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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 한옥
한옥은 자연과 닮게 짓는다. 산자락에 의지해 지으면서 결코 산을 깍지 않는다. 정원에 쓰는 조경석도 원래 자연에 있었던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사용한다. 자연의 운행에 역행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한옥의 건축재로도 목재와 흙으로 헐어 넘어지면 환경의 오염없이 바로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재료들이다. 환경을 고려한 이러한 생각들은 환경보호의 차원에서 뿐만아니라 자연환경을 잘 이용해 우리생활에 가장 적합하도록 일조와 통풍 및 조형계획을 해왔다.
한옥의 가장 큰 특징은 온돌과 마루가 공존한다는 것이며 처마를 깊숙히 뺀다는 것이다. 한옥의 평면에 온돌과 마루가 공존하게 된 것은 추운지방의 평면과 따뜻한 지방의 평면이 결합하면서 생겨난 한옥만이 갖고 있는 특징이다. 사계절의 냉난방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이다.
요즘건축법에는 처마가 1미터 이상 나오면 건축면적에 포함되기 때문에 많이 빼고 싶어도 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우리의 문화환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법조문 중에 하나이다. 처마를 깊숙히 하는 것은 여름에 실내로 들어오는 태양광선을 막아 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보다 쾌적한 실내환경을 만들 수 있고 여름을 시원하게 날 수 있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자연스러운 순응이고 요즘처럼 에어콘을 억지로 돌려 얻을 수 있는 냉방병도 막을 수 있다. 선조들이 오랜기간동안 건축하면서 얻어진 지혜요, 조영철학 이었던 것이다. 한옥은 또한 울타리안에 큰 나무를 심지 않았으며 마당에 잔디를 심지도 않았다. 큰나무가 있으면 집안이 음침하며 벌레도 많아 위생적으로나 심리적적으로 좋지 않기 때문이다.
집은 쾌적해야 함과 동시에 명랑하고 밝아야 한다. 쾌적하기 위해서는 온도와 습도 등의 신체적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고 명랑한 기분을 주기 위해서는 밝아야 한다. 쾌적한 온도조건을 만들기 위해 처마를 깊숙히 빼다 보면 차칫 집안이 어두울 수가 있다. 그래서 집안을 밝게 하는 방편으로 마당에 잔디를 심지않고 마사토를 깔아 마당에 반사된 태양빛을 실내에 끌어 들였다. 대단히 고급스런 간접조명 방식이다. 설사 직사광이 들어온다 할지라도 한지를 투과하면서 순화된 부드러운 빛이 들어온다. 빛의 엄청난 조도차이에서 오는 시력의 감퇴를 막을 수 있는 지혜가 한옥에는 있다.
또 지붕의 비중이 크다보니까 너무 무거워 보이고 답답해 보인다. 그래서 자연에서 선을 하나 빌려와 지붕에 얹었다. 학이 막 날개를 접고 내려 앉으려 할 때의 모양 처럼 가겹고 율동적이고 생동감 있게 되었다. 기능을 만족 시키면서도 충분히 아름다운 조형언어를 사용한 것이다. 그것은 천연의 아름다움이며 인공의 멋은 아니다.
한옥에는 이러한 물리적이고 환경적인 것 이외에도 사람의 심성을 도야할 수 있는 여러가지의 배려가 있다는 것이 다른 어떤 주거유형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특징이다.
한옥은 기능과 사용에 따라 독립된 건물로 만든다. 각 건물을 놓을 때는 좌우대칭이 아닌 비정형적 배치를 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리고 각 채들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시원하게 배치된다. 대지가 경사지일 때는 깍지 않고 경사를 그대로 활용하거나 부토를 하여 수평을 잡은 다음 중요건물을 높은데 두고 부속건물은 낮은데 두어 공간의 위계성을 갖게 한다. 여기에 주전은 건물을 크게 하고 지붕도 높게 하여 조화로운 스카이라인을 갖게 한다. 같은 평면에서도 대칭적 구성을 하지 않는다. 또 방을 배치하여도 대청을 사이에 둔다던가 하여 독립성을 갖도록 구성한다.<그림1-태양고도와 일조각>
이상형 한옥
산이 많은 고장의 골짜기에 열린 넓지 않은 형국에서 평저한 곳은 농사 짓는 논밭이 되어야 한다. 집터는 들녘을 피해 산기슭에 올라서야 했다. 산기슭의 집터는 조건이 까다롭다. 뒷산이 날카로우면 인격 함양에서 심성이 메마르며 단기(短氣)에 치우친다. 뒤쪽 산형이 둥글고 너그러우면 백성들은 덕기(德氣)에 넘친다. 산사태가 날 자리엔 집터를 잡을 수 없다. 큰물이 쏟아지는 계곡도 마땅치 않다. 그러니 집터 고르는 일이 까다롭다.
집은 남향으로 지어야 한다. 골짜기가 남향으로 열려야 볕이 잘 든다. 이런 터전은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바람기가 있어 시원하다. 산의 능선 중 어느한쪽이 낮아 바람이 휘몰아치면 나쁘다. 바람기도 온화해야 한다. 이런 터전을 바람기 머금었다고 말한다.
산은 고정되어 있지만 계곡의 물은 늘 흐르고 있다. 산이 조건을 만족스럽게 구성하였는데도 물이 없으면 사람은 살 수 없다. 물도 좋아야 한다. 이렇게 고루 갖추어진 터전을 우리는 좋은 집터라고 부른다.
