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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브레이어(Bréhier, 1876—1952)
- 제3권. 중세와 르네상스, Moyen Age et Renaissance 463-702
제7장, 르네상스 La Renaissance 659-702.
1절, 일반적 성격들 Caractères généraux 658-
15세기의 인본주의 환경들 속에서, 군주들과 교황들의 보호아래 매우 다른 대학들이 세속적인 것과 교회적인 것을 무차별적으로 재통합되었는데, 플로랑스에서 로랑 드 메디치(Laurent de Médicis, Laurent le Magnifique, 1449-1492)의 플라톤 아카데미에서도, 베니스에서 알도 마누찌오(Aldo Manuzio, 1449-1515)의 알도 아카데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새로운 환경에서 지식 그대로의 욕망 보다 더 가치 있을 수 있는 어떠한 실천적 고려도 없었다. 완전히 자유로워진 정신은, 대학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더 이상 성직자를 만드는 필연적인 교육에 봉사하지 않는다. 다음세기는 대학과 구별되는 꼴레쥬 드 프랑스(Le Collège de France, 옛 명칭 Collège royal)가 설립되었으며, 전통적인 습득 지식을 분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인식들을 장려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659)
이런 자유는 학설들과 사상들의 범람을 일으켰다. 우리는 중세 동안 내내 이런 것들이 상처를 내었다는 것을 보았으나, 이제까지는 억제될 수 있었다. 이런 혼재된 혼합을 사람들은 자연주의라 부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방식으로 자연주의는 우주도 품행도 어떠한 초월적 규칙에 종속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주의는 단지 그것들[우주와 품행]의 내재하는 법칙들 탐구하고, 가장 생생하고 가장 사상들 이외에도 최악의 괴물같은 성질들로 포함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만들었던 모든 것에 등을 돌리고자 원했다. “ 로방 발라(Laurent Valla, 1407–1457)는 - 포게(Pogge, 1380-1459)가 쓰기를, 그의 친구가 인본주의자이며 에피쿠로스주의자이듯이 또한 그도 마찬가지이라고 했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비난했다. 그는 보에티우스(480-520)의 라틴어로부터 다른 문명을 발견하였고, 또한 그는 종교를 파괴하고 이교도의 사상들을 공언하였으며, 경전(Bible)을 불신했다‥…그는 크리스트종교가 증거들 위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증거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신앙위에 근거하고 있다고 선언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포게는 로마 교황청의 직원(공무원)이었다. 로랑 발라로 말하자면, 추기경 쿠자누스가 1450년에 교황에게 그를 천거했고, 또한 그를 교황청에 들어가게 하고자 원했다. (660)
새롭고 위험한 다른 삶에 대한 강한 욕망은 경험과 기술들의 거대한 증가에 의해 부추겨지고, 적어도 강조되었다. 이런 증가는 한 세기 동안에 유럽의 물질적이고 지적인 조건들을 변화시켰다. 경험의 증가는 과거에 그리스 원전을 읽었고 인본주의자들 덕분이었고 16세기에는 동방 언어들을 전수받았던 인본주의자들 덕분이었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원전의 발견에서라기보다 사람들이 원전들을 읽는 방식이다. 성 암브로시우스(340-397)와 에라스무스(1466-1536)가 읽었던 키케로(전106-전43)의 동일한 의무론(De officiis: Traité des devoirs)이었다. 그런데 암브로시우는 그 책에서 성직자를 위한 규칙들을 찾았고, 에라스무스는 거기서 크리스트교로부터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도덕을 찾았다. 이제 이런 원전을 경전들의 설명과 일치시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것들을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험의 증가 측면에서 공간상으로, 그 당시에, 고대 이후에 크리스트교가 거주하는 토지의 한계들을 그렸던 세상(οἰκουμένη, 오이쿠메네)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양푼이 같은 지중해의 시각들을 넘어서는 새로운 땅들[신대륙] 뿐만이 아니라, 종교도 풍습도 알려지지 않은 인류들의 삶의 새로운 전형들을 발견한다. 기술의 증가 측면에서, 나침판, 대포의 화약, 인쇄술 뿐만이 아니라 산업들과 기계들의 발명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기계들의 발명에는 거의 대부분 이탈리아 예술가와 동시에 장인들의 도움이었다. 이시대의 인간들은 전통에 매여 있었다고 할지라도, 삶이 오랫동안 중지되었던 삶이 새로이 펼쳐지고, 인류의 숙명이 다시 시작한다는 인상을 가졌다. 1433년에 추기경 쿠자누스가 썼듯이 “우리는 도처에서, 고대로 되돌아가는 자유예술들과 기계들의 연구에 가장 열중했던 인간들의 정신들을 본다. 이들은, 마치 사람들이 어떤 혁명의 원(cercle) 전체를 곧 완성하는 것을 보고자 기대했던 것처럼, 극도의 열성을 가지고 연구에 열중했다.” (660)
