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삶으로 성경쓰기4-스토리텔링>의 줄거리:
하나님이 참 만족과 기쁨과 행복의 유일한 근거가 되신다는 믿음으로, 건강 물질 권력 명예 등등 세상 가치 대신에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한 하나님 사랑이고, 그 사랑에 도달하기 위해서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동안에 우리는 삶으로 성경을 쓰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으로 성경 쓰기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스토리텔링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 의미가 온전히 성취 됩니다. 현장 스토리텔링과 현장 외 스토리텔링이 그것입니다.
삶으로 성경쓰기 IV-스토리텔링
(요4:27~30, 39~42)
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오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삶으로 성경쓰기 IV-스토리텔링>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삶으로 성경쓰기 IV-스토리텔링’
요즘 스토리텔링이 대세입니다. 스토리텔링 마케팅, 스토리텔링 프레젠테이션, 스토리텔링 수학 등 삶의 전 분야에서 스토리텔링의 요청이 강합니다. 도대체 수학을 어떻게 스토리텔링으로 가르치고 받아들이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또한 TV에서 문화재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면 예전에는 내레이션 식으로 정보와 사실을 연결하여 말했습니다. 그런데 스토리텔링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은 그 안에 기승전결이 있습니다. 지역을 소개할 때에도 단순히 지리학적 정보를 연결시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기승전결을 만들어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전합니다. 이렇게 할 때의 좋은 점은 이야기가 재미있고 생생해져서 결론적으로 설득력 있게 되는데, 이렇게 설득력을 가진 스토리텔링의 본질적 특성에는 독특한 이벤트성이 있습니다. 그 이벤트성이 무엇인가 하면 스토리텔링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스토리가 있어야 하고, 둘째는 스토리를 말하는 화자가 있어야 하고, 셋째로 듣는 청자가 있어야 합니다. 스토리텔링이 이벤트가 되는 것은 스토리를 화자가 이야기하면 그 스토리는 하나의 세계를 전하는 것이 되고, 청자는 자기의 세계를 떠나서 그 세계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놀라운 변화입니다. 내레이션 식으로 사실과 정보를 그대로 전달하게 되면, 청자는 자기의 입장과 처지와 세계관을 유지한 채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러나 기승전결로 이야기를 만들어서 전하게 되면 그것이 하나의 세계가 되기 때문에 듣는 사람이 이쪽 세계 안으로 들어와서 내용을 접하게 되기 때문에 훨씬 더 생동감을 가지게 되는데, 특히 연설이나 강연을 하는 사람들에게 요청되는 것이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스토리텔링의 주된 내용을 구분하면 첫째로 자신의 이야기가 스토리가 될 수 있고, 두 번째로 남의 이야기가 스토리가 될 수 있고, 세 번째로 책이나 언론이나 다른 매체를 통해서 접한 이야기를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자신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이 전달과 설득의 효과를 가장 극대화시킬 수 있는데, 연설하는 사람은 자신을 노출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스토리 속에 포함된 자신을 노출시키게 되면서 청자들의 마음이 그 세계 안으로 들어오게 되고 연설하는 화자와 관계를 맺게 됩니다. 관계의 통로가 생기면 그 다음부터 하는 이야기들은 굉장한 설득력과 친근감과 신뢰감을 가지고 받아들이게 되므로 자기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수가 성 여인의 이야기가 제목과 관련해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특히 본문의 감동적인 전도 장면에 입각해서 전도의 정의를 내려 봅니다. ‘전도’는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난 나를 전하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예수님을 만난 나를 전함으로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여자가 나와 만나서 나의 아내가 되면 내 아버지는 그녀에게 시아버지가 되고, 내 어머니는 그녀에게 시어머니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예수님만을 전하고 하나님만을 전하는 것은 나를 남편으로 허락하지 않은 여자에게 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시아버지 시어머니로 여기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만나서 전도해야 할 모든 사람들은 지금 현재 예수님이 아닌 나와 관계를 맺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 앞에서 예수님과 하늘에 계신 하나님아버지와의 관계가 분명해야만 합니다. 지금도 그 사람 앞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예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가지지 못하면서 전도하는 것은, 여자에게 나는 남편이 아닌데 나의 부모를 시부모로 여기라는 것과 같습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나와 1년을 만나고 2년을 만나고 10년을 만났는데도 왜 그 사람들은 아직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나지 못하고 시부모로 만나지 못하는 것일까요? 