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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1926-1932)[3권 합본 1938]
브레이어(Emile Bréhier, 1876—1952)
- 제3권. 중세와 르네상스(Moyen Age et Renaissance) 463-702
제5장 13세기 Le XIIIe siècle 565
1절 일반적 특성들 Caratères généraux 565
사람들은 꽁트(Auguste Comte, 1798-1857)가 13세기를 얼마나 굉장한 찬사를 했는지를 안다. 탁월하게 조직화의 시대이며, 이 시대는 정신적 통일성을, 즉 진실한 카톨릭주의를 실현했다. 공통적 신앙의 토대 없이 사회적 평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모든 사람들의 꿈은 이 세기로 향했다. 이 공통 신앙은 사유와 활동[실천]을 인도했고 또한 철학, 예술, 도덕을 종속시켰다. (565)
확실하게, 정신적 삶의 틀들이 보다 견고하고 보다 말끔하였던 때는 어떠한 시대에도 없었다. 그 당시 환경들은 특별하게 유리하게 알맞았다. 활기차고 상업이 왕성한 도시들의 재탄생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관념들의 능동적 교환을 더욱 알맞게 했다. 파리 대학이 있고, 거기에 사람들은 13세기에 지적 생활에서 그러한 역할을 하는 것을 보러왔다. 그 대학은 필립 2세 오귀스뜨(Philippe II, “Auguste”, 1165-1223, 재위 1180 à 1223)의 파리 없이 이해할 수 없다. 그 파리는 왕국의 수도로서 유럽의 가장 힘찬 도시이며, 모든 나라의 이방인들을 끌어들였다. 서방 크리스트교리 전체에 공통하는 언어로, 많은 나라에서 온 여러 스승들에 의해 제공된, 교육에서 국가적 배타주의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그 스승들이란 영국으로부터 할렌시스(Halensis, 1175경-1245)가, 이탈리아로부터 성 보나벤투라(Bonaventure, 1217-1218-1274)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d'Aquin, 1225-1274)가, 독일로부터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 le Grand, Albertus Magnus, 1200경-1280)가 왔다. 이런 교육 도시는 전적으로 라틴 크리스트교의 대학이고, 크리스트 교리의 수장이고, 크리스트의 대리(vicaire)이다. 그 대리 임무는 대학을 조직화하고 또 대학에 여러 지위들을 부여하면서, 그 대학으로 크리스트교 생활의 중심 자체를 만든다고 주장했다. 그 시기[1231년]에 종교재판소를 설치하고, 프란체스코파와 도미느크파의 걸승파 수도원들을 확정하고, 파리 대학에게 용기를 불어넣은 것은 이노센트 3세(Innocent III, 1160–1216, 재위 1198-1216), 교황 자신이었다. 이 세 가지 조치들은 동일한 정신으로부터, 즉 크리스트교 통일을 강화하기 위한 욕망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그 정신은 종교재판에서 이단들을 축출하는 수단을, 걸승의 수도원에서는 시대적 관심에 분리되어 있으면서 그들의 지방에 전적으로 매여 있으면서 크리스트교 사유를 배타적 봉사에 이용하는 인간들을 축출하는 수단을 찾았다. 대학에서는 – 인문학부, 법학부, 의학부, 신학부라는 이름으로 재통합하는 대학에서는 – 성스런 학문(Doctrina Sacra [계시신학])의 교육의 주변에 그 시대의 모든 지적인 삶을 체계화하는 수단을 발견했다. (566)
왜냐하면 교황만이 대학의 교육에 관하여 가장 높은 지휘권을 가졌기 때문이다. 대학에 필립 2세 오귀스트는 단지 시대적 특권들을 일치하도록 간청할 뿐이었다. 그는 신학에서 보아 변증법의 과도한 발전이 생성했던 위험을 방어하는 방식으로 이런 교육을 조직화한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논리학은 여전이 하나의 기관[도구]일 뿐이며, “자유예학들의 근대적 박사들이” 신학적 주제들에 전념하지 못하게 막아야 했다. 이것은 1219년 이노센트 3세가 말했던 것이고, 1228년에 그레고리우스 9세(Grégoire IX, 1145경-1241, 1227-1241)가 반복했던 것이다: “신학적 지성은 … 각 학부 위에 신학적 능력을 행사해야 한다. 마치 살(육肉)에 대해서 보다 정신이 우월하듯이. 그리고 신학적 지성이 학부가 길을 잃지 않도록 똑바른 길로 그 학부를 인도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신학이고, 신학은 “성자들의 체험된 전통들에 따라서” 오로지 진술되어야만 하고, 육신을 무기로 쓰이지 않아야 한다. 1231년 교황은 하나의 훈령을 내렸다. “신학의 스승들은 철학의 과시를 행하지 말라.” 이 때문에 이런 조건들에서 철학은 토론하는 기술로, 그리고 신적인 권한에 의해 제기된 전제들로 출발하면서 귀결을 끌어내는 기술로 축소되었다. 이로부터 이 시대의 글쓰기들의 문학적 형식, 이것은 아벨라르가 예, 그리고 아뇨에서 사용했던 방법에서 도출된 것이고, 그리고 12세기의 평결론자들이 사용했던 방법에서 도출된 것이다. 각 주제에 관하여 사람들은 종교적 권한들로 또는 종교적 권한으로 연역된 추리들로 한방에 논증했다. 찬성과 반대를 지적하고 난 뒤에, 사람들은 해결책을 제안한다. 사람들은 이로부터 일체의 모든 진술을, 즉 종합적 관점을 무시하거나 또는 회피하기에 이른다. 종합적 관점이란 신학자들의 다양한 주장들을 체계적으로 연결하고, 크리스트교의 학설에 너무 과도한 추리의 진행을 부여할 지도 모를 관점을 말한다. 틀림없이 크리스트교 학설의 진리들에 대한 진술에 내속하는 질서가 있다: 즉, 신, 창조, 타락, 속죄, 구원이 있다. 이것은 전통적 질서이며, 롱바르두스(Lombardus, 1100경-1160)가 따랐던 질서이며, 아퀴나스(1225-1274)의 신학대전(1265-1273)(1485발간)의 밑에 깔려있는 질서이다. 그러나 이것은 계시된 진리들의 질서이라는 것을 주목해야만 한다. 그 질서에서는 각각이 논리적으로 앞선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창조, 타락, 속죄, 이것들은 자유로운 작동들이다. 사람들은 이 작동들을 이것들의 결과에 의해서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필연적인 원리들로부터 연역될 수 없다. 따라서 신앙의 조목들 각각과 신앙이 함축하는 주장들의 각각을 따라 연구할 여지가 있다. 이법은 항상 귀결들로 내려가는 데 쓰이지만, 원리로 올라가 체계화하는데 쓰이지 않는다. (567)
그러나 고정되고 경직된 이런 틀들의 내부에서, 그 사유는 교황들이 부과하고자 꿈꿨던 이런 카톨릭교리를 가졌던가? 실재로 교황권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13세기는 심지어 이 시대에서 조차도 유일한 스콜라철학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금지했던 첨예한 갈등들의 광경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갈등들은, 중세 시대가 살아가기를 그만두었을 때만 평화로울 것이다. 이런 갈등들의 근원은 지적인 모든 고등교육을 신학에게, 그리고 신학을 준비할 학문들에게로, 환원하는 예비과정에서 정확하게 있었다. 순수하게 인간적인 철학은 철학으로서 지위를 요구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철학에게 어떤 지위를 부여해야할지를 몰랐다. 사람들은 그 철학의 지위를 신학의 내부에 둘 것인가? 그 당시, 종교적 권한과 합리적 방법만큼 발산하는 두 방법을 동시에 사용하는 하나의 학설의 통일성을 유지하는데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해야 할 것인가! 사람들은 이에 대해 유명한 예들을 곧 보게 될 것이다. 반대로 사람들은 철학을 신학으로부터 배제할 것인가? 그러면 철학은 자기의 독립성을 요구할 것이다. 두 경우에서 사람들이 정립하고자 했던 정신적 통일성이 부서졌다. 정신적 통일성이 부서졌다는 것은, 왜냐하면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정치적이고 종교적 동기들 때문에 인간적 이법의 자치를 고려하지 않아야 한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인간적 이법이 스스로 확립한 기회를 가질 것인데, 그때는 모든 연구들을 지도한다는 신학의 주장이 결정적으로 포기될 때이다. (567)
13세기의 철학사는 이런 갈등들의 역사이다. 우리가 12세기에 발견했던 예상 참여된 르네상스의, 정신적 자유의, 정열적 사유의 어떠한 것도 없었다.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심지어는 논리학과 정합성의 댓가를 치르더라도, 통일성에 대한 하나의 탐구, 즉 사람들이 지적인 동기들을 위해서 만큼이나 사회적 정치적 이유들을 위해 바랐던 통일성의 탐구가 있을 뿐이다. (567)
2절 서방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작품들의 확산 La diffusion des Oeuvres d’Aristote dand l’Occdent 568
이런 충돌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작품들의 완전한 인식에 의해 또한 강조되었다. 그 작품들은 아랍어에서든지 그리스어에서든지 라틴어로 번역되었으며, 지금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철학적 사유의 장을 열었고, 처음으로 이방[그리스] 사유의 직접적인 공개로 이어졌다. 그 이방 사유는 그리스트교 사유와 접촉에 의해 어떠한 변형도 없었다.