이런 집터 중에서 아늑한 골짜기의 서편쪽 능선 아래로 맑은 물이 알맞은 양으로 흐르면 으뜸이라 손꼽았다. 그 물줄기는 집의 앞면에 이르면 동쪽으로 곧게 흘러 남향한 대문 앞을 지난다. 대문 앞을 지난 물줄기는 집의 동쪽에 만든 연못으로 흘러든다. 연못에 모였다가 넘처 흘러야 수덕(水德)을 충분히 받았다고 믿었다.
자그마한 연당은 네모 반듯하게 장대석으로 호안을 하였다. 연당 중앙에는 작은 섬을 만든다. 당주(當州)라 부른다. 이런 섬이 있으면 부귀공명하고 자손들이 번창한다고 하였다. 섬은 연못의 물이 썩지 않게하는 기능도 지녔다. 정자와 연못을 중심으로 정원이 만들어져 손님을 맞아들이고 공부중에 여흥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대문 앞에는 명당수가 흐르기 때문에 대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연히 다리를 건너야 한다. 이런 도랑과 돌다리는 좋은 터 고른 고급집에는 으레 있게 되고 궁궐등에도 구조된다. 다리는 역시 화강석을 다듬어서 돌다리를 놓는다. 돌다리는 아주 간결하게 구조하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긴돌을 다듬어서 몇 개를 나란히 병렬시키는 정도로 완성한다.
돌다리 남쪽은 바깥마당이 넓직하게 자리 잡는다. 가을의 추수와 농작업에 충분한 크기로 만들어 진다. 한쪽에는 비를 피해 물건을 넣어놓을 수 있는 헛간이 만들어지고 한쪽에는 추수가 끝나고 남은 볏가리가 쌓여진다.
창덕궁의 연경당을 보면 다리건너 대문간채에 이른다. 대문간채에는 장락문(長樂門)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오래오래 즐겁게 살고자하는 소망을 담고 있는 것이다. 대문간채는 바깥마당과 가까워 가을 걷이를 보관할 수 있는 여러가지의 창고들이 만들어 진다. 한쪽에는 마구간과 외양간이 있어서 농작업에 쉽게 동원될 수 있도록 한다.
문간채 한쪽편에는 곡식을 보관하는 곳간채가 들어서 있다. 곳간채는 통풍이 잘되어야 하기 때문에 지면으로 부터 높이 띄워 루각형태로 만들어 진다. 반빗간에도 작은 곳간이 있지만 여기에는 바로바로 사용될 곡식이 보관된다.
문간채를 들어서면 행랑마당이 있고 행랑채가 있다. 행랑채에는 출입문이 2곳에 마련된다. 여성의 출입구와 남성의 출입구가 구분되어 있다.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사랑마당이 있고 왼쪽으로 들어가면 안마당에 이른다. 행랑채에는 아랫사람들이 거처한다. 살립집이 마련되 있어야 한다. 또 곡식도 종류별로 보관하기 때문에 행랑채에는 작은 창고들이 많이 필요하다. 곡식뿐만아니라 잔치에 쓸 술도가도 행랑채에 만들어진다.
행랑의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큰사랑채가 있고 우측에는 '࠘'자로 아랫사랑채가 있다. 큰사랑에서는 바같주인이 거하고 아랫사랑채에는 장성한 아들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아랫사랑채에는 훈장님 방도 따로 있고 대청이 넓게 만들어져 여럿이 모여 공부할 수 있도록 계획되었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내외담이 막혀있어 샛문을 통해야만 건너갈 수 있다. 외부로부터 차단하는 효과도 있다. 큰 사랑채 뒤로는 아늑하고 쾌적한 곳을 골라 노부부가 거하는 뜰아래채를 두었다. 뒤에 후원의 정자와도 연결되어 있어 자연과 가장 가깝게 접하면서 여생을 즐겁게 보내시도록하는 배려이기도 하다.
안채 뒤로는 반빗간이 따로 마련된다. 이와같이 큰 대가집에서는 식사준비도 보통일이 아니다. 그래서 식사를 준비하는 채를 따로 두었다. 반빗간 뒤로는 우물과 장독대,곳간 등이 있어서 식사준비를 편리하게 하였다. 안채 서쪽으로는 별당채를 따로 두어서 과년한 여식이 거하도록 했다.
내외공간
기능에 따른 채의 분리
한옥은 기능과 사용에 따라 독립된 건물로 만든다. 각 건물을 놓을 때는 좌우대칭이 아닌 비정형적 배치를 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리고 각 채들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시원하게 배치된다. 대지가 경사지일 때는 깍지 않고 경사를 그대로 활용하거나 복토(覆土)를 하여 수평을 잡은 다음 중요건물을 높은데 두고 부속건물은 낮은데 두어 공간의 위계성을 갖게 한다. 여기에 주전은 건물을 크게 하고 지붕도 높게 하여 조화로운 스카이라인을 갖게 한다. 같은 평면에서도 대칭적 구성을 하지 않는다. 또 방을 배치하여도 대청을 사이에 둔다던가 하여 독립성을 갖도록 구성한다.
한옥의 모듈
한옥에 사용되는 척도는 모두 인체에서 나온다. 근대이전에 사용했던 자(尺)은 사람의 손마디를 한 치(寸)로 했을 때 그 열배되는 길이를 말한다. 치의 1/10을 푼(分)으로 한다.
삼각형 비례를 사용함에 있어서도 구,고,현(勾股竓) 법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사람의 다리 관절에서 그 비례가 나온다. 사람의 허벅지를 구(勾)로, 정갱이를 고(股)로 했를 때 구와 고가 이루는 빗변(竓)을 연결하면 직각 삼각형이 나온다.
