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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1월 21일 화요일. 바람, 비가 거의 안 옴. 춥다.
아침에 일어나 소고기와 버터 그리고 토마토를 삶아서 식사를 했다. 히터가 밤새 잘 나와서 따듯하게 잘 잤다. 젖은 운동화와 양말이 잘 말라 있어서 반가웠다. 혹시나 해서 수돗물을 틀어 맛을 보니 역시나 짠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 짠물을 주면서 호텔을 운영하다니 납득이 안 된다. 베이루트의 물 사정이 전부 그런 것은 아닌가 싶다. 전에 묵었던 마블 타워 호텔도 아침이면 커다란 물차가 와서 물을 공급해 주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가끔 도로에서 커다란 물차를 보곤 한다.
일단 숙소를 옮기기로 하고 어제 묵었던 메이플라워 호텔로 다시 예약을 해 두었다. 체크아웃을 하고 다시 배낭을 메고 메이플라워 호텔로 간다. 낯익은 리셉션이다. 예약자 명단을 확인하고 별 말이 없이 이번에는 방 키를 준다. 2박 요금을 현지 파운드로 결재를 했다. 1달러에 1,500 하던 것이 2,200으로 내려갔기 때문인데, 나중에 한국에 와서 명세서를 보니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402호실이다. 전에 묵었던 방이라 반가웠다. 짐을 내려놓고 바로 나왔다. 오늘의 목적지는 바알베크이다.
콜라 터미널에 가서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어제 알아둔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간다. 함라 지역에서 콜라 행 버스를 타는 곳을 알아두었다. Hamra Street를 동쪽으로 걸어가다가 세로로 뻗어있는 Rome Street의 교차점에 콜라 행 버스가 정차한다. 12번, 24번 버스를 탈 수 있다. 숙소에서 많이 가깝다.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씩 알게 되는 것 같다. 24번 미니버스를 탔다. 젊은 총각이 운전을 한다. 콜라 터미널에서 바알베크 가는 버스를 탈 것이라고 했더니 더 편리한 정류장을 알려준다면서 우리를 콜라에 내려 주지 않고 두 정류장 정도 더 가서 내려준다.
Saeb Salam 거리에 내려준다. 건너편에는 폐허로 방치된 건물이 보인다. 여기서 기다리면 된단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버스가 온단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콜라 터미널로 다시 걸어가기로 했다. 부지런히 걸어간다. 다행히도 비가 내리지 않아서 걸을 만 했다. 아내도 잘 걸어간다. 아침부터 왠 고생이람. 좀 더 빨리 가려고 버스를 탔는데 더 시간이 지체되고 말았다. 콜라에 도착해서 바알베크를 외치자 버스가 등장한다.
올라타니 벌써 손님들이 가득했다. 빈자리도 없이 가득 채워서 미니버스는 출발한다. 요금은 바알베크까지 7,000파운드(4,200원)란다. 지금까지와 달리 이제는 동쪽으로 차는 달린다. 속도가 제법 있다. 지도를 보니 M 30번 길로 간다. 언덕을 올라가기 시작한다. 대형 트럭들이 많이 간다. 어디로 가는 차들일까 알아보니 이 길을 통해서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로 가는 것이었다. 대형 트럭들을 따라가다가 추월하고 또 따라가다가 추월하며 간다.
기다란 트럭들이 길가에 세워져 있기도 하고 앞서 가는 트럭들도 힘겹게 올라간다. 사이사이 작은 차들은 경쟁을 하듯이 추월해 간다. 좀 위험해 보이는데 스릴이 있다. 우리가 넘어가는 이 길이 레바논 산맥이란다. 얼마 올라가지 않았는데 밖에는 하얀 눈이 가득 쌓여있다. 초록색 산들을 하얀 페인트를 칠 한 것 같이 온통 흰색이다. 파란 하늘의 흰 구름과 이어져 어디가 하늘인지 모르겠다. 멋진 광경이다. 그런데 도로는 이미 녹아서 오르는데 문제가 없다.
이렇게 오르다가 눈이 쌓인 곳이 나타나면 어떻게 하나, 약간 걱정이 되기도 한다. 무사히 넘어가기를 바래본다. 버스는 별 어려움 없이 하얀 설산을 구경하면서 이제 내려간다. 조금 내려가니 눈이 물로 변해 길가를 흐른다. 우리가 먼저 도착한 곳은 쪼우라(Chtoura)라는 제법 규모가 있는 도시였다. 그런데 여기서 다 내리란다. 아직 바알베크에 오지 않았는데, 바알베크로 가는 미니버스를 섭외해 주었다. 자기는 5,000파운드를 갖고 바알베크로 가는 사람들에게 2,000파운드를 돌려준다.
