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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함이 사람의 원죄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한계를 두셔서 사람이 자신 안에 있는 가능성들을 잘못 쓰지 않도록 지키려고 하셨다( 선악을 아는 것 . 2:17과 그 해설 참조). 그런데 모르고 있는 무엇을 금지하면, 이는 사람을 유혹하여 거부할 수 없게 한다. 그 과정을 시작하게 한 것은 뱀 이지만, 마침내 유혹이 생기는 것은 사람 자신으로부터 비롯된다. 호기심도 작용하지만,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기 싫어하시는가 하는 불신과 의심도 일어난다. 그런 생각을 물리치려고 여자가 보인 지나친 열심( 만지지도 말라 함은 금지를 과장한 말이다)은 약함을 드러낸다.
초기 유대교 해석에서, 또 그 영향을 받은 신약 성경에서도 뱀 은 악마의 상징으로 이해한다(지혜2:24; 요8:44; 계12:9; 20:2). 본문은 뱀이 짐승 가운데 들어감을 분명히 하고 오로지 특별히 영리하다고 볼 뿐이다(여기서 간교하다 함은 교활함을 뜻하기보다 영리함을 뜻한다). 사람이 자기의 책임을 초인적인 악의 힘에 돌릴 수 없음이 명백하다.
3:6-7남자와 여자는 스스로 속았으면서도 남을 속이려는 사람처럼 거기 서 있다!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보장되는 안전한 상태에서 떨어져 나와 처음으로 스스로 몸이 벗은 것을 보게 된다(2:25 해설 참조). 이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타락'은 성적인 유혹과 관계없고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함에(2:17), "하나님 같이" 되려 함에(5절) 있다. 성과 여인을 '유혹자'로 평가절하할 근거는 창3장에서 찾을 수 없다.
3:8-10 아담 은 본디 고유명사가 아니라 '사람'을 뜻하는 히브리 낱말이다(2-4장에서 이 낱말은 히브리 말로 늘 정관사를 붙여 '하아담'으로 쓰인다). 이후로 아담이라 하지 않고 '그 사람'으로 옮긴다면(3:20-24에 아담과 "그(또는 이) 사람"이 나란히 쓰인다), 첫 사람에게서 인류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은 더 잘 표현된다. 히브리어 본문으로는 5:3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아담이 정관사 없이 나와서 고유명사로 쓰인다.
3:11-15뱀에 대한 저주는 뱀이 처음에는 아직 네 발로 기어다니는 짐승으로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또 뒤이어 나오는 심판의 말씀에서는 지금 세상의 부정적인 현상들을 원역사의 과정에서 이끌어낸다. 그 가운데에 한 가지 깊은 진리가 상징적으로 암시되어 있다. 곧,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근본적인 장애가 생기면 이는 피조물의 삶과 사람 사이의 삶에도 모든 영역에서 장애로 작용한다는 것이다(16-17절).
15절은 사람과 뱀이 서로 원수처럼 여김에 대해 말한다. 후손 을 뜻하는 히브리 낱말이 단수로 나오기에('씨앗'=후손 일체)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이미 일찍이 여기에 하와의 후손 예수나 마리아가 악을 극복하리라는 것에 대한 첫 암시가 있다고 해석했다.
3:16여자에게 내린 벌은 여자의 가장 기초적이고 고유한 영역, 곧 어머니와 남자의 상대자임에 관한 것이다. 죄 때문에 내린 저주를 통하여 남자와 동등한데서(2:23-24) 벗어나 남자가 여자를 다스리게 된다. 이 다스림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끝나게 되어 있다(갈3:28; 고전11:11-12. 여자*).
3:17-19노동은 저주가 아니라 사람의 운명에 속하지만(2:15) 지금은 막 벌어진 전도된 상황의 표를 띠게 된다. 19절의 표현은 죽음을 처음부터 사람의 운명에 속한 창조 질서로 여김을 보여준다(2:7과 해설 참조. 본문과 2:7 둘 다에서 흙 =티끌이다. 같은 사실을 23절에서도 이끌어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2:17에서 경고하신 죽음의 벌을 집행하시지 않았다(거기서 네가 정녕 죽으리라 함은 '네가 죽을 존재가 되리라'를 뜻하지 않는다). 창조주는 죄있는 사람에게 생명을 허락하신다. 이는 하나님이 일관성 없이 행동하시거나 약하시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증거한다. 그러나 노동이 낙원 바깥에서는 고통으로 뒤바뀌듯이 이제 죽음도 인생의 의미를 의심하게 하는 쓰라린 종말이 된다.
구약 성경에 보면 "에덴 동편"(4:16)에서도 고통 없는 죽음, 알찬 삶, 수를 다한 삶 다음에 맞이하는 죽음이 있다(25:8; 35:29; 욥42:17).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피조 세계의 틀 안에서(1:31) 죽음이 불협화음을 일으킨다는 느낌이 우세해진다. 죽음은 낙원에서 쫓겨남과 관련되어 생명을 감소시키는 것들을 총괄하는 개념이 된다(14-19절). 이는 또한 신약 성경에서 전제하는 생각, 곧 첫 사람의 죄를 통하여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다는 생각으로 나아간다(지혜2:23-24; 롬5:12; 6:23).
