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577돌 한글날이다.
나와 같은 평범한 직장인들은 주말에 연이은 월요일에 휴일이 걸리면 반갑기가 그지없다.
같은 휴일이라도 주중에 있는 휴일과 주말에 연이은 월요일의 휴일은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출근 공포에 찌든 월요일을 쉴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그 해방감이 배가 되는 느낌은 비단 나만의 제한적 느낌일까?
여름 내내 탁구에 빠져서 소홀히 했고, 더운 날씨 핑계로 창고에만 모셔놓은 산악 자전거를 꺼내와 정비 했다. 오늘은 간만에 나의 팅커벨(산악자전거 애칭)에게 갈바람과 갈꽃 향기를 마음껏 누리게 해줄 참이었다.
너무나 집에만 있어서 나로 하여금 “집사람”이라는 애칭을 부여받은 남편은 남들 다 일하는 평일에는 집안일을 하며 막걸리만 축내다가 이렇게 남들 다 쉬는 휴일에 한 번씩 일을 하러 가게되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러니 남들로 하여금 휴일까지도 쉬지 않고 일한다는 어이없는 말을 듣게되고 세상 돈은 혼자 다 번다는 오해를 받기 일수이다.
그렇지않아도 일거리가 없어서 장비를 세워놓는 때가 많은데, 역시나 오늘 집사람은 간만에 일을 하러 나가고 없다.
휴일에 늦잠을 자라고 조용히 아침을 챙겨먹고 일을 나간 집사람의 배려가 고맙다. 그렇지만 절대 그 고마움을 표현하는 일은 없다. 마치 태고부터 그런 것처럼 그저 당연히 여길 뿐.
옷장에 묵혀둔 라이딩 복장을 주섬주섬 챙겨입고, 전날 딸아이가 사들고 온 맛난 빵도 물과 함께 몇 개 챙겨넣고 열시쯤 집을 나섰다. 그때까지만 해도 오늘이 얼마나 고된 하루가 될른지 짐작도 못한 채로 말이다.
출발은 순조로웠다. 순천만 갈대밭 근교에 위치한 집에서 출발하여 뚝방길을 따라 상사댐쪽으로 쭉 올라갔다. 여기 저기 알고 또 모르는 이름으로 피어난 수수하고 단아한 들꽃들과, 억세풀 또한도 하나의 꽃이 되어, 피어난 듯 서 있는 것이 과연 가을이 왔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기분 좋은 풍광들이었다.
어디서 이렇게 강렬한 향기가 코끝을 잡아당기는가 근원을 찾아가보니 어느 동네나 드문드문 있을법한 금목서, 은목서들이 지금은 제 시대가 온것마냥 의기양양하게 곧추서서 아름다운 향기로 맘껏 제 존재를 뽐내는 중이었다. 이 수목들은 마치 살구와 자두를 섞어놓은 듯한 달콤한 향기가 일품인데, 은목서에 비해서 금목서는 그 향기가 더 강렬하고, 그 향이 만리를 간다하여 만리향이라는 별칭이 있기도 하다. 이에 비해 은목서는 금목서보다는 약간 순하고 은은한 향의 특징이 있는 것 같은 개인적인 느낌인데, 죽도봉 팔각정 아래 비둘기 아파트 부근에 가보면 그 향을 만끽할 수 있을만치 아름드리 은목서가 즐비하다.
나는 농촌에서 나고 자라면서 갖가지 농사일을 신물나게 하며 자랐다. 유년의 때에는 가난한 농촌에 태어난 운명을 한탄하기도 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수구지심과 같이 옛것을 동경하게 되고, 오래된 것의 소중함을 알게되고, 어릴 적에 접했던 음식이나 문화 등이 그리워지는 것은 사람이면 어찌할 수 없는 본능인 듯 싶기도 하다.
상사댐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를 타고 오르다가, 은빛마을이라는 노인 요양시설을 지나기 직전에 우측 산등성이로 올라가다보면 천주교묘지 방향으로 이어져 용수동가는 도로와 연결되는 길이 있다.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있어서 상사쪽에서 시내방향으로 가려는 차량들이 시내도로의 복잡한 신호체계를 피해가거나 용수동 방향으로 빠른 진입을 위해 종종 이용하는 도로이다. 그 가파른 정도가 상사댐을 올라가는 것 보다는 조금 더 난이도가 있는 편이나 몇 번 가본적이 있는터라 힘은 들었으나 지루하지 않게 고개 마루까지 오를 수 있었다.