바알베크까지 가는 사람은 우리 부부와 폴란드 부부가 전부다. 2,000에 가기로 하고 섭외해 준 미니버스를 타고 다시 바알베크로 출발한다. 우리를 태우고 온 미니버스는 여기까지고 다시 손님을 싣고 베이루트로 간단다. 기분이 좀 나빴지만 할 수 없다고 맘을 고쳐먹고 간다. 우리가 달리는 길은 바로 바알베크의 베카 분지(Bekaa Valley)이다. 아주 넓은 평야 지대이다. 들판에는 초록색으로 가득하고 가끔 낙엽이 떨어진 썰렁한 나무들이 보이곤 한다. 집들도 드문드문 보인다.
거리의 사람들을 보면 찬바람이 가득해 보인다. 40분 정도를 달려 바알베크에 도착했다. 그런데 요금을 2,000파운드가 아나니라 4,000파운드를 내란다. 한참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4,000을 주고 돌아섰다. 이것이 정식 요금이란다. 출발 할 때 적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기분 좋지 않은 맘으로 돌아서니 바로 거대한 유적 기둥들이 눈에 들어온다. 놀라움과 기대감을 갖고 입구를 찾았다. 오른쪽에는 비너스 신전 유적과 민가가 붙어있는데 작은 교회들이 여러 개 보인다.
이 지역은 헤즈볼라 지역이라고 들었는데 이상하다. 이곳은 특별여행경보의 여행 금지구역이다. 약간의 경계심을 갖고 왔지만 그래도 우리는 바알베크에 왔다. 바알베크는 레바논의 베이루트 동북쪽 약 65km 지점에 있는 고대도시이다. 바알베크(Baal-Bek)라는 명칭은 바알(Baal, 페니키아의 신)이라는 신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바알베크(Baalbek)는 세 개의 신을 숭배하는 페니키아의 도시이며, 헬레니즘 시대에는 ‘헬리오폴리스(Heliopolis)’라고 알려졌다.
로마 시대에는 종교적 기능을 하였으며, 헬리오 폴리탄의 유피테르(주피터) 신전 성지에는 수천 명의 순례자들이 몰려들었다. 바알베크의 거대한 건축물은 제정 로마의 전성기 시대 건축술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 중의 하나이다. 바알베크에 대해서는 그리스가 시리아를 정복했던 BC 332년 이전에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다. BC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고 난 후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이때부터 쓰기 시작한 헬리오폴리스라는 이름은 이집트에 있는 같은 지명을 본뜬 것으로 추측된다.
BC 200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대왕에게 점령되었고 BC 64년 셀레우코스 왕조가 망하면서 로마 제국에게 넘어갔다. AD 637년 아랍인들의 지배 아래 들어간 뒤 20세기까지 시리아의 이슬람 군주들의 통치를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프랑스가 레바논을 위임통치할 때 바알베크도 포함되었다. 유럽인들이 바알베크의 유적을 발견하고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부터였으나 거대한 로마식 사원의 발굴은 1898~1903년 독일인 조사단의 작업을 통해 비로소 이루어졌다.
프랑스의 위임통치 아래에서 폭넓은 정리·보수 작업이 이루어졌고 레바논 정부도 상당부분을 복구했으나 1970년대 중반 레바논에 주둔한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군대에게 빼앗겨 요새로 쓰였다. 세계문화유산이다. 서기 1세기부터 약 200년에 걸쳐 지은 로마시대의 신전 건물이다. 지금은 거대한 석주와 건물의 잔해만 있다. 이 신전의 배경이 되는 레바논 산맥은 눈으로 덮여 있다. 중동이라면 자동적으로 사막이 연상되기 때문에 눈 덮인 산은 이상하게 여겨진다.
바알베크 유적은 우선 그 규모가 엄청나다. 로마의 본거지인 이탈리아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크다. 바알베크 유적은 레바논의 옥토인 베카 분지(Bekaa Valley)에 있다. 레바논은 지중해 연안의 좁은 해안평야 지대를 제외하고는 전체가 산지로 되어 있다. 중앙부에는 쿠르네트아스사우다 산(해발 3,088m)을 최고봉으로 하는 레바논 산맥이 남북으로 뻗어 있고 시리아와의 국경을 따라 헤르몬 산(해발 2,814m)을 최고점으로 하는 안티레바논 산맥이 레바논 산맥과 나란히 뻗어 있다.