12세기 중반부터 스페인 톨레도에서 라이몬도(Raimondo di Toledo, 1126-1151) 주교의 추진력으로 번역학교가 분석론 후편을 테미스티오스(Θεμίστιος, 317-388)의 주석과 더불어 아랍어로 번역을 시작하였고, 또한 변증론와 소피스트들에 대한 반박론들을 번역하였다. 크레모네시스(Cremonensis, 1114-1187)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상학, 자연학, 천체론, 생장과 붕괴론을 번역했고, 진위를 알 수 없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신학, 원인론, 요소들의 소유에 대한 원인들을 번역했다. 그러고 나서 그리스인의 인식이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12세기의 필사본들에서 형이상학의 번역과 주석을 발견한다(1270년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뮈(M)편과 뉘(N)편을 제외하고). 그리고 기욤 브르통(Guillaume le Breton, 1165경-1225)은 1210년에 자신의 년대기 기록에서, 사람들은 파리에서 “최근에 콘스탄티노플에서 가져와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한” 형이상학을 읽고 있었다고 말한다. 13세기의 과정에서 앙리 드 브라방(Henri de Brabant)의 시기에, 토마스 아퀴나스의 친구인 메르베케(Guglielmo di Moerbeke, 1215-1286), 그로스떼뜨(Robert Grossetête, 1175-1253), 바르톨로메오(Bartolomeo da Messina, 13세기)는 헬레니스트들이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작품들의 부분 또는 전체를 번역하고, 특히 아랍철학자들에게도 무시되었던 정치학도 번역했다. (568)
사람들은 또한 아랍 주석가들 또는 그리스 주석가들의 저술들, 그리고 유대 철학자들의 저술도 번역했다. 알 킨디(al-Kindī, 801–873), 알파라비(Al-Fârâbî, 872- 951), 아비센(Avicenna, 980-1037) 아비케브론(Avicebron, 1021경-1058경)도 알려졌다. 사람들은 파리에서 아베로에스(Averroès, I1126-1198)의 모든 주석들, 단지 오르가논을 제외하고, 가지고 있었다. (568)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이해하고 판단하는데 잘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소책자교육의 열심인, 지식인들에게는 이 발견물들의 무서운(치명적인) 결과를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지식인들은, 필수적 역사적 의미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여, 자기의 틀 속에 그 의미를 대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시대의 용법에 따라서 단지 단어 대 단어로 된 거의 이해할 수 없는 번역에 의해서만 그 의미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신플라톤주의의 충분한 경향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의 견고한 구축작업을 대립시켜야만 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12세기에 칼키디우스(Chalcidius, 4세기활동)에 의해 주석 달린 티마이오스편 이외에도, 사람들이 거의 읽지 않았고 이해하지도 못했던 파이돈편과 메논편들도 번역했다. 사람들은 이 동일한 세기의 후반에 섹스투스 엠피리쿠스(160경-240경)의 활사법(생생하게 묘사하기)을 알았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의 어느 것도 소유학파에게 균형을 이루지 못했다. (569)
그런데 이런 학설은, 다른 학설의 연약함에 비해 매우 강하다고 할지라도, 신학자들이 철학에게 요구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학설을 포함하고 있다. 항상 봉사하는 철학은 예비학문과 보조학문처럼 이용되어야 했다. 사람들은 철학으로부터 토론의 방법을 유지하기를 바랐지, 사물의 자연에 관하여 주장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이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학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자연학은, 자연학에 연결된 신학과 더불어, 크리스트교의 학설과 삶이 함축하는 이미지와는 양립할 수 없는 세계의 이미지를 암시한다: 우선 영원하면서 창조되지 않는 세계가 있고, 그리고 신이 있고 그 신은 고정된 것들에 대한 천구의 단순히 운동자이며, 신의 섭리와 심지어 신의 인식은 달 아래 세계의 사물들에 전혀 펼쳐지지 않는다. 다음으로 영혼이 있고, 그 영혼은 유기화된 신체의 단순한 형상이며, 신체와 더불어 태어나고 사라지고, 그 귀결로서 어떠한 초자연적 숙명도 없으며, 이어지는 구원의 드라마에 속하는 모든 기호작용을 제거한다. 따라서 창조, 타락, 속죄, 영원한 삶, 이러한 것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들을 몰랐거나, 은연중에 부정했다. 이제 아마도 어떤 위험을 제공하는, - 왜냐하면 플라톤주의가 스코투스 에리우게나와 아벨라르의 잘못된 해결책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 그 절충적인 플라톤주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것이 중요하다. 그 다른 것이란, 적어도 아우구스티누스와 위-드니 덕분에 독단과 충분히 잘 순응할 수 있는 것이며, 신적인 실재성의 고민과 영혼의 초자연적 삶의 고민을 표출했던 것, 즉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이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문제들을 제기하는 것을 거부했고, 문제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기도 거부했다. (569)
크리스트교 신학과 형식적 불화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 의해 형성된 학술적 묶음이 경험적 과학과 더 잘 일치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태야만 할 것이다. 그 경험과학은 말하자면 천문학과 함께 그 이름을 진실로 감당할 만한 가치가 있는 중세에서 유일한 과학이었다. 매우 확실한 인식, 그 당시 사람들이 지구와 연관해서 행성들의 거리의 변화에 대해, 행성들의 공전들 중의 하의 과정 동안에 가졌던 그 인식, 그 인식은 천구들의 이론을 불가능하게 했음이 틀림없었다. 천구들의 이론은 그 행성을 지구를 중심으로 삼았던 구 위에 끼워넣는 것이었고, 그 이론은 프톨레마이오스 학설로 후퇴하는 것이었다(알마게스트는 1175년에 크레몬(1114-1187)에 의해 번역되었었다) 또는 옛 중세에 알려졌던 지구 운동의 퓌타고라스학파의 학설로 후퇴였다. 초기에 상황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진보를 멈추게 했으나, 나중에는 일단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승리를 했었지만, 상황은 그 학설의 파괴의 가장 중요한 원인들 중의 한 원인이었다. (570)