정신들은 증가하는 이런 경험에 대해 대치되는 제한된 경험에 근거한 인간과 삶의 전통적 개념작업들을 자연적으로 좋아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모든 분산들과 이 모든 다양성드에도 불구하고, 중세 전체 동안에 하나의 이미지가, 만일 사람들이 원한다면, 하나의 도식이 있었다. 그 도식 안에 우주의 가능한 모든 이미지들이 틀로 짜져서 자연적으로 들어온다. 그것이 우리가 신중심주의라고 불렀던 것이다. 마치 원리로서 신으로부터, 마치 목적과 완수(consommation)같은 신으로, 유한한 존재들에 의해 통과하면서, 하나의 정식이 나온다. 그 정식은 대전들들 중의 가장 정통교리인 것에 적합하듯이, 신비학들 중에 가장 이교교리인 것에도 마찬가지로 적합할 수 있다. 그 만큼이나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품행도 이런 원리와 이런 목적 사이에 일종의 필연성을 가지고 제자리를 잡는다. (661)
이러한 종합은 우주의 모든 사물들을, 즉 기원과 종말을 참조하며 신의 피조물들 또는 표출들로서 모든 유한한 존재들을, 신에게 가까워지거나 또는 멀어지는 중에 있는 모든 유한한 정신들을, 생각하는 학설 덕분에 가능했다. 그런데 이런 참조는 점점 더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미 12세기에 어떻게 인본주의의 자연주의가 초안되었는지를 우리는 보았다. 이 자연주의는 자연과 사회의 구조와 힘들을 그 자체로 연구했었다. 더 나아가 14세기에는 사물들의 기원과 종말을 바라본 모든 것을 숙고하여 생각하면서, 그리고 변하지 않는 하늘과 달 아래 영역의 대립에서 신적인 어떤 도식[단면]의 어떤 것을 파악했다고 사람들이 믿었던 것이 오류라는 것을 심지어 증명하면서, 오캄주의자는 자연을 그 자체로서 그리고 마주하여 연구하였다. 그러나 뒤 따르는 두 세기에서는 새로운 이법들이 신중심주의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갔던가! 사람들이 역사와 자연 속에서 겨우 의심스러워했던 낯설고 불가사의한 심층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문헌학이 다른 한편으로 실험 물리학이 인간과 사물들에 새로운 교육을 제공하였다. 크리스트교의 드라마는, 창조, 원죄, 속죄들 같은 교리의 역사적 찰나들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틀에, - 즉 자연에게도, 인류에게도, 시대에서도, - 결정적으로 쓸모가 없을 수 있다: 말하자면 자연의 법칙이 교리의 드라마와는 완전히 무차별적이고[무관하고], 인류의 일부[다른 지역의 인간들]는 교리를 완전히 모르고 있고, 이 시대에 크리스트교 민족들 자체는 정신적 능력[종교]과는 독립적이 되는 경향을 띠면서, 민족들의 정치적인 면에서 크리스트교의 초자연적인 목적들보다 완전히 낯선 목표들을 중요시 하였고, 또는 크리스트교의 동일성의 관념과는 반대로 숙고하게 되었다. (661)
매우 생생한 변화가 무한한 반향을 일으켰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모든 종류에서 실천하는 인간들, 행동하는 인간들, 예술가들, 장인들, 기술자들을 전면에 놓으면서 성찰하는 것들과 사변적인 것들에 멀리 두었다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새로운 개념작업은 사람들이 그것을 사유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실현화 할 개념작업이라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철학자들의 이름들은, 즉 니콜라 쿠자누스에서부터 캄파넬라(Tommaso Campanella, 1568-1639)에까지, 그 당시에는 위대한 장수들[지도자들]과 위대한 예술가들 곁에서 거의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 당시 고려할 모든 것은 어떤 방식으로라도 기술자(technicien)였다. [한편] 완성된 전형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Léonard de Vinci, 1452-1519)였으며, 그는 화가이자, 동시에 발명가, 수학자, 물리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의학자이며 동시에 적어도 천문학자이며 비의학자인 철학자는 전혀 아니었다. [다른 한편] 마키아벨리(Nicolas Machiavel, 1469-1527)의 정치학은 이탈리아 군주들에게 필수적인 기술(technique)이었다. [또 한편] 인본주의자들은 사상가들이기에 앞서, 문헌학에 참여자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고대인들의 형상들과 사유를 재정립하게 해줄 방법들을 고민했다. (662)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아마도 시대의 거대한 파라독사가 있었다. 르네상스의 대부분 철학자들은 우주에 대한 고대의 도식 주위에서 자신들의 사상을 조직화하고자 애썼다. 플라톤주의의 회귀는 (플라톤주의는 충분히 뒤섞인 종합주의를 배척하지 않았다) 철학자들을 새로운 관념들로 이끌기는커녕, 철학의 중요 임무가 원리같은 신과 목적같은 신 사이에서 사물들과 정신들을 정돈하는 것이라고 이들을 더욱더 설득하려 하였다.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체계 속에 총합하려는 자연에 대한 낡은 도식과 새로운 철학 사이의 대비는, 우리가 보게될 것이지만, 그들의 학설에 커다란 난점을 일으켰다. (662) (56UKB)
2절, 사유의 다양한 흐름들 Les courants de pensée 662. [르네상스의 네 가지 흐름]
이런 반성들은 매우 혼동된 이 시대에서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구별된 여러 관념들의 흐름을 분리하게 해줄 것이다.
