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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레 미제라블(2) Les Miserables 빅토르 위고[프랑스] 빅토르 위고 (Victor Marie Hugo) 프랑스 소설가/생몰; 1802년 2월 26일 ~ 1885년 5월 22일/ 대표작; <레미제라블>, <노틀담의 곱추> 등이 있다./경력;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 반대
제3부 마리우스
1. 파리의 피유 뒤 칼베르 거리에는 괴팍하기로 소문난 질노르망이라는 노인이 살고 있었다. 나이는 아흔 살이나 되었지만 아주 정정해서 허리도 꼿꼿했고 이빨도 서른두 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아주 특이한 노인으로 18세기 식으로 다소 거만하고 완전무결한 부르주아였다. 그는 부르봉 왕가를 숭배했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던 1789년을 증오했다. 공포시대 때 어떻게 살아남았으며 목이 잘리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재치와 기지를 발휘해야 했는지를 늘 이야기하고 있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와서 그 앞에서 공화국을 찬양이라도 하는 날이면 그는 얼굴이 새파래져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화를 내는 것이었다. 이 늙은 용사는 언제나 원기왕성했고 허풍이 세고 성급하며 화도 잘 냈다. 누군가가 뜻에 거슬리기라도 하면 당장에 지팡이를 쳐들어 후려치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질노르망 큰아가씨라고 사람들이 부르는 노처녀 딸이 있었는데 화가 나면 쉰이 넘은 그 딸도 매섭게 후려치고 어린애 취급을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여러 가지 문제점은 갖고 있었지만 존경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18세기에 속하는 사람으로서 경박하면서도 동시에 위대했다. 가족으로는 노처녀와 노인 말고도 소년이 하나 더 있었다. 소년은 질노르망 씨 앞에서는 언제나 아무 말도 못하고 벌벌 떨었다. 노인은 이 소년에게 말할 때는 언제나 엄했고 때로는 지팡이를 들어올리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이 외손자를 몹시 예뻐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소년을 '가엾은 아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는 '루아르 강의 불한당(1815년 나폴레옹이 실각한 뒤 루아르 강 너머로 피신한 패잔병들을 일컫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 불한당이란 질노르망 씨가 자기 집안의 수치라고 부르던 그의 사위였다. 퐁메르시라는 이름의 사위는 베르농에서 가장 좁은 뜰이 달린 가장 초라한 집에서 혼자 쓸쓸하게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꽃을 재배하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다. 그가 바로 저 루아르 강의 불한당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생통즈 연대에 있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자 퐁메르시는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슈파이어, 뇌스타르, 알제 등지에서 싸웠다. 몽 팔리셀에서 있었던 전투에서는 클레베르 장군 밑에 있었는데 이때 산탄을 맞아 팔을 부상당했다. 이탈리아 국경에 있는 탕드 협로를 수비한 30명의 결사대에도 있었다. 아우스터리츠 싸움에서는 나폴레옹으로부터 십자훈장을 받았다. 나폴레옹을 따라 엘바 섬에도 갔었고, 워털루에서 뤼네부르크 대대의 군기를 빼앗은 것도 바로 그였다. 나폴레옹은 그를 대령으로 승진시키고 남작 작위를 주었으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주었다. 워털루 전투에서 퐁메르시는 부상을 입었고 야전병원을 전전하다가 마침내 루아르 강 건너편으로 추방당했던 것이다. 왕정복고 때문에 그의 봉급은 반으로 깎였고 곧이어 감시 받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는 제정시대 전쟁 틈에 질노르망 가의 작은 딸과 결혼할 수 있었다. 늙은 부르주아 질노르망 씨는 무척 화가 났지만 결혼을 허락하고 말았다. 퐁메르시 부인은 아주 훌륭하고 교양도 있고 남편에 어울리는 여자였지만 아이 하나를 남기고 곧 세상을 떠났다. 이 아이는 외롭게 지내는 대령한테는 유일한 낙이었다. 하지만 외할아버지는 막무가내로 손자를 빼앗아갔다. 내놓지 않는다면 상속권을 박탈하겠다고 엄포를 놓자 아버지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 양보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아들 대신에 꽃을 길렀던 것이다. 질노르망 씨는 사위하고는 완전히 관계를 끊고 지냈다. 노인 쪽에서 보면 대령은 악한이었다. 그는 절대로 사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또한 퐁메르시도 절대로 자기 아이를 만나거나 말을 걸어도 안 되는 것으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질노르망 씨 재산은 그리 많은 것이 아니었지만 질노르망 큰 아가씨는 어머니한테서 꽤 많은 재산을 물려받고 있었고, 미혼이었으므로 조카가 그녀의 상속자였던 것이다. 아이 이름은 마리우스로서 자기에게 아버지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밖의 자세한 사정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마리우스 퐁메르시는 여느 아이들처럼 자라났다. 공부도 했고 이어 법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할아버지처럼 왕당파였다. 고상하고 너그럽고 거만하고 신앙심이 두텁고 열성적이며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이었으며, 준엄하게 보일 정도로 품위가 있고, 거칠어 보일 정도로 순수했다. 아버지 소식을 처음 들은 것은 그가 열일곱 살 때였다. 어느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자 외할아버지가 손에 편지를 한 통 들고 있었다. "마리우스, 내일 베르농에 가도록 해라. 네 아비를 만나보거라." 마리우스는 가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이 집에 맡겨놓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도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병이 난 모양이다. 널 찾고 있어." 마리우스는 다음날 해질녘이 되어서야 베르농에 도착했다. 집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하녀가 나와서 문을 열었다. "퐁메르시 씨 계십니까?" 하고 마리우스가 물었다. 하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전 그분 아들인데요. 절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이젠 기다리고 계시지 않아요." 하고 말한 그녀는 눈물을 글썽였다. 마리우스는 그녀를 따라 응접실로 들어갔다. 대령은 맨바닥에 셔츠 차림으로 길게 누워 있었다. 대령은 사흘 전에 뇌염에 걸렸다. 병이 난 첫날부터 그는 어떤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질노르망 씨에게 아들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써보냈다. 아닌게 아니라 병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 대령은 그날 저녁 갑자기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더니 일어나 소리쳤다. "내 아들은 오지 않는구나. 내가 직접 가서 만나봐야겠다!" 그러고는 방에서 뛰어나가 응접실 마룻바닥에 쓰러져버렸다. 그리고 방금 막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희미한 촛불 아래로, 거기에 누워 있는 대령의 창백한 볼 위에 눈물이 흘러내린 자국이 보였다. 눈은 초점을 잃은 채 크게 뜨여 있었지만 눈물은 아직 채 마르지 않고 있었다. 그 눈물은 기다리던 아들이 오지 않아 흘린 것이었다. 마리우스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게 된 그 사나이를 자세히 내려다보았다. 고귀하고 남자다운 얼굴,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눈, 흰 머리칼. 그는 이 사나이가 자기 아버지고 지금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생각하며 냉정하게 서 있었다. 마리우스가 느낀 슬픔은 어떤 사람이든 죽어 누워있는 것을 보게 되면 느끼는 그런 슬픔에 지나지 않았다. 대령은 아무런 유산도 남기지 않았다. 그의 물건을 모두 팔아도 장례식 비용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하녀는 종이쪽지를 마리우스에게 주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내 아들아. 황제께서는 워털루 전장에서 나를 남작에 봉하셨다. 왕정복고 정부는 피흘려 얻은 이 작위를 인정하지 않지만, 내 아들은 그것을 인정하고 사용하기 바란다. 내 아들은 이 칭호에 어울리는 인간이 될 것이다. 워털루 전투에서 어떤 사람이 내 생명을 구해주었다. 이름은 테나르디에라고 한다. 아마 지금 파리 근교 몽페르메유라는 마을에서 여관을 열고 있을 것이다. 만일 그를 만나게 되면 최대한 은혜를 갚도록 하라. 마리우스는 베르농에 이틀밖에 머무르지 않았다. 장례식을 마치자 다시 파리로 돌아가 법률 공부를 시작했고, 아버지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대령은 이틀 뒤에 땅에 묻혔고, 사흘 뒤에는 완전히 잊혀져 버렸다.
2. 마리우스는 어릴 때부터 종교적인 습관에 깊이 빠져있었다. 어려서부터 늘 일요일이면 생 쉴피스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곤 했다. 그런데 그날은 여느 때와는 달리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느라 아무 생각 없이 '교구위원 마뵈프 씨'라고 쓰인 이름표가 달린 의자에 앉고 말았다. 미사가 막 시작되고 나자 한 노인이 와서 마리우스에게 말했다. "이건 내 자린데요." 마리우스가 당황해서 얼른 옆자리로 옮기자 노인은 자기 의자에 앉았다. 미사가 끝나자 노인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까는 미안했소. 그런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오. 설명해 드리겠소." "아니, 괜찮습니다. 그러시지 않아도 됩니다." 하고 마리우스는 말했다. "아니오, 날 나쁘게 생각해서는 안 될 테니까. 난 저 자리를 아주 좋아하지요. 언제나 저 자리에 앉아서 두서너 달에 한번씩 어떤 훌륭하고 가엾은 아버지가 이 미사에 참례하는 것을 보았소. 그가 아들을 보려면 다른 방도가 없었소. 물론 아들은 아버지가 자기를 보러 여기에 와 있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소. 아버지는 들키지 않으려고 저 기둥 뒤에 몸을 숨긴 채 아들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곤 했소. 아들을 무척이나 사랑했으니까요. 난 그 가엾은 아버지의 내력도 알게 되었소. 아이한테는 돈 많은 이모와 외할아버지가 있었는데 만약 아버지가 아이를 만나면 상속권을 뺏겠다고 위협했던 거요. 그래서 그는 아들의 행복을 위해 자기를 희생했던 것이오. 그는 정치적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처가로부터 배척을 당했던 거요. 하지만 워털루 싸움에 참가했다고 해서 곧 악마인 건 아니잖소. 그는 보나파르트 군 대령이었고 베르농에 살고 있었지요." "혹시 그분이 퐁메르시 씨가 아닙니까?" 마리우스는 얼굴이 하얗게 변하면서 물었다. "맞아요, 당신도 알고 있소?" "네, 그분이 제 아버님이셨습니다." 늙은 교구위원은 두 손을 마주잡고 외쳤다. "아니, 당신이 아드님이란 말이오? 아 세상에 이런 일이!" 마리우스는 도서관에 가서 지나간 신문들을 모두 찾아서 읽었다. 공화정과 제정시대의 모든 역사, 나폴레옹의 회고록, 온갖 기록, 신문, 보고서 등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마뵈프 교구위원을 다시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마 안 가서 마리우스는 거룩하고 온화하고 세상에서 보기 드문 아버지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정열적으로 아버지를 숭배하게 되었다. 또한 그의 사상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있었다. 이전에는 그에게는 공화정이니 제정이니 하는 말은 끔찍스러운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는 혼란의 암흑만 예상했던 그 시대에서 미라보, 베르뇨, 당통 같은 별이 빛나고 나폴레옹이라는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는 두려움과 기쁨이 교차하는 놀라움을 느꼈다. 혁명과 제정은 앞에 찬란하게 펼쳐졌다. 민중에게 되돌려진 민권의 지배로 요약되는 공화정, 전 유럽의 과제가 된 프랑스사상의 지배로 요약되는 제정. 그는 대혁명에서 민중의 위대한 모습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고, 제정에서 프랑스의 위대한 모습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것이 모두 훌륭한 일이었다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의 마음은 후회와 부끄러움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이제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을 토로할 수 있는 것은 무덤뿐이라는 것을 생각하자 절망했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흐느껴 울었다. 동시에 그는 한결 진지해지고 성숙해졌고 확고한 신념과 사상을 갖게 되었다. 그의 정신은 성장해가고있었다. 또한 당연한 결과로서 그는 할아버지로부터 점점 멀어져갔다. 그는 전부터 질노르망 노인의 경박한 성격을 좋아하지 않고 있었다. 이제는 게다가 잔인하게 자기를 대령에게서 떼어내 아버지와 아들을 갈라놓았다는 것을 생각하자 격렬한 반항심까지도 갖게 되었다. 마리우스가 베르농에 있는 아버지 묘지를 찾아가 며칠 묵고 돌아온 날이었다. 그는 피로를 풀 겸해서 옷을 급히 벗어놓고는 수영장에서 피로를 풀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날따라 질노르망 씨는 아침 일찍 깨어나 있다가 마리우스가 돌아오는 소리를 들었다. 손자가 어디 다녀왔는지 궁금했던 그가 딸을 데리고 마리우스의 방에 갔을 땐 이미 청년은 방을 나간 뒤였다. 침대에는 그가 벗어놓은 프록코트가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다. 옆에는 가죽 주머니가 하나 놓여있었다. "이게 뭔지 알겠니? 이런 걸 가슴에 품고 다닌단다. 연애하고 있는 여자의 편지 따위겠지." "어디 봐요, 아버님." 하고 딸이 말했다. 주머니에서는 곱게 접은 쪽지가 나왔다. 노처녀는 안경을 집어들었다. 두 사람이 종이를 펴서 읽은 것은 퐁메르시 대령이 아들에게 남긴 유언장이었다. 두 사람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온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딸은 그 종이를 다시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이때 파란 종이로 싼 물건이 프록코트 주머니에서 떨어졌다. 질노르망 양은 그것을 주워서 펴 보았다. 그것은 마리우스가 어느 인쇄소에 부탁해서 찍은 백 장의 명함이었다. 그녀는 그 중 하나를 아버지에게 건넸다. 거기에는 '남작 마리우스 퐁메르시'라고 찍혀 있었다. 마리우스가 돌아오기까지 그들은 꼬박 한 시간을 쥐죽은 듯한 침묵 속에서 지냈다. 마리우스가 막 돌아와 응접실 문턱을 넘기도 전에 그는 할아버지가 손에 자기 명함을 한 장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할아버지는 비웃는 투로 외쳤다. "이봐, 넌 이제 남작이구나, 축하한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지?" 마리우스는 얼굴을 붉혔다. "그건 바로 제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질노르망 씨는 엄하게 말했다. "네 아비는 바로 나야." "제 아버지는 겸손하고 용감한 분이셨습니다. 공화국과 프랑스를 위해 훌륭히 싸우시고 인류 역사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역사 속의 위인이셨습니다. 그랬는데도 결국에는 잊혀지고 버림받은 채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잘못이 있었다면 단 한가지, 조국과 저라는 이 배은망덕한 자식을 너무나도 깊이 사랑했다는 것뿐입니다." 이 말은 질노르망 씨로서는 도저히 그대로 듣고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공화국'이라는 말에 그는 벌떡 일어나 고함쳤다. "마리우스, 이 못된 놈! 네 아비가 어떤 놈인지 난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고. 그놈들은 죄다 부랑자고 살인자고 혁명당원이고 도둑놈들이었다!" 이번에는 마리우스가 분노로 몸을 떨었다. 자기 아버지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는 눈을 들어 할아버지에게 소리쳤다. "부르봉 왕가를 타도하자! 살찐 돼지 루이 18세를 타도하자!" 분노로 새빨갛게 불타올랐던 노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남작님과 나 같은 부르주아가 한 지붕 밑에서 살 수는 없겠지. 나가거라." 그리고 마리우스는 집을 나왔다. 3.
할아버지 집을 나온 마리우스는 생활이 몹시 어려워졌다. 그가 집을 뛰쳐나간 뒤 마음이 조금 풀어진 노신사는 딸을 시켜서 돈을 보냈지만 마리우스는 그것을 모두 거절하고 돌려보냈다. 하지만 학교 친구의 셋방에서 얹혀 지내며 그가 겪은 가난은 비참했다. 옷가지나 시계를 팔아서 지낸 것은 문제도 되지 않았다. 빵이 떨어진 나날들, 촛불 없는 저녁, 불 꺼진 난로, 방세를 치르지 못해서 받는 모욕, 이웃들의 비웃음. 이런 것들로 가득 찬 나날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옷차림이 초라하다고 놀림 받고 가난하다고 업신여김을 받는 쓰라림을 겪었다. 하지만 이런 끔찍한 시련은 오히려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꿋꿋하고도 비범한 성격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궁핍은 강한 영혼과 정신을 낳는다. 그는 궁핍 속에서도 자존심을 키워내고 고결한 영혼을 키웠다. 그는 그런 가운데서도 공부를 계속해 마침내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변호사가 되자 마리우스는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 그것을 알렸지만 노신사는 부들부들 떨면서 편지를 읽고 나더니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변호사가 된 그는 허름한 방 하나를 얻었고 어떤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일년에 7백 프랑 가량을 벌어 생활해 나갔다.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그전처럼 쪼들리지는 않았다. 이 정도나마 살게 되기까지는 3년이 걸렸다. 한마디로 고통스러운 세월이었다. 하지만 그는 단 하루도 용기를 잃지 않았다. 애써 꿋꿋한 태도를 취했고 자부심을 잃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 무렵 마리우스는 이미 스무 살된 미남 청년으로 자라 있었다. 짙고 숱 많은 머리칼, 훤하고 이지적인 이마, 진지하고 침착한 표정, 그리고 특히 그 얼굴에는 어딘가 기품 있고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는 길을 지나다가 젊은 처녀들이 돌아보는 것을 알고 부끄러워서 그곳을 도망치고는 했다. 여자들이 자기의 초라한 옷차림을 보고 비웃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그를 보고 넋을 잃고 쳐다본 것이었다. 일 년 전부터 마리우스는 뤽상부르 공원의 한적한 오솔길에서, 어떤 노신사와 소녀가 그 오솔길에서도 가장 호젓한 웨스트 거리 쪽의 끝에 있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을 자주 보았다. 자기 생각에만 열중해서 산책하는 사람들이 늘 그렇듯이 마리우스는 거의 날마다 아무 생각 없이 그 길을 걷곤 했는데 그때마다 두 사람을 보았다. 두 사람은 늘 조용히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소녀는 즐거운 듯 쉬지 않고 재잘거리고 있었고, 노신사는 애정에 넘친 눈길로 딸을 바라보면서 그 말을 듣는 것이었다. 신사는 예순쯤 되었는데 무언가 슬픔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늘 퇴역장교 같은 옷차림에 백발 머리에는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사람은 좋아 보였지만 어쩐지 접근하기 어려운 데가 있어서 결코 다른 사람들과 눈길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소녀는 열여섯 살 정도 되어 보였다. 키가 훤칠하고 아름답고, 순결해 보였는데 그 나이에 볼 수 있는 가장 매혹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아름다운 갈색머리에 대리석을 깎아놓은 듯한 이마, 장미꽃처럼 발그레한 볼, 눈부시게 하얀 살결. 그녀는 언제나 눈을 내리깔고 있었기 때문에 마리우스는 바로 그 옆을 지나면서도 그 눈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부끄러움이 깃들인 긴 갈색 속눈썹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늘 꾸민 데가 없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은은하게 우아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녀 옆을 지나칠 때면 온몸에서 싱싱하고 강렬한 젊음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마리우스가 두번째 가까이 지나갔던 날 소녀가 눈을 들었다. 그 눈은 진한 하늘색이었고 깨끗한 눈망울에는 아직도 어린 티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무심코 마리우스를 올려다보았다. 마리우스는 자기 생각에 빠진 채 산책만 계속했다. 그는 그들이 앉아 있는 벤치 옆을 몇 번 지나갔지만 그녀 쪽으로는 눈길도 보내지 않았다.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그는 여느 때처럼 뤽상부르 공원에서 산책을 즐겼지만 그들에게 더 이상의 관심은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따스한 날이었다. 공원에는 그늘과 햇빛이 넘쳐 흐르고 하늘은 씻은 듯이 맑았다. 참새들은 우거진 마로니에 숲속에서 지저귀고 있었다. 마리우스는 아무 생각 없이 그 벤치 옆을 지나갔다. 그때 그 소녀가 눈을 들었다.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다. 짧은 시간 동안 그들 눈길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그녀는 곧 고개를 숙였고 그는 산책을 계속했다. 무의식적인 영혼의 그 첫 눈길은 빛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어떤 미지의 찬란한 것에 눈뜨게 되는 일이다. 그것은 우연히 나타나 기다리는, 일종의 대상이 정해져 있지 않은 애정인 것이다. 그런 운명적인 눈길 속에는 온갖 순결과 정열이 담겨 있고 마음 속 깊숙이 스며들어,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그 꽃을 갑자기 피우는 마력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날 저녁 자기 다락방으로 돌아온 마리우스는 자기 옷차림을 훑어보고는 얼마나 자기가 촌스럽고 초라한 모습인가 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튿날은 새 웃옷과 바지, 모자와 구두를 꺼내 차려입고 장갑까지 끼고서 공원으로 갔다. 오솔길에 들어서자 맨 끝에 있는 벤치에 그들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면서 그의 발걸음은 점점 더 느려졌다. 벤치 앞을 지나가자 심장이 몹시 두근거렸다. 그의 귀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이야기하는 그 목소리는 정말 아름다웠다. 그는 벤치 앞을 지나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그 길 끝까지 간 다음 거기서 되돌아서서 다시 그 아름다운 소녀 앞을 지나갔다. 이번에는 얼굴이 창백해지고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 그날 저녁 그는 밥 먹는 일도 잊고 말았다. 마리우스는 사랑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제 날마다 공원에 가서 멀리에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벤치 앞을 지나갈 만한 용기는 이제 없었다. 나무들 뒤나 숲속에 세워진 조각상 그늘에 자리를 잡았다. 때로는 꼬박 30분 동안이나 손에 든 책 너머로 조용히 눈을 들어 그 아름다운 소녀를 보는 일도 있었다. 그러면 그녀도 희미한 미소를 띠고 그 사랑스러운 옆얼굴을 그에게로 돌렸다. 그러고는 그 백발 노신사와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열적이고도 꿈꾸는 듯한 눈길을 마리우스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그럭저럭 시간은 또 일 년이 흘렀다. 그 동안 그는 날마다 공원에 갔고 그 시간만 되면 무엇도 그를 붙잡아 둘 수 없었다. 마리우스는 황홀감 속에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 소녀가 자기를 쳐다보았던 눈길만 느껴질 뿐이었다. 어느 날 해질녘 마리우스는 그들이 막 떠나간 벤치 위에서 손수건 하나를 발견했다. 아주 수수한 손수건이었으나 새하얀 고급 천이었다. 그는 낮에는 이 손수건에 입을 맞추고 그 향기를 맡았고 밤에는 입술에 올려놓고 잠을 잤다. 4.
마리우스가 세든 집에 함께 세들어 있는 종드레트 집안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무렵 그집에 세든 사람은 그와 종드레트 식구들밖에는 없었다. 그는 언젠가 종드레트의 집세를 대신 치러준 일도 있었지만, 부모와 두 딸이 함께 살고 있다는 것과 아주 가난하다는 사실 말고는 아는 것이 전혀 없었고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도 없었다. 그 겨울 어느 저녁 무렵이었다. 그가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누가 어깨를 세게 부딪치며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보니 누더기를 걸친 어떤 두 여자 아이들이 헐레벌떡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하나는 키가 크고 비쩍 말랐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조금 작았는데 둘 다 무엇이 쫓기는지 부지런히 뛰어가고 있었다. 큰 아이가 소리 죽여 말했다. "개가 쫓아왔어. 하마터면 잡힐 뻔했어." "나도 봤어. 그래서 죽으라고 뛰었지 뭐." 작은 아이가 대답했다. 마리우스는 그 끔찍스런 말을 듣고서 아이들이 경찰을 피해 도망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는데 땅바닥에 작은 꾸러미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봉투 안에 무언가 종이가 들어 있었다. 아까 그 아이들이 떨어뜨린 것 같았지만 그들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 마리우스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옷을 벗다가 그 봉투에 손이 닿았다. 열어 보았더니 편지가 네 통이나 들어 있었다. 편지는 하나같이 지독한 담배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편지가 봉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읽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하고 그는 그것을 읽어보았다. 편지는 모두가 이런저런 가난한 사정을 설명하며 자선을 베풀어달라고, 각기 다른 네 사람에게 구걸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편지 쓴 사람 이름은 모두 달랐는데 글씨체는 똑같았다. 게다가 똑같은 싸구려 종이에 쓰여진데다가 맞춤법이 똑같은 부분에서 틀려 있었다. 마리우스는 그 수수께끼를 풀어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막 일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고 말하자 문을 연 것은 바로 어제 본 키가 큰 여자 애였다. 희미하게 창문에서 비쳐드는 빛을 받은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비쩍 말라서 뼈만 앙상한 데다 추운 날씨에도 셔츠와 치마만 걸치고서 달달 떨고 있었다. 누르스름한 얼굴에는 핏기도 없었고 헤벌어진 입은 시퍼렇게 얼어 있었다. 이빨은 몇 개가 빠진데다 멍해 보이는 눈은 뻔뻔스럽고도 천박스러웠으며 발육은 덜되어 있었는데 눈매는 꼭 노파처럼 재빨랐다. 마리우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치 꿈속에서 나타나는 망령 같은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있었다. 무엇보다도 서글픈 것은 그 처녀가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못생기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어렸을 때는 아마 무척 예뻤을 것이다. 하지만 한창 피어날 때의 아름다움은 가난하고 타락한 생활 때문에 생긴 겉늙음과 싸우고 있었다. "편지를 갖고 왔어요." 소녀는 편지를 내밀었다. 마리우스는 봉투를 뜯어보았다. 편지는 네 식구가 굶어죽을 지경이니 좀 도와달라는 내용이었고 끝에는 종드레트라고 이름이 쓰여 있었다. 이 편지도 앞서 네 통의 편지와 똑같은 글씨체였고, 틀린 맞춤법도, 종이도, 담배 냄새도 똑같았다. 편지도 다섯 통이고 사정 이야기도 다섯 가지고 이름도 다섯 가지였다. 그제야 마리우스는 내막을 알아차렸다. 이웃의 종드레트라는 작자는 돈 많고 동정심 많은 사람들에게 가명으로 동정을 구걸하는 편지를 써서 딸들에게 전하도록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날 저녁 그 처녀들이 당황해서 헐레벌떡 도망을 친 것이며, 그들이 주고받던 말을 미루어 보면 이 불쌍한 처녀들은 뭔가 수상한 짓을 하고 다니는 것이 틀림없다고 마리우스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놀랍고도 서글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동안 처녀는 거리낌없이 방안을 왔다갔다하면서 구경하고 있었다. 쉬지 않고 이곳저곳 살펴보면서 다니다가 책상 옆으로 다가왔다. "아, 책이군요!" 하고 그녀는 소리쳤다. 그녀의 흐릿한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저도 읽을 줄 알아요." 그녀는 책상 위에 펼쳐진 책을 집어들고는 조금 읽어보았다. "워털루에 관한 책이군요. 아버지도 이 전쟁에 참전하셨어요. 군인이셨거든요. 워털루에서는 영국 군하고 싸웠죠." 하더니 그녀는 책을 내려놓았다. "우린 모두 교육을 받았어요. 전부터 이렇게 가난했던 건 아니에요. 우리도..." 그러더니 마리우스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상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마리우스 씨, 아세요? 당신이 아주 잘생겼다는 걸?" 마리우스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마리우스 옆으로 다가와서 어깨에 손을 얹었다. "당신은 저 같은 건 안중에도 없겠지만 전 당신을 잘 알고 있어요. 이집 계단에서도 가끔 만났었고 또 당신이 아우스터리츠 근처에 사는 마뵈프 씨댁에 들르시는 것을 그 근처를 돌아다니다 몇 번 본 적이 있어요. 당신한테는 그 더벅머리가 정말 잘 어울려요." 마리우스는 조심스럽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봐요." 그는 냉정하게 말했다. "이 봉투도 당신 것 같은데 가져가요." 그녀는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어머나, 이걸 찾으러 얼마나 헤맸는데. 제 동생이 떨어뜨렸나봐요. 하마터면 아버지한테서 매를 맞을 뻔했어요. 그래서 편지를 모두 전했노라고 거짓말을 했지요." 그녀는 깔깔대고 웃었다. "이 편지를 전해야 아침밥을 얻어먹어요. 그저께하고 어젠 종일 굶었어요. 배가 고프면 터질 때까지 먹어대지요." 그제서 마리우스는 이 가엾은 소녀가 자기를 찾아온 이유가 생각났다. 그는 호주머니를 전부 뒤져 5프랑을 주었다. 그 돈을 주자 그에게는 16수가 남았는데 그도 역시 그걸로 저녁을 먹으면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처지였다. "어머나, 좋아라." 소녀는 소리쳤다. "정말 좋으신 분이네요. 전 당신한테 홀딱 반했어요. 우리 식구가 이틀 간은 실컷 먹고 마시게 됐네요!" 그녀는 마리우스에게 인사한 다음 다정스런 손짓을 하고 문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안녕. 아버지한테 가봐야겠어요." 나가다가 그녀는 먼지가 뽀얗게 쌓이고 곰팡이가 핀 마른 빵조각을 찬장 위에서 발견하고는 그것을 집어 씹으먹으면서 중얼거렸다. "아이, 맛있어라. 근데 왜 이렇게 딱딱하지. 이빨 부러지겠네." 그리고 그녀는 방을 나갔다. 5.