이러한 삼각형의 비례는 피타고라스의 삼각형 비례법보다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온 인간을 중심으로 한 모듈이다. 집을 지을 때 수직과 수평을 잡는 것도 이러한 삼각형이 이용되었다. 방의 크기를 결정함에 있어서도 천지만물의 기본수인 3과 사람의 평균신장인 5를 기본수로 하여 그 배수를 기준삼았다.
가벽의 이용(분합문)
대청과의 경계에 들어 올릴 수 있는 여섯 짝 문을 설치한다. 아랫목에 앉아 건너다볼 수 있게 하기도 하다가 중간에 칸막이 들여 방을 이등분 하기도 한다. 아랫목과 웃목사이에 임시 경계를 둔 것이다. 여기에도 맹장지의 미닫이를 설치한다. 필요에 따라서 다시 터서 원상복구할 수 있게 마련한다.
칸막이를 옆으로 치기도 한다. 겹집의 모양이기도 한데 쓰임에 따라서는 편리하기도 하고 전유공간이 확보되기도 한다. 필요에 따라서는 역시 넓은 방으로 회복시킬 수 있다. 넓은 방일 때 침상을 따로 들여다 놓기도 한다. 둘레에 병풍을 치거나 발을 늘어뜨리거나 방장을 드리워서 아늑하게 꾸민다. 모두 조립식이어서 보통 때는 해체하여 따로 보관해 둔다. 이런 침상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볼 수 있다. 그 유래가 오래된 것이다.
한국은 사계절이 있어서 여름에 무척 덥고 겨울에 춥다. 한옥은 더위와 추위에 모두 적합해야 한다. 그러므로 개방성과 폐쇄성이 동시에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가벽의 역할을 하는 분합문이어서 한옥에서는 일찍부터 문이 발달 되었다. 전세계 건축에서 한옥만큼 창호가 발달한 건물은 없다. 유럽에서는 20세기 들어서서야 가벽을 연구하게 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구들과 마루
구들의 이력과 유형
고구려의 구들은 방의 한편에만 설치하는 쪽구들이었다. 움집의 구들과 상통하는 구조이었다. 그것을 장갱(長穀)이라 불렀다. [구당서]의 장갱이 그것이다.
고구려 이래의 구들이 이웃에 오랜 세월 작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하는데, 북쪽지방에서는 대단히 요긴한 난방시설이어서 세월이 훨씬 흐른 뒤에도 구들을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고구려와 이웃에 있으면서 다투기도 하고 친선을 맺기도 하였던 선비족이 세운 나라인 북위에도 구들이 보급되어 관계사(觀鷄寺)에도 구들을 시설하였었다. [수경주(水經注)]에 수록된 이야기이다.
원초의 시기로 부터 고구려를 거쳐 백제와 발해에 이르기까지의 구들은 실내의 한쪽에 쪽고래를 켜고 아궁이를 시설하여 실내에서 불을 지피도록 된 구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겨울에 지독하게 내려 쌓이는 눈으로 바깥출입이 막혔을 때라도 능히 불을 지필 수 있게 해야한다는 기능적인 문제가 고려된 시설이었다고 해석된다. 이 흐름은 지금도 계속되어서 함경도지방에서 볼 수 있는 여섯 혹은 여덟간 겹집으로 발전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계열의 쪽구들과 오늘의 방 전면을 난방하는 온돌방과의 징검다리로 발해 이후의 구들을 살펴야하는데 고려시대의 것이 거기에 해당한다. 그렇긴 하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것의 대부분은 조령 원터의 사례를 제외하면 고려시대에도 주류는 쪽구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조 사람들이 욱실이라 부르는 온돌방의 정착은 조선조에 이르러서야 확고하게 되었던 듯 하다. 물론 결론 내리기에는 아직 이르다. 유례가 너무 엉성하기 때문이다. 고려의 구들의 출현을 더 기다려 봐야 하겠다.
조선조의 구들 중에 함경, 평안, 황해도의 집에서 방의 반쪽에만 구들을 드린 예가 있다고 한 보고가 있는데 이는 정지를 지칭한 것이다. 오늘의 온돌방처럼 방 전체에 구들시설을 활발하게 시작한 것은 대략 임진왜란 이후가 아니겠는가 한다.
마루의 발전과 구조
마루는 남방의 따뜻한 지방으로 부터 발전하여 북쪽으로 전파되어 구들과 만나게 되었다. 마루는 한옥에 있어서 남방적인 특성으로 주로 여름에 사용하는 공간이 된다.
마루의 종류는 대청(마루), 툇마루, 쪽마루, 뜰마루로 나눌 수 있다. 대청 마루는 집의 중심이면서 모든 동선의 중심이기도 하다. 대청 마루는 향의 기준이 되며 2칸내지 3칸으로 만들어 진다.
툇마루는 아마도 쪽마루,뜰마루와 같이 혼용해 사용되는 폭넓은 개념으로 일반인에게 알려져 있는 것 같은데 사실상은 다르다. 툇마루는 툇기둥이 나와있어야 형성되며 툇기둥과 안기둥 사이에 놓이는 폭이 좁은 마루로 처마 안쪽에 위치하여 실내에 속하게 된다.
쪽마루와 뜰마루는 놓이는 위치는 같으나 단지 구조적으로 마루가 기둥에 끼게 되어 고정된 것이 쪽마루,기둥에 고정됨 없이 이동이 자유로운 것이 뜰마루라 각기 부른다.