우선 플라톤주의 흐름이 있다. 사람들은 플라톤주의가 크리스트교의 첫 세기부터 새로운 종교에 의해 잘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회상한다. 마르실 푸생(1433-1499)과 같은 15세기의 플라톤주의 인본주의자들은, 플라톤주의 속에서 크리스트교에 알맞은 철학적 종합을 발견할 거라고 아직도 매우 신중한 희망을 간직하였다. 인본주의자들은 크리스트교를 무시한다고 할지라도 샤르트르학파와 아벨라르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둘째 흐름은 파도바 대학의 [아베로에스(1126-1198)] 에베로에스주의자들의 흐름이다. 이들은 시제르 브라방(1240-1284)이래로 파도바대학에서 14세기 초에 피에트로 아바노(Pietro d'Abano, 1250-1316)에 의해서 중단 없이 전해졌던 전통을 따라갔다. 이 전통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에 근거하였으며, 크리스트교의 소요학파주의의 전통에는 대립되었다. 그 전통에서는 사람들은 자연주의자로서 어떤 아리스토텔레스를 보며, 섭리와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부정자로서 어떤 아리스토텔레스가 반대로 엄격한 결정론을 주장하는 것을 본다. 그 전통에서 근대 과학의 여명을 본다는 것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파도바파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의 정신들 유지했던 [크리스트교의] 반동파들이었다.
셋째 흐름은 진솔한 과학자들의 흐름이다. 그들에게서 모델은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아니고, 오히려 아르키메데스(전 287경-전212), 즉 수학적인 것을 경험에 통합시킨 첫째 인간이었다. 아르키메데스는 중세에서는 완전히 무시당했을지라도, 전통이 가르칠 수 있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진보된 과학의 상태로 도약을 이끌었다.
넷째 흐름은 셋째만큼이나 독창적이다. 이 흐름은 고착되고 규정된 어떠한 정식에도 이르지 않는 흐름이다. 그것은 도덕론자들의 흐름이다. 이 흐름은, 마치 과학자들이 자연의 기원과 종말에 대해 독립적으로 자연[본성]이 무엇인지를 탐구한 것과 마찬가지로, 초자연적인 자기숙명으로 만들어진 추상화 작업으로써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묘사하기를 제안한다. 인간 자연[본성]에 대한 이런 묘사에서, 고대 도덕론들은 특히 스토아학파의 도덕론에서는, 진실로 선도적이었다. (663)
첫째 흐름을 보류하고 보면, 오캄주의가 14세기부터 이 모든 학설에서 함축적 가정작업을 발언했던 것 같다. 자연 속에서는 아무 것도 우리를 신의 대상들에게 이끌 수 없다. 신앙은 폐쇄된 영역이고, 유보된 영역이며, 신의 무상 보시(un don gracieux)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소통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러나 이것이 또한 종교개혁의 근본적 생각이 아닌가? 우리의 지성도 우리의 의지도 자연적 수단들에 의해서 신앙에 맞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종교개혁은 스콜라신학에서 만큼이나 인본주의에도 대립되었다. 종교개혁은 스콜라신학을 부정하는데, 왜냐하면 종교개혁은 오캄주의와 함께, 우리의 추리적 능력들이 우리를 자연으로부터 신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종교개혁은 인본주의도 부정하는데 인본주의의 오류들이라기보다 그것의 위험들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연적 힘들은 어떠한 종교적 의미와 소통할 수 없기 때문이다. (663)
반대로 종교개혁은 인본주의만큼이나 우주의 신중심주의 개념작업에 적대적이고 또한 신중심주의에 연결된 모든 도덕적 정치적 주제들에 적대적이다. 이 양자는 자연적인 것과 신적인 것, 감각적 세계와 세계의 원리의 이런 종합을, 즉 13세기에 꿈꿨던 모든 귀결들과 더불어 종합을 무시하고자 한다. (664)
[르네상스를 설명하는 네 가지 흐름이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인문주의, 자연과학,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것과 다르다. 왜? 세 가지 강조는 앵글로색슨이고, 네 가지 흐름은 그리스 사유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서로 대립되는 두 방식으로부터 사람들은, 자연의 인식과 신적인 실재성 사이에서 결정적이라고 느꼈던 분열에 의해 잃어버린 심정적 통일성을 재발견하기를 시도한다. 한편으로 자연을 규칙으로 삼는 자치적인 도덕적 삶을 조직화하려고 애쓰면서, 다른 한편으로 은총에 의해서와 다르게 정당화되는 모든 가능성을 인간에게서 제거하고 한다. (664) (56UKB)
3절, 플라톤주의: 니콜라 쿠자누스 Platonisme: Nicolas de Cues 664.
