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4:1-42)
이제 우리는 유명한 본문인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에 이르렀습니다. 원래 본문은 4-38절입니다. 그 전후 문단은 주제가 다르지만, 이것이 이 대화와 간접적으로 연관되었고, 큰 단락으로 분류하기에는 너무 짧아서 편의상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라는 큰 단락 속에 편입했습니다. 1-3절에서는 예수님이 왜 유대를 떠나 사마리아로 오시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며, 39-42절은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를 받은 사마리아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전체를 연구하면 4장의 모든 사건이 잘 연결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목차:
4.1. 예수님이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다(4:1-3)
4.2. 물을 좀 달라(4-9)
4.3.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10-18)
4.5. 사마리아 여인의 회심과 그 결과(27-30; 39-42)
우리는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1-3절을 별도의 단락으로 구별하여 연구하고자 합니다. 잘 관찰하면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 중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습니다.
4.1. 예수님이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다(4:1-3)
1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7)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b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그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면 자발적으로 그분만을 위해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 그분을 알게 되면, 그분을 정말로 알게 된다면(“네가 만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10), 그분을 알게 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알고 버립니다. 그러면 그분의 거룩하심과 아름다움이 항상 나의 마음을 끌므로 나는 그분을 향하게 됩니다.
이 그리스도를 아는 길은 성경에 계시되어 있고, 우리가 바로 전에 배운 니고데모와의 대화에, 그리고 세례 요한의 증거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이제 몇 주에 걸쳐 배울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방식이 여러 가지 면에서 상당히 독특합니다. 감동이 없이는 읽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대화를 잘 연구함으로써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그분께 감동하여 그분만 사랑하는 제자가 되고자 합니다. 우리의 모든 욕망, 헛된 망상, 죄 된 편향을 버리고, 또한 이론화된 성경 지식을 넘어서 우리 메시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자 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자유인이 되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되고자 합니다.
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하겠는지라”는 소위 신적인 “muß(must)”입니다. 즉,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통해 갈릴리로 가시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그분의 뜻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유대에서 갈릴리로 갈 때 사마리아로 질러가지 않고 항상 요단 강 계곡을 따라서 갑니다. 그러면 훨씬 멀므로 시간이 많이 듭니다. 어차피 사마리아인들도 유대인이 자기 영역에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참조: 눅 9:53).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적대적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이들도 구원의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나중에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사마리아를 전도하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께는 모든 사람이 사랑과 구원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a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님은 수가라는 동내에 이르셨는데, 요한은 그 지역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이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묘사입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수가로 오자 바로 자기 조상 야곱과 요셉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어느 민족에게 일어났던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은 그 민족의 사고와 의식을 형성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저는 진주의 촉석루에 가서 논개를 생각하고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다. 중국 심양에 가서는 우리 선조들이 이곳에서 국가를 이루어 살았고 독립군들이 활동했던 것을 기억하자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물며 이스라엘의 조상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던 야곱과 요셉이 관련된 지역에 갔던 제자들은 그곳에서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겠습니까? 이들은 난생처음 그 그리던 조상의 땅을 밟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이르시니”라는 동사를 인상적인 “이르신다”라는 현재형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또한 8절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만 남기고 전부 동네로 간 것을 이런 배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만큼 호기심도 컸을 것입니다.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창 32:29), 그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좀 더 친근한 조상입니다(참조: 사 58:14; 호세아 12장; 요 4:14; 롬 9:13). 그의 이름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자주 „야곱의 집“이라고 합니다(눅 1:33; 행 7:46; 롬 11:26). 그의 이름은 자주 아브라함, 이삭과 함께 나오며(마 8:11; 22:32; 행 3:13; 7:32; 히 11:9), 또한 때때로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심인물 중의 하나로서 혼자 나타나기도 합니다(마 1:2; 행 7:8 이하; 히 11:21). 고대 유대교에서 야곱을 아브라함보다 더 높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낳고, 이삭은 에서를 낳았다. 야곱에 가서야 흠이 없는 열두 지파를 낳았다“(bSchabbat 146a).
야곱의 이야기 중에서 이곳에서는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언급됩니다. 이것은 창 33:19; 48:22에 나오는 땅을 말한 것 같습니다: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세겜 땅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창 48:22). 수 24:32에 따르면 (애굽으로부터 가지고 온 요셉의 유골을) 요셉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땅인 그곳에 장사 되어 묻혔습니다(참조: 행 7:16). 그곳에 야곱이 „우물“을 팠다는 것은 구약성경에 나오지 않으므로 지금 4:12에서 처음으로 듣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사마리아인의 구전일 것입니다. 어쨌든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에게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한순간에 머리에 떠올라 큰 감회에 젖었을 것입니다.
„수가“ 및 „야곱의 우물“은 옛 세겜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이 옛 세겜은 오늘날 아랍어로 나블루스라고 하며, 수가는 아스카르라고 합니다. 요셉의 무덤과 야곱의 우물 사이에는 약 300미터 떨어졌습니다. 모슬렘도 요셉의 무덤을 성지로 여깁니다. 이 우물 위에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그때는 아마도 콘스탄틴 황제 시절이었을 것입니다. 이 우물 근처에는 사마리아인이 거룩한 산으로 여기는 그리심 산과, 성경이 저주받은 산으로 여기는 에발 산이 있습니다(창 27:11 이하). 요한이 이렇게 지명을 자세히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그가 지리에 매우 밝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6b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더운 지역인 팔레스타인에서 우물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구약 여러 곳에 우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조상 이야기에서도 우물은 큰 역할을 했습니다(참조: 창 21:19,25 이하; 24:11 이하; 26:15 이하). 이스라엘 사람에게 우물가는 무언가 로맨틱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물가에서 야곱이 라헬을 만났고, 모세가 십보라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자와 예수님과의 만남은 로맨틱과는 전혀 반대되는 일이지만, 그녀가 진정한 남편을 만났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합니다. 여러분도 이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남편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출 2:15에서는 모세가 바로를 피하여 미디안 땅에 가서 “우물 곁에 앉았더라”고 합니다. 이 장면 묘사는 지금 예수님의 경우와 똑같습니다. 이것은 우물 둘레로 넓은 돌이 깔렸으므로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께서 …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라고 합니다.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님은 „피곤하시고, 힘이 다 빠지시고, 녹초가 되시고, 매우 슬퍼하신 분으로“ 묘사합니다(참조: 마 26:38; 막 4:38; 눅 22:44). 그분은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셔야 합니다(히 2:17).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의 고난을 이해하십니다(참조: 마 11:28; 사 50:4). 요한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매우 강조해서 나타냈지만, 또한 예수님의 낮으심도 강조했습니다(참조: 19:5). 그분은 진정한 인간이면서도 진정한 하나님이시라는 것, 이 두 가지 모두 요한복음의 메시지입니다.
1:39에서와같이 요한은 정확한 시간을 알려줍니다: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이것은 오전 11-12시를 말합니다. 5-6에서 지명을 정확하게 말한 것과 같이 시간까지도 정확하게 알린 것은 목격자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7절은 많은 의미가 담긴 말입니다. 예수님은 피곤하셔서 우물 곁에 앉으셨는데, 한 여자가 물동이를 지고 자기 쪽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때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9절에 따르면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보통 유대인 랍비라면 불쾌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모처럼 그늘에서 좀 쉬려고 했는데 사마리아인이 나타나는구나. 더구나 여자가!” 그리고 그는 여자를 피해 다른 곳으로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과는 전혀 다르십니다.
요한은 한 여자가 온다고 하지 않고 “사마리아 (사람) 한 여자”가 온다고 함으로써 그 여자가 사마리아 여자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한 여자라고 할지라도 당연히 사마리아 여자로 알아들을 것이지만, 이렇게 표현한 것은 독자가 뒤에 나오는 대화의 특징을 잘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것입니다. 특히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는 요청이 매우 뜻밖이며, 그 여자의 반응이 당연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물을 좀 달라!“ 이러한 요청은 겉으로 보면 이해할만한 것이며. 이것을 통해 예수님이 지치셨을 뿐만 아니라 목도 마르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특기할만한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남자요 랍비로서 자매에게 말을 걸으셨다는 것입니다. 유대인 랍비라면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이 없는 곳에서(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 남자가 여자에게 말 거는 것은 풍습에도 어긋납니다. 그러나 구원자의 사랑은 이러한 풍습을 넘어갑니다. 둘째는, 그분은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에 설정한 경계선을 넘으셨다는 것입니다(9). 즉, 예수님은 남녀의 경계선과 민족 간의 경계선을 넘어서신 것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자로서의 사랑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비록 목이 마르셨지만, 그것 때문에 말을 거신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 랍비라면, 그 여자가 그를 불쌍히 여겨서 자발적으로 물을 제공했다고 할지라도 “네가 감히”라고 화를 내며 거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움을 영접한다는 것은 도움을 준 사람의 호의를 인정한다는 것이며, 그와 함께 그 사람을 영접한다는 표시가 됩니다. 보통 사람은 자기와 상대할 정도가 못 되는 사람에게서 도움을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여자는 이러한 것을 알기 때문에 이 한 마디가 꽉 닫힌 그녀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여자는 자기를 조롱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그래? 마셔라!” 하면서 물을 길어서 그 앞에 물을 부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요청은 겸손과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존중을 나타냅니다. 무엇보다 겸손하심이 잘 드러납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아쉬워서 소문난 죄인에게, 자기를 낮추고 부탁을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친애하는 여인이여, 나에게 도움이 필요한데, 나를 좀 도와줄 수 있겠소?”라고 청원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자기 낮춤은 사도들을 매우 감동시켰습니다. 이들은 메시아 왕국에서 재상이 되어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고 했으나(“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마 20:21), 나중에는 매우 겸손하게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겸손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특별히 빌립보서, 고린도후서). 우리가 이러한 예를 예수님으로부터 체험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결코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신 분이 마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처럼 겸손하게 교만한 죄인에게 오십니다.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그 „여자“는 두 가지 면에서 좀 놀랐습니다. 1) 여자로서 남자의 청을 받는 것과 2) 무엇보다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무엇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녀가 „어찌“ 이것을 이해하겠습니까? 유대인의 옷은 소매에 긴 옷자락이 있었으므로, 그가 유대인이라는 것이 쉽게 드러납니다(민 15:38; 신 22:12).