마루짜임은 장귀틀과 동귀틀은 폭이 큰 부재를 사용하되 네 모서리로만 보내게 되는데 내구성이 좋아 오래 간다. 귀틀맞춤은 장귀틀에 통장부를 만들어 동귀틀에 내다지로 맞추며 이 부분에 마루 동바리 장부 혹은 촉꽂이로 꿰맞춰 귀틀이 꽉 물려있도록 한다. 마루널은 장귀틀에 턱솔로 맞춰지는데 한쪽 끝의 홈턱을 변탕함 없이 마루널을 그냥 옆으로 밀어넣고 마지막 동귀틀을 맞춰 마감한다. 다른 방법으로는 동귀틀을 눕히지 않고 세로로 길게 세워 쓰며 마루면보다 튀어나오도록 동귀틀을 장귀틀에 맞춰넣는다. 장귀틀 장부는 내다지 뺄목으로 빼내고 메뚜기 산지를 끼워 고정시킨다. 혹은 벌림쐐기로 고정시켜서 뺄목을 잘라내기도 하는대 동바리는 장귀틀에 마추어 세우게 된다.
이렇게 장귀틀,동귀틀이 짜이면 그 사이에 두툼한 널판(혹은 청판이라고도 한다)을 끼우게 되는 과정이 남아 있다. 대개 청판은 마주한 두 장귀틀의 파인 홈을 따라 청판은 양팔을 벌리고 쭉쭉 밀려 끼어들어가는데 언제나 맨 마지막 청판은 한팔이 장귀틀 표면에 걸쳐진 채로 마감된다. 이는 청판 보수를 손쉽도록 해준다. 못에 의해 부재들이 고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목구조의 짜임에 의해 설치와 보수시에도 간편히 할 수 있도록 배려한 조상의 슬기에 놀라울 뿐이다.
마루의 전면 기둥을 잇는 장귀틀 앞에 때로 덧대어지는 얇은 널판이 있는데 이를 여모판 또는 여모중방이라 한다. 이는 마루의 속보임을 줄이고 디딤돌에 놓여진 신발들이 마루 밑으로 떨어짐을 방지함에 있다.
흔히 우물마루라면 위에서 말한 장귀틀과 동귀틀 사이에 청판이 깔려 형성되는 것이고, 장마루라면 이 사이를 긴널판이 장마루 방향으로 놓이는 것을 말한다.
초기에는 마루로만 형성된 건물이 있어서 한옥의 구들과 조합되기 이전의 원초적인 모양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다락집
다락집은 나무를 의지해서 만든 오두막 집에서 그 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생나무 가지를 상투 엮어 내부공간에 나뭇대기들을 걸쳐대 바닥을 만들어 사다리를 놓고 오르내린 것을 마루의 원초형으로 볼 수가 있다.
경(京)
곡식의 낟알을 저장하는 창고로 그 기능상 습기가 차면 상하기 쉬워 건조한 상태로 보관이 용이하다. 그 구조는 사방네기둥을 세우고 기둥 중턱쯤에 나무바닥을 만들어 땅으로부터 띄워놓는데 앞서 말한 땅으로부터 올라오는 습기의 피해를 막기 위함이다. 설치되는 장소는 집 부근에 두어 경계가 쉬우며 주위에 나무가 있어 드리우고 있는 곳과 지붕 밑은 당연히 벗어나야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공중으로부터 낙하되는 짐승이나 곤충류 따위로부터 공격을 미연에 막을 수 있을 뿐더러 통풍의 원활함도 꾀하기 쉽기 때문이다.
내루(內樓)
다락집이 집의 한 칸에 만들어지는 경우 이것을 내루라 부른다.
내루는 보통 사랑채에 구성되며 그 집에서 제일 경관이 잘 바라다보이는 자리에 설치된다. 그것은 집에 따라 평면의 유형이 바뀌게도 만드는데 주인의 명운(命運)과 경관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풍수적인 요소가 깔려 있다.
양청(凉廳)
왕조실록 등에서 보이는 것으로 궁궐과 같은 규모 있는 건물내에 피서를 위해 특별히 마련해둔 마루방 또는 대청이라 여겨진다.
정자(亭子)
이규보의 사륜정기에 보면 '사방이 탁 트이고 높게 만든 것이 정자이다.'라고 하고는 이와 비슷한 구조인 사(擂)와 누(樓)와는 구별하고 있다.
한옥의 천장높이
한옥에서 방의 경우 천장 높이는 보통 7.5자로 잡는다. 이것은 앉아있는 사람의 눈높이 2.5자에 서 있는 사람 한 길을 합한 길이 이다. 이것은 인체치수를 모듈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방에 들어 앉는다. 아늑해야 좋다. 썰렁하면 덜 좋다. 아늑하다는 생각은 안정감에서 유래한다. 안정감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타고난 감각인데 수천년의 경험이 축적된 잠재의식에서 발현하는 깊은 인식에 속한다.
한국사람은 자기 몸을 기준으로 삼고 안정감을 고려한다. 방의 넓이만 해도 그렇다. 삼국시대 이래로 그랬으리라 여겨지는데 백성들 집의 방의 크기는 한 변이 15자였다. 15×15자가 최소한의 평면이었다. 형편이 나지면 18자, 21자, 24자, 27자로 넓혀 나간다. 이것은 모두 3의 배수이다.
3은 천·지·인의 조화수 이다. 5는 또한 한국사람의 평균신장을 이른다. 3과 5가 어우러져 한옥의 방의 크기의 기본 단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중심, 즉 나의 신체를 기본 모듈로 하여 평면의 크기와 단면의 크기가 결정되는 것이다.