이들 산맥 사이에는 남북 약 120km, 동서의 너비 약 10km에 걸쳐서 해발 1,000m내외의 베카 고원이 있으며, 고원의 북으로는 아시 강이 북쪽으로 흐르고, 남으로는 리타니 강이 남쪽으로 흐른다. 예로부터 농업이 발달한 풍요로운 곡창지대다. 해발 1000m이상 되는 산맥 능선까지 백향목과 전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고, 농산물로 밀과 보리, 감자가 주로 수확되고 과일로는 포도와 살구를 재배했다. 레바논 산맥은 해발 2,000m가 넘는 봉우리가 13개나 되며, 레바논의 높은 산들은 년 중 절반 이상을 정상부에 백설을 이고 있어, 리타니 강의 수량을 풍부하게 하여 베카계곡을 푸르고 기름지게 한다.
이 지역에는 해양 무역에 능했던 페니키아인이 바알 신을 섬겼다. 그들에게는 여기가 우주의 중심이고 최고 태양신인 바알에게 제사를 지내던 고대 종교의 중심지였다. 다산의 3신인 샤마쉬(Shamash), 안타(Anta), 알린(Alyn)을 숭배하였던 지역이다. 기원전 64년 로마제국의 영토가 된 후 토착신앙과 로마 종교가 조화롭게 결합된 포용력을 보여주는 로마의 관용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로마가 이곳을 점령했을 당시 이 도시의 이름은 헬리오폴리스라고 불렀다.
헬은 태양의 도시라는 뜻이다. 헬레니즘시대부터 그리스의 태양신과 동일 시 되어 이집트에 있는 같은 지명을 인용한 것이다. 이는 기원전 4세기경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는데서 기인한 것이다. 이곳에 로마 신전을 최초로 시작한 사람은 아우구스투스황제다. 3개의 신전 중 가장 규모가 큰 주피터 신전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직접 설계하여 네로 황제 때인 60년에 완성되었다. 서기전 47년에 시저는 이곳을 로마식민지로 만든 이후 기원전 60년부터 시작된 주피터 신전 공사에 10만 명의 노예들이 동원되었다.
네로 황제시절인 기원후 60년경에 거의 완성되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재위 306 - 337)는 밀라노 칙령을 공포하여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고, 391년에 데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 - 395)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정하자 이교도의 신들을 숭배하는 일은 금지되었다. 그 결과 바알베크에서도 신전 건설의 중단은 물론 기존의 신전이 그리스도교의 바실리카 등으로 개축되는 예도 발생된다.(주피터 신전 안뜰에 성녀 바르바라의 바실리카 건설 등)또 신전 일부를 파괴하고 가장 큰 기둥들은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로 싣고 가서 짓고 있던 성 소피아 성당에 쓰도록 했다.
이후 이슬람교가 그리스도교를 대신하여 이 땅을 지배하게 되면서 종래의 헬리오폴리스에서 바알베크라는 원래의 지명은 되찾았으나 로마의 신전은 이슬람의 요새로 바뀌었고, 중세를 지나는 동안 서서히 파괴되어 갔다. 1516년 오스만 투르크의 영토가 되면서, 제국의 무관심으로 신전은 사람들에게 완전히 잊혀 진 가운데, 1759년의 대지진 등 여러 차례 이곳을 덮친 지진은 유적에 심대한 피해를 안겨주었다. 신전의 돌은 새로운 건물의 석재로 쓰이거나 풍화작용으로 서서히 황폐화되었다.
1898년 이곳을 방문한 독일의 윌리엄 카이저 2세는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으로부터 발굴 허가를 얻어 7년간 작업했다. 제 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이 패망한 뒤로는 프랑스 고고학자들이 발굴했다. 이 계곡을 중심으로 산지에는 기독교계 마론(Maronites)파와 평지에는 이슬람계인 드루즈(Druze)파가 살고 있다. 동상이 하나 보이는데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이곳을 처음 발굴하기 시작한 독일의 윌리엄 카이저의 동상이 아닐까 싶다. 입장료를 사기 위해 매표소로 갔다.