그럼에도 그녀가 대답을 한 것은 마음이 조금은 열렸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아마도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다른 사람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을 것입니다. 동족도 자기를 무시하는데, 유대인 랍비가 말을 건 것은 그녀에게 참으로 신기한 사건입니다. 굳게 닫힌 이 여인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분은 예수님 외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비통하고 절망하여 마음이 닫혔을 때에도 찾아갈 수 있는 분이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거나 도울 사람이 없는 절망 가운데서 신음처럼 내는 기도 소리를 주님께서 들으십니다.
그럼에도 의심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솔직하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이렇게 해서 대화가 시작합니다. 이렇게 자비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꽁꽁 얼어붙은 한 여인의 마음을 여셨습니다. 여기에 겸손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도 한몫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 마음 문을 두드리실 때에는 우리가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반대로 이러한 예수님께 마음을 닫는 사람은 마음이 단단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인격적인 대화를 시작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계속되는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정말로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찬양을 드리며, 우리 마음을 활짝 열어서 항상 그분을 맞이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심판자가 아니라 구원자로서 문을 두드리실 때 얼른 문을 열어야 합니다(참조: 계 3:20). 예수님의 겸손하심과 사랑은 가장 굳게 닫힌 마음까지도 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드러움과 사랑이 바로 그분의 능력입니다.
사마리아
유대인과 사마리아인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마이어의 마태복음 주석을 그대로 인용한다:
시락서(집회서) 50:25-26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나 자신이 혐오하는 민족이 둘 있고, 셋째 것은 민족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들은 세일 산에 사는 자들(에돔)과 블레셋인들 그리고 세겜에 거주하는 어리석은 백성(사마리아인)이다.“ 비록 집회서가 기원전 175년에 쓰였지만, 이러한 관점이 예수님 당시에도 유효했을 것이다. 이러한 혐오감은 어디에서 왔을까? 이것을 알려면 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기원전 722년에 앗수루 왕 사르곤 2세에 의해 사마리아가 정복당하여 북 왕국이 멸망하자, 정복자들은 다른 나라의 피정복민을 그곳에 보내어 민족을 섞었다. 이로써 남아있던 이스라엘 사람과 다른 민족이 섞여 사마리아인이 탄생했다(참조: 왕하 17:24 이하). 이들은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을 견지하면서도 여기에 이방 종교 요소를 섞었다(왕하 17:27 이하). 유대인이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왔을 때, 사마리아인은 이들을 도와 함께 성전을 지으려고 했으나, 유대인이 이것을 거절했다(스 4:1 이하).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사마리아인이 예배를 우상숭배와 섞었다. 2) 사마리아인은 이방인과 피가 섞였으므로 결혼에 관한 율법을 어겼다(에스라 9장과 느헤미아 13장). 그 이후로 사마리아인은 예루살렘과 성전 중건을 방해했다(스 4:4 이하; 느 3:33 이하; 4:1 이하; 6:1 이하). 이들은 세겜 근처에 있는, 신 11:29; 27:12와 수 8:30 이하에서 언급한 축복의 산인 그리심 산 위에 자기들 성전을 세웠다. 유대의 왕 요한네스 히르칸이 기원전 128년에 이 성전을 부수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적대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비록 이 성전은 재건되지 않았지만, 그리심 산은 이들에게 여전히 거룩한 산이었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리고 66-73년의 유대-로마 전쟁 직전에도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피를 흘리는 싸움이 있었다(참조: 눅 9:52 이하). 그럼에도 상호간에 약간의, 특히 상업적인 관계는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에게 우호적이었다(참조: 눅 10:33 이하; 17:11 이하). 오늘날에는 그리심 산기슭에 있는 고대 도시 니블루스에 사마리아인이 극소수 민족으로서 약 250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아직도 이들은 이 산 위에서 매년 유월절을 지낸다.
4.3.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10-18)
요절: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4).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0절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은혜로운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그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청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이곳에서 드러납니다. 그것은 그분이 생수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부터 필요하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도 그 여자에게 물 한 방울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것이 우리에게 꼭 필요하고 가장 중요한 것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서 생명을 넘겨 달라고 요구하시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을 주시고자, 부탁하는 자로서 다가가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것을 그냥 주시지 않으셨을까요? 왜 그녀가 구하기를 기다리셨을까요? 구원을 포함한 모든 은사는 우리가 구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 원칙입니다. 왜냐하면 소원이 없는 자에게 아무리 좋은 것을 주어도 그것을 귀하게 여기지도 않고 사용할 방법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맹인과 같이 하나님의 은사를 모르고, 돼지와 같이 불결하고 무례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은사를 주시기 전에 먼저 은사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을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받으라고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10절의 의미입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그 여자는 하나님의 은사를 전혀 모르므로, 예수님은 그녀를 이해시키고자 생수와 그 은사를 연결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이것은 교육적인 표현입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한 사람을 전도할 수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가르치십니다.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기에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그를 진정한 축복으로 인도하시려는 구원자의 간절한 마음이 실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이렇게 구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제 인간이 그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고 원해야 합니다. 원하지 않으면 구원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노력은 무산됩니다.
이 문제가 중요하므로 반복해서 말한다면, 하나님은 죄인에게 모든 좋은 것과 하늘의 은사를 제시하십니다. 이것은 분명히 거저 주는 선물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물을 드린다는 조건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거저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그 은사의 귀중함을 모르므로, 예수님은 그녀가 가장 알기 쉬운 방법으로, 그녀의 마음을 끄는 것인 생수라는 말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주는 이 선물을 네가 받아주었으면 참 좋겠다”고 하십니다. 마틴 루터는 이러한 것을 하나님의 유혹(locken: 꾀다)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해서 의미를 밝게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이 굳게 닫힌 죄인의 마음을 움직이시고자 신적인 지혜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여자처럼 하나님의 은사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자연인은 오히려 이것을 거북하게 여기고 이에 대적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은사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설명하셔서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이것이 이 여인과의 대화의 초점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보통 자기 삶에만 관심이 있거나, 종교적인 만족을 구할 뿐입니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은 교회에 와서 말씀과 은혜의 소비자가 됩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 받아 기뻐하지만, 하나님의 은사가 정말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하늘의 은사를 보이시면서 이들의 마음을 끌어당기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를 미끼(?!)로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무한한 은사인 죄 사함, 깨끗해짐, 그리스도와의 교제, 영생, 부요함을 생수에 비유하셨고, 그 여자는 자기가 매일 마시는 물과 생수를 비교함으로써 그 우물물보다 더 좋은 생수에 관심을 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나에게 생수를 구하라, 그러면 그것을 원하는 이상으로 주겠다. 그것이 너에게 넘쳐 흐르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당사자가 예수님에 의해 설득을 당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네가 만일 … 알았더라면”이라는 조건절을 붙이십니다. 만약 그 여인이 하나님의 선물이 얼마나 큰지를 알았더라면, 그리고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즉 그분이 하나님의 선물을 쏟아부어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 여자는 당장에 그 모든 것을 달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이것이 무엇인지 상상도 할 수 없었으므로 예수님은 “생수”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그녀가 예수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생수”를 주신다는 말씀에 귀가 좀 열린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물을 마음대로 마시는 것이 소원인데, 더 좋은 생수를 주신다고 하니 예수님께 관심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그가 그 생수를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는지를 질문한 것입니다. 어쨌든 그녀는 이제 생수를 갈망하는 마음이 생겼고, 예수님에게는 이 생수와 하나님의 은사를 연결해서 이 여자가 이것을 이해하도록 하시는 것이 앞으로 대화의 과제가 됩니다. 우리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분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한 가지 신학적인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본문을 문맥에 따라 자연스럽게 해석했으므로 전혀 무리가 없지만, 신학적으로는 모순되는 면이 있습니다. 인간의 의지는 완전히 타락해서, 아무리 하나님이 그에게 은사를 주셔도 받을 생각도 없고 받지도 못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어거스틴의 전통에 따른 것이며 루터가 가장 깊게 다룬 문제이며 칼빈이 이것으로 어거스틴으로 돌아가 예정론을 가르쳤습니다. 저도 노예의지를 믿습니다. 하나님이 하지 않으시면 어떤 인간도 구원을 원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종교개혁 신학의 기본 전제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인간이 은혜를 영접해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종교개혁 신학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영접하는 마음까지도 불어넣어 주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이들이 결정론을 가르치는 것입니까? 바로 이것을 피하고자 이들은(특히 청교도) 인간의 책임을 강조해서 가르침으로써 균형을 이루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신학적인 논쟁을 피하여, 이곳에서 인간이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을 가르쳤다는 것만 부각합니다. 만약 그 여자가 “생수”를 주겠다고 하신 약속을 거절했다면 원칙적으로는 그녀는 생수를 받지 못합니다. 이것만은 분명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늘 삼가서 그리스도의 선물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한 번 놓치면 영원히 놓치는 것으로 여기고 살아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이번이 일생 단 한 번 있는 기회입니다.
