침은 황금을 쌓은 듯
풍진 속에 다니는 건 응당 나그네 일이니
정자에서 세상에 은둔할 마음 가진들 어떠리
술자리에 마주한 동은桐隱은 강호의 사람이니
부평초 같은 세상 특별히 찾아와 주어 감사하오
망미정에 올라(登望美亭)
망미정 가에는 석양이 쉽게 지니
물가 모래 물가 풀이 난간을 에워쌌어라
옷의 띠처럼 지금 황량한 성첩이 둘러쌌는데
멀리 봉래산 어드매에서 채색 구름이 나는가
맑은 가을 들판의 빛깔은 갖가지 곡식이요
옛 나루터에 다듬이 소리는 집집마다 옷이라
어진 인재가 지금 세상에 드묾을 슬퍼하노라
천하를 즐거워하고 근심하는316) 이 누가 있느뇨
바둑(圍棋)
바둑 두는 즐거움이 책 보기보다 나으니
선산에 사는 사호四皓317)와 같다뿐이겠는가
영토를 개척하는 병사들은 학과 같이 한가롭고
포위를 무너뜨리는 부대는 물고기처럼 활달해라
손가락 끝에선 점점이 강 기러기 내려앉고
바둑판 위에 똑똑 성근 밤비가 떨어지는 듯
의각과 연환318)의 계책을 그대 말하지 말라
긴긴 여름 소일할 방법이 참으로 넉넉하다오
인풍루에 올라(登仁風樓)
문장 짓는 버릇은 늙어서도 남아서
하늘을 꿰뚫을 큰 무지개를 만들고저319)
상전벽해에 돌아오는 학 몇 번이나 보았더뇨320)
호해에서 일찍이 활발한 물고기를 찾았었지
벼는 들판에 펼쳐져 곡식이 익으려 하는데
바람과 함께 장맛비 내려 햇살이 나지 않았네
백 걸음 걸어 난간에 기대니 감회가 많아
창생들이 어느 곳에서 편안히 살 수 있을꼬
제비(鷰)
둥둥 사고社鼓 소리 날씨는 맑았다 흐렸다
이 깊숙한 지역으로 제비가 날아오누나
둥지를 지어 의탁할 곳 아니 사람들 모두 사랑하고
세상에 노닐 땐 몸이 가벼워 침해를 받지 않네
가랑비 내리는 주렴과 창은 여름 나무와 이어졌고
바람이 맑은 거리는 가을 기운처럼 서늘해라
은혜와 의리를 저버리는 속진 속 사람들은
이 미미한 새가 주인 찾아오는 마음에 부끄러우리
찍찍 우는 벌레 소리(喞喞)
찍찍 벌레 소리가 동서쪽에 어지러이 울어
들판에도 침상에도 방문에도 들려오누나
슬픈 소리는 달빛 비친 그윽한 집에 많고
움직임은 또 바람 부는 저물녘에 좋아라
백 년 평생 과부가 낭군님을 생각할 제
천 리 밖 나그네가 고향 꿈을 꿀 때
덧없는 인생에 무슨 일인들 감회가 없으랴만
너에 대한 감회가 가장 잊어버리기 어렵구나
빗속에 거연정에 올라(雨中登居然亭)
천천히 걸어 거연이란 작은 정자에 오르니
맑고 서늘한 천석의 풍경 흐릿하게 보이네
온 성이 풀 속에 들어가니 닭울음이 파랗고
긴 해가 소나무에 이어지니 빗방울이 푸르누나
그 옛날 동해를 누가 밟고자 했던가
중산中山에서 한번 취한 술 깨기 어려워라321)
길손은 시 얘기하고 진경이 많으니
덕분에 풍진 속에 백발이 된 것 잊노라
청명일에 동문루에 올라(淸明日上東門樓)
서쪽에서 취하고 동쪽에서 깨고 동쪽에서 시 읊노니
몇 가닥 마음속 생각이 은연중 서로 통하누나
푸르른 들판 빛깔은 푸른 시내 저편에 있고
또렷한 촌락 모습은 가랑비 속에 보여라
먼 길손이 누각에 오르니 머리털은 세었고
집집마다 무덤에 절하는데 취한 얼굴 붉어라
알겠노라 만남과 이별 덧없는 인생의 일은
반은 구름 속에 반은 바람 속에 들어간다는 것을
북루北樓
노염이 몹시 찌는 듯한 7월 더위에
북루 높은 곳에는 늘 서늘하여라
해가 기우니 산 그림자는 성에 이어져 푸르고
물이 불어나니 강 빛은 난간에 올라 누렇구나
예전 습성 남았으나 범을 잡기는 어렵고322)
책 끼고 다님이 무에 귀하랴 양을 잃게 되거늘323)
술자리의 머리털 센 이 천애의 나그네는
견마犬馬의 공로도 없는데 조정에 감사하오324)
육삼정六三亭
육삼정 정자에 오늘 또 오니
밤비는 잠깐 개고 물은 다리에 차오른다
난간을 지나가는 구름 그림자에서 세태를 보고325)
자리에 불어오는 솔바람 소리에 조수 소리 듣노라
허다한 고해의 더위에 사람들은 괴로워하는데
갑자기 신선 사는 산에 오니 길이 멀지 않아라
