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이 노랗게 변하고 있다. 초록빛과 뒤섞였던 노랑이 점점 더 넓게, 그리고 더 강하게 번져 간다. 허리가
부러질 듯 잔뜩 이삭을 맺은 벼가 늦은 오후 햇살에 출렁인다.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도 이런 풍경을 만날 수 있다. 가을은 사람의 걸음을 자꾸만 밖으로 불러내려는 모양이다. 그렇게 찾아간 작은 포구는 외지인들로 분주했던 여름 한철을 보내고 나름의 방식으로 열매를 거둬들이고 있었다. 그렇게 한적함을 내밀고 있었다. 느림에는 전염성이 있다. 놀라울 정도로 천천히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지나는 두 노인을 봤다. 느린 자전거 바퀴에 사로잡혀 걸음도 느려지고 눈동자도 느려지며 숨까지 느려지는 것 같았다. 속도와 경쟁, 세상에 그런 단어가 있었나 싶어졌다. 따지고 보면 바삐 움직이는 사람이야말로 게으른 사람 아닌가. 부지런한 사람이 그렇게 바삐 걸을 이유가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멀리 가지 않아도 서해의 해넘이 빛을 받고 나이 들어온 송월동에 그런 풍경이 있다. 저마다 담 아래에 화분을 내놓고 키우는 오래된 가옥들이 유난히 많은 동네이다.
#그는 옛 노래를 간직한다 음악에 관한 물건들을 차곡차곡 쌓아 온 이들이 있다. 오랫동안, 그리고 느리게 나름의 화분을 담 아래에 키우고 있는 것이다. 태어난 곳보다 인천에서 훨씬 긴 삶을 이어온 김점도(1935년생)선생도 그런 사람이다. 군악대에서 악기를 연주했고, 그 또래의 많은 연주인들처럼 미군을 위한 무대에서 활동했다. 그러면서 1970년대부터 인천을 또 다른 고향으로 삼았고, 인천에 대한 노래도 여럿 작곡했다. 오래된 것에는 새로운 것이 아직 지니지 못한 가치가 있다. 음악자료를 국가가 정책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정리하는 작업은 이제 막 시작되는 단계이다. 그렇지 않았던 긴 시간 동안은 사명감을 지닌 개인들이 그 역할을 대신해야만 했다. 김점도 선생은 각종 가요음반과 자료들을 수집해 왔다. 그리고 1998년, 인천에 한국가요사박물관을 차리면서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오로지 한 사람이 맺은 열매였고, 미래의 씨앗이었다. 비록 지금은 그동안 거둬들인 이삭들을 다른 곳에 옮겨두긴 했으나, 지금도 인천에서 실버그린악단을 이끌면서 나름의 방식으로 제2의 고향에 음악소리가 울리도록 노력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한국인은 새로운 물건을 유별나게 좋아한다. 독일에서 공부하다가 돌아온 지인이 지하철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무선호출기를 가지고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랐던 것이 1990년대이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가 휴대전화를 들고 다닌다. 그것은 마치 무기처럼 됐다. 휴대전화가 없으면 무기 없이 전장에 버려진 병사처럼 불안해한다. 심지어 과기능 휴대전화도 많아졌다. 덕분에 24시간 내내 일과 직장에 연결된 채 살아야 한다. 24시간 내내 놀거리를 찾아야 하는 이도 있겠지만 말이다. 필수적이지 않은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들이 이 사회에는 참 많다.