이 대화가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좀 어렵지만, 나중에 이 글을 읽을 유대인이나 구약을 잘 아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좀 더 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하나님과 연관하여 생수라는 말이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이스라엘이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버림!)…”(렘 2:13). 또한 슥 14:8에는 메시아 시대에 성취될 엄청난 약속이 있습니다: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예수님이 바로 이 일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부활 이후에 성령님을 통해 이 모든 것을 넘치도록 주십니다(사도행전 2장). 죄 사함을 통해 사람을 완전히 새롭게 하시고, 영생을 주시고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와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의 약속을 주십니다.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그 여인은 예수님의 약속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사랑스러운 태도와 온화함에 더는 경계심을 가지지 않고 실제적인 문제를 생각했습니다. 즉, 예수님이 이 우물에서 물을 길을만한 여건도 갖추지 못하셨는데, 그보다 더 귀한 생수를 어디에서 구하겠느냐는 질문입니다. 실제로 중동의 우물은 상당히 깊습니다. 물이 많은 한국에서처럼 우물 파기가 쉽지 않으므로 몇십 미터를 파야 지류에 도달합니다. 양동이가 있어도 쉽게 물을 퍼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는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을 깊은데”라고 합니다. 그 여자는 매일 수고해야 물을 얻을 수 있는데, 예수님은 빈손으로 생수를 어떻게 얻겠느냐는 것입니다. 생수는 우물물이 아니라 물의 근원으로부터 밖으로 흘러내리는 물을 말하는데, 그 주위에는 그런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이러한 예수님의 약속을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는 깊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생수를 주신다는 분은 지금 랍비의 옷을 입고 점잖게 앉아계십니다. 그러한 분이 어떻게 생수를 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 분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물 길을 그릇”조차도 없습니다. 그가 어떻게 사마리아 여인을 도와줄 수 있겠는가? 나에게 도움이 급히 필요한데,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겠는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지금 죽어가는 나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으며 심지어 구원하시겠는가? 이러한 종류의 질문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 대화는 당장에 문제 해결을 위해 도움이 될만한 것을 예수님에게서 찾지 못하는 많은 사람의 무지와 실명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가장 좋은 것과 영원한 것을 주신다고 약속하시지만, 우리 눈에는 그분에게서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대부분 사람의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들은 계속 어둠 속에서 헤맵니다.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2절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녀는 갑자기 „우리 조상 야곱“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당신이 그 야곱보다 더 큽니까?” 즉, 당신은 아무것도 없이 그러한 물을 준다고 했는데, 대단한 능력으로 자기 가족과 가축에게도 먹인 야곱보다 더 능력이 많습니까? 당신은 대단히 특별한 분입니까? 질문 형태로 보아서는 그렇지 않다는 대답이 요구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가능성을 열어놓았습니다. 야곱은 사마리아인들도 숭배하는 위대한 조상입니다. 야곱보다 큰 자라면 그러한 능력이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대화 주제가 이제는 물이 아니라 누가 더 큰가의 질문입니다. 질문이 엉뚱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서에서 이러한 부류의 질문과 진술이 많이 나오므로, 고대인은 이러한 표현을 즐겨 사용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8:53: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참조: 마 12:6,41-42; 마 22:41 이하; 요 8:58).
대화 주제가 형이하학(물)에서 형이상학(더 큰 분)으로 전환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은 영적인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다: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로써 우리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표현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하십니다!
이 말씀으로써 예수님은 이 여자가 생각하고 기대하는 물과는 다른 물을 의미하신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밝히십니다. 마실 물과 영생의 은사를 연결하십니다. 15절의 청원을 보면 그녀가 아직은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지만, 그럼에도 이것이 그녀가 16절의 갑작스럽고 매우 거북한 예수님의 요구를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약속의 말씀이 없이는 15절의 청원과 16절의 요구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이 말씀은 자매가 매일 겪는 고난의 체험을 들면서 그것에게서 오는 문제를 지적합니다. 물을 아무리 마셔도 시간이 지나면 또 목마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는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갈증만 식히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마시는 사람 안에서 생수의 근원이 되어 영원토록 생수가 솟아나게 합니다! 또한 늘 이 물을 마시면서 영생에 이릅니다!
이 물을 마시기만 하면 그것이 내 안에서 생수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약속입니까! 그리고 내가 영생에 이른다는 것이! 믿음이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성령님께서 끊임없이 말씀으로 나를 새롭게 만드십니다. 나를 하나님의 진리와 거룩함으로 위로하시고 진리에 대한 갈망이 생기게 하면서 또한 그것을 채워주시고, 사랑이 샘솟게 하시고 소망으로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입니다.
그녀는 이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지라도 제자들은 잘 이해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이 메시아가 오시면 주신다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사 49:10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긍휼히여기는이가그들을이끌되샘물근원으로인도할것임이라“
사 55:1 „오호라 너희모든목마른자들아물로나아오라돈없는자도오라“
사 58: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물댄동산같겠고물이끊어지지아니하는샘같을것이라“
겔 47:1 이하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문지방밑에서물이나와동쪽으로흐르다가성전오른쪽제단남쪽으로흘러내리더라…“
이렇게 메시아께서 주시는 생수를 마시면 영혼이 완전한 만족을 얻습니다. 인간에게는 아무리 마셔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습니다. 이 갈증이 바로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해결됩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이 불행한 여자, 아무리 남자를 사귀고 의존해도 항상 부족하고 갈증이 났지만, 이제 예수님 안에서 비로소 그 타는 갈증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이 은사, 말씀을 통해 내려지는 이 은사의 물줄기는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샘 솟듯이 흘러나와 나를 새롭게 합니다. 우리는 이 물을 마시면서 영원을 향해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갈망과 채움이 없이는 영원한 구원이 없습니다.
어거스틴도 그의 고백록에서 그가 그리스도를 발견한 후에 비로소 그 오랫동안의 갈망이 그쳤다고 합니다. 이 세상이 주는 모든 것은 나를 영원토록 만족하게 못 합니다. 그 효과가 아무리 길지라도 죽음과 함께 그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빨리 그 허무함을 깨닫고 뼈저리게 느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아직 여기까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 무언가 신비한 비밀이 있음을 감지했습니다. 그분은 자기 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예수님께 청원했습니다:
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이 말 한마디에 그녀의 실존적 고통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자매에게는 물 길러 가는 것이 하나의 재미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침이나 저녁, 좀 시원할 때 물을 길러 우물가에 가서 동네 아낙네와 대화를 주고받는 것도 삶의 즐거움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가장 더운 때에 따가운 햇볕을 받으면서 땀을 흘리고 우물가에 가야 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가야 했으므로 고독을 느끼고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슬펐을 것입니다. 마음은 날로 비통해졌습니다. 그러므로 그녀의 큰 소원은 물을 길러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녀의 가장 큰 소원은 마당에 생수가 나는 물의 근원지가 터지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면 그 힘들고 마음을 상하게 하는 그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그 여자가 이러한 청을 드렸을 때 아마도 이런 정도의 바람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와 함께 무언가 다른 것이 있을 것이라는 짐작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신뢰한 것입니다. 신뢰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렇게 자기 심정을 털어놓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것은 큰 진전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도 믿음은 아직 크게 없을지라도 예수님을 신뢰하고 계속 말씀을 배우면 언젠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말씀을 순종하게 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기본적인 신뢰와 순종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또한 이러한 강한 영적 소원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주시려는 영적 은사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 은사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그 은사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귀하게 여기지 않아서 다시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그런 물을 내게 주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지금까지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이해심과 사랑이 넘쳤습니다. 그녀는 그러한 따뜻한 배려와 존중은 처음 받았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이러한 것을 받아보기 원했을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꿈꾸었을 것입니다. 그녀가 설사 그런 것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녀는 영원한 것, 참된 것,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처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녀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녀는 헛되고 헛된 것을 추구한 것입니다. 그녀가 추구한 것은 남편과 가족입니다. 그녀는 자기를 사랑해주는 남편만 만나면 세상을 얻을 것 같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행복해질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섯 번이나 이혼 및 사별했습니다. 인생에서 다섯 번 큰 실패를 겪었습니다. 그래도 혼자 살 수는 없어서 결혼도 하지 않고 한 남자와 살았습니다. 이것은 음란입니다. 동네 사람이 다섯 번 결혼한 것을 두고 그녀를 경멸한 것도 있지만, 결혼도 하지 않고 사는 것에 대해 더욱 분노했을 것입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예수님의 이 명령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남편의 부도덕을 꾸중하거나 그녀를 무안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문제를 치료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하는 것으로 보아, 지금 남자 친구도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명백합니다. 그녀의 마음은 아무것으로도 채울 수 없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여자입니까?
