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람과 이스마엘(창세기 16:1-16)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손과 땅에 대해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땅에 대한 약속은 기간을 정하여 주셨는데, 후손에 대한 약속은 기한이 없습니다. 이것은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실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기다릴 줄 모르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사건이 이스마엘 사건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기다릴 줄 모르는 자들입니까? 그러므로 믿음이란 기다림의 다른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것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사백년이 지나고, 천년이 지나도 반드시 이루어 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전능하신 분이심을 알지만 막상 기다림의 문제에 부닥치면 우리도 별수 없이 아브람과 사래처럼 약속을 끝까지 믿고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스마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말씀의 본의가 무엇인지 배우고, 우리의 교훈으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우리가 이미 배운 대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언약 체결식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계획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15:13-2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친히 자손 언약과 땅 언약을 체결해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위대한 사실을 땅 위에 증거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수행해 나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16장 말씀은 아브람이 이 언약을 믿고 그 언약을 믿음으로 수행해 나가지 않고 인간적인 방법을 쓰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곧 아브람이 사래의 제안을 받아들여 여종 하갈을 취하여 아들 이스마엘을 낳는 사건입니다. 이 일은 16:3절에 보면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에 들어가서 거한지 십년 후의 일이었습니다. 이 때 아브람의 나이는 85세 였고, 사래의 나이는 75세였습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에 거한지 십년이 넘도록 자식이 없자 아브람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였습니다. 16:2절에 보면 그것은 자신의 여종 중에서 애굽 사람 하갈이라는 종을 아브람에게 첩으로 주어 그로 자식을 얻고자 한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체결해 주셨지만 현실은 여전히 하나님의 일반적인 법칙에 의해서는 그에게 자식이 없었습니다. 아브람은 한 때 하나님의 크신 뜻을 이루어 나가려면 양자를 얻어서라도 그 일을 이루어가고자 한 적이 있습니다. 15: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상 중에 나타나셨을 때 “주 여호와여!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께서는 15:4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때 아브람은 ‘내 몸에서 날 자가 후사가 되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이 큰 사명을 이루어 나가시는 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이 사래의 제안을 수용했습니다. 아브람과 사래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몸에서 날자가 후사라고 하셨기 때문에 꼭 사래의 몸에서 나지 않아도 될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래는 자신의 여종에게서 자식을 얻으면 그를 후사로 잇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에 보면 정실이 후사가 없을 때 첩을 두거나 씨받이를 통해 후사를 이었습니다. 아브람 당시에도 일부다처의 문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래의 이런 제안은 그 당시의 문화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아브람도 그럴 수 있다고 단순하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특히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몸에서 날 자가 후사가 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자식을 낳아 후사를 이어야 할 신성한 사명이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경영하시고 지금 자신에게 보여주신 큰 일에 대해서 수수방관하고 있을 수 없지 않느냐?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무엇인가 해야 하지 않는가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래가 먼저 제안하고 나오니 이것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날도 그렇게 생각하는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 발생하면 혹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닐까 덮어놓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아주 무서운 발상이요, 위험한 태도입니다. 죄를 짓기 쉬운 태도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자의적으로 짐작하는 일입니다. 부패한 인간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결코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스스로 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자기의 입장에서 종교적 사고를 하며 기도하며 행동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신앙이라,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리화하고 자긍합니다.
아브람과 사래 역시 독자 이삭을 얻는 과정에서 그런 오류에 빠진 것입니다. 아브람은 당시 제도 가운데서 생각할 수 있는 일반적인 상태에 머물지 않고 그 이상으로 진전했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의 경영이시니까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일을 재가하시는지 아니하시는지 여쭈어보는 태도를 취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했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신령하게 사는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요, 절대적으로 해야 할 마땅한 태도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는 의와 자기가 그렇게 판단하게 한 동기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시려고 하시는 풍성한 계시의 내용에 반드시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아브람이 사래의 제안이 왔을 때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이시려고 하시는 계시의 내용에 부합한지 아니한지를 비추어 보아서 자신의 결정이 하나님의 뜻에 부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서 자기의 생각과 관념대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한 것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하였습니다. 이것이 아브람의 문제였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섬기고자 할 때 자기 양심에만 의지한다면 그것은 캄캄한데 머무는 것입니다. 사람이 양심에 의지하여 어둠속에서 약간의 의를 행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위치나 그런 차원으로 올라가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양심이란 그의 의에 대한 인식의 정도 안에서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자기가 당연히 했어야 할 것을 안했더라도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경우에는 하등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자기 양심에 기초한 의는 정당한 척도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안내자는 되어도 최종의 심판의 척도는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은 마땅히 하나님께 그 뜻을 물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 사래가 이렇게 이렇게 말하는데 이 일이 사람의 생각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는데, 나의 생각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인지요?’하고 물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묻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람이 이 일을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일입니다. 아브람은 자기 나름대로의 인본적인 신앙심과 충성심으로 하나님께 과잉 충성을 한 것입니다. 자기의 뜻이 하나님의 뜻 인양 착각하고 행한 것입니다. 이것은 불신앙이요, 과잉 충성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기보다 주변 환경과 자신의 형편을 바라보고 사래의 제안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인 냥 행한 것입니다.
4-6절에 보면 결국 아브람 가정은 이 문제로 가정 분란이 일어났습니다. 하갈이 잉태하자 교만하여 사래를 무시했습니다. 이로 인해 사래는 아브람에게 바가지를 긁었습니다. 아브람이 사래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자 사래는 하갈을 구박하여 내쫓아 버렸습니다. 7-1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친히 감당해 주셨지만 아브람은 이 문제로 많은 고통을 당했을 것입니다. 결국 아브람은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12절에 보면 이스마엘에 대해서 예고해 주셨습니다.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 것이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 하나님의 이 예고하신 대로 이스마엘의 문제는 그 후 역사가 펼쳐지는 대로 하나의 중요한 역사적인 문제로 계속 남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중동 분쟁의 빌미가 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는 그 시대의 도덕적 관점과 문화적 관점에서 볼 때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악일 경우가 많습니다. 아브람과 사래가 행한 그 일들은 도덕적으로, 관습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계시를 이루기 위한 선한 의도에서 나온 행위였습니다. 특히 사래의 입장에서는 많은 희생을 감수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죄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무리 선한 의도에서 이루어진 일이고, 자기희생을 감수하며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행한 일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참뜻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곧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아브람의 신앙생활을 보면 그는 하나님의 계시에 접촉하면서 움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이 일 하나에 있어서는 계시의 접촉이 빈곤했습니다. 아마 아브람은 자기가 자식을 낳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경륜을 펴나가는 일에 있어서 마땅히 해야 할 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그 뜻을 묻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행한 것 같습니다. 이것이 아브람의 착각이요, 실수였습니다. 아브람이 행한 행동을 동양사상대로 말한다면 ‘진인사 대천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할 바를 해 놓고 천명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상은 성경이 말하는 사상이 아닙니다. 사람의 할 일이라는 것도 결국 내가 인식하는 범위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옳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일 것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정말 하나님께서 그것을 재가 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곧 그것이 진짜 하나님의 참 뜻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 때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분에게 여쭈어 보고 그분의 계시에 의해서 하려고 하는 자세가 바른 신앙의 자세인 것입니다.
물론 자기가 그르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옳은 일이고 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여러 가지 형세를 보아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이 된다고 해도 그냥 밀고나가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하나님께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마엘 문제가 바로 아브람이 자기 뜻에 옳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묻지 않고 밀고 나간 결과로 생긴 것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큰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브람의 이스마엘 사건에서 깊이 생각해야 할 많은 문제 중에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수행해 나갈 때 그것이 진정 하나님의 참 뜻인지, 아니면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인지 늘 고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안 될 때 우리도 아브람과 똑같이 이스마엘 문제를 양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창세기 16장의 이스마엘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뜻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언약을 사람들이 망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통하여 사람이 하는 일을 대비하여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에서와 야곱을 대비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와 비약속의 자녀가 어떻게 나오는 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을 이루어나가실 때 사람의 기술과 방법과 끈기와 노력과 인내와 낮아짐이나 그 무엇이든지 간에 다 거절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손길로만 이루어내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집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하였습니다. 범죄 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세계를 망쳐놓았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부패하여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인간이 아무리 선하게, 아름답게, 욕심 부리지 않고 이루어 놓은 찬란한 문화라고 하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진노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향하여 불태워 버리고자 준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세상을 사람들이 힘을 합하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고집합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와서 ‘아니다, 내 나라는 다른 곳에 있다’고 하시자 그 아들을 죽여 버린 것이 바로 이 땅의 죄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 서지 않은 자는 자신이 죄인임을 결코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죽은지를 모르는 것이 아직도 죄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마엘과 이삭을 신약에서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이스마엘은 인위적인 작품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브람이 할례를 받고 나서 주시는 자녀입니다. 인간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만이 약속 안에 들어가게 됨을 보여 주시는 사건입니다. 갈라디아서 4:21-31절을 보면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고 했습니다.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 계집종에게서 난 자, 육체를 따라 난 자, 이것이 이스마엘이며, 사람의 행위로 구원에 이르고자하는 사람들의 대표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 홀로 이루어 내시는 것인데도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려고 하였다가 나온 것이 이스마엘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모르면 자꾸만 이스마엘을 양산시켜 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지 않고 인간적인 방법, 세상의 방법을 따라 일하는 것은 다 이스마멜을 양산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반드시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이스마엘을 양산해 낸다하여도 결국은 다 내어 쫒기는 신세입니다. 그러나 약속의 자녀는 자유자의 자녀이며, 위에서부터 났으며, 땅의 예루살렘이 아니라 위의 예루살렘이기에 출처가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속받은 자들이 바로 약속의 자녀입니다. 사람의 적당한 종교적인 기술과 인위적인 행함이 아니라 오직 위로부터 난 자만이 그래서 다른 것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자기를 새롭게 창조하신 주님만 바라보는 자가 약속의 자녀입니다. 오늘날도 육체의 모양을 내려고 하는 자들이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하듯이 그러므로 성경은 이스마엘을 내어 쫒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교회 안에서 누구를 쫓아내어야 합니까? 이스마엘을 쫓아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열심보다 사람의 열심을 보이고자 하는 자,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기 보다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세상적인 비전을 심고 있는 자, 하나님의 일이 자기들이 아니면 이루어 내지 못하는 것처럼 말하는 자들이 바로 이스마엘 같은 자들입니다. 이들이 세상에서 큰 업적을 드러내고 많은 세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큰 교회를 이룰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의 약속에는 참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내어 쫒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스마엘을 보면서 사람의 계획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내지 못하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사람의 일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내지 못함을 보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홀로 자기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 내셔서 자기 백성을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스마엘의 길이 아니라 이삭처럼 약속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늘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약속의 실체가 바로 새 언약으로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언약을 자신의 주권과 뜻 가운데 이루어 가심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늘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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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마엘 (창16:1-16)
아브람이 85세가 되었을 때, 곧 그가 가나안 땅에서 살기 시작한지 10년이 되었을 때였다. 10년이 지나도록 아브람에겐 아들이 없었다. 이것은 물론 아브람에게도 고통스럽고, 걱정되는 상황이었지만, 사래에겐 더욱 더 고통스러운 상황이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아브람의 몸에서 날 자가 아브람의 모든 것을 상속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또 맹세까지 하셨다. 하지만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자식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 누가 가장 괴롭겠는가? 사래다. 여자로서, 한 집안의 안주인으로서, 자녀를 낳아 그 대를 잇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없었다. 괴로워하던 사래가 드디어 결심을 한다. 자기 나이 75세, 아브람은 85세, 아브람이 더 늙기 전에 해결을 ...해야 했다. 그래서 애굽 여종 하갈을 아브람에게 준다. 이 한 결정과 이 한 행동으로 인해 16장의 모든 문제와 갈등이 발생한다.
