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현실 기획
종전이 오고 있다
강정구(문학평론가)
<종전 시대의 시>라는 기획은 시라는 장르가 종전 시대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하는 탐구로 이해된다. 이때 문제시되는 것은 종전 시대가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형이라는 점이다. 엄밀히 말해서 내일 뭐가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오늘까지 거쳐 온 역사의 길을 성찰하면서 내일의 태양을 그리며 기다릴 뿐이다. 이 글은 종전 시대에 씌어질 시가 어떤 역사적인 맥락 속에 있는가 하는 점을 성찰하면서, 동시에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 하는 점을 주목하도록 하겠다.
먼저, 종전 시대에 씌어질 시가 어떤 역사적인 맥락 속에 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역사적인 맥락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종전에 선행한 전쟁의 성격을 규정지을 필요가 있다. 한국전쟁은 소련의 세계공산화 전략에 맞선 미국이 사회주의권에 대한 봉쇄와 반격을 시도한 좌우 이데올로기적인 특성을 지닌 것으로 이해된다.1)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우익 국가 미국과 좌익 국가 소련이 1945년에 한반도를 분할·점령하고 1948년에 각각 극우·극좌 국가를 만들어놓았을 때에 우연히 발생할 수 있는 일종의 스파크와 같다. 한반도에서 자신의 국가를 각각 만든 남북한 권력 사이에서 2개의 국가란 좀처럼 이해되기 힘든 현상이었다. 동일한 문화 혈연공동체의 통합적인 요구가 전쟁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한국전쟁이 세계사적인 차원에서 좌우 이데올로기의 첨예한 대립이었다는 특성 규정은, 당대의 시가 나아갈 바를 분명하게 제시해줬다. 성찰과 감각의 장르인 시(문학)가 이데올로기에 대응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이데올로기 이전에 인간이 있다는 맨얼굴의 논리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문학사적인 가치를 더 쳐주는 전쟁기의 시는 대부분 인간의 맨얼굴을 보여준 시, 혹은 휴머니즘 시였다.(여기에서 휴머니즘의 이데올로기성은 논의 전개상 논외로 치기로 한다.) 구상은 다음과 같이 전쟁기 인간의 맨얼굴을 보았다.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바른 두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로다.2)
문제는 이 맨얼굴이다. 맨얼굴이란 가리타니 고진에 따르면 기호론적인 틀의 전도에 의해서 가능하다. 이 시를 쓰기 이전에도 우리에게 방아쇠를 당기던 적으로서의 너희들이 있었다. 너희를 적으로 보는 것은 좌우 이데올로기라는 기호론적인 틀에서 가능하다. 너라는 적은 일종의 사물이다. 그것은 인간이 아닌 것이다. 이런 사물은 이미 주체와 같은 생명이 있지 않기 때문에 제거하거나 학대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죽은 너희를 보는 시인은 좌우 이데올로기를 ‘넘어선(post)’ 기호론적인 틀의 전도를 경험하고, 그 전도 속에서 너희를 잠깐 이데올로그가 아닌 인간 그 자체를 본다. 물론 인간 그 자체를 보는 것은 시적인 순간일 뿐, 다시 누구나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 현실에 적응해 살아간다. 남한의 역사는 적어도 이러했다. 전쟁 이전에 이승만이 극우 이데올로기로 권력을 획득·유지할 때에도, 박정희가 자신의 권력을 장기간 이어나갈 때에도 남한의 역사는 좌우 이데올로기의 이분법적인 틀에 의존하고 나중에는 갇혀서 자기 자신도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1980년대 후반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는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무너지는 기호론적인 틀의 전도가 일어난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 혹은 시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남한에서는 민주주의가 좀 더 실현됐고, 좌우 이데올로기의 틀 바깥에서 북한을 살펴볼 수 있게 됐으며, 이윽고 남북한 정상이 수차례 만날 수 있었다. 미국과 소련도 과거처럼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 속에서 한반도 전략을 펴지 않게 된 것이다. 나는 한반도에 종전이 오고 있다면, 적어도 이 역사적인 연속선 상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반도의 종전은 미국과 소련, 혹은 남한과 북한으로 대표되는 우익 대 좌익 이데올로기의 기호론적인 틀이 무너지는 역사적인 맥락에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종전 시대에 씌어질 시는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시간이다. 그동안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 구도 속에서 국가 단위 내부에서 추구했던 문학은, 남한의 경우에 민족문학이다. 남한의 진보적인 지식인은 1950년대 이후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까지 진보적 민족문학론으로 대표되는 민족문학을 전개해 갔다. 이때 이러한 진보적 민족문학이 한편으로 남한 내부의 좌익 이데올로기를 강조해서 우익 이데올로기의 광기성·비이성을 폭로하고 대안을 제시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름 좌익 이데올로기에 편중돼서 세계를 바라봤음도 부인하기 힘들다. 비유해서 말하면 거대한 오른쪽 날개를 펼쳐 날아가는 새에게 왼쪽 날개를 붙인 것이다.