그러나 영적으로 본다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은 조건을 갖춘 사람입니다. 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반드시 가족을 떠나야 합니다. 예수님이 여러 곳에서 이것을 강조하셨습니다. 마 10:34-36에서는 심지어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예수님은 죄인의 구원을 위해 자기 몸을 십자가에서 희생하셨습니다. 그분은 자기에게 속한 제자도 자기만을 사랑하고 경배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마리아 여자처럼 그리스도보다 남편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그분의 정결한 신부가 될 수 없습니다. 이 면에서 사마리아 여자는 준비된 사람입니다. 남편의 사랑을 찾다가 인생의 종착역에 왔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만 안다면(„…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4:10) 그분을 영접할만한 준비가 어느 정도는 된 것(„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4:10)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행복한 가정에서 즐겁게 사는 자매보다 이 사마리아 여자는 하나님을 믿기에 더 좋은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든지 긍휼히 여기시고, 판단하시기보다는 영원한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그런데 „남편을 불러오라“는 명령은 그녀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른 것입니다. 바로 이 문제 때문에 동네 사람에게 멸시받고, 뜨거운 햇볕을 맞으면서 우물에 왔습니다. 못된 여자라면 그 정도에서 대화를 마무리하고 물을 길어 집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어쨌든 대답했습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님의 수술하려는 칼을 보고 겁이 나서 거짓말로 슬쩍 피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죄 문제에 부딪혔을 때 나타나는 인간의 전형적인 태도입니다. 화를 내지 않으면 다른 말로 화제를 돌리거나 거짓말로 위기를 넘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은혜로운 대답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이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이해하려면, 우선 „남편“이라는 말은 그리스어에서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 여자와 대조되는 남자 2) 남편. 예수님은 지금 함께 사는 동거남을 데리고 오라고 하셨으나, 그 여자는 남편의 의미로 받아들여 남편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녀에게는 실제로 남편은 없었으나 동거하는 남자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가 실제로는 남편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그녀의 대답은 반쪽 진리였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녀의 대답을 받아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의 거짓말을 인정해주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거짓말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는 대답은 그녀의 비참한 심정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이 말은 완전히 진실은 아니지만, 예수님 앞에서 자기 솔직한 심정을 토로한 것입니다. 남편처럼 함께 사는 사람에게 남편이 아니라고 할 정도면, 그에게 너무 실망하여 더는 바랄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남자 친구가 이 말을 들었다면 그도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렇게 실망하지 않으면 결코 그리스도를 찾지 않습니다. 그분을 믿을지라도 그분은 항상 삶의 뒷전에 쳐집니다. 항상 남편과 가족이 앞서고 그다음에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녀의 거짓말이 아니라 솔직한 심정을 토로한 것에 촛점을 맞추시고 „네 말이 참되도다“(18)라고 하신 것입니다.
당시 모든 것이 제한된 상황에서, 특히 자매가 자기 재능을 펼 수 없는 사회에서 남편을 통해 만족을 얻으려는 심정은 누구나 이해할만합니다. 오늘날에는 이 여인의 심정을 좀 더 확대해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남편이나 아내, 가족으로부터 사랑과 평안함이나 자기실현을 추구할 수 있고, 아니면 출세나 명예, 돈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여자에게 남편은 우리에게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것, 자아 실현“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경배(예배)의 대상입니다. 큰 교회, 성공적인 목회를 추구하는 것도 이 범주에 속합니다. 저는 솔직히 큰 교회에서 목회하는 사람을 항상 불쌍하게 여깁니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 말씀으로써 예수님은 그 여자의 상태를 다 알고 있으므로 숨길 필요가 없다는 것과, 또한 자신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임을 분명히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므로 대화가 자연스럽게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일을 매우 자연스럽게, 그리고 극도로 예민해진 그녀의 마음이 닫히지 않도록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으로, 인격적으로 하셨습니다. 더욱이 „네 말이 참되도다“라는 말씀에는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이 깊은 구원자의 사랑과 지혜가 들어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은 그녀의 부끄럽고 추한 과거를 전부 들추셨습니다. 이것을 덮어두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인간의 죄는 모두 드러나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발가벗은 추한 몸으로 예수님 앞에서 서야 합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 앞에 아무것도 숨길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스스로 마스크를 벗어야 합니다. 여자로서 부끄러움을 견디어야 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슬그머니 피하는 것은 영원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대부분은 진리 앞에서 자기 죄를 숨기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곳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신적인 지혜를 볼 수 있습니다: „네 말이 참되도다.“ 이 말씀 안에는 지금까지 그녀가 저지른 죄와 잘못을 완전히 사해주신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물론 회개를 전제로 하여). 다섯 남편을 가졌고, 지금도 음란 관계에 있는데, 그럼에도 하나님이 그녀를 받아주실 수 있다는 진정한 복음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용서와 죄 사함의 오묘한 이미와 아직의 긴장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없이는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할 수 없으며, 이와 반대로 우리의 회개가 없이는 죄 사함이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을 우리가 이론적으로 풀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을 경배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 죄 사함이 있기 전에 예수님은 그녀의 죄를 분명히 지적했습니다: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이것도 참으로 오묘한 말씀입니다. 그여자는 „나는 남편이(남자가) 없나이다“라고 한 것은 반은 거짓말이지만, 또한 반은 사실입니다. 이로써 자기는 한 남자와 결혼도 하지 않고 동거 관계에 있으므로 자기도 인식하지 못한 채 음란죄를 짓고 있음을 시인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여자는 „나에게는 남편이 없다“라는 말로써,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스스로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자기 내면의 비참함이 자기 의지에 반해서 고백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 말이 참되도다“라는 말씀은 그녀의 죄를 두둔하신 것이 아니라, 그녀의 영혼에 하신 위로의 말씀입니다. 이것으로 죄와 과오로 일그러진 그녀의 심성이 빛을 얻지 않았을까요? 어두워진 양심에 섬광이 비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가 죄를 짓고 있을 때 찾아오십니다. 우리 죄를 깨닫게 하시고, 동시에 우리 처지를 이해하시고 메시아적 사랑과 죄 사함의 은혜를 주십니다. 이러한 겸손한 메시아의 사랑이 없이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이렇게 온전히 하나님에게서 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저에게 찾아오셔서 먼저 제 죄를 사해주시지 않으셨다면, 제가 제 죄를 깨닫고 회개한다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논리로는 이해하지 못할 비밀스러운 일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예수님을 우리가 성인으로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와 비교해 보면, 이 두 분은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하는 플라톤의 작품은 그리스 원문으로 읽으면, 느낌이 번역판과 다릅니다. 그와 소피스트들의 논쟁이 매우 박진감이 있고 살벌해서 독자에게 땀이 날 정도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소위 산파의 역할을 하는데, 이것은 그의 지혜로 소피스트들이 자신의 무지와 오류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은 궁지에 몰려 땀이 나고, 어찌할 줄 모르고, 분노하고 욕설을 퍼붓기도 합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진리가 무엇인지는 소크라테스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논쟁이 아니라 사랑과 배려와 진리로 사람을 깨우쳐주시고 진정한 깨달음과 영생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이 대화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매우 잘 드러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인간과는 너무나 다르십니다. 인간의 심성으로는 예수님과 같은 분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하늘에서 오셔서 자기를 계시하셔야 우리가 겨우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이 대화가 전부 요한의 제자들에 의해 창작되었다는 신학자들의 죄가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이러한 말씀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 신학자들은 얼마나 가볍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 문제를 서서히 깨달아가고,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마음 깊이 묻혀 있던 문제를 꺼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진리를 알게 됩니다.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죄인을 어떻게 구원하시는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전형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매우 무서운 방법으로 죄를 직면시키실 수도 있으십니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알맞은 방법으로 (인격적으로) 다가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죄의 속박으로부터 풀어주셔서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주시며, 오로지 예수님만 경배하는 자로 만드십니다. 이러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은사가 그의 삶을 채웁니다: 말씀, 진리, 죄로부터의 해방, 영생, 영적 기쁨, 완전한 평안, 양자 됨, 제자의 삶, 하나님과의 화해와 교제 등. 이것이 마음에서 솟아나와 영생하기까지 이르고, 남에게도 작은 축복의 샘이 됩니다.
우리의 구주 예수님은 지금은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그분은 아직도 우리가 짓는 죄의 용서를 위해 하나님 앞에서 대언하십니다. 이는 자기 피로 우리 죄를 덮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우리가 반드시 우리 죄를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4.4.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19-26)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24)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앞에서 예수님은 대화 중에 그 여인에게 영원히 솟아나는 생수를 주신다고 약속하셨을 때, 그 여인은 그런 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정말로 그런 물을 원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물을 길을 바가지도 없었지만, 그 물을 주실만 한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을 믿기 전에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신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녀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르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그녀는 이 영원한 생수를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헛된 곳에서 생수를 구하는 한에는 영생수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녀 바로 옆에 그것이 있을지라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아픈 찌름을 받아야 비로소 그것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찌르심은 은혜입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그 죄인에 대한 최고의 배려와 이해심으로 그를 대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분임을 간접적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로써 대화는 더욱 깊어집니다.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 예배에 대한 질문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먼저 그것을 언급하신 것이 아니라, 그녀가 자발적으로 그 문제를 꺼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죄인의 마음을 움직여 스스로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정말로 인격적이고 은혜로우십니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하는 분이심을 배웁니다. 우리도 이를 통해 예배와 경배의 진정한 의미를 배웁니다. 예배가 극도로 타락한 이때에 우리는 예배의 본질을 배우고자 합니다.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이 여자는 깨달음이 깊어지면서 예수님께 이제 존경을 나타내고 „주“라고 할 뿐만 아니라 아예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그가 선지자가 아니라면 자기 사생활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매우 특별한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보통 죄인을 꾸짖지만, 예수님은 자기 죄를 꾸짖지 않으십니다. 자기의 잘못된 삶을 분명히 지적해 주셨지만, 그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임을 그녀는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이분은 나에게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신다! 그렇다면 이분은 내 영적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으시다! 그녀의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하나님은 어디에 좌정하고 계신가? 어디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 이 여자는 지금 하나님을 진짜로 만날 수 있는 장소를 물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녀로부터 바로 이 질문이 나오기를 원하셨습니다. 지금까지의 대화는 이 목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이 자매는 잠에서 깨어난 것 같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올바로 경배하는 것을 원했고 그 길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이 길을 발견하지 못한 채 삶에 허덕이다 보니 이 문제가 묻혔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예수님이 다시 찾아주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그 산은 그녀 시야에 놓여 있는 그리심 산입니다. „예배하였는데“라고 과거 형을 사용한 것은, 옛날에 그곳에 그들의 성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전에 그리심 산에 여호와 성전을 세우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유대인의 예루살렘 성전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유대 왕(마카비 왕조)이며 동시에 대제사장이었던 요한네스 히르칸이 기원전 128년에 이것을 파괴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믿음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신 11:29; 12:4 이하; 27:12와 출 3:12에서 그분을 경배하는 거룩한 처소로 지정하신 곳입니다(„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신 11:29). 그러나 그녀가 „당신들“이라고 말하는 유대인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유대인이 이에 사용하는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무엘하 7장, 열왕기상 6-8장, 역대상 21장과 28:11 이하; 역대하 3-7장; 시편의 다수의 구절.