마리우스는 지금까지 자기도 가난과 괴로움 속에서 살았지만 조금 전 그 끔찍한 처녀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아직은 진짜 가난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가 공상과 정열에만 열중해 주위 사람들에게 무관심했던 것에 자책감을 느꼈다. 매일 벽 저쪽에서 그들이 왔다갔다하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동안 자기 곁에서는 자기 같은 인간들이, 그의 형제인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타락하고 비천했지만 가난속에서 품위를 잃지 않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는 그렇게 자기를 꾸짖고 있다가 그 방과 자기 방 사이의 벽을 물끄러미 보게 되었다. 널빤지 위에 얇게 덧바른 벽을 통해 말소리가 뚜렷하게 들려왔다. 허름한 벽에는 벽지도 발라져 있지 않았다. 마리우스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 가장 높은 곳 판자 틈으로 세모난 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던 것이다. 찬장 위에 올라가 보았더니 옆집이 들여다보였다. 그가 들여다 본 그 방은 꼭 짐승 소굴 같았다. 마리우스의 방도 초라했지만 그래도 그의 가난에는 기품이 있어서 깨끗하고 산뜻했다. 하지만 종드레트 가족의 방은 너저분하고 더럽고 어두컴컴했다. 가구라고는 탁자 하나, 의자 하나, 부서진 책상 하나, 깨진 그릇 몇 개, 그리고 초라한 침대 두 개였다. 빛이라고는 거미줄이 잔뜩 쳐진 창을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햇빛뿐이었다. 방바닥에는 널빤지도 바닥 돌도 없었고 새까만 때가 끼여 있었다. 한번도 청소하지 않은 것 같았다. 탁자 앞에는 펜과 잉크와 종이가 있고 그 앞에는 예순 살쯤 된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키는 작은 데다 비쩍 마르고 창백한 얼굴에 사나운 기색이 엿보였다. 한마디로 교활하고 잔인해 보였다. 벽난로 옆에는 뚱뚱한 중년 여자 하나가 맨발로 앉아 있었는데 누더기만 걸치고 있었다. 때가 낀 손톱으로 이따금 머리를 긁고 있었다. 침대에는 몸이 마르고 창백한 소녀가 앉아 있었는데 거의 벌거벗다시피 하고 있었다. 이 소녀가 바로 동생인 모양이었다. 가슴이 답답해져서 마리우스가 그 자리에서 내려오려고 하는데 그 집 문이 홱 열리면서 큰딸이 나타났다. "와요, 아버지!" "생 자크 성당의 그 자선가 말이냐, 에포닌?" "정말이냐?" "진짜 온다니까요. 마차를 타고 오고 있어요." 사나이는 벌떡 일어났다. "이봐, 들었지? 자선가가 온대, 불을 꺼." 그는 재빠르게 물 항아리를 집어들더니 벽난로에서 타고 있는 장작에 물을 끼얹었다. 그리고 의자에서 짚을 빼버렸다. "밖이 춥냐?" "네, 무척 추워요. 눈도 와요." 아버지는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작은딸을 돌아보며 고함을 쳤다. "빨리 침대에서 내려와, 이 게으름뱅이야. 유리창이라도 하나 깨!" 딸은 벌벌 떨면서 침대에서 내려왔다. "유리창을 깨란 말이다" 딸은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발끝으로 올라가서 주먹으로 유리창을 깼다. 유리는 큰소리를 내며 아래로 떨어졌다. "당신은 자리에 누워 있어." 마누라는 하라는 대로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작은딸이 방구석에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유리를 깨다가 손에서 피가 났던 것이다. 마누라가 다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이봐요. 유리를 깨다가 손을 다쳤잖아요." "잘됐어. 일부러 그러라고 시킨 거야." "뭐요? 잘됐어요?" "입다물고 있어." 사나이는 소리쳤다. 그러고는 입고 있던 자기 셔츠를 북 찢어서 딸의 피투성이가 된 딸의 손을 싸매주었다. 차디찬 북풍이 유리창을 흔들며 방안으로 불어 들어왔다. 밖의 안개도 흘러들어와 방안에 엷게 퍼졌다. 그는 잊은 것이 없는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 이제 자선가를 맞을 준비가 다 되었다." 누군가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사나이는 빨리 뛰어가 문을 열고 공손히 머리 숙여 인사한 다음 아양을 떨듯이 웃음을 지었다. "어서 오십시오, 동정심 많으신 나리님. 그리고 어여쁘신 아가씨께서도." 한 노신사와 젊은 처녀가 방문 앞에 나타났다. 마리우스가 그 구멍을 통해서 본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 공원에서 만나는 그 아름다운 소녀와 노신사였던 것이다. 소녀의 고상한 얼굴은 자주색 벨벳 모자로 감싸여 있고 공단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망토 밑으로는 비단 구두를 신은 작은 발이 보였다. 그녀는 방안으로 두어 걸음 들어오더니 큰 보퉁이 하나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종드레트 큰딸은 문 뒤로 비켜서서 그 벨벳 모자며 비단 망토며 아름답고 행복해 보이는 얼굴을 서글픈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노신사는 친절하면서도 동정 어린 눈길로 종드레트에게 말했다. "이 보퉁이 속에 새옷과 양말과 담요가 들어 있습니다." "아, 자비로우신 나리님, 정말 고맙습니다." 종드레트는 머리가 마룻바닥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두 방문객이 비참한 방안을 둘러보고 있는 동안 아버지는 큰딸에게 작은 소리로 재빨리 속삭였다. "자, 봐라. 내 말이 맞지? 돈은 안 내놓고 헌옷만 갖고 왔다." "정말로 어렵게 사시는군요. 그런데 이름은..." 하고 노신사가 물었다. "파방투라고 합니다." 종드레트는 가명을 줏어섬겼다. "전에는 배우였지요. 인기도 꽤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빵도 없고 불도 없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의자는 속이 다 빠져버렸고 이렇게 추운 날씨에 유리도 깨졌어요. 게다가 아내는 아파서 누워 있고요." "어머나, 가엾어라." 아름다운 소녀가 말했다. "어여쁜 아가씨." 하고 종드레트는 말했다. "이 피투성이 손목을 좀 보십시오. 일당 6수를 벌자고 일하다가 이렇게 됐습니다." "정말입니까?" 노신사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작은딸은 그 소리를 듣자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네, 사실입니다. 자비로우신 나리님!" 하고 종드레트가 말했다. "파방투 씨," 노신사가 말했다. "지금 갖고 있는 게 5프랑밖에 없어서 이따 저녁에 다시 들리겠소." "네, 어르신. 여덟 시까지는 꼭 집세를 내야합니다." "그럼 여섯 시에 오리다. 60프랑을 가지고." "아, 고맙습니다. 어르신. 마차 타시는 데까지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종드레트는 어쩔 줄 몰라하며 소리쳤다. 세 사람은 밖으로 나갔다. 마리우스는 이 기회에 그들이 어디 사는지 알아두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서둘러 밖으로 뛰어나갔다. 하지만 이미 노신사와 처녀는 마차를 타고 떠난 뒤였다. 저녁 때 신사가 다시 오겠다고 했으므로 그때 뒤를 밟으면 된다는 생각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도로 집 계단을 올라가다 보니 큰길 건너편의 인적 없는 담벼락 밑에서 종드레트가 한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부랑자라고 소문난 아주 고약한 작자였다. 두 사나이는 이리저리 휘날리는 눈보라 속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리우스는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자기 방으로 막 들어가려는 순간 종드레트 큰딸이 복도에 서서 자기를 기다리는 것을 보았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요?" "마리우스 씨, 침울해 보이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아무 일도 없소." "아니에요. 분명히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데요." "신경쓸 것 없소." 마리우스가 문을 열려고 하자 그녀는 문을 꼭 붙잡았다. "그러지 마세요, 마리우스 씨. 당신은 별로 돈도 많지 않으면서 오늘 아침 저한테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셨잖아요. 무슨 일인지 몰라도 제가 도와드릴 건 없을까요? 제가 어쩌면 당신한테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 편지를 전한다든가, 누구 집을 찾아낸다든가, 사람 뒤를 밟는다든가 하는 일은 저만큼 잘하는 사람도 없을 거예요. 절 시키세요." 마리우스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방금 당신 집에 다녀간 노신사 있지요? 그 따님하고..." "네." "그분들 주소를 알아다 줄 수 있겠오?" "그럼요. 꼭 알아다드리지요."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떠났다. 방에 들어간 마리우스는 자기가 오늘 본 일이 너무 혼란스러워 오랫동안 멍하니 엎드려 있었다. 아름다운 소녀며 노신사, 사기꾼 종드레트와 그 가족에 대한 모든 생각이 뒤범벅이 되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는 몽상에서 깨어났다. 귀에 거슬리는 종드레트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벽 너머에서 들려온 말이 그의 관심을 끌었다. "틀림없어. 바로 그 자야. 내 눈이 정확하지." 도대체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일까? 그 노신사일까? 그러면 종드레트는 그를 알고 있단 말일까?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는 호기심에 그는 다시 찬장 위로 올라갔다. 종드레트는 방금 돌아온 모양이었다. 큰딸은 벽난로 옆 바닥에 앉아 동생 손에 붕대를 감아주고 있었고 마누라는 침대에 누워 놀란 표정을 짓고있었다. 종드레트는 방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 눈초리는 이상하게 빛났다. "정말이에요? 확실해요?"마누라는 남편 말을 듣고는 얼이 빠진 것 같았다. "그럼. 난 확실히 알아봤어. 몸이고 얼굴이고 더 늙지는 않았어. 달라진 건 옷을 좀 잘 입고 있다는 것뿐이지. 이젠 꼼짝없이 나한테 잡힌 거야." 그는 걸음을 멈추고 딸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나가 있어." 딸들은 아무 소리 못하고 방을 나갔다. 마누라와 단둘이 남은 종드레트는 그녀를 보면서 큰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해 줘? 그 애가 바로 그 계집애란 말이야..." "고것이요?" 그 '고것'이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의미는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놀라움과 미움과 분노가 한데 섞인 끔찍한 말투였다. "설마 그럴 리가. 우리 애들은 맨발에 옷 한벌 걸칠 게 없는 신센데. 그 애는 부잣집 딸처럼 고급으로 차려입었던데. 설마, 그 아이일 리가 없어요." "내 말이 맞아. 두고 보라고." 아내는 시뻘겋고 커다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세상에, 그게 바로 그 거지년이라니. 그 배때기를 발로 차서 터뜨려버렸으면 속이 시원하겠네." "그게 문제가 아냐. 부자가 한 놈 걸려든 거야. 이제 우리도 한밑천 잡을 수 있게 됐어. 저녁에 오기만 해 봐라. 그땐 옆방 녀석도 저녁을 먹으러 갈 테고, 우리 애들은 내보내 망을 보라고 하면 돼. 그놈은 우리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거야.“ "만약 계획대로 안 되면 어떡해요?" 하고 마누라가 물었다. "그땐 해치워버리는 거야." 하면서 그는 소리내 웃었다. 그가 웃는 것을 마리우스는 처음 보았다. 차갑고 음산한 웃음이었다. 6.
마리우스는 몽상가이기는 했어도 용감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가 방금 들여다 본 것은 어김없는 도둑 소굴이었다. 이런 악독한 놈들은 짓밟아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뭔지는 몰라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종드레트 일당이 뭔가 불길하고 끔찍한 계획을 세우고 있어서 노신사와 그 딸은 무서운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들을 구해야만 했다. 그는 살그머니 찬장에서 내려와 방을 나갔다. 퐁투아즈 거리의 경찰서를 찾은 그는 서장에게 면회를 신청했다. "서장님은 안 계시지만 경위님을 만나보시겠습니까?" 하고 사환이 말했다. "그러지요. 급한 일이오." 사환은 그를 서장실로 안내했다. 키가 큰 남자 하나가 난롯가에 서 있었는데 눈초리가 아주 매서웠다. "무슨 일이오? 남자는 무뚝뚝한 말투로 물었다. "아주 중요하고도 급한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말씀하시지요." 마리우스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집의 번지수를 듣자 경위는 얼굴을 들고 차갑게 말했다. "그럼 그 복도 맨 끝방인가요?" "그런데요. 그 집을 잘 아십니까?" 경위는 한참 조용히 있다가 말했다. "그 노신사가 누군지도 짐작이 가오. 그 집은 나도 잘 알고 있소." "그런데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경위는 마리우스를 쏘아보았다. 그러고는 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더니 두 자루의 작은 권총을 꺼냈다. 그것을 마리우스에게 내밀고는 재빠르게 말했다. "이걸 갖고서 집으로 돌아가 소리내지 말고 방에 숨어 있어요. 그리고 놈들 동정을 잘 살피는 거요. 놈이 무슨 일을 해도 한동안 손을 쓰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그러다가 좋은 때라고 생각되는 순간에 한발 공중이나 천장에 쏘시오. 너무 빨리 쏘지 말고 놈이 일을 시작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거요. 당신은 변호사라니까 잘 알겠지요?" 마리우스는 권총을 받아 웃옷 호주머니에 넣었다. 마리우스가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자 경위가 소리쳤다. "만약 여섯 시 전에 무슨 일이 생기면 직접 오든지 사람을 보내시오. 자베르 경위를 찾으시오." 벌써 날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마리우스는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발끝으로 살그머니 계단을 올라가 자기 방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침대에 걸터앉았다.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이 무슨 꿈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악몽에 사로잡힌 듯한 기분을 떨쳐버리기 위해 이따금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차디찬 권총에 손을 대보곤 했다. 종드레트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벽에 난 구멍이 핏빛으로 빨갛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 빛은 촛불에서 새어나온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아래층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묵직한 발자국 소리가 빠른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라와 복도를 지나갔다. 종드레트가 돌아온 것이었다. 마리우스는 이제 엿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몸을 날려 그 구멍 앞에 올라섰다. 방안은 묘하게 변해 있었다. 조금 전 그 이상한 불빛이 무엇인지 곧 알 수 있었다. 촛불 하나가 켜있긴 했지만 실제로 방안을 비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숯불을 환하게 피워놓은 커다란 화로에서 나오는 빛이었다. 숯은 활활 피어 있고 화로는 벌겋게 달아 있었다. 파란 불꽃이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시뻘겋게 달아오른 끌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문 바로 옆에는 쇠붙이와 밧줄 더미가 쌓여 있었다. 이렇게 불빛이 환하게 비치고 있는 방은 마치 대장간 같았다. 붉은 불빛을 받고 서 있는 종드레트는 꼭 악마 같았다. 종드레트는 방안을 서성거리면서 마누라와 낮은 목소리로 뭔가 말하고 있었다. 갑자기 멀리서 단조롭게 울리는 종소리가 유리창을 흔들었다. 여섯 시를 알리는 종이 성당에서 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놈이 꼭 와야 할텐데." 하고 종드레트가 중얼거렸다. 서성대던 그가 의자에 막 앉자마자 문이 열렸다. "어서 오십시오. 자비로운 어르신." 하고 종드레트는 얼른 의자에서 일어났다. 노신사가 모습을 나타냈다. 침착하고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탁자 위에 루이 금화 네 잎을 꺼내놓았다. "파방투 씨. 우선 이걸 방세와 생활비에 보태십시오. 그리고 앞 일은 또 의논하기로 합시다."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하고 종드레트는 말했다. 노신사는 의자에 앉으면서 물었다. "따님은 좀 어떤가요?" "아주 나빠졌습니다. 제 언니가 병원에 데리고 갔습니다." "부인께서는 많이 좋아지신 것 같군요." 하고 노신사는 그의 부인을 힐끔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녀는 노신사와 문 사이를 가로막고 서 출구를 지키겠다는 듯이, 위협하는 듯한 태도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사람은 다 죽게 됐어요." 하고 종드레트는 말했다. "하지만 워낙 씩씩한 여자라서요. 마치 황소 같습니다." 종드레트가 교활하고도 날카로운 표정을 잃지 않은 채 지껄이고 있는 동안 한 사나이가 문소리를 내지 않고 살그머니 들어왔다. 털 조끼를 입은 사나이는 얼굴을 시커멓게 칠하고 있었고 문신을 한 팔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저 사람은 누굽니까?" 하고 노신사가 물었다. "이웃입니다.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하고 종드레트가 대답했다. 다시 조용히 문이 열렸다. 두번째 사나이가 들어와 종드레트 마누라 뒤에 있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도 역시 두 팔을 드러내고 있었고 잉크인지 숯인지로 얼굴을 시커멓게 칠하고 있었다. "조금도 개의치 마십시오. 모두 이 집에 같이 사는 사람들입니다.“ 신사가 힐끗 방구석을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언제 들어왔는지 이미 사나이가 네 명이나 들어와 있었다. 모두 시커먼 얼굴을 하고서 가만히 서 있었다. 갑자기 종드레트는 흐릿하게 떴던 눈에서 무시무시한 빛을 뿜으면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신사를 향해 한 걸음 내딛으며 고함을 질렀다. "이놈아,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냐?" 신사는 방안을 한번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태도에는 무서워하는 빛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종드레트 이웃이라는 사나이들은 벌써 쇠붙이더미에서 가위와 장도리와 쇠망치 따위를 꺼내 들고 문 옆에 늘어섰다. "그래, 내가 아직도 누군지 모르겠어?" "모르겠소." 신사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 이름은 파방투가 아니야. 테나르디에야. 몽페르메유의 여관 주인이었어. 이제 알겠어? 바로 그 테나르디에야." 신사의 얼굴에 가벼운 경련이 지나갔다. 하지만 그는, "전혀 모르겠소." 하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마리우스 귀에는 그 대답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테나르디에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는 몸을 떨면서 벽에 기댔다. 그 이름은 바로 아버지 유언장에 적혀 있던 것으로 그가 늘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이름이었다. 하필이면 이 악당이 아버지를 구한 생명의 은인이라니! 아버지는 테나르디에한테 은혜를 갚으라고 했는데 도리어 마리우스가 그를 파멸시키게 된 것이다. 그는 어쩔 줄 모르고 가만히 서 있었다. 테나르디에는 노신사를 향해 무서운 얼굴로 소리쳤다. "이제야 네 놈을 만나게 되었다! 8년 전 크리스마스 전날 밤 우리 종달새를 꾀어갔지. 인자한 척하면서 단돈 천오백 프랑만 냈어. 그렇게 쉽게 일이 끝날 줄 알았냐? 부잣집 딸에 틀림없는 그 계집애한테서 평생 먹고 살만한 돈을 짜낼 수 있었는데 네 놈 때문에 좋은 기회를 놓쳤어. 겨우 금화 네 잎? 어림도 없다. 이것 갖고는." 노신사는 그 말이 그치자 침착하게 말했다. "난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소. 아마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소." "뭐라고? 날 몰라? 이래뵈도 난 한때는 여관주인이었어. 선거권도 있었고 지금도 훌륭한 시민이야. 난 너처럼 그렇게 수상한 놈은 아냐. 어디에 사는 누군지 밝히지도 못하면서 애를 빼앗아가는 그런 놈이 아니야. 난 이래뵈도 프랑스 군인이야. 워털루에도 갔었어. 그리고 거기서 무슨 남작인가 하는 군인도 구해 준 일이 있지. 알겠어? 자, 이제 그런 얘기는 그만하자. 난 돈이 필요해. 엄청난 돈이 필요해.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버리겠어." 마리우스는 다소 마음을 진정하고 그 말을 듣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이 사나이는 분명히 테나르디에였다. 그리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와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그 눈에는 허세와 비열과 교만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뒤섞여있었다. 테나르디에는 한숨 돌리고 나서 핏발 선 눈으로 신사를 쏘아보며 나지막하고 무서운 소리로 말했다. "이제부터 맛을 좀 보여주지." 도끼를 든 한 악당이 거들었다. "장작 패는 일이라면 내가 하지." 노신사는 아까부터 테나르디에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틈을 노리고 있었다. 테나르디에는 자기 편이 워낙 많으므로 마음을 푹 놓고 방안을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도끼를 든 사람을 쳐다보느라 그는 노신사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 틈을 타 신사는 재빨리 의자를 걷어차고 손으로 탁자를 밀어뜨리고는 가볍게 몸을 날려 창가로 갔다. 하지만 여섯 개의 우악스런 손이 그를 낚아채 힘껏 방안으로 끌어들였다. 마누라도 그의 머리칼을 잡고 늘어졌다. 그들은 노신사를 침대로 끌고 가 일으켜 세운 뒤 침대 다리에 그를 밧줄로 칭칭 동여맸다. 테나르디에는 의자를 노신사 앞에 갖다놓고 걸터앉았다. 그는 조금 전과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금까지의 그 미친 듯한 표정에 침착하고도 교활한 평온함으로 가득차 있었다. "창문으로 뛰어내리려고 한 것은 형씨가 아주 잘못 생각한 거야. 다리가 부러질지도 모르니까. 나도 너무 엄청나게 돈을 요구하지는 않겠어. 나도 양보하고 희생할 테니까 20만 프랑만 내." 신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테나르디에는 계속해서 말했다. "나도 상당히 많이 봐 준 거야. 나처럼 가난한 사람한테 20만 프랑을 적선한다고 해서 대단한 건 아닐 거라고. 지금부터 내가 부르는 대로 받아쓰기만 하면 돼." "어떻게 쓰란 말이오? 난 묶여 있는데." 신사가 침착하게 말했다. "참 그렇군. 이봐, 이 양반 오른팔을 좀 풀어주지." 한 사나이가 그의 오른팔을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내가 부르는 대로 써. 나의 딸아..." 그는 부르르 떨면서 테나르디에를 올려다보았다. "'나의 사랑하는 딸아'하고 써. '네가 꼭 와야만 하겠다. 이 편지를 전하는 사람을 따라서 오너라. 기다리고 있겠다.'" 노신사는 그대로 받아썼다. "그리고 주소를 적어. 이 근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으니까 주소를 속일 생각은 하지 마."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펜을 들고 쓰기 시작했다. "이봐, 마누라!" 하고 테나르디에가 외쳤다. 그의 부인이 급히 옆으로 다가왔다 "이 편지를 갖고 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일이 끝나면 곧 돌아와." 도끼를 든 사나이와 마누라는 방을 나갔다. 이제 남은 것은 테나르디에와 포로와 세 명의 사나이들뿐이었다. 모두들 둔감하고 음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런 패들이라면 아무런 분노도 동정도 느끼지 않고서 태연하게 죄를 저지를 것 같았다. 그들은 한쪽 구석으로 몰려가 마치 짐승처럼 가만히 웅크리고 있었다. 테나르디에는 발을 불에 쬐고 있었다. 포로도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마리우스는 불안해 하면서 꼼짝 않고 있었다. 테나르디에가 계집애니 종달새니 하는 것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알 수도 없었다. 뭔가 홀린 듯한 심정으로 그 모든 상황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서 있었다. 아주 가까이 본 그 끔찍한 광경 때문에 멍해져서 몸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종달새가 그 처녀인지 아닌지는 테나르디에 마누라가 오면 알 수 있다. 만약 그녀가 위험하게 된다면 내 생명을 바쳐서라도 그녀를 구해주도록 하자.' 하고 생각했다.
