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곤이 여섯 개밖에 안 달린 작은 열차가 옥천역에 도착하니 옥천역 자그마한 건물에 “명시 ‘향수’의 고향입니다.”라는 그리 크지 않은 글발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내려 보자, 비록 처음 오는 곳은 아니지만 이곳이 내가 그토록 그리던 옥천 땅, 대시인 정지용님의 고향이 아닌가!’
나는 청주에서 일하는 동생을 만나러 함안에서 “시조경창대회”행사가 끝나는 길로 상행차를 잡아탔지만 결국 동생이 있는 청주에 먼저 옥천 땅에서 내렸다.
깨끗한 휴게소를 빠져나오니 역광장 남쪽으로 치우친 조용한 “정지용시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자를 보니 2003년에 세워진 시비여서 그런지 그리 물이 낡지 않았고 깨끗하고 우아한 멋이 다분히 풍겼다.
옥천읍 쪽으로 향한 남쪽면엔 동시 “할아버지”가 반듯하게 새겨져 있었고 역전을 마주한 면엔 명시 “고향”이 새겨져 있었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고향”을 읽으면서 나는 어쩐지 쓸쓸한 분위기에 차분히 말려들었다.
그렇다, 고향이라고 찾아왔어도 그 색동 꿈 곱던 오색찬연한 고향일 수가 없고 스산하고 망가진 동네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하지만 그래도 태를 묻고 이역만리 넘나들다 그리워 달려오던 고향임은 숨길 수 없고 자나 깨나 베개머리에선 고향기슭을 누볐음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리라.
생가로 가는 길에 촉촉이 싸락비가 내리고 있었다. 온몸으로 옥천의 비를 맞으면서 마음까지 촉촉해졌다.
생가는 3년 전 보던 모습 그대로인데 삽작문이 반쯤 열려있고 위 방문이 활짝 열려있어 마치도 지용님께서 나더러 어서 오라고 부르시는 것 같았다.
생가로부터 “정지용문학관”으로 가는 소로길은 온통 짚 부스러기에 묻혀있었다. 게다가 비까지 촉촉이 내리다 보니 나의 신발엔 짚 부스레기들이 가득 개발렸다. 문학관 정문 앞에서 나는 신에 개발린 짚을 다 떨어버리고 정중히 문을 열고 문학관에 들어섰다. 나젊은 남성접대원 두 명이 달려와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신발을 벗고 끌신을 갈아 신은 다음 먼저 정지용님 동상 앞에 가 꾸벅 90도 경례를 드리고 다시 접대원 실에 들어섰다.
나는 중국에서 올 때부터 혹시나 해 준비해온 “중국조선족소년보”를 꺼내 접대원한테 정중히 드렸다. 그날 우리 신문에 “정지용문학관”을 상세하게 소개한 나의 글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접대원은 아주 고맙게 우리 신문을 넘겨받아서는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그리곤 향기롭고 따뜻한 녹차를 가져왔다. 조금 후 다른 접대원이 증정본으로 갓 만들었다는 “정지용시선집”을 선물했다.
받아보니 정지용님의 동시들도 거기에 실려 있어 나는 더 기뻤다.
여러 해 문학편집을 해오면서도 나는 정지용님의 동시들을 우리 신문에 소개하지 못하여 늘 민망한 마음을 안고 있던 차였다.
문학관을 자세히 돌아보면서 나는 다시 한 번 지용님의 시세계에 포근히 잠겨버렸다. 문학관 내에는 나 외에 또 지식인인 듯한 늙은 부부가 이쪽저쪽 거닐면서 사진자료들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시낭송실에 들어가서 이어폰을 귀에 걸고 목청 돋우어 “향수”랑 읊으면서 오랜만에 시 예술의 향연에 포-옥 젖어 온몸을 시흥으로 가뿐히 샤워하였다……
내가 알고 있는 원옥천군문화원장 박효근님을 찾아 떠난 것은 그날 오후였다.
골프연습장을 꾸리고 있는 박 원장 댁에까지 찾아가니 원장님께서 외출하고 안 계셔 나는 중국서 갖고 갔던 술 한 병과 조선명태를 인사로 내놓고 다시 나왔다.
자유시장으로 가니 무, 홍시, 배추 등이 우리 연변과 별반 차이 없이 팔리고 있었다. 상냥한 얼굴을 한 아줌마들이 곰살궂게 굴었다. 나는 팥죽집에 들어가 2천 원을 내고 팥죽 한 그릇 사먹었는데 그렇게 향기로울 수가 없었다.
저녁엔 또 옥천역 앞에 있는 보리밥집에 들어가 보리밥에 된장국을 맛나게 먹었다. 진짜 조종의 음식맛(순맛) 그대로여서 뼛속으로 우리 맛을 느껴봤다.
청주에 있는 “동양일보”에 전화를 넣으니 조철호 회장님(시인)께서 함께 진천군에 있는 조명희시비를 보러 가자고 했다. 나는 문학을 즐기는 나의 동생도 데리고 가겠다고 하니 너무 좋다고 하셨다. 편집 실장 유영선님(수필가)이랑 함께 간댔다. 보고 싶었던 얼굴들이다.
나는 지용님의 고향을 떠나는 마음이 퍽 서운했지만 또 포석님의 생가에 안길 걸 생각하니 마음이 또다시 설레기 시작했다……
림금산:
현 중국조선족소년보사 편집기자부 주임.
중국작가협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이사.
정지용 문학상, 한국동포문학 안민상(금상), 연변작가협회 인터넷문학상(대상), 흑룡강 신문 수필상, 연변일보 해란강 문학상, 한국 월간아동문학상, 윤정석아동문학상, 청년생활 수필 대상, 중국청년월간지 소수민족부문 수필상 등 수십 차 수상.
시집 『불새』(수상시집), 동시집 『살구꽃 복사꽃』(수상시집)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