신중심주의 옛날 우주 도식과 인본주의 방법 사이의 내면적 투쟁은 15세기 유일한 사상가, 즉 추기경 니콜라스 쿠자누스(Nicolas de Cues, 1401-1464) 속에서 정확한 방식으로 표시된다. 그에게는 오캄주의와 신플라톤주의 사이에서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들 중의 한 가지 혼합이 있는데, 오캄주의는 그가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스승들의 전통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신플라톤주의는 그에게, 드니 아레오파지트에 의해서 뿐만이 아니라 그가 읽었던 프로클로스의 중요한 작품들과, 신학 원론, 파르메니데스에 관한 주석, 플라톤의 신학과 친숙하기 때문인데, 이는 마치 앞선 세기 독일 신비가들처럼 기욤 드 메르베케(1215-1286)의 번역에서 읽었던 것이다. 아랍인들의 신플라톤주의와 심지어 드니 아레오파지트의 신플라톤주의가 다르다. 플로티노스와 프로클로스의 신플라톤주의가 다르다. 전자는 무엇보다 존재들의 위계질서를 묘사하는데 신경을 쓰고 있다. 천사들 또는 지성들에서부터 하부 정령들에까지 어느 정도로는 그들 각각의 형이상학적 지위를 규정하기 위하여 위계질서를 묘사하고 있다. 후자는 차이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에 훨씬 더 가깝고, 어떻게 위계의 각 등급이 가능하지만 다른 국면 하에서도 모든 실재성을 포함하는지를 제시하고자 원한다. 온일자(l’Un)은 모든 것들[사물들]을 포함하며 온지성도 마찬가지이며, 똑 같이 영혼도 감각적 세계와 마찬가지인데, 각각 기저(chaque hypostase)는 자기 방식에 따라 다르다. 말하자면 온일자에서, [모든] 사물들은 구별이 없다. 온 지성에서, 사물들은 각각에서 모든 것을 보는 직관적 통찰 덕분에 서로 침투한다. 영혼 속에서, 추론하는 이법의 연결들에 의해서만 연결될 뿐이다. 세계 속에서는, 사물들은 서로들과 서로들 간에 외적으로 남아있다. 따라서 이런 서로 간의 차이는 존재의 항들로서 라기보다 오히려 인식의 항들로 표현된 수 있다. 신플라톤주의는 한 기저(une hypostase)애서부터 덜 상위 기저로 이행을, 마치 한 실재성으로부터 다른 실재성으로 이행 처럼이라기 보다, 오히려 동일한 우주에서 점점 더 깊고 점점더 하나로 가는 통찰처럼, 재현한다. (665)
그런데, 신플라톤주의의 이런 생각[관념]은 추기경의 현학적 무지에 대하여(De docta ignorantia, 1440)와 다른 저술들 속에서 수천 가지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고, 그 생각은 진실로 그의 사유의 토대를 형성한다. 추기경은 이법 우주와 감관의 우주보다 더 우월한 우주에 대해 통찰할 도식으로 이행하도록 자신에게 허락하는 방법을 찾으려 했다. ]그 방법은] 모든 사물을 추리화하는(rationaliter) 것이 아니라 지성화하는(intellectualiter) 것을 파악하는 것이며, 이러한 것이 그의 첫째 목표였다. (665)
이로부터 수학들을 생각하는 그의 방식에서 하나의 특성적인 예를 들어보자. 이런 영역에서 풍부한 결과물을 갖지 못하지만, 그의 사유는 적어도 그의 사유 방향에서 우리에게 흥미를 끈다. 우선 아리스토텔레스에서서 수학들이 무엇이었는지를 한 마디로 상기해보자. 그에게서, 우리가 알고 있듯이, 마치 인간의 조각상 또는 하늘의 자연적 외형 윤곽처럼 기하학적 특성들은 이런 존재의 본질에 의존한다. 이때부터 기하학, 즉 이런 윤곽들의 연구는 추상화된 실재성들의 – 실재성들 자체 속에 윤곽들의 이치[근거]를 갖지 못하는 - 과학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수학적 추론은 정의 속에서 정태적으로 주어지는 이런 형상들의 성질들을 서로 서로 연쇄로 연결한다. 기하학이 이런 하부 지위를 오랫동안 차지했었는데, 많은 르네상스 사상가들이 이 지위를 기하학에게 내버려 둔 채로 처리했다. 