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관자재 처음 착수 방법
일체의 시간 속에서 정념(正念)을 잃지 않고 불법을 떠나지 않는다
관자재가 곧 관세음이다. 관은 자관⋅비관⋅지혜관이고, 세음은 범음⋅묘음⋅해조음이다. 관음찬(觀音贊)(하련거 선생님이 지음)을 체험 터득할 수 있으면 매우 좋을 것이다.
觀自在即觀世音. 慈觀、悲觀、智慧觀;梵音、妙音、海潮音. 觀音贊(蓮公所撰)如能體會很好.
이어서 경문을 강의하겠습니다. 관자재는 바로 관세음입니다. 한 분의 보살이 명호가 두 개입니다. 불보살에게는 모두 무량한 명호가 있습니다. 관자재는 능엄경 내의 이근원통(耳根圓通) 법문에 부합합니다. 그분이 바로 관자재인데, ‘반문문자성(反聞聞自性)’, 자기의 능히 듣는 기능으로 되돌아가, 듣는 작용을 되돌려 자성을 듣습니다. 법화경에서, 자신의 명호를 부르는 소리를 찾아 고통에서 구제하여 주는 [尋聲救苦] 분은 바로 관세음입니다. 어디에서든 관세음보살을 한 번 부르거나 염하면 관세음보살은 곧 오셔서 당신을 구해주십니다. 그러므로 ‘관’은 바로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는) 자관(慈觀)⋅(중생의 괴로움을 없애는) 비관(悲觀)⋅(넓고 큰 지혜로 살피는) 지혜관(智慧觀)이고, ‘성음’은 바로 (소리에 집착함이 없는) 범음(梵音)⋅(설법하는 데 장애가 없는) 묘음(妙音)⋅(때를 놓치지 않고 응하는) 해조음(海潮音)으로서, 모두 경전에 나오는 말입니다. 하 선생님이 말씀한 관음찬(觀音讚)은 아주 좋습니다. 『정어(凈語)』에 「관음찬」이 실려 있으니 여러분이 체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관음에 대하여 더욱 이해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반야이다. 어떻게 착수할까? 실상은 체(體)이고, 문자는 상(相)이며, 관조는 용(用)이다. 문자로부터 관조하여 실상에 도달한다.
最要注意者是般若. 如何下手?實相是體, 文字是相, 觀照是用. 由文字而觀照而實相.
반야가 이렇게 중요한 이상 우리는 어떻게 착수해야 할지 물어야 합니다. 착수는, 실상반야⋅문자반야⋅관조반야 의 3종 반야를 말하지 않았습니까? 즉, 실상반야는 본체이고, 관조반야는 작용이며, 문자반야는 드러나는 상(相)입니다. 문자는 상이므로 다들 문자를 볼 수 있으니, 문자반야로부터 착수합니다. 그러므로 문자반야를 떠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문자 속의 의미로부터 관조합니다. 이 관조(觀照)는 예리한 근기도 있고, 둔한 근기도 있습니다. 일반적인 근기에 대해서는, 당신에게 최소한 한마디 색즉시공(色卽是空)을 말해주겠습니다. 이 한 마디 말을 당신은 늘 관조하고 관조해도 좋습니다. 당신이 애착하는 것들, 세간의 이런 좋은 것들은 모두 색이 아닌가요? 어디서 가구를 전시 판매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으면, 가구를 빨리 바꾸러 가고 싶지만, 당신은 그런 경우마다 5온이 모두 공하다[五蘊皆空]고 할 수 있다면, 천천히 실상(實相)에 깨달아 들어갈[證入]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6바라밀 중 어느 바라밀이나 모두 저 언덕에 도달할 수 있지만, 어느 바라밀이나 모두 반야를 떠날 수 없다.
六度皆能到彼岸, 但均不能離般若.
