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의 성은 이씨요, 본관은 진성眞誠이다. 이름은 해瀣요, 자는 경명景明 호號는 온계溫溪로서 세상에서 온계선생 이라고 했다. 스스로 온계를 자호로 삼은 것은 선생이 거한 곳이 온계리이고, 또 이 마을 서쪽에 있는 소계에는 항상 맑은 물이 흐르고 있고, 이 물이 겨울에는 얼지 않기 때문에 온계라고 해서 선생이 온계라 자호하셨다.
선생은 퇴계선생의 넷째 중형이요, 퇴계는 선생의 끝 동생이다. 선생의 육형제중 온계선생과 퇴계선생은 가장 훌륭하시어 이 형제를 금곤옥제金昆玉弟 이니, 금곤옥우金昆玉友 이니해서 온계, 퇴계선생을 같이 높이 평가해 온 것은 널리 세상에 알려진 사실이다.
선생의 선계先系는 여말에 진보현리를 지낸 진사 이석을 시조로 삼는다. 진사공은 은덕이 있는 분으로 子 송안군 자수의 귀貴로서 봉익대부 밀직사로 추봉되었기 때문에 밀직사공으로 불리우고 있다. 자수는 과거에 급제하여, 판전의사라는 관직에 올랐으며 통헌대부의 품계에 이르렀다. 공민왕 때에 홍건적을 토벌한 공으로 안사공신에 녹훈되고 송안군에 봉해졌다.
송안군이 처음 진보에서 안동 마애로 이거하였다가 주촌으로 다시 이주하였다. 송안군의 子는 운후이며 군기시부정을 지냈다. 증손 우의 귀로 통훈대부 사직시정으로 추증되었다. 이 분이 바로 온계선생의 고조이며 고조비는 감찰 증좌의정 권희정의 따님이며 문하시랑 용일의 손녀이니 권태사의 후이다. 증조는 정이다. 음직으로 중직대부 선산부사를 지냈으며 손자 우의 귀로 통정대부 병조참의로 추증되었고 다시 증손 황의 귀로 가선대부 호조참의겸 동지의금부사가 되었다. 선산부사가 되기 전에 영변판관으로 약산성을 개척하였고 청렴 검약한 관리로서 이름이 높았다. 증조비는 평산 부사를 지낸 김정의 따님이다. 이 분이 三子를 두었는데 장자는 우양이니 현감이고 차자는 흥양으로 참군을 지냈으며 삼자는 계양이니 이 분이 선생의 조부 되는 분이다. 활정하고 은조가 있는 분이며 진사로서 그쳤다. 차자 우의 귀로 가선대부병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가 다시 손 황의 귀로 자헌대부 이조판서겸 지의겸부사로 추증되었다. 조비는 사직 김유용의 따님이다. 조부 판서공이 안동에서 예안현 온계리로 이거하였으니 말하자면 예안 입향 시조이다. 이 분이 형제를 두었으니 장자는 식이니 진사공이요, 차자는 우이니 호조참판 송재공이다. 진사공이 선생의 부친이니 처음 온계선생의 귀로 해서 가선대부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가 다시 퇴계선생의 귀로 해서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겸 판의금부사로 추증되었다. 진사공은 의지도 강하고 근학했으나 진사시에 합격한 후 조졸早卒했기 때문에 행직을 가지지 못했다. 모친은 초취에 의성김씨 정랑 한철의 따님이었고 재취는 춘천박씨 사정 치의 따님이다. 선생은 춘천박씨의 소생이다. 당시 숙부 송재공이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호조참판에 올랐으며 문명이 또한 높았으므로 이때부터 선생의 가문은 크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가문에서 선생은 연산군2년 병진년(서기 1496년) 예안현 온계리에서 육 형제 중 4남으로 태어났다. 퇴계선생이 찬한 선생의 묘지에 의하면 선생은 어려서부터 매우 모양이 뛰어나고 아름다웠으며 보통 아이들보다 뛰어나서 부군 찬성공이 특히 사랑했다고 되어있다. 선생 6세시에 아우인 퇴계선생이 태어나고 6세 되던 해에 부친 찬성공이 조졸했으므로 온계, 퇴계선생 등 6형제가 모두 고아가 되었으며 편모의 양호와 숙부 송재 선생의 훈계를 받아가면서 성장했다. 6형제 중 온계, 퇴계 두 선생은 특히 뛰어났다. 