창 16장의 핵심과 관심은 아브람의 신앙의 타락이나, 실패에 있지 않다. 그 보다, 사래와 하갈 사이에 벌어진 일과, 그로 인해 발생한 일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바라보시며, 어떻게 그 사이의 문제와 갈등을 해결하시는가에 놓여 있다. 구원사의 큰 물줄기가 흘러가고 있는 창세기의 아브람의 이야기에서, 16장은 놀랍게도 여인들의 마음의 갈등과 고통과 상처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바라보시며, 어떻게 봉합하는지를 보여준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아브람? 사래? 하갈? 1-3절까지, 등장인물은 아브람과 사래다. 3-6절까지 등장인물은 아브람과 사래와 하갈이다. 하지만, 1-6절의 주요 인물, 모든 사건을 이끌고 있는 인물은 사래다. 그리고 7-16절까지의 중심 인물은 하갈이다. 사래와 하갈, 이 두 여인의 이야기가 하나님께서 온 인류의 구원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대답을 보여주고 있다.
약속을 받은 지 10년,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로서 사래의 고통은 날이 갈수록 해가 갈수록 깊어져 갔다. 그래서 자기 여종을 들이고자 한다. 그것을 통해서 그녀가 꿈꾼 것은 무엇인가?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내가 세워질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창 16:2)
히브리어 성경은 “내가 그녀로 말미암아 세워질 것이다“이다. 즉 사래는 하갈을 아브람에게 주는 것을 통해, 혹 그녀가 자녀를 얻게 된다면, 그로 인해 자기가 세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자기 수치가 없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소망이 있었기에, 사래는 참으로 쉽지 않은 결심을 하게 되었고, 그것을 어렵사리 행동에 옮기고 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십 년 후이었더라』(창 16:3)
히브리어 성경은 이것을 우리 성경과 는 다른 울림을 갖게 쓰고 있다. “그리고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애굽 여인, 그녀의 여종 하갈을 취했다. 십년이 지났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그녀가 그녀를 그녀의 남편 아브람에게, 그에게, 아내로 주었다.“
성경은 가나안에 거한지 10년 후 아브람이 결국 믿음을 못 지키고 하갈을 취했다는 투로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 성경은 십년이 지나도록 자녀가 없었던 사래가, 아브람의 아내가, 자기 여종을 아브람에 내어 주면서 겪고 있는 고통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아브람의 아내가 여종을 취해, 그녀를, 그녀가, 그녀의 남편, 아브람에게, 그에게, 아내로 주었다.
우리 성경엔 ‘첩‘으로 주었다고 번역했지만, 그냥 ‘아내‘다. 아브람의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아브람에게, 그에게, 그녀를 ‘아내‘로 주었다는 것이다. 여자들은 알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그런데 사래는 이 고통을 스스로 선택하고 있다. 사래는 그보다 더 큰 고통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기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고통이다. 더 이상 이 고통을 견딜 수가 없다. 그러니, 차라리, 내 여종을 취해 자녀를 낳아라!
자기 아내의 번민과 고통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아브람은 그 말에 순종한다. 그리고 하갈이 임신한다. 그러자 문제가 발생한다.
사래가 바랬던 것은 무엇인가? 하갈이 임신을 하는 것이다. 여종이 낳은 자식은 곧 그 주인의 자식이다. 야곱에게 레아와 라헬이 있었고, 그녀들에게 실바와 빌하라는 여종이 있어 자식을 낳았다. 그 자식들은 곧 레아와 라헬의 자식들인 것이다. 그런데 사래가 그토록 바랬던 일이 일어났는데, 그런데 문제가 생긴 것이다.
막상 하갈이 아이를 갖자, 사래가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하여, 사래의 불행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이라는 운명이 더 분명하게 부각된 것이다.
하갈이 임신하기까지는 아무도 이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하갈이 정말로 임신을 하자, 상대적으로 10년동안이나 아이를 가지지 못했던 사래가 불임의 여성이라는 것이 더욱 더 분명하게 확인이 된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비참한 깨달음이다.
물론 사래는 그런 자기 상황을 받아 들이고, 마음을 추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불임의 여성이다. 하나님이 내가 자녀를 갖는 것을 막으셨다. 하지만, 하갈을 통해 낳은 자는 내 자식이고, 나는 그의 어머니다. 그는 아브람의 씨가 아니냐?. 그래 내가 하갈을 아브람에게 주어 아이를 가진 것이다. 내가 아브람의 씨를 잇게 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여인으로서 참으로 깊은 허전함과 막연한 불안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겨우 마음을 추스르는데 하갈이 자기 마음을 긁는 것이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창 16:4)
우리 성경엔 멸시한다고 했는데, 이는 좀 강한 표현으로 보인다. 멸시까지는 아니고, 무시 정도가 맞다. 임신하자 하갈의 눈에 사래가, 그녀의 여주인이 하찮게 보였다.
그런데 이런 하갈의 눈을, 생각을 못 읽을 사래가 아니었다. 그리고는 분노하고, 그리고는 괴로워한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창 16:5)
내가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다. 내가 당하는 이 폭력적인 일은 당신 책임이다. 내 여종이 나를 멸시한다. 그런데 히브리 성경은 이를 아주 예리하게 표현한다. “그녀가 나를 멸시한다. 하찮게 여긴다“라고 쓰지 않고, “내가 그녀의 눈에 하찮은 존재로 보여졌다. 내가 그녀의 눈에 무시할 만한 존재가 되었다.“라고 쓰고 있다. “그녀가 나를 무시한다“가 아니라, “내가 하갈의 눈에 별볼일 없는 여자로 여겨질 것이다“라는 것이다.
실지로 하갈이 대놓고 무시했으리라 생각되진 않는다. 그런데 사래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이다. 저년이 나를 무시하는 구나! 저년이 나를 애도 못 낳는 여자라고 생각하고 나를 같잖게 여기는 구나!
누가 생각한다고? 하갈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래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하갈도 그렇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결국 자식도 못 낳는 여자였구먼“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그것이 나타난다. 더구나 예민할 대로 예민해져 있는 사래가 이것을 알아채지 못했겠는가? 설사 하갈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사래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저년 눈에 하찮게 보이겠지“
사래의 이 하소연에 대해, 사래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하갈에게 들어갔던 아브람은, 이번에도 사래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는 말한다. “당신 여종이니, 당신 눈에 좋은 대로 하시오“
사래가 기대했던 아브람의 대답은 그것이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아브람도 아내에 대해 최대한 그 마음을 나름 헤아리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래의 고통을 안다. 그녀가 하갈을 주었고, 하갈이 임신했다. 자기가 하갈을 편들거나, 그 자녀를 생각해서 참으시오. 라고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당신 원하는 대로 하시오! 라고 말하고 있었을 것이다.
남편에게 위로 받지 못한 사래는 하갈을 학대한다.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창 16:6)
사래가 하갈을 학대한다. 근데 여기서도 학대는 좀 강한 표현이다. ‘아나‘라는 히브리 단어인데 억압하다, 괴롭게 하다, 혹독하게 하다, 낮추다 라는 뜻이다.
일을 더 심하게 부려먹었다기 보다는 ‘너는 종에 불과하다‘라는 것을 각인시키는 것이다. 그러자, 하갈이 도망한다. 왜 도망했겠는가? 사래가 자기를 너무 심하게 부려먹어서, 힘들어서 견딜 수가 없었는가? 아닐 것이다. 그런 것 때문이 아닐 것이다.
자기에게 어떤 권리가 없다고 생각할 때, 불만은 발생하지 않는다. 자기에게 어떤 권리가 있다고 생각할 때, 불만이 발생한다.
종으로 있을 때에는 사래가 시키는 일들을 하는 것이 불만을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비록 여전히 종이지만, 지금 자기는 임신 중이고, 더구나 아브람의 씨를 배고 있다. 자기가 존중 받을 만한 상황에 있다. 그런 권리가 있다. 마땅히 존중 받아야 한다. 그런데 사래는 와서 “너는 종이고, 나는 주인이다“를 끊임없이 확인시키며, 이런 저런 일들을 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불만을 만들고, 억울해지는 것이다. 억울함이다.
억울함은 두 가지 근원에서 발생한다. 1) 자기 자신의 권리가 침해 받고 있다고 생각 할 때 2) 상대방이 그렇게 할 권리가 없다고 느껴질 때
사람들 사이의 문제들과 갈등들은 여기서 발생한다. 이 두 가지 생각이 사람을 긁어댈 때, 갈등은 촉발된다.
1) “내가 누군데, 내가 누군지 알아?“ 2) “네가 뭔데? 네가 뭔데 그러는 거야?“
하갈도 이 생각이고, 사래도 이 생각이다. 하갈은 (1) “내가 누군데, 내가 아브람의 씨를 밴 여잔데, 내가 아니면 너는 자녀도 없이 있었을 텐데…“ 와 (2) “네가 뭔데? 여주인이면 다야? 여주인이면 여주인답게 자녀를 낳아야지, 불모의 여자, 불임의 여자가 당신 아니야?“
그러나 이 생각은 사래도 똑같다. 1) “내가 누군데, 내가 아브람의 조강지처야“와 또한 2)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 나를 무시해? 너는 종이라구, 종!!!!“ 누가 옳은가? 누가 정당한가? 둘 다 옳다. 둘 다 정당하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갈등이 생겼는가? 사래의 결정 때문이었다. 사래는 왜 이런 결정을 했는가? 아브람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뿐이었을까? “이로 인하여 내가 세워질 것이다“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녀는 더 이상 자기의 수치를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아브람의 자손을 잇게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한 행동이지만, 또한 그 내면에는 자기가 세워지기를 바라는, 자기 수치를 지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누가 그런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서로가 정당한, 누구도 무릎 꿇을 수 없는 이 상황 속에서, 너무도 심하게 헝클어져 도저히 상황이 풀릴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그 때에, 결국 하갈이 도망한다. 문제를 해결하는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피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하여 피해질 것인가? 해결될 것인가?
그럴 수 없다. 하갈의 배에는 아브람의 씨가 자라고 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어쨌든 아브람이고, 사래는 어쨌든 엄마로서의 권리가 있다. 해결이 아니다. 그러나 하갈은 견딜 수가 없었다. 아침마다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는 사래가 견딜 수가 없었다. 사실 그건 사래도 마찬가지였다. 아침마다 불러오는 배를 내밀며, ‚아이고 힘들어‘ 하는 하갈을 견딜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갈등은 격화되었다. 결국 하갈이 견디지 못하고 도망한다.
그런데 이 때,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전혀 기대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사건이 전개된다. 『[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 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8]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창 16:7-8)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샘곁에서.... 그녀를 만나주고 있다. 술 길 샘물이다. 바로,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묻는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에게 던졌던 물음이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사람아, 네가 어디 있느냐?“ “너는 누구냐?“라는 물음이었다.
