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태 근
연보
- 1920년 6월 30일 부산광역시 금정구에서 김명수, 김정순 부부의 2남3녀 중 맏이로
출생, 본관 경주. 아호 범곡梵谷
- 9세 때 울산으로 이사
- 1945년 8월 울산 건국청년단 창단, 선전부장
- 1946년 3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울산군지부 청년부장
- 1947년 1월 조선민족청년단 울산군 단장
- 1950년 9월 미8군 울산 유류보급창(POL) 노조위원장
- 1988년 7월 건국청년운동협의회 경상남도 지부장
- 1989년 11월 고희古稀기념문집 수필집 『태화강太和江』 출간 (처용출판사)
- 1994년 11월 제4회 경남연극상 (전국소극장 연합회장)
- 1996년 12월 공연예술부문 경남문화상 (경상남도지사)
- 1999년 4월 사단법인 대한민국건국회 울산시지회장
- 2002년 12월 예총 예술문화상 연극부문대상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장)
- 2006년 8월 문화논설집 『함월산含月山』 출간 (울산 중구문화원)
- 2006년 10월 옥관 문화훈장 (대통령)
- 2007년 5월 미수기념 희곡전집 『암벽暗壁』 출간 (울산 연극협회)
- 2007년 5월 연예예술인 스승 추대 (연예예술인협회장)
- 2011년 6월 11일 향년 92세로 별세, 울산예총장
7월 29일 묘소인근에 <태화강> 시비 제막
김태근金兌根선생님을 돌아보다
양 명 학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국문학)
<1>
금년 6월 11일은 범곡梵谷김태근金兌根선생님의 6주기가 되는 날이다.
지금이라도 우리들의 모임에 쓰윽 나타나서 “잘 되어가고 있나?” 하시며
옆에 와서 조용히 앉으실 것만 같은데 벌써 6년이라니!
범곡 김태근 선생님의 92년 생애는 오로지 울산의 현대문화 창달을 위해
바쳐진 것이었다고 하여도 아무도 아니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3·1 기미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쫓기어 일본으로 숨은
아버지로 인하여, 어머니와 조부모 손에 자라던 범곡선생은 다섯 살 어린 나
이에 어머니를 도와 가장 역할을 했던 탓으로 어릴 때부터 철저한 반일反日
정신을 가졌기에 아홉 살에 부모님을 따라 울산으로 이사 오고서도 반일과
우리문화 창달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광복 후의 울산의 건국운동, 반공계몽운동, 연극운동, 문학운동,예술운동이 모두 범곡의
주도하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웬만한 문학가나 예술가 문화인들이 자기 고향에서 어느 정도의 이름을 얻으면 거의 대부분 서울로 올
라가버리고 지방은 언제나 문화와 예술의 불모지로 일컬어지는 현상이 대부분이던 20세기 중반기의
우리나라 문화 현상을 되돌아볼 때, 범곡 선생처럼 끝까지 지방에 남아 그
지역의 문화와 예술을 지키고 키워준 분들이 있었던 지역은 그나마 그 지역
문화가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지역은 그 지역 특성의 문화를 상실한 채 ‘ㅇ
ㅇ지방문화=서울문화’ 이거나 ‘ㅇㅇ지역=문화의 불모지’로 되어버린 현상
들을 살펴볼 때 범곡 선생이 끼친 울산문화에 대한 공적은 위대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내가 범곡 선생을 처음 뵙게 된 것은 1955년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그해
봄에 교내 전교생 문예백일장에 장원을 하고 나니 최종두 김헌경 주영돈 서
상연 김인달(나이 많은 동기생으로 고등학교 때 요절) 등등의 선배들이 나
를 찾아와 격려해주었다. 그 후 수시로 울산읍내에서 열리는 문학행사에는
나를 데리고 가주었다. 어느 날은 시화전이 열렸는데 가보자고 하여 따라갔
더니, 얼굴이 가무잡잡한 어느 분 앞에 데리고 가서 “김태근 선생님이다. 인
사해라.” 하였다. 아무리 봐도 우리 학교 선생님은 아니다 싶어서 그냥 절
만 꾸벅하였던 기억이 남는다. 그러나 그 분이 거의 한 평생 나를 이끌어주
고 영향을 끼친 문화적 스승이 될 줄은 그 때는 전혀 몰랐다.