내가 그 사람 앞에서 하늘의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있는 관계로 유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말은 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사는 나의 삶을 성경으로 쓰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성경이 되어야 그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삶으로 성경 쓰기’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사랑과 그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이 내게 진짜 만족과 기쁨과 행복의 유일한 근거가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건강, 권력, 물질, 명예등과 같은 세상 가치 대신에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하나님을 추구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찾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찾는 것’은 내 마음이 붙잡고 있든지 이미 붙은 이름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 안에 이름이 없는데 그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를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생활화로 다른 이름과 결합한 내 마음을 끊임없이 죽은 것으로 여겨서, 하나님의 이름을 제일 먼저 마음이 붙잡아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이유는 하나님 사랑을 실행하기 위해서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의 유일한 만족과 기쁨과 행복의 근원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하나님을 생각하고 찾는 삶은 기도원이나 수도원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인 자식 앞에서 부모 앞에서 형제자매 앞에서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학교에서 추구하게 됩니다. 그렇게 땅에 사는 동안에 매일 하나님을 추구하면 성경을 쓰는 삶이 되고 그 현장마다 스토리가 생겨납니다. 땅에서 주어진 이런저런 관계에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스토리가 고스란히 성경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삶으로 성경쓰기의 완성은 스토리텔링으로 온전하게 됩니다.
‘스토리텔링’은 스토리와 화자와 청자가 있어야 가능한데, 청자는 화자가 전하는 스토리 안으로 참여하는 이벤트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으로 쓰는 성경도 스토리텔링을 통해 성경으로서의 의미가 완성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스토리텔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이 굳이 성경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정경으로서의 성경의 존재 의미도 다름 아닌 그 스토리가 읽히고 선포됨에 있는 것입니다. 그 성경 속 스토리에 우리가 참여하여야 정경으로서의 성경도 의미가 있고, 이것도 스토리텔링의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삶으로 쓰는 성경은 두 가지 방식으로 스토리텔링의 과정을 거치며 완성이 됩니다.
첫 번째는 현장 스토리텔링입니다. 내가 십자가 생활화로 하나님의 사랑을 추구하는 삶 자체가 현장에서 나와 관계를 맺는 사람들에게 스토리가 됩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 있으면 그 현장에서 함께 있는 사람들과 전혀 다른 가치를 추구하므로, 차별화를 통해서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이야깃거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승진을 추구하고 월급을 추구하고 사장님께 잘 보이려고 하는데, 나는 현장에서 승진이나 월급이나 사장님과의 관계 등은 나를 사랑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 다 맡기고, 회사 안에서 하늘의 하나님만을 기쁨과 만족의 유일한 이유로 추구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내가 이야깃거리가 될 수밖에 없고, 내 삶이 스토리가 될 때에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텔링이 되는 것입니다. 나와 삶의 현장에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사랑을 십자가 생활화로 이루려고 하는 나의 삶 자체가 하나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독특한 스토리가 되면서 그 안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풍랑 속에서 깊은 잠을 주무실 때에는 마음이 하나님께 가 있으신 상태이므로, 육체가 풍랑을 만났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은 하나님아버지 품에 안기셔서 깊은 잠을 주무십니다. 이 현장에 제자들이 함께 참여합니다. 당장은 풍랑이 무서워서 잠드신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중에 베드로가 헤롯 대왕에 의해서 참수형을 당할 것이 정해졌을 때에, 전날 밤에 잠을 자는데 감옥 안에 빛이 환하고 천사가 와서 발로 옆구리를 차는데도 잠이 덜 깨어서, 문 밖에 나온 다음에야 잠이 깰 정도로 깊은 잠을 잤는데, 내일 목이 달아나게 생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입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삶으로 말씀하신 스토리 안에 참여했다가 그 세계를 자기의 세계로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하실 때에 하늘이 열렸는데 돌에 맞고 있는 육체나 원수 같은 사람들에게 마음이 붙잡힌 것이 아니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성경을 삶으로 써가는 현장에 스데반 집사님의 죽음을 마땅히 여긴 살기등등한 청년이었던 미래의 바울이 있었습니다. 