예를 들어 프라카스토르(Jérôme Fracastor, 1478-1553)는 수학들이 확실하다고 할지라도 너무 천박하고 너무 낮은 대상들을 다룬다는 것을 주목했고, 그리고 이러한 반성은 심지어 [데카르트의] 방법 서설 속에 그의 반향을 지닌다. 그런데 쿠자누스는 측량사의 기술인 감각적 수학 이외에도 또한 유클리드의 가하학인 추리적 수학 이외에도, “지적인 수학”이 성립하는 것을 보기를 바랐다. 그것은 그가 표현의 방식으로 “기하학적 변형작업들”(1450)의 기술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런 기하학적 변형작업의 기술은 근대 수학자들이 극한(limite)의 문제라고 불렀던 문제들을 다룬다. 즉 기하학자가 판명한 것으로 생각하는 형태들 중의 한 형태와 다른 형태가 일치를 이루는 경우들을 다룬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원의 호(弧)와 현(弦)이 일치한다는 것을, 호가 최소일 때에[즉 극한에서], 직관에 의해서 본다. (665)
이런 호와 현의 일치는 사물들의 지적 인식의 원리인 대립물들의 일치의 일반원리의 적용일 뿐이다. 반면에 모순의 원리는 추리적(rationnelle) 인식의 원리이다. 지성은, 이법이 반대하고 배타적이라고 선언하는 반대들이 재통합된다고 본다. 따라서 인식은 비추론적 것을 향하는 경향이 있고, 말하자면 마치 극한을 향하는 것처럼 지적인 것을 향하는 경향이 있다. 현학적 무지에 대하여(1440)는 이치(raison)에 대해 극한들을 의식하는 자의, 대립물들의 일치를 인정하는 자의, 정신적 상태이다. 말하자면 모든 사물들의 이런 통일성의 상태에서 플라톤주의자들은 존재와 인식의 원리를 보았다. 그러나 이런 국면에서 인식은 짝을 이룬 반대들이 있는 만큼이나 많은 구체적 문제들에게 실마리를 줄 수 있다. 이리하여 곡선은 직선과 일치한다. 게다가 정지는 운동과 일치한다. “운동은 계열로 정돈된 정지일 뿐이다(quies seriantim ordinata)” [쿠자누스가] 아리스토텔레스학파의 자연이 근거하는 모든 중요한 대립들을 이렇게 넘어섰다. 우주 자체는 마치 하나의 무한정한 실재성처럼 나타나고, 그 실제성의 중심은 도처에 있고, 그 원주(圓周, 가장자리, 테두리)는 어디에도 없다. 플라톤주의자들이 통합 상태라고 불렀던 것을 쿠자누스는 콤플리카티오(complicatio, 접음, 얽힘)이라 불렀고, 그들이 산개 상태라고 불렀던 것을 엑스플리카티오(explicatio, 펼침, 전개)라고 불렀다. “신은 접음 상태에서 모든 것(사물)이다. 세계는 펼침 상태에서 모슨 것이다. 신과 세계는 하나 하나가 가능한 존재 전체를 포함하는 최대치이다. 그러나 신은 절대적 최대치, 즉 소유존재(posset)이다. 이 소유존재에서 모든 능력(pouvoir, posse)이 현실적으로 있다(etre, est). 게다가 최대치는 여기서 존재들 중의 가장 큰 존재를, 즉 사람들이 최대치를 유한한 존재들과 비교한다고 가정했을지도 모를 무엇을, 의미하지 않는다. 최대치를 사물들과 모든 비례 관계 바깥에 두는 초과[과도함]를 생각하기 위하여, 초과도 또한 최대치이라고 말해야만 한다. 말하자면 최대치는 모든 대립을 넘어선다고 말해야만 한다. 우주[세계]는 축약된 최대치, 말하자면 축소된 최대치이며, 거기에서 혼성되고 계속되는 실재성은 잠세태로부터 현실태로 통과한다. 또한 ”신은 세계의 절대적인 실질임(quiddité, 무엇임)이다. 우주는 신의 축약된 무엇임이다.“우주라는 이런 축약된 최대치 안에서, 쿠자누스는 완성되었다기보 오히려 잘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라는 펼침(explicatio)을 제시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자연학은 마치 플로티노스의 자연학처럼, 전체는 아직도[여전히] 전체 속에 있다. 이리하여 4원소들은 아리스토텔레에서처럼 순수성의 상태로 현존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섞인 것들이다. 그리고 불 그 자체는 다른 3원소들을 포함하고 있고, 자기 속에 재통합되어있다. 그 수학(la mathematique)이 이런 경험의 체계적인 계열로부터 생성을 파악할 수 있다. (667)