<2>
우선 범곡 선생의 가계와 생애를 한번 정리해보자. 이것은 김태근 선생께
서 돌아가시기 9개월 전인 2010년 9월 8일에 울산예술문화포럼(*대표 황
우춘)에서 행한 초청 강연회 ‘옛 얘기하듯 말할까’에서 선생님이 직접 하신
말씀과 기타 여러 문헌과 직접 들은 말씀을 토대로 정리해 보았던 것에 약
간 더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힌다.
선생님의 본관은 경주 김씨고 호는 범곡梵谷이시다. 유교 선비 집안으로
부친은 처사 명수命守씨고 모친은 김해김씨로 정순貞順여사인데, 두 분의 2남3
녀 중 맏이로 1920(경신)년 6월 30(음력5월 15)일에 당시 경상남도 동래군 동래
읍 오륜동(현 부산광역시 금정구)에서 태어나셨다.
부친이 1919년의 기미독립운동에 가담하셨다가 일본으로 망명하신 탓으로
태어나고서도 이름을 미처 짓지 못하였는데, 호구조사를 나왔던 일본순사가
적당히 대근大根이라고 적어 넣은 것을 후에(3세 때) 가족들이 “그래도 큰아들인데 대를
이을 아들이 남근이 빠져서야 되겠느냐?”고 하여 큰 대大자에다 불알이 하나 들어간 클 태太자로 바
꾸어 태근太根으로 고쳤다. 그 후 9세에 울산으로 오신 후에는 “왜놈 순사가
지은 이름을 그대로 쓰기 싫다.”고 하여 태근兌根으로 다시 고치셨다.
4세 때부터 서당을 다녔는데, 천자문千字文을 얼음 위에 박 굴리듯이 줄줄외웠기로 동네 사람들이
‘신동神童났다’고 칭찬하였다. 5세가 되자 어머니를 돕기 위해 조부님께 “지게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하여서는 나무를 하러 다녔으며, 아버지가 못 오시는 집의 장남이라 삶이 고달파서 철모르는 5세에
자살을 시도했다가 목을 매었던 지게꼬리가 끊어지는 바람에 살아나기도했다.
이런 것을 볼 때 범곡 선생은 어릴 때부터 두뇌가 명석하고 사물을 보는 눈과 생각이 넓었으며 결심
한 바를 과감히 실행하는 용단을 가졌던 것 같다. 9세 때에 부친이 일본에서 귀국을 하자 왜경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울산으로 이사를 왔는데 줄곧 걸어서 오셨다. 아마 교통수단도 불편했겠지만 왜경
들 모르게 와야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중략)
<4>
이제 범곡선생께서 타계하신지 6주년을 맞고 보니 선생님의 공로와 은덕이 더욱 새롭고 더욱 그
리울 뿐이다.사람이 구순을 살기도 어렵지만 그 구순 세월을 변함없이 한 가지 일에
매달려 살기도 쉬운 일이 아닌데, 범곡 선생은 그렇게 사셨고 그렇게 가셨다.
범곡 선생은 희곡 『암벽』이 한창 떴을 때 서울로 오라는 유혹을 수없이 받
았지만, 지방의 문화, 우리 울산의 문화를 지키기 위하여 꿈쩍도 안 하셨다.
그런 선생의 정신을 존경하였기 때문에 울산문학 초창기의 우리들은 누구
도 중앙문단 등단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으면서 지방문학을 고집하였다. 중
앙문단 등단제도 자체가 일제日帝가 우리 문학계를 잡아 흔들기 위해서 만
든 악의惡意적 제도였던 것인데도, 그래서 세계적으로 한국에만 있는 악법
인데도, 오늘날 한국문단이 중앙문단 등단 여부로 문인의 경륜과 자격을
따진다는 것은 참으로 가소롭다. 지방문화 지방문학의 다양성이 없으니 우
리나라의 문화도 문학도 발전하지 못하고 그 흔해빠진 노벨문학상도 여태
못 받고 있는 게 아닐까?
모두들 조금의 이름을 얻거나 조금의 틈만 나도 서울로 서울로 가버려
서,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교육도 모두 ‘대한민국’이 못 되고 ‘서울민국’이
되어버린 이 나라의 개성 없는 지방 문화의 공허감을 생각할수록 범곡 선
생은 우리들 마음에 영원히 태산泰山으로 남을 것이다.
*(중략)전체 내용 참조:울산문학 제80호 pp. 25-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