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화
- 이별 -
바다의 가슴
추억을 펌프질 한다
뜨거운 갈증의 언어들
흔들거리며 떨어져 나간다
어깨를 내린 시간들
출렁이는 윤슬이 되었다
* 박정애 : ‘한국현대시문학(2014)’ 등단, 부산영호남문인협회 이사, 알바트로스시낭송문학회 이사, 경호문학회 회원
그날 새벽, 나는 그녀의 방에서 격렬한 사랑은 나누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처음, 그녀와 사랑을 나눌 때의 설렘과 황홀감 그리고 귓가에 은은히 들려오는 종소리가 그날은 없었다. 대신 내 머릿속에는 사랑과 영혼이 담겨 있지 않은 육체적인 쾌감과 지나친 소유욕, 독점욕이 돌아다녔다. 이건 아니다 싶어 몇 번이나 고뇌했지만, 나는 그녀와 사랑을 나누는 내내 불안했다. 그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마치 이별을 전제한 사랑 나누기를 하는 것처럼 그녀의 눈에는 간간이 눈물이 고여있었다. 나와 그녀는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고백했지만,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그녀의 침실을 빠져나오려는데, 그녀가 내 등 뒤에서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시간이 얼마 없어요. 결정해주시면, 따르겠어요.”
그날 미란이 내게 한 말이 그때 퍼뜩 생각났다. 나는 그녀가 서울의 남자와 결혼을 서두르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줘.”
나는 뒤돌아서서 그녀를 한 번 안아주고 그곳을 빠져 나왔다. 그녀에게 그렇게 말을 하고 나왔지만, 나는 앞이 캄캄했다. 아내와의 이혼, 그건 내 삶과 가정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일이었다. 절망적이었다.
어느덧 뜨거웠던 여름은 지나가고 초가을이 되었다. 그사이 나는 아내에게 더 이상의 결혼생활은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몇 번이나 이혼을 요구했다. 하지만 아내는 내 말을 아예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대로 나만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서 방황하던 나는 점점 초췌하게 변해갔다.
그러던 차에 나는 사장으로부터 두 달 동안 미국 출장을 지시받았다. 해마다 있는 미국 여러 곳에 있는 현지 방산업체와의 중요한 운송계약 때문이었다. 작년까지는 부장이 갔었는데, 부장은 유럽 쪽 출장과 맞물려 있어, 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그녀와 확실한 미래가 보장되었으면 나는 이참에 직장에 사표를 내고 함께 지리산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나는 별수 없이 미국으로 가야만 했다. 사장은 이번 계약만 잘되면 내년에 부장 진급을 약속했지만, 나는 그런 것에 연연할 마음이 아니었다.
출국 하루 전날, 나는 그녀의 집 앞에서 그녀를 잠시 만났다. 그녀는 내가 출장을 간다고 하자, 처음엔 말렸다. 하지만 이건 우리가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회사 차원이었고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녀를 두고 떠나는 게 몹시 불안했다. 그건 내 생각이겠지만,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내가 출국하기 전날 마치 내가 영영 떠나는 사람처럼 날 꼭 안아주었다.
미국에서는 매일매일 바쁜 날들의 연속이었다. 방산업체가 한곳에 모여있는 것이 아니라, 한곳에서 그곳 현장을 돌아보고 실무자들과 협상을 진행하고 결렬되면 또 협상하여 비로소 계약이 체결되면 나는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 와중에 나는 그녀에게 될 수 있는 대로 매일 카톡으로 내 마음을 전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 있는 게 이렇게 고통스러운 줄은 이곳에 와서 알았다. 일하다가 문득 그녀와의 추억이 담긴 공간에 내 마음은 가 있었고, 그녀와 나누던 사랑이 생각나 밤에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도 나처럼 거의 매일 카톡을 보내는 등 나름대로 사랑을 표시하였다. 하지만 매일 오던 연락이 삼 주를 지나자 띄엄띄엄하더니 한 달 후부터는 아예 연락되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불안하기 시작했고 그녀에 대한 걱정과 의심으로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러자 나는 오로지 귀국만을 생각했다.