7.
그럭저럭 시간이 흘러갔다. 벌써 한 시간도 더 계속되고 있는 이 무서운 사태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험악해졌다. 옆방은 음침할 정도로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 고요 속에서 아래 계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노신사가 묶인 채로 몸을 약간 움직였다. 마누라가 얼굴이 새빨개져서 헐떡이며 뛰어들어왔다. "주소가 틀려요!" "주소가 틀리다고?" 하고 테나르디에가 물었다. "그 번지에는 그런 사람이 없대요. 당신, 저 영감한테 속았어요." 테나르디에는 무서운 기세로 포로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소를 속였어? 대체 무슨 속셈으로 그런 짓을 했지?" "시간을 끌기 위해서다!" 하고 포로가 힘찬 소리로 외쳤다. 그러면서 그는 몸에 감고 있던 밧줄을 털어버렸다. 밧줄은 이미 끊겨 있었다. 악당들이 정신을 차려서 덤벼들기도 전에 그는 화로에 손을 뻗쳤다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악당들은 너무나도 놀라 방 한구석으로 물러나서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시뻘겋게 달아오는 끌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있었다. 나중에 이 사건이 있은 뒤 조사한 경찰에 의하면 현장검증을 할 때 이 방에서는 특수 세공이 된 동전이 발견되었다. 이 커다란 동전은 바로 죄수들이 탈옥할 때 쓰는 도구였다. 죄수들은 식칼 따위를 써서 동전을 두 쪽으로 잘라 안을 모두 도려낸 다음 다시 합쳐서 감쪽같이 먼저대로 하나가 되게 만든 것이었다. 그 안에는 시계태엽이 감춰져 있는데 그것으로 죄수의 쇠사슬고리며 쇠창살도 자를 수가 있다고 했다. 경찰이 그 방 침대 밑에서 발견한 동전도 그런 것이었다. 아마 노신사는 오른손이 자유롭게 되자 그것을 꺼내 비틀어 열고 태엽을 꺼내 밧줄을 끊은 모양이었다. “너희들한테는 안 됐지만 내 목숨은 그렇게 애쓰면서 지킬 게 못돼. 하지만 너희들이 그렇게 억지를 쓴다면..." 포로는 왼팔 소매를 걷어올리면서 말했다. "봐라." 그는 팔을 뻗치더니 드러난 살에다 벌겋게 단 끌을 가져다댔다. 지지직하면서 살타는 소리와 냄새가 방안에 퍼졌다. 마리우스는 정신이 아찔해져서 비틀거렸고 악당들조차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 이상한 노신사는 얼굴도 일그러뜨리지 않았다. 끌이 살에 닿아 연기를 내는 동안 그는 태연하고도 엄숙한 표정을 하고서 테나르디에를 보고 있었다. 눈에는 증오의 빛이라고는 전혀 없었고 완전히 승화된 고통 속에 위엄만 감돌고 있었다. "가엾은 놈들. 내가 너희들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처럼 너희들도 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말하더니 그는 끌을 열려 있는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자, 이제 너희들 마음대로 해라." 악당들이 달려들어 그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이렇게 되면 방법은 하나뿐이야." "칼로 족칠 수밖에 없어." 테나르디에와 마누라가 낮게 속삭였다. 마리우스는 권총을 만지작거리면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잡힌 사람도 구해주어야 했지만 아버지 유언을 지켜야한다는 갈등 때문이었다. 테나르디에는 천천히 탁자 있는 곳으로 가서 서랍을 열고 칼을 꺼내들었다. 이때 문이 열리면서 자베르가 들어왔다. 그는 해질 무렵 그 근처에 부하들을 배치해놓고 자신도 가로수 뒤에 숨어 있었다. 그리고 언제든지 쳐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해 놓고는 마리우스와 약속한 신호가 울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테나르디에 마누라와 악당이 마차를 타고 왔다갔다하는 것을 보고 그는 무척 걱정을 했다. 그러다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곧장 들어가 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거기들 서 있어. 우린 열다섯 명이다. 조용히 해." 칼을 든 헌병과 한 떼의 경찰관들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방으로 몰려들어왔다. 그들은 악당들을 체포했다. "모두 수갑을 채워라." 테나르디에 마누라는 꽁꽁 묶인 남편을 보더니 마룻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자베르는 탁자 앞으로 가서 위엄 있게 앉더니 서류를 꺼내 조서를 꾸미기 시작했다. 조서를 몇 줄 쓰고 나서 그는 눈을 들었다. "잡혀 있던 사람을 이리 데려와." 경찰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니, 그 사람 어디로 갔어?" 하고 자베르가 물었다. 노신사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문은 경찰이 지키고 있었지만 창문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자베르가 조서를 꾸미고 어수선한 틈을 타서 아무도 모르게 창으로 뛰어내린 것이었다. 경관 하나가 창가로 달려가 둘러보았지만 밖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놈을 놓쳤군." 하고 자베르가 말했다. 제4부 플뤼메 거리의 목가(牧歌)
1.
자베르가 체포한 악당들을 끌고 떠난 다음날 마리우스는 얼마 되지 않는 가구를 손수레에 싣고는 주소도 남겨놓지 않은 채 전에 얹혀 지내던 친구 집으로 떠났다. 이튿날 마리우스한테서 전날 저녁에 일어난 사건을 알아보려고 찾아왔던 자베르는 허탕을 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마리우스가 서둘러 집을 옮긴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렇게 질 나쁜 가난뱅이가 끔찍스럽고 악독한 짓을 저지른 것을 보고 나자 더 이상 그 집에 있기가 싫었으며 재판이 벌어지면 거기에 나가서 테나르디에에 대한 불리한 증언을 해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슬픔에 잠기게 되었다. 아름다운 그 소녀와 노신사가 더 이상 공원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들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몰랐고 그들이 누군지 짐작할 만한 단서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 아버지 같은 그 노신사는 수수께끼의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어쩐지 수상한 면이 있었다. 그는 왜 도망을 쳤을까? 정말 그녀 아버지일까? 이런 온갖 수수께끼가 그의 머리속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뤽상부르 공원에서 만났던 그녀의 청순한 매력이 줄어드는 건 절대 아니었다. 그의 가슴속에는 정열이 끓어올랐지만 눈앞에는 어두움뿐이었다. 하루하루가 흘러가도 새로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산책을 하러 나가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아, 저기 계시네!" 고개를 들어보니 바로 테나르디에 큰딸인 에포닌이었다. 그녀는 마리우스의 방에 거침없이 들어왔던 그날과 똑같이 맨발에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 그 누더기는 두 달이 지난 만큼 더 낡고 더러워져 있었다. 머리카락에는 지푸라기며 마른 풀까지 붙어 있었다. 헛간에서 잠을 잤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에 기쁜 웃음을 띄면서 마리우스 앞에 와 섰다. "겨우 찾았군요." 그녀는 입을 열었다.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몰라요. 마뵈프 씨 댁까지 찾아가 물어보았더니 여기에 사신다고 가르쳐 주셨어요. 저는 그 동안 유치장에 들어가 있었어요. 2주일이나 있다가 나왔어요. 이젠 그 집에서 안 사시지요?" "그래요." 하고 마리우스는 대답했다. "지난 번 그 일 때문에 그러시죠? 그런 야만스런 짓이 싫으신 거죠?" 마리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절 만난 게 기쁘지 않은 모양이군요." 마리우스는 여전히 가만히 있었다.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커다란 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내 말을 들으시면 기뻐하실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무슨 갈등을 느끼는지 망설이는 눈치였다. "당신이 부탁하신 주소를 알아냈어요." 순간 마리우스는 파랗게 질렸다. "주소?" "알아봐 달라고 했던 주소 말이에요." "그래? 그럼 얼른 데려다 줘. 원하는 건 뭐든지 다 주겠어. 대체 거기가 어디야?" 그는 에포닌의 손을 꼭 잡으면서 말했다. "절 따라오세요. 번지는 몰라요. 하지만 집은 아니까 모셔다 드릴게요." 그녀는 왠지 가슴을 아프게 할 만큼 슬픈 말투로 말했지만 기쁨에 들떠 있는 마리우스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마리우스의 얼굴이 잠시 흐려졌다. "하지만 한 가지만 맹세해 줘요!" 에포닌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당신 아버지한테 그 주소를 말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란 말이오." "아, 우리 아버지 말이죠? 그런 건 걱정 안해도 돼요. 지금 아버지는 감옥 독방에 갇혀 있어요. 전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은 생각할 겨를도 없어요." "자, 그럼 데려다 줘요." 몇 발짝 가다가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그에게 말했다. "그런데 저한테 뭘 주시겠다는 거지요?" 마리우스는 호주머니 속을 뒤졌다. 전재산인 5프랑밖에 없었다. 그것을 에포닌 손에 쥐어주었다. 그녀는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돈을 바란 건 아니었어요." 생 제르맹 문밖에 있는 한적한 플뤼메 길에는 이층집이 한 채 있었다. 18세기 중엽 어떤 판사가 정부를 숨겨두었던 집이었다. 집 앞 넓은 뜰에는 쇠울타리가 둘러쳐져 있었다. 집 뒤에는 좁은 마당이 있었는데 그 구석에는 비밀 문이 하나 있고 좁고 기다란 길이 나 있었다. 이 샛길은 양쪽이 높은 담에 둘러싸여 있어서 묘하게 가려져 있었다. 그 담 모퉁이를 돌아가면 구부러진 길을 따라 또 다른 문이 나오게 되어 있었다. 이것은 이 집 주인이었던 판사가 쓰던 비밀통로였다. 비밀문은 거의 다른 구역이라고 해도 될 바빌론 거리로 나가게 되어 있었다. 그 주위에는 원예장이나 과수원이 들어차 있었는데 이웃들은 그곳에 이중 벽이 있고 그 사이에 길이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1829년 10월 한 노신사가 찾아와 이 집을 세냈다. 집을 약간 수리한 다음 어린 처녀 하나와 하녀를 데리고 옮겨왔는데, 이웃에는 사는 사람들이 없었으므로 누구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도 없었다. 이들은 장 발장과 코제트였다. 그때까지 장 발장은 수녀원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평생을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곳에 계속 있으면 코제트가 수녀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아이의 앞날을 위해 안전한 그곳을 나오기로 결심했던 것이었다.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마침 플뤼메 거리에 있는 이 한적한 집을 발견하고는 거기에 몸을 숨겼다. 그때부터 그는 윌팀 포슐르방이라는 이름을 썼다. 그리고 파리 시내에 있는 다른 두 곳에도 방을 얻어 놓았다. 그렇게 하면 항상 같은 곳에 사는 것보다 사람들 주의를 덜 끌게 될 것이고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도 도망칠 곳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따금 코제트만 데리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다른 집에서 살다가 돌아오곤 했다. 두 사람은 매일 다정하게 산책을 나갔다. 뤽상부르 공원에 가서 가장 한적한 오솔길을 거니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일에는 가난한 동네에 있는 생 자크 성당에 다녔다. 그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많이 베풀었고 성당 안에서는 자선가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테나르디에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었다. 장 발장은 코제트와 함께 나갈 때는 퇴역장교 같은 옷차림을 했지만 혼자 나갈 때는 언제나 작업복 윗도리를 입고 챙 달린 넓은 모자를 깊숙이 내려쓰고 있었다. 코제트는 수수께끼 같은 자기 운명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런 아버지의 이상한 행동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식구들은 드나들 때는 늘 바빌론 거리쪽 문을 썼다. 정원 철문은 언제나 닫혀 있었다. 장 발장은 사람들 눈을 끌지 않기 위해 정원을 손질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내버려두고 있었다. 정원은 반 세기 이상 사람 손이 닿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고도 매력적인 곳이 되어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돌 의자와 이끼 낀 조각상이 두어 개 놓여 있고 길도 없고 잔디도 없고 온통 잡초만 우거져 있었다. 잡초들이 제멋대로 자란 사이사이로 무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거기서는 온갖 것이 자라고 있었다. 나무들은 가시덤불 쪽으로 구부러지고 가시덤불은 나무들을 타고 올라가고 나무줄기, 잎사귀, 빽빽이 자란 덩굴, 줄기, 가시 같은 것들이 엉켜 있었다. 이곳은 단순한 정원이 아니라 거대한 수풀이었다. 봄이 되면 이 수풀은 온통 벽으로 둘러싸인 울타리 속에서 자유롭게 그 신비한 푸른 머리칼을 바람에 나부끼면서 번식과 생명과 기쁨과 향기를 뿌리고 있었다. 한낮에는 수천 마리의 하얀 나비 떼가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그 화려한 녹색 그늘 속에서는 무수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벌레 우는 소리가 들렸다. 저녁이 되면 꿈결 같은 안개가 피어올라 정원을 부드럽게 감쌌다. 낮에는 새들의 날개가 나뭇잎을 즐겁게 해주고 밤에는 나뭇잎이 새들의 날개를 감싸주었다. 이 조용한 정원은 푸른 나뭇잎과 풀과 이끼와 새들의 한숨소리와 부드러운 그늘과 흔들거리는 가지들로 꾸며져 있는 뜰이었고, 거기에는 사랑과 믿음과 순진함과 희망과 동경과 공상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영혼이 있었다. 코제트는 어렸을 때 수녀원에서 나왔다.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않은 나이였다. 수녀원에서 갓 나온 그녀에게는 플뤼메 거리의 집만큼 즐거운 곳은 없었다. 쓸쓸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자유로운 삶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장 발장은 손질이 안 된 정원을 코제트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여기서 뭐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말을 들은 그녀는 몹시 기뻤다. 정원의 수풀이란 수풀은 모두 헤쳐보고 돌이란 돌은 모조리 옮겨 놓으면서 정원에서 뛰어 놀았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몸매도 예뻤고 피부는 하얗고 매끄러웠으며 머리칼은 윤기가 흐르고 푸른 눈동자에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정원에서 마치 자신이 여왕이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져 새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나무 사이로 보이는 해를 바라보며 숲속에 피어 있는 꽃도 보았다. 그녀는 즐거움에 푹 빠져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어린애다운 순진한 애정으로 사랑하고, 가장 가깝고 다정한 친구로 생각했다. 아버지를 무척 존경하고 사랑했기 때문에 늘 그 뒤를 따라다녔다. 장 발장 주위에는 늘 평화와 기쁨이 어려있었다. 코제트는 어린 시절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를 위해 매일 아침저녁으로 기도했다.
테나르디에 부부의 일은 꿈속에서 보았던 두 개의 무서운 얼굴처럼 그녀 머리속에 깊이 남아 있었다. 어느 날 밤에 숲속으로 물을 길러 갔던 일도 기억하고 있었다. 지옥 같은 생활에서 아버지가 구해 준 것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장 발장의 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에 대해 이따금 물어보았지만 장 발장은 그때마다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자꾸 다그쳐 물으면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어느 때인가는 꼭 듣고 싶다고 조른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의 웃음은 끝내 눈물로 변해 버렸다. 어느 날 코제트가 그에게 말했다. "아버지, 어젯밤 꿈에 엄마를 봤어요. 엄마는 커다란 날개를 달고 계셨어요. 엄마는 이 세상에 계실 때 성녀에 가까우셨던 모양이에요." "고생을 많이 하셨으니까."장 발장은 그렇게 대답했다.
2.
마리우스가 뤽상부르 공원에서 그녀를 만났을 무렵 코제트는 수녀원에서 받았던 엄격한 가르침을 벗어 던지고 사랑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운명은 은근하고도 끈기 있게 그들 두 남녀를 가까이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들의 말없는 눈길이 처음으로 부딪히기 전부터 그녀는 그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벌써 그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벌써부터 그가 아름다운 머리칼과 아름다운 눈을 갖고 있으며 온몸에서 품위와 다정함과 소박함과 기품이 풍기고 있고, 가난한 듯하지만 어딘가 세련된 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마침내 두 사람의 눈길이 서로 마주치고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그 최초의 은밀한 기분을 나누었던 날 코제트도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코제트의 눈길은 마리우스를 야성적인 기쁨에 떨게 했고 마리우스의 눈길은 그녀를 설레게 만들었다. 그날부터 두 사람은 서로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코제트는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사랑이 어떤 것인지 모른 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더욱 정열을 쏟아서 사랑하고 있었다. 그것은 멀리 떨어져서 품은 강한 동경이고 모르는 사람에 대한 숭배였다. 그녀는 매일같이 산책 나갈 시간을 기다렸고 나가서 마리우스를 볼 때면 즐거웠다. 하지만 언제인가부터 장 발장은 코제트를 더 이상 공원에 데려가지 않게 되었다. 코제트는 불평도 한마디하지 않았고 왜 그래야 하는지 묻지도 않았다. 아버지의 기묘한 행동에 익숙해 있는 데다가, 모든 일을 그에게 말하고 상의하던 그녀는 이 일만은 순진한 처녀의 부끄러움에서인지 그에게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녀는 점점 슬픔에 잠기게 되었지만 장 발장은 그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코제트가 슬픔에 잠긴 듯하자 그도 조금은 우울해졌다. 그는 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밝고 정다운 얼굴로 그녀를 대했다. 하지만 코제트는 마음이 텅 빈 것 같은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 생각은 하루하루 더해 가기만 했다. 그녀는 오직 한 가지 생각에만 골몰해 있었고 멍하니 뜬 눈은 깊고 어두운 허공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장 발장은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이따금 그녀에게 물었다. "왜 그러는 거냐?" "아니에요, 아무 것도." 코제트는 아버지가 슬퍼하는 것을 알고 이렇게 덧붙였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나 말이냐? 난 아무렇지도 않다." 그렇게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은 그토록 오랫동안 서로 의지해 살아왔으므로 서로 상대방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그 괴로움을 말로 표현하는 일도, 원망하는 일도 없이 웃음만 나누는 것이었다. 1832년 4월 초였을 것이다. 장 발장은 바깥에 나가고 집에 없었다. 정원 한구석에는 한길 쪽 울타리 옆으로 돌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코제트는 해가 진 뒤 어스름한 속에 거기에 혼자 앉아 있었다. 나무가 바람에 살랑거리고 있었다. 영문 모를 슬픔이 그녀를 덮쳐 왔다. 그때 불현듯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뒤돌아 본 코제트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가 서 있었던 것이다. 얼굴은 창백하고 야윈 것 같았다. 석양빛은 그의 잘생긴 이마를 파르스름하게 보이게 했고 눈은 어둠속에 가려 있었다. 코제트는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았지만 소리는 지르지 않았다. 그때 그녀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때까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그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속삭이고 있었다. "용서해 주십시오. 가슴이 터질 것 같고 이대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절 알아보시겠어요? 기억나시는지요, 당신이 날 쳐다보았던 그 날 일이. 뤽상부르 공원에서요. 하지만 그 뒤로 통 뵐 수가 없더군요. 그때부터 당신을 찾아다녔습니다. 밤마다 여기에 왔습니다. 당신이 놀라실까 봐 당신 방 창문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이렇게 오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제가 당신을 얼마나 사모하는지 제 심정을 알아주십시오." 그녀는 비틀거렸다. 마리우스가 그녀를 붙잡아 안았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그 팔에 힘을 주었다. 코제트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당신도 날 사랑하시는 겁니까?" 그녀는 한숨을 쉬듯 들릴락말락한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잘 아실 텐데요." 그녀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사랑에 취해 있는 청년의 가슴에 묻었다. 그는 의자에 앉았다. 그녀도 그 옆에 앉았다. 그들은 이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별은 하늘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한번의 입맞춤, 그것이 전부였다. 두 사람은 몸을 떨며 어둠 속에서 빛나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어디로 해서 정원으로 들어왔는지, 어떻게 집을 알고 찾아왔는지 묻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찾아온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두 사람은 조금씩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둠은 그들 머리 위에서 맑고 조용하게 빛나고 있었다. 영혼처럼 순결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의 꿈, 그들의 도취, 그들의 기쁨, 그들의 공상, 그들의 절망. 얼마나 멀리서 사랑했는지, 얼마나 그리웠는지, 만날 수 없었을 때 얼마나 절망했는지. 그들은 더할 수 없이 가까워져서 가장 은밀한 것까지 모두 털어놓고 말았다. 그들 두 사람 마음은 서로 하나가 되어 마침내 한 시간 뒤에는 청년은 처녀의 영혼을 소유하고, 처녀는 청년의 영혼을 완전히 소유하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 상대방의 마음에 깊이 파고들어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이야기를 모두 끝내자 그녀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마리우스입니다. 당신은요?" 하고 그는 물었다. "코제트예요." 3.