상제도 노니는 길손의 흥취를 알아
일부러 비바람을 뿌려서 안개 자욱하게 하네
봉선화鳳仙花
곱디고운 꽃이 이끼 곁에 피었으니
봉은 범조凡鳥가 아니고326) 신선도 드물지
깊고 깊은 규방엔 가랑비 내리고
적적한 주렴에는 밝은 햇살 옮겨 간다
비단 같은 속은 교태 더하니 시축에 적을 만한데
은빛 물든 섬섬옥수는 몇 번이나 베틀에 올랐나327)
연꽃 좋아하고 국화 좋아하고328) 난초 좋아하건만
속세 밖을 나는 봉선화의 고명은 뉘라서 알랴
육삼정六三亭
장맛비 잠깐 갤 제 또 이곳 찾아오니
외로운 정자 맑은 경치에 가슴이 시원해라
옛 변새 강물 소리에 아침저녁 세월은 가고
깊은 산속 솔바람 소리는 어제가 오늘 같네
머나먼 타향에 가을이 오니 벌레 우는 소리
관서에서 나그네 신세인데 전대엔 돈이 없네
석양이 다 저물었을 제 술잔을 드노라니
온 세상 풍진에 이내 마음 감회에 잠기네
면가정眄柯亭
강호에 뜻 두어 한평생 은거하니
면가정에는 풍광과 정취도 좋아라
저무는 산은 비를 머금고 처마와 이어져 푸르고
작은 풀은 꽃을 남겨서 난간을 올라와 환하구나
몇 병 사온 술 마시고 나라를 위한 충정 일지만
천 리 밖 고향 생각은 성을 둘러쳐서 막지 못하네
머나먼 변새에 흉금이 통하는 선비들이 많으니
춘풍 속에 앉아 있고329) 또 금성이 들리어라330)
용포재에 와서(遊龍浦齋)
독로강331)은 흘러서 진종일 서쪽으로 가는데
학당에는 빗소리 들리고 저물녘에 닭 울음소리
나뭇가지들로 가려진 들판에선 벼 향기 풍겨오고
초가집에는 진흙을 문 제비가 낮게 날아온다
술 생각만 나는 것은 저잣거리에서 답답해서요
벗들과 손을 잡고 등라 아래 나란히 걸어간다
난간에 기대 서로 웃고 세상사 모두 잊노니
용포에서 노니는 것이 호계332)에 비길 만하여라
김박언에게 부치다(寄金泊彥)
하늘의 이치를 받아서 태어난 몸이니
비록 고생스러우나 감히 가난을 말하랴
풍류는 걸출한 선비임을 응당 인정할 터
성행性行은 참으로 금옥과 같은 분임을 안다오
바다가 드넓으니 노니는 용이 갈기를 떨치고
산이 신령하니 약초 절로 뿌리 깊은 격일세
강주에서 8년 동안 유유히 살아온 이 몸
그대 집안에 춘풍 기운이 가득하길 원한다오
김수장에게 부치다(寄金水長)
변방 마을 넉 달 만에 가을이 또 왔건만
학동들 가르치는 생활 흰 머리털만 늘었구나
친구가 보내온 서찰은 천금보다 소중하고
관서 땅 이 몸의 행장은 머리털처럼 가볍네
밝은 달빛은 숲을 뚫고 이내 침상에 오고
흰 구름은 물과 함께 이 서재에 어리누나
붉은 단풍잎 떨어지고 국화는 시드는데
얼마나 강계 땅 바라보며 옛정을 생각했던가
신해년 봄에 우연히 송남하를 만나(辛亥春偶逢宋南河)
장안의 풍광은 티끌 먼지로 암울한데
머나먼 변방 땅에서 백발로 늙어 가노라
뜬구름 흐르는 물 같은 이 나그네 몸이
그대와 맑은 날에 푸른 산속 집에서 함께한다
풍모가 빼어나니 새 중에서 학이요
문장이 찬란하니 비단 위의 꽃이로세
손가락 꼽아 보면 이 생애 원래 꿈이니
술 마시며 맘껏 시를 읊은들 어떠리
또(又)
쪽빛 푸른 깊은 강에 먼 산은 짙푸른 빛
그대 집의 봄 경치는 그림 속 풍경이로다
술을 권하니 나는 응당 취하고
문묵으로 상종하니 그대는 한가롭구려
천 리 밖 은하수 저편 고향을 그리워하고
일신으로 먼 변방 땅에 나그네 신세로세
밝은 흉금은 달과 같고 시는 옥과 같으니
천인이 지상에 돌아왔을 줄 생각지도 못했다오
청암사 조실에서 만우당과 작별하며(靑岩寺祖室與萬愚堂話別)
귀뚜라미 울고 밤비 내리는 푸른 산 절간
은연중 깊어지는 향수에 머리가 무거워라
만사가 다 꿈이거니 그 무엇이 진실인가
백 년 평생 흐르는 물이요 이 생애는 뜬구름
만남은 애써도 어려워 이제껏 늦어졌는데
이별은 무단히 찾아와 몇 해나 지났던가
백발이 이미 분분하거늘 이제 또 작별하니
어이 견딜꼬 그대 떠나고 나만 홀로 남음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