“너는 누구냐? 너는 누구이기에 거기 숨어 있느냐?“
여호와의 사자는 지금 동일한 물음을 묻고 있는 것이다. “너는 누구냐?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느냐?“ 그 답은 무엇인가? “사래의 여종 하갈아!“가 답이다. “너는 사래의 여종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합니다.“ 그녀의 대답엔 그러나 “어디로“에 대한 답이 없다.
모든 도망의 특징이다. 어디로가 있다면 그건 더 이상 도망이 아니다. 그건 모험이고, 여행이고, 도전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어디로 없이, 어디에서부터의 도망뿐인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도망해서 어디로 갈 것인가? 애굽으로? 거기에 뭐가 기다리고 있겠는가? 거기에 행복이 있는가? 그렇다는 어떤 보장도 없다. 하지만 괴롭다. 그러니 도망하는 것이다.
그 하갈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신적인 권위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창 16:9)
“네 여주인이게 돌아가라! 그리고 그 손 아래 복종하라“ - 복종하라는 단어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사래가 하갈을 낮추고자 그녀를 억압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돌아가서 사래의 손아래에 스스로를 낮추라고 한다. 사래가 너에게 대하는 그 모든 것에 대해 너 스스로 그 아랫자리에 서라는 것이다.
이게 가능할까? 가능하다. 왜냐하면 하갈은 참으로 사래의 여종이기 때문이다. “너는 누구냐?“ “나는 사래의 여종입니다.“ “그럼 사래는 누구냐?“ “사래는 나의 여주인입니다.“
모든 갈등은 두 근원에서 나온다고 했다. 1) 내가 누군지 알고 그래? 와 2) 너는 뭔데? 였다.
이 물음에 대한 이전의 하갈의 대답은 (1) “내가 단지 여종인지 알아?“와 (2) “네가 여주인이야?“ 였다.
그런데 지금 여호와의 사자는 이 두 물음에 답을 준다. (1)“하갈, 너는 여종이다.“ (2) “사래, 그녀는 너의 여주인이다.“
맞다, 사래는 지금 정말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는 중이다. 그녀가 참으로 여주인이라면, 여종인 하갈에게 이렇게 대해서는 안 된다. 맞다. 하지만 그 말이 뜻하는 바는 사래 또한 상처에 대한 치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을 만나 그녀를 만져주고, 치유해 주고 있다. 왜 사래가 아닌 하갈인가? 그녀가 보다 약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약속을 준다. “네 아들은 이스마엘이다. 그가 무수히 번성할 것이다. 들나귀 같을 것이다. 아무도 그를 길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번성할 것이다. 그 씨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이스마엘이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에게 주신 최종적인 대답이다. “이스마엘“ – 하나님, 그가 들으실 것이다.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나를 보시는 하나님, 나를 아시는 하나님, 내가 고통 받았음을 알고, 들으시는 하나님.... 그는 내 고통을 들으셨고, 앞으로도 들으실 것이다. 이스마엘!!
그런데 하나님의 이 치유는 바로 사래에게도 필요한 것이었다. 만일 사래가 하갈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을 알았다면, 그랬다면, 이 모든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수 있었다.
사래의 수치스러움. 10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는 생명이 없는 죽은 여자! 그 고통의 세월, 무수히 눈물로 보냈던 날들! 그 수치를 걷고, 자기를 세우고 싶었던 사래!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16장에서 도망하는 하갈에게, 이스마엘, 곧 하나님이 네 고통을 아시고 들으셨다는 말씀으로 찾아오심으로 사래에게도 말씀하고 싶으신 것이다.
"사래야, 내가 네 고통을 알고, 네 고통의 소리를 들었노라!"
무엇이 옳고 그르냐 이전에, 누가 맞고 틀리다 이전에,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아시고, 그 고통을 들으시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시다. 창16장의 여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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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급함은 곧 불 신앙이다. (창세기 16장 1-6절) 장동찬 목사
인간은 반복해서 죄를 짓고 실수하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횃불로 언약을 삼아 증거까지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또 실수를 범합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믿음과 현실을 어떻게 조화하며 살 수 있는가? 우리의 숙제입니다. 믿어야 되겠는데 현실이 다릅니다. 인간적인 생각은 현실을 보고 얻은 이성과 감정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항상 설득력이 있습니다. 사래는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앞질렀습니다. 인간의 조급함은 불 신앙의 결과입니다. 조급하면 원칙을 무시하고 편법을 쓰게됩니다. 어떤 편법을 사용하게 되면 당시에는 쉽고 편리하지만 결국은 비극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 약속하신 아들을 기다리게만 하시고 주시지 않으셨는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을 믿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믿음을 시험해서 먼 훗날 육신적인 방법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를 이삭의 탄생을 통하여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몸종인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고는 주인 노릇을 함으로 사래는 욕을 받고 멸시를 받습니다.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아브라함의 계속되는 책임 없는 실수는 하갈이 집을 떠나가게 합니다. 인간적인 생각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하나님의 질서를 깨어버립니다. 나라와 교계의 지도자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채우기 위해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 편법을 쓸 때 질서는 더 쉽게 깨어지고 혼돈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교회, 믿음의 사람들은 영의 법칙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를 통해서 주님의 천국 확장에 우리가 쓰임을 받을 때에 개인적인 감정이나 이익을 문제에 결부시키면 사단이 그 문제를 먹어버리고 사단의 세력이 커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법칙은 순종하는 겁니다, 내가 고난을 받고 내 자신만의 생각을 버리면 하나님의 능력은 커지고 마귀의 세력은 허약해집니다. 우리들의 삶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결입니다. 내가 마귀에게 양식을 먹이면서 살아갈 것이냐? 아니면 마귀를 굶기게 하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사는 은혜의 사람이 될 것인가? 바로 이것이 우리들의 삶에서 매일 선택하여야 하는 결단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사는 삶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아브라함이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죄보다 더 큰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요, 실수보다 더 큰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사람들이 실수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일어설 수 있음을 계속 말씀합니다. 조급한 인간의 생각과 방법을 버리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기다리는 베다니 성도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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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기다리라. (창 16:1-16)
창세기 16장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하신지 10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변화가 없자 그의 믿음이 흔들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하갈을 통해 아들을 낳는 실수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일로 아브람의 가정은 큰 고통이 왔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2가지 교훈을 나누려 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때를 믿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창세기 15장에서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되리라 는 말씀을 들었을 때 그는 그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집에 돌아와서 사래의 말을 들었을 때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여러분 약속의 말씀이 더디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믿음으로 기다리십시오. 믿음의 거장들은 다 믿음으로 기다리는 자들이었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지으면서 100년을 기다렸고 요셉은 비전을 받고도 13년을 노예로 기다렸고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을 기다리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도달하기 위해서 40년을 기다렸고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수 천년을 기다렸습니다.
인내하며 기다린다는 것은 믿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때는 언제나 완벽합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시37:7)
하나님을 의뢰하고 기뻐하고 맡기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습니까? 믿음으로 기대하고 기도하고 기다리십시오. 믿는 만큼 크게 은혜 부어 주실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갈의 이름은 ‘도망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여주인인 사래를 피해 가나안과 애굽 중간지점인 술 광야 샘물 곁에 와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의 뜻대로 지금 도망을 가고 있습니다. 그녀가 임신한 몸으로 가나안으로도 못가고 애굽으로도 못가고 광야에서 머물며 고통중에 울고 있습니다.
누가 이 여인의 아픔을 알겠습니까? 누가 이 여인의 기구한 운명을 바꾸어 주겠습니까? 그녀의 인생에는 어디를 보아도 갈 곳 없는 버림받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녀의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장 16:11절을 읽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안고 일어섬을 다 보시고 계십니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139:2-6)
사라의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의 고통을 다 보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은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과 딸인 여러분들의 고통을 보시고 도우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 눈 앞에 사는 자가 되십시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자는 위대한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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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래와 하갈의 갈등 (창세기16장 1-6절)
1.사래의 조급함 사래는 인간적인 생각이 앞서서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방법으로 아브람에게 자식을 안겨 주려고 합니다. 우리가 입술로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믿고 기다린다고 하지만 실제 우리의 삶 속에서는 조금의 길만 보이면 그길로 가는 경향이 많습니다. 오늘 사래는 자신의 여종 하갈을 아브람에게 첩으로 줌으로서 화를 자초하게 됩니다. 사래는 그의 말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산을 허락치 않으셨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 시키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종종 우리의 한계상황을 내 세우며 하나님뜻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인것처럼 하지만 그것 역시 이기심에 이끌려 행하는 믿음없는 행동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은 나의 생각대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그분이 일하실때 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의 조급함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지 않는가?
2.교만하여 추방당한 하갈 하갈은 자신의 원래 신분을 잊어 버리고 아브람의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자신의 주인인 사래를 무시하다가 결국 사래에게 학대 당하고 도망치는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하갈의 모습은 피조물인 인간이 주인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마치 자신이 이 세상의 주인인것처럼 살아가는 많은 우매한 사람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하갈이 아브람의 자녀를 잉태하였음에도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신분을 바로 깨달았다면 그는 오히려 더 큰 사랑을 받고 보호받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아름답게 살 수 있는 비결이 있다면 우리가 부하든지 빈하든지 항상 주인되신 하나님앞에 겸손히 서서 나의 신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주인의 자리를 넘보는 그리스도인은 아닌지 돌아 봅시다.
묵상하기 나는 교만으로 인하여 낭패를 당하고 있지 않은가?
(예화) 옷을 입었을 때 알게된 교만 대중 목욕탕에서 두 사람이 같이 목욕을 하다가 한 사람이 어쩌다가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을 끼얹게 되었다. 그러자 잘못되었다고 사과를 하였다. 그러나 계속 신경질을 내면서 <내가 누구인데> 물을 끼얹고 해.나가서 보자. 옷을 입고 보자. 그저 안 둘 테다...두 사람은 나갔다. 그리고 옷을 입었다. 그런데 옷을 입고 보니 그렇게 의기양양하던 사람은 대위 계급을 붙인 군인이었다. 반면에 사과하던 사람은 옷을 입었는데 중령 계급을 단 장교였다. 그때서야 의기양양하던 사람은 손이 발이 되도록 백배 사죄하여 빌었다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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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갈과 이스마엘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 - 김범수 목사
16장에서 아브람이 정말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붙드심이었음을 보여 준다. 15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분명히 하늘의 별을 보게 하였다. 또한 제물에 횃불로 나타나셨다. 어길 수 없는 하나님의 언약을 맺으셨다. 그렇다면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상속자를 주시고, 자손을 번성시키신다는 약속을 믿어야 했다. 그러나 아브람은 사래가 출산하지 못하자 결국 아내가 여종 하갈을 들여야 한다는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이 이해할 만하고, 받아 드릴 수 밖에 없는 현실이라도 믿음안에서는 당연히 거부해야 한다. 그러나 아브람은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버리지 않고, 그들을 보호하시고, 그들을 축복하신다. 하갈과 이스마엘, 곧 하이에게 하나님은 멸시하지 않고, HI(하이)로 받아 들이신다.