그렇다면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그녀가 예루살렘까지 가서 예배해야 하는가? 예수님을 선지자로 여겼으므로 그분이 올바른 대답을 해줄 수 있고, 그러면 자기도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자매가 „예배하다“고 했을 때에는 하나님과 만나는 것에 관계된 모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배뿐만 아니라 경배와 찬양과 헌신 등을 포괄합니다. 내가 어디에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서 경배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계신 진정한 성전은 어디에 있을까? 그리심 산에서 혹은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이렇게 묻는 것으로 보아 그 자매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통해 그녀에게서 이러한 소원이 다시 현재화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소원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해야 내가 하나님을 올바로 경배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이 긴 말씀에서 예수님이 그녀에게 하시고자 한 말씀의 핵심이 나옵니다. 가르침의 핵심은 그녀가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이 대화에서 그 자매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얼마나 진지하게 대하시는지, 그리고 가득한 사랑과 지혜로 자기를 진리로 이끄신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를 통해 서서히 마음으로, 그리고 머리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내 말을 믿으라!“: 이 간단한 말씀의 깊이를 우리는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말을 믿어달라고 죄인에게 사정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겸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얻으시고자, 구원하시고자, 귀한 은사를 무한정(„넘치도록“) 주시고자 우리 마음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 여자 편에서 볼 때에 지금까지 자기를 이렇게 귀하게 여기고 진지하게 대해 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제 그녀의 마음은 완전히 열렸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다음에 이어지는 어려운 예수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온통 마음을 드려서 말씀을 듣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그녀로서는 (심지어 제자들에게도)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고대인에게는 신이 항상 장소에 묶여 있습니다. 신이 거하는 장소가 있고, 그가 나타나는 장소와 경배를 받는 장소도 별도로 있습니다. 근동이나 그리스에 가면 이직도 고대 신전을 볼 수 있습니다.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라고 하십니다. 이 가르침은 분명히 이 여인의 상상력을 넘어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아직 이 사실을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이들도 예루살렘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장소로서의 의미를 잃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제일 먼저 이해한 사람은 스데반인 것 같습니다(„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행 7:4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전을 파괴하게 하셨음에도, 많은 사람, 심지어 기독교 신자들도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지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성전은 더는 없습니다!
이 말씀은 우선 하나님께서는 경배를 받으실 때 장소에 구애받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에게는 민족과 국가의 구분도 없어진다는 의미로 확대 적용이 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그 „때“, 구속사의 그 시간이 오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그리고 심지어 이방인과의 구분도 없어집니다. 이방인도 유대인과 똑같이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여호와 하나님이 사마리아인, 이방인의 하나님이 되고,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은 점점 없어지고 아버지가 하나님의 호칭이 됩니다(참조: 마 6:9). 이로써 유대인의 구속사적 의미는 없어지고, 모든 사람이 어디에서나 하나님을 믿고 예배할 수 있는 시대가 옵니다. 이제 유대와 사마리아와 그외 지역으로 확장되는 선교를 통해 하나의 하나님 백성이 탄생할 것입니다(행 1:8; 8:1 이하). 이 하나의 하나님 백성에 이스라엘 열두지파도 속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메시아 시대에 가져야 할 소망입니다(참조: 9:1,13). 따라서 유대주의는 없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이 예수님 말씀은 (구약)성경과 동떨어진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솔로몬의 헌당예배 기도에 하나님에 대한 경배가 장소적으로 한 건물에 제한되어 있지 않다는 내용이 있습니다(왕상 8:27). 선지자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더욱 깊이 다루었습니다(사 66:1; 말 1:11). 그러면 우리에게 사 2:2 이하와 슥 14:16 이하 말씀을 이해하는 길이 열립니다:
사 2:2-4: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전쟁을연습하지아니하리라“.
슥 14:16-17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땅에 있는 족속들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비 내림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이방 나라들의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말일에는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몰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께 모입니다! 이방인들은 문자적으로 초막절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해석해 주신 하나님의 율법(예: 산상수훈)을 지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장소에 제한된 성전에 계신다든지, 혹은 이 하나님을 경배하러 모든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모인다는 것은 구약적인 표현이며 일시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정결 예식)과 마찬가지로 단지 „사이에 들어온“(롬 5:20) 것으로서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새창조 때에는 성전이 없을 것입니다(„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계 21:22). 예수님은 지금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성전과 „거룩한 산“이 더는 필요없는 새로운 경배를 가리키고 계십니다. 따라서 사 2:2 이하와 슥 14:16 이하의 성전, 예루살렘은 그곳에서 새 언약(„피의 언약“)을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가르칩니다.
유대인은 새 언약이 맺히기까지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입니다. 이들을 축복하시고 이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하나님을 알고 경배합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합니다. 구약성경 가르침만 진리입니다. 이 구약 백성인 이스라엘로부터 „구원이 납니다.“ 즉, 구원에 대한 모든 하나님의 계시가 아브라함 이래로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이 – 예수님 시대에는 유대인이라 하는데 – 모든 세상에 구원을 중재하는 자라는 것은, 사 7:3과 렘 3:17뿐만 아니라 롬 3:1-2; 9:4-5,11,18도 지원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계시가 예수님에게 모아지고, 예수님께서 이 구원을 완전한 모습으로 가지고 오셨습니다(참조: 히 1:1-2). 그러므로 구속사에서 이스라엘이 가진 특별한 위치는 예수 그리스도에서 끝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미래의 예배는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집니까?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입니다(23). 참된 예배는 성경 전체에서 가르치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낙원에서 쫓겨난 이후 일어난 최초의 비극은 거짓 예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가인이 드린 예배는 참된 예배가 아니었으므로 하나님이 이것을 받아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참된 예배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방식과 다른 모든 예배는 거짓 예배이며 우상숭배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이지요! 예배가 잘못되면 예배를 드릴수록 그만큼 우상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시어 그들 가운데 참된 예배를 회복하시려는 노력의 역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역 시작부터 거짓 예배의 온상이 된 성전을 깨끗이 하셨습니다. 이것을 위해 선지자들이 얼마나 싸웠습니까?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사 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무수한제물이내게무엇이유익하뇨나는숫양의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아니하노라“
사 1:15-16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악한행실을버리며행악을그치고“
이들이 제물도 드리고 기도도 많이 했을지라고 악행을 버리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예배는 의미가 없습니다. 예배는 삶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사 29:13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나를가까이하며입술로는나를공경하나그들의마음은내게서멀리떠났나니그들이나를경외함은사람의계명으로가르침을받았을뿐이라“.
이들은 겉으로는 예배를 잘 드렸으나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하나님 계명을 두려워하여 지키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오히려 애써 하나님 계명을 배우지 않으려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계명을 잘 지키도록 계명을 풀어주는 사람보다 „당신은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몸이 되었습니다“라는 것만 강조하는 설교자가 훨씬 많지 않습니까?