거꾸로 매달아 놓아도 국방부의 시계는 돌아간다는 말이 있듯이, 미국에서의 시계도 마찬가지로 돌아가, 마침내 귀국했다. 토요일이었지만 공항에는 고맙게도 사무실 연희와 직원 몇이 꽃을 들고 마중 나와 있었다. 근사한 환영회를 광안리 바닷가 횟집에서 마련했다는 그들과 함께 그곳을 찾았을 때는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파도는 잔잔했고 가을은 완연했다.
“과장님. 계약체결을 잘했다고 들었어요. 정말 수고하셨어요. 내년엔 진급하시니 지금 부장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지요. 축하드려요.”
연희가 활짝 웃으며 잔을 권했다.
“당연한 것 아냐? 지금부터 우리는 부장님이라고 부르자. 부장님! 제 술도 한잔 받으십시오.”
다른 남자직원이 이렇게 말하자 좌중은 폭소가 터졌다. 하지만 이 기쁜 자리에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나는 그곳에서 그들에게 그동안의 미국 출장에 대해 주절주절 말했고 그들은 경이로운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낮술을 먹어서인지 아니면 시차 때문인지 나는 몇 잔 마시지 않았음에도 금방 취기가 올랐다.
그래도 술자리인지라 나는 내 옆에 와서 술을 따르는 김 대리와 업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내 귀에 유희, 라는 이름이 들렸다. 내가 앉은 반대편 여직원과 연희가 나누던 말이었다.
“계집애! 완전 밉상이야. 빌딩 안의 온 남자들을 몸 달아오르게 해놓고선, 결국 다른 놈과 결혼을 한다 하네.”
내가 고개를 돌리자 연희가 그 여직원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만해. 우리 사무실 이야기도 아니잖아.”
“내가 그만하게 됐어? K 관세사 사무실에 그 애를 짝사랑하던 박 대리 있잖아. 얼마 전에 그 애에게 구애하다가 거절당하고 맨날 울상이잖아. 내가 박 대리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그놈은 그년만 좋아하고 말이야. 내가 화가 나 죽겠어.”
나는 얼핏 들었지만, 그녀가 결혼한다는 이야기는 귀에 선명했다. 충격과 함께 온몸에 힘이 빠졌다. 그렇더라도 내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짐짓 별 관심이 없는 듯 자연스럽게 연희에게 물었다.
“연희야. 내 친구 한수 사무실에 있는 그 아가씨가 결혼해?”
당황한 듯 연희가 내 옆자리로 왔다.
“그렇다네요. 과장님 일단, 제 술 한 잔 더 드세요.”
그때 남자 직원들이 작은 소리로 그 여직원을 타박했다.
“야! 예전에 과장님과 그 여자의 뒷소문이 있었잖아. 그걸 알면서 그런 이야기를 왜 이 자리에서 꺼내고 지랄이야. 우리도 난처하게.”
그 직원은 양산 펜션에서 내가 술에 취해 있을 때, 내 옆에 있다가 유희 데려와, 하며 고함지르던 내게 봉변을 당한 직원이었다. 그제야 여직원은 자신이 말을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내 앞으로 왔다.
“과장님. 죄송해요. 제가 술 한잔 따를게요.”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래서 분위기를 바꿀 요량으로 나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다들! 내게 신경 쓸 것 없어. 물론 한때였지. 그럼. 그러니 그 여자에 대해 말해도 아무 상관 없으니까 계속해도 좋아.”