이 찰나에 중요한 것,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주의가, 교황들의 대학 정책에 봉사하기 는 커녕, 커다란 장애인 것으로 위협받았다는 것이다. 알베르투스(Albertus Magnus, 1200경-1280) 그 자신은 다비드 드 디낭(David de Dinant, 1160경-1217)의 이질적 교리의 관념들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의 영향을 고발하지 않았던가? 또한 1211년부터 파리 공의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가르치는 것을 막았다. 교황의 특사였던 로베르 꾸르송(Robert de Courçon, 1160-1218)은 1215년에 파리 대학에 교수자격들을 부여하면서,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윤리학 책들을 허용하면서도, 형이상학과 자연철학을 읽는 것은 막았다. 틀림없이 이런 금지조치는 공중의 열망 앞에서 헛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레고리우스 9세(재위. 1227-1241)는 교리에 반대되는 모든 주장을 삭제한 채 아리스토텔레스의 편집본들을 제작할 것을 권고 하는데 그쳤다. 그래도 진실인 것은, 1255년에 자연학과 형이상학이 인문학부의 수업과목에 들어있었다. 이런 찰나로부터 교회 권한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책으로부터 정통교리에 반대되는 학설들을 끌어내는 자들을 단죄하였다. 결국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차차 조금씩 논의의 여지가 없는 권위가 되어갔다는 것도 진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크리스트교화의 역사를 우리는 이제 곧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다. (570)
3절 도미니끄 군디살비 Dominique Gundissalvi 570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와 아랍과 유대의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사유는 도미니끄 군디살비(Dominique Gundissalvi, 1105-1181)와 같은 편집자들에 의해 대중 소통되었다. 그는 세고비아의 총주교였으며, 번역 이외에도, 알파라비(872-951)에 따라 구성된 철학의 분할에 대하여와 이사악 이스라엘리의 정의(定義)들과 같은 저술들을 썼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백과전서의 순서에 의해 전통적 순서를 대체하기 위해, 3학과 4과의 전통적 순서를 뒤엎었다. 자연학은 움직이고 물질적 존재들을 연구하는 것이다; 수학은 존재들의 질료와 운동으로 이루어진 추상화작업이며, 동일한 존재들을 연구한다; 신학은 신과 천사들처럼 움직이지 않는 존재들을 연구하는 것이다. 논리학에 관한 한, 논리학은 철학에 앞서 진행하는 도구이다. 그는 알파라비에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의 책들과 형이상학의 책들에 대한 연구 계획을 제공했다. 첫째 책들은 자연학에서 시작하여, 천체론과 동물론을 거쳐서 영혼론으로 가는 것이다. 둘째 책들은 계속해서 본질과 우발사건들, 증명들의 원리들, 비물체적인 본질들, 그 본질들의 위계질서, 신적인 작용을 다룬다. 서방에서는 완전 새로운 이 계획에 따르면, 사람들이 그것을 잘 주목할 수 있듯이, 부동의 원동자의 연구로서 신학은 운동하는 물체의 연구로서 자연학에 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거기서 유기체화 된 물체의 형식으로서 영혼의 연구는 자연학의 일부였다. 플라톤-아우구스티누적인 이미지의 정반대의 세계의 이미지는 반대로 세계와 영혼을 이것들의 고유한 삶에서 또한 전적으로 초자연적인 삶에서 고려했을 것이다. (571)
심지어 그의 영혼의 불별성에 대하여 속에는 영감도 있다. 그 책에서 도미니끄는 인간 영혼의 불멸성에 대해 플라톤의 증명들을 형식적으로 비판하고 거부했다. 왜냐하면 이 증명들은 너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냐하면 이 증명들은 또한 야만인들의 영혼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도미니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제들에 근거한 증명들만을 받아들인다. 이 전제들은 일반적 원리들이 아니라 연구된 주제의 고유한 특성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 증명들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있듯이, 신체와 연관하여 예지의 독립성이다. 이 독립성은, 비록 영혼의 개체적 숙명의 연속작용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비인격적 불멸성을 상상하는 데로 이끈다. (571) (56SMG)
4절 기욤 오베르뉴 Guillaume d'Auvergne 571
기욤 오베르뉴(Guillaume d'Auvergne, 1190-1249)는 1228년에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쳤는데, 그의 작품은 새로운 관념들의 도입에 의해 전통적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생산된 일종의 불편함을 증거한다. (571)
아랍 철학의 노력들 중의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틀들을 벗어나지 않고서, 제일 원리를 이 원리에서 도출된 또는 창조된 존재들을 구별하는 것이었다. 어려운 기획이지만, 만일 사람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회상한다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이런 형이상학은 운동성들과 운동자들에 관한 그의 사색들에 의해서 다수의 부동의 운동자들, 즉 천구들의 운동하는 지성들, 동물들의 영혼들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이런 것들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 이것들이 유일한 원리에 의존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지 못했다. 그러한 것은 유대주의에서 나온 거의 모든 종교들의 유일신앙과는 아주 조금만 일치했다. 사람들은 알 파라비가 그리고 아비센이 어떻게 어려운 발걸음으로부터 벗어났는지를 상기한다. 최고 원리가 그 원리로부터 도출된 운동자들로부터 구별되는 것은, 내재적 특성에, 즉 필연성에 의해서이다. 필연적 존재는 자기로부터 있는 모든 것을 갖는다. 그 존재는 단순하고 유일하다. 반대로 도출된 운동자들은, 필연적인 존재의 영향 하에서만 현존하는 그 자체들 속에서 가능한 존재들이다. 필연적 존재는 가능적 존재들을 현실태로 이행하게 한다. (572)
아리스토텔레스가 유일신앙자가 될 수 있다면, 사람들은 그의 학설에 이런 종류의 어떤 구별을 보태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기욤 오베르뉴는 스콜라철학에 그것을 도입했는데, 또한 보에티우스(480-524)에게 스콜라철학을 결합시킴이 없지 않았다. 그것은 본질과 현존에 유명한 구별이다. “신은 존재(l’être, ens)이며, 그것의 본질은 있다는 것(d’être, esse)이다. 다시 말하면 신은 그 자체이며 그리고 우리가 말할 때, 우리가 그에게 부여하는 존재(l’être)이다. 신은 유일하고 동일한 사물이다” 반대로 피조물은 두 사물의 통합으로 이루어진 것과 같다. 즉 두 사물이란, 하나는 피조물이 있는 것(quod est) 즉 자기의 본질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에 의해 피조물이 있는 것(quo est)인데, 자기 본질로부터 필연적으로 구별되는 것이며, 왜냐하면 이런 본질은 그 자체에 의해서 현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구별은 유일신론을 확립하는데 쓰이며, 이런 구별이 아비센(980-1037)에 의해 소개되었던 대로 새로운 위험을 끌어들였다. 이런 이유로 만일 최고원리의 역할이 가능적 존재들을 현실태로 이행하게 하는 것이라면, 이 존재들은 이런 작용에 앞서 가능한 것으로서 현존해야 한다. 이때 가능함은 최고 존재로부터 독립된 질료이다. 단지 이와 같이, 아비센이 피조물들 속에서 다수성을 설명할 수 있었다. 기욤에게서는 전혀 반대로 가능함이 신으로부터 구별된 현존이 아니라, 오히려 신이 자신으로부터 그것을 있도록 부여했던 힘(능력)이다. (572)