인식은 펼침(explicatio)의 반대 운동이다.이 운동에 의하여, 영혼 속에서 다양성은 통일성으로 환원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처럼 쿠자누스에게서 영혼은 자기 방식으로 복잡함(complication)의 상태에서 모든 것[사물]이다. 그리고 영혼이 조금씩 생산하는 인식은 그[영혼] 자체 속에 있는 것의 설명(l’explication, 펼침)이다. 마치 펼침(explicatio)이 이완과 다양성의 상태인 것처럼, 펼침은 원칙적으로 접음(la complicatio)보다 열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식은, 즉 영혼의 권능들에 대한 현실화작업은 사실상으로는 풍부함이다. 쿠자누스는, 인식이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운동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상당히 모호한 방식으로, 그런대로 지각했던 것 같다. 하나는 분석이고 다른 하나는 종합이다. 그는 하나를 펼침(explicatio)이라고 다른 하나는 접음(la complicatio)이라고 이름 붙였다. (667)
어떻게 이런 독단이 플라톤주의로부터 정돈되었는가? 쿠자누스의 화해하는 정신. 이 정신은 그에게 매우 평화적인 정신으로 코란의 검토(Examen du Coran, 1460)와 호기심가득한 대화로 신앙의 평화(De pace fidei, 1453)에 영감을 주었고, 이 후자는 18세기에 자연종교의 호소로서 해석될 것이다. 이런 정신은 그에게 크리스트교를 부정신학의 전망 속에서 해석하게 해주었고, 동시에 독단들에 대해 일종의 주지주의화 하면서 해석하게 해주어다. 여기서 신앙(la fides)은 그의 몇 원문들에서 보듯이 예지(l’intellectus)보다 상위의 한계일 뿐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창조가, 즉 신적 의지의 자유롭고 긍정적인 작동이, 이러ᄒᆞᆫ 정식으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최대치의 존재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이고, 그리고 왜냐하면 최대치 속에서, 존재하고 행하고 창조하는 것은 동일한 것[사물]이기 때문에, 창조한다는 것은, 신이 전체가 이라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것을 말하고자 원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쿠자누스는 일자로부터 다자를 나오게 하는 어떠한 필연적 원리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유일하게 무한한 형식이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피조물들에 참여되는 지를 이해한다는 것”이 언제까지나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또한 사람들은 여기서 이런 이유로 쿠자누스를 근대인으로 보는데, 그는 신플라톤주의로부터 우주를 대체적으로 설명하는 형이상학보다, 구체적인 문제들과 극한들에 이르는 방법과 정신을 추출하기를 시도했다. (667) (56UKC)
4절, 플라톤주의(연속) Platonisme(suite) 668 .
니콜라스 쿠자누스(1401-1464)의 플라톤주의는 많은 점들에서, 우리가 이제 제시할 플라톤주의를 훨씬 넘어섰다. 업무에 짖눌린 추기경은 철학적 성찰에 상당히 적은 순간들에서만 짬을 낼 수 있었다. 그의 사상들 자주 모호한 채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는 플라톤주의에서 하나의 방법이 있다는 것을 겉핥기 보다 많을 것을 해냈다. 반대로 마르실 피생(1433-1499)이래로 플라톤주의자들은 스승의 학설들에 내재하는 종교적 또는 시적인 토대들을 특히 강조하고 원했다. 그들은 거기서 크리스트교와 일치를 찾으려 했을 뿐만 아니라, - 크리스트 교리는, 파도바학파의 아베로에스주의자들에게 반대하여, 철학이 크리스트 교리적이라는 것을 제시하려고 했다 - 또한 전 인류에 공통적인 종교의 통일성을 찾으려 했다. 그런데 이 통일성을 사람들이 모든 민족들의 전통들 속에서 다소 막연하게 마주치게 되고, 이 통일성에 대해 크리스트교는 아마도 찰나적인 국면일 뿐일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인본주의 플라톤주의자들을 종교개혁과도 충돌하고, 또한 결국에는 반종교개혁과도 충돌할 것이다. (668)
