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박물관-발해-고려-사료와유물★
발해(698-926년)는 대조영大祚榮이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만주 동모산東牟山 일대에 세운 나라이다. 전성기의 발해는 대동강 이북의 한반도 북부 지역, 중국의 랴오닝 성(遼寧省), 지린 성(吉林省), 헤이룽장 성(黑龍江省)과 러시아의 연해주 일대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중국에서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海東盛國)'로 칭송할 정도로 수준 높은 문화를 이루었으며,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각종 제도를 정비하였다.
발해는 넓은 영토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5경을 두었고, 여러 차례 수도를 옮겼다. 도성인 상경·중경·동경에서는 잘 지어진 궁전 건축물과 화려하게 장식된 기와, 벽돌, 용머리, 토기, 무기, 각종 불상 등이 출토되어 발해 사람들의 높은 문화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발해는 당나라와 신라는 물론 일본과도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발전하였다. 발해는 멸망한 후에도 유민들 중 일부가 고려로 들어와 우리 민족사에서 그 맥을 이어 갔다.
짐승얼굴기와 -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부리부리한 눈, 크게 벌린 입에 날카롭게 튀어나온 송곳니와 길게 내민 혀, 벌름거리는 코 등 사납고 험상궂은 짐승 얼굴을 형상화하였다. 여기에 짙푸른 녹색 유약까지 입혀져 더욱 기괴한 인상을 주고 있다.
불비 -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가르침을 듣는 승려와 보살(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새겨져 있다. 위에는 용으로 보이는 동물 2마리가, 아래에는 글씨[銘文]와 인왕상이 각각 새겨져 있다. 글씨는 함화 4년(834) 발해 허왕부(許王府)의 관리였던 조문휴(趙文休)의 어머니가 모든 불제자들을 위해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발해에서 ‘함화(咸和)’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허왕(許王)이 관할하던 관청이 있었고, 그 허황 위에 발해 황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석가와 다보 두 여래상이 나란히 앉은 모습을 표현한 이불병좌상(二佛竝坐像)이다. 광배에는 연꽃을 통하여 다시 태어나는 동자상(童子像) 5구를 돋을새김 하였다. 이 연화화생상은 이 세상에서 좋은 일을 하면 극락간다는 아미타신앙이 반영된 것이다. 발해 팔련성(八連城) 제2사지에서 출토되었다.
수키와, 암키와, 막새기와, 치미 등 고대 건축물에 사용된 기와는 모두 갖추고 있다. 그 중에서 녹색의 유약을 발라 구운 기와가 사용된 것을 보면, 녹색으로 물들여진 발해 기와 지붕의 화려함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연꽃무늬 막새기와는 문양과 제작 기법에 있어 고구려 문화를 고스란히 이어받았음을 말해준다.
용머리 - 건물 기단에 끼워 넣어 장식하였던 것으로, 벽면에 튼튼하게 끼워질 수 있도록 뒷부분을 쐐기 모양으로 길게 깎아내고 고정하기 위한 홈을 팠다. 상경성을 비롯한 발해의 도성(都城)에서 몇 개가 출토되었지만 형태와 조각 기법은 모두 같다. 귀밑까지 찢어진 입, 날카로운 이빨, 툭 튀어나온 두 눈, 머리에서 귀 뒷부분까지 이어진 갈퀴 등이 어떤 악귀(惡鬼)도 얼씬하지 못할 상서로운 용의 모습이다.
주춧돌장식 - 고운 진흙을 사용한 것으로, 표면에 녹색 유약을 발랐다. 나무 기둥과 주춧돌이 만나는 부분에 씌워 기둥을 장식하는 한편, 기둥 밑이 썩는 것을 방지하였다.
고려 인종시책 - 고려 인종(仁宗)이 죽고 의종(毅宗)이 즉위한 1146년에 제작된 인종의 시책(諡冊)이다. 시책이란 왕이나 왕비가 죽은 후 시호(諡號)를 올릴 때 만드는 것으로, 이 유물의 내용은 죽은 인종의 인품과 덕을 기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앞뒤로 매우 미려하게 새긴 천부상(天部像) 두 점이 있어 회화 자료가 희소한 12세기 고려의 궁중 회화 양식을 엿볼 수 있다. 모두 43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글귀가 새겨진 책엽(冊葉) 41개(33×2.5×2.5cm)와 천부상이 새겨진 다소 넓은 책엽 2개(33.1(32.8)×8.5×2.5cm)이다. 명문 부분의 책엽 중 네 장은 몸통의 일부가 부러져 떨어져나갔다.