오베르뉴가 “소요학파 학자들”에게 보낸 비판은 이런 해석의 뉘앙스에 결부되어 있다. 소요학파 학자들은 세계의 영원성을 주장했으며, 우리가 매우 자주 만났던 이 원리 위에 기대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본질은 어떤 찰나에 생산을 시작할 수 없다. 기욤 오베르뉴는 앞서 나아간 것에 환원되지 않는 세계 안에서는 어떠한 변화도, 말하자면 그 변화는 새로운 것의 생산이기 때문에 어떤 진실한 변화도, 없을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사람들이 알다시피, 소요학파 학자들은 제일 원리의 단순성을 근거로 세계의 영원성을 지지하면서, 독립적인 질료 덕분에만 다자와 변화요인을 설명할 수 있었다. 이런 물질의 부정은, 변화를 부인하는 것으로든지 창조의 능력을 신속에 놓던지 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순수 작동과는 아주 다르게 이끌었다. (573)
인식에 대한 아랍이론들에 반대하는 기욤의 비판들은 동일한 정신으로부터 출발했다. 아랍이론들은 영혼 자체 속에 질료와 형상의 대립을 도입했고, 잠세태의 예지를 항상 작동 중인 예지의 영향아래서 현실태로 이행한다고 제시했다. 기욤은 아비센(그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달의 구면 속에서 자리차지 했던 구별된 능동예지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그는 크리스트교의 소요학파학자들의 익명의 이론도 거부했다. 익명의 이론은 능동적 예지를 가지고서, 마치 물질적 예지를 가지고서처럼, 영혼 그 자체의 역량을 만들면서, 능동예지에게 가지적 기호들을 현실태로 이행하게 하는 작용을 부여했으며, 그 가지적 기호들은 물질예지 안에서 잠세태로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혼에게 항상 현실적인 과학을 부여하려 했을 것이다. 현실적 과학은 플라톤의 회상처럼 모든 교육을 무용하게 했을 것이다. 기욤은 영혼 속에서 유일한 예지만을 인정하였고, 그는 그것을 물질적 예지라고 불렀다. 이런 예지로부터, 마치 정자로부터 어른이 되는 것처럼, 감각작용들과 이미지들이 영향 아래서, 이 예지가 품고 있는 가지적 형태들이 전개된다. 사람들은 이런 이론이 어떤 점에서 지성을 추상하는 능력으로 환원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지는지를 느낀다. 기욤에 따르면, 추상작용은 가지적 형상들의 인식에 내속하지 않는다. 추상작용은 우리의 불완전으로부터 그리고 우리의 정신적 관점의 연약함으로부터 온다. 지적 인식의 전형, 그것은 자기 인식이며, 다시 말하면 자기 견해들의, 자기 의심들의, 따라서 특별한 존재의 인식이다. (573) (56SMG)
5절 도미니크 수도승들과 프라체스코 수도승들 Diminicains et Franciscains 573
기욤 오베르뉴(1190-1249)의 태도보다 더 깔끔한 태도들이, 13세기 후반전체 동안에 파리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을 요동치게 한 갈등을 생겨나게 했다. 1284년 이 세기의 말경에 이런 동요들이 거의 안정되었을 때, 프란체스코파인 팩햄(John Peckham, 1230경–1292)은 칸터베리 대주교이면서, 로마 교황청에게 이렇게 썼다. “로마의 성스런 교회는 두 수도원들(프란체코파와 도미니크파)의 학설은, 토론하도록 허락된 모든 문제들에 관하여 현실적으로 거의 완전히 대립된다는 것을 고려해야 마땅하다. 두 수도원 중에 하나의 학설이 내버려지고, 어떤 점에서는 신부들의 교육들을 오해하기도 하면서, 철학자들의 교육에 거의 배타적으로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1285년 편지에서 링컨의 주교인 서톤(Olivier Sutton, 1219-1299)에게 정확하게 썼다. “철학적 연구들이 그 만큼 신학적 독단들에게 쓰일 수 있기 위하여, 우리가 철학적 연구들을 조금이라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당신은 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세속적인 새로움을 겪고 있다. 새로움은 철학적 진리들에 반대하고 신부들을 불리하게 하여, 거의 20년 전에 신부들의 학설을 분명하게 거부와 오해를 이끌어왔기에, 신학의 심층부들에서 금지되었다. 가장 견고하고 가장 건전한 학설이 어떤 것인지, 성 프란체스코 계열들의 학설이, 말하자면 알렉상드르 할렌시스(1175-1245) 형제의 것이나, 성 보나벤투라(1217-1274) 형제의 것이나 또한 그들의 그러한 학설들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들의 작품들은 … 교부들과 철학자들 위에 동시에 근거하고 있거나, 또는 이런 새로운 학설은 교부의 학설에 거의 총체적으로 반대하며,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영원한 규율들에 관해, 움직이지 않는 빛에 관해, 영혼의 권능들에 관해, 물질 속에 내재되어 있는 씨앗의 이치들에 관해 가르친 모든 것을 흔들고 파괴하는데, 그 새로운 학설의 온힘을 쏟고 있지 않는가?” (574)
이렇게 두 정신들은 대립되고 있었다. 프란체스코 정신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자양분을 받아 보나벤투라에 의해 재현되었다. 도미니크파의 정신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나와서 알베르투스(1200경-1280)와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에 의해 재현되었다. 한편으로 학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계시된 신학과 철학 사이에 원리라는 영감이 있다. 전자의 학설에서 철학은 신학과 잘 구별되지 않지만 신플라톤주의 방법에 따라 신적 실재성에 적어도 이미지에 의해 도달하려고 애쓴다. 후자에서 철학은 감각적 경험을 출발점으로 삼아 매우 추리적 방법을 통하여 철학 자신의 자치와 신학에 대해 자신의 독립성을 주장한다. (574)
그럼에도 프란체스코파의 아우구스티누스주의와 도미니크파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요약적으로 대립시키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첫째로, 성 보나벤투라는 많은 점들에 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둘째로, 성 알베르투스와 성 토마스는 자신들의 수도원 한 가운데서 많은 반대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도미니크파인 킬워드비(Robert Kilwardby, 1215경–1279)는 칸터베리 대주교를 지냈는데, 1277년에 토마스주의 명제들을 단죄했다. 셋째로, 성 토마스는 소요학파를 이해하는 어떤 방식에 있어서 성 보나벤투라에 비해 덜 반대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소요학파 사상은 크리스트 신앙에 직접적으로 반대되는 결론들에 이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브라방(Siger de Brabant 1240경-1284)에 대해 그리고 사람들이 라틴 아베로에스주의라고 불리는 운동에 대해 말하고자 원한다. 결국[넷째], 이 두 수도원들은 실천적 지평 위에서 다시 재통합된다: 이런 이유로 실천적 지평은 교황들의 의도에 맞았다. 그 의도들은 파리 대학에서 신학 교육을 세속 성직자에게 보다 오히려 수도원에게 의뢰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231년부터 파리대학의 교수직을 두 걸승 수도원의 각각이 차지하였다. 이로부터 수도사들에 반대하는 세속 성직자들의 열띤 논쟁이 나온다. 그 논쟁은 기욤 드 생 따므르(Guillaume de Saint-Amour, 1202-1272)의 팜플렛 세계의 종말의 위험들에 관하여(1225)에서 드러난다. 여기서 기욤은 수도사들에게 교육의 권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이들에게 성 토마스는 30년 후에 신의 숭배와 종교에 싸우는 자들에 반대하여(1256)로서 대꾸할 것이다. (575) (56TKA)
6절 성 보나벤투라 Saint Bonaventure 573