몇 년 전에 캠핑장이 생겨나서 젊은 캠핑족들이 적지 않게 텐트를 쳐놓고 휴일 망중한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고개 마루에 다다라서 가쁜 숨을 가다듬고 목을 축이고 한숨 돌리며 단팥빵을 한껏 베어 물고 있는데, 반대쪽에서 남자인것만 확실한 라이딩 무리가 숨을 헉헉대며 한창 올라오다가 혼자 쉬고 있는 나를 보고는 인사를 건넸다.
말없이 목례로만 화답하고 눈길로 그들을 쫓으니 대여섯명 무리들 틈에 여자는 없어 보였다.
간혹 여자 멤버들도 소수 합류하거나 드물게 여성 멤버들로만 구성된 동호회를 한번 보기는 했지만 그래도 산악자전거는 아직 여자 선수들의 수가 많지 않다.
너무 오래 쉬면 오히려 멀리 가지 못하기 때문에 간식만 챙겨먹고 서둘러 일어섰다.
오르막을 오를 때는, 이러다 멎을 것 같이 심장은 미친듯 펌핑질을 해대고, 넘어갈 듯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 팽창한 풍선처럼 터질듯이 허벅지가 아파오지만 이 너머에 이 고통 이상의 안도가, 즐거움이, 바람을 가르는 활강의 활공이 주는 희열을 알기에 견딜 수 있다. 더군다나 초행길이 아니라면 한번 해봤다는 성취감 또한 업로드의 고통을 경감시키는데 일몫하게 된다.
인생도 그런 것 같다. 왜 시쳇말로 처음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쉽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것은 경험이 그 만큼 중요하다는 것의 역설인 것 같다. 경험이 선생이라는 선인들의 말은 과연 진리인 것 같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걸음이 두렵고 불안하겠지만, 목표가 있고 종착지를 아는 걸음은 힘이 넘치고 거침이 없는것처럼, 목표를 위해 달리고 성취의 꿀맛을 알고나면 인생의 힘듦이, 녹록치 않음이, 감당이 되고 견뎌질 수도 있으니 지금이 힘든 인생들이여 부디 좌절하지 말고 쉬이 지치지 마시기를 바라는 바이다. 솔로몬의 반지에 새겨진 글귀처럼 이 또한 다 지나가리니 지나고 나면 그때를 추억할 수 있고, 그 시절을 잘 견뎌온 나는 성큼 성장해 있을터이니 말이다.
바람에 얹혀진 채로 언덕을 순식간에 내려 온 나와 팅커벨은 용수동 도로에 인접하여 좌회전을 하고는 공동묘지 방향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sos어린이 마을을 지나 용수동 저수지가 나오고, 삼거교회 앞에서 왼쪽으로 빠진 임도로 접어 들었다. 이는 풍치재로 가는 길인데 내가 타는 라이딩 코스중에 가장 난이도가 높은 코스이다. 일단의 계획은 풍치재를 넘어갔다가 쌍암 읍내에서 한숨돌리고 다시 풍치재를 넘어 온 길을 되짚어 귀가하는 것이었다.