참된 예배란 하나님 마음과 내 마음이 하나로 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르다면 참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만 진리이므로 내 뜻이 하나님 뜻에 온전히 일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멀리 계신 하나님, 죄인과는 지극히 먼 하나님께서 친근한 우리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얼마나 가까워졌습니까! 바로 앞에 뵙고 대화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성령님을 받은 자만이 죽은 영이 살고 진리를 깨닫게 되므로 이 살아있는 영으로, 하나님의 영 안에서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셔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그분으로부터 우리가 절대적으로 순결한 하나님과 같은 품성을 받음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늘 „생수“를 공급하십니다. 이렇게 성령님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사도 바울이 가르친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영을받았으므로우리가아빠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갈 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그아들의영을우리마음가운데보내사아빠아버지라부르게하셨느니라“
우리는 이제 예배라는 말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예배란 주일 예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 주일 예배는 모든 예배의 꽃과 같으므로 가장 중요하지만, 우리의 삶 전체가 예배입니다. 우리 삶 전체가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경배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롬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몸을하나님이기뻐하시는거룩한산제물로드리라이는너희가드릴합당한영적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받아하나님의선하시고기뻐하시고온전하신뜻이무엇인지분별하도록하라.“
간단히 말하면, 인간의 매일의 삶은 하나님께 대한 경배가 되어야 하고, 이 경배는 성령님을 받아야 가능하고, 말씀을 깨달아 진리를 아는 자,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며, 매일 일하면서도 감사하며 기도하며 찬송함으로써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가르침은 제자들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이 가르침을 알아들었을까요? 우리는 배우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서 무시하면 안 됩니다. 진리, 예수님의 가르침은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아무라도 그 기본적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이 그가 가진 강한 선입관 때문에 예수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언제 일어납니까?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라고 예수님은 5:25에서와같이 말씀하십니다. 즉, 이 결정적인 사건이 그분의 오심과 함께 „지금“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그 여자는, 예수님이 바로 그 메시아라는 것을 가리키는(혹은 암시하는) 일련의 사실들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유대인에게서“ 오셨고, 그분과 함께 새 언약과 새로운 예배의 „때“가 도래했고, 그분이 „진리“로 계시하셨고, „아버지“를 보이셨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방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이 여자는 예수님이 누구 신지 곧 깨닫게 될 것입니다.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25절은 갑자기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듭니다. 유대인이 아닌 사마리아인이 메시아를 기다렸다는 것과,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알려주신다는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것이 역사적으로 고증됩니다. 사마리아인들도 모세오경을 믿고 이것을 경전으로 가지고 있었으므로 메시아를 믿은 것입니다. 요세푸스 기록에도 이와 관련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예수님은 긴 대화를 통해 그 자매 안에 있는 메시아 기대를 일깨우시고, 오랬동안 잠자던 소원을 다시 불러일으키셨습니다.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는 말은 메시아가 완전한 교사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포함해서 참다운 경배와 영생의 길을 알려주신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인도 이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그런데 이 자매는 왜 메시아 이야기를 꺼냈을까요? 지금 대화 주제가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20절에서 먼저 스스로 예배 이야기를 꺼냈고, 예수님은 참된 예배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그 자매는 메시아께서 참된 예배를 가르치는 분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예수님이 바로 그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과 그 여인과의 대화는 결말을 맞이했습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라는 말씀으로써 대화가 대단원의 막을 내렸고 계시가 정점을 이루어 일단 종료되었습니다. 그 자매 앞에는 자기가 바라던 메시아께서 서 계십니다. 그분은 지금까지 그녀에게 대화를 통해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로써 그녀는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하나님은 참된 경배자를 원하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경배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것입니다. 대부분 이스라엘 사람은 이것을 거부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도 이 문제로 사도 바울의 책망을 들었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들의 수는 넘치지만, 참되게 경배하는 자는 매우 적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과 진리“로, 마음을 다해서 진리인 하나님 말씀으로,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우리 예배는 헛됩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참된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참고:
예수님은 이곳에서 경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가르치신다.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오직 하나님만 경배해야 할 것을 가르치신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경배하면 안 되는가? 이곳에서는 이것을 말하지 않지만, 예수님 부활 이후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Kyrios)로 경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분께도 직접 기도했다. 성경 계시는 이렇게 진전되어 예수님의 부활, 승천에서 정점을 이룬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경배의 대상이라고 가르쳐도 된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어떻게 경배해야 하는지를 잘 가르치는 것이다: „영과 진리로“!
4.5. 사마리아 여인의 회심과 그 결과(27-30; 39-42)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28-29)
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
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예수님과 그녀가 대화하고 있는 사이에 제자들이 도시로부터 돌아왔습니다. 그 대화 시간이 얼마나 되었을까요? 적어도 30분은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물은 도시 밖에 있었고, 제자들이 도시에 들어가 음식점을 찾아 음식을 사서 다시 나오는 데까지 시간이 좀 걸렸을 것입니다. 모든 제자가 함께 간 것으로 보아 이들이 도시를 조금이라도 구경했을 것입니다. 관광 목적보다는 조상의 흔적이 있는 그곳, 원래는 유대에 속했던 역사적인 그 도시를 보고 싶었던 것은 당연하고도 옳은 일입니다. 그리고 구경하면서 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대화가 30분은 진행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서에 기록된 대화를 낭독하면 5분도 걸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대화가 오고 갔으며 중간이 생각하는 시간도 있었는데, 요한이 대화를 최대한 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자매는 예수님과 대화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면서 깨닫고, 자기를 돌아볼 시간과 마음을 돌이킬 시간도 가졌습니다. 그래야만 그녀가 예수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이 이해됩니다. 생각이 정리되고 예수님에 의해 마음이 크게 동요될 만큼 시간을 가졌습니다.
제자들이 이 광경을 보고 놀란 것(이상히 여긴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 랍비는 자매와의 대화를 꺼리기 때문입니다. 특히 혼자 있을 때 자매와의 독대를 피했습니다. 그들은 유혹을 받거나 소문이 나쁘게 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혹은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이 보도는 우리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 여자가 갑자기 물동이를 버려두고 도시로 들어가 전도했다고 합니다. 그 여자 말을 듣고 사람들이 예수님께 왔다고 합니다. 우선 우리는 요한이 극도로 간단히 보도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설명이 하나도 없이 매우 간결하게 중요한 사실만 보도합니다. 그러므로 원활한 이해를 위해서는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야 합니다.
7절에 따르면, 그 여자는 물을 길으러 우물에 왔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지금 „물동이를 버려 두“었다는 것은 완전한 전환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전까지 그녀에게는 물을 긷는 물동이가 매우 중요했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훨씬 더 중요해졌습니다. 그러므로 그 물동이를 버려두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 „물동이“는 그녀의 옛 삶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그녀가 시내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전도할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메시아를 만났기 때문이며, 동네 사람들도 자기와 같이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빨리 동네에 들어가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도 유대인과 같이 간절히 메시아를 대망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여자의 말만 듣고 그 더운 정오에 우물까지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녀는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고 했습니다. 그녀 과거의 삶이 도시 주민에게 잘 알려진 것이 분명합니다. 그녀는 자기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다 아는 매우 특별한 사람이 우리 동네 우물가에 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메시아임이 틀림없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당신들도 가서 확인해보라고 한 것입니다. 그녀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그늘에서 쉬고 있는 곳을 찾아간 것 같습니다.
느닷없이 그 여자가 나타나서 이 말 한마디 했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 말을 믿고 우물가로 몰려갈 리가 없습니다. 그녀는 여러 가지 말로 우물가에서 일어났던 일을 설명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놀란 것은 그녀의 모습과 태도였을 것입니다. 항상 침울하고 어둡게 보이고 숨어다니는 그림자와 같은 인생이, 너무나 밝은 얼굴로 매우 자신있게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정말로 놀랐을 것입니다.
„알고 있다“는 말에는 그런 나를 용서하고 영접하셨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그녀는 죄 사함의 은혜를 피부로 느끼고 너무나 감사하고 기뻐서 어찌할 줄 모르는 모습으로 전했습니다. 이것이 그녀가 분명히 회심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메시아를 만난 자의 기쁨입니다. 물동이도 팽개치고 이 사실을 전하러 자기를 무시하던 사람들에게 갔다는 이러한 극적인 전환은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얼마나 기뻤으면 그렇게 했을까요? 평소에 상종도 하기 싫은 동네 사람에게 갔다는 것이!
이러한 증거를 듣고도 가만히 앉아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러한 그녀의 모습은 그곳에 있는 사마리아인에게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물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정말로 메시아께서 오셨다는 기대를 하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이렇게 참다운 증거는 열매를 맺습니다. 31-38절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예수님의 기쁨을 생각하면 이 여인의 회심은 진짜 회심이었고, 이것이 영생에 이르는 열매(36)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한 여인의 회심을 대단히 기뻐했습니다.
우리도 모두 이렇게 회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옛날에 회심했을 때는 기뻤는데, 지금은 힘이 빠졌다고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인격적 회심이 아니라 종교적 회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진짜 회심은 예수님이 죄인의 마음에 들어오심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우리 마음에 들어오신 예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우리에게 계속 영생수를 공급하십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분과 깊은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정말로 만난 사람은 결코 그분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31-38절은 그 여자가 동네에 들어간 사이에 있었던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므로, 다음에 이 부분만 별도로 연구하겠습니다. 그러면 먼저 39-42절을 보겠습니다.
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본 단락은 유대인 방식으로 서술되었으므로 우리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언어 습관대로 풀어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이들은 사마리아 여인이 완전히 변한 모습과, 그녀의 과거를 모두 알고 있는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그녀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분명히 예수님과 대화하고 질문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분이 정말로 그 여자의 과거를 알고 계신다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또한 그분의 놀라운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을 온전히 감동하게 합니다. 그분의 메시아적 사랑도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분은 죄인에게 회개를 통한 구원의 길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이들 마음이 열려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였습니다: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39). 이 사실은 우리가 간단히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사마리아인이 원수 같은 유대인의 메시아를 자기들 메시아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사가 아닙니다. 본문을 계속 보면, 이들의 믿음은 정말로 진지했던 것 같습니다. 2:23-24에서 예수님께 보여준 유대인들의 반응보다 훨씬 좋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곳에서도 전도나 선교가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물가에서의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40).
이들이 유대인 예수님께 한 청원은, 예수님이 7-9에서 그 여자에게 한 청원과 마찬가지로 사실은 매우 놀라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 종족은 서로 상종하지 않는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눅 9:52-53을 보아서도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가 얼마나 악화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들이 유대인인 예수님과 여러 제자를 이들 집으로 모시는 것은, 이들이 예수님을 정말로 메시아로 영접했으며, 더 많은 가르침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래 이 청을 거절하실 수 있었습니다. 본격적인 사마리아 선교는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며, 지금은 이스라엘을 구하는 데 집중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 10:6; 15:24). 그러므로 지금 행하시는 일은 예외입니다. 다른 계획이 있었음에도 양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들어주시는 긍휼하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하루 주무셨습니다. 밤늦게까지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셨고, 제자들도 옆에서 듣고 많이 배웠을 것입니다.