사람들은 어떻게 성 보나벤투라 그 자신이 두 수도원들의 정신에 반대했는지를 안다. “설교자들(도미니크파들)은 특히 사색에 전념하며, 이로부터 그들은 자신들의 명칭을 받았고, 그리고 기름 바르기에 열중한다. 작은 형제파들(프란체스코파들)은 원칙적으로 기름바르기에 열중하고, 그리고 사색을 한다.”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Saint François, 1181-1226)는 작은 형제 수도회의 창시자이며, 그는 학설에 보다, 정신적 삶에 더 많이 새로운 도약을 부여했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연구하기를 권고했다면, 그것은 “가르치기에 앞서서 행동하라”는 조건에서였다. 프란치스코파들 가운데, 한 파가 있는데 이는 정신적인 것을 중시하는 파이다. 이 파는 모든 학설의 교육을 싫어했다. 죠아생 드 풀로르(Joachim de Flore, 1135경-1202)의 영원한 복음에 관한 사유는 성령의 지배에 관한 이단들과 결합되어있다. 이런 관점들은 수도원의 수도원장인 장 드 파름(Jean de Parme, 1209경-1289) 호평들을 만나게 되었다. 쟝 드 파름은 1257년에 해임되었고, 새로운 수도원장이 주도하는 종교재판에 의해 단죄되었다. 그 새 수도원장은 바로 성 보나벤투라였다. (575)
사람들은 이에 따라 학설적인 프란체스코파들에게 그리고 신학자들에게 제시되었던 문제를 더 잘 본다. 문제 제시란, 프란체스코파의 자유로운 정신성과 더불어 학설적이고 추리적인 교육과정을 화해하는 것, 또는 오히려 그 학설을 가지고 정신적 삶을 이루는 내적인 계시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요소를 만드는 것이다. 보나벤투라에 앞서서부터 학설적인 프란체스코파들이 있었다. 우선 할렌시스(Halensis, 1175-1245)가 있다. 그는 파리에서 신학을 가르쳤으며, 그의 대전은 롬바르수스(1100경-1160)의 평결문들의 도식 위에서 제자들에 의해 작성되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에 충실하였다. 그리고 쟝 들라 로셸(Jean de la Rochelle, 1200경–1245)이 있다. 이 양자는 서로 알고 있었고, 심지어는 자연적 인식의 제한된 영역에서, 인식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을 인정했다. 가능적 예지가 감관들로부터 나온 이미지들을 가지적 형상들을 추상할 수 있는 것은 능동적 예지의 영향에 의해서라 한다. 그러나 인간의 재능들을 넘어서는 대상들이 중요할 때, 인식은 계시적이 되고, 신 그 자체를 능동자로 삼는다. (576)
그러나 쟝 피단짜 드 토스칸(Jean Fidanza de Toscane, 1221-1274)은 보나벤투라라고 불리며, 고결한 박사라 칭한다. 그는 1248년에서 1255년에 파리에서 가르쳤고 서른여섯에 그의 프란체스코파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으며, 이런 정신의 가장 주목할 만한 대표자였다. 성 보나벤투라의 교육 전체는 정신의 영혼으로 향하는 여정(1259)이라는 제목처럼 영혼이 신으로 향하는 여정이었다. 이 작품은 그의 말년의 작품들 중의 하나이다. 도미니크 학자들이 철학적 많은 저술들을 생산하는 때에, 사람들은 그의 작품들 목록 속에서 그런 작품의 하나를 찾는 것은 헛된 일일 것이다. 평결문들에 관한 주석들(1250)과 순수하게 신학적이거나 또는 신비적인 주체들에 관한 많은 소품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여정 속에서 그는 이법과 철학을 만났고, 그는 이것들을 정신적 고등 생활로 인도하는 데 쓸 수 있는 모든 것에 동화시키려 했다. (576)
이리하여 철학적 이법이 우리를 신에게 다가가는 도약에서 제자리를 차지하면서, 그 이법이 신으로 향하는 정도에서만 기호작용을 갖는다. 이법은 열등한 단계와 고등한 단계 사이에 전환의 단계를 지적해준다. 전자에서 우리는 신을 잘 알지 못하고, 후자에서 우리는 신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신앙의 단순한 상태로부터 관조로 올라가면서, 후자는 우리가 거쳐 갈 찰나들 중의 하나이다. “사람들은 신앙의 안정성에 의해 시작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관조의 그윽함에 이르기 위하여 이법의 차분함에 의해 진보한다.” 성 보나벤투라는 완전히 신플라톤주의의 철학계보에 있게 된다. 이성은 신앙과 지적 직관 사이에 매개로서 생각되었고, 이 직관은 단번에 원리를 파악한다. 그에게는 이법에 대한 어떠한 생각도 없다. 단지 이 이법은 이것의 규칙들을 적용하는 영역에서는 그 자체로 충분할 수도 있을 것이며, 또한 자치적인 과학들을 창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법은 신앙만큼이나 한편으로는 관조이며, 다른 한편으로 이 둘은 그에게서 성스런 은총의 결과로 나온다. 우선 성스런 은총은 신앙(credere)의 덕목에 의해 표출되고, 그 다음에 사람들이 믿는 것에 대해(intelligere credita) 지성의 선물에 의해서 표출된다. 결국에는 관조(videre intellecta)의 지복에 의해 표출된다. 따라서 거기에는 인식의 정도의 차이들의 도식이 있다. 이것은 플라톤이 그러한 것을 폴리테이아편 6권의 마지막에 그려놓은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인 신앙심(dévotion, 예배)의 강조는 사물들의 깊이에서 아무 것도 변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 (577)
이런 결과로 보나벤투라에게서 철학은 사물들 그 자체에 도달하고자 원하는 호기심의 결실일 수는 없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에게는 우리가 신으로 향하는 종교적 경향성의 결실이 있다. “피조물들은 사물들처럼 또는 기호들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보나벤투라는 모든 점에서 신의 자연으로부터 표현들, 이미지들, 흔적들, 그림자들을 찾았다. 가장 기술적인 문제들의 해결책들은, 여기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와 대립되는데, 그에게서는 거대한 상징주의에 의해 다루어졌다. 상징주의가 그에게서는 경전과 동등하며, 자연을 마치 하나의 책처럼 고려하게 했다. 그 책으로부터 신의 의미를 해독해야만 했다. 신, 창조, 인식에 의한 영혼의 신으로 회귀, 그리고 계시였다. 또는 만일 더 좋은 표현을 쓴다면, 표본적 원인인 신, 효과적 원인인 신, 목적적 원인인 신, 이러한 것들은 철학의 세 가지 유일한 주제이다. 신의 현존 그 자체는 명증하다. 스스로 인식하면서도 신의 이미지로서 스스로 인식하는 영혼에게서도 명증하다. 그리고 영혼은 불완전하고 조성되어 있고, 움직이는 사물들을 인식하면서도 그런 면에서 심지어는 완전하고 단순하고 움직이지 않는 존재를, 즉 사물들의 효과들을 파악한다. 표본적 원인으로서 신은 소위 말하는 형이상학의 대상이다. 보나벤투라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반대하여 플라톤의 이데아들의 현존을 힘차게 주장한다. 이데아들 속에서 만이, 신은 진실하고 완전한 자기표현과 자기의 첫째 닮음을 발견한다. 또한 마찬가지로 이데아들의 세계는 피조물이 아니다. 그 세계는 신 자체이며 말씀과 같고, 성자와 같다. 따라서 그 세계는 하나이며 단순하다. 그 세계는, 세계가 감각적 사물들의 무한한 다양성에서 태어나게 하는 만큼이나, 다양하게 나타날 뿐이다. 보나벤투라의 가지적 세계는 플라톤의 세계가 아니며, 왜냐하면 우선 그 세계가 그것의 원리보다 열등하지 않기 때문이고, 다음으로 왜냐하면 그 세계에는 신과 감각적 세계 사이에 매개물이 없기 때문이며, 마치 세계에 대한 첫째 창조 즉 완전한 정신적인 창조와 같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나벤투라는 전혀 플라톤주의가 아니다. 거꾸로 아무것도 영혼에서 신으로 회귀에 장애물 만들지 못하게 한다. (578)
따라서 효과적 또는 창조적 원인으로서 신은 표본적 원인으로서 신과는 차이가 있어야만 한다. 말씀의 무한한 통일성 속에서 – 말씀은 무한한 가능세계들의 원본인데 – 신의 의지는 우리에게 완전히 침투할 수 없는 이법들이기 때문에, 이 세계들 중의 하나를 선택한다. 이 때문에 보나벤투라는 최상의 이법은 신의 의지를 연쇄로 연결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신은 가능세계들 중에서 최상의 세계를 창조하도록 애썼을 것이다. 이 용어는 심지어 의미를 전혀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선택된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사람들은 그 선택된 세계의 최상의 것을 무한히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프란체스코학파에서 곧 강조하게 될 이런 “의지주의”에 의해 보나벤투라는 신과 피조물 사이에 연속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모든 시도에 대해 더욱 더 형식적으로 반대했다. (578)
