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고 싶은 애굽 (이사야 31:1~9)
불과 풀무.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것. 하나님께서 구상해놓으신 시온, 예루살렘이란 것은 하나님 본인의 능력에 의해 세워진다. 왜? 우리 마음이 시온과 예루살렘에 있지 않고 마음이 콩밭에 가있다. 소박한 우리만의 인생의 기쁨이 따로 있다. 우리만의 시온, 예루살렘
하나님이 만드신 예루살렘에 관심없는 것이 인간의 실상.
1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 도움을 구하러 갈까? 만약 3억이 필요하다면? 돈이 있는 사람한테 갈 것. 그 당시 애굽이 도움을 청할 만한 경제력, 군사력이 있었기 때문.
말 병거 마병 군사력과 재력을 갖춘 이웃을 옆에 두시고 나서 하시는 말씀이 ‘애굽으로 가지 말라’
이 말씀을 가지고 창세기로... 에덴 동산을 창조하시고 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고 먹지 말라. 문제는 먹음직 보암직 탐스러움. 또 먹지말라고 하신 말씀이 진심이라면, 하나님 뜻이라면 저 구석에 갖다놓으면 좋을뻔했는데 동산 중앙에.
문경 사과농장. 입구에 전기철망. 도처에 cctv. 사과를 훔쳐가지 말라는 뜻. 하나님이 정말 선악과를 먹지 못할 요량이셨다면 아무튼 먹지 못하게 하셨어야 되는데 너무나 접근이 용이한 동산중앙, 너무나 예쁘고 탐스럽게 심어두신 것. 선악과 먹지말라는 말씀을 인간들은 맘속에 담아둘 수 없었다.
마치 그것처럼 지금의 선악과는 애굽. 우리 모두가 다 마찬가지. 선악과 보면 먹고싶고, 애굽에 도움 요청, 잘 사는 친구 있으면 도움받고 싶고. 그것이 우리 본성. 자신을 위해서.
따라서 우리 맘속에 하나님 말씀 담아둘 상태가 아니다. 솔직히 우리 마음은 하나님 말씀보다 가십, 드라마에 있다.
3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가 의지하는 것들을 풀무불로 없애버린다.
4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왔다 할지라도... 이와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
하나님이 택하신 자기 백성을 놓치지 않으신다. 사자가 먹이를 놓치지 않는 것처럼. 반드시 자기 백성 내부의 못된 요소를 제거하고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우신다.
5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뛰어넘어 구원하리라
6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심히 거역하던 자에게로 돌아오라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을 거역하게 되어있다. 하나님 말씀과 맞지 않다. 우리는 말씀이 즐겁지 않고 다른게 즐겁다. 거역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 거역을 들춰내시며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 우리는 불평 원망 본성을 드러내는데 그런 과정에서 주님은 굴하지 않고 당신의 일을 하신다.
7 너희가 자기 손으로 만들어 범죄한 은 우상, 금 우상을 그 날에는 각 사람이 던져 버릴 것이며. 우리 내부의 탐심을 하나님께서 친히 제거
빌3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우리에게 유익하던 것- 돈, 애굽.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가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웠기 때문에 유익한 것. 이 세상살이에 필요한 모든 것들. 그 유익하던 것들, 돈 명예 세상 권세 자잘한 이익들, 건강. 그 유익하던 모든 것들을 다 해로 여긴다.
8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사실은 사도가 말한 배설물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귀한 보물. 따라서 우리 자체적으로는 유익하던 것, 이 땅에서 보기에 좋은 것들을 스스로 버릴 수 없다. 이 땅 쾌락 스스로 못버림. 주님께서 풀무가 되어서, 불이 되어서 친히 우리 가운데 이런 일들을 행하신다. 그 모델은 예수님
아담은 실패했지만 예수님은 실패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그대로 순종. 아담과 하와는 순종하지 않고 그 말을 버렸지만. 그 말씀대로 순종하면 돌로 떡을 만들라, 뛰어내려보라.. 이 땅에서 유익했던 것들을 다 버린다. 심지어 목숨까지. 인간에게 제일 유익한 것 목숨.
내 목숨에 기반을 두고 모든 쾌락 추구. 그런데 예수께서는 죽는데까지 순종. 그 예수께서 우리의 모델. 하나님께서 불, 풀무가 되어 자기 백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판에 집어 넣으신 것. 그래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틀 속으로 끌려들어간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유익하던 것들을 뱉어내고 전에는 좋았던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절차로 들어가게 된다.
사람이 만들어내는 과정 아니라 주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패턴 속으로 성도를 집어넣음으로 마지막에 생산되는 존재들이 예수님과 동일한 예수의 지체가 되는 자들.
스데반 집사처럼 죽을 줄 알면서도 말씀 전함. 주님께서 본인이 걸어가신 노정 그대로 당신의 백성을 따라오게 하신다. 용광로 쇠물을 녹여 틀을 따라 흘러가게 하면 새로운 형태가 나오듯.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불, 풀무가 되어 예수님 순종한 길로 우리를 인도.
그런 과정에 들어가면 어쩔수 없이 우리 속에 고백되는 것. 전에 유익하던 것들을 다 해로 여긴다. 주님께서 우리 속을 털어내시고 그 속에 순종하는 예수... 그 예표가 백부장 같은 사람들.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 그 말씀만으로 충분. 거기에 철조망 놓고 전기 흐르게 하는 과정 필요없이 말씀만으로 된다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틀 속에 들어와 만들어지는 자들.
말씀이 살아있어 우리를 잡아채서 끌고갈 때 그런 일이 벌어진다. 밖에 있는 말을 지키는 게 아니고 말씀이 우리 멱살을 잡고 예수 가신 길로 끌고간다. 거기서 불과 풀무 거치면서 생산되는 것이 정결한 시온, 주님이 거하실 수 있는 예루살렘.
우리가 애굽이 좋고 세상이 좋고 선악과 먹음직하고 우리 멋대로 살아가지만 이미 부활하신 예수께서 새가 새끼를 보호하듯 우리를 끌고 당신이 가신 길로.. 그 과정 속에서 세상 유익 기대 빠져나가고 예수 말씀 채워진다. 그런 과정 통해 은혜의 고백.
그 끌려감 속에 우리 심령 가운데 신선한 기쁨들. 내 뜻이 깨지고 다른 분의 뜻이 내 인생을 주관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오히려 안도. 내 머릿속 인생은 시원치 않다. 그러나 주님께서 내 인생을 끌고 있다는 사실이 새로운 자유.
우리는 애굽 군사력을 보고 거기 기대보고자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 역시 이 세상 재물, 눈에 보이는 사람 의지. 그러나 우리 마음 속 탐심들이 여호와의 불에 의해 소각되어지고, 여호와 풀무에 의해 녹아지며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십자가 여정으로 끌려감을 감사. 우리가 계획한 길이 무너지고 주님의 계획이 다가올 때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심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