그 현장에 참여했다가 결국 다메섹에서 고꾸라지면서 스데반 집사님의 삶으로 이야기되었던 세계를 자기의 세계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현장에서 나의 삶 자체가 직접 스토리텔링이 되어서 삶으로 성경쓰기가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현장 외 스토리텔링입니다. 십자가로 하나님 사랑을 추구한 나의 삶을 다른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이것은 스토리텔링인데 오늘 본문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수가 성 여인에게 어떻게 이러한 파격적인 전도의 효과가 나타날 수 있었을까요? 선교학을 배운 것도 아니고 말을 유창하게 했던 것도 아닙니다.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을 전한 것도 아닙니다. 29절에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라고 하는데 문자적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 같지만 상황적으로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다섯 번의 남편과 제대로 살지 못하고 여섯 번째로 다른 여자의 남편과 살고 있었습니다. 이 수치스러운 과거와 현재의 삶의 형태 때문에 동네 사람들과는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나는 수치스러워서 못 다가가고 사람들은 나를 경멸하면서 따돌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확인한 뒤에는 물동이를 버리고 뛰어가서, 그 담을 스스로 허물고 그리스도를 전한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을 전했습니다. 이전과의 차이점은 이전의 자신은 수치스러움에 묻혀있었지만, 지금은 자신을 예수를 그리스도로 확인한 자로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멸하는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이 여자를 보면서 왜 저렇게 행복해하고 물동이까지 버려가며 기뻐 날뛰며 우리에게 와서 수치스러운 이야기를 꺼내며 누구를 전하느냐고 관심을 갖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2000년 전에 그 당시에 여자에게 있어서 기쁨과 만족과 행복의 유일한 근원은 남편이었는데 ‘다섯 번의 남편을 거쳐 여섯 번째 남자와 산다.’는 바가 뜻하는 것은 유일하게 여자에게 허락된 기쁨과 만족과 행복의 근원으로 믿어졌던 것에서 ‘남편이 절대로 참 기쁨과 만족과 행복의 근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삶을 통해 검증적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기쁨과 만족을 완전히 포기하고 죽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포기 했다’는 것은 ‘기쁨과 만족과 행복과 관계해서 이 세상에서 죽었다’는 것인데 ‘심리학적으로 죽었다’는 것이고 이 상태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이 구주가 되신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기쁨과 행복의 통로가 되어 주시고 행복의 통로가 돼 주십니다. 이때 유일한 기쁨과 행복과 만족으로 통하는 예수님을 만난 자기 자신을 전한 것이고 수가 성이 뒤집히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유일한 기쁨과 만족과 행복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내 이야기를 통해서 안 듣던 사람들은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상승(시너지)효과가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바울이 아테네에서 철학적으로 전하려다 선교에 실패하고 이제 십자가만 전하려고 합니다. 심하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안식일이 되면 회당에 가서 말씀을 전하고 평소에는 천막을 기우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 마케도니아 지방의 교회들을 탐방한 실라와 디모데가 도착합니다. 마케도니아 지방은 특별히 궁핍한 동네였는데 고린도 교회 같은 부자 교회에서 하지 않는 바울에게 선교 헌금을 후원하고 굳건히 믿음을 지켜가는 모습을 전해 듣게 됩니다. 실라와 디모데로부터 마케도니아의 기독교인들이 삶으로 성경을 쓰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행18:5절에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라고 하십니다. 두려워하며 떨던 바울이 그 스토리 안으로 들어가서 ‘말씀에 사로잡혔다’고 하는데 이것이 스토리텔링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성공적인 스토리텔링을 할 수가 없다. 십자가 생활화도 제대로 못하고, 하나님으로 만족한 경험도 별로 없다.’라고 할 수 있는데 스토리텔링이 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은 돈에 붙잡혀 가지만 이상하게도 하나님이 유일한 기쁨과 만족과 행복의 근원이 되신다는 믿음이 나를 떠나지 않습니다. 나는 여전히 돈이 없으면 걱정하기도 하고 돈이 벌리면 기뻐하기도 하지만, 머릿속에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기쁨과 행복과 만족의 근원이시라는 생각이 멈추질 않는데 이 믿음이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잘 하지는 못하더라도 십자가 생활화에 대한 절대적 필요성에 대한 믿음을 성령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마음이 풍족해지고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이 없어서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명적 삶을 살 수 있는 상태는 성공적 삶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생활화를 못해서 죽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돈에 끌려 다니고 하나님으로 만족하지도 못하고 기쁘지도 못했는데,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이 마음의 기쁨과 만족과 행복의 근원이심을 믿는 절대적 믿음과, 그 하나님께 가려면 십자가 생활화가 필요하다는 믿음이 살아 역사하여, 그러한 삶에 대해서 반성하게 되고 이 성공하지 못한 삶을 성령님이 허락하신 두 관점으로 바라보아서 이야기로 만들 때에 성경이 됩니다.