또한 피조물들에 대한 그의 개념작업에서, 신의 무매개적인 활동성의 기호를 피조물들 속에서 제기하기 위하여, 그리고 신성과 더불어 모든 혼동을 막기 위하여, 모든 것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두 가지 요청들은 모순이 아닐지라도 적어도 대립된다. 하나는 전체 속에서 신적인 발산을 파악하는 경향이 있고, 다른 하나는 전체 속에 피조물의 결핍을 선언하는데 있다. 결핍, 그것은 피조물의 다양성이며, 즉 신적인 소통과 완전함의 분출을 다변화하면서 달리 받아들일 수 없는 피조물들이다. 결핍, 그것은, 필연성이며, 모든 피조물에서 형상과 질료의 조성물이기에 필연성이며, 질료는 그 존재에 대해 수동적 측면을 강조한다. 보나벤투라는 다른 프란체스코파 학자들과는 함께하고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반대하며, 창조 속에는 어떤 순수 형상도 없다는 것을, 그리고 분리된 지성들로 되어 있다는 천사들 자체도, 또한 정신적인 존재들로 되어있다는 인간 영혼들도 형상과 질로의 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주저 없이 주장하였다. 이런 이유로 존재는 능동적이고 수동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존재이고, 또한 개별적이고 종 속에 또는 류 속에 다시 들어갈 수 있는 존재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존재가 질료를 포함한다고, 다시 말하면 잠재적인 존재를 또는 다른 존재의 가능성을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토마스 아퀴나스가 믿었던 것과 반대로 진실한 개별자들은 영혼들의 경우이고, 심지어는 천사들의 경우이다. 또한 성 보나벤투라가, 성 토마스와 반대로, 형상들의 다수성의 주제를 받아들인 것은 결핍의 감정에 의해서이다. 사람들은 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존재의 형상은 무엇이 효과적으로 있는 것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인 것은, 형상 속에서 인류성의 형상의 현전 덕분이다. 각각의 실체는 하나이기 때문에, 따라서 유일한 실체적 형상을 가져야만 한다. 이런 형상은 실체의 자연을 완전히 규정하고 고정한다. 그런데 이런 결론을 보나벤투라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형상을 마치 존재를 완성하고 소비하는 것처럼 실체적인 어떠한 것도 거기에 덧붙일 수 없는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 그것은 피조물이 완전하게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리라. 실재 상으로, 만일 형상이 실체에 완전성을 준다면, 그것은 실체에 완전성을 고정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그것은 형상 자체가 실체에게 줄 수 있는 다른 완전성을 실체가 받아들이게 처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빛이 이미 구성된 물체에게, 마치 새로운 실체적 형상처럼 물체에 대해 활동성을 자극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보탠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동일한 정신으로부터, 그 정신이 형상의 생산 작업에 대한 질문을 하는데 대해, 그 응답이 나온다.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정리를 상기한다. 잠재적인 존재는, 그 현실태인 존재의 영향 하에 있을 때만, 현실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러한 것은 잠재적 존재 안에서 곧 태어날 형상은 존재의 현재가 전혀 아니고, 오히려 마치 작동 중인 존재의 영향(형상들의 교육으로)하에서 끌어낸 것처럼 곧 현재되기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론은 현실태인 존재에게, 그 작동중인 존재가 가질 수 있는 효과를 부여하는 것이리라. 이런 효과는 그의 정당한 한계로 환원될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잠재적 존재가 씨앗의 이법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더불어 인정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작동중인 존재의 영향은 단지 씨앗의 이법들을 표출하고 전개하게 할뿐이라 한다. (579)
따라서 사람들은 이 모든 주제들의 통일성을 본다. 이 주제들 중의 여러 주제들은 프란체스코파의 사유와 성 토마스 사이에 대립된다. 다양성, 보편적 질료형상의 조성, 형상들의 다수성, 씨앗 이법들과 더불어 자연적 세계를 불가능하게 하는 많은 방식들이 있다. 자연적 세계는 자치적이고 또한 자기 속에 설명의 원리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피조물에 대해 둘째 요청들과 완전히 일치하는 주제들이 있다. 둘째 요청에 따르면 사람들은 피조물 속에서 신적 발산의 흔적들을 재발견한다. 게다가 마치 두 가지 연관 사이에 있는 동등처럼 단순한 유비이지, 마치 신과 이데아들 사이에 있는 닮음과 같은 닮음이 아니다. 이런 유비의 전형, 그것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 영혼의 세 가지 능력들 사이에 연관 속에서 재발견한 삼신격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이런 유비 자체는 정도의 차이들을 갖는 것이고, 이는 관찰자가 자연의 사물들 속에서 발견하는 신적 속성들의 그림자들 또는 흐릿함들 에서부터, 신에 속하는 자신의 고유한 닮음에 대해, 인간 영혼 속에서 직접적으로 의식하는 진실한 이미지에까지 정도의 차이들이다. 이런 초자연적인 재능의 효과에 의해서, 이런 유비적 이미지는 선택된 자들에게서 진실한 비슷함으로 변형될 것이다. 그 진실한 비슷함을 영혼의 신격화라고 여길 것이다. (580)
영혼 자체라기보다 이런 마지막 상태와 연관해서, 성 보나벤투라(1217-1274)는 지적 인식을 분석하고 그리고 이 주제에 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랍인들의 영혼의 자료들을 해석하였다. 그는 능동적인 예지와 가능성의 예지 사이의 구별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우선할렌시스(1175-1245)와 성 토마스처럼(1225-1274), 그는 후자와 마찬가지로 전자를 가지고 영혼의 역량을 만들었고, 그리고 능동 예지 속에서 구별된 실재성과, 천상의 지성들 중에 마지막 지성을 보는 것을 거부했다. 그에게서는 이렇게 분리된 능동 예지의 부정은, 신과 영혼 사이에 어떤 매개적인 것을 받아들이도록 능동 예지를 우회하게 하는, 동일한 정신 상태의 측면이다. 더군다나능동 예지는, 마치 순수 능동자가 순수 수동자에 속하지 않듯이, 가능 예지에 속하지 않는다. 능동 예지는, 상상작용의 이미지들로부터 가지적인 형상들을 추출하기 위하여, 필연적인 추상화 작업을 하도록 단순히 가능 예지를 돕는다. 그러나 그 자신 스스로 작업하게 하는 것과, 능동 예지에게, 자신이 관조한 종들을 전달하는 것은 가능 예지이다.마지막으로 감각적인 것에 관한 추상작업은 그에게서 지적 인식의 유일한 전형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험주의는 감각적 세계의 인식 속에서만 정당하다. 원리들, 도덕적 덕목들, 신이 문제거리일 때, 우리의 인식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모순의 원리와 같은 원리의 인식에 있어서, 많은 감각적인 종류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들 속에 있는 “자연의 빛”은 이것들을 무매개적으로 그리고 어떠한 추론도 없이 획득하게 해준다. 도덕적 덕목들에 관한한, 인식은 어떠한 종류의 감각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속에서 선을 향해 느끼는 성향에, 그리고 이 성향이 바르다고 하는 무매개적 인식에 기인한다. 결국 신은 우리 자신에 관하여 단순한 반성에 의하여 알려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의 이미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우리 자신과 신에 대한 인식의 이름 하에서 성 보나벤투라는 감각적인 것의 회로를 통하지 않는 직접적 인식을 인정했다. (581)