마루에서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대청마루는 방이 평천장인데 반해서 연등천장이다. 특별히 반자를 하지 않고 서까래를 그냥 노출되게 놓아두는 것이 바로 연등 천장이다. 서까래는 지붕의 빗물받이 물매에 따라 30°에서 60°사이의 각도로 걸리게 된다. 그러니 아래에서 올려다 보면 중심부가 높게 구조되고 좌우로 경사지게 되어 있다. 이 구조에서 중심부 가장 높은 자리를 10자로 잡는 것이다. 5자를 사람들 평균신장으로 설정하였을 때 마루 위에 서있는 사람의 머리 위로 한 길이 되는 여유를 두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방에 비해서 천장이 높다. 대청마루는 보통 평균신장의 두 배를 잡는다. 방의 천장 높이가 7.5자라면 대청마루는 10자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점은 방은 앉아서 생활하는 것을 기준으로 했고 마루는 서서생활하는 것을 기본으로 했기 때문에 오는 차이점이다. 한옥의 이러한 천장높이의 결정법은 삼국시대부터 있어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통일신라나 조선초의 가사규제에 의하면 귀족 일 수록 평면만 커지는 것이 아니라 기둥 높이도 높아져 천장 높이가 높아짐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귀족 일 수록 더 높은 평상을 놓고 생활했음을 알 수 있다.
천장 높이가 이렇게 좌식이건 입식이건 머리에서부터 천장까지의 높이가 사람 한 키 정도로 일정하게 확보되는 것은 기(氣)의 유통과도 관계가 있다. 정수리에서 솟아오른 기가 기세 좋게 뻗어 나간다.
기를 발산만 하면 탈진된다. 그래서 기는 대류하면서 다시 흡수된다. 발산과 흡수가 꾸준히 계속된다. 발산하였을 때 천장이 낮아 기를 억압하면 쇠(衰)하여진다고 말한다. 기를 더욱 억압하면 마침내는 기색(氣塞)하고 말게 된다. 반대로 천장이 너무 높으면 빠져나간 기가 다시 돌아오지 않아 기가 허하게 된다. 그러므로 기가 순환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높이로 집의 단면은 만들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의기양양한 인격이 함양되고 당당하게 세상을 살 수 있는 자제들을 키워낼 수 있는 것이다.
단면계획과 머름
머름의 기능
방의 앞뒤로는 출입문이 없고 창을 낸다. 창은 출입문 보다 문지방이 높다. 그래서 머름이라는 구조체가 등장한다. 그리고 창문 앞으로는 반 칸 정도의 툇마루가 설치 된다. 툇마루 바닥에서 창문의 윗선,즉 상인방 까지는 대략 사람의 평균신장 정도의 높이 이다.
창문의 높이는 3-4척 정도로 설정된다. 창문 밑에 만들어지는 머름은 높이가 대부분 한 자(약30㎝)에서 1.8자 정도이다. 이러한 높이는 방에 앉아 편안하게 팔을 걸칠 수 있는 높이가 된다. 즉 인체 치수에 기본을 두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이것이 더 낮아진다면 팔을 기대기가 어정쩡 하여 자세가 불편하고 심리적으로 불안할 것이다. 또한 너무 높으면 폐쇄적이 되어 심리적으로 위압감을 줄 것이다.
프라이버시
우리의 한옥은 높은 기단위에 지어지는데 마당에서 머름까지의 높이는 통상 서있는 사람의 눈 높이 정도로 설정된다. 또 기단에는 어느정도 폭이 있기 때문에 외부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여기에 머름이 있기 때문에 방안의 프라이버시가 보장된다. 지금의 주택에서는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보밑 까지 창문을 올리다 보니까 문지방도 따라 올라가 상당히 창문이 높게 달리게 된다. 그럴지라도 문지방의 높이가 눈 높이 아래에 있고 창문까지 접근할 수 있어 방안의 프라아버시가 보장되지 않는다.
또한 창문이 너무 높이 있어 독서 등의 생활 눈 높이 정도에서는 자연채광의 사각이 생긴다. 하지만 비록 창을 통하여 빛이 들어온다 할지라도 창이 유리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직사광선이 들어와 눈에 좋지 않을 뿐 만아니라 부분적으로 조도의 차이가 엄청나게 생긴다.
일조와 열환경
한옥은 높직한 기단위에 세우고 마당에는 잔디나 큰나무를 심지 않으며 마사토 정도로 포장한다. 반면에 양옥은 기단이라는 것이 없어서 실내바닥과 마당과의 단차가 거의 없다. 그리고 마당에는 잔디를 일반적으로 깐다. 이러한 차이에서 일조계획에 많은 차이를 보인다.
한옥의 창문은 방바닥에서 약 한 자 정도의 머름위에 만들어진다. 그리고 처마가 깊이 빠져나와 직사광선이 들어 오지 않는다. 그대신에 마당으로 부터 반사되는 빛이 간접광이 되어 방안 골고루 들어온다. 기단을 높인 것도 물론 습기를 피하고자 하는 것도 있지만 간접광을 충분히 받기 위함이다.
창호지는 또한 적당히 환기도 되면서 직사광선의 빛을 걸러 순하게 만드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한옥은 방안 구석구석 까지도 조도가 일정한 순한 빛이 꽉차게 된다. 하지만 양옥은 처마가 짧고 창문이 높이 달려 있으며 마당에는 잔디와 나무 등이 있어 간접광은 받을 수가 없다. 그래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직사광선에 의해 음영의 대비가 심하고 앉았을 때 눈 높이 정도의 곳에서는 오히려 어둡게 된다.