1. 하갈과 이스마엘
사래나 하갈이나 똑같은 아픔을 가진 여자들이다. 그러나 사래는 자손이 없었던 여인이나 자식을 낳았다. 하갈은 여종으로서 주인의 아들을 얻었으나 자유롭지 못한 슬픈 인생을 살았다. 하갈은 애굽 사람이었다. 아브람이 가나안에 기근이 있어 애굽으로 갔을 때 하갈을 종으로 데리고 왔을 것이다. 하갈이 아브람의 씨를 가졌을 지라도 하갈은 엄연히 사래의 종이었다. 사래는 종의 주인이었다 하더라도 늘 마음이 허전했을 것이다. 여인으로서 아이를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죄송함과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선택한 것은 여종 하갈을 아브람에게 들이는 것이었다. 단순한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다. 문화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한 여인으로서 그것을 감당하기는 마음에 큰 고통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래는 아브람에게 아내로서 설득을 했다. 살아가면서 있어야 할 것이 없을 때가 있다. 그리고 없어야 할 것이 있을 때가 있다. 이 럴 때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느냐가 중요하다. 사래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먼저 앞세웠다. 그것이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가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브람이 사래의 제안을 받아들여 하갈과 동침을 하게 된다. 아브람이 아내의 말이 아무리 설득력있는 말이라 해도 거절했어야 했다. 비록 불쌍한 사래의 말이라도 인간적인 애정에 끌려 갈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지켜야 했다. 하갈이 아브람과 동침한 이후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 하갈이 사래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사람의 마음은 이렇게 변한다. 과거에는 종이었던 하갈이 주인 사래의 마음을 괴롭게 하였다. 하갈은 주인인 사래를 멸시하였다. 주인으로서 존경을 하지 않고, 예의를 다하지 않은 것이다. 사람은 이렇게 변할 수 있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을 감싸고 있는 환경이 아니라 마음이다. 언제나 변함이 없는 마음을 지키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 사람의 신분이 어떠하든지 그 한 사람의 인격을 존중해 주는 것이 사람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태도이다. 사래는 하갈로부터 받는 여자로서의 모욕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남편 아브람에게 이런 모욕을 아브람이 받아야 한다고 감정을 표현하였다. 아브람은 사래의 말을 듣고 하갈을 마음대로 하라고 허락했다. 사래는 그렇게 철저한 아내였다. 사래의 주인은 자기가 아니라 아브람이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어도 아브람의 결정이 아니고서는 하지 않았다. 이후 사래는 하갈을 학대하였다. 사래가 하갈을 학대했다고 했으니 어떻게 행동했는지 상상할 수 있다. 하갈은 사래의 이같은 학대를 못이겨 집을 나가 떠나게 된다.
하갈이 광야로 나가 있을 때에 하나님이 하갈에게 나타나셔서 사래에게로 다시 돌아가라고 한다. 그리고 하갈의 씨를 크게 번성케 하고 그 수를 많게 할 것이고 축복을 해 주신다. 하나님은 하갈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이스마엘을 통해서 난 후손들은 들나귀처럼 살것이고, 모든 사람을 치고, 형제들과 서로 대항해서 살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이삭의 후손과 이스마엘 후손과 다른 축복을 해 주신다. 이삭을 통해서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고, 이스마엘의 후손들은 서로 다투며, 죽이게 된다고 하셨다.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어도 믿음의 사람들은 은혜로 산다. 그러나 다툼과 경쟁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축복받은 인생인가?
하갈은 자기를 만나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 곳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란 뜻으로 ‘브엘라해로이’라고 했다. 하갈은 이스마엘을 낳고, 그 때의 아브람의 나이가 86세였다. 아브람, 사래, 하갈, 이스마엘을 보면 참 연약하기 그지 없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이 없이는 한 순간이라도 살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의 믿음없슴과 교만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지켜주시고, 번성케 하시는 하나님, 잘못이 있음에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할 뿐이다. 날마다 하나님께 하이(HI)하며 인사하고, 감사를 해도 결코 부족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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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창세기 16:1~5)
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삶은 쉽지 않습니다. 직선으로만 가면 좋을 텐데, 인생은 직선이 아닙니다. 그리고 살다 보면, 길을 잃을 때도 있고, 장애물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살아가다 보면,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실수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실수가 잦으면, 실수가 인생을 무너뜨립니다.
살다 보면, 예기치 못한 일을 많이 겪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다양한 시험이 찾아옵니다. 믿음의 길에는 시험이 있습니다. 시험으로 인해 넘어지면, 그것이 바로 실수입니다. 물론 우리의 실수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실수로 인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매우 큽니다.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의 생애 중 중요한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크게 실수한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 15:5). 그런데 세월이 지났지만, 현실은 하나님의 약속과 점점 멀어졌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잘못된 선택을 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여러 가지 시험이 찾아옵니다.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우리의 삶에 찾아오는 여러 가지 시험에 어떻게 대처하여 승리할 것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문제를 만났을 때, 객관성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문제를 만났을 때, 객관성을 잃으면, 굉장히 위험합니다. 본문 창세기 16장 1절에 보면,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라가 출산하지 못했다는 것, 이것이 아브라함의 문제입니다. 아브라함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답이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제를 만나면, 문제만 바라볼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시야가 좁아집니다. 시야가 좁아지면, 객관성을 잃습니다. 그런데 문제에만 몰두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문제를 만나면, 문제 자체를 해결하기 위해 애씁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다 보면, 자기 의욕이 강해지고, 자기 욕심에 치우쳐 상황을 올바로 판단하지 못하게 됩니다. 사고(思考)가 협소해집니다. 넓게 보지 못합니다. 객관성을 잃습니다. 판단력이 무디어집니다. 그래서 문제가 오히려 악화됩니다. 생각이 고정되어버립니다. 그래서 귀를 닫아버립니다.
아브라함의 여종은 아브라함의 가족과 늘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갑자기 마음이 급해지고 불안감을 느끼고 판단력이 흐려졌습니다. 여종이 대안(代案)으로 보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말대로 여종 하갈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본문 창세기 16장 4절에 보면,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통해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했지만 아이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갈과 동침했더니 하갈은 쉽게 임신했습니다. 일이 수월하게 해결되는 것 같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는데 잘 풀렸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는데,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는 것이 덫인 경우가 있습니다. 문제가 풀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문제가 풀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꼬이는 것입니다.
위기를 만나 삶이 궁지에 몰렸을 때에는 결정을 미루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대한 문제일수록 문제와 거리를 두고 문제에서 빠져나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조급한 마음으로 문제를 빨리 해결하려고 하다 보면, 쉬운 해결방법을 찾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유혹입니다.
믿음의 길에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유혹은 편리한 해결책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힘들어도 기다려야 했습니다. 사라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실, 약속의 자녀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빨리 해결하려고 하다 보니 여종 하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갈이 임신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것이 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본문 창세기 16장 1절에 보면,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마치 한 여종이 준비되어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종을 예비해놓으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본문 창세기 16장 2절에 보면,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라가 제안했습니다. 아브라함도 사라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 근동 지방에서 보편적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세상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생각하다 보니 여종 하갈을 통해 자녀를 낳으려고 했습니다.
마귀는 종종 우리에게 “왜 그렇게 복잡하게 사냐, 어렵게 사냐, 쉽게 살아.”라고 속삭입니다. 그리고 편리하게 신속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합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속임수입니다. 쉽고 편리한 것을 선택하는 것은 마귀의 덫에 걸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길에서 잘 생각해야 합니다. 주어진 것을 아무 생각 없이 덥석 잡으면, 혹독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요나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욘 1: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다시스로 가려고 했습니다. 요나 1장 3절에 보면,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요나가 욥바 항구에 갔는데,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내가 다시스로 가려는 것을 싫어하시지 않으시나보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죄를 지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합리화시킵니다. 자신에게 맞게 맞춥니다. 자신에게 편리한 대로, 유리한 대로 모든 것을 맞춥니다.
예수님께서 40일 금식하신 후에 마귀가 예수님을 찾아와 시험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3)”고 말했습니다. 배가 고픈 예수님께 이보다 솔깃한 제안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유혹을 거부하셨습니다.
사라의 제안이 아브라함에게는 합리적인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방법이 하나님을 도와드리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아내 사라의 제안이 아브라함에게는 지혜로운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지혜를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성도들이 자신의 일에 하나님의 뜻을 끌어당겨 정당화시킬 때가 많습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빠른 길, 쉬운 길로 유혹합니다. 큰 힘 들이지 않고 쉽게 이룰 수 있는 방법으로 유혹합니다. 삶이 힘들 때, 누군가가 쉬운 해결책을 제안하면 끌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다림을 통해 우리를 단련하십니다. 기다림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련하시는 방법 중 매주 중요한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편에서는 가장 힘든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기다리게 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 받는 것을 보시며 즐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기다림이 곧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의 과정을 통해 믿음이 여물어져갑니다. 기다림이 없으면,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기다릴 수 있다면, 기다리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단단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기다리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인간의 방법과 계획을 내려놓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방법과 계획을 내려놓고 하나님만을 신뢰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다림을 통해 우리의 수단과 방법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2~4절에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소망 중에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 믿음의 정석(定石)입니다. 시험은 믿음을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믿음을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기다림을 통해 믿음의 질이 좋아집니다. 기다리는 가운데 자신의 묘안과 대안을 만들어내려는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성숙시키십니다.
아브라함은 문제를 잘 분석했습니다. 그런데 적용하는 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본문 창세기 16장 2절에 보면,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라의 출산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허락하셨는데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좀 더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고 말했습니다.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라는 자신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자신의 힘과 의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을 섞어버렸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런데 자신의 옛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주기도문에 보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기도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자신의 뜻도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심으로 움직이려는 고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 깨닫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지만,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인가는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은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다가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자신이 대신 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는 믿는 믿음이 약해지면, 내가 대신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래 기다리게 하시는 데에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기다림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집을 꺾으시고, 우리의 수단과 방법, 우리의 의도를 꺾으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뜻 앞에 굴복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때를 우리가 임의로 조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일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시간표를 우리에게 보여주시지 않으십니다. 왜 보여주시지 않으실까요? 우리에게 유익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미래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확실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다림으로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평생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내 생각과 내 뜻, 내 의도로 살아가려는 고집을 꺾고,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생활에서 최고의 레슨(lesson)입니다.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보다 상황을 더 의존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창세기 16장 3절에 보면,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였을 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지 10년이 지났습니다. 아브라함은 85세요, 사라는 75세였습니다. 사람이 생각하기에는 아이를 낳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이성적으로 보면, 사라가 옳은 선택을 한 것입니다.