3:20-21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요구했던 사람에게(3:5) 하나님은 그 한계를 알려 주셨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사람을 돌보시고 아끼신다. 이제 사람에게 닥칠 거친 삶을 이겨내도록 하나님 몸소 사람에게 장비를 갖추어 주신다. 하와 라는 이름에는 땅이 온갖 침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삶의 무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표현되어 있다(히브리 명사형 '하와'는 삶, 목숨을 뜻하는 히브리 낱말을 생각나게 한다).
3:22-24사람은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하게 하는 지식을 얻었다(2:17 다음 해설 참조). 하나님은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지 않으려 한다. 그렇지만 사람은 지금 모습으로 그 지식을 유익하게 사용할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 그룹*들 말고도 또 다른 파수꾼으로 서 있는 것은 한 독자적인 존재로 소개된 번개( 화염검 )이다. -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롬5:12-19) 또한 생명나무 로 이르는 길도 다시 열린다(계2:7; 22:2).
22절에 나오는 우리 라는 복수는 아마도 - 1:26과는 달리 - '하늘의 궁정'을 이루는 천사들을 가리키는 듯하다(하나님의 아들들*).
4:1-2 동침하다 로 옮긴 히브리 낱말은 본디 '알다'라는 뜻을 지닌다. 여기서 성은 그 자체가 목적(쾌락)이거나 목적을 위한 수단(번식)이 아니다. 그보다는 전적으로 인격적인 관심과 얽혀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가인 이란 이름은 '얻다'라는 뜻의 히브리 낱말과 발음이 비슷하다. 아벨 은 '약한 바람, 덧없음'을 뜻한다. 이름은 그 사람의 운명을 미리 알려 준다. 양치기와 농사일은 옛 시대의 주된 직업이다.
4:3-5가인이 드린 제물의 가치가 덜한 것은 아니다. 그의 마음이 덜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결정은 이해할 수 없고 근거를 밝힐 수 없다.(히11:4는 이를 달리 본다.) 하나님이 자기가 드린 제물을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가인이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히브리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그 결과 곧 복이 내리지 않는다는 데에서 가장 빨리 알 수 있다(신28:3-6). 제물은 감사 예물의 뜻을 지닌다. 이 예물은 장래에 복 주시기를 비는 기도와 연결된다(복?). 기름은 가장 값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제사법에 따르면 제물로 바친 짐승의 몸 가운데서 하나님의 것으로 따로 내어놓은 부분이다(레3:16-17과 그 곳 관련 구절들을 보라).
4:6-7하나님이 가인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가인을 시험하신다. 가인은 이해할 수 없는 차별대우를 잘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사람의 운명으로 다양하게 반복된다. 히브리어 본문 7절은 세부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 뜻은 분명하다. 이제 문제는 '너다'라는 것이다.
4:8-12대담한 말장난으로 가인은 책임을 회피한다. 살해당한 아우의 직업을 암시하면서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 곧 목자이니이까?"라 한 것이다. 그러나 아벨의 피 가 가인을 고발한다. 땅 위에 아무도 살인을 벌하지 않기에 피가 하늘 재판관에게 호소한다 (9:5-6 참조). 하나님이 내리신 판결의 영향은 가인의 생업에 미친다. 형제의 피로 땅을 더럽힌 사람은 생명력의 순환 과정(=농사일)에서 스스로 벗어난 것이다.
4:13-16유랑자 가인은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다. 가인이 생명을 선물로 받았을 뿐만 아니라 보호의 표로써 생명의 안전이 보장된 것은 가인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이는 동시에 죄있는 인류를 위한 복음을 담고 있는데 이 인류는 에덴 동편에서 오로지 창조주의 자비를 힘입어 산다. 그러므로 가인을 죽일 사람들이 도대체 어디서 올까 하고 물을 필요가 없다. 본문은 그들이 있음을 그저 전제한다. 그리함으로써 옛적에 한번 일어난 일을 다시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거듭될 수 있는 전형적인 것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놋 (=쉼이 없는) 땅이 어딘지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추방당함을 표현하는 비유이다(14절).
가인의 이야기에서는 낙원에서 쫓겨남이 두 번째로 되풀이된다. 마찬가지로 가인이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행한 행동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름을 되풀이한 것이다. 사람의 공동생활에 '아담의 타락'이 어떻게 반영되는가 하는 것이 가인에게서 드러난다. 따라서 아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본문에서도 " 어디 있느냐? " 하는 물음이 한가운데 자리잡는다. 이 물음으로써 하나님은 길 잃고 반역에 얽힌 자신의 피조물을 재판관인 동시에 아버지로서 찾아가신다(9절. 3:9).
15절은 가인이 어디에 어떤 표 를 받았는가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는다. 그 표는 수치의 표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표이다.