에포닌은 우연히 플뤼메 거리를 찾아갔다가 그곳의 외딴집 정원에 있던 코제트를 보게 된 것이었다. 마리우스는 에포닌이 가르쳐 준 이 집 울타리 앞에서 며칠 동안 황홀한 시간을 보낸 뒤 로미오가 줄리엣의 정원 안으로 들어가듯 코제트의 정원 안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쇠울타리는 녹이 슬고 삭아 있었기 때문에 창살 하나를 비틀어 열고 들어가는 일은 쉬웠다. 거리에는 거의 사람들이 다니지 않았고 마리우스는 밤에만 그곳에 들어갔기 때문에 누구 눈에 띌 염려는 전혀 없었다. 입맞춤 한번으로 두 영혼이 굳게 결합된 그 축복 받은 밤부터 마리우스는 밤마다 그곳을 찾아갔다. 그 해 5월 내내 순진한 이 남녀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거칠어진 정원 속에서 밤마다 하늘의 축복을 받으며 청순하고 정직한 사랑에 도취된 찬란한 빛으로 서로를 비춰주고 있었다. 밤에 그들이 정원에 있을 때면 그곳은 마치 살아 있는 신성한 장소 같았다. 그들 주위에 활짝 피어 있는 온갖 꽃들은 향기를 내뿜고 있었고 그들은 자기들의 영혼을 활짝 펴 그것을 꽃들 위에 펼쳤다. 이 연인들이 속삭이는 사랑 이야기는 그 옆에 있는 나무들을 기쁨에 떨게 만들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행복했다. 서로의 영혼에 대한 도취라고 할 수 있는 황홀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이상 속에서 순결한 두 영혼이 맞부딪치는 최초의 포옹이었다. 마리우스는 코제트와 보내는 시간에만 온 마음을 쏟고 있었다. 저녁마다 플뤼메 거리에 와서 창살을 비틀고 들어가, 돌의자에 나란히 걸터앉아 나무사이로 저물어 가는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다정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는 동안 그들 머리 위로 구름이 흘러가고,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은 하늘의 구름보다 사람의 꿈을 더 많이 싣고 갔다. 그들은 영혼 밑바닥에서부터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고 있었다. 영원한 것은 확실히 존재한다. 서로 사랑하고 미소를 나누고 웃고 입술을 삐죽거리며 토라지기도 하고, 손을 서로 깍지끼고 다정스러운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황혼 속에서, 보이지 않는 어스름 속에서, 새와 함께, 장미꽃과 더불어 몸을 숨기고 눈동자 속에 마음을 담아 그늘 속에서 서로 매혹적인 말들을 속삭인다. 끝없는 별들의 반짝거림은 무한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두 사람은 행복에 도취되어 꿈꾸는 듯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바로 그 달 파리에서는 불안한 분위기가 감돌고 수많은 사람들이 콜레라로 죽어갔는데도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숨김없이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마리우스는 코제트에게 자기는 고아라는 것, 아버지는 대령으로서 영웅이었고, 외할아버지와 사이가 나빠졌다는 것, 그리고 자기가 남작이라는 사실까지도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리우스가 남작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남작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마리우스는 그저 마리우스일 뿐이었다. 그녀도 자기는 수녀원에서 자랐고,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친절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돕고 있다는 것, 하지만 결코 부자가 아니며 그녀에게는 무엇하나 부족하지 않게 해주면서도 자신은 퍽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 등을 이야기해 주었다. 마리우스는 코제트를 만나게 된 다음부터는 일종의 교향악 속에서 사는 것만 같았다. 이상하게도 지난 일은 바로 엊그제 일어난 일까지도 아득한 먼 일로만 느껴졌고 코제트가 하는 이야기만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래서 테나르디에 방에서 일어났던 그 일이며, 테나르디에 집안 일, 코제트 아버지의 이상한 행동, 그가 이유 없이 도망친 일에 대해서는 그녀에게 이야기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 모든 일을 완전히 잊고 있었던 때도 있었다. 그는 저녁때가 되면 그날 아침에 무엇을 했는지 어디서 아침을 먹었는지, 누구와 만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귓가에서는 언제나 즐거운 노랫소리가 윙윙거리고 있어 다른 것은 전혀 들을 수 없었고, 오직 코제트와 함께 있는 동안에만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코제트와 함께 있을 때면 그야말로 천국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으므로 지상의 일을 잊어버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육신이 없는 정체 모를 환희의 짐을 짊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열렬히 사랑하고 있었다. 그뿐이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고요한 흔들림 속에서 눈을 뜬 채 잠들어 있었다. 그것은 이상의 무게에 짓눌린 현실의 빛나는 혼수상태였다. 이따금 마리우스는 코제트의 그 아름다운 모습 앞에서 눈을 감고 있는 때가 있었다. 눈을 감는다는 것은 상대의 영혼을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마리우스와 코제트는 자기들의 사랑이 앞으로 자기들을 어디로 이끌고 갈 것인지는 전혀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벌써 목적지에 도달한 듯한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장 발장은 이 모든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코제트는 마리우스보다 덜 몽상적이었기 때문에 늘 쾌활했고, 장 발장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던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코제트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밤 열 시가 되면 자기 방으로 돌아가는데 마리우스는 그때까지는 정원 밖에서 기다렸다가 그 시간이 지나 코제트가 나오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원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물론 낮에는 절대로 오지 않았다. 그 달콤한 5월 한 달 동안 마리우스와 코제트는 끝없는 행복을 맛보았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 갖가지 복잡한 일이 닥쳐오고 있었다. 어느 날 마리우스가 밀회 장소로 가기 위해 플뤼메 거리 모퉁이를 막 돌아서는데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마리우스 씨!" 고개를 들어보니 에포닌이었다. 그는 당황했다. 이 처녀가 집을 가르쳐 준 뒤로는 한번도 그녀를 생각해 본 적도 만날 일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 존재는 완전히 그의 머리속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오늘 그가 누리고 있는 기쁨은 모두 그녀 덕분인 만큼 그녀에 대해서는 오직 고마울 뿐이었다. 하지만 조금 거북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코제트에게 온통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기 때문에 마리우스에게는 에포닌이라는 이름은 아무런 뜻도 없었다. 그는 좀 당황한 빛을 보이면서 대답했다. "에포닌이 아니오?" "왜 그렇게 깎듯이 말을 하세요? 제가 뭐 불편하게 해드렸나보지요?" "아니, 그런 건 아니오." 하고 그는 대답했다. 계속 그가 입을 다물고 있자 에포닌도 말이 없었다. 전에는 아주 제멋대로고 뻔뻔스럽던 그녀도 지금은 뭐라고 할 말을 잊은 것 같았다. 좀 웃어 보이려고 했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다시 말했다. "저..." 그러다가 또다시 입을 다물고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안녕히 가세요, 마리우스 씨." 그녀는 불쑥 이렇게 말하고는 서둘러 가버렸다. 이튿날도 마리우스는 해질녘에 여전히 황홀한 생각에 잠겨 정원으로 갔다. 코제트는 돌의자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만큼 하늘이 아름답고 나뭇가지가 산들거리고 꽃향기가 그윽한 적은 없었다. 새들은 부드러운 소리를 내는 나뭇잎 사이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이때만큼 마리우스가 행복에 도취되고 황홀감에 잠긴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코제트가 슬픔에 잠겨 있는 모습을 보았다. 코제트는 울었는지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것은 맑은 하늘에 처음으로 끼기 시작한 먹구름이었다. 이윽고 마리우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 그래요?" 그러자 그녀는 대답했다. "말할 게 있어요." 그리고 그녀는 돌계단 옆 벤치에 앉아, 그가 떨면서 옆에 앉는 동안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에 아버지가 저더러 여행준비를 하라셨어요. 무슨 일이 생겨서 이곳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고요." 마리우스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난 6주일 전부터 마리우스는 조금씩, 천천히, 날마다 코제트를 차지해가고 있었다. 마리우스는 코제트의 일부였고 코제트는 마리우스의 일부였다. 마리우스는 자기 내부에 코제트가 살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순결한 사랑에 빠져 있는 때에 갑자기 '떠나게 되었다'는 말이 떨어지자 그는 현실로 돌아왔다.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코제트는 그의 손이 무척 싸늘해졌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말했다. "오늘 아침에 아버지가 자질구레한 걸 모두 챙겨서 떠날 준비를 해놓으라고 하셨어요. 같이 떠나게 된 대요. 영국으로 간 대요." 마리우스는 기운 없이 물었다. "언제 출발하는데요?" "아직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언제 돌아오는데요?" "그것도 몰라요." 마리우스는 벌떡 일어나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코제트, 당신도 갈 건가요?" 코제트는 슬픔으로 가득 찬 그 아름다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아버지가 가시면 저도 가야 해요." "그냥 떠나겠다는 말이오?" 코제트는 아무 대답 없이 마리우스 손을 꼭 잡았다. "좋아요." 하고 마리우스는 말했다. "그럼 나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려야겠소." 코제트는 창백해졌다. 그녀는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우리가 가는 곳으로 절 만나러 오시면 안 돼요?" 마리우스는 이제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코제트에게 소리쳤다. "같이 떠나자고요? 영국으로? 그러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난 빈털터리요. 친구한테 빚도 있소. 친구 방에 얹혀 사는 처지요. 내가 갖고 있는 거라고는 낡은 모자 하나에 단추도 다 떨어진 윗옷과 셔츠뿐이오. 난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이오. 그건 불가능해요. 나한테는 여권 값도 없소." 마리우스는 일어나 옆에 있는 나무줄기에 얼굴을 갖다댔다. 그리고는 나무가 살갗을 찌르는 것도, 뜨거운 열이 관자놀이에서 맥박치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이마를 나무에 대고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숨이 끊어진 절망의 조각상처럼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른 채 그렇게 서 있었다. 그러다 그는 돌아섰다. 뒤에서 숨막힐 듯한 울음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코제트가 흐느껴 울고 있었다. 그녀는 벌써 두 시간 이상이나 생각에 잠겨 있는 마리우스 옆에서 울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녀 옆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아, 옷자락 밑으로 나와 있는 그녀의 발끝을 손으로 잡고 거기에 입을 맞추었다. "날 사랑하고 있소?" 그녀는 흐느끼면서 대답했다.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요." "울지 마, 날 위해 울음을 그쳐요." "당신도 날 사랑하세요?" "코제트, 난 지금까지 아무한테도 내 명예를 걸고 맹세해 본 적이 없소. 하지만 이제는 가장 신성한 맹세를 하겠소. 당신이 내 곁을 떠난다면 죽어버리겠소." 이렇게 말하는 그의 말투에는 엄숙하고도 침착한 슬픔이 어려 있었다. 코제트는 울음을 그쳤다. "희망이 아주 없는 건 아니오. 궁리를 해보겠소. 조금만 기다려 줘요." 그녀는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싸안고 그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내일 정원에서 기다릴게요. 아홉 시에 나와 있을게요." "나도 그 시간에 꼭 오겠소." 그들은 괴로움 속에서도 달콤한 기분에 감싸여 서로를 끌어안고 기쁨과 눈물이 가득한 눈을 들어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았다. 4.
질노르망 노인은 당시 아흔한 살이 훨씬 넘어 있었다. 그는 아직도 큰딸과 함께 그 낡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그는 옛날처럼 기운차게 지팡이를 짚고 다니지 않았다. 큰 소리로 야단을 친다든가 하녀들의 뺨을 때린다든가 하는 일도 없었다. 좀처럼 기가 죽거나 나약한 말을 하는 법은 없었지만 마음속으로는 확실히 자신이 쇠약해져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4년 전부터 그는 마리우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 고약한 녀석이 찾아와 대문을 두드릴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참을 수 없는 것은 자기가 얼마 안 있어 죽는다는 일보다는 어쩌면 마리우스를 두 번 다시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할아버지와 다투고 집을 뛰쳐나간 배은망덕한 손자에 대한 할아버지의 애정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갔다. 그러나 질노르망 씨로서는 할아버지인 자기가 손자한테 화해를 하자고 먼저 묻는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자기가 잘못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지만 마리우스를 생각할 때면 사무치는 정과 절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질노르망 노인은 이날 밤도 여느 때처럼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의 초조한 애정은 언제나 부글부글 끓다가 마지막에는 분노로 변하기 마련이었다. '이젠 끝났어. 그 녀석은 이제 돌아오지 않아.' 그렇게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하인이 들어왔다. "나리, 마리우스 씨가 오셨는데 들어오시라고 할까요?" 노인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사라졌다. "들어오라고 해." 문이 열리고 한 청년이 들어왔다. 마리우스였다. 그의 초라한 옷차림은 램프 갓 그늘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침착하고 진지하고, 이상하게 슬퍼보이는 얼굴만이 흐릿하게 보일 뿐이었다. 질노르망 씨는 놀라움과 기쁨으로 멍해져서 마리우스를 보고 있었다. 드디어 4년만에 손자를 보게 된 것이었다. 노인은 마리우스를 훑어보았다. 마리우스가 무척 아름답고 기품 있고 고상하며 어른스러워졌으며, 예의 바르고 호감이 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팔을 벌리고 마리우스 이름을 부르며 뛰어가 꼭 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마음은 한없는 기쁨에 떨리고, 다정한 말이 솟아올라 가슴에서 그대로 넘쳐흐를 것 같았다. 하지만 항상 본심과는 반대되는 짓을 하는 습관 때문에, 입술 사이로 튀어나온 말은 쌀쌀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여긴 뭣하러 왔느냐?" 마리우스는 우물쭈물했다. "저..." 노인은 마리우스가 먼저 그의 팔 안에 뛰어들기를 바랐던 것이었다. 화가 난 할아버지는 차가운 목소리로 마리우스 말을 가로막았다. "그래, 왜 왔어? 나한테 사과하러 온 거냐?"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나한테 무슨 볼 일이 있어서 왔느냐?" 마리우스는 손을 마주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절 좀 도와주십시오." "그래, 뭘 도와달라는 거냐?" "저..." 마리우스는 구렁텅이에 빠지기 직전의 눈빛으로 말했다. "사실은 결혼 허락을 받으려고 왔습니다." 노인은 벽난로 앞으로 가서 등을 기대었다. "결혼? 누구하고 말이냐?" 그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마리우스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너한테는 직업이 있지. 돈은 좀 벌었냐?" "한푼도 못 벌었습니다." 마리우스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러면 그 처녀가 부자인 모양이구나." "저하고 마찬가지 처지입니다." "지참금도 없다는 말이냐?" "네." "그래? 그 아버지는 뭘 하는 사람인데?" "모르겠습니다." 노인은 혀를 찼다. "그래, 나이 스물한 살에 변변히 돈도 못 벌면서 결혼하겠다고? 퐁메르시 남작 부인이 채소가게에 2수어치 파슬리를 사러 다녀야겠구나." 마리우스는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지는 것을 느끼면서 급히 말했다. "제발 부탁입니다. 할아버지, 제발 결혼을 허락해 주십시오." 노인은 기분 나쁜 목소리로 껄껄 웃었다. "네 놈은 이렇게 생각했겠지. 이제 그 멍청한 늙은이한테 가 보자. 결혼할 수 있는 나이인 스물다섯 살이 못됐으니 정말 유감이다. 하지만 그 영감한테 가서 말해주자. 이제 난 결혼하고 싶어요. 우린 빈털터리예요. 난 직업이고 장래고 청춘이고 생활이고 모두 강물에 던져버리고 싶어요. 그러니 결혼을 허락해주세요. 그러면 그 늙은이가 이렇게 말하겠지. 그래. 너 좋을 대로 해라. 그 처녀하고 결혼해라...하고 말이야. 하지만 어림없는 소리다. 절대로 안 된다!" "할아버지!" "안 돼!" 이 안 된다는 말을 듣자 마리우스는 모든 희망을 잃고 말았다. 그는 벌떡 일어나 문 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젠 다시는 아무 것도 부탁하지 않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질노르망 씨는 깜짝 놀라 입을 벌린 채 팔을 뻗치고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말할 겨를도 없이 문이 닫히고 마리우스는 사라져버렸다. 노인은 한참 동안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잠시 뒤 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재빨리 문 쪽으로 달려가면서 소리를 질렀다. "거기 아무도 없냐? 아무도 없어!“ 놀란 딸과 하인이 뛰어왔다. 노인은 비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놈을 쫓아가서 잡아와! 이젠 아주 가버릴 거다! 이번에 가면 다시는 안 올 거야!" 그는 한길 쪽으로 난 창으로 달려가 떨리는 늙은 손으로 창문을 열고 외쳤다. "마리우스! 마리우스! 마리우스!" 그러나 마리우스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이미 생 루이 거리 모퉁이를 돌아가고있었다. 노인은 괴로움에 찬 표정으로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쳐서 안락의자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말도 나오지 않고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기가 막힌 듯 머리를 흔들고 입술을 떨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5.
그 즈음 장 발장은 연병장의 가장 호젓한 둑길 뒤에 혼자 앉아 있었다.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 있는 중이었다. 한때 걱정했던 코제트의 우울한 낯빛도 다시 환해져 지금까지는 코제트와 함께 평화롭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한두 주일 전부터 다른 걱정이 생겼다.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우연히 테나르디에와 마주친 것이었다. 아마 감옥에서 탈주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장 발장이 변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테나르디에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 뒤로도 장 발장은 테나르디에를 여러 번 보았고, 이제는 그 근처를 배회하고 다니는 듯한 분명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이제는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만 할 듯했다. 그뿐만 아니라 파리의 상황도 심상치 않았던 것이었다. 그 같이 신상에 꺼림칙한 구석이 있는 사람에게는 매우 불리한,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황이 일어나고 있었다. 경찰은 매우 불안하고 예민해져 있어서 과격파들을 수색하다가 엉뚱하게도 자기 같은 사람을 발견해 낼 가능성이 많았던 것이다. 이런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 그는 프랑스를 떠나 영국으로 건너가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그 집을 떠나 다른 은신처에 가 있으면서 여권을 손에 넣을 궁리를 했다. 코제트한테도 집을 떠날 생각이라고 말해 두었다. 한참 이런 생각에 잠겼던 그는 문득 한 줄기 그늘이 드리워지는 것을 보고 바로 등뒤의 둑 꼭대기에 누가 와서 서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고개를 막 돌리려는 순간 종이 한 장이 무릎 위에 떨어졌다. 그는 종이를 집어서 펴 보았다. 거기에는 이런 글이 연필로 커다랗게 쓰여 있었다. '이사를 하시오.' 장 발장은 얼른 일어나 둘러보았지만 둑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회색 작업복 윗도리에 까만 바지를 입은 어떤 사람이 벽을 넘어 연병장 참호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장 발장은 깊은 생각에 잠겨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마리우스는 해가 지자 약속한 대로 정원으로 갔다. 울타리를 비틀어 떼어내고는 정원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러나 언제나 자기를 기다리고 있던 그 자리에 코제트는 없었다. 덤불을 헤치고 돌계단 옆 으슥한 곳으로 가 보았다. 그러나 그곳에도 코제트는 없었다. 정원을 돌아보았지만 어디에도 인기척은 없었다. 집을 올려다보니 집의 덧문은 모두 닫혀 있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슬픔에 떨며 덧문을 두드렸다. 창문이 열리고 코제트 아버지가 나온다 해도 이제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다시는 코제트를 보지 못하게 된다는 무서운 현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는 한참 두드리다가 커다란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무 대답도 없었다. 이제 모든 것은 끝장이었다. 마리우스는 절망적인 눈으로 무덤처럼 컴컴하고 공허한 이 집을 올려다보았다. 코제트와 함께 수많은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그 돌의자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돌계단 위에 쭈그리고 앉아서, 코제트가 자기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영원히 떠나가버린 지금 자기는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때 별안간 사람 소리가 들렸다. 한길 쪽에서 숲 너머로 누군가 자기를 부르고 있었다. "마리우스 씨!" 그는 벌떡 일어났다. "누구요?" "마리우스 씨, 친구들이 모두 샹브르리 거리 바리케이드에서 기다려요." 그것은 아주 낯선 목소리는 아니었다. 거칠고 약간 쉰 듯한 에포닌 목소리 같았다. 마리우스가 울타리 쪽으로 달려가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보니 젊은 청년 같은 사람이 저쪽 어둠 속으로 부리나케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제5부 장 발장
1.
이 불행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이어가기 전에 여기에서 당시 프랑스 역사를 되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과 그 뒤를 이은 나폴레옹제국 탄생과 몰락, 그 뒤에 온 왕정복고. 이 모든 것은 민중의 권리를 외치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말할 수 없는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프랑스로 돌아온 부르봉왕가는 아직도 국권은 왕가에게 있다는 한심한 생각을 갖고 있다가 스스로 몰락하고 말았다. 국가의 뿌리는 왕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 유명한 1830년에 일어난 7월 혁명에 의해 국민들은 정부를 도로 찾았고 부르봉 왕가는 다시 망명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7월 혁명은 찬란히 빛나는 민권의 승리였다. 혁명 주도자들이 추대한 루이필리프가 왕이 되었다. 그는 중류계급의 대표자였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고 민중을 존중했다. 그는 개방적인 왕이었다. 출판도 언론도 신앙도 자유였다. 하지만 결정적인 그의 잘못은 불안한 시대에 나라를 강력하게 통치하지 못했다는데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어려움에 부딪쳤다. 기초가 튼튼하지 못한 정부는 시작되자마자 저항을 받기 시작했다. 왕당파들은 7월 혁명은 반역이므로 지금 정부는 불법이라고 선언하고 정부를 공격했다. 공화주의자들 역시 정부를 비난했다. 7월 혁명 때문에 민중들이 파산했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수세기에 걸친 왕당파와 싸우고, 또 한편으로는 영원불멸의 인권운동과 싸우느라 정부는 기진맥진해 있었다. 빈곤, 무산자, 임금, 형벌, 매음, 빈부 차이, 노동자의 권리 같은 문제가 계속 일어나고있었다. 이것이 프랑스 사회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었다. 정당들 말고도 다른 움직임도 일어나고 있었다. 엘리트 계급도 민중처럼 사상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가난한 자를 보호하라, 빈곤을 없애라, 약자에 대한 강자의 부당한 착취를 없애라, 노동임금을 조정하라'는 사회주의 사상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칠흑 같은 어둠이 프랑스에 깔리고 있었다. 모든 것들은 혼란에 빠지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불안 속에서 떨고 있었다. 7월 혁명이 일어난 지 2년도 되지 않아 1832년은 절박한 재난의 징조를 띠고 시작되었다. 가난한 민중, 빵 없는 노동자, 유럽 도처에서 들려오는 혼란의 소식, 파리와 리용에서 일어난 폭동, 모반, 콜레라, 이 모든 것들은 사상의 불안한 움직임을 더욱 부추기고 있었다. 4월말 경에는 모든 것이 악화되었다. 7월 혁명 이래로 여기저기서 사소한 폭동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진압되었는가 싶으면 곧 다시 되살아나곤 했다. 프랑스 전체는 파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비밀결사 모임들은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었다. 이런 불온한 움직임은 모두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싸울 것인가, 가만히 있을 것인가 하고 공공연히 토의를 벌였다. 바로 눈앞에 다가온 폭동은 정부 앞에서 태연히 그 폭풍을 준비하고 있었다. 혁명의 열기는 더욱 퍼져갔다. 파리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국 도처에서 맥박이 고동치고 있었다. 각종 비밀결사의 그물 같은 조직이 전국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파리에서는 학생들까지도 동요하고 있었다. 1832년 봄, 석 달 전부터 콜레라가 퍼지더니 사람들을 긴장시키면서 음침한 검은 그림자를 몰고왔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기운이 감돌고 있던 폭탄 같은 그 한가운데 떨어진 불똥은 라마르크 장군의 죽음이었다. 그는 행동가이며 자유주의자였다. 정치 성향도 좌파와 극좌파의 중간에 있었고, 자기 이해를 따지지 않았기 때문에 민중으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그는 임종할 때도 조국이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이 임박하자 민중은 그를 잃는 것을 두려워했고 정부는 그것이 무슨 사건의 계기가 될까 봐 두려워했다.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났다. 라마르크 장군의 장례일로 정해진 6월 5일 전날 밤부터 아침에 걸쳐 장례행렬이 지나가기로 되어 있던 생 탕투안 성 밖에는 공포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장례 행렬은 육군 의장대 호위를 받으며 파리 시내를 통과했다. 2개 대대나 되는 병사, 군도를 찬 만명의 시민군 등이 관을 호위하고 있었고 영구마차는 청년들이 끌고 있었다. 그 뒤에는 흥분한 수많은 군중들이 따르고 있었다. 법률을 공부하는 학생들, 갖가지 깃발을 휘두르며 가는 아이들, 마침 파업을 하고 있던 석공, 인쇄공, 목수들, 이 모든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고 몽둥이를 휘두르기도 하며 질서는 없었지만 하나의 정신으로 뭉쳐서 걸어갔다. 큰길가 집집마다 발코니나 창이나 지붕에 얼굴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었고 모두 불안해하는 표정이었다. 한 무리 군중은 무장을 하고 지나가고 한 무리의 군중은 걱정하면서 이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편 불안해진 정부쪽에서도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거리마다 군대로 가득차있었다. 루브르 궁전 안뜰에는 포병들이 들어와 있었다. 파리 교외에도 몇 개의 연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장례 행렬은 몇 개의 큰 길을 거쳐 바스티유까지가 아우스터리츠 다리 앞 광장에서 멈추었다. 영구마차 주위를 한 무리의 사람들이 둘러쌌다. 군중은 갑자기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라마르크에게 바치는 고별 조사를 읽을 차례였다. 비통하고 장엄한 순간이었다. 모든 이들이 일제히 모자를 벗었다. 이때 갑자기 한 사나이가 붉은 깃발을 들고 군중 한가운데로 나왔다. 이 붉은 깃발은 삽시간에 군중 속에 폭풍을 일으켰다. 부르동 대로에서 아우스터리츠 다리에까지 마치 화난 파도 같은 소란이 군중을 뒤흔들었다. 우렁찬 함성이 터져나왔다. 그러는 동안 센 강 왼쪽 기슭에 출동해서 다리를 막고 있던 병사들이 강둑을 따라 움직여왔다. 마차를 끌고 가던 군중은 그들과 충돌했다. 사태는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 돌이 빗발치듯 쏟아지고, 총이 사방에서 불을 뿜고 수많은 군중들이 쏟아져 나왔다. 눈 깜짝할 새 청년들은 병사들을 공격하고 병사들은 군도를 휘두르고 군중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이 소식은 삽시간에 파리에 퍼져갔다. "무기를 들어라!" 하고 외치고 뛰고 도망치고 저항했다. 마치 바람이 불길을 부채질하듯 분노는 폭동을 사방으로 퍼뜨렸다. 15분도 채 못되어 파리 각처에서는 약탈과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노동자와 학생들은 성명서를 낭독하고 무기를 들라고 외치면서 길바닥의 돌을 집어들고 집집마다 대문을 때려부수고 가로수를 뽑고 온갖 잡동사니를 쌓아올려 바리케이드를 만들고있었다. 불과 한 시간도 못 되어 파리 중앙 시장 구역에서만 스물일곱 개의 바리케이드가 마치 땅에서 솟아난 듯 생겨났다. 반란군은 한편으로는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비군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불과 세 시간도 못 가서 폭도들은 병기창, 구청, 시장 부근 모든 거리를 점령했다. 파리 곳곳에서는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폭도들이 군대 무기를 빼앗고 집집을 수색하고 무기상점에 떼지어 몰려간 결과, 돌팔매질로 시작된 싸움은 이제 총격전으로 변해 있었다. 파리 중앙 시장 쪽에서 랑뷔토 거리로 들어서면 오른 쪽에는 샹브르리라는 거리가 나온다. 이 거리는 아주 이상하게 구획이 이루어져 있어서 좁은 골목길이 쭉나있는 꼬불꼬불한 미로였다. 이곳에는 코랭트라는 유명한 술집이 있었다. 이 3층짜리 집은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거리입구는 넓고 안쪽은 좁은 막다른 골목이었다. 술집이 바로 그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서 길 양쪽을 쉽게 막을 수 있었으므로 공격은 바로 앞에서만 가능한 곳이었다. 군중들이 이곳으로 우르르 몰려들자 그 일대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순식간에 집집마다 문에는 빗장이 걸렸고 사람들은 모두 모습을 감추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마리우스가 법률학교에 다닐 때 알게 된 친구인 앙졸라가 조직한 'ABC의 벗'이라는 비밀결사 회원들이었다. 그들은 합세한 폭도들과 함께 술집 창틀에서 창살을 뽑고 길바닥에 깔린 포석을 뜯어냈다. 지하실에 있는 빈 술통을 모조리 가져왔다. 이웃집 대들보도 몇 개 뽑아다 바리케이드를 쌓기 시작했다. 바리케이드 두 개가 코랭트를 가운데로 해서 직각을 이루고 세워졌다. 50명 정도 되는 폭도들은 소총을 갖고 있었다. 바리케이드를 완성하고 붉은 기를 꽂은 뒤 총알을 나눠가졌다. 그들은 엄숙하게 천천히 총알을 장전했다. 앙졸라는 바리케이드 밖에 세 명의 보초를 세웠다. 이렇게 모든 준비가 끝나자 그들은 어둠과 고요 속에서 무장을 하고 각오를 하고 차분히 기다리고 있었다. 혁명의 날은 저물어 이제 밤이 되었지만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들리는 것은 이따금 멀리서 들리는 총소리뿐이었다. 이렇게 공격이 지체된다는 것은 정부가 시간을 끌어서 그 틈에 병력을 모으고 있다는 증거였다. 지금 여기 모인 50명의 사람들은 6만 명의 적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었다. 사람들은 아래층 홀에 모여 앉아 있었다. 그때 한 사나이가 들어오더니 가장 어두컴컴한 탁자에 가 앉았다. 그는 커다란 군용 총을 두 무릎 사이에 끼고 있었다. 그런데 앙졸라에게 누군가가 급히 오더니 말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이 바로 경찰 밀정이야." "그게 정말이야?" "얼마 전에 내가 다리 난간에서 바람을 쐬고 있는데 저 작자가 와서 날 혼낸 적이 있었어." 앙졸라는 술통을 나르던 사람에게 가서 뭐라고 속삭였다. 그는 당장 홀을 나가더니 세 명의 동료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그 사나이가 팔을 괴고 있는 탁자 뒤로 살그머니 가서 늘어섰다. 앙졸라는 그 사나이한테 다가서서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갑작스런 질문에 사나이는 움찔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건방지고 다부진 웃음을 짓더니 거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묻는 뜻을 알겠다. 네가 생각한 그대로다." "당신, 밀정이지?" "그 계통 사람이다." "이름은?" "자베르." 앙졸라는 사나이들에게 신호를 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자베르는 목덜미를 잡힌 채 쓰러지고 묶여서 몸수색을 당했다. 시경국장 서명이 든 '총경 자베르, 52세'라고 쓰인 카드가 나왔다. 사람들은 그를 일으켜 세우고 양팔을 등뒤에 묶어 홀 한복판 기둥에 붙들어맸다. 자베르는 단단히 묶인 채, 평생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답게 용감하고 태연하게 머리를 쳐들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은 아주 재빠르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술집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사건은 끝난 뒤였다. 자베르는 단 한번도 고함을 치지 않았다. "바리케이드가 점령되기 2분 전에 너를 총살하겠다." 앙졸라가 자베르에게 말했다. 자베르는 아주 건방진 말투로 대꾸했다. "왜 당장 하지 않는 거냐?" "화약을 아끼기 위해서지." 앙졸라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칼로 해치워 주게!" "이봐, 밀정." 하고 앙졸라가 말했다. "우린 심판자지 도살자가 아니야." 2.