41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이상하게도 이곳에서는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셨다는 보도가 없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이스라엘에서도 이적을 많이 행하셨는데, 이곳 이방에서는 이적을 행하시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믿는 자가 더욱 많아졌습니다. 예수님은 점심때부터 적어도 저녁까지는, 혹은 밤에까지 가르치셨고 다음 날 아침에도 계속하셨을 것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예수님 가르침을 듣고 분명한 믿음에 들어왔다는 것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쨌든 이들은 이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서도 충분히 믿을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들에게는 그 여자가 변한 그 이적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변하는 것이 가장 큰 이적입니다.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들은 왜 그녀에게 이 말을 했을까요? 39절에서는 이들이 여자의 증언을 듣고 믿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들이 먼저 그 여자의 증언을 듣고 믿음에 들어왔으나 예수님 말씀을 들음으로써(„우리가 친히 듣고“) 정말로 그분이 메시아시라는 것을 확신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이것은 그녀를 무시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이 메시아에서 한 걸음 더 나가 „세상의 구주“로 더 구체적으로 되었다는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증인을 통해(전도자를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나 예수님을 직접 만난 후에(직접 말씀을 연구한 후에) 더 구체적이며 깊은 인격적인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분이 누구신지 더욱 연구해서 알아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전도자, 설교자가 믿음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증거를 들은 사람은 이제 자기가 직접 성경을 연구해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전도자는 뒤로 물러나야 합니다. 전도자, 목사는 모든 것을 챙겨주고 먹여주는 부모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러한 오해 때문에 교회가 많이 타락했습니다. 이것은 미국에서 shepherding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정죄된 것입니다. 목회자가 사람을 자기에게 묶고 신자가 목회자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 이것이 타락입니다.
우리는 먼저 설교를 통해 말씀을 듣고, 그 후에 본인이 말씀을 잘 연구해서 믿음이 깊어져야 합니다. 설교에서 들은 것이 정말로 그런지 말씀을 통해 확인해야 합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는 본인이 맺어야 합니다.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시다“: 이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들은 사마리아인들이 그분께 한 신앙고백입니다. 많은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했는데, 그들의 고백은 이 하나로 모아졌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며(29), 또한 „세상의 구주“십니다(42). 그리스도는 여러 가지 다른 명칭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분을 진정한 „세상의 구주“(소테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사마리아인이 세상의 구주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주란 자기를 구원해주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참으로“(진정한)라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당시 세계에, 그리고 사마리아인에게도 구원자라 알려진 신들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특히 Asklepius(치료의 신)가 구원자로 알려졌으며 아우구스투스 이후로 로마 황제도 구원자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은 여러 신을 섬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에게 예수님만 진정한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실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들보다 성경을 훨씬 더 잘 아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깨닫는 데에 실패했습니다. 이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구원의 길이 담긴 성경을 오해하여 구세주를 민족 해방자, 자기 문제 해결자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자기를 죄에서 구해주실 구원자로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짧게 머무시는 동안에 이들에게 복음의 핵심을 잘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예수님을 „구주“라고 하는 첫 이방인의 고백을 듣습니다. 유대인이 멸시하는 사마리아인이 이로써 모든 백성이 해야 할 올바른 신앙고백의 예를 보였습니다(참조: 딤전 4:10; 요일 4:14). 요한이 복음서 기록자 중에서 유일하게 이 이야기를 기록했다는 것은, 그가 사마리아와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아마도 행 8:14 이하의 사건들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한 보잘것없는 여인의 회심이 이렇게 큰 결과를 가져온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녀의 회심을 매우 기뻐하신 것과, 이를 통해 선교 비전을 가지신 것을 볼 때, 이곳에 분명히 교회가 세워졌을 것입니다. 고대인은 우상을 많이 섬겼는데, 이들이 정말로 구원자로 여기는 분을 섬기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이들이 독자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다가 나중에 사도들이 와서 그분의 부활과 승천을 전하고 그 교회를 관리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아들의 영광된 모습을 본 사람은 이 여인처럼 변하지 않을 수가 없음을 배웠습니다. 그녀는 이제 마르지 않는, 마음으로부터 항상 솟아오르는 생수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의 삶이 이렇게 변하지 않는 것은 그가 이러한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영광을 모릅니다. 그분이 주신 하늘의 은사를 맛본 적이 없어서 이것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도 마음에 생수를 넘치도록 주시는 예수님을 믿고 항상 그분께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고달픈 이 길을 힘차게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거저 주시는 은사를 풍성하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간절하게 주시고자 하고 넘치게 주시는지는 우리가 본문을 통해 배웠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난 자는 더는 자기 문제 때문에 시달리지 않고, 자기를 극복하여 예수님을 전하는 자가 됩니다. 그의 삶은 이렇게 온전히 변합니다.
4.6.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다(31-38)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36)
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32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35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이제 우리는 마지막 남은 단락인 31-38절을 연구합니다. 내용은 예수님과 제자들 간에 있었던 대화입니다. 이것은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우물가에 놔두고 동네로 전도하러 들어가서 사람들을 모아 이들과 함께 예수님께 오는 그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선교 비전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이 대화에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선교에서 우리 역활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전도와 선교란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선교와 전도의 중요한 원칙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본문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세 시제가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미래에 이루어질 사건을 말씀하심에도 과거형과 현재형을 사용하십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성경의 독특한 표현 방식을 배우게 됩니다.
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32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제자들은 도시에 들어가서 구매한 음식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그분은 당연히 배가 고프셨습니다. 제자들은 도중에 먼저 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이 드시지요“라고 하지 않고 „잡수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뜻밖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은 이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예수님은 이렇게 자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막 4:33-34). 비유는 얼핏 들으면 잘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막 4:13). 그러므로 관심을 두고 곰곰이 생각해야 그 깊은 의미가 이해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교육 방법입니다. 때로는 제자들이 그 의미를 물어보기도 했습니다(막 4:10). 때로는 쉽게 금방 이해될 때도 있습니다. 대체로 하나님의 뜻은 우리 생각과 너무 다르므로, 우리가 깊이 연구하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그런데 일단 이해하면 영적 진리에 눈을 뜨게 되어 마치 보물을 찾은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 비유 말씀이 의미하는 것입니다(마 13:44-46). 예수님과의 긴 대화를 통해 영생수라는 보화를 발견한 그 여인의 태도가 이 사실을 증거합니다.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영생에 대해 가르치시고자 생수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고 성령님을 통해 거듭나서 매일 그리스도의 은사를 받아들여 사는 삶이 영생수를 마시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이 말을 이해시키시고자 오랫동안 대화하셨습니다. 드디어 그녀가 이 비유 말씀을 이해하고 생수를 구하고 그것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도 „먹을 양식“이라는 말을 사용하시어 제자들에게 중요한 영적인 진리를 가르치려고 하십니다. 이 양식은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이 가져다준 음식을 거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음식“이라는 말을 상징으로 사용하시어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가르치시고자 하십니다. 음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인에게 영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그 사이에 누가 음식을 가져다 예수님께 드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리스 문장을 보면 제자들은 그렇게 생각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러한 상태의 제자들에게 분명히 깨닫도록 계속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과 메시아로서 주위 사람들에게 자주 이해하기 어려운 비밀스러운 분이셨습니다(참조: 요 3:4; 4:15; 6:52; 7:35; 8:22,57; 14:8; 16:17-18,30).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35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지금 제자들에게 길고 상세하게 설명하시는 것이 눈에 띕니다. 그 핵심 주제는 „씨 뿌리는 일과 추수“입니다. 이 일은 죄인의 영생을 위한 것입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양식은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서 양식을 먹지 못하면 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양식은 음식이 아니라 „자기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자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그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분은 아버지의 일을 하시는데는 피곤함, 목마름, 배고픔도 잊으셨습니다. 온전히 집중하고 헌신하여 그분의 일을 이루십니다. 이것이 자발적인 순종이며, 여기에 독생자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요 1:18). 그리고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도, 그리고 산상수훈에서도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이렇게 예수님이 하나님께 순종해서 일하셨을 때에 그분은 또한 큰 기쁨을 얻으셨습니다. 그분은 지금 식사도 하시지 않으면서도 그 죄 많은 여인이 회심한 것을 보고 만족해하십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한 죄인의 회심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가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우리 삶도 여기에 맞추어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구원받은 우리로서 가장 중요한 우리의 일은 우리에게 맡겨진 „그분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와 선교에 힘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그곳을 향해 죽음의 길을 가시면서도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35 전 반절의 정확한 의미를 알아내기가 어렵습니다.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라는 말씀은 제자들, 혹은 사람들이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이 말슴을 하신 그때는 12월입니다. 곡식은 4월에 추수하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그것은 격언일까요? 그렇다면 이것은 „추수할 때가 되려면 아직 멀었으니 서두리지 말고 인내로 기다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은 착각이라고 하십니다. 바로 지금 그때가 되었으므로 지금 추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옳은지 판단할 수는 없으나, 중요한 것은 35절 후반부의 의미는 지금 추수할 때가 왔다는 의미입니다.
„밭“은 추수할 때가 되면 „희어“집니다. 그런데 36-38을 볼 때 이것이 농부의 추수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리스 언어인 „추수“는 신약성경에서 한 번도 본래의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말세의 전도(선교), 혹은 심판의 의미로 사용됩니다(마 9:37-38; 13:30,39; 눅 10:2; 계 14:15). 즉 영적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전도를 두고 추수라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은 수가성의 야곱 우물로 몰려드는 사마리아인들입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예수님은 지금 구체적으로 자기에게 오는 사람들을 가리키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36절 말씀인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누구인지 밝혀야 합니다. 이 의미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36-38절 말씀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이 해석에 논란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해석은 „뿌리는 자“는 하나님이시고 „거두는 자“는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오랫동안 씨를 뿌리셨고, 예수님께서 이 열매를 거두시는 분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바로 전에 전도의 열매를 맺으셨고, 이제는 사마리아인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해석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벵엘의 해석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에 뿌린 씨가 유대와 사마리아에, 그리고 세상 전역에서 추수를 가져왔다.“ 즉, 벵엘은 추수를 세계 선교를 통해 있을 열매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뿌리는 자이시고 제자들은 거두는 자들이다.
