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이 할배 추억 나들이-초가집 세대
김 영 길
내 나이는 아흔 살 어린이들을 남달리 사랑하는 늙은이 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 하는 시간이 있으면 참 좋고 행복 합니다.
부모님들 지나친 욕심 때문에 공부와 학원의 노예가 되어 자신들의 시간을 빼앗긴 채 살아가는 오늘 날 아이들의 안타까운 모습들을 보면서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비록 가난하고 힘들게 살면서도 오늘 날 아이들처럼 공부에 매달리지 않고 자신들의 시간을 가지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공부는커녕 먹고 살기에도 바빠 일만 하던 우리들, 그럼에도 일본의 압박과 광복의 혼란, 6.25 전쟁을 이겨내고 조국 대한민국을 세계가 인정하는 경제대국, 문화강국으로 발전시킨 주역들이였다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 아이들에게 나의 어린 시절 추억들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어린이 여러분! 나와 함께 할아버지 세대들 어린 시절로 추억나들이 시간여행을 떠나보지 않을래요.
(1) 초가집 세대
먼저 우리 할아버지들은 어린 시절 ‘어떤 집에서 살았을까’ 라는 궁금함부터 풀어볼까요?
내 나이가 열 살 때, 그르니까 80년 전이네요. 그 때 우리나라는 일본의 지배를 받던 식민지 국가로 세계지도에 일본과 한 나라였고, 우리나라는 이름도 없었답니다. 그러니까 우리민족은 나라 없는 민족으로 말과 글도 빼앗기고 일본 말, 일본 글을 배우고 쓰면서 살았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지고, 우리나라가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 난 것이 내 나이 열 살 때였고, 대한민국 정부를 세우고 국제연합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이 열세 살 때인 1948년 8월 15일 이였습니다.
그 때 내가 살던 마을이 스무 집 정도가 사는 작은 농촌 마을인데 모든 집이 초가집이 였어요. 집과 집 사이에 돌로 담을 싸고, 사람들이 생활하는 본채와 소를 먹이는 마구간, 창고 방앗간 등이 있는 아래채, 본채와 멀리 떨어져 있는 변소, 쓰레기 등을 모우는 퇴비장, 개집과 닭장 등을 갖추고 과일 나무로 감나무는 어느 집에나 다 있고 간혹 살구나무, 석류나무 등이 있는 집도 있었습니다.
위에 적은 기본 시설 등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지요.
초가집은 3칸 집이 대부분이고 4칸, 5칸 집은 부자들이 살았어요. 3칸 집은 방이 둘에 부엌 하나이고, 4칸은 마루가 하나 더 있었어요.
내가 살던 집도 3칸 집이였는데 방들이 너무 작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작은 방은 배틀, 가마니틀, 곡식 가마니 등을 들여 놓고 부모님들이 일 하는 장소로 쓰였고요. 잠자고 밥 먹는 등 생활은 큰 방에서 했는데 옷장 이불장 등을 놓고 부모님과 5남매 일곱 식구가 누우면 몸을 움직이기조차 힘들 정도로 좁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부엌에는 밥솥 국솥 아궁이가 둘, 음식을 조리하는 부뚜막, 그릇을 놓아두는 찬장, 물을 길러 담아두는 물두멍, 쓰고 남은 물을 모아두는 구정물통, 땔감을 놓고 나면 한 사람이 드나들기에도 비좁았어요, 땔감 나무로 불을 지펴 음식을 만들었으니 연기에 그을려 천장과 벽이 온통 새까맣게 되었답니다. 처마가 짧아서 뜰이 좁아 신발을 벗어 놓으면 뜰이 가득하고 비가 오면 신발을 방에 들어 놓았던 기억이 나요.
동생들이 자라 몸집이 커지면서 한 방에서 생활하기가 힘들어 마구간 옆에 방을 한 칸 더 만들어 막내 여동생은 부모님과 함께 지내고, 네 형제는 새로운 방에서 생활하게 되어 마음대로 딩굴며 좋아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마구간은 소를 기르는 곳으로 소죽을 주는 구유가 있고 소가 쉬고 잠자는 곳이지요. 소는 논밭 다음으로 귀중한 자산이기도 하고 논밭을 갈아 농사짓는데, 소달구지를 끄는데, 무거운 물건을 옮기는데 등 없어서는 안 되는 가족처럼 귀중한 가축입니다.
농사를 많이 짓는 부잣집은 황소를 길렀지만 대부분의 집에서는 암소를 키워 송아지를 낳으면 키워서 팔아 살림에 보태고, 소를 살 형편이 안 되는 집에 맡겨 큰 소로 키워 송아지를 낳으면 낳은 송아지를 키워준 대사로 주고 맡긴 소는 받아와 팔아서 재산에 보태었답니다. 소는 풀을 먹고 자라기 때문에 봄, 여름, 가을은 아이들이 산이나 들로 소를 몰고 가서 풀을 뜯게 하고, 겨울철은 볏집이나 말려 둔 풀로 쇠죽을 끓여 먹여 키웠지요.