해질녘 어둠을 틈타 마리우스를 샹브르리 거리로 불러들인 그 목소리는 그에게는 마치 운명의 부름처럼 들렸다. 코제트를 영원히 잃게 되었다고 생각하자 죽고 싶었는데 그 기회가 온 것이었다. 청춘과 사랑에 도취해서 두 달 동안 꿈속에서 살아온 지금에 와서는 비참한 인생을 빨리 끝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마리우스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플뤼메 거리에서 대로로 빠져나와 걷기 시작했다. 샹브르리 거리로 가까이 갈수록 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다. 가게문들은 굳게 닫혀 있었고 둔하고 무거운 웅성거림만 들려왔다. 아르브르 세크 분수 근처에는 움직이지 않는 한 무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군중의 물결은 거리 어귀에서 한데 뒤엉켜 웅성거리고 있었다. 보잘 것 없는 차림을 한 군중들에게는 공포의 빛이 서려있었다. 빽빽한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가보니 거리에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거기에서 군중은 멈춰 섰으며 그쪽 앞은 군인들의 지대였다. 마리우스는 군중 속을 헤치고 나와서 군대 옆을 지나 순찰대대와 보초병 눈을 피해 앞으로 나갔다. 길을 돌아 중앙 시장 쪽으로 향했다. 오싹 소름이 끼치는 그 음산한 동네로 들어섰던 것이다. 이곳은 이웃 어느 거리보다도 조용하고 어두웠다. 하지만 불그레한 불빛이 샹브르리 거리 쪽을 막고 있는 집들의 높은 지붕을 뚜렷이 드러내 보이고있었다. 코랭트 술집을 둘러싼 바리케이드 속에서 타고 있는 횃불에서 반사된 빛이었다. 마리우스는 그 불빛을 목표로 걸어갔다. 조금 가자 술집 건물과 그 앞에 총을 무릎에 올려놓고 쭈그리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마리우스는 아버지 퐁메르시 대령을 생각했다. 대령은 그 수많은 전쟁터에서 20년 세월을 보냈고 프랑스를 위해 모든 의무와 봉사를 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제 자기도 나설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마리우스가 바리케이드 앞에 나서자 사람들이 주위로 모여들었다. "네가 왔구나!" "정말 다행이다." 친구들 말소리가 들렸다. 그의 머리속은 회오리바람이 부는 것처럼 복잡했다. 기쁨과 사랑으로 보냈던 지난 2개월 동안의 사랑이 갑자기 끝나고, 코제트가 곁을 떠난 일도, 바리케이드도, 폭도가 된 자신도 무서운 꿈처럼 생각되었다. 거리 반대쪽에서는 병사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횃불에 총칼이 번쩍이고 있었다. "누구냐?" 하는 소리와 함께 철커덕 하고 총알을 재는 소리가 들렸다. 앙졸라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프랑스 혁명군이다!" "쏴라!" 하고 그 목소리가 명령했다. 그 순간 눈부신 빛이 길가 집들 정면을 온통 시뻘겋게 밝혔다. 무시무시한 폭발음이 바리케이드를 뒤흔들었다. 붉은 기가 넘어졌다. 상대방 병력은 1개 연대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총소리와 함께 공격병들이 바리케이드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전투경찰대와 시민군들이 총을 겨누고 윗몸을 드러낸 채 떼지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횃불은 그들의 총검과 초조한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폭도들은 습격을 받고 당황했지만 대열을 다시 갖추었다. 대부분 폭도들은 이층이나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공격군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용감한 몇 사람은 집 벽에 기대어 바리케이드 위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군대와 맞서고 있었다. "무기를 버려라!" 하고 장교 하나가 군도를 빼들고 말했다. "쏴라!" 앙졸라가 외쳤다. 양쪽에서 동시에 폭발음이 터지며 모든 것이 연기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숨이 막힐 듯한 연기가 자욱한 속에서 죽어 가는 사람과 부상자들이 쓰러져 가냘픈 신음이 들려왔다. 공격군은 더 이상 쳐들어오지 않았다. 지원병력을 기다리는 것인지 다른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습격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바리케이드에서도 철수하고는 거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폭도들은 바리케이드를 다시 찾게 되었다. 더 이상 공격이 없기에 그곳에 보초를 세워두었다. 몇몇 의대생들은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마리우스는 그 근처를 순찰하면서 작은 바리케이드 쪽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고 조용했다. 그곳을 에워싼 거리들도 아주 고요했다. 순찰을 마치고 막 돌아서는데 어둠 속에서 자기 이름을 부르는 가냘픈 소리가 들려왔다. "마리우스 씨." 그는 깜짝 놀랐다. 얼마 전 플뤼메 거리 정원 밖에서 그를 부른 목소리였다. "마리우스 씨." 하고 그 목소리가 다시 불렀다. 몸을 굽혀서 자세히 살펴보니 누가 길바닥 위를 기어오고 있었다. 등불 빛으로 작업복 윗도리와 낡고 찢어진 바지, 맨발, 그리고 피가 흥건히 괸 자국이 어렴풋이 눈에 띄었다. 그 창백한 얼굴이 마리우스 쪽을 보고 말했다. "저 에포닌이에요." 마리우스는 깜짝 놀라 몸을 굽혔다. "아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난 곧 죽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마리우스는 놀라서 부르짖었다. "어디? 어딜 다쳤어? 아니, 여기는 뭐 하러 왔어?" 그러면서 그는 그녀 밑으로 팔을 넣어 안아 올렸다. "많이 다쳤어? 금방 치료를 받게 해 줄게." 그녀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총알이 등으로 빠져나갔어요. 여기서 옮겨봤자 소용없어요. 그보다도 당신 옆 돌바닥에 내려주고 제 옆에 앉으세요." 마리우스는 그녀 말대로 했다. 그녀는 마리우스 무릎에 머리를 올려놓고 그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아, 이젠 기분이 나아졌어요. 하나도 아프지 않아요." 그녀는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 마리우스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마리우스 씨 아세요? 저는 당신한테 그 집을 가르쳐 드리고도 그곳에 당신이 드나드는 것이 싫어서 견딜 수 없었어요. 저 정말 바보지요? " 그녀는 또 말을 끊었다. 그리고 가슴 속에 품고 있었을 갖가지 어두운 추억들을 뛰어넘어 애처로운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절 못생긴 여자라고 생각하셨지요? 하지만 이젠 당신도 끝장이에요. 당신을 여기로 끌고 온 게 바로 저예요. 이젠 아무도 이 바리케이드에서 빠져나갈 수 없어요. 당신은 머지않아 죽을 거예요. 전 당신이 이렇게 여기서 죽기를 바랐어요. 하지만 전 당신보다 먼저 죽고 싶었어요. 오래 전에 당신은 나한테 5프랑을 주었지요? 생각나세요? 하지만 전 돈을 바란 것이 아니었어요. 아마 전 당신을 사랑했나봐요." 그녀는 제정신이 아닌 듯 엄숙하고도 애처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찢어진 작업복 사이로 가슴이 드러나 보였다. 그녀는 말을 하면서 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있었지만, 가슴에 뚫린 구멍에서 빨간 피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리우스는 이 불쌍한 소녀를 측은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제 말 잘 들으세요. 제 호주머니 속에 당신께 전해 달라는 편지가 들어 있어요. 우연히 부탁을 받았어요. 이 편지가 당신 손에 들어가는 것이 싫어서 전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이대로 헤어지면 조금 뒤에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나게 될 때 제게 화를 내시겠지요. 편지를 꺼내가세요." 그녀는 경련을 일으키며 손으로는 마리우스 손을 잡고 있었지만 이미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편지를 드렸으니까 그 대신 약속을 하나 해주세요." "뭔데?" "약속해주세요. 제가 죽거든 제 이마에 입을 맞추어주시겠다고 약속해주세요. 저는 죽어서도 그걸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마리우스 무릎 위에 머리를 떨어뜨리고는 눈을 감았다. 에포닌은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리우스는 차디찬 땀방울이 맺혀 있는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한 불행한 영혼에게 보내는 다정하고도 경건한 이별의 인사였다. 에포닌이 전해 준 편지를 손에 들자 자신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소녀의 몸을 살며시 땅 위에 내려놓고 편지를 꺼내어 읽었다. 사랑하는 당신께, 큰일났어요. 아버님께서 당장에 출발하겠다고 하십니다. 오늘 밤은 롬 아르메 거리 7번지에 있게 돼요. 일주일 후에는 런던에 가 있을 겁니다. 코제트 올림.
이제까지의 일은 모두 에포닌이 꾸민 연극이었다. 그녀는 마리우스가 코제트 집에 드나드는 것이 싫어서 그들을 떼어놓을 작정이었다. 그녀는 지나가던 젊은 부랑배 하나와 옷을 바꾸어 입었다. 연병장에 앉아 있던 장 발장에게 이사하라고 경고를 준 것도 바로 그녀였다. 장 발장은 과연 집으로 돌아와 코제트에게 당장 이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코제트는 그 말을 듣고 서둘러 마리우스에게 짧은 편지를 썼다. 하지만 그 편지를 우체통에 넣으러 밖으로 나갈 길이 없었다. 그런 걱정을 하고 있다가 마침 울타리 너머에 서 있던 남자옷 차림의 에포닌을 발견했다. 에포닌은 그 일이 있은 뒤 줄곧 이 정원 주위를 얼쩡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코제트는 이 젊은 노동자를 불러 5프랑과 편지를 주면서 우체통에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편지를 읽어본 에포닌은 질투와 연정에 불타올랐다. '어차피 죽기는 마찬가지니까 바리케이드로 가서 죽어버리겠다, 그리고 마리우스도 끌어들여 함께 죽어버리자' 하고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죽음 속에 끌어들이고, '이제는 그 누구도 그이를 빼앗아갈 수 없을 거야.' 하는 질투심이 갖는 비통한 기쁨을 느끼면서 죽어갔던 것이다. 마리우스는 코제트의 편지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어차피 코제트 아버지는 그녀를 영국으로 데리고 갈 것이고 할아버지는 결혼을 반대하고 있었다. 결국 죽어야 한다는 운명은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코제트에게 자기 죽음을 알리고 마지막 이별 인사를 하는 일이었다. 그는 늘 품에 지니고 다니는 수첩을 꺼내 코제트에게 편지를 썼다. 그 종이를 넷으로 접은 다음 겉에다 롬 아르메 거리 주소를 썼다. 편지를 접은 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는 수첩 첫 장을 열어 거기에 자기 이름과 할아버지 집 주소를 써넣었다. 그는 수첩을 다시 품에 넣은 뒤, 바리케이드 안에서 폭도들 심부름을 하고 있던 한 소년을 불렀다. "내 심부름을 좀 해줄 수 있겠니?" "뭐든지 말씀만 하세요." "이 편지를 갖고서 당장 바리케이드에서 나가라. 그리고 이 편지에 적힌 주소를 찾아가서 코제트 양에게 전해주기만 하면 된다." 3.
6월 5일 밤 장 발장은 코제트와 하녀를 데리고 롬 아르메 거리로 급히 이사를 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코제트는 갑작스럽게 이사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이 같이 살게 된 이후 처음으로 코제트 마음과 장 발장의 뜻이 분명하게 맞섰던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롬 아르메 거리에 도착하기까지 제각기 자기 생각에만 빠져 있느라 입을 꼭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장 발장은 불안한 마음에 코제트의 슬픔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간단하게 저녁을 먹었다. 식사하는 동안 하녀가 서너 번이나 되풀이해서 말했다. "나리, 난리가 났어요. 시내에 싸움이 벌어졌어요." 그러나 그는 이 생각 저 생각에 정신이 팔려 그 말은 한마디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코제트를 데리고 영국으로 갈 계획을 마음속으로 차근차근 세우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자 코제트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고 장 발장은 천천히 식당 안을 거닐고 있는데 문득 눈길이 어떤 이상한 것에 가서 멎었다. 눈앞 찬장 위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는 거울 속에 몇 줄의 글이 보였다. '사랑하는 당신께' 하고 시작되는 코제트의 편지였다. 코제트는 압지를 거울 앞에 놓고서 편지를 썼던 것이었다. 이제 편지는 없었지만 고스란히 압지 위에 박힌 그 글자들이 거울에 똑바로 비치고 있었다. 장 발장은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그 글을 되풀이해서 읽었지만 믿어지지가 않았다. 장 발장은 코제트를 아버지로서만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줄곧 독신으로 지내왔기 때문에 거기에는 온갖 종류의 사랑이 함께 깃들어 있었다. 그는 코제트를 딸처럼 사랑했고 어머니처럼 사랑했으며 누이동생처럼 사랑했다. 그는 지금까지 코제트를 집으로 가정으로 조국으로 천국으로 삼고서 살아왔던 것이다. 이제 코제트가 다른 남자에게 사랑을 느껴 자기 곁에서 서서히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자 이기적인 절망이 덮쳐왔다. 이제 코제트가 사랑하는 사람은 따로 있고 자기는 있으나마나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자 괴롭기 짝이 없었다. 충동적으로 그는 모자도 쓰지 않고 집을 나와 문 앞에 멍청히 앉아 있었다. 거리는 조용했다. 허둥지둥 집으로 돌아가는 시민들 몇 명밖에 없었다. 중앙시장 쪽에서 일제히 총소리가 들려왔다. 샹브르리 바리케이드에서 난 총소리였을 것이다. 그제야 그는 하녀가 한 말이 생각났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얼른 눈을 들었다. 한 소년이 롬 아르메 거리로 들어오더니 집들을 훑어보면서 그 쪽으로 왔다. "꼬마야, 무슨 일이냐?" "배가 고파요." 장 발장은 호주머니를 뒤져 5프랑 금화를 하나 꺼내 소년에게 쥐어주었다. "아저씨는 정말 좋은 분이군요." 소년은 금화를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러고는 믿음에 찬 말투로 물었다. "이 거리에 사세요?" "그래. 왜 그러지?" "7번지가 어디에요?" "거긴 왜?" "편지를 전하러 왔거든요." 순간 장 발장 머리에 반짝이는 생각이 스쳐갔다. "혹시 코제트 양한테 온 거 아니니?" 소년은 편지를 내밀었다. "제가 저 바리케이드에서 심부름 온 걸 아시죠?" "그래, 고맙다. 그런데 답장은 어디로 보내면 되지?" "샹브르리 거리의 바리케이드에서 왔어요." 이렇게 말하고 소년은 사라졌다. 장 발장은 편지를 펴 보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우리 결혼은 불가능한 것 같소. 내게는 재산이 없고 당신도 마찬가지요. 당신 집에 갔지만 이미 당신은 없었소. 내가 당신에게 한 맹세를 기억하오? 나는 그것을 지켜려 하오. 나는 죽을 것이오. 당신을 사랑하오. 마리우스.
장 발장은 문지기를 깨웠다. 문지기가 이웃을 찾아다니며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구해다 주었다. 장 발장은 시민군 제복으로 갈아입고 탄환을 잰 총과 탄약이 가득 든 탄창을 들고 중앙시장 쪽으로 걸어갔다.
폭도들은 앙졸라 지휘를 받아 밤의 어둠을 틈타서 다시 일했다. 바리케이드를 수리했고 위로 60센티미터 가량 더 높이 쌓았다. 아래층 홀을 깨끗이 치우고 부엌은 임시 병원으로 만들어 부상자들을 치료해 주었다. 시체들은 그들이 점령하고 있던 골목에 쌓아놓았다. 바깥으로 정찰을 나갔던 사람이 돌아왔다. "파리의 모든 군대가 동원되었소. 그 중 삼분의 일은 바로 이 바리케이드로 공격해 올 거요. 게다가 시민군까지 합세하고 있소. 아마 한 시간 뒤에는 공격을 받게 될 거요." 가장 어두운 안쪽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좋소. 모두들 여기서 버팁시다. 시체가 되어서라도 항쟁합니다. 공화주의자들은 민중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시다!" 그 말은 모든 사람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그때 마리우스는 바리케이드 안에 서 있는 장 발장을 보았다. 그는 시민군 복장 때문에 군대쪽 공격선을 쉽게 통과해 올 수 있었다. 폭도 쪽에서는 그가 단 한 사람의 시민군이라 안심하고 그대로 통과시켰다. 장 발장은 바리케이드 안의 광경을 눈으로 보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나더니 잠자코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서 던졌다. "저 사람은 누구야?" 하고 누군가가 물었다. "내가 아는 분이야.“ 마리우스가 엄숙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 한 마디로 모든 사람들은 안심했다. 앙졸라가 장 발장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잘 오셨습니다. 동지."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잘 아시겠지만 우리는 이제 모두 죽을 겁니다." 날이 차츰 밝아오고 있었다. 거리는 음산할 정도로 조용했다. 조금지나 해가 비쳐 환해지자 웅성대는 소리가 거리 쪽에서 또렷하게 들려왔다. 대포가 나타났던 것이다. 포병들이 포차를 밀고 있었다. "사격 개시!" 하고 앙졸라가 외쳤다. 바리케이드와 대포가 전부 불을 뿜었다. 포탄 소리는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포병들이나 폭도들은 하나도 부상당하지 않았다. 포병들은 다시 포탄을 쏘기 위해 조준하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포구가 바리케이드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두 번째 포탄이 발사되고 폭음이 울려 퍼졌다. 포탄은 다행히도 바리케이드를 다치지 않고 마차 바퀴만 하나 부수었다. 폭도들은 환성을 올렸다. 하지만 포격이 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 산탄 세례를 계속 받게 되면 15분 이상을 견뎌내기 힘들 것 같았다. 앙졸라가 명령을 내렸다. "저 앞에 짚요를 갖다 놓아야겠어." "이젠 짚요가 없는데요." 장 발장은 술집 모퉁이 길 위에 혼자 떨어져 앉아 있었다. 그는 그때까지는 전혀 전투에 끼여들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앙졸라 명령을 듣자 자리에서 얼른 일어섰다. 폭도 집단이 샹브르리 거리로 모여들었을 때 어떤 노파 하나가 총알이 날아올 것을 예상하고 짚요를 7층 건물에 있는 자기 집 다락방 창문 앞에다 매달아 놓았다. 짚요는 비스듬히 두 가닥 밧줄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멀리서 보면 가느다란 두 가닥 실처럼 보였다. 장 발장은 앙졸라의 2연발 총을 빌렸다. 다락방을 겨눈 다음 방아쇠를 당겼다. 밧줄 한 가닥이 끊어졌다. 두 번째 총알로 두 번째 밧줄이 깨끗하게 끊어지면서 짚요는 거리로 떨어졌다. 바리케이드에서 박수 갈채가 터졌다. "자, 짚요가 생겼다!" 모든 사람들이 소리질렀다. "그런데 누가 저걸 가져오지?" 짚요는 바리케이드 밖, 공격군과 방어군 중간에 떨어져 있었다. 포병들은 다시 포격 준비가 갖춰질 때까지 바리케이드를 향해 총을 쏘고 있었다. 바리케이드에 맞아서 미친 듯이 총알이 튀어나오는 거리는 아주 위험했다. 장 발장은 빗발치듯 쏟아지는 총알을 뚫고 달려가 짚요를 집더니 등에 업고 돌아왔다. 그는 직접 짚요를 바리케이드 갈라진 틈에 갖다 막았다. 이 일이 끝나자 모두들 산탄 공격을 기다렸다. 대포가 요란한 폭음을 울리며 산탄 한 덩어리를 토해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도 튀지 않았다. 바리케이드는 안전했다. "동지여." 앙졸라가 장 발장에게 말했다. "공화국은 그대에게 감사드립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감탄해서 웃고 있었다. 공격군의 사격은 계속되고 있었다. 소총 사격과 산탄이 번갈아 발사되자 주점 앞면 윗부분이 피해를 조금 입었다. 하지만 폭도들은 총을 쏠 수 없었다. 탄환도 화약도 아껴 써야 하기 때문이었다. 근처 높은 지붕 위에서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투구 하나가 보였다. 병사 하나가 이쪽을 정찰하는 모양이었다. 장 발장은 소총을 들어올렸다. 말없이 그 병사를 총으로 겨누었다. 순식간에 철모는 총알을 맞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거리로 떨어졌다. 깜짝 놀란 병사는 부리나케 몸을 숨겼다. 두 번째 정찰병이 다시 그 자리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장교였다. 재빨리 다시 총알을 잰 장 발장은 한 방으로 그 장교 철모도 길 위로 떨어뜨렸다. 이번에는 경고가 통한 모양이었다. 다시는 아무도 지붕 위에 나타나지 않았다. "왜 그자를 죽이지 않았소?" 하고 누군가가 물었다. 장 발장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4.
열두 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어깨에 도끼를 멘 공병들이 거리 끝에서 나타났다. 이제 마지막 결전 순간이 온 것을 안 앙졸라는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1분도 안 되어 사람들은 술집 앞에 쌓여 있던 포석을 술집 안 이층으로 운반해 창문을 절반가량 막았다. 그리고 아래층 창문과 문을 굳게 닫았다. 요새는 완벽해졌다. 그들은 죽을 각오를 하고 버티고 있었다. 앙졸라는 홀로 들어가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이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스물여섯 명만 남아 있었다. 스무 명은 바리케이드로 갔고 여섯 명은 이층 창문에 숨어서 포석 총구멍으로 공격군을 쏠 준비를 했다. 그렇게 사람들을 배치한 뒤 그는 자베르 쪽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나가는 자가 이 밀정 머리를 쏘기로 한다." 거기에 장 발장이 나타났다. 그가 앙졸라에게 물었다. "당신이 지휘자요?" "그렇소." "아까 내게 고맙다고 했지요?" "그렇소, 공화국의 이름으로요." "저 사나이를 내 손으로 쏘게 해 주시오." 자베르는 고개를 들어 장 발장을 보았다. 그리고 거의 눈에 띄지 않게 몸을 움직이더니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당연하지." 앙졸라는 장 발장 쪽으로 돌아섰다. "이 밀정을 끌고 가시오." 거의 동시에 나팔소리가 들렸다. "습격이다!" 바리케이드 꼭대기에서 누가 소리쳤다. "모두 밖으로!" 하고 앙졸라가 외쳤다. 폭도들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장 발장은 자베르와 단둘이 남게 되자 기둥에 묶여있던 그를 풀었다. 자베르는 일어섰다. 그는 아주 기묘한 웃음을 짓고있었다. 자베르가 앞장을 서고 장 발장은 그 뒤를 따라 술집 밖으로 나가 바리케이드 안 네모난 빈터를 지나갔다. 폭도들은 절박한 상황에 정신이 팔려서 이쪽으로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들은 골목에 있는 작은 벽을 타고 넘어갔다. 골목길에는 그들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자베르가 말했다. "자, 복수해라." 장 발장은 안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자베르의 손을 묶었던 밧줄과 발을 묶었던 가느다란 줄을 끊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이제 당신은 자유요." 자베르는 아연해서 입을 벌린 채 꼼짝 않고 서있었다. 장 발장은 계속해서 말했다. "난 아마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오. 하지만 내가 여기서 다행히 나간다면, 포슐르방이라는 이름으로 롬 아르메 거리 7번지에 살고 있으니 그리로 찾아오시오. 자, 이제 가시오" "포슐르방이라고 했지, 롬 아르메 거리?" "7번지요." 자베르는 돌아서서 팔짱을 낀 채 시장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장 발장은 눈으로 그를 좇았다. 자베르는 대여섯 걸음 가더니 뒤돌아서서 장 발장에게 소리쳤다. "당신은 날 괴롭히고 있군. 차라리 나를 죽여주시오." "어서 가시오." 하고 장 발장은 말했다. 자베르는 느릿느릿 걸어서 멀어져갔다. 그가 보이게 되지 않자 장 발장은 하늘을 향해 총을 한 방 쏘았다. 그러고 나서 바리케이드로 돌아와 말했다. "해치웠소." 바리케이드에는 드디어 죽음의 고통이 시작되고있었다. 돌격을 알리는 북이 울렸다. 군대는 정면에서 바리케이드를 향해 돌진했다. 보병들이 시민군에 뒤섞여 거리 한복판으로 달려 진격했다. 바리케이드 한쪽 끝에는 앙졸라가 있었고 다른 쪽 끝에는 마리우스가 있었다. 마리우스는 몸을 드러내놓고 싸우고 있었다. 그는 격렬하게 싸우면서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꿈속에 있는 것처럼 전쟁 속에 있었다. 폭도들은 맹렬한 기세로 사격을 했다. 하지만 방어군의 탄약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공격군은 끊임없이 새로운 병력을 보강하면서, 비오듯 쏟아지는 총탄 속에서도 힘으로 밀어붙여 왔다. 그리고 조금씩 바리케이드를 죄어왔다. 그들은 서로 육박전을 벌려 권총을 쏘고 군도를 휘둘렀다. 코랭트 술집 정면은 절반 이상 파괴되고 창문 유리도 창틀도 날아가버렸다. 많은 폭도들이 죽어갔다. 마리우스는 아직도 싸우고 있었지만 온몸에 부상을 당했고 특히 머리를 심하게 다쳐서 얼굴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앙졸라만 무사했다. 그는 군도를 휘두르며 마지막까지 싸움을 지휘하다가 "들어가라!“ 하고 외쳤다. 사람들은 모두들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마리우스는 밖에 남겨졌다. 어깨에 총알을 한방 맞았던 것이다. 몸은 꺼져가는 것 같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이미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 순간 억센 손이 자기를 붙잡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의식을 잃으면서도 코제트에 대한 생각을 마지막으로 떠올렸다. 창문과 지붕에서 폭도들은 포석을 빗발처럼 떨어뜨렸다. 공격도 맹렬했지만 방어도 필사적이었다. 군대가 문을 부수고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위층에 올라가있었다. 그때 그곳 계단 입구에서 무서운 폭발이 일어났다. 그것은 마지막 화약이었다. 화약이 다 떨어진 폭도들은 닥치는 대로 손에 잡히는 것을 붙잡아 그들에게 대항했지만 쏟아지는 총알 세례에 하나씩 쓰러져갔다. 마침내 공격군들은 벽을 기어올라 천장에 매달려 사나운 기세로 이층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은 앙졸라밖에 없었다. 그는 대담하게 자기 가슴을 내밀었다. "쏴라!" 그는 총알을 여덟 발을 맞고 머리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잠시 후 병사들은 다락방에 숨어 있던 마지막 폭도들을 해치우고는 이웃집들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5.