#젊은이는 새로운 소리를 찾는다 반면 누군가에게 새롭지만 쓸모없어 보이는 것을 새로운 음악의 도구로 되살리는 이들이 있다. 마치 소음과 같은 소리를 통해 실험적이고 학구적이기까지 한 음악으로 만들어 낸 것을 노이즈 음악(Noise Music)이라 한다. 처음에는 이상한 물건을 가지고 놀다보니 시끄럽고 괴상한 소리가 생겨났고, 이웃들은 그 소리에 괴로워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점점 많은 이들이 그 소음에 빠져들게 된다. 젊은 음악가 박다함은 1986년에 인천 구월동에서 태어났다. ‘록캠프’에서 공연을 보기도 했던 그는 현재 노이즈 뮤지션으로, 그리고 공연기획자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여전히 연수구에서 살고 있다. 박다함은 외국인 친구가 붙여 준 예명으로 본명은 박승준이다. 받다함에서 ‘다함’은 ‘다 하다’의 뜻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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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부터 한국에 실험음악과 즉흥음악을 전파해 온 집단인 불가사리(Bulgasari)와 릴레이(Relay)와 활한 이 청년은 플리커 비긴스(The Flicker Begins)라는 프로젝트에서 실험음악을 시도하다가 자신에게 영감을 준 한국의 아티스트들인 아스트로노이즈(Astronoise)의 최준용·홍철기 등과 함께 ‘불길한 저음’을 만들어 괴상한 음악을 전파하게 된다.
또한 그는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도 지역음악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불길한 저음과 함께 동인천의 대안공간 ‘스페이스빔’을 매개로 인천에서 공연을 펼치기도 한다. ‘인천 배다리 문화축전’이라는 이름으로 도시의 골목을 뒤흔들어 놓은 적도 있다. 또한 독립 다큐멘터리 ‘뉴타운컬쳐파티’의 조연출로 영화 제작에도 참여하고 있다. 재개발의 문제와 독립음악인들의 상황 그리고 그 둘의 연대와 문제의 공유를 기록한 영화이다. 도시와 음악의 밝은 면만을 보고 사는 것은 불행하게도 낮뿐인 하루를 사는 셈이다. 혼자 차려 먹는 밥상과 누군가 차려 주는 밥상의 온기는 다르다. 이 사회에는 서로에게 밥상을 차려주는 사람이 더 많아져야 한다.
# 가을과 노을은 또 하나의 시작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쓸모 때문에 쓸모없어진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지만 요즘은 정말 사서 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 그대로를 사랑하고 반성하고 미워하고 실망하며 살아갈 줄 알고, 그것을 받아들일 때 아마도 쓸모가 있을 것이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삶이 있는 곳이 삶터이고, 삶터에서 새로운 삶이 피어난다. 음악 역시 그러하다. 오로지 잘 팔리고 경쟁력이 있는 것만을 살려두려는 시대에 각자의 방식으로 옛 음악을 간직하고 새 음악을 실험하는 이들이 있어줘야 한다. 이 도시에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 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일까. 세상은 음악인과 예술가에 모종의 천재상을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베토벤의 교향곡 ‘합창’의 친필 악보는 고친 흔적들로 그득하다. 또 일찍 시작해야만 할 수 있을까. 예수님과 알렉산더는 서른셋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많은 것을 이뤘다. 서른여섯 생일 전에 생을 마감한 모차르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대중음악의 역사를 새로 쓴 지미 헨드릭스와 짐 모리슨 그리고 제니스 조플린, 또한 커트 코베인도 서른을 넘기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사례들이 더 많다. 고흐는 앞서 말한 음악인들이 죽은 나
이인 27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소포클레스는 75세에 ‘오이디푸스왕’을 썼으며, 괴테는 81세에야 ‘파우스트’를 완성했다. 엥그르가 ‘터키탕’을 그린 건 82세 때이다. 세잔과 하이든도 모두 노년에 명작을 남겼다. 빠른 성공보다 잘 늙어 가기가 더 중요하다. 도시 곳곳에 그렇게 새로운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하늘이 아름다운 계절, 만약 가을에게 다른 이름이 붙여졌다면 아마도 그것은 노을이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가을과 노을은 또 다른 세계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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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부활의 노래에.. 이문세의 감성에 빠져살던 소녀가 추억에 애절해하는 나이든 아줌마가 된 현실..
그래도 늘 음악은 내가슴에~~♥
딥퍼플의 존로드 님은 세월과 함께 가셨지만....지금 그분의 음악을 인뺀협카페에서 배경음악으로 듣고 있으니...음악은 늘 가슴에 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