만일 이제 사람들이 이런 인식을 정당화하기를, 그리고 자신의 진리가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를 알기를 원한다면, 사람들은 진리를 신적인 계시에 완전히 연관시키기에 이르게 될 것이다. 보나벤투라는 여기에서 플라톤의 옛 원리로부터(아비센에 의해 다루어진) 출발한다. 이 원리에 따르면 정신이 존재에, 말하자면 안정되고 동일한 실재성에, 도달하는 거기에 인식이 있다. 그런데 존재에 도달하는 것, 그것은 정확히 신을 통해서도 아니고, 신 속에서 영원한 이데아들과 이법들을 보는 것도 아니다. 존재의 이데아는 마치 틀과 같은데, 우리는 그 틀을 실재성들에 적용하려고 스스로 노력한다. 그런데 실재성들은 이데아를 정확하게 허용하지 못하며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온전하게 분명한 인식의 대상일 수 없다. 그러나 이런 관념[이데아]은 현전의 덕분에만, 그리고 우리 속에 영원한 이법들의 – 우리가 소유하지 못한 이법들의 - 영향 덕분에만 현존할 수 있다. 이리하여 가장 겸손한 인식은 인식 그자체로 정의되지 않고, 오히려 신이 갖는 자기 고유한 이법의 충만하고 분명한 인식을 지워버린 이미지의 자격으로 정의되었다. (581)
따라서 성 보나벤투라의 철학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사유의 한 전형으로 다시 소개된다. 이 철학은 그가 근본적 진리로서 고려했던 것에 의해서 지배되었다. 즉 영혼은, 우리에게 크리스트교의 계시에 의해 알려진 초자연적 숙명을 지니고 있다. 다른 진리들에 대한 탐구에서, 사람들은 마치 우리가 다른 진리들을 무시했던 것처럼, 또한 마치 진리와 거짓을 규정하기 위하여 우리가 자치적 방법을 가졌던 것처럼, 진행할 수 없다. 반대로 모든 진리들은 다른 진리들과 연관해서 서로 정돈되어 있다. 자연과 영혼은 신으로 향해져 있다는 것을 서로 이해한다. 즉 자연은 신적 속성들의 흔적과 같고, 그리고 영혼은 우리를 신과 통합하는 사랑의 본질적 기능에 의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이런 철학의 원리가, 크리스트교 사상가들에 의해 잘 흡수되었다고 할지라도, 크리스트교의 정통교리에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접합이 안 되었다는 것을 보는 것은 쉽다. 여기서 우리는 크리스트교의 모든 영향의 바깥에서 나온 신플라톤주의의 고대 원리를 인정한다. 한 존재는 전향의 덕분에만 충만하게 ‘있는’ 것일 뿐이다. 이 전향은 그 존재를 자기의 고유한 원리로 향하게 한다. 그때 존재는 그 원리의 향기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학설은 이어진다. 이 학설에 대해 보나벤투라의 계승자인 마튜 아콰스파르타(Matthieu d’Acquasparta, 1237경-1302)의 저술이 있다. 아과스파르타는 파리 대학에서 신학의 대가였으며, 1287년에 프란체스코파의 총감독이 되었다. 그의 작품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대립을 훨씬 더 깨끗하게 제시하게 되었다. 그의 인식에 관한 문제들이란 저술에서, 그는 “몇몇 철학자들의 경험론”을 다시 세웠다. 이 경험론은 신적인 빛의 어떠한 특수한 영향도 인식에서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을 부인했고, 그리고 능동적 예지의 자연적 능력을 모든 인식에게 속하게 하는 것을 부인했다. 이리하여 “중요한 박사”인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권위도 부인하였다. 그는 “지적 인식에 대해 확실하게 인식되는 모든 것은 영원한 이법 속에서도 또한 제1진리의 빛 속에서도 인식된다.”고 정반대로 주장했다. 심지어는 프란체스코파인 쟝 팩햄(Jean Peccham, 1230경–1292)이 전하는 플라톤주의에 충실했다. 팩햄은 파리 대학에서 공부하고, 그러고 나서 파리 대학에서 가르쳤으며,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학의 대가였다. 플라톤-아우구스티누스 운동의 힘은 우리에게 반대 운동이 전개되었던 조건들을 이해하게 했다. 그 반대운동은 알베르투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전개된 아리스토텔레스 운동이다. (582)
7절 성 알베르 르 그랑 / 알베르투스 Saint Albert Le Grand 582
크리스트교의 소요학파학자들의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은 도미니크파의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 1200경-1280)이다. 그는 “보편박사”라 불렸다. 알베르투스는 1245년에서 1248년까지 파리 대학에서 가르친 신학의 대가일 뿐만 아니라, 1248년에서 1260년에는 쾰른에서도 강의 했으며, 그리고 거기서 1270년부터 세상을 뜰 때까지 가르쳤다. 만일 1250년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알려진 모든 논저들에 대해 긴 설명들을 썼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계획 속에 들어있었지만 그에 의해 부인되었던(무기물에 대하여에서처럼) 문제들에 관해 그가 믿었던 논저들을 거기에 덧보탠다면, 그리고 진위가 의심되는 원인론(그는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그는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비센의 저술들로부터 유대인 다비드의 발췌본으로 생각했다)의 주석을 보탠다면, 그는 또한 평결문들의 주석과 피조물들에 대한 대전과 같은 독단적 신학논저들의 저자이기도 하고, 그리고 위-드니의 주석처럼 신비적인 글들의 저자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그는 1256년에 기욤 드 생 따무르의 공격들에 대항하여 도미니트파 수도원의 방어자로서 능동적 역할을 했다. 그리고 1263년 독일에서 십자군의 설교자이면서 교황의 대사로서 활동했다. (582)
극단적인 다양성과 극단적인 확장으로 알베르투스는 그의 사유의 정합성의 부족을 은폐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다양성과 확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백과사전 속에 포함된 풍부한 목록을 만드는 것이고, 그리고 이 풍부함에 덧붙이는 것인데 그에게 즐거움이었다. 알베르투스는 사유의 정합성의 부족에 대한 감정을 가졌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당시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기도 했다. “나의 철학적 모든 작품들에서 나는 나 자신의 것을 결고 말하지 않았지만, 또한 나는 내가 소요학파학자들의 견해들을 할 수 있는 만큼 충실하게 제시했다; … 만일 내가 나에게 속하는 어떤 견해가 가졌다고 한다면, 신에게 미안하지만, 우리는 그 견해가 철학적 저술에서 보다, 오히려 신학적 저술들 속에서 그럴듯하게 보이게 만들 것이다.” (583)
