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꽃 아래 천년
배한봉
봄날 나무 아래 벗어둔 신발 속에 꽃잎이 쌓였다
쌓인 꽃잎 속에서 꽃 먹은 어린 여자아이가 걸어나오고, 머
리에 하얀 명주수건 두른 젊은 어머니가 걸어나오고, 허리 꼬
부장한 할머니가 지팡이도 없이 걸어나왔다.
봄날 꽃나무에 기댄 파란 하늘이 소금쟁이 지나간 자리처럼
파문지고 있었다. 채울수록 가득 비는 꽃 지는 나무 아래의 허
공, 손가락으로 울컥거리는 목을 누르며, 나는 한 우주가 가만
가만 숨 쉬는 것을 바라보았다.
가장 아름다이 자기를 버려 시간과 공간을 얻는 꽃들의 길.
차마 벗어둔 신발 신을 수 없었다.
천년을 걸어가는 꽃잎도 있었다. 나도 가만 가만 천년을 걸
어가는 사랑이 되고 싶었다. 한 우주가 되고 싶었다.
고래와 비닐
배한봉
너도 알고 나도 안다.
심해에 사는 고래가
숨을 헐떡이며 해변으로 떠밀려 와 죽은 까닭을.
그런데도 우리는
과자의 비닐봉지를, 쇼핑비닐봉투를, 온갖 종류의 비닐을
날마다 쓰고
날마다 버린다.
온갖 색깔의 음모들, 땅에서도, 바다에서도
썩지 않는, 질긴 혀를 내민 권모술수들
생활 속에 뿌리를 감추고 번성해 무기가 되려는 욕망들
칼처럼 날카롭지 않으면서도
폭탄처럼 터지지 않으면서도 목숨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나는 소화되지 않는 이데올로기를 본다.
버려져 없어지는 것이 아닌
주검이 되어 살아 돌아오는 끈질긴 욕망
아무런 마지막 비밀도 없고 끝도 없는
행로와 음모
육탁(肉鐸)
배한봉
새벽 어판장 어선에서 막 쏟아낸 고기들이 파닥파닥 바닥을 치고 있다
육탁(肉鐸) 같다
더이상 칠 것이 없어도 결코 치고싶지 않은 생의 바닥
생애에서 제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
나도 한 때 바닥을 친 뒤 바닥보다 더 깊고 어두운 바닥을 만난 적이 있다
육탁을 치는 힘으로 살지 못했다는 것을 바닥치면서 알았다
도다리 광어 우럭들도 바다가 제 세상이었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내가 무덤 속 같은 검은 비닐봉지의 입을 열자
고기 눈 속으로 어판장 알전구 빛이 심해처럼 캄캄하게 스며들었다
아직도 바다냄새 싱싱한,
공포 앞에서도 아니 죽어서도 닫을 수 없는 작고 둥근 창문
늘 열려 있어서 눈물 고일 시간도 없었으리라
고이지 못한 그 시간들이 염분을 풀어 바닷물을 저토록 짜게 만들었으리라
누군가를 오래 기다린 사람의 집 창문도 저렇게 늘 열려서 불빛을 흘릴 것이다
고이지 못한 그 시간들이 염분을 풀어 바닷물을 저토록 짜게 만들었으리라
지하도에서 역 대합실에서 칠 바닥도 없이 하얗게 소금에 절이는 악몽을 꾸다 잠깬
그의 작고 둥근 창문도 소금보다 눈부신 그 불빛 그리워할 것이다
집에 도착하면 캄캄한 방문을 열고
나보다 손에 들린 검은 비닐봉지부터 마중할 새끼들 같은, 새끼들 눈빛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