정경으로 허락된 성경 속에도 영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성령의 역사로 기록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적으로 실패해서 십자가 생활화를 하지 못했을 지라도,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믿음은 성령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실패한 이야기도 얼마든지 그대로 삶으로 쓰는 성경이 될 수 있습니다. 나의 실패를 실패로 바라보게 하는 두 관점이 살아 있으면 나의 삶도 점차적으로 영적인 승리의 삶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 생활화와 유일한 기쁨과 만족의 근거인 하나님 추구를 해서 내 삶 자체가 성경이 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했어도 그 삶에 대해 끊임없이 후회하고 미워하면서, 하나님이 유일한 가치이고 그 하나님을 추구하기 위한 십자가 생활화가 유일한 길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성령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실패한 나의 삶을 바라보고 스토리가 되면 그 스토리 속에서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역사가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선배들의 많은 실패를 통해서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풍성히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복음을 전하고 듣고 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고 하나님을 추구해도 전부 각자가 벽으로 막혀있습니다. 카페가 있고 홈페이지가 있지만 자기의 삶의 성경쓰기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서로 교통이 없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영적으로 막대한 손해인지 모릅니다. 어떻게 하면 각자의 성공한 스토리든지 실패한 스토리든지 그 스토리들이 다른 나라 다른 지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상승효과가 전해지고, 또한 다른 나라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한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져서 서로 호환되고 상승될 수 있을까요? 요새 페이스 북이나 카카오 톡 같은 것들이 많은데 우리는 어떤 형식이나 루트를 통해서 서로가 서로를 통해서 자기의 노출을 두려워하지 않고 소통할 수 있을까요?
일단 하나님을 유일한 가치로 믿고 십자가로 하나님께 도달하기 위한 유일한 길로 확신하면서 삶을 사는 사람이 자기를 노출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실패한 이야기라도 두 관점으로 이해하고 해석한 삶이 이야기가 될 때에,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의 길을 찾아가게 하고, 이미 들은 사람에게는 더 강력하게 하나님을 추구하게 하는 동력을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를 노출시키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도 철저하게 이 두 관점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는 것이고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 믿음을 확인하고 강화시키기 위해서라도 우리를 노출시킬 수 있어야 하고, 삶으로 쓰여 진 성경 이야기를 다른 형제자매들이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그들의 삶으로 쓰여 진 성경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십자가 복음 방송의 시스템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면 그런 호환의 가능성이 열릴지에 대해서 여러분께서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온라인상의 활동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잘 아시는 분이 있다면 도움을 주시고 길을 열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의 삶이 나와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현장에서 전해지는 스토리가 되게 하시고, 현장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스토리텔링이 되게 하셔서, 저에게도 그들에게도 좀 더 강력하게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이 허락되어 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 생활화가 철저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기회가 서로에게 제공되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지혜가 그러한 길을 열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원하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