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6구간(매요마을-복성이재)
1. 산이름 : 사치재, 사리봉, 복성이재
2. 소재지 : 전북 남원시
3. 산행 코스 : 매요휴게소(유치재) ←(1.9km)→ 618봉 ←(1.1km)→ 사치재 ←(2.3km)→ 새목이재 ←(2.6km)→ 781봉 ←(2.0km)→ 복성이재
4. 산행 거리 및 소요시간 : 10.0Km(5시간 30분)
5. 산행 안내 : 남원-인월(권포회관 하차)-복성이재:성리-인월버스(16:00.18:00) 인월숙박
0.매요마을 버스종점에서 폐교 뒷길로 500m 정도 가다가 포장된 큰 삼거리에서
산으로 올라 지리산휴게소 쪽 사치재 동물보호길로 올라 감.
매요마을-복성이재 구간
남원에서 인월가는 버스를 타고 매요마을에 도착하여 매요휴게소 윗쪽 언덕으로는 정자나무와 교회가 시골풍경의 멋을 더해주는 느낌이었다.
작은 길을 따라 오른쪽으로는 폐교로 보이는 건물을 따라 뜨거움을 느끼며 삼거리 아스팔트 길에서 거울을 보며 인증을 하고 사치마을 입구를 지나 왼쪽 숲으로 들어가니 유치삼거리라는 안내판이 서있다. 표식리본을 따라 들어서는 입구에 이정표가 유치삼거리 해발 420미터 라는 안내와 함께 여원재 10.5km, 사치재 2.5km 라고 적혀 있듯이 사치재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소나무 숲으로 이어진 능선길을 편하게 갈 수 있다.
유치삼거리에서 편안하게 길을 따르면 사치재에 닿는다. 시원스러운 고속도로 위 동물이동통로를 통해 사치재 이정표 푯말에서부터 억새밭으로 이루어져 있는 등로를 따라 697봉까지 가야한다.
\올라가는 길은 70도 정도 경사의 가파른 길로 오른쪽으로 소나무가 많이 서있었으나 왼쪽으로는 잡풀이 늘어 우거져 있었다. 나무군락은 초입에서만 볼 수 있었고 가파른 길 내내 경사가 있는 만큼 경치는 좋았으나 작열하는 태양을 오롯이 맞으며 산행을 해야 했다.
아래쪽으로 88고속도로가 시원하게 앞을 가로질러 차량통행이 시원하게 보이고, 내려다보이는 왼쪽으로 함양방면 지리산휴게소와 휴게소 상징물이 멋있어 보인다. 헬기장에 도착하여 처음 출발했던 고남산을 비롯한 마루금이 볼만했으나 뜨거움으로 인해 머리가 익어 버릴 것 같아 틈만 나면 물을 먹으며 쉬어야 했다.
흥부마을이라는 성리마을
남원시 아영면 성리마을은 판소리 다섯 마당 중의 하나인 흥부전의 배경이다. 이곳은 전해내려오는 설화와 지명을 근거로, 흥부가 정착하여 부자가 된 발복지(發福地)로 밝혀졌다. 이 마을에는 오래 전부터 복덕가(福德家) 춘보설화(春甫說話)가 전해져 오고 있다. 흥부가와 춘보설화는 가난 끝에 부자가 된 인생역정, 선덕의 베품을 내용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 내용이 유사하다. 실제로 성리마을에는 박춘보(朴春甫)의 묘로 추정되는 무덤이 있다. 매년 정월 보름에 망제단에서 흥부를 기리는 춘보망제를 지내오고 있다.