쓰러지는 마리우스를 붙잡은 사람은 장 발장이었다. 그는 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줄곧 마리우스한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마침 공격은 앙졸라와 코랭트 정문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정신을 잃은 마리우스를 안고 빈터를 가로질러서 코랭트 모퉁이로 사라져가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퉁이 안쪽에서 장 발장은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상황은 매우 위험했다. 이곳을 빠져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앞에는 7층 건물이 서 있고 오른쪽에 있는 낮은 바리케이드 너머로는 총검이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보병들이 거기에 배치되어 기다리고 있었다. 왼쪽은 싸움터였다. 죽음은 등 뒤의 벽모퉁이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장 발장은 절박하고 필사적인 심정으로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보고 있는 동안 막연하게 희미한 어떤 것이 나타나 그의 발밑에서 확실한 모습을 이루었다. 바리케이드 바로 밑에 쌓여 있는 포석 더미 아래에는 반쯤 가려진 납작한 쇠창살이 놓여 있었다. 사방 2미터 가량 되는 창살을 받치고있던 포석 틀은 떨어져나가 있었다. 쇠철봉 사이로 시커먼 입구가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옛날 탈주 방법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포석을 치우고 격자를 들어올린 다음 시체처럼 늘어진 마리우스를 어깨에 둘러메고 그 구덩이 속으로 내려가 머리 위로 무거운 쇠뚜껑을 떨어뜨려 닫았다. 그렇게 하는 데는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장 발장은 여전히 정신을 잃고 있는 마리우스를 메고 그 기다란 지하도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깊은 평화와 침묵과 어둠만이 있었다. 옛날 수녀원 안으로 뛰어내렸을 때 느낌이 되살아났다. 다만 지금 그가 메고 있는 것은 코제트가 아니라 마리우스인 것이 달랐다. 장 발장이 들어간 곳은 그 유명한 파리의 대하수도였다. 그곳은 길이가 백리도 넘는 미로였다. 꾸불거리고 복잡하게 파리 시내 밑을 뚫고 흐르고 있었다. 장 발장은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머리 위 몇 미터 안되는 곳에서 휘몰아치고 있는 살인의 폭풍은 땅에 가로막혀 지금은 희미하고 어렴풋한 소리로 전해져 왔다. 손으로 옆을 휘저어 보았다. 통로는 좁았으며 발은 미끄러웠고 바닥은 젖어 있었다. 앞으로 조금 나가자 앞이 보이게 되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것이었다. 조금씩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 볼 수 있게 되었다.
얼마쯤 걸어나가자 그는 발을 멈추었다. 지하도는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난처했다. 하지만 이 미로에는 하나의 단서가 있었다. 바로 바닥의 기울어진 정도였다. 기울어진 곳을 따라 내려가면 강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을 그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자기가 있는 곳은 중앙시장 하수도일 거라고 짐작했다. 왼쪽 길을 택해 경사를 따라가면 센 강으로 나가는 출구쯤에 도착하게 된다. 파리의 가장 번화한 곳으로 대낮에 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는 차라리 어둠에 몸을 맡기고, 나가는 곳은 하느님의 뜻에 맡기겠다고 결심했다. 경사를 더듬어 올라가 오른쪽으로 돌았다. 모퉁이를 돌자 또다시 어둠의 벽에 부딪쳤다. 마리우스의 팔은 그의 목에 걸쳐져 있었고 다리는 그의 등 뒤로 늘어져 있었다. 마리우스에게서 흐르는 미지근한 피가 옷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장 발장은 힘겹게 그곳을 걸어갔다. 방향을 정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가 들어간 곳은 몽마르트르 하수도로서, 낡은 그물코처럼 뻗친 하수도 중에서도 가장 복잡한 미로 가운데 하나였다. 다행히 그는 짐작대로 중앙시장 밑 하수도를 통과했지만 그곳에는 여기저기 지그재그로 얽힌 막다른 골목과 굴이 이어져 있었다. 대하수도를 안전하게 나가려면 허리띠 하수도라고 불리는 길을 더듬어 갈 수밖에 없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불안하기만 했다. 나가는 문을 찾을 수 있을 것인지, 탈출할 수 없는 곳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닌지, 하수도 속에서 마리우스와 자기가 출혈과 굶주림 때문에 죽게 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만 떠올랐다. 갈림길에 도착할 때마다 그는 모퉁이를 더듬어 보았다. 갈림길이 지금 그가 있는 곳보다 좁을 때는 구부러지지 않고 곧장 걸어나갔다. 좁은 길은 모두 막다른 골목일 것이고 그러면 나가는 문에서 멀어진다는 정확한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함정들을 피하면서 앞으로 걸어나갔다. 길은 점점 어려워져 갔다. 천장 높이는 사람 키 정도였지만 마리우스가 천장에 부딪치지 않도록 몸을 구부리고 걸어야 했다. 바닥은 미끈거려서 발을 딛기에 든든하지 않았다. 그는 더러운 도시의 배설물과 고약한 냄새 속을 비틀거리며 나아갔다. 허기와 갈증을 느꼈다. 그의 체력은 대단했지만 이번만은 온몸이 축 늘어지는 것 같았다. 피로가 엄습해 오자 마리우스가 점점 무겁게 느껴졌다. 드디어 오후 세 시쯤 허리띠 하수도에 도착했다. 그곳은 아주 넓었고 천장도 머리에 닿지 않았다. 장 발장은 걸음을 멈추고 마리우스를 조심스레 돌바닥 위에 내려놓았다. 손가락으로 마리우스 옷을 헤치고 가슴에 손을 대 보았다. 심장은 아직도 뛰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셔츠를 찢어내어 상처를 잘 묶었다. 마리우스 옷을 헤치면서 그는 주머니에서 두 가지 물건을 발견했다. 전날 마리우스가 넣어두고서 먹는 걸 잊었던 빵 한 조각과 수첩이었다. 그는 빵을 먹으며 수첩을 펴 보았다. '내 이름은 마리우스 퐁메르시오. 내 시체는 피유 뒤 칼베르 거리 6번지에 사시는 할아버지 질노르망 씨께 보내주기 바라오.' 장 발장은 한참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빵을 먹고 나자 조금 기운이 났다. 그는 마리우스를 등에 업은 다음 다시 하수도를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어디를 지나왔는지, 어디쯤 지나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다만 이따금 만나게 되는 빛이 엷어지는 것을 보고는 점점 해가 기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머리 위에서 마차가 굴러가는 소리도 뜸해지더니 거의 들리지 않게 되었다. 파리 교외로 빠져나온 모양이었다. 주위는 어둠이 짙어가고 있었다. 그는 점점 힘이 빠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빨리 걸었다. 마지막 모퉁이에 도달해 벽에 닿자 그는 눈을 크게 치켜 떴다. 저 앞쪽에 한 줄기 빛이 보였다. 햇빛이었다. 나가는 문이었다. 마치 지옥에 떨어져 불길이 활활 타는 아궁이 한복판에 있다가 갑자기 탈출하는 문을 찾은 영혼처럼 장 발장은 이제는 힘들지 않았다. 마리우스의 몸무게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달려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문이 점점 또렷하게 보였다. 아치 모양 문에는 쇠창살이 걸려 있었고 거기에는 단단한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장 발장은 마리우스를 바닥에 내려놓은 뒤 문으로 가서 두 손으로 쇠창살을 잡고 힘껏 흔들어보았다. 문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창살을 하나씩 흔들어보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문을 열 방법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지나온 무서운 길을 되돌아갈 만한 힘은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은 끝났다. 지금까지 한 고생도 모두 허사도 돌아가고 만 것이었다. 마리우스를 눕힌 돌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머리를 무릎 사이에 파묻었다. 그 깊은 절망 속에서 그는 코제트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넋을 놓고 앉아 있는데 갑자기 손 하나가 어깨에 얹히면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둘이 나눠먹기로 하자고." 장 발장은 그 안에서 사람 목소리를 듣게 되자 너무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한 사나이가 앞에 서 있었다. 장 발장은 그를 보자 더욱 놀라고 말았다. 바로 테나르디에였다. 하지만 장 발장은 위급한 상황에 익숙해 있었고 워낙 침착한 사람이라 곧 제정신을 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테나르디에는 지난 번 사건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 있다가 불한당들의 도움으로 탈옥했다. 그리고는 여전히 예전 생활로 돌아가 공갈협박이나 도둑질을 하면서 살아가던 중이었다. 그는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상대방을 잘 살펴보려고 했지만 진흙과 피투성이가 된 장 발장을 알아보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테나르디에가 침묵을 깨뜨렸다. "도대체 여기서 어떻게 나갈 작정이야?" 장 발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한테 열쇠가 있어. 그런데 자넨 저놈을 죽였지?" 테나르디에는 마리우스를 손으로 가리켰다. "저놈한테서 훔친 걸 반만 내놔. 그러면 문을 열어주지." 그러고는 작업복 밑에서 커다란 열쇠를 절반쯤 꺼내 보였다. 장 발장은 얼이 빠지고 말았다. 그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테나르디에의 모습으로 땅 속에서 나타난 자비로운 천사였다. 테나르디에는 계속 떠들어댔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 하수도를 여기까지 빠져나왔지? 아마 저놈을 죽이고 센 강에 던져 버리려고 죽어라고 떠메고 온 모양이군. 잘 생각한 거야. 강에다 버리면 쥐도 새도 모르게 되지." 그가 떠들수록 장 발장은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자, 결말을 내자고. 절반 나누지." 장 발장은 주머니를 뒤졌다. 그는 언제나 집에 돌아가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는 비참한 운명 때문에 항상 돈을 갖고 다녔다. 그러나 이번에는 시민군제복을 갈아입으면서 지갑을 잊었던 것이다. 돈을 꺼내보니 30프랑뿐이었다. 테나르디에는 말했다. "별로 많지도 않은데 죽였군." 그러더니 천연스럽게 자기 옷처럼 장 발장과 마리우스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테나르디에는 마리우스 옷을 뒤적이면서 장 발장 모르게 재빠른 손놀림으로 옷자락을 한 조각 뜯어서 자기 작업복 안에 넣었다. 아마 그 헝겊 조각이 나중에 이 살인자와 죽은 사람이 누군지 알아내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돈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는 30프랑을 몽땅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자, 친구. 돈을 냈으니 나가게." 그러더니 그는 낄낄 웃으면서 장 발장이 마리우스를 어깨에 짊어지는 것을 거들어주었다. 테나르디에는 밖의 동정을 살피더니 열쇠를 자물쇠에 꽂았다. 빗장이 미끄러지면서 열렸다. 문을 조심스럽게 연 그는 장 발장이 나갈 수 있을 만큼만 틈을 내주더니 다시 쇠창살을 닫고 자물쇠를 돌려서 잠그고는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
6.
장 발장은 밖으로 나왔다. 마리우스를 둑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독기와 암흑과 공포는 뒤로 물러갔다. 건강하고 깨끗하고 상쾌한 공기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주위는 조용했다.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다. 저 멀리에는 강변길과 파리와 넓은 지평선과 자유가 있었다. 그곳은 파리에서 가장 한적한 곳 가운데 하나였다. 장 발장은 몸을 굽혀 강물을 손으로 떠서 마리우스 머리 위에 조용히 몇 방울 떨어뜨렸다. 마리우스는 눈을 뜨지 않았다. 하지만 반쯤 벌어진 그의 입은 숨을 쉬고 있었다. 장 발장이 또다시 강물에 손을 넣으려고 하는데 누군가 등뒤에 서 있는 기척이 났다. 뒤를 돌아보았다. 프록코트를 입은 사나이가 팔짱을 끼고 대여섯 걸음 떨어진 곳에 버티고 서 있었다. 장 발장은 그가 자베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자베르는 뜻밖에 바리케이드에서 나오게 된 뒤 곧장 경시청으로 가서 국장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보고한 다음 즉시 자신의 임무로 되돌아갔다. 센 강 오른쪽 샹 젤리제 부근을 감시하다가 근처를 배회하던 테나르디에를 보고 뒤쫓던 중이었다. 장 발장은 하나의 장애를 넘어 또 다른 장애에 부딪친 셈이었다. 악마 같은 테나르디에를 떨구자마자 자베르 손아귀에 떨어진 일은 정말 가혹한 일이었다. 이제서야 장 발장은 짐작이 갔다. 테나르디에는 자기가 감시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나타난 장 발장을 자기 대신 경찰에게 미끼로 던져주기 위해 친절하게도 문을 열어준 것이었다. "넌 누구냐?" 자베르는 그를 알아보지 못한 모양인지 그렇게 물었다. "장 발장이오." 자베르는 다가와서 몸을 기울여 장 발장 어깨를 붙잡더니 그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나서야 그를 알아보았다. "자베르 경위." 장 발장은 말했다. "난 이렇게 당신한테 붙잡혀 있소. 날 체포하시오. 하지만 한 가지만 허락해 주시오." 자베르는 그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장 발장에게서 손을 떼고 몸을 일으킨 뒤 중얼거리듯 말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요? 그리고 저 사나이는 누구요?" "당신 마음대로 날 처리해도 좋소. 하지만 우선 이 사나이를 집으로 데려다주는 걸 도와주었으면 하오. 부탁은 그것뿐이오." 자베르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물에 적셔서, 피로 물든 마리우스 이마를 닦아주었다. "바리케이드에 있던 사나이로군." "부상을 입었소." 하고 장 발장이 말했다. "당신이 이 사나이를 여기까지 데려왔군." 자베르가 말했다. 그는 무엇엔가 마음을 빼앗긴 것 같이 넋을 잃고 있었다.자베르는 둑으로 올라가 마차를 잡았다. 그들은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빠른 속도로 바스티유 쪽으로 향했다. 마리우스는 꼼짝 않고 머리를 가슴 위에 힘없이 늘어뜨리고 자리에 쓰러져 있었다. 장 발장은 그림자로 만들어진 듯해 보였고 자베르는 돌로 만들어진 사람 같았다. 마차 안은 차가운 침묵만이 흘렀다. 마차가 피유 뒤 칼베르 6번지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이미 완전히 떨어져 있었다. 자베르가 먼저 마차에서 내려 문을 두드렸다. 그 동안 장 발장과 마부는 마리우스를 부축해서 마차에서 끌어내렸다. 잠이 깨서 나온 문지기가 밖을 내다보았다. "이 집 아들을 데리고 왔네." 자베르가 말했다. 문지기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죽은 모양이야. 바리케이드에 있는 것을 데려왔네. 가서 사람들을 깨우게." 자베르가 고함을 쳤다. 문지기는 질노르망 큰아가씨와 하녀를 깨웠다. 노인한테는 되도록 늦게 알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서 깨우지 않았다. 장 발장과 마부와 사람들은 조용히 마리우스를 이층으로 옮겼다. 그들은 다시 그 집을 나와 마차에 탔다. "자베르 경위. 집에 잠깐 들르게 해 주시오. 그 다음에는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하시오." 자베르는 한동안 잠자코 있더니 마부를 불렀다. "마부, 롬 아르메 거리 7번지." 그들은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장 발장은 코제트에게 모든 이야기를 해 주고 마리우스가 있는 곳도 가르쳐주고 그밖에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다. 이미 자기 자신에 관한 일은 끝장이 나 있었다. 그는 자베르에게 조금도 저항하지 않았다. 그의 집 앞에서 마차가 섰다. 두 사람은 마차에서 내렸다. 장 발장이 문을 두드리자 문은 곧 열렸다. "들어가 보시오." 하고 자베르는 말했다. 그러고는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소." 장 발장은 이상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자베르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장 발장은 문을 밀어서 열고 집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올라갔다. 이층에 올라와서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층계참 창문 밖으로 거리가 내려다보였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가로등 불빛이 환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밖으로 내밀었다. 그는 깜짝 놀라 멍해졌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베르는 가고 없었다. 마리우스 집에 의사가 당장 달려왔다. 의사는 진찰이 끝나자 마리우스가 다행히도 중태는 아니라고 말했다. 내상은 하나도 입지 않았다. 탄환은 수첩 때문에 옆으로 비껴나 겨드랑이에 파열상만 입혔을 뿐이었다. 빗장뼈가 부러져 있었고 두 팔에는 칼에 찔린 상처가 수없이 나 있었다. 하지만 머리 상처는 뇌까지 손상을 입은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어서 두고 보아야만 했다. 의사가 마리우스의 얼굴을 닦아주고 있는데 응접실 문이 열리며 창백한 얼굴이 나타났다. 할아버지였다. 그는 손자를 바라보았다. 마리우스는 피투성이에다 피부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고 입술은 새파랗고 온몸은 시뻘건 상처투성이에다가 정신을 잃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뼈만 앙상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마리우스, 이 못된 놈아, 죽었구나!" 하고 그는 외쳤다. 그는 두 손을 비틀면서 처절하게 웃었다. "죽었어. 날 원망하면서. 내가 널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동안 내가 네 이름을 얼마나 불렀는지, 저녁때만 되면 네가 돌아오기만 기다리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 난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해 줄 작정이었다. 그런데 넌 이런 걸 다 알고 있으면서도 바리케이드에 가서 일부러 목숨을 내던진 거야." 의사는 이제 할아버지가 걱정이 되어 그를 부축해 주었다. "난 괜찮소. 난 온갖 일을 다 겪었소. 하지만 마리우스가 나보다 먼저 죽다니! 얘는 바로 내가 길러낸 자식이오. 내가 가끔 큰 소리도 지르고 지팡이로 때리기도 하고 잔소리도 했지만 그게 다 장난이었다는 것을 얘도 다 잘 알고 있었소." 그는 의식을 잃고 있는 마리우스에게 다가갔다. "이 매정한 놈! 혁명당 무법자! 이제 이 불쌍한 늙은이는 비참하게 혼자 죽어야 한단 말이냐? 내가 오래 전에 죽었어야 했는데." 이때 마리우스가 눈을 뜨더니 흐릿한 눈으로 질노르망 씨를 쳐다보았다. "마리우스!" 하고 노인은 소리쳤다. "마리우스, 내 귀여운 자식! 눈을 떴구나, 살아 있었구나. 고맙다!" 그리고 그는 기절했다. 7.
자베르는 천천히 롬 아르메 거리를 떠났다. 그는 센강으로 통하는 지름길을 골라서 그 강가 길을 떠나 노트르담 다리 모퉁이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은 급류가 좁혀지고 사납게 흐르기 때문에 무척 위험한 곳이었다. 그는 다리 난간에 턱을 괴고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자베르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몇 시간 전부터 그의 마음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토록 단순하고 명쾌했던 그의 머리는 이제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자베르를 놀라게 한 것은 장 발장이 그를 용서한 일이었고 그를 당황하게 만든 것은 바로 자기가 장 발장을 용서한 일이었다. 범죄자한테서 목숨을 구원받고, 이번에는 그 은혜를 다른 은혜로 보답한 것,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숭고한 공적 임무를 저버리고, 자신의 양심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 사회를 배신한 이런 여러 가지 부조리가 그에게 덮쳐와 고민하고 있었다. 장 발장은 그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장 발장이야말로 그를 내리누르는 무거운 짐이었다. 자베르 생애의 의지가 되었던 모든 믿음이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자베르에 대한 장 발장의 너그러움은 그를 압도하고 말았다. 전에는 가식이고 어리석은 짓이라고 여겨왔던 사실들이 이제 또렷이 되살아왔다. 자베르는 그 범죄자에 대한 존경이 영혼에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괴롭지만 장 발장의 거룩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정심이 많고, 선량하고, 불행한 자를 돕고, 악을 선으로 보답하고, 미움을 용서로 보답하고, 복수하기보다 불쌍하게 여기고, 인간이라기보다 천사에 가까운 전과자. 자베르는 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자기가 옳다고 믿어 왔던 것이 와르르 무너진 것이었다. 그는 머리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캄캄한 강물을 바라보며 한동안 꼼짝 않고 서있었다. 갑자기 모자를 벗어 강둑 위에 놓았다. 그는 난간 위로 똑바로 올라섰다가 곧장 강으로 떨어져 들어갔다. 둔탁한 물소리가 들렸다. 마리우스는 오랫동안 중태에 빠져 있었다. 몇 주일동안 높은 열이 계속되었고 의식불명 상태에서 헤매고 있었다. 처음 며칠 동안은 밤마다 고열에 시달리며 헛소리로 줄곧 코제트의 이름을 불렀다. 그동안 질노르망 노인은 정신을 잃다시피 하면서 손자의 머리맡에 붙어 있었다. 집으로 온지 넉 달째 접어들자 의사는 이제 위험한 고비는 넘겼고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는 회복기로 들어선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오랜 치료기간 덕분에 그는 경찰의 추격을 피할 수 있었다. 군법회의는 전투현장에서 체포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찾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마리우스는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질노르망 씨는 처음에는 온갖 괴로움을 겪었고 다음에는 온갖 기쁨을 맛보았다. 마리우스 병세가 점차 좋아지자 할아버지는 너무도 기뻐서 자신도 모르게 야릇한 행동을 했다. 마리우스를 남작각하라고 부르기도 하고 "공화국 만세!" 하고 외칠 때도 있었다. 마리우스는 간호를 받으면서도 오직 코제트에 대한 생각만 품고 있었다. 그는 코제트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고 있었다. 샹브르리 거리 사건도 기억 속에서는 어렴풋할 따름이었다. 에포닌, 테나르디에 일가, 바리케이드 연기 속에 처참하게 휩쓸려 들어간 친구들. 이 모두가 분별할 수 없을 정도의 그림자가 되어 머릿속에 떠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기운을 차려가자 옛 상처가 입을 벌렸다. 할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되살아났던 것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조용히 그것을 참고 있었다. 노인은 마리우스가 집으로 실려와서 의식을 되찾은 이래 자기를 한번도 할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리우스는 할아버지와 전쟁을 벌이기 전에 우선 시험삼아 탐색전을 벌여보기로 했다. 만약 거절당하면 제 손으로 붕대를 찢어버리고 단식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에게는 상처가 하나의 무기였다. 코제트와 결혼을 하게 되느냐 아니면 죽느냐 하는 중대한 싸움이었다. 어느 날 그 기회가 왔다. 질노르망 노인이 마리우스 쪽으로 몸을 굽혀 아주 다정하게 말을 걸어왔다. "마리우스야. 이젠 고기를 먹는 게 좋겠다. 기운을 차리려면 연한 살코기를 많이 먹어야지." 마리우스는 온 힘을 다해 침대 위에서 일어나 앉더니 굳은 표정으로 노인을 보고 말했다. "그것보다도 저는 결혼이 하고 싶습니다." "알고 있다." 하고 노인이 말했다. 그러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네?" "그래 알고 있다. 그 아가씨를 데려 오너라." 마리우스는 그 한마디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래. 그 귀여운 아가씨를 데려 오너라. 그 아가씨가 날마다 사람을 보내 네 병세를 알아본단다. 네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날마다 눈물을 흘린다고 하더라. 정말 귀엽고 영리한 처녀더라. 널 끔찍하게 사랑하고 있더구나. 네 상처에 쓸 거즈를 산더미 같이 만들어 주었다. 만약 네가 죽었다면 한꺼번에 세 사람이 죽을 뻔했다. 그 처녀 관이 내 관 뒤를 바싹 따라왔을 거다. 코제트? 사랑? 좋고말고. 그 이상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니? 결혼하거라.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라." 노인은 이렇게 한바탕 늘어놓더니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는 마리우스의 머리를 두 팔로 싸안고는 늙은 가슴에 끌어안았다. 그리고 둘은 같이 울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하고 마리우스는 외쳤다. "그럼, 너도 날 좋아해 주는 거지?" 노인이 말했다. "자, 이젠 됐다. 날 할아버지라고 불러주었으니." "그런데 이젠 저도 다 나았으니 코제트를 만나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그것도 안다. 네가 날 할아버지라고 불러주었으니 당장 그 아가씨를 불러오라고 하겠다."
8.