4:17-22본문은 인류가 발달하고 여러 갈래로 나누어짐을 가족 계보 형식으로 묘사한다. 여기서 가인은 온갖 문화의 아버지이다. 가인이 아내를 어디로부터 맞이했는지에 대해서 본문은 관심이 없다. 본문은 또한 모든 것이 이성의 논리에 명료한가에 대해서는 고려함이 없이 인류 역사를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형식으로 묘사한다. - 라멕의 아들들로부터 목자들과 음악가들과 대장장이들이 나온다. 수금과 퉁소는 가장 오래된 악기*이다.
4:23-2417-22절에 암시된 문화 발달은 1:28의 위탁과 연결된다. 다른 한편으로 이는 타락과 형제 살인으로 시작된 소외의 전조 아래 진행된다. 곧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져 가면서 문화를 일군 것이다. 그리하여 문화 발달은 또한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자기 지위를 지키며 자기 뜻을 사정없이 관철하려는 인간적인 노력이라는 성향을 늘 지닌다. 그 두드러진 보기가 라멕 이다. 라멕은 하나님이 가인을 위해 주신 보호의 표로써 정하신 정도를( 칠 배 ) 훨씬 뛰어넘어( 칠십칠 배 , 15절) 제 힘으로 자신의 복수를 한다.
4:25-26가인의 계보 다음에 둘째 계보가 나타나는데, 이는 - 아주 짧지만 - 반대 방향의 목표로 나아간다. 스스로에게 영광을 돌리는 초인의 맞은 쪽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등장한다( 에노스 는 아담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뜻한다). 사람들은 기도 드리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그 보기가 시편에 가득 차 있다. 시3:1; 5:1; 8:1; 13:1 등. 욜1:19 참조). 이는 이름*에 대한 인식이나 하나님에 대한 근원적인 지식이나 하나님의 계시를 전제한다(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는 주님*을 보라. 출3:13-15와 해설 참조).
5:1-2새 단락은 1장의 창조 본문에 바로 이어진다(특히 1:27-28 참조). 이리하여 여기에 다시 제사장 문서의 저자가 말한다('안내'를 보라). 그는 '타락' 이야기에 대해 모르거나 그런 것을 전해 주지 않는 듯하다. 사람 창조에 이어 인간 세대의 전개가 곧바로 뒤따르는데 이는 창조주가 자기 피조물들에게 약속하신 복의 결과이다(1:28).
2절의 '사람'은 히브리 낱말로 아담이다(3:10 다음 해설을 보라). 계보는 남자 대표들을 기준으로 삼지만, 사람이라는 이름은 남자와 여자 둘 다에 관계됨을 분명히 한다(1:5,8,10처럼). 사람이라는 이름을 주심으로써 창조 작업은 끝난다. 이름*에는 그렇게 불리는 사람의 본질이 표현되어 있다. 인류는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다. 서로 다른 점들과 반대되는 점들이 생겨난다. 그러나 사람이 무엇인가 하는 것, 곧 창조주가 사람 안에 두신 하나님의 형상 은 그 온갖 것 가운데 파괴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1:27 해설 참조).
5:3-5하나님은 사람에게 " 자기 형상과 같은 " 자식을 낳고 그로써 사람을 " 자기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 창조하신 창조주의 일을 계속할 능력을 주셨다(1:27 참조). 첫 사람뿐만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 을 지닌다. - 옛 선조들이 누린 아주 긴 생애는 창조주가 주신 복의 힘이(2절 다음 해설 참조) 옛적에는 아직 깨어지지 않은 채 작용하고 있었음을 표현한다. 생명력은 근원에서 멀어지면서 줄어든다(11:10-26에 적힌 나이 참조. 이와는 달리 6:3은 다른 전승층에 속한다).
5:6-24 에녹 은 다른 사람과 견주어 볼 때 짧지만 알찬 생애를 보냈다(그가 산 햇수 365는 한 해의 날 수와 꼭 같다). 에녹은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선조들의 계보에서 두드러진다. 하나님과 동행했다 는 표현은 6:9의 노아처럼 에녹이 하나님과 친하게 지냈고 하나님의 계획을 잘 알고 있었음을 가리킨다(이와 관련하여 주전 1,2세기 묵시문서 하나가 에녹의 저작으로 불린다. 이 책은 유14절에 인용되어 있다). 에녹의 종말은 비밀에 싸여 있다. 왕하2:11의 엘리야와 비슷하게 에녹은 죽지 않고 하늘로 옮겨졌다 .
5:25-32 노아 라는 이름은 '푹 쉬다'라는 뜻의 히브리 낱말을 생각나게 한다(푹 쉬게 하다 = 안위하다 ). 이름의 뜻을 이렇게 풀이함은 포도 농사의 창시자인 노아가(9:20) 인류에게 열어 보인 '위로'를 암시한다. 알콜의 부정적인 작용에 대한 말은 여기에 아직 보이지 않는다(그렇지만 9:21 참조). 본문에 라멕과 에녹이 나옴으로써 가인 후손의 계보에 있던 두 이름이(4:17-19) 거듭 쓰이지만, 그 이름을 지닌 사람들의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
출처: 해설 관주 독일성서공회판 본문 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