주민 같이 생각되는 영감님들 서너 명이 앉아서 표를 판다. 사람이 별로 없다. 두당 15,000파운드(9,000원)다. 입장료는 외국인이라 좀 높다. 들어가서 먼저 만난 것이 층계가 있는 입구 같이 생긴 Propylaea다. 신전·사원 등의 입구 또는 문인데 특히 Acropolis(성채나 신전)의 입구를 말한다. 직사각형 형태로 길게 펼쳐져 있고 계단 끝에는 기둥들이 입구임을 겨우 버티고 있다. 계단을 올라가니 유적지가 펼쳐진다. 육각형의 형태만 남아 있는 Hexagonal forecourt 앞마당이다.
그 뒤로 이어지는 광장이 Great Court다. 그랜드 코트(Grand court)는 트리야누스의 통치 기간에 건설되었다. 페니키아 토착 종교 건물과 2개의 제단이 만들어져 있고 좌우에 연못(basin)이 있다. 토착신인 아버지, 어머니, 아들을 상징하는 하다드(Hadad-하늘과 폭풍의 신)와 아타르카티스(Atargatis 물과 풍요의 신), 알리안(Aliyan 식물의 정령신) 3신이 안치되어 있는 곳이란다. 1970년대에는 신전 유적지가 게릴라들의 훈련 장소로 이용되었고 전쟁의 혼란 속에서 귀중한 문화유산이 국외로 반출되기도 했다.
우리는 커다란 기둥이 있는 곳으로 더 들어갔다. 여기가 바알베크의 주피터 신전이다. 주요 유적의 하나로 주피터 신전을 들 수 있다. 이 신전은 입구를 지나면 6각형 앞마당이 나오고 이어서 정교하게 장식된 반원형 벤치들로 둘러싸인 가로 104.5m, 세로 103m 크기의 직4각형 터(그랜드 코트)를 거쳐, 상 이집트의 아스완에서 가져온 84개의 화강암 기둥으로 받쳐진 지붕이 있는 현관으로 연결된다.
주피터는 그리스의 제우스를 말하며 페니키아의 바알 하다드와 접목하여 태양 신을 의미하는 헬리오스로, 다시 이 신전의 이름도 주피터 신전 또는 헬리오폴리스(태양의 신전)로 불리게 되었다. 이 주피터 신전의 웅장함은 현대인의 발달된 건축술로도 불가능해 경이와 찬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유적에 남아있는 열주는 높이 26m의 총 54개 중 6개이며 지름은 2.2m나 됩니다.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엔타블레이처는 높이 5.3m로 아칸서스 잎을 모티브로 한 코린트 양식의 극치를 보여준다.
제정 로마의 가장 뛰어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엔타블레이처(entablature)는 건축에서 고대 그리스·로마 건축물의 기둥의 바로 위에 위치하며 그 기둥에 의해 지지되는 수평의 쇠시리와 띠 장식의 집합체를 말한다. 100년경에 신전 안뜰 중앙에 번제를 드릴 두개의 제단이 설치되었고, 좌우에 제물로 쓸 동물을 깨끗이 씻을 연못(水槽)이 만들어 졌다. 그림에 주피터 신전의 안뜰 전경과 번제를 올리는 제단, 그리고 제물을 깨끗이 씻기 위한 수조가 그려져 있어 이해를 돕는다.
미완성의 수조의 장식 조각이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정한 후 이교도의 신전 건축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란다. 열주 기둥과 사자머리의 빗물받이용 장식의 거대함과 섬세함을 볼 수 있다. 주피터 신전은 측면이 88m, 정면 48m로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보다 크다. 54개였던 이 기둥들은 이집트 아스완에서 채석된 것으로 무려 1,500km를 운반하여 온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바알베크의 신전들은 신전 터가 고르지 않아 높낮이를 맞추기 위해서 높은 단을 쌓은 것이 특징이다.
무게가 750톤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돌들이 기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레바논 바알베크의 인공 거석들은 1,000톤이 넘는 돌로 세워진 신전들이다. 정사각형 기둥 형태의 인공 거석. 석조 외벽 중간 부분에 길이 20m, 높이 4m, 두께 3m의 거석이 3개 있다. 현재 학계의 전문가들은 거대한 석재를 7m 높이의 하단 구조물 위에 어떻게 올려놓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적절한 설명을 못하고 있다. 미 육군 기술전문가들 조차도 현재의 발달된 기중기를 이용하더라도 1,200톤에 이르는 거대 석재를 들어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곳에서 800m 떨어진 채석장에서 발견된 가장 거대한 크기의 석재는 길이 20m, 두께 4m, 높이 4m로 거대하다. 과연 누가 이 석재를 옮겼을까. 이집트에서 가져왔다고 하는데 믿을 수 없는 일이란다. 방문한 우리야 그저 입을 벌리고 놀라움과 경이로움에 탄성을 지르면 사진을 찍는 것에 만족할 뿐이다. 그 아래 바쿠스 신전이 보인다. 조심스럽게 돌을 디디면서 내려간다. 위에서 볼 때는 작게 보였는데 막상 내려가 올려다보니 엄청 크다.