사라는 기다릴 만큼 기다렸습니다. 사라는 자신의 상황을 보며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사람의 논리로 따져보면, 하나님의 약속과 현실이 맞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사라는 자신의 생각대로 선택했습니다. 이것이 사라가 실수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언약(covenant)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구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은 다 성취되었습니다. 성취된 약속이 신약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단 하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약속만 남아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시고, 약속하신 것을 이루신다는 것이 성경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확신하지 못하면, 우리의 믿음은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깨지 않으시고,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사무엘상 15장 29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끔 약속을 깨신다면, 우리는 불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결코 깨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연결됩니다. 누가 약속한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늘 거짓말하는 사람이 약속한 것은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변함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안정감을 누립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것을 놓쳤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노력이나 열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우리의 삶에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실수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의 삶을 지켜줍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의 삶을 붙듭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갑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때로는 우리가 실수합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난 후 그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거기서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그래서 바로에게 아내 사라를 빼앗길 뻔 했습니다. 그 날 밤, 하나님께서 바로와 그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리하여 바로가 사라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라를 통해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로가 사라를 건드렸다가는 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창 15:2)”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5:4~5).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희미하게 붙잡았습니다. 그래서 상황에 반응했습니다. 말씀에 사로잡혀야 하는데, 상황에 사로잡혔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반응할 때가 있습니다. 현실이 힘들면, 말씀을 놓쳐버립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놓아버립니다. 현실의 상황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말씀에 반응하기보다 상황에 반응합니다. 말씀에 대한 깊은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하게 붙잡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자손에 대한 언약은 핵심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손을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선교사나 목회자가 소명의식이 흔들리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이 희미해지면, 상황에 끌려 다닙니다. 나중에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잊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하나님의 약속을 이룰 백성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상황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을 놓고 상황에 빠져버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하게 붙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날마다 파도처럼 우리에게 밀어닥치는 상황으로 인해 말씀과 상관없는 길로 빠집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잊어버립니다. 상황에 밀려다니지 않으려면, 말씀을 확고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인가 아닌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확실하다면, 상황이 나빠진다 해도, 느긋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인가 아닌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붙잡아야 합니다. 천하가 뒤집힌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급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조급한 마음은 불신앙입니다. 상황에 따라 반응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으면 느긋합니다. 담담합니다. 별 일이 일어나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뒤집혀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3절에 보면,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려는데, 앞에는 홍해가 있고, 뒤에서는 애굽의 군대가 추격해옵니다. 꼼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고 생각하고 나아갔는데, 상황이 악화되었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길을 여셨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의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 생명을 창조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시는 창조주이십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능히 하시지 못하실 것이 없으십니다.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변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주변 사람들의 조언에 귀 기울이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본문 창세기 16장 2절에 보면,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한두 번 말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의 말을 들은 이유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사라를 누이라고 속여 바로에게 빼앗길 뻔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6장에서 아브라함은 왜 이런 실수를 했습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이 자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적 분별력이 부족했습니다.
우리는 가까이에 있는 사람의 말을 주의해서 들어야 합니다. 가까이에서 친숙하게 지내기 때문에 분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더구나 문제를 만났을 때에는 더 민감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는 경계심이 없습니다.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부부는 닮게 되어있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의 말을 주의해서 들어야 합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오히려 해가 될 때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주변 사람을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부부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깨어있어야 합니다. 부부 두 사람 다 분별력이 없으면 같이 실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 부부는 영적 파트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서로서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귀에 솔깃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꾀려고 하는 악한 자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육을 잘 받지 못하면, 훈계를 받지 않으면, 악인의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꾀려는 악인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시편 1편 1절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분별력을 가질 수 있습니까? 말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자칫하면 악인을 따라가게 됩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쓸데없는 주변의 소리에 끌려 다닙니다.
매일 우리의 귀에 들리는 소리가 많습니다. 편리하게 살라고, 되는 대로 살라고, 적당히 살라고 유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 열심을 내지 않으면, 세상의 소리가 강력하게 들립니다. 그럴 듯하게 느껴지는 해결방안이 더 크게 들립니다. 세상에는 간단하고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제시합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유혹을 이기려면,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아무리 사람들의 제안이 귀에 솔깃하게 들려도, 하나님의 말씀이 선명하게 들려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묵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인도를 받는다면, 사람들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라의 말을 들었습니다. 본문 창세기 16장 2절에 보면,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창세기 3장 17절에 보면,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아담은 똑같습니다. 인간의 역사(歷史)는 반복됩니다. 불순종이 대물림됩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히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계속 흔들렸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점점 성장시키셨습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22장 3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주변 사람들과 의논하고 대화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대한 순간에는 하나님과 독대(獨對)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결재하신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길은 외로운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는데, 그것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물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나에게 확신을 주신 영적 체험을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만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매일 누구의 말에 귀를 기울이십니까? 이것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누구의 말에 귀가 솔깃합니까? 거기에 운명이 달려있습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하나님의 지시와 인도를 따라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나아가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잘못된 선택은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사라는 자신의 머리를 사용하여 방법을 찾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히려 꼬였습니다. 큰 실수를 한 것입니다. 하갈은 자신이 임신함을 알고 여주인 사라를 멸시했습니다. 사라는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분노를 쏟아 부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여전히 무기력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창 16:6)”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라는 하갈을 학대했고, 하갈은 사라를 피해 도망갔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하갈은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이스마엘의 탄생은 오늘날 중동 분쟁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의 엄청난 분쟁을 초래했습니다.
이 일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창세기 17장 1절에 보면,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창세기 16장 16절에 보면,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창세기 16장 16절과 창세기 17장 1절 사이에 14년의 공백기가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14년 동안 침묵하셨습니다. 말씀의 기근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는 가장 큰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인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끊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갈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끊어지는 것은 가장 큰 벌입니다. 말씀의 기근보다 심각한 기근은 없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와 신구약 중간기에 하나님께서 침묵하셨을 때는 영적 암흑기였습니다.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끊임없이 주어지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진다면, 하나님께서 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십니다. 그런데 말씀이 끊어졌다면, 그것은 죽은 것과 같습니다. 길이 없습니다. 육체가 늙어가는 것은 문제되지 않습니다. 상황이 꼬이는 것은 문제되지 않습니다. 말씀이 끊어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불순종의 대가를 혹독히 치렀습니다. 우리의 삶에 찾아오는 고통 중에는 우리가 자처한 것이 많습니다. 불순종으로 인해 고통이 주어질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33절에 보면,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불순종으로 인해 고통을 뼈저리게 겪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보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신중하게 따라야 합니다. 상황의 위급함으로 인해 인간적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서는 안 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려야 합니다. 신자는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기다리는 것은 낭비가 아닙니다. 기다림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견고해집니다.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됩니다. 상황이 꼬여도,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상황보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상황보다 하나님이 크시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만났을 때, 문제에 빠지지 마세요. 문제에 빠지면, 객관성을 잃어버립니다. 마음이 좁아집니다. 그래서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됩니다. 편리한 해결책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편리하고 빠른 해결책, 그럴 듯한 방법은 덫입니다.
말씀을 잘 적용해야 합니다. 상황에 의존하기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어야 합니다. 사람의 조언에 귀 기울이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잘못된 선택을 하면, 고통이 따릅니다. 매 순간 하나님의 인도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때를 잠잠히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말씀에 사로잡히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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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마엘 (창16:1-16)
아브람이 85세가 되었을 때, 곧 그가 가나안 땅에서 살기 시작한지 10년이 되었을 때였다. 10년이 지나도록 아브람에겐 아들이 없었다. 이것은 물론 아브람에게도 고통스럽고, 걱정되는 상황이었지만, 사래에겐 더욱 더 고통스러운 상황이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아브람의 몸에서 날 자가 아브람의 모든 것을 상속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또 맹세까지 하셨다. 하지만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자식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 누가 가장 괴롭겠는가? 사래다. 여자로서, 한 집안의 안주인으로서, 자녀를 낳아 그 대를 잇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없었다. 괴로워하던 사래가 드디어 결심을 한다. 자기 나이 75세, 아브람은 85세, 아브람이 더 늙기 전에 해결을 ...해야 했다. 그래서 애굽 여종 하갈을 아브람에게 준다. 이 한 결정과 이 한 행동으로 인해 16장의 모든 문제와 갈등이 발생한다.
창 16장의 핵심과 관심은 아브람의 신앙의 타락이나, 실패에 있지 않다. 그 보다, 사래와 하갈 사이에 벌어진 일과, 그로 인해 발생한 일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바라보시며, 어떻게 그 사이의 문제와 갈등을 해결하시는가에 놓여 있다. 구원사의 큰 물줄기가 흘러가고 있는 창세기의 아브람의 이야기에서, 16장은 놀랍게도 여인들의 마음의 갈등과 고통과 상처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바라보시며, 어떻게 봉합하는지를 보여준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아브람? 사래? 하갈? 1-3절까지, 등장인물은 아브람과 사래다. 3-6절까지 등장인물은 아브람과 사래와 하갈이다. 하지만, 1-6절의 주요 인물, 모든 사건을 이끌고 있는 인물은 사래다. 그리고 7-16절까지의 중심 인물은 하갈이다. 사래와 하갈, 이 두 여인의 이야기가 하나님께서 온 인류의 구원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대답을 보여주고 있다.
약속을 받은 지 10년,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로서 사래의 고통은 날이 갈수록 해가 갈수록 깊어져 갔다. 그래서 자기 여종을 들이고자 한다. 그것을 통해서 그녀가 꿈꾼 것은 무엇인가?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내가 세워질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창 16:2)
히브리어 성경은 “내가 그녀로 말미암아 세워질 것이다“이다. 즉 사래는 하갈을 아브람에게 주는 것을 통해, 혹 그녀가 자녀를 얻게 된다면, 그로 인해 자기가 세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자기 수치가 없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소망이 있었기에, 사래는 참으로 쉽지 않은 결심을 하게 되었고, 그것을 어렵사리 행동에 옮기고 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십 년 후이었더라』(창 16:3)
히브리어 성경은 이것을 우리 성경과 는 다른 울림을 갖게 쓰고 있다. “그리고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애굽 여인, 그녀의 여종 하갈을 취했다. 십년이 지났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그녀가 그녀를 그녀의 남편 아브람에게, 그에게, 아내로 주었다.“
성경은 가나안에 거한지 10년 후 아브람이 결국 믿음을 못 지키고 하갈을 취했다는 투로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 성경은 십년이 지나도록 자녀가 없었던 사래가, 아브람의 아내가, 자기 여종을 아브람에 내어 주면서 겪고 있는 고통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아브람의 아내가 여종을 취해, 그녀를, 그녀가, 그녀의 남편, 아브람에게, 그에게, 아내로 주었다.
우리 성경엔 ‘첩‘으로 주었다고 번역했지만, 그냥 ‘아내‘다. 아브람의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아브람에게, 그에게, 그녀를 ‘아내‘로 주었다는 것이다. 여자들은 알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그런데 사래는 이 고통을 스스로 선택하고 있다. 사래는 그보다 더 큰 고통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기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고통이다. 더 이상 이 고통을 견딜 수가 없다. 그러니, 차라리, 내 여종을 취해 자녀를 낳아라!
자기 아내의 번민과 고통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아브람은 그 말에 순종한다. 그리고 하갈이 임신한다. 그러자 문제가 발생한다.
사래가 바랬던 것은 무엇인가? 하갈이 임신을 하는 것이다. 여종이 낳은 자식은 곧 그 주인의 자식이다. 야곱에게 레아와 라헬이 있었고, 그녀들에게 실바와 빌하라는 여종이 있어 자식을 낳았다. 그 자식들은 곧 레아와 라헬의 자식들인 것이다. 그런데 사래가 그토록 바랬던 일이 일어났는데, 그런데 문제가 생긴 것이다.
막상 하갈이 아이를 갖자, 사래가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하여, 사래의 불행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이라는 운명이 더 분명하게 부각된 것이다.
하갈이 임신하기까지는 아무도 이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하갈이 정말로 임신을 하자, 상대적으로 10년동안이나 아이를 가지지 못했던 사래가 불임의 여성이라는 것이 더욱 더 분명하게 확인이 된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비참한 깨달음이다.
물론 사래는 그런 자기 상황을 받아 들이고, 마음을 추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불임의 여성이다. 하나님이 내가 자녀를 갖는 것을 막으셨다. 하지만, 하갈을 통해 낳은 자는 내 자식이고, 나는 그의 어머니다. 그는 아브람의 씨가 아니냐?. 그래 내가 하갈을 아브람에게 주어 아이를 가진 것이다. 내가 아브람의 씨를 잇게 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여인으로서 참으로 깊은 허전함과 막연한 불안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겨우 마음을 추스르는데 하갈이 자기 마음을 긁는 것이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창 16:4)
우리 성경엔 멸시한다고 했는데, 이는 좀 강한 표현으로 보인다. 멸시까지는 아니고, 무시 정도가 맞다. 임신하자 하갈의 눈에 사래가, 그녀의 여주인이 하찮게 보였다.