보살은 6바라밀을 닦습니다. 이 6바라밀은 바라밀 하나마다 모두 저 언덕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바라밀 하나마다 반야를 떠나면 저 언덕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앞의 다섯 바라밀은 눈이 먼 봉사나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일부 사람들이 선정을 닦고 있고 많은 사람이 좋은 작용을 얻었습니다. 여기에 이틀 전에 한 사람이 왔는데, 그는 나를 만나 본 뒤로 자신의 선정이 또 깊어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바로 엄(嚴) 씨의 병을 치료해 준 사람입니다. 엄 씨는 지난 며칠 동안 병이 나서 발광했습니다. 마구 춤을 추고 소동을 벌였으며, 손발로 마구 찼고, 밥을 먹지 못하고, 허튼소리를 하고 손발을 다 다쳤습니다. 그렇게 사흘 동안 소동을 벌였습니다. 그를 청해 갔습니다. 그가 가서 주문을 몇 번 외우면 좋아졌다가, 이틀이 지나면 또 좋지 않았습니다. 혼수상태에서 먹지도 않았고 마시지도 않았으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문에 들어가자마자 엄 씨는 일어나 앉았습니다. 엄 씨는 그를 단속하여 소리쳤습니다, “송 선생님, 좀 살살하세요.” 이게 다 선정 때문이니, 선정을 닦다 보면 이런 일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 씨는 반야가 없으니 봉사이며, 이래서 아침⋅저녁으로 이성을 잃고 마구니 경계에 빠져 들어간 것[入魔]입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선정 좌선을 하는 사람은 주화(走火: 도가 지나치다. 무언가에 미쳐 이성을 잃을 지경이다―역주) 증세로 정신병이 일어난 사람이 많고 많았습니다. 다른 것은 다시 예를 들겠습니다. 다음은 하 선생님이 드는 예입니다.
예컨대 보시로 아이에게 칼을 주거나 독균이 있는 음식을 주어서는 안 된다. 보시가 삼륜체공(三輪體空)과 같다면 저 언덕에 도달할 수 있다. 나머지 바라밀도 이에 따라 행한다.
例如布施, 施小孩以刀, 以有毒菌食物則不可. 布施如三輪體空, 則可到彼岸. 餘度例此.
“예컨대 보시로 아이에게 칼을 주거나,” 이것은 한 가지 예입니다, “독균이 있는 음식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요? 이것은 매우 좋은 예가 아닌가요? 당신이 물건을 남에게 주는 것은 좋지만, 당신이 자신의 잘 드는 칼을 아이에게 주었는데, 그 아이가 자기 손가락을 자르거나 아니면 다른 아이를 찌르고 다른 아이의 눈을 찌른다면, 어떻게 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독균이 있는 음식을 아이에게 주면 되겠습니까? 어른은 저항력이 조금 강하지만, 이 독균이 있는 음식물을 어린이가 먹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에 보시는 반야가 없으면 안 됩니다.
보시가 만약 삼륜체공(三輪體空)이면 저 언덕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보시에 지혜가 없으면 안 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을 지혜가 있는 보시라고 할까요? “삼륜체공”입니다, ‘삼륜’은, 예를 들면 내가 십만 원을 가지고 곤란에 처한 병자를 구제하려고 주는 경우, 안으로는 돈을 줄 수 있는 나를 보지 않고, 밖으로는 나의 돈을 받는 병자가 생각 속에 없으며, 중간에도 내가 보시한 십만 원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의 돈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을 ‘삼륜체공’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보시이어야 비로소 저 언덕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좋은 일을 한다는 생각이 하나 있고, 내가 그에게 십만 원을 주었다면, 이것을 상에 머무는 보시[住相布施]라고 합니다. 그것은 단지 인간계와 천상계의 복보를 얻을 수 있을 뿐으로, 머리를 쳐들고 허공에 화살을 쏘는 것과 같습니다. 화살 하나를 천상을 향해 쏘면 조금 있다가 툭 다시 떨어지듯이, 위로 올라갔다면 또 내려와야 합니다. 6바라밀도 모두 이와 같습니다. 다음은 또 하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어떻게 한 법문으로 깊이 들어가 피안(彼岸)에 도달할 수 있는가? 반야가 아니면 안 된다. 어떠한 것이 반야인가? 관자재(觀自在)이다. 불법은 적은 문자를 듣고서도 많은 해석을 얻을 수 있다. 무엇을 관찰하는가? 자기[自]를 관찰한다. 무엇이 자기인가? 신체가 자기인가? 그것은 임시로 화합한 것[假]이다. 중요한 점은 자기가 있는지 있지 않은지를 관찰하는 것이다. 어느 때나 정념(正念)을 잃지 않고 불법을 떠나지 않으면 있음[在]이다. 당신의 자기가 있는지 있지 않은지를 관찰하는 것이 처음 착수하는 방법이다. 언제나 있으면[在] 하나의 근(根)이 근원으로 돌아가 6근이 해탈한다.