바쿠스 신전은 주피터와 대등한 위치에 있는 시리아의 천둥의 신 하다드, 베누스(비너스)에 견줄 수 있는 자연의 여신 아타르가티스, 그리스의 헤르메스나 로마의 메르쿠리우스와는 동격으로 식물의 영혼과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 소년신 등 3신을 모시고 있다. 메르쿠리우스(Mercurius)는 로마 신화에서 상품 및 상인의 수호신. 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와 대응하며, 헤르메스와 같이 마이아의 아들이라고 여겨진다. 작품에서도 역시 헤르메스와 비슷하게 묘사되어, 날개 달린 모자와 신발을 신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원래는 순수하게 농업에 관한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으나 나중에는 인격신을 숭배하는 미신적 측면이 발전했고 소년 신을 모시는 제사도 주신제의 모습을 띠게 된 것 같다. 역시 코린트 양식으로 지어진 바쿠스 사원은 앞뒤로 8개씩, 양옆으로 15개씩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데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사원을 장식하고 있는 상징물들은 이곳이 주피터 사원과 마찬가지로 농업에 관련된 앞의 3신에게 바쳐졌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베누스 신을 상징하는 상당수의 내부 장식물을 통해 내세구원을 믿던 미신적 의식이 행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바쿠스 신전은 주피터 신전보다 조금 늦은 2세기경에 건립되었다. 보존 상태가 가장 좋은 신전이다. 지붕만 붕괴되고 원형이 잘 보존되어있다. 본전의 넓은 홀로 들어가려면 천정과 가장자리를 아라베스크 무늬로 장식한 입구를 지난다. 바깥쪽의 코린트 식 원주 42개(높이 19m)로 지탱되는 열주랑과 떨어져 내린 격자무늬의 천장석은 아름답고 섬세한 아라베스크 무늬로 장식되어 있으며, 격자무늬 사이에는 신화의 신들이 표현되어 있으며, 디오이소스(Dionysos)의 모습과 날개를 단 큐피드이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내벽은 2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세로로 골이 팬 코린트식 부착기둥과 벽감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아름다움의 기교를 다한 코린트식의 기둥과 벽체 사이로 빛바랜 주신(酒神)의 모자이크화가 이 신전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이야기 해주고 있다. 한창 화려하였을 당시의 신전의 웅장함을 복원하여 보여주는 그림이 있다. 제단 쪽에 서서 들어오는 아내를 보니 작아 보인다. 그만큼 규모가 크다. 유적을 둘러보는 것도 쉽지는 않다. 너무 넓고 오르내리기가 힘들다.
유적 사이를 걸어가는데 여기서 여름에는 예술 축제가 열리곤 했단다. 바알베크 인터내셔널 페스티발이라는 예술 축제다. 1955년에 처음 열렸고, 매년 7~8월에 개최된단다. 축제 기간 동안에 클래식 음악을 비롯한 오페라와 재즈, 춤, 연극 공연 등 다양한 무대가 마련된다. 실제 유적인 신전을 무대로 삼는다는 점에서 다른 음악 축제와의 차별성을 지닌다. 중동 지역에서 열리는 예술 축제 가운데 가장 역사가 깊고 명성이 높단다.
첫 회는 프랑스 작가이며 영화감독인 장 콕도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고, 코미디 프랑세즈와 런던 올드빅 등 세계 유수의 극단이 공연을 선보였다. 1956년에는 뉴욕 필하모닉과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등이 클래식 음악을 연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1975년, 레바논에서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에 벌어진 내전이 격화되면서 페스티벌이 중단되었다. 1990년에 내전이 끝난 뒤 1997년이 되어서야 재개되었는데, 그 뒤로도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바알베크의 신전 터가 상해를 입는 등 불안정한 정치 상황이 지속되었다.