그런데 이런 하갈의 눈을, 생각을 못 읽을 사래가 아니었다. 그리고는 분노하고, 그리고는 괴로워한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창 16:5)
내가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다. 내가 당하는 이 폭력적인 일은 당신 책임이다. 내 여종이 나를 멸시한다. 그런데 히브리 성경은 이를 아주 예리하게 표현한다. “그녀가 나를 멸시한다. 하찮게 여긴다“라고 쓰지 않고, “내가 그녀의 눈에 하찮은 존재로 보여졌다. 내가 그녀의 눈에 무시할 만한 존재가 되었다.“라고 쓰고 있다. “그녀가 나를 무시한다“가 아니라, “내가 하갈의 눈에 별볼일 없는 여자로 여겨질 것이다“라는 것이다.
실지로 하갈이 대놓고 무시했으리라 생각되진 않는다. 그런데 사래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이다. 저년이 나를 무시하는 구나! 저년이 나를 애도 못 낳는 여자라고 생각하고 나를 같잖게 여기는 구나!
누가 생각한다고? 하갈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래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하갈도 그렇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결국 자식도 못 낳는 여자였구먼“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그것이 나타난다. 더구나 예민할 대로 예민해져 있는 사래가 이것을 알아채지 못했겠는가? 설사 하갈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사래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저년 눈에 하찮게 보이겠지“
사래의 이 하소연에 대해, 사래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하갈에게 들어갔던 아브람은, 이번에도 사래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는 말한다. “당신 여종이니, 당신 눈에 좋은 대로 하시오“
사래가 기대했던 아브람의 대답은 그것이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아브람도 아내에 대해 최대한 그 마음을 나름 헤아리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래의 고통을 안다. 그녀가 하갈을 주었고, 하갈이 임신했다. 자기가 하갈을 편들거나, 그 자녀를 생각해서 참으시오. 라고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당신 원하는 대로 하시오! 라고 말하고 있었을 것이다.
남편에게 위로 받지 못한 사래는 하갈을 학대한다.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창 16:6)
사래가 하갈을 학대한다. 근데 여기서도 학대는 좀 강한 표현이다. ‘아나‘라는 히브리 단어인데 억압하다, 괴롭게 하다, 혹독하게 하다, 낮추다 라는 뜻이다.
일을 더 심하게 부려먹었다기 보다는 ‘너는 종에 불과하다‘라는 것을 각인시키는 것이다. 그러자, 하갈이 도망한다. 왜 도망했겠는가? 사래가 자기를 너무 심하게 부려먹어서, 힘들어서 견딜 수가 없었는가? 아닐 것이다. 그런 것 때문이 아닐 것이다.
자기에게 어떤 권리가 없다고 생각할 때, 불만은 발생하지 않는다. 자기에게 어떤 권리가 있다고 생각할 때, 불만이 발생한다.
종으로 있을 때에는 사래가 시키는 일들을 하는 것이 불만을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비록 여전히 종이지만, 지금 자기는 임신 중이고, 더구나 아브람의 씨를 배고 있다. 자기가 존중 받을 만한 상황에 있다. 그런 권리가 있다. 마땅히 존중 받아야 한다. 그런데 사래는 와서 “너는 종이고, 나는 주인이다“를 끊임없이 확인시키며, 이런 저런 일들을 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불만을 만들고, 억울해지는 것이다. 억울함이다.
억울함은 두 가지 근원에서 발생한다. 1) 자기 자신의 권리가 침해 받고 있다고 생각 할 때 2) 상대방이 그렇게 할 권리가 없다고 느껴질 때
사람들 사이의 문제들과 갈등들은 여기서 발생한다. 이 두 가지 생각이 사람을 긁어댈 때, 갈등은 촉발된다.
1) “내가 누군데, 내가 누군지 알아?“ 2) “네가 뭔데? 네가 뭔데 그러는 거야?“
하갈도 이 생각이고, 사래도 이 생각이다. 하갈은 (1) “내가 누군데, 내가 아브람의 씨를 밴 여잔데, 내가 아니면 너는 자녀도 없이 있었을 텐데…“ 와 (2) “네가 뭔데? 여주인이면 다야? 여주인이면 여주인답게 자녀를 낳아야지, 불모의 여자, 불임의 여자가 당신 아니야?“
그러나 이 생각은 사래도 똑같다. 1) “내가 누군데, 내가 아브람의 조강지처야“와 또한 2)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 나를 무시해? 너는 종이라구, 종!!!!“ 누가 옳은가? 누가 정당한가? 둘 다 옳다. 둘 다 정당하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갈등이 생겼는가? 사래의 결정 때문이었다. 사래는 왜 이런 결정을 했는가? 아브람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뿐이었을까? “이로 인하여 내가 세워질 것이다“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녀는 더 이상 자기의 수치를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아브람의 자손을 잇게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한 행동이지만, 또한 그 내면에는 자기가 세워지기를 바라는, 자기 수치를 지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누가 그런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서로가 정당한, 누구도 무릎 꿇을 수 없는 이 상황 속에서, 너무도 심하게 헝클어져 도저히 상황이 풀릴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그 때에, 결국 하갈이 도망한다. 문제를 해결하는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피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하여 피해질 것인가? 해결될 것인가?
그럴 수 없다. 하갈의 배에는 아브람의 씨가 자라고 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어쨌든 아브람이고, 사래는 어쨌든 엄마로서의 권리가 있다. 해결이 아니다. 그러나 하갈은 견딜 수가 없었다. 아침마다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는 사래가 견딜 수가 없었다. 사실 그건 사래도 마찬가지였다. 아침마다 불러오는 배를 내밀며, ‚아이고 힘들어‘ 하는 하갈을 견딜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갈등은 격화되었다. 결국 하갈이 견디지 못하고 도망한다.
그런데 이 때,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전혀 기대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사건이 전개된다. 『[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 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8]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창 16:7-8)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샘곁에서.... 그녀를 만나주고 있다. 술 길 샘물이다. 바로,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묻는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에게 던졌던 물음이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사람아, 네가 어디 있느냐?“ “너는 누구냐?“라는 물음이었다.
“너는 누구냐? 너는 누구이기에 거기 숨어 있느냐?“
여호와의 사자는 지금 동일한 물음을 묻고 있는 것이다. “너는 누구냐?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느냐?“ 그 답은 무엇인가? “사래의 여종 하갈아!“가 답이다. “너는 사래의 여종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합니다.“ 그녀의 대답엔 그러나 “어디로“에 대한 답이 없다.
모든 도망의 특징이다. 어디로가 있다면 그건 더 이상 도망이 아니다. 그건 모험이고, 여행이고, 도전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어디로 없이, 어디에서부터의 도망뿐인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도망해서 어디로 갈 것인가? 애굽으로? 거기에 뭐가 기다리고 있겠는가? 거기에 행복이 있는가? 그렇다는 어떤 보장도 없다. 하지만 괴롭다. 그러니 도망하는 것이다.
그 하갈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신적인 권위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창 16:9)
“네 여주인이게 돌아가라! 그리고 그 손 아래 복종하라“ - 복종하라는 단어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사래가 하갈을 낮추고자 그녀를 억압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돌아가서 사래의 손아래에 스스로를 낮추라고 한다. 사래가 너에게 대하는 그 모든 것에 대해 너 스스로 그 아랫자리에 서라는 것이다.
이게 가능할까? 가능하다. 왜냐하면 하갈은 참으로 사래의 여종이기 때문이다. “너는 누구냐?“ “나는 사래의 여종입니다.“ “그럼 사래는 누구냐?“ “사래는 나의 여주인입니다.“
모든 갈등은 두 근원에서 나온다고 했다. 1) 내가 누군지 알고 그래? 와 2) 너는 뭔데? 였다.
이 물음에 대한 이전의 하갈의 대답은 (1) “내가 단지 여종인지 알아?“와 (2) “네가 여주인이야?“ 였다.
그런데 지금 여호와의 사자는 이 두 물음에 답을 준다. (1)“하갈, 너는 여종이다.“ (2) “사래, 그녀는 너의 여주인이다.“
맞다, 사래는 지금 정말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는 중이다. 그녀가 참으로 여주인이라면, 여종인 하갈에게 이렇게 대해서는 안 된다. 맞다. 하지만 그 말이 뜻하는 바는 사래 또한 상처에 대한 치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을 만나 그녀를 만져주고, 치유해 주고 있다. 왜 사래가 아닌 하갈인가? 그녀가 보다 약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약속을 준다. “네 아들은 이스마엘이다. 그가 무수히 번성할 것이다. 들나귀 같을 것이다. 아무도 그를 길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번성할 것이다. 그 씨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이스마엘이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에게 주신 최종적인 대답이다. “이스마엘“ – 하나님, 그가 들으실 것이다.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나를 보시는 하나님, 나를 아시는 하나님, 내가 고통 받았음을 알고, 들으시는 하나님.... 그는 내 고통을 들으셨고, 앞으로도 들으실 것이다. 이스마엘!!
그런데 하나님의 이 치유는 바로 사래에게도 필요한 것이었다. 만일 사래가 하갈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을 알았다면, 그랬다면, 이 모든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수 있었다.
사래의 수치스러움. 10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는 생명이 없는 죽은 여자! 그 고통의 세월, 무수히 눈물로 보냈던 날들! 그 수치를 걷고, 자기를 세우고 싶었던 사래!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16장에서 도망하는 하갈에게, 이스마엘, 곧 하나님이 네 고통을 아시고 들으셨다는 말씀으로 찾아오심으로 사래에게도 말씀하고 싶으신 것이다.
"사래야, 내가 네 고통을 알고, 네 고통의 소리를 들었노라!"
무엇이 옳고 그르냐 이전에, 누가 맞고 틀리다 이전에,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아시고, 그 고통을 들으시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시다. 창16장의 여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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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엘라해로이
/ 창세기 16장
브엘라해로이의 뜻 - 나를 살펴보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샘
1.
기다리게 하시는 하나님
극복하기 힘든 문제를
발생할 때 인내의 한계점이 발생될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경제문제, 교육문제,
결혼문제, 자녀문제 직장 문제 등 많은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문제가 발생하면 성도가 해야 할 기본은 기도입니다. 문제는 기도 후에 응답이 지연될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내일의 청사진이 보여 지지 않고 너무 미래가 불투명해지면 사람들은 두려움이 엄습하고 불신앙이
마음속에서부터 일어나고 생각이 멈추어 버릴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아브람의
가정에도 극복하기 힘든 문제가 발생합니다. 성경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창15:3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 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오늘 성경말씀‘네
몸에서 날 자’에는 2가지 해석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몸에서 날 자’라고 말씀하고 있지
‘사래의
몸에서 날 자’이라고 말씀하지 않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래는 아마도 이것을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브람도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브람에게서 날 자라면 나
아니고 다른 사람의 몸에서도 나야 한다는 뜻인가? 라고 생각했다는 해석입니다.
두
번째 해석은 ‘사래가 인간적 방법을 제안하자 아브람도 같이 흔들리면서 그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해석입니다. 2절 하 반절에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사실 한 인간이요 한 아내의 남편으로써 아브람을 생각하면 아브람은 참 눈치가 없습니다. 여자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사래의
말은 진심이 아닐 수도 있다는 해석입니다. 사래가 하도 답답하니까 한 번 해본 소리인데
그것도 모르고 아브람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만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자기 남편에게 다른 여자를 들여보내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여자에게는 이것만큼은 안 되는 일입니다. 그때 아브람은 이렇게 했어야 했습니다.