또한 이것은 알베르투스가 자기 자신과 대립시키는, 자기의 아우구스티누스주의를 소요학파주의에게 대립하게 하는, 하나 놀이이다. 가끔 그는 병치시키는데 만족했다. 이리하여 신학 총서 속에서 그는 영혼의 이중 용어가 있다고 경고한다. 영혼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인데, 여기서 영혼은 마치 유기체화 된 물체의 형상과 같다. 그리고 신학적 이론이 있다. 특히 그가 이 이론을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들로부터 끌어냈다. 한편으로 지적이고 의지적인 삶의 메카니즘의 묘사가 있다. 다른 한편 하나가 다른 것 위에 놓이는 단계들로 이루어진 역량들의 묘사가 있다. 역량들은 감각적 인식에서 신에까지 점진적으로 올라가는 영혼을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감각작용과 아우구스티누스의 감각성 사이에 어떠한 것도 닮지 않는다. 전자는 느끼는 것과 느꼈던 것에 공통하는 현실태이며, 후자는 영혼에게 유용한 곳을 찾게 하고 해로운 것을 멀리하게 하면서, 영혼을 땅에 묶는 것이다. 우리를 인도하는 상위 이법과 우리에게 도덕 법칙을 알게 하는 하위 이법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구별과, 능동 예지와 가능 예지에 대한 소요학파의 구별 사이에서, 알베르투스가 이에 대해 사유한 것이라 할지라도, 비슷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결국 알베르투스가 인정한 근본적인 구별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의지(προαίρεσις 또는 electio)와 임의 자유에 대한 배타적인 신학적 용어 사이에 구별이 있다. 전자에서 의지는 오성의 판단을 따른다. 후자에서 임의 자유는 “이법과 의지의 능력이다. 이 능력에 의해, 만일 우호적 분위기가 우리를 감싸면 선이 선택되었고, 그 분위기가 우리게 모자라면 악이 선택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신테레시스(synteresis) 즉 “의식의 불꽃”에 해당하는 용어는 아무 것도 없다. “의식의 불꽃은 성 제롬에 따르면, 동산에서 쫓겨났다고 할지라도 아담의 영혼 속에서 불꽃이 꺼지지 않는다.” 그것(신테레시스)은 최고 도덕 규칙들을 인식하는 능력이다. “그것에 대해 철학자들은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일반적 대상들에 따라서 영혼의 역량들을 분할하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신학자들은 신적 권리와 인간적 권리 사이를 구별할 줄 안다.” 이리하여 감각적 세계와 전체 연관 밖에서 고려된 영혼에 관한 “성인들”의 관점들이, 영혼을 신체와 연관에 의해서만 인식하는 철학자의 관점들을 채워준다. (584)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시각들에서는 알베르투스의 학설이 당대의 지배적인 아우구스티누스주의와 연관해서 정신의 아주 새로운 습관들을 지적한다. 철학적 이법이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은 어느 정도 낮추어졌다. 성 알셀무스에서처럼 예지에 의해 계시된 독단들의 – 신체화 또는 삼신성 - 이법들을 발견하는 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거기에 순수 신앙으로 있으며 또 남아 있을 항목들이 있다. 철학적 이치는 결과들에서 원인으로만 진행할 수 있을 뿐이다. 인식 질서에서 첫째인 것은 존재 질서에서 마지막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감각적 세계에 의해서, 존재론적 증거를 통해서가 아니라 결과에서 원인으로 가는 우주적 증거를 통해서, 신에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 세계에 대한 고찰로부터, 사람들은 틀림없이 신에게로 결론지울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세계가 시간 속에서 시작했거나 안했거나 간에, 심지어 사람들이 추리적인 전반적 확실성을 가지고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발견하는 영원성을 위한 논증들은 반대 논증들과 거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단지 계시만이 문제를 단호하게 해결할 수 있다. (584)
알베르투스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항들을 분리하는 경향이 있다. 이 항들 사이에서 아우구스티누스학자의 플라톤주의는 연속성과 위계질서를 찾고 있다. 바로 이런 경향성에는 몇 가지 측면들이 있다. 13세기에 아우구스티누스학자들은 아비케브론에 다소 가까운 영향 하에서 모든 피조물들에서 또한 물체적인 것만큼이나 정신적인 피조물들에서, 질료형상적 조성을 인정했었다. 천사와 영혼, 또한 물체도 마찬가지로 질료와 형상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런 관점에 반대하여, 그리고 순수 현실태인 운동하는 지성과 형상인 영혼에 대해 자기 이론을 갖춘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면서, 알베르투스는 질료를 마치 정신적 존재들을 조성하는 것처럼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이런 거부의 효과는 우주에 대한 자기의 통찰을 변형하는 것이다. 마치 형상은 그 자체로 보편적인 것처럼, 마치 개별화의 원리가 형상에 보태진 질료에서 유래하는 우발사고들에서 있는 것처럼, 개별적인 인간의 자연은 영혼과 신체로 조성되어 있어서 천사의 자연과는 거의 어떠한 공통점도 더 이상 없다는 결과가 뒤따른다. 천사들은 순수 형상들이기 때문에, 그에 따라 마치 개별자들로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종들로서 취급되는, 형상들 사이에서 달라야만 한다. 동일한 이름의 어떤 역량들도 천사에게서, 인간 영혼에서, 신체에 연결된 영혼에서, 동일한 능력이 아니다. 이 신체와 연결된 영혼은 감각적 이미지들에게로 향한 추상화의 조작에 의해서만 추리적인 것에 도달한다. 반면에 천사는 오류와 탐색이 면제되어 직관적 인식을 갖는다. 능동 예지, 즉 천사의 직관적 예지는, 인간에서 보면, 구별되지 않는 단순한 명석함이다. 이런 명석함은 류들과 종들의 모든 구별들을 감각적 이미지들에서 끌어온다. (585)
이리하여 사람들은 보편적 연속성 안에서 깊은 틈들의 인상을 도처에서 갖는다. 알베르투스는 심지어, 아랍의 소요학파 학자들에게 속하는 지적 인식이론에서, 신으로부터 인간을 접근시키려했던 모든 것을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아베로에스에게서 능동 예지는, 열째 구(球) 차제 속에 가지적인 것들 모두를 포함하고 있어서 열째 구의 운동하는 지성이기에, 그 귀결로서 모든 인간들에게 공통적이었다. 아베로에스의 능동 예지는 인간 영혼의 일부를 이루는 하나의 능동 예지에 의해 대체되었다. 따라서 영혼들이 있는 그 만큼 많은 능동예지들이 있다. 게다가 그것은 형상들로부터 비어있고, 그리고 다른 곳에서 주어진 감각적 이미지들로부터 형상들을 추상화하는 것 이외의 다른 기능을 갖지 않는다. 만일 분리된 지성 또는 천사적인 지성이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면, 이런 영향의 결과는 전적으로 자연적 인식과 구별되는 계시[폭로]이다. (585)
이러한 조건들 속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알베르투스가 자연의 연구를 그 자체로서 관심을 가질 수 있었는가?를, 동물학, 식물학, 광물학의 문제들에서 “경험만이 확실성을 부여한다”는 이 원리의 덕분에 이런 과학들이 어떻게 그에게서 환상적 동물의 우화집 또는 전통적 상징적 우화집과는 다른 것이 되기 시작 했는가?를, 이해한다. (585)
독일 도미니크파 학자들로서, 위그/위고(Hugues de Strasbourg, ?-1268)와 울리히(Ulrich de Strasbourg, 1220-1277)는 알베르투스의 학설들을 퀠른에서 퍼뜨리기 시작하였고, 또한 매우 잘 못 알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들 중에 둘째 학자는 아랍 소요학파주의에 대해 자기 스승보다 훨씬 더 잘 접근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가 신비적 운동의 초기에 있었을 것이고, 그 신비적 운동은 곧 에크하르트(Eckhart, 1260경-1328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5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