이로 인해 페스티벌을 바알베크가 아닌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로 옮겨 개최되는 고비를 겪었다. 그러나 바알베크라는 이름을 유지하고 축제를 지속시켜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반영되어 2014년의 축제는 다시 이곳에서 개최됐다고 한다. 반정부 시위로 나라가 혼랍스럽다. 다시 올해 축제가 열릴는지 잘 모르겠다. 주변을 다시 살펴본다. 주변에는 도시 벽의 유적과 주민들의 집에서 출토된 로마식 모자이크와 옛날 재료를 써서 복원한 모스크의 폐허 등이 있고, 아랍 제국의 요새 유적도 곳곳에 남아있다.
뱀과 크레오파트라 모양이 있다는 데 찾아보지 못했다. 바쿠스 신전의 외관에 둘러싼 기둥들의 규모를 비교하기 위해 아내를 기둥 옆에 세워두고 사진을 찍어보았다. 전체가 들어가게 찍으면 아내를 찾기 힘들 정도로, 개미 같이 작아 보인다. 박물관으로 들어간다. 터널같은 곳에 유물들이 전시되어있다. 다시 처음으로 나가서 입구 계단을 오르며 사진을 찍고 돌아보았다. 커다란 철재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려다가 길 건너편에 있는 비너스 신전을 가기 위해 돌아섰다.
비너스 신전은 도로 밑으로 만들어진 통로를 통해 들어가라고 경비하는 아저씨가 알려준다. 좁은 통로를 통해 비너스 신전에 들어섰다. 비너스 신전은 주피터와 바쿠스 신전 동남쪽에 3세기 경에 지어진 신전이다. 지성소 앞에는 4개의 기둥이 세워진 현관랑(玄關廊) 있고 6개 열주가 신전을 둘러싸고 있다. 외관은 로마의 바로크 양식을 연상시킨다. 섬세한 조각과 곡선이 여성미가 느껴지고 원으로 이루어진 중심이 아름답다. 왜 비너스 신전인지 그 흔적을 찾아보았다.
조개 모양의 조각이 보인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라는 그림이 생각난다. 시내와 접경하고 있고 도로로 편입되어서 좁아졌고 보존상태가 많이 떨어져 아쉽다. 날씨가 생각보다 춥다. 이제 돌아가야할 것 같다. 유적을 뒤로하고 마을로 들어간다. 어디서 차를 타는지 알 수 없었다. 시청사 부근에는 여성 둘과 남성 한 명을 그려놓은 커다란 인물화가 눈에 들어온다. 헤즈블라의 근거지라는 것을 알았지만 어디도 위험한 상황이 느껴지지 않았다. 배가 고프다.
쌀쌀한 바람으로 어디 앉기도 불편해서 걸어가면서 아몬드와 호두 그리고 양념된 생선포를 먹는다. 참 맛있다. 미니버스 타는 곳을 지나가는 아가씨에게 물었다. 친절하게 알려준다. 초우라까지 2,000파운드에 가서 다시 갈아타려고 맘을 먹었는데, 마침 베이루트로 간다는 미니 버스를 만났다. 베이루트가 집이란다. 베이루트까지 두당 7,000파운드에 가기로 약속을 하고 차에 올랐다. 손님은 서너명이 타고 있었다. 차는 별로 멈춤이 없이 달려간다. 늦은 오후라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초우라에 도착했다. 손님을 태우고 베이루트로 가려는 미니 버스가 줄을 서 있다. 우리 차는 탈 손님이 없음을 확인하고 그냥 베이루트로 향했다. 하얗게 눈이 덮인 레바논 산맥을 넘어간다. 2시간이 걸려 베이루트에 들어선다. 우리를 함라에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는 장소에 내려준다. 여기서 도로가에 대기해 있는 4번 버스를 타라고 친절하게 안내해 준다. 시간이 오후 4시 40분이다. 별 어려움 없이 우리는 아침에 탔던 정류장에 내렸다.
어제와 같이 슈퍼에 들러 소고기와 토마토 계란을 샀다. 우리나라에서는 소고기가 부위별로 차이는 있지만 보통 1kg이면 3만원정도 하는데, 여기서는 만 원이다. 숙소에 들어가 소고기를 요리하고 토마토를 익혀서 누룽지와 함께 식사를 했다. 뜨거운 누룽지 물을 차 삼아 마시니 피곤이 삭 풀리는 것 같다. 소금물이라 어제 하지 못한 샤워와 빨래를 하고 나니 기분이 좋지만 피곤이 밀려온다.
1월 21일 경비- 버스비 36,000, 입장료 30,000, 슈퍼 12,750
(숙박비 이틀 = 107,287원). 78750*0.6=47,250원
계 154,537원
누계2,76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