코제트가 문턱에 모습을 나타났을 때 마리우스 방에는 온 집안 식구가 다 모여 있었다. 할아버지는 "예쁘구나!" 하고 소리쳤다. 코제트와 함께 한 백발 노신사가 뒤를 따라 들어왔다. 그가 포슐르방 씨, 바로 장 발장이었다. 검은 양복을 입고 흰 넥타이를 매고 아주 훌륭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옆구리에는 책처럼 보이는 네모난 종이꾸러미를 끼고 있었다. "포슐르방 씨, 내 손자 마리우스 퐁메르시 남작을 위해 따님에게 청혼하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포슐르방 씨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서 승낙을 표시했다. "이제 됐다!“ 하고 할아버지가 말했다. 그리고 마리우스와 코제트 쪽을 바라보고 두 팔을 벌려 축복하면서 외쳤다. "서로 깊이 사랑할 것을 허락한다." 두 사람은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너무 기뻐요." 하고 코제트는 소곤거렸다.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어서요. 지난 넉달동안 전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어요. 하지만 아까 우리에게 와달라고 전갈이 왔을 때 전 너무 기뻤어요. 옷을 갈아입을 수도 없었어요. 상처가 무척 심했다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당신은 지금도 절 사랑하세요?" "아, 나의 천사." 하고 마리우스가 말했다. 질노르망 씨는 그들에게 다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좀 더 다정하게 이야기하렴. 어려워할 것 없다." 질노르망 큰아가씨는 노인들만 살던 이 집안에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즐겁게 쳐다보고 있었다. "어떠냐?" 노인이 딸에게 말했다. "이렇게 될 거라고 내가 전에 말했지? 어쩌면 이렇게 예쁘냐, 정말 예쁘구나. 난 정말 이 아가씨한테 홀딱 반해 버렸다. 이젠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즐겁고 귀여운 결혼식이 거행되겠군. 생 폴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릴 수 있도록 특별 허가를 신청해야겠다." 할아버지는 마리우스 곁에 앉더니 코제트도 앉게 해서 두 손으로 그들의 손을 잡았다. "코제트는 정말 훌륭한 아가씨야. 아직 어린 데도 의젓한 귀부인 티가 나는구나. 겨우 남작부인이 되기엔 너무 아까워. 너희들 정말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열심히 사랑하거라." 그는 갑자기 얼굴빛을 흐리더니 덧붙였다. "그런데 한 가지 슬픈 일이 있다. 내 재산은 거의 전부가 종신 연금으로 되어 있단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그럭저럭 괜찮겠지만 내가 죽고 나면 너희들은 무일푼이 되고 만단다. 남작 부인의 아름답고 흰 손도 생활에 시달려 거칠어지게 될 게다." 그때 위엄 있고도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포슐르방 양에게는 60만 프랑의 지참금이 있습니다." 그는 그때까지 아무 말도 않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가 방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있었다. 그는 그 행복한 사람들 뒤에 조용히 서있었다. "60만 프랑이라고!" 하고 질노르망 씨가 말했다. 장 발장은 들고 있던 종이꾸러미를 탁자 위에 놓았다. 그는 그것을 손수 풀어 보였다. 그것은 모두 돈 다발이었다. 천 프랑짜리, 오백 프랑짜리 지폐가 가득 들어 있었다. "이제 만사가 다 해결됐구나." 하고 할아버지는 말했다. "마리우스 녀석, 솜씨 좋게 백만장자의 딸을 골랐군." 마리우스와 코제트는 그 동안에도 줄곧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그런 것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장 발장은 자기 정체를 밝히고 나서서 체포되었다가 며칠 동안 탈주한 적이 있었다. 그는 그 틈을 타서 파리로 나와 은행에 예금해 둔 돈을 모두 찾았다. 모두 63만 프랑이었는데 상자 하나에 그것을 다 채우고 또 다른 그의 보물인 주교의 촛대도 넣어서 몽페르메유 숲속에 묻었다. 그 뒤로 장 발장은 돈이 필요해질 때마다 거기에 가서 돈을 꺼내왔다. 그러다가 마리우스가 회복되어 가자, 이 돈이 필요할 때가 가까워졌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모두 가져온 것이다. 이제 남은 돈은 코제트에게 준 60만 프랑뿐이었다. 자신이 쓸 돈으로는 5백 프랑만 남겨놓았다. 장 발장은 자신이 자베르 손에서 풀려난 것도 알고 있었다. 자베르의 투신자살에 대해서 신문에 기사가 났기 때문이었다. 모범적인 경찰이고 상관의 신임이 두터웠던 자베르 총경이 자살한 것은 정신착란을 일으킨 모양이라는 내용이었다. 장 발장은 그를 체포하고도 자베르가 놓아준 것을 보면 아마 그때 이미 머리가 돌았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다음해 2월 마리우스와 코제트는 결혼식을 올렸다. 코제트는 하얀 호박단 페티코트 위에 레이스 드레스를 입고 오렌지꽃 화관을 쓰고 있었다. 순백색에 감싸인 그녀는 보는 사람들의 눈을 부시게 했다. 마리우스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은 윤기가 흐르고 은은한 향기를 풍겼다. 할아버지는 당당하게 머리를 쳐들고 있었고 우아했다. 장 발장은 검은 예복을 입고 그의 뒤를 따라가면서 웃음 짓고 있었다. 시장과 사제 앞에서 대답을 하고 시청과 성당 등록부에 서명을 하고 반지를 교환하는 모든 순서가 끝났다. 그들은 참석자들이 두 줄로 서 있는 사이를 걸어나가 좌우로 활짝 열린 성당 정문 현관에 이르러 마차를 탔다. 마리우스는 코제트 옆에 질노르망 씨와 장 발장은 그들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생 폴 성당 앞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마차 유리창 너머로 코제트 머리에 꽂힌 오렌지꽃이 흔들리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코제트는 마리우스에게 바싹 몸을 붙이고서 속삭였다. "이건 꿈이 아니지요? 이제 난 당신 아내가 되었어요." 그들은 찬란하게 빛났다. 젊은 두 사람은 두 송이 백합꽃 같았다. 지난날의 모든 아픔이 오히려 그들을 도취시켰다. 아픔도 괴로움도, 두려움도 절망도 이제는 모두 앞으로 다가올 즐거운 시간을 더 즐겁게 해주는 것만 같았다. 이제까지 고생했던 것에 감사하는 마음마저 들 정도였다. 사람들은 질노르망 씨 집으로 돌아왔다. 집은 잔치 분위기였다. 사방은 꽃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질노르망 집안과 친한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코제트 옆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서로 앞다투어 그녀를 남작 부인이라고 불렀다. 장 발장은 아무도 자기를 눈여겨보고 있지 않은 틈을 타서 조용히 일어나 집 밖으로 나갔다. 환한 식당 창문 아래 어둠 속에 한참 가만히 서 있었다. 시끄러운 잔치 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의 드높은 위엄있는 말소리, 바이올린 선율, 접시며 유리잔이 부딪치는 소리, 이따금 터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흥겨운 가운데서 코제트의 즐겁고 상냥한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그곳을 떠나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집은 텅 비어 있었다. 그의 발소리는 여느 때보다 더욱 크게 울렸다. 코제트의 방으로 들어갔다. 코제트가 소중히 쓰던 자질구레한 물건들은 모두 질노르망 씨 집으로 옮겨갔고, 텅빈방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커다란 가구와 벽뿐이었다. 장 발장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 촛불을 탁자 위에 놓았다. 한시도 곁을 떠난 적이 없는 작은 가방을 꺼냈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가방을 열었다. 그 속에는 십 년 전 코제트가 몽페르메유를 떠날 때 입었던 옷이 들어 있었다. 제일 먼저 자그마한 검은 드레스, 검정색 목도리, 장식이 달린 구두, 능직 속옷, 주머니가 달린 앞치마, 털 양말이 차례로 나왔다. 양말은 장 발장 손바닥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빛깔은 모두 까만색이었다. 그 옷가지를 사서 몽페르메유까지 가져갔던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겨울이었고 몹시 추웠다. 코제트는 누더기를 걸치고 벌벌 떨고 있었다. 불쌍하게도 그 자그마한 발은 나막신 속에서 빨갛게 얼어 있었다. 장 발장은 그 누더기 옷을 벗기고 이 옷들을 입혀주었다. 팡틴이 자기 딸이 상복을 입은 것을 보았더라면, 무엇보다도 그렇게 따뜻한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았더라면 무덤 속에서도 분명히 기뻐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는 또 몽페르메유의 숲을 생각했다. 둘이서 그 숲을 헤치고 가로질러 왔던 것이다. 그때 날씨며 낙엽진 나무들, 새 한 마리 없던 나무들과 어두운 밤하늘을 생각했다. 그래도 그들은 즐거웠다. 커다란 인형을 안은 채 웃는 코제트의 손을 잡고 그는 걸었다. 그때 그녀한테는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장 발장밖에 없었다. 그 생각이 들자 장 발장은 얼굴을 코제트 옷에 파묻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9.
결혼식 이튿날 정오에 포슐르방 씨가 마리우스를 찾아왔다. 문지기는 그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장 발장의 얼굴은 몹시 창백했다. 눈은 푹 꺼져 있었다. 그의 검정 옷은 밤새도록 입고 있었던 탓인지 구겨져 있었다. 문에서 소리가 났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마리우스가 들어왔다. 머리를 반듯이 쳐들고 입가에는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아버님이셨군요. 일찍 오셨습니다. 코제트는 아직도 자고 있는데요." 그에게서는 말이 샘솟듯 흘러나왔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어제는 아버님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얼마나 섭섭했는지 모릅니다. 저희들은 아버님 이야기를 무척 많이 했습니다. 코제트가 아버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겠더군요. 우리 집에 아버님 방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저희 바로 옆방입니다.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으니까 그저 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코제트는 아버님 앉으시라고 안락의자까지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 방에는 햇볕도 잘 듭니다. 할아버지께서도 아버님을 아주 좋아하십니다. 두 분은 서로 잘 통하실 겁니다. 같이 사십시오. 저희들은 행복하게 살아가기로 굳게 약속했습니다. 아버님도 저희들 행복을 함께 나누면서 행복하셔야 합니다." "사실은..." 하고 불쑥 장 발장이 말했다. "할 이야기가 있소. 난 전과자요." 마리우스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난 감옥살이를 했던 사람이란 뜻이오." "그럴 리가!" 마리우스는 공포에 사로잡혀서 말했다. "퐁메르시 군. 난 19년 동안 징역을 살았소. 절도죄였소. 그 뒤에 다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소. 역시 절도죄였소. 현재는 감시 위반자요." 마리우스 눈앞에는 자기에게 지워진 끔찍스러운 운명이 아른거렸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신은 코제트 아버지십니다." 장 발장은 위엄에 넘치는 태도로 몸을 똑바로 폈다.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을 믿어야 하오. 내 말을 믿어주시오. 난 코제트 친아버지가 아니오. 내 이름은 포슐르방이 아니라 장 발장이오. 코제트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소. 안심하시오." 마리우스는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코제트는 고아였소. 그래서 내가 그 아이를 길렀소. 이제 코제트는 퐁메르시 부인이 되었소. 그게 더 코제트한테 행복한 일이오. 모든 일이 다 잘되었소. 그리고 60만 프랑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마시오. 그건 내가 맡아 가지고 있던 돈이오. 어떻게 그 많은 돈을 맡게 되었는지는 알려고 하지 마시오. 난 맡았던 돈을 코제트에게 돌려준 것뿐이오." 마리우스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는 자기 앞에 나타난 새로운 사태에 너무 놀라 원망하듯 부르짖었다. "그런데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가만히 비밀로 간직하시지 않고 무슨 까닭으로 일부러 고백하시는 겁니까?" "무슨 까닭?" 장 발장은 마리우스에게 이야기한다기보다는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나직하고 희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그 대답은 간단하오. 정직해지고 싶어서요. 내가 멀리 떠나가 버릴 수만 있었다면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었을 거요. 떠나기만 하면 되었을 거요. 그렇게 되면 당신들은 행복하게 살 수 있소. 하지만 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소. 이곳, 코제트 옆을 떠날 수가 없었단 말이오. 당신은 이 집에 내가 머무를 수 있는 방까지 마련해 놓고 날 와서 살라고 하고, 코제트는 안락의자까지 가져다 놓았소. 당신 할아버지께서도 내가 와 있는 것을 좋아하셔서 모두 함께 살자고 하시오. 모두가 한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겨울에는 벽난롯가에 둘러앉고 여름엔 모두 함께 산책을 하고. 참 즐거운 일이오. 그것이야말로 행복한 말이오. 그 이상 더 무엇을 바라겠소." 장 발장의 목소리가 갑자기 격해졌다. "아니, 나한테는 가족이 없소. 가정도 없소. 난 당신 집안 식구가 아니오. 이 세상 누구와도 한가족이 될 수 없는 사람이오. 난 불행한 사람이오. 따돌림을 당한 사람이오. 내게 부모가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요. 코제트를 결혼시킨 그날로 모든 것은 끝났소. 코제트가 행복하고, 그 아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더 이상 이곳에 끼여들 수가 없었소. 당신들을 모두 속이고 포슐르방 씨로 그냥 지낼 수도 있었소. 하지만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소. 그 까닭은 내 양심 때문이오. 이렇게 털어놓는다는 것은 정말 힘들었소. 난 밤새도록 내 욕심과 싸웠소. 모든 것을 털어놓지 않고 전처럼 살아가고 싶은 마음에서였소.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소. 내 주위 사람들은 기쁨이 넘치겠지만 내 영혼 밑바닥은 역시 암흑 그대로 있을 것이오. 사람은 행복한 것만으로는 부족하오. 만족을 느껴야 하는 것이오. 정직한 척하면서 당신 가정에 형무소를 끌어들이고, 언젠가 정체가 드러나면 반드시 내쫓길 거라고 생각하면서 당신들과 한 식탁에 마주앉을 수는 없소. 나한테는 그런 행복을 누릴 권리가 없소. 난 인생에서 따돌림을 당한 사람이오." 장 발장은 방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거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한동안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이윽고 그는 말했다. "퐁메르시 군, 한 번 상상해 보시오. 내가 아무 말도 않고 여전히 포슐르방 씨로 있으면서 댁에 들어와 한식구가 되고 평화롭게 살아간다고 칩시다. 그런데 어느날 내가 당신들과 함께 모여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장 발장!'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경찰의 무시무시한 손이 어둠 속에서 불쑥 나와 내 가면을 홱 벗겨버린다고 합시다." 마리우스는 부르르 떨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 발장은 말을 이었다. "코제트와 당신 가족을 위해서요. 나 같은 사람과 인연을 끊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일 것이오. 당신 가족 중에 전과자가 있다는 이런 무거운 짐을 지게하고 싶지는 않소. 이래야 내 마음이 편할 것이오. " "가엾은 코제트가 이걸 알게 된다면." 하고 마리우스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이 말에 장 발장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제발 부탁이니 그 아이한테만은 말하지 말아 주시오. 온 세상 어느 누구에게든 이야기해도 좋소. 하지만 그 아이한테는 말하지 마시오. 알면 몹시 놀랄 거요. 전과자라니!" 그는 의자에 쓰러지듯이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어깨가 떨리는 것으로 보아 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소리 없는 눈물이야말로 가장 큰 슬픈 눈물이었다. 그는 경련 같은 발작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차라리 내가 죽어버렸으면 얼마나 좋을까." "안심하십시오." 하고 마리우스는 말했다. "이 비밀은 혼자 간직하겠습니다." 장 발장은 말을 꺼내기를 망설이는 듯 가만히 있다가 우물우물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이제 모든 사실을 알았소. 그런데 한 가지 묻겠소. 당신은 코제트 남편으로서 내가 다시는 코제트를 만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시오?"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지요." 마리우스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시는 만나지 않겠소." 하고 장 발장은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일어나 문있는 데로 걸어갔다. 그는 손잡이를 잡았다. 문을 열고 잠시 서 있다가 마리우스 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은 이제는 핏기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납빛이 되어 있었다. 이미 눈물은 말라 있었지만 슬픈 불꽃이 눈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목소리도 이상할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그렇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그 아이를 만나 보러 오고 싶소. 정말 그러고 싶소. 코제트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면 당신에게 이런 고백은 하지도 않았을 거요. 아무 말 없이 어디론가 가버렸을 거요. 사실 코제트와 가까운 곳에 살면서 언제까지나 코제트를 만나고 싶었기 때문에 당신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던 거요. 내 말을 알아들으시겠소? 난 지난 9년 동안 그 애와 함께 있었소. 우린 한번도 떨어져 있어 본 적이 없었소. 난 그 아이 아버지였고 그 아이는 내 딸이었소. 이제 다른 곳으로 떠나 다시는 얼굴을 볼 수도 없고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고, 영원히 헤어져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가슴 아픈 일이오. 당신이 그다지 나쁘게만 생각하지 않는다면 가끔 코제트를 만나러 오고 싶소. 자주 찾아오지는 않겠소. 오래 있지도 않겠소. 진심으로 부탁하오. 앞으로 얼마 동안만 코제트를 만나고 싶소. 아주 가끔만이오. 그것 말고는 아무 소원도 없소.“ "매일 저녁 오셔도 좋습니다." 하고 마리우스는 말했다. "코제트도 기다릴 겁니다." "고맙소." 마리우스는 장 발장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마치 행복이 절망을 문까지 배웅하는 것 같았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헤어졌다.
10.
마리우스의 마음은 복잡했다. 장 발장에게 수수께끼 같은 면이 있다고 늘 느꼈는데 이제야 그것이 풀렸던 것이다. 그 수수께끼란 바로 더러운 부끄러움, 곧 형무소와 관계된 것이었다. 포슐르방 씨는 바로 전과자 장 발장이었던 것이다. 가장 행복한 순간에 이런 비밀을 알게 된다는 것이 그에게는 너무 가혹했다. 결혼 때문에 그 전과자의 짐마저 짊어지게 된 것이었다. 물론 코제트에 대한 사랑이 식거나 변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장 발장에 대해서는 혐오감을 느끼게 되고 말았다. 마리우스는 골똘히 생각했다. 종드레트 집에서 일어났던 사건, 자베르가 왔을 때 달아난 이유에 대해서도 이제서야 대답을 찾은 것이었다. 그는 탈옥한 전과자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이상한 점은 남아 있었다. 장 발장이 왜 바리케이드에 왔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는 바리케이드에 와 있었다. 그러나 싸우지는 않았다. 이런 의문 앞에 한 유령이 나타나 대답했다. 바로 자베르였던 것이다. 그제야 마리우스는 묶여 있던 자베르를 바리케이드 밖으로 끌고 나가던 장 발장의 음산한 뒷모습이 생각나 몸서리를 쳤다. 그리고 길모퉁이 뒤에서 들려왔던 무서운 총소리가 귀에 쟁쟁했다. 틀림없이 자베르와 장 발장은 서로 미워했을 것이다. 그래서 장 발장은 복수하기 위해 바리케이드에 왔던 것이었다. 어쨌든 장 발장이 자베르를 죽인 것은 확실했다. 그는 장 발장에 대한 공포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는 민주주의자였지만 형법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도 엄격한 사회제도를 지지하고 있었다. 법률과 인권의 차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보자 장 발장이 흉측하고 기분 나빴다. 장 발장은 하느님에게 버림받은 사람이었고 죄수였고 살인자였다. 이튿날 해질녘에 장 발장은 질노르망 댁의 문을 두드렸다. 다음 날도 그는 같은 시각에 다시 찾아왔다. 아무도 그 기막히고 비극적인 내막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몇 주일이 지나갔다. 새로운 생활이 조금씩 코제트 마음을 사로잡아갔다. 결혼 때문에 새로 사귀게 된 사람들, 방문, 오락 등 일상생활이 그녀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의 즐거움은 오직 한 가지 마리우스와 함께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행복했다. 마리우스는 이곳저곳 법정에서 변호사 일을 하고 있었고 할아버지는 아직 건강했다. 질노르망 큰아가씨는 신혼부부 곁에서 조용히 만족스러운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장 발장은 날마다 찾아왔다. 그는 아직도 롬 아르메 거리에 살고 있었다. 코제트가 살고 있는 근처에서 멀어질 결심을 도저히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느 날 그는 보통 때보다 더 오래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그가 찾아와서 코제트와 늘 시간을 보내는 그 방 벽난로에 불이 꺼져 있었다. 장 발장은 아마 때가 벌써 4월이라 불을 이제 그만 피우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득 코제트가 아버지에게 이상한 말을 했다. "아버지, 그이가 저한테 이상한 걸 물어봤어요." "무슨 말을?" "우리한테는 3만 프랑의 연금이 들어온 대요. 2만 7천 프랑은 제 지참금에서 나오는 거고 3천 프랑은 할아버지께서 주시는 거래요. 그런데 저더러 3천 프랑만 갖고서 살아나갈 수 있겠느냐고 묻는 거예요. 그래서 전 그이하고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한 푼도 없어도 괜찮다고 대답했어요." 장 발장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코제트는 아마 아버지한테서 어떤 설명을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저 침울한 얼굴을 하고서 입을 다문 채 귀를 기울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롬 아르메 거리로 돌아가 여러 가지 추측에 시달리고 있었다. 마리우스는 그 60만 프랑이 어디서 났는지 의심을 품고, 무언가 깨끗하지 못한 곳에서 나온 돈이 아닌가 싶어 꺼림칙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의심스러운 재산을 갖기가 꺼림칙하고, 수상쩍은 돈으로 잘 사느니보다 차라리 코제트와 둘이서 가난하게 사는 편이 좋다고 마음먹었는지도 모른다. 이튿날 질노르망 씨 댁 아래층 방으로 들어간 그는 놀라운 충격을 받았다. 안락의자가 치워지고 없었던 것이다. 의자라고는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어머나, 의자가 어디 갔을까?" 코제트가 들어오면서 외쳤다. "오늘 손님이 오나 보지? 그래서 다른 방으로 가져갔겠지." "아니, 오늘은 아무도 안 와요." "그래?" "요즘 그이가 참 이상하네요. 어제는 벽난로 불을 끄게 하더니, 오늘은 의자를 치워버리게 하고." 장 발장은 말할 기운도 없었다. 그는 힘없이 밖으로 나왔다. 이번에는 그도 알 수 있었다. 이튿날 그는 코제트를 찾아오지 않았다. 코제트는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달았지만 조금 섭섭하게만 생각했지 곧 잊고 말았다. 그 다음날도 그는 오지 않았다. 하지만 코제트는 그 일을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저녁 시간을 보내고 밤에 잠을 자고 난 뒤에야 비로소 생각이 났다. 그녀는 너무나도 행복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곧 하녀를 아버지 집으로 보내어, 왜 오시지 않았는지 알아오게 했다. 하녀는 돌아와 장 발장이 곧 여행을 떠날 예정이라서 준비에 바쁘다는 전갈을 가져왔다. 코제트는 장 발장과 마리우스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마리우스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잊은 것은 아니었다. 결혼 생활에 바빠서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아버지도 무척 사랑하고 있었지만 남편을 더 사랑하고 있었다. 때때로 그녀는 아버지 이야기를 하면서 우울해 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마리우스는 그녀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집에 안 계시는 모양이야. 여행을 떠나신다고 했소." 그러면 코제트는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두서너 번쯤 하녀를 롬 아르메 거리에 보내 아버지가 여행에서 돌아오셨는지 알아오게 했다. 장 발장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전하라고 말했다. 코제트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오직 마리우스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마리우스는 코제트를 차츰 장 발장에게서 떼어놓고 있었다. 코제트는 그렇게 되어 가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11.