선생은 8세 때부터 송재 선생에게 수학했으며 선생과 퇴계선생은 뜻이 같고(志同) 도학이 같아서(道合) 어려서부터 성현의 학에 뜻을 두었으며 형제가 같이 정려 면학하여 송재 선생이 이 형제에게 크게 장래를 기대했으므로 금곤옥우라는 칭찬을 받았다. 12세 되는 해는 중종 2년 정묘(서기 1507)년인데 이때 송재 선생이 진주목사로 있어서 선생은 중형 훈도공 하와 같이 진주 월아산 청곡사에서 공부를 했다.(註 : 온계선생 연보에 의하면 선생이 12세 때인 정묘년(1507)에 훈도공 河와 송재공이 진주 목사로 출임할 때 따라가서 청곡사에서 독서 했다고 기록이 되어있고, 퇴계집 별집 권1 ‘과청곡사過靑谷寺’ 시詩의 서敍에는 정묘 년간에 家兄 의, 해가 고유孤幼로 숙부를 따라서 이 절에서 독서했는데 27년 전의 일이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훈도공 河는 1482년생이니 정묘년에는 이미 나이 26세이고 충순위공 의는 선생보다 두 살 위로 1494년생이므로 정묘년에는 14세가 된다. 따라서 훈도공이라기 보다는 온계선생의 바로 윗형인 충순위공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생각한다.<편집자 주>)그 후 퇴계선생이 청곡사를 지나면서 다음과 같은 시 한수를 남겼다.
金山道上晩逢雨
靑谷寺前寒瀉泉
爲是雪泥鴻亦處
存亡離合一?然
17세 때 선생은 퇴계선생과 같이 송재 선생한테 글을 배웠다. 숙부 송재 선생은 항상 말하기를 형님은 이러한 아들 형제를 두었으니 참으로 후광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18세 때 조효연 오언의 등과같이 청량산에 가서 공부 했으며 이해에 연안김씨 가인의 부흥의 따님을 맞아 결혼했고 이듬해에는 용수사에서 공부했다. 22세 때에 모재 김안국선생이 경상감사가 되어 부임할 때 송재 선생의 집에 들렀다. 이때 온계 퇴계 형제를 불러보시고 찬성공의 자를 부르면서 모는 이런 형제를 두었으니 헛되게 죽지 않았다고 말하고 책과 식량을 많이 주어서 청량산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이해에 숙부 송재 선생이 돌아가셨다. 29세 때에 아우 퇴계선생, 종제 수령, 질 인, 민귀서, 정효종, 손정, 김사문, 민기원 등과 같이 용수사에서 월하시회를 열어 즐겼고 이해 8월에 향시에 합격했다. 30세 되던 을유년 중종 20년(서기 1525)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31세 때 성균관에서 공부했으며 2년 후인 33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 승문원 권지정자로 선임되고 이듬해에 부정자로 승임된 후 선생이 두루 역임한 관직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35세 3월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 4월 승陞 통사랑 6월 승의부위 의흥위사용
36세 정월 승시교 윤유월 승무공랑봉교
37세 12월 승 선무랑
38세 정월 성균관전적겸 남학교수. 2월 세자시강원사서. 사간원정언. 3월 승 선교랑. 4월 겸춘추관기사관. 5월 성균관전적. 사간원정언 겸춘추관기사관. 9월 승훈랑이조좌랑.
39세 윤2월 겸승문원교검. 4월 승봉훈랑
40세 3월 승 봉직랑. 10월 현신교위 호분위사과 성균관전적(불부不赴)
41세 정월 공조정랑겸 승문원교리. 2월 이조정랑겸 승문원 교리. 3월 겸세자시강원문학. 5월 염관북도 복명. 겸 승문원 교리 춘추관 기사관. 6월 의정부검상.
42세 4월 조봉대부. 승 의정부사인겸 춘추관편수관 승정원교감 세자시강원문학. 7월 일본사신 선무사. 9월 홍문관응교겸 경연시강관 춘추관편수관 승문원교감.
44세 12월 복관. 조산대부 의정부사인겸 춘추관편수관 승문원교감(불부不赴).
45세 2월 봉렬대부 홍문관전한 지제교겸 경연시강관 춘추관편수관 승정원참교수. 봉정대부. 6월 사간원사간겸 승문원참교 제용감정 겸직여고. 7월 사복시정 겸직여고. 11월 수중훈대부.