계절이 이때인지라 길바닥에는 밤송이들이 즐비하게 떨어져 있어서 지뢰를 피하듯이 자전거 바퀴가 밤송이를 밟지 않도록 주의 하면서 폐달을 연신 밟았다. 몇 년전 처음 자전거를 시작할때에는 뭣도 모르고 밤송이를 밟고 지나갔다가 바퀴에서 바람이 새는 바람에 몇 번 혼이 난적이 있던터라 여간 조심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자전거 바퀴는 밤송이에 찔려 들어가지 않을 줄 알고 무대포로 밤송이를 깔아 뭉개고 다녔었는데 몇 번 빵구를 떼우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고가의 자전거들은 바퀴 안에 접합액같은것이 들어있어서 밤송이처럼 미세한 펑크는 스스로 메워지도록 되어 있는데 내것은 그리 비싼축에는 들지않은 장비라서 조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라이딩중에 일어날 수 있는 사고에는 모래나 빗물이 노면에 고여 미끄러진다거나 장애물을 피하려다가, 혹은 장애물에 걸려서, 다른 이유로 정신 팔려서 중심을 잃거나 주변 사물에 옷가지가 걸리거나 자기 실력을 과신하다가 방심하는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4년 전 라이딩중에 빗물이 고인 것을 간과하고 급하게 회전하다가 얼굴 광대뼈와 갈비뼈 두대 골절상을 입은 적이 있고, 돌이 많은 임도에서 다운힐 중에 굴러서 같은 부위에 갈비뼈 골절을 당한 적이 있다. 직장에는 취미 생활 중에, 그것도 다칠 확률이 많아 모두가 만류하는 산악자전거 타다가 다쳐서 입원하게 되었다고 사실대로 말 할 수가 없어 둘러댔었는데, 그때만 해도 코로나가 한참 극에 달했던 시기라서 한 명의 결원으로 나머지 직원들의 업무량이 늘어나는 상황이라 욕먹을 각오를 단단히 했어야 하는 시기였다.
팅커벨의 힘겨운 회전운동 끝에 어느덧 풍치재 정상에 다다랐다. 물 한모금으로 한숨 돌리는 사이, 기억은 어느덧 산악자전거를 처음 시작하던 그해 여름에 가있었다. 하루도 안빠지고 점심시간마다 이 재를 오르기 위해 기를 쓰며 폐달을 밟아댔으나 그때는 단순히 이동수단으로 이용하던 평범한 자전거로 아무리 용을 써도 도무지 언제쯤에나 이 재를 오를 수 있을지 그저 까마득하게만 느껴 졌더랬다. 어느 古詩처럼 세월이 하 수상하다.
풍치재 정상에서 쌍암읍사무소 방향으로는 진짜 깎아 내리는 듯한 내리막이 이어진다. 오랜만이라 다소 긴장하며 내리막을 달리는데 수직낙하 놀이기구처럼 아찔한 경사를 내달리는 순간에 갑자기 두려움이 덜컥 솟아났다. 다운힐에서 두려움이 생기는 것은 경험상 좋은 징조는 아니다. 그러한 불안감이 사고로 이어져 다친 경험이 몇 번 있었기 때문에 더욱 긴장하여 속도를 늦추려 양손은 브레이크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중력에 의한 낙하에는 큰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자전거를 오래 쉬어서 두려움이 생겨난 듯 하였다. 무사히 재를 내려왔지만 나는 스스로를 강하게 단련하고 싶은 마음에 목표를 수정하여 읍에서 접치재까지 더 가보기로 하였다.
접치재는 가끔씩 헤이해진 정신을 조이거나 흐트러진 마음을 추스르려 곧 잘 오는 등산코스인데 접치재를 올라 장군봉을 거쳐 보리밥을 먹고 다시 되돌아 오거나 작은 굴목제롤 지나 연산사거리에서 송광사로 넘어가 버스를 타고 접치재로 다시 돌아오는 코스를 자주 이용하였다.
자전거를 접치재 아래 등산로 초입에 은닉해 놓고 간식으로 열량을 채운 후 라이딩 복장과 헬멧을 손에 든채 가파른 등산길을 호기롭게 오르기 시작했다. 고관절이 뻐근해 오고 다리가 천근 만근인 듯 걸음을 옮기기 수월치 않았으나 스스로를 다그치며 산을 올랐다.
신나는 음악을 켜서 텐션을 끓어 올리려 애를 쓰면서 장군봉까지 올랐다. 보통 한시간 십오분정도면 도달할 거리인데 한시간 반걸려서 장군봉에 다달았다. 배 바위까지 갈까 고민했으나 시간이 이미 많이 지나있어서 발길을 돌려 하산하였다.