후삼국으로 분열된 통일신라 말기의 상황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함으로써 마무리되었다(태조 19년, 936). 우리 역사상 두 번째의 통일 왕조가 된 고려는 12세기에 들어 특유의 청자 문화를 꽃피우는 등 화려한 귀족 문화를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고려인들은 자신들의 왕을 천자로 부르며 천자국에 맞는 정부 체제를 운영하였다. 왕을 천자·황제 등으로, 왕실을 황가로, 왕성을 황성으로 부르고, 왕의 명령을 제制, 또는 칙勅이라 한 것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송이나 거란·금 등에 조공하며 사대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은 형식적인 외교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고려가 천자의 나라를 자처할 수 있었던 것은, 후삼국의 통일을 이루었다는 높은 자긍심과 함께, 당시 다원적 국제 질서 속에서 고려 스스로 또 다른 천하의 중심이라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려의 명장 강민첨(?∼1021)의 초상화이다. 강민첨은 현종 10년(1019)에 강감찬과 함께 10만 거란군을 격퇴한 것으로 유명하다. 고려 제11대 왕 문종은 그의 이러한 공을 높이 사 공신각에 그의 형상을 그려 모시도록 하였다. 이 초상화는 조선 후기인 정조 12년(1788)에 박춘빈이 원본을 옮겨 그린 것인데, 그 원본이 문종 때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 당시의 초상화 화법 및 관리 복식의 연구에서 참고하지 않을 수 없는 자료이다.
왜 개성에서 출토되었는지 궁금한 경주 향리 딸의 묘지명이다. 죽은 이의 아버지는 경상도 경주의 호장(향리의 최고위직) 김지원이다. 여성으로서 남편이 아닌 아버지의 이름만 새긴 것은 미혼으로 죽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방 향리의 딸이 미혼인 채로 개경에서 사망하게 된 연유는 알 수 없다. 혹 지역 대표로 개경을 오가던 아비의 직임으로 볼 때, 출장 온 아비를 따라 서울[개경] 구경을 왔다가 사망하였으나 경황이 없어 개경에서 장례를 치른 것일 수도 있다. 여덟 잎 꽃 모양의 묘지명은 어린 딸에 대한 아비의 애틋한 사랑이 담긴 듯하다.
고려는 고려·송·거란·여진[금]으로 이루어진 동북아시아의 다원적 질서 속에서 천자국을 자처하며 실리 위주의 외교정책과 단호한 군사적 대응으로 자국의 이익을 지켜냈다. 12세기 들어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등으로 문벌귀족 체제에 균열이 생기더니, 마침내 무신정변이 발발하였다(의종 24년, 1170).
권력을 잡은 무신들 간의 권력 투쟁과 농민 반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불교계에서는 승려 지눌을 중심으로 불교계의 자성을 촉구하는 결사 운동이 일어났다. 13세기 들어 무신정권은 최씨 일가의 무단 통치로 상대적 안정을 찾았으나, 중국 대륙을 장악한 몽골은 이러한 고려를 압박해왔다. 최씨 무신정권과 백성들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 가운데 약 30년 간 몽골 침략군에 맞서 싸웠다. 이 몽골군을 물리치기 위해 새긴 것이 팔만대장경이었다.
고려인들은 전쟁과 같은 고난의 시기나 평화 시기를 막론하고 불보살에 귀의하며 여러 가지 불사를 통해 각자의 소망을 기원하였다. 이러한 고려인의 정신세계에는 비단 불교나 유교뿐만 아니라 도교와 민간신앙, 그리고 풍수지리 관념 등이 서로 어우러지며 조화 속에 공존하고 있었다.
거란소자가 새겨진 청동거울로, 고려와 거란의 교류를 통해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거란소자는 거란 태조가 직접 만들었다는 거란대자와 달리 표의문자가 아니라 음절 단위의 표음적인 요소가 있다. 1125년 거란이 멸망하면서 사용이 쇠퇴해갔고, 금에 의해 공식적으로 사용이 금지되었다. 기억하기가 어려워 일반인보다는 황실의 공문서나 비문 등 제한된 경우에만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겨진 자료가 적어서 거란소자를 제대로 해독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죽은 이의 유골을 담은 석관이다. 뚜껑의 바깥 면에 비천과 꽃을, 안쪽 면에 카시오페이아와 북두칠성을 새겼고, 바닥의 안쪽 면에 격자무늬를 베풀었다. 또 4개의 측면 판석에는 바깥 면에 사신(청룡, 백호, 주작, 현무)을 양각하였고, 안쪽 면에는 꽃과 꽃병을 선각하였다. 사신이 둘러 지키고 꽃이 흐드러진 석관 내부에서 죽은 이는 안식을 누렸을 것이다.
생각하고 있는 듯한 온화한 표정의 보살상이다. 머리카락은 상투처럼 높이 틀어 올린 후 두 귀 옆으로 다시 몇 가닥을 드리워 내렸다. 가슴과 배, 다리에는 화려한 장식을 걸쳤으며, 두 손은 각각 엄지손가락과 가운데손가락을 굽혀 중생을 구제하려는 염원을 나타냈다. 동으로 주조한 후 표면에 금박을 잘 입히기 위하여 검은색의 칠을 발랐다.