이러한 사이에 2000년대 이후의 남한 사회에서도 민족의 이름으로 공공연하게 드러난 비이성·광기성이 문제 되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너무나도 협소한 단일민족주의이다. 단일민족주의의 유래가 이승만의 일민주의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단일민족주의로 나름의 순혈을 중심 집단으로 규정하면서 우리 사회에서는 결혼여성이주민, 외국인이주노동자, 외국이민회귀자, 탈북자 등도 모두 주변집단으로 내몰았다. 심지어 한 탈북자는 다음과 같이 절규한다.
탈북자 시인 김대호는 남한 사회의 단일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인 틀 속에서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사실을 날벼락이라 말한다. 모든 남한인이 자신을 남한의 중심 집단(단일민족)이 아닌 탈북자로 보는 시각은 기호론적인 틀 혹은 민족 이데올로기가 그만큼 강고함을 뜻한다. 이때 김대호는 벌어벗기라는 퍼포먼스를 통해서 자신이 인간이라는, 맨얼굴과 같은 맨몸을 보여주고자 시도한다. 이 시도는 이 시를 읽는 동안 잠깐 성공한다. 시적인 순간은 잠깐 왔다가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종전이 오고 있는 이 시대에 시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시적인 순간에는 민족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서 인간 그 자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 그 자체를 보는 어려움은, 소외당하고 무관심의 대상인 타자와 만나려는 레비나스의 사유와 맞닿아 있다. 우리는 남한의 중심 집단인 우리가 북한 인간을 만나거나, 혹은 남한 내부의 고집스러운 민족·좌우익 이데올로기적인 틀에 고착되려는 자들의 언행을 넘어서려는 어려운 과제 앞에 있다. 이때 시는 인간 그 자체를 순간적으로나마 만나게 해준다. 이것이 종전 시대 시의 방향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최근 남북한의 공연에서 있었던 다음의 노래는 여러 케미가 어울려서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인간을 만나게 해준다. 종전 시대의 시와 같다.
동포 여러분 형제 여러분
이렇게 만나니 반갑습니다
얼싸안고 좋아 웃음이요
절싸안고 좋아 눈물일세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4)
1). 강만길 외, 「한국전쟁의 기원과 발발」, 『한국사 17-18』, 한길사, 1994, 참조.
2). 구상, 「초토의 시8」, 『초토의 시』, 청구출판사, 1956.
3). 탈북자, 「날벼락」, 『벌거벗은 시의 고백』, 리빙북스, 2003, 68쪽. 이 시집에는 시인의 이름이 탈북자로 명기되었으나, 탈북자 도서 리스트를 참조하면 ‘김대호’로 나타나 있다.
4). 리종오 작사·작곡, 리경숙 방창, 「반갑습니다」
강정구 평론집으로 「세상을 떠도는 목어들-차창룡의 시세계」, 시 「경마공원」을 발표하면서 평론과 시 활동 시작. 편운문학상 평론 부분 본상 수상.주요 논저로 「신경림 시의 서사성 연구」, 「문학과 서정의 이면」, 「신경림과 민족문학 다시 읽기」, 「한국근현대문학의 민족 표상」, 「다문화시대의 민족문학」, 「산란하는 현실들」 등이 있음.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