등산 중에 나는 곧잘 뱀을 만나곤 하는데 이날도 어김없이 힘빠진 하산길에 통통한 독사 한 마리가 좁은 등산로를 가로 질러 통행료라도 받으려는 듯 기고만장하게 늘어져 있었다. 독사들은 보통 몸통이 짧고 통통한 편이고 도망도 잘 안간다고 알고 있었기에 이놈이 독사라고 확신을 했었는데, 나중에 유튜브로 확인해보니 과연 이눔은 살모사 내지는 칠점사의 무늬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었으니 모골이 송연하기 이를데 없었다. 멀리 떨어져서 서서 큰소리로 손짓 발짓 해가며 빨리 지나가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쳐도 한참을 꿈쩍을 않고 있으니 한 오륙분을 뱀과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오히려 소리없이 조용히 있으니 뱀은 슬금슬금 몸을 움직여 낙엽속으로 사라져 갔다. 사라진 낙엽쪽에 돌까지 던져보아서 완전히 지나간 것을 확인한 후 풍치재 다운힐보다 더 재빨리 그곳을 지나쳐 왔다.
내 사지는 이미 뇌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쓸데없이 후덜되며 야단법석을 피고 있었고 올라갈 때 이미 물도 바닥난 상태라 갈증이 심하게 몰려왔다. 누구라도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체면불구하고 남은 물있으면 좀 주고 가시라고 통사정을 할 참이었다. 등에 땀이 흥건한 채 하산 후, 도로 옆 주차장 한켠에 지어진 원두막같은 쉼터에 큰대자로 뻗어버렸다. 즐겨듣던 박창근의 노래를 켜놓은 채 십여분을 널부러져 있었다. 시간은 이미 네시를 향해 가고 있었고, 해지기 전에 집에 가려면 마냥 넋 놓고 쉴 수가 없어 다시 쌍암 읍내로 폐달을 돌렸다. 몇 년 전에 읍내에 씨유 편의점이 생겨서 그지역에 갈때면 그곳을 자주 애용하던터라 1+1하는 이온음료를 사 들고 두 병을 한 자리에서 다 비워버렸다.
그런데 아뿔싸!
라이딩 복장 상의에는 핸드폰이나 작은 간식을 넣을 수 있는 등주머니가 달려있는데, 그 안에 마땅히 있어야 할 물건 하나가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었으니 바로 핸드폰이었다.
사용한지 5년도 넘었고 액정도 군데군데 금이 가 있어서 ‘언제나 바꿀거나’ 하면서 시기를 보고 있기는 하였지만 서도 이런 식으로 손익은 핸드폰을 떠나 보내기는 싫었다.
아이고!! 나는 일 분 고민 끝에 다시금 헬멧의 고리를 채우고 어디 떨어져 있을지 모를 핸드폰을 찾아 왔던 길을 되돌아 가야 했다. 그때 그 순간의 절망감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도중에 소피를 보던 곳에 빠졌을까 아니면 자전거 타고 내려오다가 방지턱 넘으면서 빠졌을까 아니면 주차장 입구에 쉬면서 두고 왔을까 여러 가지 가설을 세우면서 내 눈은 레이더처럼 길바닥을 훑으며 왔던 고개마루를 되짚어 가고 있었다.
내 가설속에는 정답이 있었다. 접치재 주차장 옆 쉼터에 다다를 무렵, 마침 등산 후 쉼을 마치고 일어서는 등산객 한 분과 눈이 딱 마주쳤다. 대뜸 “핸드폰 가지러 오셨어요?”라는 물음이 있었고 다급한 대답이 있었다. “네네!!”
“핸드폰은 있는데 주인이 없길래, 제가 경찰서에 연락해 놨어요. 경찰 오지 말라고 취소해야겠네요”
너무나 친절하게도 인근 경찰서에 누가 핸드폰 두고 갔다고 연락을 취해준 것이었다. 남의 일에 신경쓰기 싫어하는 요즘 세상에 이렇게까지 배려해 주심이 너무도 감사하여 폴더폰 각도로 허리를 구부려 감사 인사를 전했으나 그것으로도 부족한듯하다.
깨지고 벗겨진 핸드폰이나마 기쁘게 챙겨 들고 다시금 돌아가는데 이 길을 오늘 왔다가 갔다가 다시 왔다가 다시 가려니 핸드폰 되찾은 기쁨보다 다시 가야하는 수고에 더 짜증이 났지만 뭐 어쩌겠는가 살다 보면 자주는 아니어도 일 년에 한 두 번 이렇게 혼쭐나게도 나이 먹음을, 낡아짐을, 생생히 또 혹독하게 경험하는 것을...