두 손에 선도를 받쳐 든 인물 모습의 주전자이다. 의복과 봉황이 장식된 관, 선도를 받쳐 든 모습 등에서 이 인물이 도사이거나 도교 전설에 나오는 서왕모일 것으로 추정된다. 서왕모는 도교의 대표적 여자 신선으로서, 중국 한 무제에게 불로장생의 복숭아를 주었다는 얘기가 전한다. 인물의 머리 위에 물을 넣는 구멍이 있는데 뚜껑은 없어진 상태이다. 등 뒤에 손잡이가 있어서 전체적으로 주전자의 기능을 지니고 있으나, 실제로 사용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고려 충숙왕 복위 4년(1335) 고려 왕족의 부인 수령옹주(1281~1335)의 묘지이다. 수령옹주는 14살에 왕온과 혼인했으나 29살에 남편을 여의고 3남 1녀를 홀로 키웠다. 그러던 중 고명딸을 원나라에 공녀로 보내게 되자 그 슬픔으로 병이 나서 죽었다. 묘지명에서 ‘현왕’, ‘문왕’ 등 고려 왕을 가리키는 말보다 ‘세조’, ‘천자’, ‘조’ 등 원나라 황제와 관련된 용어를 한 단 위에 새겨 두 나라의 위계 관계를 표시하였다.
80여년에 걸친 원나라의 간섭 아래에서 고려인들은 막대한 공물과 공녀를 바치는 등 엄청난 고통을 입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고려인들은 성리학과 화약 제조 기술, 목면 등을 원나라에서 도입하여 문화와 과학 기술 발전에 큰 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오래된 현존 금속활자본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우왕 3년, 1377)이 말해주듯이 금속활자 인쇄의 맥도 이어지고 있었다.
14세기 중반에 공민왕은 원나라의 쇠퇴를 틈타 반원 정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토지 개혁 등에도 적극 나섰으나 지지 세력의 부재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의 성리학 중시 정책으로 성장한 정도전 등 일부 급진파 신진 세력은 위화도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와 손잡고 대대적인 토지제도 개혁을 단행함으로써(공양왕 3년, 1391) 새 왕조 개창의 명분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조선 후기, 화가 미상. 고려 말의 대학자 목은 이색(1328~1396)의 초상화이다. 이색은 공민왕의 개혁 정책에 따라 성균관을 다시 짓고, 성균관 대사성으로서 정몽주·김구용·이숭인·박상충 등 쟁쟁한 신진들을 교관으로 근무하게 하는 등 성균관의 성리학풍 진작과 신진사대부의 성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후에 이성계 세력에 협조하기를 거부하여 고초를 겪었다. 문하에 권근과 김종직, 변계량 등을 배출하여 조선 초기의 정치와 학문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조선 고종 17년(1880), 이한철 그림. 고려 말의 학자이자 충신인 포은 정몽주(1337~1392)의 초상화이다. 조선 고종 17년(1880) 궁중 화가이던 희원 이한철이 개성 숭양서원에 있던 초상화를 옮겨 그린 것이다. 정몽주는 대학자 이색이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을 때, 김구용·이숭인·박상충 등과 더불어 성균관의 중흥과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이색으로부터 「우리나라 이학(성리학)의 시조」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고 정확하였다. 또 그는 우왕 때에 왜구의 횡포가 극심하자 단속을 요청하는 일본 사행을 충실히 수행하고, 세공 문제로 악화되어 있던 명과의 관계 회복에도 기여하는 등 정치적으로 큰 활약을 하였다. 정도전 등 급진파 신진사대부들과 달리 이성계 일파에 끝내 협조하지 않은 채 죽음을 맞음으로써 훗날의 선비들에게 충절의 상징이 되었다.
불단에 안치해놓고 향을 피우는 데 사용한 향완이다. 고려시대의 향완은 12세기 중반 이후에 은입사 기법으로 화려하게 문양을 장식하기 시작하였다. 이 향완은 범자와 함께 용·여의두·구름·번개 등을 비롯한 다양한 문양을 기면 전체에 은입사로 표현하였다. 향완의 제작 시기는 도식화된 문양이나 높이에 대한 입지름의 비율 등으로 보아 13세기 이후로
추정된다.
※향완: 나팔 모양의 기대와 밥그릇 모양의 몸체[노신爐身]를 지닌 고배 형식의 향로로서, 우리나라 특유의 불구 형식으로 평가되고 있다. 현존하는 향완의 기형은 고려시대에 등장하여 조선시대까지 큰 변형 없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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