창호지는 직사광선을 걸러 순광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아예 지붕의 처마를 깊이 빼내어 직사광선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럴경우 실내가 너무 어둘 것을 배려하여 창을 밑으로 내렸으며 기단을 높이고, 마당에는 마사토를 깔아 마당에서 반사된 빛이 간접적으로 방안에 들어오게 함으로서 방안 전체가 일정한 조도를 갖게 한 대단히 과학적인 조명계획이다.<그림2-일조계획>
한옥의 후원은 나무숲이나 뒷산의 구릉으로 해서 찬공기가 형성된다. 반면에 앞마당에는 태양의 복사열로 인해 더운 공기가 형성된다. 앞뒤의 기온차로 인해 기류가 형성된다. 바람이 한점 없는 날에도 한옥이 시원한 것은 바로 이러한 환경조건에 의해 자체로 공기의 순환이 일어나 실내로 유입되기 때문이다.
대청마루의 높직한 연등천정 상부로 뜨거운 공기가 올라가고 사람키 아래로는 시원한 바람의 순환이 이루어진다. 생활공간의 높이에서는 쾌적한 온도조건을 갖추게 된다. 처마를 깊숙히 빼기 때문에 그늘이 형성되고 이로 인해 나무그늘에 들어온 것과 같이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처마밑에서도 소기류가 형성되어 마당의 뜨거운 공기를 차단하는 역할도 한다.<그림4-대류와 통풍>
한옥의 지붕에는 강회다짐과 적심 등을 올려 두껍게 한다. 한 낮에 뜨거운 태양열을 받지만 흙과 나무의 단열효과로 실내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차가운 것도 마찬가지다. <그림6-단열>
과학적인 창의 구조
안방을 기준으로 했을 때 출입문은 대청쪽으로 난다. 문짝은 1짝에서 3,4,6,8짝으로 낸다. 평상시의 출입은 한 짝 만을 여닫으므로서 가능하다.
대청과 방과는 낮으막한 문지방으로서 경계를 삼는다. 여름이나 잔치를 위해 넓은 공간이 필요로 할 때는 열어 른혀서 들어 올려 대청의 대들보에 박혀 있는 걸쇠에 걸면 대청과 방 사이는 벽 하나가 없어진 꼴이 된다. 대청과 한공간을 이루며 밖과 탁트여 시원하게 된다. 이러한 문을 분합문이라 하고 분합문은 문 윗쪽에 돌쩌귀가 달려 있어 위로 들어 열어 걸수 있게 되어있다.
분합문이 대청과 안방 사이의 벽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창호지로만 바른다면 겨울과 같은 때 문을 다 닫아도 추을 뿐만아니라 너무 밝아 안방에 앉았을때 허하고 불안하여 안정감이 없다. 그래서 대부분 대청과 방사이의 분합문은 불발기창을 둔다. 불발기창은 문의 중간,눈 높이 정도에 사각,팔각 등으로 내고 이부분 만을 창호지로 바르고 나머지 위아래는 안밖으로 벽지를 발라 벽과 같은 역할을 하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난방에 효율적이고 심리적으로도 안정하게 되는 것이다. 수시로 들어걸 수 있는 이러한 분합문은 용도에 따라서 수시로 움직일 수 있는 가벽과 같이 최신의 건축계획을 담고 있는 훌륭한 우리의 건축 요소인 것이다.
창은 바깥의 띠살무늬 덧문 만을 다는 수도 있지만 그안에 명장지의 미닫이와 맹장지의 갑창을 달기도 한다. 격조가 있는 집에서는 명장지 다음에 갑사천을 바른 사창을 하나 더 달기도 한다. 갑사는 현대의 방충망처럼 얇아 투명하며 벌레를 막으면서도 통풍이 가능하여서 여름을 지내는데 유익하다.
이런 4단계의 창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 창은 띠살문과 판장문이 있다. 띠살에는 세살로 된 창호를 주로 사용하며 만살과 '亞'자살 등이 사용되기도 한다. 다양한 문양을 연출한다. 대청의 뒷쪽 에는 판장문을 주로 사용한다. 시골 농가 등에서는 덧문만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덧문 안쪽에는 미서기창을 단다. 덧문과 미서기창으로 구성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창의 구조이다. 미닫이창을 열었을때 창짝이 들어가도록 방안 벽쪽에 설치하는 것을 '두껍닫이'라고 한다. 완자창은 아자창보다 화려하므로 안방 등의 내실에서 주로 사용한다. 아자창은 단정하고 고상한 풍격을 지니고 있으므로 사랑방 등에 주로 사용한다. 숫대살은 일정한 길이의 살을 2개씩 나란히 가로, 세로로 배열한 것이다. 범살은 '田'자나 '用'자 모양의 격자를 만드는 것으로 창살 사이의 간격이 넓은 간단한 구조로 널리 사용된다. 유가(儒家)에서 검소, 근검이 숭상되므로 사랑방 등에 쓰였다고도 한다.