그해 늦봄에서 초여름에 걸친 몇 달 동안 마레 구역의 상인들이나 행인들은 단정하게 검은 옷을 차려입고 걸어가는 한 노인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노인은 날마다 똑같은 시각 해질 무렵이면 롬 아르메 거리에서 나와 한참 걸어서 생 루이 거리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거기에 도착하면 노인은 발걸음을 늦추고 얼굴을 앞으로 내밀고 아무 것도 보지도 듣지도 않고, 눈은 언제나 똑같은 곳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마치 그곳이 별빛이라도 반짝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피유 뒤 칼베르 거리 모퉁이에 이르게 되면 그의 눈은 점점 빛을 더해 갔다. 마음 속에 무슨 기쁨이라도 떠오르는지 눈이 점점 환해졌다. 그리고 매혹되고 감동된 듯한 표정을 짓고 입술은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는 희미한 웃음을 띤 채 되도록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치 그곳에 가기를 너무도 바라면서도 그곳에 닿는 순간을 두려워하는 듯했다. 그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듯한 그 거리 모퉁이에서 대 여섯 집을 남겨두면 걸음이 느려져 어떨 때는 걷고 있지 않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걸음을 늦추어도 결국에는 도착하게 된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떨면서 맨 끝 집 모퉁이에서 우울하고 겁먹은 태도로 고개를 내밀고 그 거리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그 슬픈 눈에는 실망만 떠올랐다. 이윽고 눈에 고인 눈물이 차츰 굵은 방울이 되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그렇게 한참 돌처럼 서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그 길을 되돌아가는것이었다. 그리고 차츰 거기에서 멀어져가면서 그의 눈은 빛을 잃어갔다. 노인은 점점 그 모퉁이까지 가지 않게 되었다. 생 루이 거리 중간쯤에서 걸음을 멈추는 것이었다. 어느날 그는 멀리에서 그 모퉁이를 바라보더니 무엇인가 거절이라도 당한 듯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얼마가 지나자 그는 생 루이 거리까지도 가지 않게 되었다. 날마다 같은 시각에 집을 나와서 같은 길을 갔지만 그 길을 끝까지 가지는 않았다. 점점 거리는 짧아지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는 오직 하나의 생각만 떠오른 것 같았다. 빛나던 눈빛도 어느덧 사라져 반짝이지 않았다. 눈물도 이제는 메말라버려서 눈가에 괴는 일조차 없었다. 생각에 잠긴 그 눈은 이제는 말라붙어 있었다. 노인은 여전히 얼굴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이따금 흔들리는 턱과 여윈 목덜미의 주름살은 보기에도 가슴 아팠다. 이따금 날씨가 흐린 날에는 우산을 옆에 끼고 있었지만 그것을 펴는 일은 없었다. 이웃 아낙네들은 그 노인이 머리가 좀 돈 모양이라고 말하고 있었고 아이들은 킬킬거리며 그의 뒤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장 발장은 어느 날인가부터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튿날은 침대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그에게 식사를 만들어주던 문지기 할멈이 그가 손대지 않은 접시를 보고 소리쳤다. "아니, 어제는 아무 것도 안 잡수셨군요. 이걸 어째." "물을 마셨소. 물밖에는 먹고 싶지 않소." 일주일이 되어도 장 발장은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친절한 할멈은 아무래도 의사를 불러야겠다고 할아범에게 걱정을 늘어놓았다. 어느 날 저녁 장 발장은 팔꿈치를 짚고 몸을 일으키는 데도 고통을 느꼈다. 숨은 가빠지고 이따금 헐떡이기까지 했다. 자신이 어느 때보다 더 쇠약해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가까스로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었다. 옷을 입는 데도 힘이 들어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간신히 작은 가방을 열고 코제트의 옛날 옷을 꺼내 침대 위에 늘어놓았다. 주교가 준 촛대는 언제나처럼 난로 위에 놓여 있었다. 서랍에서 초를 두 자루 꺼내 촛대에 꽂았다. 가구를 붙들고서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것도 너무나 힘이 들어서 그는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았다. 코제트가 결혼하고 난 뒤 한 해 동안 서른 살은 더 나이를 먹은 것 같았다. 이마에 새겨져 있는 주름은 노인의 주름살이 아니라 죽음을 알리는 신비로운 표시 같았다. 그는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슬픔의 마지막 단계, 이미 괴로움도 없는 상태에 빠져 있었다. 어느덧 밤이 되었다. 그는 탁자 위에 앉았다. 주교의 촛대에 꽂힌 촛불로 밝혀진 탁자에 팔꿈치를 괴고 펜을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다음 같이 몇 줄을 썼다. 코제트야, 너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란다. 이제부터 내가 설명하는 것을 잘 들어라. 네 남편은 훌륭한 청년이다. 내가 죽은 뒤에도 항상 깊이 사랑하도록 해라. 퐁메르시 군, 내 사랑하는 아이를 언제까지나 사랑해주길 바라오. 코제트, 너한테 꼭 해야 할 이야기를 적겠다. 내가 너한테 준 돈은 분명히 네 것이다. 그 돈은 내가 정직하게 번 돈이니까... 그는 쓰던 손을 멈추었다. 펜이 손가락 사이에서 힘없이 떨어졌다. 이따금 가슴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는 절망적인 흐느낌 소리가 들렸다, 가엾은 사나이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모든 것은 끝났다. 이제는 그 아이도 만날 수 없다. 그 아이는 내 존재를 스쳐지나간 단 하나의 웃음이었다. 난 이제 두 번 다시 그 아이를 만나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겠지. 1분만이라도, 1초만이라도 그 아이 목소리를 듣고, 그 아이 옷을 만지고, 그 아이 얼굴을, 그 천사 같은 얼굴을 볼 수만 있다면... 그런 다음에 죽을 수만 있다면! 죽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무서운 것은 그 아이를 만나지 못하고 죽는 일이다. 그 아이는 나한테 방긋 웃어줄 텐데. 내게 말을 걸어줄 텐데. 하지만 이젠 끝났다. 영원히. 나는 이렇게 혼자일 뿐이다. 이제 다시는 그 아이를 만나지 못하겠구나.' 이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12.
바로 그날 저녁 마리우스가 저녁을 먹고 난 참인데 문지기가 편지 한 통을 들고 와서 말했다. "이 편지를 가져 온 사람이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리우스는 편지를 받아들었다. 편지에서는 고약한 담배 냄새가 났다. 그는 그 냄새를 기억하고 있었다. 겉봉에는 '퐁메르시 남작 각하'라고 쓰여 있었다. 그는 그 글씨체도 쉽게 기억했다. 종드레트의 다락방이 눈앞에 떠올랐다. 재빨리 편지를 뜯어 읽었다. 남작 각하, 저는 각하와 관계가 있는 어떤 인물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각하께 도움을 드리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해." 하고 마리우스는 말했다. 문지기가 손님을 안내했다. 손님은 낯선 노인이었다. 머리는 희끗희끗했고 등은 구부정했다. "무슨 일인가요?" 사나이는 아양을 떨면서 상냥하게 대답했다. "전 남작 각하를 잘 알고 있습니다." 마리우스는 약간 어리둥절했다. "난 당신을 본 적이 전혀 없는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각하께 팔고 싶은 비밀을 갖고 왔습니다." "그게 뭐요?" 마리우스는 상대편 말을 들으면서 유심히 그를 살펴보았다. "남작 각하 가족에 관련된 비밀입지요." "그 비밀이란 게 뭐요?" "이건 공짜로 우선 말씀드리겠습니다. 각하께서는 집안에 강도와 살인자를 두고 계십니다." 마리우스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내 집에? 천만에!" "살인자이자 도둑놈입니다. 가명을 써서 교묘하게 각하의 신용을 얻어 거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 들어봅시다." "그놈은 장 발장이라고 합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소." "그런데 그 자가 어떤 인물인지는 모르시겠지요?" 마리우스가 알고 있다고 쌀쌀맞게 대답하자 이 낯선 사나이는 분노에 찬 눈초리로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나 한번 보면 영 잊혀지지 않을 그런 눈초리였다. 마리우스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2만 프랑만 내시면 그 비밀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비밀이 뭔지도 난 알고 있소." 사나이 눈에 새로운 빛이 번뜩였다.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굉장한 비밀입니다. 1만 프랑만 내십시오." "난 당신이 뭘 말하려는지 알고 있소. 게다가 당신 이름도 알고 있소." "제 이름을요?" "테나르디에." "네?" 사나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노동자 종드레트이기도 하고 배우 파방투이기도 했소. 그리고 몽페르메유에서 여관을 했소." "그렇지 않습니다." "게다가 당신은 악당이요.“ 마리우스는 주머니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 그의 얼굴에 던졌다. "고맙습니다. 5백 프랑이군요. 남작 각하." 사나이는 계속 굽실거리며 지폐를 움켜쥐었다. 그의 두 눈은 번들거렸고 얼굴에는 보기 흉한 주름이 잡혀 있었다. 테나르디에는 마리우스 옆방에 살고 있으면서도 한번도 그를 본 적이 없었다. 앞에 앉아 있는 퐁메르시 남작이 마리우스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는 우연히 마리우스와 코제트가 결혼하는 것을 성당에서 보게 되었고 혹시나 무슨 좋은 일거리가 생기지 않을까 해서 그들의 뒤를 밟아 갖가지 조사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모든 비밀의 실마리를 잡아내는 데 성공했고 언젠가 대하수도 속에서 만났던 사람이 누구였는가 하는 의문도 풀었다. 퐁메르시 남작 부인이 코제트라는 사실도 알아냈던 것이다. 그로서는 협박할 수 있는 커다란 구실이 생긴 것이었다. 마리우스는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드디어 테나르디에를 찾은 것이다. 이제야 아버지 분부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이제서야 이 비열한 빚쟁이 손아귀에서 아버지의 영혼을 풀어놓아 줄 수 있게 된 것이 기뻤다. 그 일 말고도 그는 또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더 있었다. 될 수 있으면 장 발장이 준 60만 프랑이 어디서 난 것인지도 밝히고 싶었다. 테나르디에는 틀림없이 무언가를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마리우스가 침묵을 깨뜨렸다. "테나르디에, 당신이 내게 팔려고 가져온 그 비밀이라는 것을 내가 말해 보겠소. 나도 여러 가지를 알고 있소. 장 발장은 도둑이고 살인자요. 도둑이라는 것은 그가 마들렌이라는 돈 많은 공장주를 파산시키고 그 재산을 훔쳤기 때문이고, 살인자라는 것은 자베르 경위를 살해했기 때문이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는데요, 남작 각하." "그럼 알게 해 주리다. 1822년 몽트뢰유 쉬르 메르에 마들렌이라는 시장이 있었소.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만들고 은혜를 베풀었소. 그런데 바로 장 발장이 그 사람의 과거를 알고 있었소. 마들렌이라는 사람은 전과자였소. 그런데 바로 장 발장이 그 비밀을 폭로해서 그를 체포시키고 그의 돈을 훔쳐냈던 거요. 게다가 장 발장은 바리케이드에서 자베르를 죽였소. 내가 바로 그 자리에 있었소." 테나르디에는 웃음을 지었다. "남작 각하, 이야기가 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장 발장은 마들렌의 돈을 훔치지 않았습니다. 자베르를 죽이지도 않았습니다." "무슨 소리요?" "우선, 첫째로 마들렌은 다름 아닌 장 발장 자신이기 때문에 그 돈은 훔친 것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리고 자베르는 자살했기 때문에 장 발장은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요? 증거가 있소?" 마리우스는 자기도 모르게 고함을 쳤다. "경위 자베르는 퐁 토 샹즈 다리 밑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하고 테나르디에는 말하면서 호주머니에서 커다란 봉투를 꺼냈다. 거기에는 잡다한 종이쪽지들이 들어 있었다. "여기 기록이 있습니다." 하고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남작 각하. 전 각하를 위해 장 발장에 대해 철저히 조사했습니다. 하지만 장 발장과 마들렌은 같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베르를 죽인 사람은 장 발장이 아닙니다. 제 이야기는 증거가 있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증거도 보통 증거가 아니라 바로 인쇄된 신문입니다." 마리우스는 누렇게 퇴색한 데다 담배 냄새에 찌든 두 장의 신문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한 장에 실린 기사는 장 발장이 붙잡혔을 때의 기사로서 마들렌 씨가 장 발장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고 있었다. 또 한 장에는 자베르의 자살과 자베르가 시경국장에게 보고한 사실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 보고에 의하면 그는 샹브르리 거리 바리케이드에서 포로가 되었는데 어떤 한 폭도가 그를 풀어주고는 공중에다 총을 쏘아서 그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는 것이었다. 신문에는 분명한 날짜가 적혀 있었다. 마리우스는 탄성을 질렀다. "그분은 진짜로 훌륭한 사람이었어! 그 재산은 모두 정말로 그분 것이었어. 바로 그 분이 그 지방의 보호자인 마들렌 씨였어. 게다가 자베르를 구해 준 장본인이었군. 정말 영웅이고 성인인 분이야!" "아닙니다. 그는 그래도 살인자요, 도둑놈입니다." 제법 위엄을 부리면서 테나르디에가 말했다. "그래요?" "장 발장은 자베르를 죽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살인자입니다. 일년 전인 1832년 6월 6일, 폭동이 일어났던 다음 날 저는 파리 대하수도 속에서 장 발장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한테는 그곳에 드나들 수 있는 열쇠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저녁 여덟 시쯤 그 안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그를 보았습니다. 어깨에 시체를 메고 있더군요. 아마 뭔가 훔친 뒤 그 사람을 죽였겠지요. 시체를 강에 던지려고 했던 거겠지요. 그런데 무거운 시체를 짊어지고 어떻게 그곳을 빠져나왔는지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굉장히 위험한 일이니까요. " 마리우스는 의자를 앞으로 끌어당겨 앉았다. 지나간 기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사실 지금까지 그는 바리케이드에서 자기를 구해 준 은인이 누군지 모르고 있었다.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바리케이드에서 정신을 잃었던 일뿐이었다. 집안 식구들도 그날 그를 데려온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런데 테나르디에가 하수도 이야기를 하자 문득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저하고 마주치게 되자 열쇠를 내놓으라고 장 발장이 위협하기에 할 수 없이 열쇠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전 그 시체를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라 알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가 눈치채지 않게 몰래 시체 윗도리에서 천을 조금 잘라냈습니다. 장 발장은 시체를 둘러메고 밖으로 나갔지요. 그 윗도리 조각이..." 테나르디에는 여기까지 말하더니 시커멓게 더럽혀진 검은 넝마조각을 주머니에서 꺼내 쳐들었다. 마리우스의 얼굴은 새하얗게 변했다. 그는 검은 넝마조각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벽 쪽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떨리는 손으로 벽장 문을 더듬어 열었다. 그 동안에도 테나르디에는 계속 지껄이고 있었다. "남작 각하. 전 그 살해당한 청년이 장 발장의 함정에 걸려든 부자라는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그 청년이 바로 나였어! 여기 그 윗도리가 있어!" 마리우스는 외쳤다. 그러고는 피투성이 검정 옷을 마루에 내던졌다. 테나르디에 손에서 넝마조각을 낚아채 옷자락에 맞추어 보았다. 찢어진 자리는 꼭 들어맞았다. 테나르디에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을 딱 벌렸다. 마리우스는 부들부들 떨며 절망하다가 벌떡 일어났다. "이 파렴치한 거짓말쟁이에다 중상모략자 악당 같으니라구! 네놈은 그분한테 죄를 뒤집어씌우려다가 오히려 그분의 무죄를 증명했어. 네놈이야말로 도둑놈이야, 테나르디에. 난 마음만 먹으면 네놈을 감옥으로 보낼 수도 있어. 이 집에서 썩 꺼져버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지폐 한 장을 테나르디에 얼굴에 던졌다. "이걸 갖고 꺼져라. 네놈은 정말 악독한 놈이다. 짐승보다도 못한 놈. 내일이라도 당장 미국으로 가거라. 네놈이 정말로 떠나는지 내 눈으로 지켜보겠어. 그리고 그때 네 청대로 2만 프랑을 주겠어." "남작 각하," 테나르디에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신이 나서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그 뒤 테나르디에는 마리우스 주선으로 이름을 바꾸고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출발했다. 그는 미국에 가서도 똑같은 악당이 되었다. 마리우스에게서 받은 돈으로 그는 노예 상인이 되었다. 테나르디에가 나가자마자 마리우스는 미친 듯이 고함을 치면서 코제트가 산책하고 있는 정원으로 달려나갔다. "코제트! 코제트! 이리 와요! 빨리 오란 말이요! 아, 이럴 수가." 마리우스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되어 있었다. 13.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코제트가 한걸음에 방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마리우스는 문지방에 서있었다. "코제트!" 장 발장은 부르짖었다. 떨리는 두 팔을 벌리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코제트는 그의 가슴에 뛰어들었다. "아버지!" "코제트, 내 딸! 너로구나! 와주었구나." 마리우스는 울음을 참느라 입술을 실룩이면서 중얼거렸다. "아버님!" "그럼 당신도 날 용서해주는 거요?" 하고 장 발장은 물었다. 마리우스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장 발장은 말을 더듬었다. "이 아이를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소, 퐁메르시 군. 지금 막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소.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 난 비참한 사람이다 하고 말이오. 하지만 난 정말 바보였소. 하느님이 계신 것을 잊고 있었기 때문이오. 하느님께서는 나한테 필요한 천사를 보내주셨소. 우리 코제트를 다시 이렇게 만났단 말이오. 정말이지 이따금씩 아주 잠깐 동안이라도 코제트를 만나고 싶었소. 하지만 난 너무나도 보잘것없고 아무 필요도 없는 존재라는 걸 알고있었소." 코제트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도대체 어디에 갔다 오셨어요? 언제나 돌아오시지 않았다는 전갈만 받았어요. 왜 돌아오신 것을 알려주시지 않았어요. 그런데 아버지, 어디 편찮으세요? 전 그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퐁메르시 군, 이렇게 와주어. 당신은 날 용서해 주는 거요." 장 발장이 되풀이해 말하는 용서라는 말을 듣자 마리우스의 가슴 속에 가득 넘쳐 있던 것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왔다. "코제트 들었소? 이 분이 내게 용서를 빌고 있소. 이 분은 내 목숨을 구해 주신 분이요. 그리고 그 보다 더 소중한 당신을 내게 주신 분이오. 나처럼 은혜도 모르는 비정한 놈한테 말이오. 죄인인 나한테 오히려 고맙다고 말씀하고 계시오. 난 일평생 이 분 발 밑에 꿇어 엎드려 지내도 그 은혜를 다 갚지 못하오. 바리케이드, 하수도, 그 더러운 진흙창을 날 짊어지고 죽음을 각오하고 헤쳐 나오셨소. 아버님, 왜 그런 말씀은 조금도 안 해주셨습니까? 여러 사람 생명을 구해주시고도 끝까지 감추고 왜 자신을 비방까지 하셨습니까?" "난 진실만 말했던 것뿐이오." 장 발장은 말했다. "아닙니다. 진실이란 모든 것이어야 합니다. 자베르 씨를 구해주시고도 왜 그 사실은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또 제 생명을 구해주신 건요? " "내가 그 하수도 이야기를 했다면 퐁메르시 군 당신은 나를 붙들었을 거요. 그러면 당신 입장이 아주 곤란하게 되었을 거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아버님을 모셔가겠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아버님은 코제트 아버지시고 또 제 아버님도 되십니다. 내일 모셔가겠습니다." 장 발장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내일이면 난 이곳에 없을 거요. 난 곧 죽게 될 거요." 코제트와 마리우스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돌아가시다니요?" 하고 마리우스가 외쳤다. "그래,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지. 코제트야, 나한테 네 목소리를 들려다오. 이야기를 해 봐라." 마리우스는 돌처럼 되어서 노인을 가만히 바라보고있었다. 코제트는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아버지, 아버지! 오래 사셔야 해요! 저한테는 아버지가 필요해요!" "지금까지 많은 고통을 겪으셨지만 이젠 모두 끝났습니다. 오히려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은 저희들입니다. 저희들이 모셔가겠습니다." 하고 마리우스가 외쳤다. 코제트는 눈물에 젖어서 말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지 않아요." 이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의사가 들어왔다. "어서 오시오. 이 아이들이 내 자식들이오." 하고 장 발장이 말했다. 마리우스는 의사에게 다가갔다. 그는 단 한마디, "선생님!" 하고 부르기만 했다. 하지만 그 말에는 모든 질문이 담겨 있었다. 의사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 물음에 대답했다. 장 발장이 말했다. "만사가 제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하느님을 원망해서는 안 되오." 얼마 동안 무거운 침묵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모두가 가슴이 죄어드는 듯한 느낌이었다. 장 발장은 다시 코제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모습을 영원히 잊지 않으려는 듯 조용히 바라보고있었다. 그는 이미 어둠 속에 잠겨 들어가 있었지만 코제트를 지켜볼 때에는 아직도 황홀했다. 그녀의 다정한 얼굴빛을 받아 그의 핏기 없는 얼굴도 환히 빛나고 있었다. 의사는 장 발장의 맥을 짚어보았다. "아, 이분께 필요했던 것은 바로 당신들이었군요." 하고 의사는 코제트와 마리우스를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마리우스 귓가에 입을 대고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이미 늦었습니다." 장 발장은 여전히 코제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부드러운 표정으로 마리우스와 의사를 보았다. 그의 입에서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 새어나왔다. "죽는다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야. 살아 있지 않다는 것이 무서운 일이지." 느닷없이 장 발장이 일어섰다. 이렇게 갑자기 기력이 되살아난다는 것은 때로는 임종이 가까웠다는 증거이다. 그는 비틀거리지도 않고 벽으로 가서 벽에 있는 자그마한 십자가상을 떼어 테이블 위에 놓으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이분이야말로 위대한 순교자요." 그러고 나서 그의 가슴은 푹 꺼지고 머리는 마치 죽음에 사로잡힌 것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코제트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무슨 말인가 하려 했지만 눈물이 솟구쳐 올라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아버지, 떠나지 마세요. 이제 겨우 다시 만나 뵈었는데 떠나려고 하시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장 발장은 혼수상태에 있다가 다시 기력을 회복해서 머리를 흔들고 거의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코제트의 소맷자락을 움켜쥐고 거기에 입을 맞추었다. 문지기 할멈이 빠끔히 열린 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더니 물었다. "신부님을 부를까요?" "여기 계시니 모셔올 것 없소.“ 하고 장 발장은 대답했다. 그리고 그곳에 누군가가 보이는지 손가락으로 머리 위를 가리켰다. 아마 미리엘 주교가 그 임종을 지켜주고 있었을 것이다. 코제트는 가만히 장 발장 허리 밑에 베개를 괴어주었다. 장 발장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퐁메르시 군, 염려하지 마오. 부탁이오. 그 60만 프랑은 분명히 코제트 것이오. 난 그 유리공예품을 만드는 데 성공했소. 만약 당신이 그 돈을 쓰지 않는다면 내 일생은 무의미하게 되고 말 거요." 마리우스와 코제트는 그에게 매달리는 듯한, 붙잡으려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지쳐보았다. 두 사람 다 너무 불안해 그저 절망으로 몸을 떨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장 발장의 기력은 약해졌다. 이따금 숨이 끊기고 조금 헐떡이기만 해도 숨이 막혔다. 손발의 힘이 차츰 빠지면서 영혼의 장엄함이 얼굴 위로 퍼져갔다. 미지의 세계에서 흘러나온 빛이 이미 그 눈동자 속에 깃들어 있었다. 얼굴은 창백해졌지만 웃음은 잃지 않았다. 그는 코제트와 마리우스에게 가까이 오라고 눈짓했다. 분명히 마지막 순간이 온 것이었다. 그리고 가냘픈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리 오너라. 난 너희들을 사랑한다. 코제트 너도 날 사랑하지? 코제트야, 난 네가 언제나 이 늙은이한테 애정을 기울여 주었다는 것을 잘 알고있단다. 내 허리 밑에 이 베개를 괴어주다니 얼마나 고운 마음씨냐. 날 위해 넌 눈물을 흘려주겠지. 하지만 너무 울지는 마라. 난 너에게 너무 큰 슬픔을 안겨주고 싶지는 않다. 너희들은 마음껏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 마차도 한 대 사고 아름다운 옷도 맞추어 입고 극장 특별석에서 구경도 하도록 해라. 맘껏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저 벽난로 위에 있는 촛대들은 네 것이다. 은촛대지만 나한테는 금이나 다이아몬드보다도 더 귀한 거란다. 그 촛대에 초를 꽂으면 성당의 큰 초와 똑같단다. 그걸 나한테 주신 분이 지금 하늘에서 날 보시고 만족하실지 모르겠다. 다만 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다. 그리고 너희들은 내가 가난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어느 땅 한구석에 묻은 다음 비석만 하나 세워다오. 이게 내 유언이다. 비석에는 이름도 새기지 마라. 코제트가 가끔 와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난 기쁘다. 퐁메르시 군, 당신도 같이 오시오. 두 사람 모두 내겐 똑같이 사랑스런 사람들이지. 당신에게 깊이 감사하고 있소. 당신이 코제트를 행복하게 해주리라는 걸 알고 있소. 벽장 속에 5백 프랑짜리 지폐가 한 장 들어 있소. 그걸 쓰지 않고 두었소.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오. 코제트야, 저 침대 위에 네 자그마한 드레스가 있지? 너 기억나니? 벌써 10년이 흘렀구나. 세월은 정말 빨리 가는구나. 우린 참 행복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 끝났구나. 자, 울지 말아라. 난 그렇게 멀리 가는 건 아니니까. 그곳에서 너희들을 보고 있겠다. 밤이 되거든 하늘을 올려다보기만 해라. 분명히 내가 웃는 것이 보일 테니까. 코제트, 몽페르메유 일을 기억하고 있니? 숲속에서 무서워 떨고 있었지? 내가 물통 손잡이를 들어주었던 일도 생각나니? 그리고 그 커다란 인형도? 그걸 수녀원에 가져가지 못해서 몹시 섭섭했었지? 이제 모두가 지나가버린 그림자가 되었다. 테나르디에 집안은 모두 나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용서해라. 그리고 이제 네 어머니 이름을 말해 줄 때가 되었구나, 어머니 이름은 팡틴이다. 잊지 말도록 해라. 어머니 이름을 입에 올릴 때는 꼭 무릎을 꿇어야 한다. 어머니는 무척 고생을 많이 하셨단다. 그건 모두 하느님께서 정해 주신 운명이었다. 하느님께선 저 하늘 위에서 우리들을 내려다보고 계신다. 자, 이제 난 가야겠다. 서로 사랑해라.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리고 여기서 죽은 이 가엾은 늙은이도 가끔 생각해 다오. 아, 코제트! 얘들아, 이제 눈이 잘 보이지 않는구나. 이따금 날 생각해다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눈앞에 무언가 환한 빛이 보이는구나. 좀더 가까이 오렴. 난 행복하게 떠난다. 사랑스러운 머리를 이리로 내밀어주렴. 내 손을 그 위에 얹을 수 있게." 코제트와 마리우스는 눈물에 젖어 장 발장의 손을 잡으면서 무릎을 꿇었다. 그의 성스러운 손은 이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반듯이 누워 있었다. 촛대의 어슴푸레한 불빛이 그의 얼굴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의 하얀 얼굴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의 두 손은 코제트와 마리우스가 입을 맞추는 대로 맡겨놓고 있었다. 그는 죽었다. 그날 밤은 별도 없이 아주 캄캄했다. 아마 그 어둠 속에서 어떤 커다란 천사가 날개를 펴고 한 영혼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 쓸쓸한 한구석에는 벽을 따라 갯보리와 이끼에 섞여 메꽃 덩굴이 기어올라간 커다란 나무 밑에 돌이 하나 놓여 있다. 이 돌도 오랜 세월 동안 곰팡이며 이끼 따위로 더러워져 있다. 근처에는 오솔길도 없고 풀도 무성하게 자라 있어서 아무도 찾지 않았다. 햇빛이 조금 비쳐 들면 도마뱀들이 이곳을 찾고 봄이면 휘파람새가 나무에서 지저귄다. 이 돌에는 아무 장식도 없다. 손질한 흔적도 없고 이름도 없다. 다만 몇 년 전 누군가가 연필로 시를 적어 놓았는데 그것도 비와 먼지 때문에 점점 읽기 힘들게 되어 아마 지금은 거의 지워져 없어졌을 것이다. 그가 이곳에 잠들어 있다. 기구한 운명이었네. 그는 살았다. 하지만 자기의 천사를 잃었을 때 그는 죽었다. 올 일은 결국 오고야 마는 것, 낮이 지나면 밤이 찾아오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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