46세 3월 사헌부집의 겸직여고. 4월 종친부전첨典籤겸 승문원교감. 7월 사복시정겸 승문원참교. 11월 종부시 검정 겸 홍문관전한 지제교 겸 경연시강관 춘추지편수관 승문원참교직제학 겸.
47세 정월 경상도 진휼어사, 윤5월 통정대부 승문원 동부승지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10월 좌부승지겸직여고.
48세 도승지 겸 경연찬참관 춘추관수찬관 예문관직제학 내의원제조. 7월 절충장군충무위상호군겸 오위장.
49세 정월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2월 검지중추부사 동지중추부사. 4월 충무위대호군. 5월 동지중추부사. 6월 사간원대사간. 10월 충무위상호군겸 오위장. 12월 예조참판. 사헌부 대사헌.
50세 윤정월 동지중추부사. 3월 충무위상호군. 5월 성절상사 부경赴京.
51세 3월 충무위상호군. 장악원판결사.
52세 황해도 관찰사
53세 동지중추부사 겸 동지춘추관사. 7월 오위도총부부총관. 9월 한성부우윤 겸 동지춘추관사. 10월 충청도 관찰사.
54세 12월 동지중추부사.
55세 4월 겸 동지춘추관사. 6월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복배 한성부우윤.
선생의 연보에 의하면 선생은 입조 20여년(33세~55세, 중종 23~명종 5년)동안에 종9품직에서 종2품직에 올랐으며 요직중의 요직인 이조정랑, 도승지, 문한직 등 내외 요직을 역임하였으니 선생의 환로는 매우 잘 열려졌으나 불행하게도 이기 윤원형 일당의 간독한 모함을 받아 그 높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사헌 한성우윤 등에서 끝나고 55세로 적지謫地의 노상에서 일생을 마친 것은 참으로 애석하고 통탄할 일이다.
2. 선생의 충효정신
선생의 충효정신은 선생의 가학에서 내려 받은 것이다. 진성이씨는 세칭 삼한갑족이라는 구족舊族은 아니나 시조 이후 누대 세록지가로서 입이효立而孝, 출이충出而忠의 가풍 속에서 선생이 자랐기 때문에 선생은 태어남으로서 유염환경하濡染環境下에 있었고 또 선생의 천품이 또한 온아 단정하여 퇴계선생이 묘지에 『자유자상봉수 회출군아 自幼姿狀?秀 ?出群兒』라고 말하셨듯이 아름다웠고 뛰어난 분이었다. 더구나 선생의 모부인이 매우 훌륭해서 선생의 교육에 특별한 배려를 했던 것이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선생이 육세 대에 부친이 돌아갔기 때문에 선생은 어린 나이로 고아가 된 것이다. 부친이 돌아갈 무렵에 퇴계선생은 한 살 되는 유아였고 육형제 중 백형 충순위공 잠潛만이 겨우 성취했을 뿐, 나머지 오형제는 모두 동자로 있었기 때문에 위로 두 형들에게는 계모가 되고, 선생에게는 친모가 되는 박씨 부인은 크게 집을 걱정하고 고아들의 장래를 근심해서 만일 이들이 문호를 지키지 못할까 근심 걱정하여 가난 속에서도 학비를 아끼지 않고 대어 주었기 때문에 선생의 형제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대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박씨 부인은 문예의 숙달에만 유의한 것이 아니라 지신과 근행에 더욱 훈계를 엄하게 하였다고 하니 선생은 참으로 훌륭한 어머님을 모셨으며 선생 역시 편모슬하에서 분발하여 대성도 했거니와 또 어머님에게 효도를 극진히 했던 것이다.
선생이 33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 승문원 권지정자로 출사한 후 3년 만인 36세 때에는 관직에 있으면서도 휴가를 청하여 고향의 모부인을 성친하러 시골을 다녀갔고, 또 38세 때에도 성친 차 귀향했으며 41세 때에도 성친 차 귀향했었다. 이때에는 아우 퇴계선생도 성균관전적으로 유경留京중이었는데 이때에는 온계 선생과 같이 귀향했으며 도중 죽령에 와서 선생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병신, 중종 31년)
楓林翠碧彩屛開
中有淸溪抱石臺
誤近忙途知不幸
了無遊迹到蒼苔
그 뒤 임인년(중종 37년)에 퇴계선생이 충청도 암행어사가 되어 이 죽령을 지나게 되었다. 이때에도 죽령에는 단풍과 벽윤壁潤이 있는지라 퇴계선생은 선생의 죽령 시에 화운和韻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潤樹楓林相映開
彩屛麗句憶銀臺
我今正作忙途客
佳處何綠保釋苔
(이 때에 이미 선생이 은대銀臺에 올랐기 때문에 은대는 선생을 말한다.)