갑창은 창호의 가장 안쪽에 덧대는 문으로 방풍을 위해 설치하는 문이다. 갑창은 도듬문이라고도 하며, 문 울거미를 제외한 안쪽에 종이를 두껍게 발라 붙인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 표면에 서화를 붙여 장식하기도 한다. 이렇게 빛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갑창을 맹장지라고 하는데 맹장지를 닫으면 낮에도 컴컴해 낮잠을 청할 수 있다. 갑창을 설치하는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두껍이집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
갑창과 미서기창 사이에 통풍이 되면서 모기나 나방 등의 침입을 막도록 하는 방충창이 있는데 이를 사창이라 한다. 사창은 창문의 울거미와 살을 짜고 창호지 대신 올이 굵은 비단을 붙인 것이다. 이 창을 설치하여 4중의 창호구성을 하는 것은 가장 고급스러운 기법으로 완성된 창호의 형식이라 할 수 있다.
대청과 방사이에는 출입문으로 불발기분합문을 단다. 여름에는 문짝을 다 걸어 시원하게 사용할 수 있다. 방과 대청사이의 분합문에는 불발기창을 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불발기창은 육각창으로 만드는 것이 많고 사각형으로 하는 경우도 있다.
불발기창의 높이는 앉아있는 사람의 눈 높이로 만든다. 불발기 분합문은 불발기창에 만 창호지를 바르고 위 아래는 벽지를 발라 빛이 들어오지 않도록 한다. 대청에서 방안으로 들어오는 빛은 불발기창을 통해서만 들어온다. 즉 방안에 앉은 사람의 눈 높이에서 만 빛이 들어 오도록 한다.
빛이 눈 높이에서 들어올 때에 가장 안정된다. 빛이 너무 높은 곳에서 들어오면 심리적으로 폐쇄감을 느끼고,너무 낮아 발 밑에서 빛이 들어오면 불안감을 준다. 한옥의 불발기분합문은 가장 안정된 높이에서 빛을 받아들이도록 한다.
한옥의 창는 창호지를 바른다. 창호지는 보온도 되면서 호흡을 하기 때문에 보온과 통풍에 유리하다. 또 직사광선을 확산광으로 만들어 방안 전체의 밝기가 일정하고 부드러운 광선으로 만들어 준다. 간접조명방식이 아니면서도 그 이상의 효과를 내는 매우 우수한 조명계획이다.
한옥의 부속시설
부엌살림 및 화덕
부엌의 화덕은 구들의 발생과 함께 생겨나서 난방과 취사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화덕은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많이 등장한다. 이러한 화덕의 모양은 조선시대 서민의 주택에서도 나타난다. 화덕이 구들과 연결되어 난방과 취사를 겸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남쪽 지방에서는 취사와 난방을 분리한 아궁이가 있다.
제주도 살림집에서는 취사용 구들을 부엌 외벽쪽에 따로 마련한다. 고구려의 독립된 화덕과 같은 유의 화덕이라고 보여진다.
조선시대의 일반서민들은 화덕이 구들과 붙으면서 난방과 취사를 겸하게 했다. 그러므로 화덕은 크게 독립된 화덕과 구들과 붙어있는 화덕이 있다.
부엌에는 방에서 튀어나온 다락이 있고 조리를하는 부뚜막이 있다. 그릇을 넣을 수 있는 찬장이나 찬방이 따로 마련되기도 한다. 한쪽에는 물항아리가 있다. 부엌옆에는 따로 곡식간이 마련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부엌은 신성시되어 조앙신을 모시는 시설을 하기도 한다.
부엌에서 발생된 연기의 그을음은 목재표면을 검게 감싸지만 표면의 탄소로 인해 목재에 해충이 침입하는 것을 막을 뿐만아니라 썩는 것도 방지해 준다.
굴뚝
온돌을 난방으로 하는 한옥에서 굴뚝의 설치는 필수적이다. 초기의 움집에서는 지붕의 꼭대기를 열어 놓은 정도로 굴뚝을 대신 했다. 이러한 유형이 조선시대 말까지도 산간의 민가에서는 사용되었는데 까치구멍집이 그와같은 유형이다.
굴뚝에서 연기를 잘 빨아줘야 아궁이에서 불이 잘들어간다. 구조가 잘못되 연기가 안빠져 나가면 아궁이에서 불도 잘 타지않고 거꾸로 연기가 나온다. 연기의 역류를 방지해주기 위해서 굴뚝에는 개자리를 설치해 준다.
굴뚝은 자연조건에 따라서 높낮이의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는 북쪽지역의 경우에는 굴뚝의 위치도 아궁이 반대편인 건물 뒤 또는 옆에 설치하고 굴뚝의 높이도 높은 편이다. 중부지방으로 내려오면 굴뚝이 점점 낮아지며 남쪽의 경우에는 굴뚝이 화방담이나 건물 기단에 설치되는 경우도 있다. 제주도에서는 아예 굴뚝이 없다.
기왕에 만드는 굴뚝에 멋을 부려서 여러가지 모양의 굴뚝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재료도 다양하다. 통나무의 가운데를 파내서 연통으로 사용하는 굴뚝이 있고 굴피나무 껍질로 만든 굴뚝도 있다. 오지를 여러개 연결하여 쌓은 굴뚝, 돌로 만든 굴뚝,벽돌로 모양을 내면서 쌓은 굴뚝,기와편을 이용해 쌓은 굴뚝,흙으로 만든 굴뚝,기단 한쪽에 구멍만 낸 굴뚝 등 다양하다. 굴뚝 주변으로 이엉을 두껍게 돌리기도 하는데 이것은 보온을 해서 굴이 잘 내도록 하는 조치이기도 하다. 굴뚝에는 장식도 많이 베풀어지는데 경복궁 자경전 꿀뚝과 같이 십장생 문양으로 장식한 고급스런 굴뚝도 있다. 굴뚝 위에는 연가라는 집모양의 장식을 올려 연기구로 사용하기도 한다.