성리에는 흥부전에 등장하는 지명이 마을 곳곳에 남아있다. 허기재, 고둔터, 새금모퉁이, 흰묵배미 등의 지명은 고전에도 등장했던 지명이다. 지금은 길 양쪽으로 감자농사가 한창인 '허기재'는 허기에 지쳐 쓰러진 흥부를 마을 사람들이 도운 고개라고 전해진다. '고둔터'는 고승이 가난에 시달리고 있는 흥부에게 잡아 준 명당으로, 흥부는 이곳에서 제비를 고쳐준 발복집터이다. 실제 '고둔'이라는 지명은 곳집(창고)이 모이는 터, 즉 부자가 되는 터라는 뜻이다. 이곳은 장수군 번암면으로 넘어가는 짓재 고개마루에 높다랗게 자리잡고 있으며 마을의 산자락과 이웃 논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사금모퉁이'는 사금꾼들이 금을 채취하던 곳으로, 흥부가 이곳에서 금을 주워 부자가 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한편, '흰죽배미'란 장소는 흥부가 부농이 된 후 은인들에게 보답으로 주었다는 논으로 전해진다. 흥부아내가 이웃들이 흰죽을 먹고 살아나서 ‘흰죽’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노디막거리'는 흥부가 부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부가 화초장을 지고 건넜다는 개울로 추정된다. 지금은 콘크리트로 덮여있지만 개울가에는 억새가 무성히 자라고 있다. 이곳저곳을 거닐면서 형제 간의 우애, 부(富)와 빈(貧), 성공한 이후에도 어려웠을 시절 함께 했던 이웃을 잊지 않은 겸손과 나눔의 정신을 되돌아 봄직하다.
복성이재
전북 남원시 아영면과 장수군 변암면의 경계를 이루는 복성이재는 해발 601.4m의 재이다. 백두대간의 고개를 이루는 이 재의 산줄기는 시리봉과 봉화산을 잇고, 물줄기는 낙동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이다. 복성이재와 복성이 마을이 만들어진 유래는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나기 전, 지역에서 조정의 양곡관리를 맡고 있던 변도탄이 천문지리에 밝았는데, 어느 날 천기를 보고 국가에 전란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대비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평화로운 기운을 어지럽게 한다하여 관직을 삭탈 당했다.
그 후 전란에 대비해 피난처를 탐색하던 중 천기의 기운이 북두칠성 중에 복성 별빛이 남쪽으로 비쳐 별빛을 따라 지리산으로 향하는데 복성별빛이 멈춘 곳에 자리를 잡고 움막을 지었다하여 복성이재라 전해진다.
그 후 쌀가루로 만든 움막은 군량미로 사용하여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며, 조정에서 변도탄의 충성심을 인정해서 큰 상을 내리자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복성이마을을 이뤘다고 한다.
여름 산행의 어려움을 새삼 느끼게 한다. 반바지를 입고 산행하고 있어 팔과 다리엔 억새들과 딸기나무들로 인해 도륙이 된지 오래다. 화끈거리는 다리를 끌고 오른쪽으로 보이는 능선위 697봉에 올라 그늘에서 한참을 쉬다가 능선길을 따라 다시 얼마를 내려가다 오래 전의 임도 이었을 듯한 길이 앞에 나타났다. 새맥이재다.
간식을 먹고 다시 오르막 능선길을 올랐다. 이 곳은 소나무가 많기도 하지만 잡목도 같이 섞여있었다. 시리봉을 우회하여 억새와 잡목길 능선을 올라갔다.
크지 않은 길쭉한 바위가 올라가는 길옆에 있었다. 남근석이라 불리는 바위다. 남근석을 지나 조금 더 오르니 781봉 정상이다. 계속 내리막길을 조금씩 가다가 쉬고 다시 가다가 쉬고 하는 사이 아민성 성터라고 간판이 나왔다. 천 년 산성은 남아 있으나 그 때의 영웅호걸은 이제 책장 넘어 에서 만나게 되는구나!
황산벌의 계백이나 황산전투의 영웅인 이성계 등 역사는 돌고 돌아 우리들 품으로 온다. 현재는 미래의 거울임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운다. 그것이 역사임을 명심하고.......
얼마지나지 않아 복성이재에 도착하여 오른쪽 동네 뒷길로 내려오니 흥부마을이라는 전시관이 있어 관리자에게 민박을 요청하니 이곳은 없고 인월까지 가야한다며 이곳에서 재배하는 차와 음료수를 주었다.
친절하게 인월가는 버스 시간을 알려주어 고마움을 표시하고 버스에 몸을 싣고 인월에서 숙박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