이렇게 온계, 퇴계 양 선생은 형제사이에 우애가 깊거니와 모두 또한 박씨 부인에 대한 효성도 지극했다. 42세 때 시월에 모부인 박씨가 세상을 떠나니 선생은 관직 때문에 편양便養하지 못 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삼았다. 당상當喪해서 가례에 따라 예장한 후 성심으로 집상했으며 탈상하자 곧 관직이 내렸으나 취임하지 않고 이듬해 45세 때 이월에 비로소 다시 출사하였다. 또 일 년이 지난 7월에는 성묘하러 안동을 다녀갔고, 이듬해에도 성묘 차 귀향했으니 부모에 대한 선생의 지극한 효성을 알 수가 있다. 요사이와 같이 교통이 편리해도 매년 성묘 차 귀향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교통수단과 로편이 좋지 않은 당시에 이렇게 매년 성묘 차 예안을 다니러 간다는 것은 보통 효성 가지고는 못하는 일이다. 그러나 선생과 퇴계선생은 사마시에 합격하고 모두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무엇보다도 모부인에게 효도를 다한 것이었다. 더구나 중종 23년 무자년에는 선생이 문과에 급제하던 해요, 또한 퇴계선생이 사마시에 합격하던 해이니 이때에 모부인의 즐거움이 어떠했겠는가. 참으로 말과 글로 다할 수 없다. 퇴계선생의 시에 『兄專一道弟傳城 人比還鄕晝錦榮』이란 것이 있다. 兄이신 온계는 충청도백이요, 弟이신 퇴계는 단양성주이니 참으로 일문의 영광이다. 성현의 말씀에 입신양명立身揚名해서 이현부모以顯父母가 효지종孝之終이라 하였으니 선생의 효도는 이로써 다했으며 이것이 가장 모부인을 즐겁게 해준 것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송재 선생은 선생이 문과에 급제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돌아갔다. 숙부 송재 선생은 형님 없는 조카들을 기르고 가르치느라고 고심하였다. 특히 온계, 퇴계 두분에게는 크게 기대하면서 훈도하였는데 겨우 선생의 결혼하는 것만 지켜보고 돌아갔다. 칭찬도 하고 격려도 하고 꾸짖기도 한 숙부의 입장 눈물어린 지도와 교육을 다했다. 선생이 결혼하던 이듬해 19세 때 선생이 용수사에서 공부할 때 송재 선생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보내면서 선생의 앞날을 크게 기대했던 것이다.
碧嶺圍屛雪打樓
佛幢深處可焚油
三多足使三冬富
一理當從一貫求
經術莫言靑紫具
藏修須作立揚謀
古來業白俱要早
槐市前頭歲月주猶
송재 선생이 선생에게 기대하고 가르치던 숙부의 사랑에 못지않게 선생도 또한 평생을 두고 송재 선생을 잊지 않고 추모했던 것이다. 선생은 이렇게 집에서는 효를 다하고 나아가서는 군주와 국가에 충을 다했던 것이다. 선생의 충성은 선생 官界관계 생활을 통해서 다각도로 발휘되었음으로 다시 언급하겠다. 특히 중형 의가 조사早死하자 선생은 그 조카를 데려다가 양육하였으니 이는 모두 선생의 의리의 대도大道를 손수 실천한 학행의 한 표본이었다.
3. 관계를 통한 선생의 업적
선생은 33세 때 중종 2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정자의 말직에서 출발하여 5년이 지난 38세 때 계사년에 사간원 정언으로 승진되었는데 이것이 첫 대간직臺諫織이었다. 그 후 49세 때 중종 39년 갑진해에 사헌부 대사헌직에올랐다. 실로 20여 년 동안 대각臺閣에 출입하면서 계언啓言하고 상소上疏한것이 모두 훌륭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선생이 말년에 화변을 입어 적로에 일생을 마쳤고 또 그 후에 자손들이 수차 병란을 겨는 동안에 계언 이나 소문 하나도 보존되지 않고 산일되어 전하지 않아서 지금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것이 매우 유감 된 일이다. 이렇게 20여년이나 조정에서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나 스스로 근행자지勤行自持하고 교유를 삼가서 악인과 사귀지 않았으며 목멱 산하 명례방에 조그마한 초가에서 검소한 생활로 자족하였으며 그 적은 서재를 운암석실 이라고 해서 저녁때 퇴조하거나 여가가 있으면 경서를 읽어서 학덕을 쌓았다.