“여보!
당신이 힘든 것 알아. 오죽했으면 그런 말 하겠소. 당신 마음 다 아니까 조금만 기다립시다. 끝까지 하나님을 믿읍시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식을 주실 것이오. 절대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내가 당신을 두고 어떤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 한단
말이오. 안 돼요.” 이렇게 말을 했어야 정말 아브람은 믿음의
사람이고 아내에게도 훌륭한 남편입니다.
그렇지만
아브람은 실수를 범하고 맙니다.
중요한 것은 부부는 서로 신앙이
좋아야 합니다. 하나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습니다. 결국 아브람은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했습니다.(4절) 인간적인 방법으로 가면 이렇게 일이 수월하게 잘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나중에 큰 올무가 되고 고통이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면 처음에는 어렵지만 나중에는 큰 기쁨이 있습니다. 요셉과 다니엘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직하게
살아간 결과는 둘 다 총리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하나님은 기다리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2.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
1)
문제의 원인
사래의 잘못 - 사래를 쉽게 죄인으로 단정하지 마십시오.
사래는 3-5년이 아니라 10년을 참은 것입니다. 10년이 인내의 마지노선이 된 것입니다. 10년을 기다렸는데도 자녀가 없자 인내의 한계가
부닥친 것입니다만 그래도 끝까지
인내하지 못한 것이 바로 사래의 잘못인
것입니다.
아브람의 잘못 - 아내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선시 한 것입니다.
얼마든지 안 된다고 할 수 있지만 아내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존중한 것입니다. 남편들은 단순하고 약간 도둑 심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의 남편들은 다 똑똑한 것 같지만 거의 대부분 아내의 말 한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의 임무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저는 우리
아내들이 브리스길라처럼 멋진 아내들이 되기를 바라며, 남편들은 언제나 아내의 말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시하는 멋진 성도들이 되 시길
원합니다.
하갈의 잘못 - 세상질서를
무시한 것입니다. 종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고 또한 언제나 종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주인 사래를 무시한 것입니다.
2)
가족원의 잘못으로 아브람의 가정에 찾아온 위기
사래 - 종에게
무시당했습니다. 자기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서 인정하는 사라는 남편 아브람을 주(벧전3:6)라고 부르던 현숙하고 아름다운 지성적인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오늘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창16: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아브람
- 아버지의
권위가 무시되었습니다.
하갈 - 집에서
도망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성경을
말합니다.
벧전3:1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3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7 남편들아 이와 같이 1)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3)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
창16: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8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우리
하나님은 찾아와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람과 사래에게 찾아가주신 것이
아니고 사래의 여종 하갈을 찾아갔습니다. 자존심이 상한 하갈은 도망쳐버린 것 같습니다. 가출했다는 말입니다. 대책 없이 광야로 간 하갈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광야에서의 무더위, 추위 굶주림으로 지쳐버린 하갈을 주님께서 찾아와 주신 것입니다.
만약 아브람에게 직접 찾아가
데려오라고 했다면 사래가 얼마나 질투했을까요?. 사래에게 데리고 오라 했으면 얼마나 주인으로서 자존심이 상했을 까요 그리고 만약 하갈이 광야에서
굶주려서 혹은 짐승에게 물려 죽었다면 일생동안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우리 하나님께서는 철부지 도망자 하갈을 찾아와서 그의 마음을 위로해주시고 원
위치로 돌아가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복의 통로가 될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는 가장 적당한 방법으로 이끌어 주신 것입니다. 문제가 발생할 때 내가 해결하려고 하면 문제가 더 크게 됩니다. 조용히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문제 해결 방법은
무엇일까요?
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설치지 말고 때가
되었을때 도망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될 때가지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나.
찾아오실 때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회를 주실 때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가인은 주님께서 찾아오셨을 때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합니다.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
말씀에 길들여져야 합니다.
이스마엘을 들 나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대항하며 살겠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길들여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이삭과 이스마엘의 다른 점은 길들여졌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야생마 길들이려면 보통 6개월
걸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을 길들이려면 20년
걸립니다.
성경에는 길들여지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
길들여집니다.
환경을 통해 길들여집니다. 고난이라는
것을 통해 사람은 길들여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나와 우리 자녀들에게
어떻게 양육해야 합니까?
첫째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고 전수해야 합니다.
둘째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셋째
예수님의 은혜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옷을 입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은혜는 낮은 대로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겸손하게 주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3.
고통을 살펴주시는 하나님
1)
원위치-네 자리로 돌아가 복종하라
9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지금현재 고통당하는 그곳을 떠나려고 생각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곳이 하갈의 삶의 현장이고 그곳에서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지금
어렵고 힘든 가정, 직장, 사업장 등 삶의 현장을 벗어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즉 도망가서는 안 됩니다. 거기서 견디면서 통과하고 연단과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승리해야 합니다. 조금 힘들다고 현실을 도피하고 떠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시간도 네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거기서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고 하십니다.
2)
하갈의 후손에 대한 예언과 축복 - 아들을 낳으리니 이스마엘이라 하라
10절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1절“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임신한
하갈이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셨고 그 이름까지 지정해 주셨는데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의 뜻은 ‘고통을 들으셨다’입니다. 여기서 또다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주목받지 못한 주변인 하갈을 하나님은 주목하셨고 그에 대한 특별한 계획을 갖고 계시고, 그 고통을
들으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하갈처럼 주변인물입니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입니다. 영적인 탕자입니다. 길
잃은 양입니다. 범죄 한 인간입니다. 그렇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많이 가지고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항상 눈물과 고통이
있습니다. 이렇게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의 고통을 들으십니다. 미래의 축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4 이러므로 그 샘을 3)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나를 살피시는 살아
계신 이의 우물이라 15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우리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사랑하셨습니까?
어떤 사람은 이삭은 사랑하고 이스마엘은 미워했다고 말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도 사랑하십니다.
교회 밖에 있는 들 나귀 같은 이스마엘도 사랑하십니다. 안 믿는 사람이라고 함부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우리보다 믿음이 조금
연약하다고 함부로 정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그들에게 주님의 사랑이 전달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할 자신이 없으면 말하지
마십시오. 조용히 기다리십시오. 사랑할 자신이 없으면 돈이라도 나누어 주십시오. 은혜는 낮은 곳으로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에 주리고 목이 말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다른 곳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주리고 목말라하며 마치 배고픈 아이가 엄마젖을 허겁지겁 먹듯이 말씀을 사모하고 먹어야
합니다. 은혜의 통로인 예배를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하갈에게 흘러갔습니다.
주님! 부족한 제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배고픈 어린아이처럼 주리고 목말라 하는 우리 가족들이 되어봅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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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마엘의 출생 / 창 16:1-1
창 16: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8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4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15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하나님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자식을 한명도 주지 않으셨다. 어느덧 아브람이 90세가 되어 가고, 아내 사르는 이미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인간적인 판단으로는 아브람이 사래를 통해 아이를 낳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아브람과 사래는 하나님의 약속을 무한정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더 늦기 전에 인간적인 방법을 써서 아이를 낳을 것인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결국 아브람은 더 이상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써서 아내의 여종 하갈을 첩으로 받아드려 아이를 낳게 되었다. 그러나 이 아이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이가 아니었다. 오늘 말씀은 아브람에게 약속의 자녀가 아닌 아들이 어떻게 태어나게 되며, 그 아이가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1. 기다림의 한계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1-3절) 이스라엘 사회에서 자녀를 갖지 못하는 것은 수치로 여겨졌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로까지 간주되었다. 더욱이 후사에 대한 언약이 몇 차례에 걸쳐 거듭 반복됨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이 자녀를 얻지 못하는 것은 신앙적인 측면에서도 큰 근심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자녀 문제에 대한 아브람의 근심과 잘못 선택한 해결 방법은 아브람의 가정에 큰 우환을 가져다주었으며 또한 아브람의 신앙에도 엄청난 마이너스 요인이 되었다. 하나님의 언약을 성급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루려는 자는 누구나 이와 같은 실수를 범하게 마련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이 택한 시기에,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아마 하갈은 아브람이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갔을 때 사래로 인해 얻은 종으로, 사래가 바로의 아내가 되는 것을 용납한 대가로 바로에게 하사받은 종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한편 하갈이란 이름이 ‘도망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이 이름은 하갈이 사래에게서 도망한 뒤에 붙여진 듯하다.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는 사래가 자신의 불임 원인을 순전히 하나님께 돌리고 있음을 알려 준다. 그렇다면 사래는 분명 불임케 하신 하나님의 뜻이 과연 무엇인지 진지하게 묻거나, 언약하신 대로 자신의 태를 열어주실 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려야 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신앙적 방법보다도 스스로 그 약속된 바를 성취하려는 인간적 방법을 취함으로써 마침내 가정적으로, 민족적으로 비극의 화근을 만들어 놓고 말았다. 아브람이 하갈을 첩으로 삼게 된 주요 원인은 사래에게 있었다.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사래의 이런 권고 이면에는 비록 인간적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 성취를 위한 열심이 강하게 깔려 있다. 사실 후사에 대한 언약이 그녀 자신을 통해 성취될 것이라는 어떤 조짐이나 암시는 지금까지 전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인간적 편법으로서 그 언약을 이루려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언약 성취의 방법에 대한 고려는 배제한 채 단순히 언약 성취의 목적에만 집착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래가 당시의 관습에 따라 여종을 남편에게 권한 것은 당시로서는 사래가 취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래가 후에 하갈과 그녀의 아들 이스마엘로 인해 멸시를 받고 크게 고통당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 성취를 인내로써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조치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주의 언약을 신뢰하면서도 이를 성급하게 인간적 방법으로 이루려는 것이 우리 성도들이 가장 손쉽게 범하기 쉬운 잘못이다. 실로 인내하며 겸손히 주의 뜻을 기다릴 줄 아는 자가 온전한 신앙 인격자라 할 수 있다.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여기서 ‘얻는다’는 말의 히브리어 ‘바나’는 ‘세우다’는 뜻이다. 여기에 사래가 하갈이 낳은 아이로 인해 계속해서 집안을 세워나갈 수 있기를 갈망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즉, 당시 축첩 제도가 유행하던 시대에는 첩이 낳은 아이도 본부인의 자녀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본문은 당시의 결혼 제도와 축첩 제도의 한 단면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당시의 이런 제도들은 성경의 결혼 원리인 일부일처 제도와는 상반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 이전 시대 구약의 여러 족장들 사이에 일부다처가 유행한 것은 이를 하나님께서 적극적 측면에서 인정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이 정례화 되기 이전 시대까지 제한적으로 묵허해 주신 것뿐이다. 