그때부터 나는 직원들과 폭음하며 완전히 술에 젖어버렸다. 어디선가 그만 마시자, 는 말이 들렸고 과장님을 누가 모셔,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패인처럼 어떤 직원의 차에 실려 집으로 오고 말았다. 직원이 겨우 아파트에 날 부축한 것은 기억이 났다. 나는 그 직원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지갑에서 몇만 원을 건네고 거실로 들어갔다. 아내와 아이들이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내가 들어왔음에도 그들은 무표정이었다. 나는 가방을 그들을 향해 힘껏 던져버렸다. 아내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고, 나는 다시 집을 나와버렸다.
무산 역이었다. 나는 무작정 서울행 KTX를 탔다. 기차에 앉자마자 나는 술에 취해 몸을 그대로 뉘었다.
눈을 떠보니 서울역이었다. 승강장에 내린 나는 바로 그녀에게 전화했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나야.”
전화기 너머에서 아!, 하는 탄성이 나왔다.
“집 근처로 갈 테니 나와 줘.”
“…….”
“신촌으로 오세요. p 카페.”
카페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조금 전, 택시를 타고 오면서 보아두었던 근처 모텔로 나는 그녀를 이끌었다. 처음엔 반항하던 그녀도 이제 체념을 했는지 순순히 방으로 따라왔다.
방문을 잠그자마자 나는 그녀를 와락, 하고 껴안았다. 여전히 그녀의 몸에서는 재스민향이 풍겼다.
“우리 지리산으로 도망가자. 그곳에 있으면서 내가 아내와 이혼을 준비할게.”
나는 그녀의 입술에 이어 목 그리고 온몸에 키스를 퍼부었다. 하지만 그녀는 목석처럼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너무 늦었어요.”
그녀는 살짝 밀쳤으나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나는 그만 침대에 쓰러지고 말았다.
“결혼은 안 돼. 어디 우리 사랑이 장난이야? 그건 절대 안 돼!”
그녀는 날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오늘 오신 거예요?”
“그런 질문하지 말고 내 말에 대답이나 해. 결혼하지 마. 제발! 유희야. 너도 알잖아. 이제 난 너 없이 살 수가 없다고.”
그녀는 안타까운 듯 내 옆에 앉아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말했잖아요. 이젠 늦은 거예요. 날짜도 다 잡아뒀는걸요?”
“그래도 안 돼. 취소해버려. 그리고 우린, 당장 떠나는 거야. 나는 펜션을 운영하며 시를 쓰고, 그대는 꽃밭은 만들면서 우리, 행복하게 사는 거야.”
그녀는 한동안 내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조금 주무셔요. 많이 피곤해 보여요.”
그녀는 내 양복 윗도리를 벗기고 넥타이를 풀어줬다. 나는 그녀를 안고 싶었지만 정말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그녀가 옷을 벗기는 동안 나는 몇 번이나 침대에 쓰러졌다가 일어났다. 갑자기 잠이 쏟아졌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녀에게 계속 “안돼.”, “그러면 안 돼.”를 반복했다.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눈을 떠보니 불을 켜져 있었고 나는 옷을 완전히 벗고 있었다. 내 옆에는 놀랍게도 물수건을 든 채 쓰러져 기대어 자는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밤새 술과 땀에 절은 내 몸을 닦아 준 모양이었다. 술이 깬 나는 조용히 그녀를 침대 위로 끌어 편안하게 누이고 얼른 세면장에 가서 샤워했다. 씻고 나니 어느 정도 정신이 들었다. 나는 침대에서 곤히 자는 그녀를 뒤로하고 침대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겼다. 방안의 시계는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그야말로 진퇴가 불가능한 수렁에 빠진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내 손목에 따뜻한 감촉이 들어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그녀가 눈을 뜨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다, 안타깝고 그윽한 눈으로 날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새 그녀의 입술이 내 쪽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달콤하고 촉촉한 입술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밤임을 깨달았다.
아침에 눈을 뜨니 그녀는 없었고, 탁자 위에 시들은 풀 반지가 놓여있었다. 그때 지리산에서 내가 직접 그녀의 손에 끼워 준 반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