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음의 언어
언어의 경제학
시나 산문이나 문학이나 비문학이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동일하다. 그렇지만 그중에서 시가 시일 수 있는 이유는 언어를 보다 정서적인 측면에서 사용하거나 상상적인 세계를 추구하거나 사전적이고 일상적인 의미를 벗어나 함축적이고 내포적인 2차적 의미의 확대를 꾀하는 것이다. 이것이 시어의 독특한 용법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러시아에서 언어와 시를 연구하던 일련의 학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언어의 근본적인 형식인 운율과 구조를 연구하면서 문학의 문학스러움이나 시의 시다운 근본적인 특징이 바로 언어의 특이한 용법에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들은 문학의 내용, 즉 이념성을 강조하던 시기에 문학성을 언어형식에서 찾고자 했다. 그래서 형식주의라고 했다. 그런데 러시아 형식주의자들로 대표적 이론가는 야곱슨(R Jakobson), 쉬클로프스키(V.Shklovski)였으며 프라그 학파의 무카로브스키(J.Mukarovsky), 코펜하겐의 엘름슬레브(L.Hjelmslrv), 미국의 웰렉(R.Wwllek)등으로 확산되었다.
이들의 기본 입장은 문학성의 발견에 있었다. 그 해결책은 전통적인 대답이나 임시변통의 방식이 아니다. 근본적인 문학성의 본질과 소재에 대한 해병이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심리학에 대한 뿌리는 불신과 함께 모든 외재적 이론들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낭만주의나 상징주의에서 즐겨 쓰는 영감(intuition)이나 상상력(imagination), 또는 천재(genius) 등에 관한 모든 공론도 일소에 붙였다. 독특한 문학성의 소재지를 작가나 독자의 정신 속에서가 아니라 작품 그 자체에서 찾아야만 했다.
이들은 현대시학에서 金科玉條로 여기고 있는 이미지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엇다. 시의 경우에서 비유, 리듬, 독특한 구문, 어려운 낱말 등은 그러한 정신의 절약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정신의 노력을 더욱 강요할 분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산문과 다른 시의 변별성(differentia)을 단순한 이미지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이 사용되는 용법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이미지를 전적으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산문의 이미지와 시의 이미지가 전혀 다름을 듯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들이 말하는 시어의 변별성, 즉 시를 시답게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을 그들은 낮설게 만들기(makes strange)와 전경화(foregrounding) 로 설명한다.
낯익음과 낯설음
쉬클로프스키의 표현을 빌리면 시의 문학성은 시어의 낯설음의 구조에 있다는 것이다. 친숙한 의미의 이미지가 아닌 생소한 충격을 주는 이미지, 뭔가 새롭게 생각하고 느끼도록 활력을 주는 언어의 창조가 바로 낯설음이며 산문과 구별되는 시어의 정수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시어나 산문적인 언어들은 바로 낯설음의 언어가 아니라 낯익음의 언어이고 낯익음의 이미지였고 낯익음의 형식이었다는 말인가. 사실 고자\ᅟᅥᆫ즈의나 낭만주의에서 시에 대한 인식이나 시어의 기능은 효과적인 전달이나 경제적인 묘현이라는 목적에서 설명되었다. 포프(A.Pope)는 시의 재치는 늘 생각하면서도 그처럼 잘 표현할 수 없는 것, 즉 어려운 것을 적절히 표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워즈워드는 낯선 세계를 인간에게 친숙하도록 만드는 기능이라고 했다. 그러나 쉬클로프스키는 언어의 친숙이야말로 가장 비시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처음 바다를 경험하는 사람은 파도가 신기하지만 바닷가에 사는 사람은 파도 소리에 익숙해져서 그들은 그것을 신기하게 듣지 않는다. 이런 사실은 일상적인 언어 생활에서도 언어를 친숙한 일상의 것으로 사용할 때는 감동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으로 듣는다. 산문의 언어들이 그렇다. 늘 사용하는 말은 감동이 없다, 처음엔 감동하지만 차츰 만성이 되어 버린다. 낯익은 사람끼리는 서로 바라보지만(look) ej 이상 서로를 주의 깊게 쳐다보지는(see) 않는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시들어 버려서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단순한 인정뿐’이다 라고 했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면 족하다.'
친숙화는 동일한 사물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 반복되어 습관화되었을 때 조성된다. 지각은 자동화되고 감각은 마비되어 낯익은 사람 사이에는 언어를 생략하고 손짓이나 눈짓으로도 의사를 교환하는 탈언어화 상대가 된다. 지각적인 인식의 언어가 생략될 남은 것은 기호뿐이다.
인간과 사물, 인간과 인간 사이에 기호만 존재하게 될 때 그것은 시의 세계가 아니라 수학이고 과학이고 산문이다. 추상적인 개념과 습관적이거 기계적인 생활만 존재하는 삶이란 이미 창조적 인간이 나니다. 그것은 기계나 동물이나 다를 바 없는 비인간화의 무의미한 세계일뿐이다.
(1)
달 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 달
어디어디 떴나
남산 위에 떴지
(2)
당신은 짐승, 별, 내 손가락 끝
뜨겁게 타오르는 정적
외로운 사람들이 따라오는 꽃씨
외로운 사람들의 죽음
순간과 머나먼 곳.
異邦의 말이 고요하게 시작됩니다
당신의 살갗 밑으로 大地는 흐릅니다
당신이 나타나면 한 개의 물고기 비늘처럼
무지개 그으며 내가 떨어질 테지만
-이성복 「당신은 짐승,별」
(1) 동요에서 ‘쟁반같이 둥근 달’이란 말은 수사학적으로 보면 직유법의 구절이다. 그러나 쟁반이나 둥근 달이란 말은 익숙한 말이다. 아예 복합어로 인정해도 무방할 만큼 굳어버린 일상적인 말이다. 여기서 일상적이니 익숙하니 하는 말은 너무 평범하게 사용되기 때문에 시나브로 나오는 자동화의 언어다. 남산이란 말도 그렇다. 이 말은 서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 사는 고장이면 다 남산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장은 어린이들에게 교육적 가치는 있겟지만 쟁반이나 남산이란 말이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줄 수는 없다.
(2)의 당신에 대한 표현이 구절마다 새롭고 낯설다. 당신은 짐승, 별, 손가락 끝, 정적, 꽃씨, 죽은, 머나먼 곳 등으로 전혀 상식적인 상상을 비약하여 충격적이다.
따라서 예술가가 대항하고 투쟁해야 할 것은 바로 일상과 습관과 인일과 매너리즘의 권태다. 대상을 습관젃인 문맥에서 뜯어내고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들과 함께 묶음으로써 시인은 ‘상투적 표현과 거기에 따르는 기계적인 반응(stock response)에 치명적인 일격(coup degrace)을 가해서 대상의 감각적인 결(texture)을 고양된 상태에서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시의 언어는 바로 일상적인 낯익음의 용법을 배제하고 낯선 용법을 창조하여 지각의 신선함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시적 자유이고 해방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교수님.
우교수님 윗글 잘 읽었습니다. 시를 쓸수록 어렵다고 느껴집니다. 밑천이 거들 난 걸 까요?
우교수님 덕분에
공부 많이 하고 있습니다
감사드려요!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상투적인 언어를 쓰지 말고 낯설게 쓰라는 말 지적 받으면서도
그 낯설게 쓰기가 너무 어려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