선생의 교우로서는 송강 조사수, 죽창 안정, 송강 권응연, 묵암 권응창 등과 교유하면서 도의를 상마하였다. 선생이 이좌랑吏佐郞이되자 처족인 김안로가 선생을 만나 보고자했다. 그러나 선생은 김안로의 인품을 아는지라 끝내 김안로의 유혹을 물리치고 성친 환향하여 그 수중에 잡히지 않았다. 이를 보면 선생은 교유를 신중히 했으며 또 출세나 세도에 관심이 없이 오직 도에 살고 의에 살아서 충성으로 국가에 봉사하고자 했던 것이다.
선생이 41세 때 이조정랑으로 세자시강원문학을 겸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관북도안찰사로 임명되었다. 오월이라 벌써 염서인데도 불구하고 하루도 지체하지 않고 멀고 험한 산길을 걸어가서 발이 부풀고 터져도 쉬지 않고 부임하였으며 손수 방방곡곡마다 민정을 살피고 고락을 백성과 같이 했던 것이니 이러한 것이 모두 선생의 충성심에서 우러나는 처사였었다.
또 선생이 47세 되던 해에 삼도에 큰 재앙이 있어 선생은 진휼어사가 되어 경상도로 내려가게 되었다. 선생이 안동 일직현에 와 있을 때 중종대왕은 유서를 승정원을 통해 내려 보내서 공경하게 받았다. 이때 내려진 치하유서에 의하면 선생은 일일이 촌마을까지 다니면서 열심히 진구하는데 진력했기 때문에 이러한 보고가 왕에게까지 전해져서 선생의 노고를 격려하는 유서였다. 이때 선생은 백성 대하기를 마치 어진 부모가 자식 대하듯 자비하였으며 명산경승의 곳을 다니면서도 조금도 산수의 경치를 즐기는 마음은 가지지 않고 오직 이재민의 구휼에만 힘써서 많은 성과를 거두어고 선생이 가는 곳마다 굶는 이가 없게 하고 민심을 안정시켰으니 선생은 정성껏 소임을 다했다.
오월에 선생이 복명하였는데 이때 중종대왕께서 사정전에 불러 보시고 상세한 기민의 진구사항을 복명 받았다. 이때 선생의 복명으로 풍기군수 주세붕과 안동부사 김광철과 선산부사 어영진도 모두 표창되었다.
49세 때에 중종대왕이 승하하니 국가로 보나 선생의 입장에서 보나 이는 매우 불행한 일이었다. 오십 세 때 성절사聖節使로 연경燕京을 다녀왔는데 이때, 사신일록인 조천록을 남겼으나 전하지 않으니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때 아들 복을 데리고 갔는데 귀로 통주에서 아들 복을 잃었으니 선생의 상심이 어떠하랴. 그러나 왕명을 받은 몸이라 억지로 식사를 하고 건강을 보살펴 귀국 복명하여 진충보국의 정성을 다하였다.
이때에 또한 권문세가에서 자녀의 혼담이 있었으나 선생은 위란한때에 권귀지문權貴之門과 결연함은 싫다고 하여 거절하였으니 선생의 고결함은 참으로 숙연하였다. 52세 때 사월에 특히 황해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이때 황해도 일대에는 크게 기민과 질병이 있어 관찰사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선생이 그 고역을 맡게 되었다. 이때에 감사로 부임함에 신재 주세붕이 시를 지어 전송餞送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須知惟簡在王心
隨處摩民白日臨
이때에 선생은 중앙정계에 간신들이 충량忠良을 모략함에 싫증을 느껴 지방에 내려갈 생각을 했는데 희망한 경상도로 내려 보내지 못하고 어려운 황해도로 내려 보내 주었다. 이때에 또 퇴계선생도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위로해 주었다.