怎麼能一門深入到彼岸?非般若不可. 云何般若?曰, 觀自在. 佛法可以少聞而得多解. 觀什麼?曰觀自. 什麼是自?身體是自否?那是假的. 要緊的是觀自己在不在?一切時中不失正念不離佛法則在. 觀汝自己在不在是初下手方法. 常常在則一根還原, 六根解脫.
여기에 큰 단락이 하나 있습니다. 어째서 반야일까요? 경문의 첫 구절인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 바로 관자재입니다. 불법은 적은 문자를 사용하여 많은 해석을 얻을 수 있어서 무량한 함의(含義)가 있습니다. ‘관자재(觀自在)’에서는 무엇을 관할까요? 자기[自]를 관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자기일까요? 이 질문은 긴박합니다. 한 질문이 한 질문을 잇따르는데, 무엇이 자기일까요? 신체일까요? 이게 자기일까요? 나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이전의 나는 일찍이 죽어버렸습니다. 하하하…, 현재의 이 나도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를 모릅니다. 여러분도 이와 같습니다. 방금 누군가가 말했듯이 예전의 나는 아이를 안고 왔습니다. 복민이라고 합시다. 현재 그녀의 아이는 벌써 성장했습니다. 그녀도 예전의 그녀가 아닙니다. 일체 모든 것은 변화하고 있습니다. 찰나 찰나에 생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잠깐 머무르는 동안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세포가 죽었고, 얼마나 많은 세포가 자라나서, 크나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몸은 자기가 아니라, 조만간에 화장터로 가서 태워져 한 더미의 재가 되어야 하는 것인데 어떻게 자기이겠습니까? 이 몸은 (4대가 화합하여 이루어진) 가짜입니다.
이 부분에서는 답안을 작성해 놓지는 않았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자기인지를 설파(說破)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늘 느끼기를, 하 선생님의 강설은 항상 반 마디를 남겨놓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남겨놓는 것은 대단히 필요합니다. 선종에서는 이른바 “말은 10할을 금기한다 [語忌十成].”, 당신이 100% 다 말해버리는 것은 금기를 범하는 것[犯諱]이라고 합니다. 당신이 황제의 휘(諱; 이름)를 범하면 목이 베이게 됩니다. 그래서 문자로써 당신에게 무엇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명사를 해석하듯이 곳곳마다 당신에게 무엇이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역시 당신 자신이 터득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당신에게 매우 구체적으로 말해줍니다, “자기가 있는지 있지 않은지를 관찰하라 [觀自己在不在].” 자기[自]에 대해서는, 현재 당신이 알 길이 없지만, “당신이 있는지 있지 않은지”는 그래도 관찰(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구체적이고 착수하기도 쉽습니다. 어떻게 있을까요? 어느 때나 항상 당신이 ‘정념을 잃지 않고 불법을 떠나지 않는 것’이 바로 ‘있다’입니다. 당신은 우선 ‘자기가 무엇인지’를 상관하지 말고, 먼저 자기가 ‘있는지 있지 않는지만 상관합니다. 이것이 처음에 착수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돌아가고 [消歸自己], 자기를 돌이켜보고 [返觀], 돌이켜 비추어 보는 [返照] 것이 모두 이 일입니다. 당신이 항상 있고 늘 있으면, 당신의 6근(六根) 중 하나의 근(根)이 근원으로 되돌아가고 6근이 모두 해탈합니다. 그래서 이 단락은 중요합니다. 이어서 또 하 선생님의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