따라서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학자들과 플라톤주의 학자들 사이에 투쟁의 의미를 보게 되는게, 이런 투쟁의 장을 연 것은 플레톤(Pléthon, Πλήθων, 1355경-1452)이 1440년에 플로랑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반대하는 팜플렛에서 시작한다. 추기경 베사리온(Bessarion, 1403-1472)과 그의 찬성파들에서 처럼 플레톤에게서도 숙명주의와 영혼불멸의 주정에 반대하여 방어하는데 플라톤을 사용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는 또한 피생의 작업들의 의미이기도 하다. 피생은 1492년에 플로티노스를 번역했고, 그리고 자신의 작품인 영혼불멸에 대한 플라톤 신학(Theologia Platonica de immortalitate animae, (1482) 속에서 플라톤의 견해에 주석을 달았다. 그는 자신의 철학적 탐구들 속에서 종교적 설법에 필연적인 보충을 보았다. 그 설법은 아베로에스의 불경건함을 파괴하기에 무능했다. 거기서 “철학자들이 기꺼이 청취하는 철학적 종교, 그리고 아마도 철학자들을 설득하는 철학적 종교가 필요했다. 몇몇 변화들과 더불어 플라톤주의자들은 크리스트교인이 되었을 것이다.” 피생은 플라톤에게서 창조적 신을, 인격적 현존과 자유와 불멸을 부여받은 영혼들을 발견했다. 독창성이 거의 없는 사상가이지만 재능있는 번역가이며 주석가인 그의 책들은, - 16세기에 파리에서 여러 번 출판되었다 - 르네상스 전 기간 동안에 플라톤과 플로티노스의 인식의 근원이었다. (668)
사람들은 더욱 열기 있는 상상작용과 더불어 유비적 정신 상태를 미란돌라(Pico Della Mirandola, 1463–1494)에게서 발견한다. 미란돌라는 그의 일곱날 다음(Heptaplus, 1489)에서 다른 많은 해석들 이후에 모세의 창세기에 대한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다시 시작했다. 그는 창세기에서 카발라와 조아르의 찬란하고 복잡한 형이상학을 재발견했다. 거기에는 우리가 필론 알렉산드리아(전20-후45경) 이래로 알았던 것 이외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새로이 알레고리와 보편적 종교의 관념의 통합을 알려야 했다. (669)
카발라의 모든 몽환적 환상(fantasmagorie)은 16세기에 독일 신비가들의 형이상학적 재구축에서 다시 나타난다. 그들의 세계에서, 마치 플로티노스의 세계에서처럼, 모든 것은 상징이고, 전체는 전체 속에 있고, 과학은 인식에 의한 친근성의 정도차이들을 표시하는데 있다. 사람들은 이런 정도차이들로부터, 마찬가지로 어떻게 사물들이 서로 서로 작용하는 지를 알 것이다. 그러한 것은 의사인 파라셀수스(Paracelsus, 1493-1541)의 목표였다. 그의 모든 작품들은 자연의 사물들 사이에서 이런 종류의 유사한(그럴듯하게 주장하는) 상응물들의 발견일 뿐이다. (669)
우리는 이런 낯선 것들을 알리는 것으로 만족한다. 독일 언어 국가 속에서 낯선 것의 확산을 주목하는데, 그럼에도 루터파 정통교리의 부분으로부터 항의가 없지 않았다. 중세의 이색분파들의 수면아래의 행동을 이어가면서, 모든 종류의 사상들이 술렁거렸고, 특히 바이겔(Valentin Weigel, 1533–1588)과 뵈메(Jakob Böhme, 1575-1624)의 작품들 속에서 표현되었다. 이 전수자들은 경전의 글자를 넘어서 신적인 삶의 불가사의들에 도달한다. 우리는 보다 나중에 이 운동의 도달점들을 재발견 할 것이다.