辰韓杖節且不論
乞暇南來那易得
황해도로 내려간 후 정사를 맑고 간결하게 하여 백성을 평안하게하고 극력 기민을 진구해서 치적을 많이 올렸다. 그 후 여러 경직을 거친 다음 오십 삼세 시월에 충청도 관찰사로 전임되었다. 인종 원년에 있었던 을사사화와 명종 이년에 있었던 정미사화이후 중앙정계는 매양 선생에게는 불안해서 선생 자신이 희망해서 외직을 구해 나간다는 것이 결국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내려왔는데 이때에 충주옥사가 일어나서 이것이 결국 선생을 불행하게 만들었고 이것이 화근이 되어 억울하게 적로에서 일생을 마치고 말았다.
선생의 관직을 통해서 일관된 자세는 정正과 직直 그리고 충忠과 성誠이었다. 대사헌으로 이기를 논핵論劾한 것은 직이요, 지방 수령이나 어사로 가서 치적을 올린 것은 충과 성이었다. 그리고 간악한 무리들과 교결을 끊은 것은 정이다. 선생은 누차 간악배의 유혹이 있었으나 끝내 악과 타협을 거절하고 정의에 살다 죽음을 택하였으니 선생의 일생은 오직 정과 직, 그리고 충과 의가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면에서 선생은 정암 조선생과 회재 이선생과 같은 입장과 운명에 놓여 있었다고 하겠다. 또한 청빈으로 일생을 보냈으니 관계생활의 모범으로 백세의 사표가 되었다. 대산 이선생이 서문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선생은 참으로 강대剛大하고 준위俊偉한 인물로서 참으로 국가에 크게 기여할 인물이었으나 중도에 간악한 무리의 횡액에 걸리어 불행한 죽음을 당하였으니 참으로 우리는 역사상에 간혹 이러한 일이 있음을 슬퍼할 뿐이다’ 라고 하였으니 선생을 사모하여 통한할 일이다.
4. 을사사화와 선생
중종대왕이 재위 삼십 구년에 승하하고 세자가 왕위에 오르니 이 분이 인종대왕이다. 인종은 왕위에 오르면서 유관, 이언적, 유인숙 등을 등용하고 선생을 대사헌으로 등용하여 크게 사림을 요직에 앉히고 계모 되는 문정왕후의 마음을 평안히 하기위하여 문정왕후의 친정동기인 윤원형을 공조참판의 자리에 앉혔다. 그뿐만 아니라 윤원형의 복심인 이기를 우의정에 등용하려했다. 이때 대사헌으로 있던 선생은 이기의 우상右相 등용은 부당하다고 공박하여 우상 취임을 못하게 했다. 이때부터 선생은 윤원형 이기 일당의 정적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조정에는 대윤 소윤의 대립이 있었으니 대윤은 윤임을 중심으로 모이고 소윤은 윤원형을 중심으로 모였다. 윤임은 장경왕후의 동생이요,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동생이었다. 장경왕후는 인종모후요, 문정왕후는 명종의 모후였는데 장경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나니 계비로서 문정왕후가 들어서게 되었다. 새로 즉위한 인종이 인자했고 또 사림을 가까이 했음으로 인종대왕이 즉위하자마자 정치가 쇄신될 것이라는 기대가 컸는데 느닷없이 소윤당인 소인 이기가 우상에 오르게 되니 사림들이 모두 그 취임을 반대해서 좌절되자 사화士禍의 씨가 뿌려진 것이었다. 이때 선생은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헌납 이치와 합계해서 이기의 등용을 극력 반대하니 윤원형 등 소윤 일당이 선생을 구적으로 삼았다. 물론 이언적, 유관, 유인숙, 송인수, 권발 백인걸, 노수신 등 많은 사림들도 모두 소윤당의 등용을 반대하니 윤원형, 이기, 임백령, 정순붕 등은 백방으로 사림을 해칠 마음을 품고 없는 사실을 꾸미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해 을사년 칠월에 인종이 승하하니 대윤당은 일시에 불운이 닥치게 되었다. 인종의 이복 아우인 명종이 즉위하니 나이 겨우 12세였다. 정사는 모후인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윤원형 등 소윤 일당은 대윤당을 몰아내기 위하여 대윤당이 명종 추대를 반대하고 봉성군(중종의 8자)을 신왕으로 추대하려 했다고 모함하여 대윤일당을 역모로 몰아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을 사사케 하고 많은 사림과 대윤당을 축출하고 혹은 파면시켰다. 이것을 을사사화라고 한다. 이때부터 정권은 윤원형, 이기 일당이 쥐고 있었고 왕명은 문정왕대비의 일언으로 좌우되었다. 대윤당을 몰아낸 소윤당은 그 여세를 몰아 명종 6년경까지 살육 또는 축출이 계속 되었다. 피화인물이 일백 여명에 달했으니 을사사화가 얼마나 규모가 큰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또 명종 이년 에는 양재역벽서사건을 일으키어 이것을 구실삼아 봉성군, 송인수, 이약수, 권발, 이언적, 유희춘, 노수신, 정자 등을 을사잔당이라고 하여 모두 죽이고 귀양 보내니 세상에서 정미사화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소윤당의 천하가 되니 선생의 입장은 점점 더 난처해졌다. 인종대왕이 세자로 있을 때 선생은 세자시강원 문학직에 뽑히어 동궁의 총애를 받은지라 인종대왕이 오래 재위했더라면 선생은 참으로 좋은 시절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왕이 일찍이 돌아가니 선생에게 이러한 불행이 없었다. 그리하여 이기 등의 간악한 무리가 선생을 모해할 의사를 가졌고 또 선생 역시도 간악한 무리와 조정에 같이 있기가 싫어서 외직을 원하였던 것이다.