방앗간은 벼를 찧어 쌀로 만들고, 밀을 빻아 밀가루로 만드는 등을 하는데 쓰지만 집집마다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이웃집들이 함께 이용했답니다. 방앗간은 소나 말의 힘을 빌려 돌리는 연자방아와 물의 힘으로 돌리는 물레방아가 있지만 한 동네 또는 몇몇 동네에 한 곳 씩 있었습니다.
변소는 통시 또는 뒷간이라고도 불렀는데 생활하는 방과는 가능한 한 거리를 두고 있었어요. 대변과 소변을 보는 곳으로 변소 안은 구더기와 똥파리가 우걸거리고, 심한 냄새가 나는 등 불결하기 짝이 없는 곳이였지요. 세수하고 목욕하는 오늘 날 화장실과 비교하면 참 살기 좋은 세상에서 산다는 생각을 하게 된답니다.
대 소변이 차오르면 변소 안에 비치해 둔 똥통에 퍼서 퇴비장에 뿌려 퇴비가 잘 썩게 하는 데 쓰고, 논밭에 뿌려서 곡식이 잘 자라게 하는 거름으로 썼답니다.
닭장은 닭을 기르는 곳 이지요. 닭은 낮에는 마당에 풀어 놓아서 풀을 뜯어 먹거나 벌레를 잡아먹고 자라게 하고 해가 지면 닭들 스스로 닭장으로 들어가 잠을 자는 곳 이지요. 닭도 재산을 늘리는 수단으로 썼는데 암탉은 알을 낳아 시장에 팔기도 하고, 병아리로 부화시켜 기르게 하여 큰 닭이 되면 시장에 팔아 살림에 보탬이 되었지요. 수탉은 키워 시장에 팔기도 하지만, 제삿날 제사상에 올리기도 하고 닭을 잡아 가마솥에 닭개장을 끓여 온 식구가 몸보신을 했답니다.
개집은 구석진 곳에 지어서 개를 키웠는데 오늘 날처럼 개를 애완견으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 도둑을 지키게 하고, 키워서 개장수에게 팔아 살림에 보태는가 하면 부모님 회갑잔치 날이나 자녀들 결혼식 날 잡아서 개장국을 끓여서 동네 사람들이나 손님들 접대하는 데에 썼지요.
따라서 오늘 날 애완견처럼 작은 개는 없었고 덩치가 큰 개 들 이였어요. 개를 음식으로 못 먹게 하는 요즘 세상, 개를 가족처럼 함께 하며 사는 것을 보면 세상이 많이 변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퇴비장은 거름자리라고도 하는데 집 한 켠 담에 붙여서 쓰레기나 마구간의 오물, 닭똥 개똥이나 생활 쓰레기 등을 모우고 여름철에 풀을 베어 함께 섞어서 퇴비를 만들고, 낮에는 소를 매어 쉬게도 하면서 거름을 썩게 하는 데 쓰기도 하였습니다. 퇴비장 거름의 양은 농사짓는 양을 말 해 주는 잣대가 되기도 하였는데 거름이 많을수록 부자 이었답니다. 1년에 몇 번씩 변소 펀 똥물을 퍼 붓고 뒤집어 잘 썩게 만들어 논밭에 뿌렸습니다.
감나무는 어느 집에나 한 두 그루씩 있었는데 귀중한 과일나무 였고 감나무에 대한 추억도 많아요. 이른 봄 감꽃이 피면 아이들은 감꽃을 주워 먹고 보릿고개의 굶주린 배를 채웠지요. 감꽃은 달콤하고 맛도 있어서 더 많이 주으려고 새벽잠을 설치고 일어나 감꽃을 주운 생각이 나네요. 여름철에는 풋감을 따서 먹기도 하고 떨어진 홍시는 좋은 군것질 감이었어요. 가을에 감이 누렇게 익으면 곳감을 깎아 말려서 제사상에 올리고 감말랭이를 만들어 긴긴 겨울 밤 군것질 거리로 삼는 등 감은 1년 내내 기쁨을 주는 귀중한 과일이였답니다.
꼬끼오! 새벽닭이 세 번째 웁니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았는데 아버지는 쇠죽을 끓이고, 어머니는 아침 밥 준비를 합니다. 쇠죽솥에 김이 오르면 아버지는 뒷간으로 가서 똥장구니에 똥물을 퍼 담아 뒷들 논밭으로 가지고 가서 뿌립니다.
맡아들 영식이는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씁니다. 닭똥, 개똥에 낙엽 등을 쓸어 모으면 둘째 영수도 나와서 형을 도와 쓸어 모은 찌꺼기를 퇴비장으로 옮깁니다.
“영철이 영민아, 세수하러 갈 시간이다.”
영순이는 영식이가 업고 5남매는 냇가로 달려갑니다.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바닥에서 깨끗한 모래 한줌씩을 집어 양치질을 합니다. 그 때는 칫솔이나 치약 같은 것은 없었으니까요. 시냇물에 세수하고 머리 감고 소매 자락으로 쓱쓱 얼굴을 문지르고는 집으로 달려옵니다. 잡곡밥에 풋나물 된장찌개로 비빈 아침밥이 꿀맛입니다.
오늘은 이만하고 다음에는 ‘보릿고개’ 세대에 대한 추억 나들이를 떠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