한편 이들 족장들이 일부다처로 인해 오히려 가정적으로 불화를 겪었다는 사실은 이 제도가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주는 것이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는 아브람이 사래가 권고에 거부의사 없이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결국 이 말은 아브람 역시 사래의 저급한 신앙 수준과 동일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첩의 소생으로 인한 가정적 불행은 두 사람 모두에게 책임 지워져야 마땅하다. ‘십 년 후였더라’는 아브람이 하갈을 첩으로 취할 때의 나이가 85세라는 말이다. 이때 사래의 나이는 75세였다. 따라서 아브람은 후사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 있은 후 10년 동안 언약의 성취를 기다렸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실상 하나님의 언약은 이로부터도 15년이 지난 후였다. 이런 일련의 기간들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엄청난 기간들이 아닐 수 없다. 아마 하나님께서 이런 오랜 공백 기간을 두신 것은 이 기간을 통해 인간이 스스로의 연약함을 깨닫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는 신앙의 훈련을 쌓게 하기 위함이었다. 2. 갈등의 원인이 생기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4-6절) 아브람으로부터 임신하게 된 하갈이 사래를 멸시했다. 히브리인의 관념으로는 불임은 매우 치욕적인 일이요, 많은 자녀를 얻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되었다. 본문의 하갈이 자신의 신분을 생각지 못하고 여주인을 하찮게 생각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녀는 심지어 정부인의 자리까지 넘보았을지 모른다. 여하튼 이 같은 사실은 마치 브닌나가 무자(無子)한 한나를 멸시하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사래는 자신이 멸시받는 원인이 그녀 자신에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남편 아브람을 원망하였다. ‘내가 받은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기를 원하노라’ 사라는 아브람에게 하나님 앞에서 잘잘못을 가리자고 요구했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남발하는 불신앙적인 행위이다. 믿음의 여성 사래가 이런 엄청난 실수를 범한 것은 하갈의 멸시를 견디지 못하고 분한 마음으로 성급하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급하게 발하는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이에 대한 아브람의 답변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라고 했다. 아브람은 하갈의 원래 신분이 일개 ‘종’에 불과함을 강조했다. 이는 필요에 따라 인간을 이용하려는 인간의 악한 본성이 내재된 발언이다. 이어지는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는 문자적으로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여 가정의 화평을 되찾기 위한 아브람의 적절한 조치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가정의 전권을 쥔 자로서 책임을 회피하려는 나약한 일면을 간과할 수 없다. 더욱이 장차 태어날 자신의 후손을 배태한 여인을 홀대하는 부도덕성도 묵과할 수 없다. 하나님의 뜻과 배치된 일은 이처럼 그 시작에서부터 그 결말에 이르기까지 고통과 비극을 산출해낸다. 사래는 다시 한 번 더 불신앙적인 잘못을 범한다. 즉, 하갈을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승낙을 얻어낸 사래는 분을 못 이겨 하갈이 자신을 멸시한 것에 맞먹는 학대와 멸시를 가하였다. 아마 이때 가한 학대는 천한 노예로서의 인격적인 수모와 또 옷을 찢는 등의 육체적인 모욕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 범하는 대부분의 잘못은 자신의 마음을 조용히 성찰하거나 인내하며 다스리지 못하는 순간적이고 감정적인 실수에서부터 발생한다. 그래서 잠언은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라고 교훈한다. 예민한 두 여인의 감정싸움은 마침내 여종 하갈의 도피로 일단락 지어졌다. 그런데 이 도피 이면에는 아브람과 사래를 통해 언약의 후손을 이루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깊은 개입이 있었다. 실로 인간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신실하신 언약의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축복이 되게 인도하셨다.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7-9절) ‘여호와의 사자’는 누구를 가리키는 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천사라는 견해, 둘째,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견해, 셋째, 성령이라는 견해, 넷째, 예수 그리스도라는 견해, 그런데 구약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로서 경배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단순히 부림 받는 영으로 피조 된 천사와는 다르다. 반면에 여호와의 사자가 성부 하나님 자신이 될 수는 없다. 이는 죄인은 하나님을 직접 볼 수가 없다. 또 ‘사자’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말라크’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성부 하나님 자신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호와의 사자는 성령 아니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어디에도 불가시적(不可示的)인 성령이 인간으로 현현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여기셔 넷째의 견해를 취해야 할 것이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같은 신성(神性)을 가진 분으로 경배받기에 합당한 존재이며, 그는 신약에서 뿐 아니라 구약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 구약의 역사에서도 일일이 구속사에 간여하셨다. 이상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하갈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는 구약에서 역사하신 그리스도의 현현으로 이해함이 무난하다. ‘광야의 샘’은 유목민이나 대상(Caravan)들이 즐겨 찾는 일종의 오아시스(Oasis)로 이곳은 사람이나 가축이 목을 축이며 잠시 쉴 수 있는 간이 시설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여기서 ‘술 길 샘물’은 팔레스틴 남서쪽에서 아라비아 광야 북서쪽으로 난 대상로(隊商路)를 말한다. 이 길은 애굽으로 통하였으며 거기에는 대상들에게 널리 알려진 샘물이 있었다. 아마 하갈은 사래의 학대를 피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 했을 것이다. ‘사라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는 하나님의 사자가 하갈의 행선지를 몰라서 물은 것은 아닐 것이다. 이는 아마 하갈에게 자신의 행위를 한 번 더 돌이켜 보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즉, 하나님의 사자는 이 질문을 통해 주인에게서 도망하는 것은 노예로서 바람직한 행위가 아니며, 또 다시 우상과 죄의 상징인 얘굽으로 향하는 것은 옳지 못함을 깨닫게 하려 했을 것이다. 하갈은 아무도 자기를 알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자기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는 분이 계시다는데 놀랐을 것이다. 하나님은 하갈에게 가장 안전하고 쉬운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아브람의 집에 돌아가서 복종하라는 것이다. 다시 여주인 사래에게 돌아가서 잘못을 빌고 직무에 충실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 이래 오늘날까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라는 실존적 질문을 통해 그릇된 삶의 방향을 향하고 있는 인간들을 당신의 품으로 모아 들이신다. 각자가 이 물음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그의 영원한 미래의 ‘어디’가 결정될 것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10, 11절)
비록 하갈의 아들에게서 생겨날 자손들이 언약의 후손은 아니었지만 이들 역시 아브람의 후손들이었기 때문에 아브람의 자손들을 번성하게 하시겠다던 주의 약속이 적용되었다. 이 약속에 근거하여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은 12족속에서부터 생겨난 오늘날 아랍 족속들의 조상이 되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이름이 먼저 고지(告知)된 첫 번째 예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아이의 이름을 지시해 주실 만큼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신 것은 그 아이가 아브람의 한 혈통을 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스마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로서 하나님께서 하갈의 탄식을 듣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주신 아들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라’ 고통 중에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되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하나님께서 하갈이 아브람의 가족들에게 학대당함을 보시고 긍휼히 보셔서 자비를 베푸셨다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죽임당한 아벨의 핏소리를 들으시고 가인을 벌하신 것과도 같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땅에서 억울하게 학대받는 자들의 고통을 외면치 않으시고 감찰하사 도우시는 분이시다. 특별히 주의 백성이 당하는 고난은 그 자체가 기도이므로 더욱 분명히 도우실 것을 확신할 수 있다. 3. 들나귀 같은 이스마엘의 출생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12절) ‘들나귀’는 히브리 시(詩)에서 광야를 종횡 무진 누비며 매우 자유분방하게 사는 자를 비유하는 표현이다. 따라서 이면에는 매우 거칠고 난폭한 자에 대한 상징적 의미가 담겨있다. 이러한 들나귀 같은 특성은 오늘날 중동 지역의 각지에 흩어진 베 드윈족(Bedouin)을 위시한 여러 아랍 계열 사람들에게서 잘 나타난다.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는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끊임없이 이웃과 불화할 것을 예언한 말이다. 사실 이들은 이후 성경의 역사에서부터 근세,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가장 잔악하고 난폭한 방법으로 이웃 족속과 국가를 유린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나 이외엔 모두 적이라는 아랍인들의 공통된 인식은 이들의 침략 근성을 잘 대변해 준다.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에서 ‘대항’은 ‘면전’(面前)으로 해석함이 좋다. 결국 이는 이스마엘의 후예들이 이스라엘 족속의 면전에서 살게 된다는 예언적 표현이다. 이 경우 이스마옐 후손은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 앞 어디에나 당당하게 일정한 영역을 점유하고 살게 된다는 뜻이 된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아랍계 족속들이 팔래스틴을 중심하여 북아프리카, 시리아, 중동, 서아시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에 흩어져 어엿한 국가를 건설하고 있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13-16절)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엘 로이)으로 직역하면 ‘지켜보시는 하나님’이란 뜻이다. 이는 주인의 학대를 피해 애굽으로 도망가던 하갈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뒤 감사와 겸허한 자세로 고백한 하나님의 성호(聖號)이다. 이처럼 광야에서 방황과 고통에 처해 있는 하갈에게 나타나 위로와 소망을 주신 하나님은 오늘날도 여전히 황량하고 메마른 세상에서 갈등하고 방황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과 은혜의 복음으로 초대하셔서 하늘나라의 무한한 축복과 소망의 길로 인도해 주신다.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는 하나님의 사자를 뵙고서도 살 수 있었던 하갈의 경이로운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방황하고 고심하는 자신에게 찾아와 위로와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기념하기 위해 하갈이 그곳에 있던 우물에 ‘브엘라해로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즉, ‘살아계셔서 나를 살피시는 자의 우물’이란 뜻이다. 이 우물은 가데스 바네아 북서 20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 아랍인 사이에서 ‘모일라히’(Moilahi)로 불리는 곳에 있는 ‘아인 가데스’ 샘으로, 오늘날도 아랍인들은 이 우물을 ‘모일라히 하갈’(Moilahi Hagar)이라 부른다. 하갈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지하여 다시 아브람의 집으로 돌아갔고 거기서 아브람의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비록 아브람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육체를 따라 난’ 육의 자손이었다. 이는 비록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는 자들 가운데도 언약의 백성이 아닌 육의 자손들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결국 구원은 혈통적 유산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해 내려진 은혜임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된다. 아브람의 나이는 전 생애를 통해 단 5번 나타난다. 즉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이를 시점(75세, 12:4),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86세, 16:16), 이삭의 출생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 언약이 주어진 때(99세, 17:1), 이삭이 출생했을 때(100세, 21:5),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브람이 사망했을 때(175세, 25:7)이다. 그런데 이러한 아브람의 나이에 관한 기록은 모두 아브람의 생애를 통해 중요한 신앙의 전환점과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따라서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여기에 언급된 아브람의 나이는 자손에 대한 언약이 있은 후 11년 만에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당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아브람의 신앙 상태를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Insight> 오늘 말씀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통찰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아브람과 사래의 인간적인 방법을 통한 하나님의 언약 수행과 그로 인한 실패와 갈등은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은 반드시 하나님의 섭리와 방법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과 나아가 인간의 섣부른 지혜와 방법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의 시작이 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우리는 겸손히 인내로써 하나님의 손길을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 이것이 가장 빠른 문제 해결의 첩경이요, 동시에 가장 확실하고도 은혜로운 문제 해결이 된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하자. 둘째, 아브람과 사래의 불신앙적 태도로 인하여 수천 년간 끊임없이 분쟁의 씨가 된 이스마엘이 탄생하게 된 사실에서 우리의 불신앙적 태도는 그 자체로 엄청난 비극적 고통을 내포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신뢰하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할 것이다. 셋째,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사래 등 당신의 택한 백성들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러한 인간적 실수를 승화시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방편으로 삼으신 사실에서 하나님의 섭리의 오묘함을 발견함과 동시에 택한 백성의 어떠한 범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속사는 반드시 성취할 것을 확신하게 된다(마 6:10). <묵상과 나눔> 1. 믿음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다가 인간적인 방법을 택할 때 금방 좋은 결과가 나타난다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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