예수님이 자기를 씨뿌리는 자로 나타내신 것을 고려할 때 이러한 해석도 좋은 것 같습니다(마 13:37: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그렇다면 제자들은 거두는 자들입니다! 좀 더 확대 해석을 한다면,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역과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구속사역은 씨를 뿌리는 일이고, 전도와 세계 선교 명령을 통해 앞으로 이어질 사역은 열매를 거두는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 방법은 우리 한국인에게 낯설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장이 분명히 과거와 현재 시제로 표현되었는데, 어떻게 이것이 미래 사건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 그런데 성경에 이러한 예가 또 있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많은 내용을 오늘날처럼 자세히 표현하지 않고, 극도로 함축하여 설명할 때 이러한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과거형을 사용하여 미래의 일을 나타내는 예수님의 표현 방식이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36절에서 „이미“ 일어난 일을 말씀하시면서도, 이것이 미래에 그대로 일어나는 것을 보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장래에 있을 이 커다란 일이 „이미“ 야곱의 우물가에서 상징적으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는다는 말씀은 바로 제자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들의 „삯“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전도자(선교사)가 받는 하늘의 보상입니다:
고전 3:6-8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자기가일한대로자기의상을받으리라“
계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사람에게그가행한대로갚아주리라“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 사역에 사용하십니다. 이것은 우리를 생명으로 부르신 하나님이 우리 삶과 전도를 통해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신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합니다. 우리는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행하느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하십니다.
„거둔다“는 말은 우리가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님은 죄인이 영생을 얻을 길을 마련하셨으므로, 우리가 이들을 그곳으로 안내하는 일이 열매를 모으는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고, 이로써 „영생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가 농부와 같이 많은 수고를 해야 열매를 거둔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열심히 일하지 않고 열매를 거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이나 사도들의 서신서를 통해 볼 때에도, 열매를 거두고자 이들이 순교도 불사하고 사역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열매“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다른 곳에서도 사용하셨습니다. 그분은 마태복음에서 믿는 자를 „열매“와 „밀“이라고 하시고 또한 농부가 수확할 때 사용하는 상징어를 사용하셨습니다: „곡식을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마 13:24 이하).
이제 우리는 36절 하반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뿌리는 자“로서, 그리고 전도하는 제자들은 „거두는 자“로서 „함께“ 서로 „즐거워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일과 성공을 두고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 모두 잃어버린 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것을 기뻐합니다. 수확의 즐거움에 대해서는 구약성경에도 나와 있습니다(사 9:3).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사역을 잘 감당하는 것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도 기쁩니다.
흥미롭게도 예수님이 비유적으로 사용하신 언어들이 나중에 기독교 선교의 표준어가 되었습니다(„삯“: 고전 3:8; 9:17-18; „수확하다“; 고전 9:11; 갈 6:7-8; „열매“: 롬 1:13; 15:28; 빌 1:22; 딤후 2:6; 약 3:18; „씨 뿌리다“: 고전 9:11; 갈 6:7-8; 약 3:18).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지 전도(선교)하지 않는 신자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도 진지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서 먼저 나 자신이 영생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구원, 즉 영원한 죽음과 영원한 삶을 정말로 믿는다면 평안히 살 수 없습니다. 우선 내가 완전히 변함으로써 세상에 영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사람이 변하면 주위 사람이 알아차리고 거기에 반응함으로써 무언가가 이루어집니다. 반응을 하지 않는다면 그가 내적으로 변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항상 전도를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어떠한 형태를 통해서라도 우리는 전도에 참가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님과 함께 기쁨으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전도지상주의로 오해되어 자기를 과시하고 자기 조직이나 교회를 키우는 것으로 발전하면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결국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거짓 복음이 만연하게 되어 교회를 크게 훼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먼저 반드시 회심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전혀 자기를 생각하는 마음이 없이 오로지 주님을 위해, 그리고 사람을 구원한다는 생각으로 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37절로써 격언을 통해(참조: 신 20:6; 28:30; 욥 31:8; 미 6:15; 학 1:6) 36절 말씀을 좀 더 보충하셨습니다: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제자들은 자기가 심지 않은 것을 거둡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이 심으시고 경작하시고 보살피신 결과입니다. 신자들은 이것을 단지 수확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하셔서 추수하신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중요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결코 회심시킬 수 없고 믿음을 주입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시고 우리는 이들을 추수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떠한 공적 의식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심지 않았던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거둘 수 있을 뿐입니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이곳에서 예수님은 과거 시제로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의미하셨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즉 예언적 과거시제라는 용어를 붙일 수 있겠습니다. „나는 너희를 보냈다“는 말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나 가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직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들을 갈릴리에서 제자로 부르시고 그 후에 또 사도로 임명하시는 것은 적어도 몇 달이 지나서입니다. 그 후에 몇 번 전도 여행을 보내셨으나 본격적으로 이들을 세상으로 보내신 것은 부활 이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 몇 년 후 미래에 일어날 일을 보고 계십니다.
이곳에서 „보내다“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이스라엘에 보내셨는데, 이것은 선교가 아니라 그들을 회개로 돌이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들에게 그리고 이방인을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이들을 영생으로 추수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예수님은 하늘로 돌아가시고 대신에 제자들을 세우셔서 이들을 보내십니다. 이렇게 해서 보내심의 사슬이 성립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내시고, 아들은 제자들을 보내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이 „보내다“라는 말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낸 자의 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셔서 세우시고 그에게 전권을 주셔서 그를 통해 말씀하시고 일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는 말씀은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1) 예수님은 자기 제자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전권을 가지고 계시다. 2) 제자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대리자로 사람들에게 등장한다. 보내심에 대해 예수님은 여러 곳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마 10:5,16,40; 23:34; 막 6:7; 눅 10:1,16; 22:35. 한 가지만 인용하겠습니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눅 10:16).
그러므로 전도자가 올바로 전한다면, 그리고 설교자가 성경을 올바로 풀어서 전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전권으로 하나님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설교자에 대한 불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설교를 들을 때나 말씀을 배울 때에 여러분이 대단히 주의해야 한다는 경고입니다. 설교자가 비록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말씀하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그와 반대도 성립됩니다. 설교자가 하나님 말씀을 계속해서 잘못 전한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이것은 매우 무서운 죄입니다. 교인은 그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듣고 잘못 되면 그것은 자기 책임입니다. 그러면 자기도 그와 함께 지옥으로 갑니다. 교회사에서 볼 때 영적 지도자를 잘못 만나 함께 멸망당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날에는 설교자를 우상으로 여기거나, 아니면 이와 반대로 무시하는 현상이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전권을 주시어 보낸 자입니다.
하나님의 전권을 받고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하는 자입니까? „내가 너희로 … 거두러 보내었노니.“ 이들은 자기가 심고 경작하지 않은 것을 거두는 사람입니다. 기르고자 노력하고 애쓴 사람은 다른 사람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이분을 하나님,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단지 거두는 자입니다. 그런데 거두는 자라는 말을 좀 더 정밀하게 분석하면, 거두는 일, 즉 인간이 하는 일에도 여러 종류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심기만 하고 다른 사람은 경작하고 또 어떤 사람은 거둡니다.
그러므로 고전 3:6에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이 고전 3:6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양육까지도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전도나 선교, 양육은 자기가 시작해서 자기가 끝맺는 일이 아닙니다. 내 양, 내 교인, 내 열매라고 하는 것은 거짓 교사나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우리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 앞에서 먼저 사역한 사람의 일을 이어갈 뿐이고, 언젠가는 후속 사람에게 그 일을 넘겨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공적 의식이 생겨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일은 매우 고된 일이며 하나님 보시기에 기쁜 일입니다: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우리가 그들의 노력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즉 우리도 함께 노력했으며 이로써 열매가 맺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사역을 인정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눅 19:17). 예수님께서 우리 사역을 평가하십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요 4:4-42은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어떻게 믿음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녀가 어떻게 전도자가 되었는지를 보도합니다. 예수님은 그녀와, 그리고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자기가 왜 세상에 왔는지를 계시하셨습니다. 그분은 메시아로서 „생수“, 즉 완전한 구원을 주러 오셨습니다. 우리 영혼에 완전한 만족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분은 영생수를 주시기 전에 먼저 죄를 들추어내십니다. 우리 마음에 죄 된 생각이 있으면 영생수의 근원이신 성령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새로운 경배(예배)를 가지고 오셨으며, 이와 함께 새언약도 가지고 오심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분은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자세히 알려주십니다.
그분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인도 새로운 하나님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조망 속에서 보면, 야곱 우물가에서의 만남은 세계선교의 전조가 됩니다. 야곱 우물가에서 이루어진 만남이 대단히 중요했으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미래를 위한 지침을 주셨는데, 이것은 예언적인 형태로 앞으로 반드시 올 선교에 관한 말씀입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그들의 사역이 하나님의 은혜와 전임자들에 의존한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셨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이어지는 보내심(missio)의 사슬은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이어진다는 것이 인상 깊게 드러납니다(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시고, 아들은 우리를 보내신다). 우리도 이 사슬 안에 들어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설교를 듣거나 읽는 여러분들도 이 보내심의 사슬 안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말씀으로 온전히 새로워져 이 사역을 섬겨야 합니다.
사역이 이렇게 커진 것으로 보아 예수님이 그곳에 적어도 1-2달은 계셨던 것 같다.
이 약속은 예수님 말씀과 거의 같다. 예수님은 늘 구약 말씀을 인용하셨다. 그리고 바로 이 이사야 말씀을 성취하셨다.
이렇게 기막힌 표현은 하나님만 사용하실 수 있는 것 같다. 인간은 이러한 사고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때“는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아직) 실현되지만, 이미 지금 시작했다.
상세한 내용은 게르하르트 마이어의 „요한복음“ 주석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