장독대
우리의 자연환경은 잘 썩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음식을 보관할 때도 발효시키는 방법이 가장 좋았다. 그런만큼 젖갈류를 비롯한 발효음식이 매우 잘 발달되었다. 고추장,된장,간장,김치,젖갈류 등을 보관할 장독대는 실생활과 어울려 중요한 요소이다.
발효음식은 햇빛이 잘들고 통풍이 잘되는 양지바른 곳에 두기 마련이다. 통풍을 위해서 장독대는 지표에서 일정한 높이로 시설된다. 장독 하나하나에도 돌로 동아리를 해서 받치기도 한다.
장독은 조리를 하는 부엌이나 우물과도 가까워야하기 때문에 대부분 반빗간 뒤에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안채로 반빗간이 합쳐짐에 따라서 안채 부엌과 가까운 곳에 장독을 설치한다. 주로 안채의 후원이나 옆에 설치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부엌 앞마당에 두는 경우도 있다.
장독대의 모양과 장독의 배치도 여러가지여서 생활의 지혜와 멋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낮은 담장을 쳐서 일곽을 형성하기도 하고 샛문을 다는 경우도 있다. 또 장독에는 찬광과 연결되어 여러 부식물을 보관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공간이 있고 항아리을 둔다.
장독은 음식을 보관하는 곳이지만 정한수를 떠 놓고 소원을 비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장독은 정신적인 공간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우물
명당의 물은 지표상의 명당수와 지하를 흐르는 수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살림집에서는 지표의 물도 중요하지만 우물을 통해 얻어지는 지하수맥도 중히 여겼다. 우물은 삼국시대 이미 집집에 있었다. 굴착하는 도구와 기술이 일찍부터 발달해 있었다. 벽화에 묘사되어 있는 우물을 보면 지표위로 우물틀을 설치하고 있다. '井'자형으로 방틀을 짜고 물을 들어 올리는 도루레를 설치하는 등의 과학성을 보이고 있다. 우물가에 커다란 물독들과 자배기,항아리 그리고 통나무로 만든 구유통이 있고 그 옆에는 작업하고 있는 두 여인의 모습이 있다.
우물 옆에는 물확과 연결 수조가 있어서 부엌이나 방앗간에 물길이 닿도록 하기도 한다.
삼국시대 신라의 김유신장군댁에도 이런 우물이 있었다. 이 전설적인 우물은 지금도 남아 있어서 '재매정(財買井)'이라고 불리고 있다. 경주시내에는 이밖에도 많은 우물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분황사에 있다. 지금도 관광객에게 시원한 물을 제공한다.
우물은 사람의 혈맥과 같아서 대단히 중요시 여겼으며 치장도 많이 했었기 때문에 최근까지도 우물과 관련된 많은 유적이 나타나고 있다. 생활과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더욱 중요시 되어왔을 것이다.
우물은 물을 제공하는 것 외에도 냉장고의 역할을 한다. 빙고가 시설되지 않는 일반민가에서는 여름에 과일이나 음식을 우물에 끈을 매 보관했다가 먹는다. 어느 곳에서는 우물 옆에 샘을 만들어 놓고 그 위에 루각건물을 지은 다음 남쪽은 사창으로 하고 나머지 3면은 판벽으로 막아 음식을 보관하기도 한다.
뒷간
배설은 먹는 것 만큼이나 중요하다. 하루를 걸러도 어렵고,때를 지체해도 어렵다. 얼른 해결해야 가뿐해 진다. 배설은 인간에게 요긴한 것이었다. 신라 때도 마찬가지 였다. 불국사에 신라인들이 사용하던 매화틀과 부춧돌들이 남아 있다.
매화틀은 요즘과 같은 수세식은 변소로 생각하면 쉽다. 궁궐내에서도 이러한 화장실이 사용되었을 것인데 용변을 본후 밑에서 바로 받아낼 수 있도록 한 것 이다.
지방에서는 잿간에 변소를 마련하는 경우가 있다. 부춧돌 두 개를 놓고 한쪽 벽에는 주걱처럼 생긴 부삽이나 고무레 놓여 있다. 뒷쪽에 재를 용변을 보기전에 일정양 부춧돌 사이에 끌어다 놓는다. 그리고 용변을 본 후에는 주걱을 이용하여 재에 말아 한쪽에 치워뒀다가 거름으로 이용한다. 재는 탈취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요즘의 수세식 보다도 냄새가 안난다. 또 거름으로 활용하니 일석이조다. 화장실을 잿간 위에 높게 설치하는 경우도 있다. 떨어지는 가속력에 의해 자연스럽게 재로 감싸진다.
제주도에서 '통시'라고 하는 유형은 뒷간이 돼지울간 위에 마련된다. 일을 보면 돼지가 달려들어 깨끗이 치워준다. 화장실을 지면으로부터 높게 설치하는 것은 오랜역사를 갖고 있는 것으로 맹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화장실은 정착과 농경생활이 시작되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동생활에서는 이동식 화장실인 요강이나 매화틀이 사용되었다. 또 특별한 화장실의 시설없이 노천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것은 현재 서역의 이동식 몽고포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생활습속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역사 이래로 발달된 많은 화장실을 갖고 있는 것이 또한 한옥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안채 뒤쪽에는 여인들이 이용하는 후원공간이 마련된다. 여기에는 여인들이 뒷물을 할 수 있는 북수간(北水間)이 마련된다.
첫댓글 제게필요했던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