우리는 이 장의 마지막에서 어떻게 플라톤의 정신주의[유심론]이 진실한 철학적인 체계들을 생산했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여기서 얼마나 비체계적이고 확산된 형식하에서 정신주의가 크리스트교 신앙들에 연결되어 있는지를 간단하게 지적하자. 플라톤의 크리스트주의는 이 당시에 인문주의자들에게 우호적 주제가 되었다. 에라스무스(1466-1536)는, 파리에서 출간되어 거대한 성공을 얻은 똘끼의 찬미(1511)에서, 신체에 얽매여서 진리를 관조하는데 물질의 방해를 받는 인간 영혼에 관하여, 크리스트교의 학설들과 플라톤주의의 학설들의 일치를 확인하는 것이, 그리고 “실재성을 그림자로서 취급하는 자들의 광기[어리석음]를 한탄하는” 현자들과 “보이지 않은 사물들의 관조에 전적으로 의지하는”(46장) 경건한 자들의 동일성을 확인하는 것이, 아주 행복했다. 이런 절충주의는 16세기 전체 동안에 프랑스에서 전개되었다. 부샤르(Amaury Bouchard, 1490경-?), “왕의 숙소의 일상적 요구들의 지배인”이었던 그는 1530년경에 한 저술 영혼의 탁월함과 불멸성에 대하여(De l’excellence et immortalité de l’âme)를 썼다. “이 저술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로부터 뿐만이 아니라, 여러 그리스와 라틴 철학자들로부터 플라톤적인 것만큼이나 퓌타고라스적인 것에도 친숙한 것을 추출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퓌타고라스의 인용문들, 즉 피생의 플라톤의 신학(Theologia platonica)에서 빌려온 리노스(Linos, Λῖνος)와 오르페우스(Orphée Ὀρφεύς)이야기를 추출했다. 라 보드리(Fevre de La Boderie, 1541-1598)의 작품 영원성이란 비밀들의 원환(L’Encyclie des secrets de l’Eternité)은 1570년에 쓴 여덟 노래들로 된 시(詩)인데, 크리스트교의 변신론적인 것의 전형이며, “이탈한 자유시인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플라톤주의에 연결되어 있다. 그 플라톤주의란, 파이드로스편의 불멸의 영혼, 그의 타고난 관념들과 더불어 파이돈편의 신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영혼, 영혼이 영원에 도달한 사실에 의하여 현존 증거, 등이다.
“영혼이 영원에까지 잘 도달했기에
너는 신성을 고백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지 않다면, 재바른 너의 영혼이
영원한 본질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이것들은 크리스트교적인 플라톤주의의 요소들이며, 데카르트가 나중에 70년 g에 이용하게 되는 것과 동일한 요소들이다. (670)
플라톤의 이런 영향의 특별한 국면이 우리의 주의를 끌어 마땅하다. 이것은 문학과 철학의 터전들에서 사랑에 관한 파이드로스편과 심포지움(향연)편의 관념들의 확산이다. 즉 플라톤의 사랑(ἔρως, 에로스)은 복음서가 덕목들의 최정상에 놓은 신의 사랑(caritas, 카리타스: gr. ἀγάπη, fr. charité)과 매우 다르다. 신의 사랑, 사람들은 이것을 토마스주의자들에 의해 마치 자기애(l’amour de soi)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처럼, 또는 빅토리아파들와 프란체스코파들에 의해 마치 순수하고 이익 없는, 또한 자연적 충력들과 전혀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랑처럼 생각했으며, 이 신적 사랑은 어째거나 하나의 목적이다. 플라톤의 사랑, 그는 [전승의 이야기 속에서] 풍요의 여신과 가난의 여신 사이의 아들이며, 그 사랑은 항상 결핍, 즉 욕망이다. 욕망은 결코 만족하지 못하며, 항상 그가 탐문하는 아름다움에 부족함이며, 휴식[안정] 없는 불안 속에 있다. 심포지움(향연)의 이런 학설은 16세기의 터전에 매우 널리 퍼진 작품들 속에서도 발견된다. 카스틸리오네(Baldassare Castiglione, 1478-1529)는 완전한 궁정인(Parfait courtisan, 1540)에서, 열등한 아름다움들로부터 우등한 아름다움들로 올라가가는 모든 진행[과정]을 서술했다. 그러나 특히 레옹 헤브류(Juda Abravanel dit Léon l'Hébreu, 1460경-1530)는 그의 사랑의 대화(Dialoghi d'Amore, 1535)에서 사랑과 욕망은 자주 일치한다고, 그리고 사랑은 현실적 세대의 욕망에 의해 이미 달 아래 세계에서 표현된다고 주장했다. 비록 그것[욕망]이 지성들의 세계에서 지배하는 사랑의 연약한 이미지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레옹 헤브류의 글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폰투스 드 띠야르(Pontus de Tyard, 1521-1605)는 최초 고독(Solitaire premier, 1552)에서와 마찬가지로 파이드로스편의 사랑하는 광기의 이론을 알게 해 준다. 그 작품[파이드로스]에서 사랑의 광기는, 다시 말하면 “영혼이 신적이고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즐기는 열렬한 욕망”은 예언적 영감과 시적 영감과 더불어 나란히 평행한다. 그리고 서정시가(Les Odes, 1552)를 쓴(I, x) 롱사르(Pierre de Ronsard, 1524-1585)는 폰투스 드 띠야르에 이어서, “싯구들은 신으로부터 온다. 인간의 권능으로부터가 아니라.”라고 선언했다. 이처럼 사랑은 상위 삶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출발점이자, 삶의 동인이다. (671) (56UKD)
(등재, 11:01 56UL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