같은 길을 갔다가 왔다가 다시 되돌아 가다 보니 경찰차 한 대가 접치재 방향으로 오고 있는게 보였으니, 혼자 쓴웃음을 지으며 폐달을 비비고 비비고 할 수 밖에...
다시금 풍치재를 넘어가려고 초입에 들어서는데 몸은 이미 천근 만근이요, 다리는 기름칠 안된 녹슨 기계마냥 마음대로 움직여 지질않았다. 이대로는 도저히 재를 넘어갈 수가 없을뿐더러 재봉틀 밟듯 덜덜거리는 근육은 제대로 걷는 것 조차 버거워졌으니 나는 길 한쪽에 앉아 쉬면서 간식으로 에너지를 보충 하였다. 이 동네에는 아직도 굴뚝에 피어오르는 연기가 구름인양 하늘로 기어올랐고, 가을걷이로 분주했던 논밭에서는 하나 둘씩 노을을 등에 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어르신들이 보이기도 했다. 해가 지려고 하는데 나는 땅으로 꺼!지려고만 하고 자전거를 타기는커녕 끌고 갈 자신도 없었다. 고민 끝에 할 수 없이 남편에게 S.O.S를 치기로 했다. 작년에 섬달천을 가는 길에도 자전거가 펑크 난 바람에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남편 찬스를 써서 돌아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도 어지간히 잔소리를 들은터라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지금으로선 달리 방도가 없는걸 어쩌랴.
전화를 해서 자초지종을 말하고 데릴러 와 줄 것을 부탁 하였는데, 돌아오는 건 알았다는 말 대신 너 미쳤니 하면서 껄껄 웃지는 않고, 돌아올 것도 생각 안하고 대책없이 멀리까지 갔다고 화를 내며 술을 먹어서 못가니 너 알아서 오라며 전화를 끊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럼 그렇지 이 인간이 내 인생에 도움이 될 리가 있나’ 오로지 남의 편만 드는 그래서 남편인 것을 익히 알았으나 평행선만 가는 현실 부부의 진면모를 재확인하는 꼴만 되었다.
주변은 이미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했고 덜컥 겁이나서 피곤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제는 죽으나 사나 자력으로 재를 넘어 귀가하는 수 밖에 없었다. 어둠에 쫓겨 발길이 바빠지니 없던 힘도 솟아나 남편에게 전화하지 말고 그냥 가도 될뻔했겠다는 후회까지 들었다.
요즘같은 환절기에는 밤낮 기온 차가 큰 데다가 내리막을 내달릴 때는 땀흘려 잔뜩 젖은 옷 때문에 뼛속에 바람이 드는 듯 이가 딱딱 마주치기까지 했다.
집에 오니 우리 집 귀염둥이들 두 마리만이 꼬리에 프로펠라 단 듯이 엄마를 반겨주고 남편은 코가 삐둘어진 채 자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는 정호승 시인의 싯구가 떠올랐다. ‘사람도 그리 외로웠으리라’ 연민 한 티스푼 던져주고 서둘러 따뜻한 물에 씻고 나니, 저녁 여덟시가 넘어섰다. 그로부터 일주일간 병원을 다니며 약과 주사로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지만 너무 무리했다는 후회는 안한다.
외국영화 가타카에서 주인공 빈센트는 자신보다 훨씬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동생과의 바다수영 경쟁에서 매번 승리를 한다. 그 비결을 묻는 동생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난 되돌아갈 힘을 남겨두지 않아서 널 이기는거야” 내가 꽂힌 대사이다. 돌아갈걸 염두해 둔다면 최선을 다 할 수가 없다. 그리고 발전도 없다. 나는 종종 무리하게 나를 한계치로 내몰아 스스로를 다그치고 혹사 시킬 때가 있다. 특히 인생이 꼬이는 날이나 잔뜩 화날 때 주로 그렇게 못된 성질을 스스로에게 과시한다. 다른 이를 아프게 하느니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방식이 화도 풀고 나의 발전도 꾀하며 좋은 것 같아서이다. 위험을 감수하다가 여생이 감수하는 수도 있겠다 마는 그 또한 감수하며 살아간다.
아직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남은 날의 나의 도전을 스스로 응원한다. 화이팅!!!
|
첫댓글 대단하시네요. 부럽습니다. 글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