5. 충주옥과 선생의 최후
선생이 오십 사세 때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 오월에 충주에 옥사가 생겼다. 이홍남은 이약빙의 아들이었다. 이약빙은 이약수와 이약해의 아우로서 정미사화에 사사당한 분이다. 이약빙 역시 정미사화 때 사사되었다. 이러한 정의에 목숨을 바친 두 형을 가진 분이다. 그런데 아들 이홍남도 연좌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 뒤 이홍남은 아우 이홍윤이 진사 강유선과 공모하여 모산수를 왕으로 추대한다는 무고를 했던 것이다. 원래 홍남 홍윤 형제는 사이가 좋지 않아서 홍윤을 이렇게 모략했는데 정부에서는 아우를 고발한 것은 멸친滅親하여 대의를 지켰다고 해서 홍남의 죄를 풀어주고 특히 서용하여 장단부사로 임명하였다. 이때 충주는 역적의 주州라고하여 강주降州 하여 유신현이 되었고 죄 없는 많은 사람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었다. 이때 홍남은 모친의 상중喪中인데도 관직을 받았고 또 아우 홍윤의 남은 재산을 몰수했다. 선생이 이를 알고 홍남은 악인이라고 중인衆人 앞에서 조소하였더니 홍남이 이를 듣고 선생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즉, 처음에 홍윤이 죄인이 됨에 그 가산을 몰수 하였던 바, 홍남이 유신현감 이치한테 물어오기를 이러이러한 가재家財를 몰수했느냐고 묻고, 그 가재家財는 실은 자기의 재산이라고 하여 반환해 갔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안 감사였던 선생은 형이 아우를 무고로 몰고 그 가재마저 뺏아 가려고 하니 그를 패륜으로 여기고 고약한 놈이라고 했던 것인데 이 말이 홍남에게 전해졌던 것이다. 이때부터 홍남은 백방으로 선생을 무고하기 시작했다. 물론 뒤에 시비가 가려져서 아우를 무고한 사실이 탄로되어 홍남은 관직을 삭탈 당했지만 선생은 홍남의 무옥誣獄으로 크게 화를 입는 일이 생겼다. 충주 유신현민 최하손의 무옥사건이 그것이다. 최하손은 관장官長에게 공손치 못하다는 죄를 짓고 의주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홍남이 아우를 무고해서 풀려나는 것을 보고 자기도 몰래 도망쳐 와서 홍남과 같이 역모 사를 고변해서 죄에서 풀려나려고 했다. 유신현에서는 홍윤의 여당을 열심히 찾아내는 판국인데 최하손이라는 자가 관청에 있는 품관 있는 향회의 회의록을 훔쳐가지고 서울로 달아나서 무고하려 했으나 때마침 유신현 나졸에게 붙잡혔다. 이때 충주읍 성주 이치가 이를 영문에 보고해오니 감영에서는 이를 중앙에 보고하는 한편 법에 따라 치죄하는데 한번 초사招辭를 받은 다음 죽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일년이 지난 오십 오세 때 선생이 한성 우윤으로 있을 때 이 일을 구실로 양사에서 선생을 청죄하게 되었다.
이때 대사헌은 송세형 이었고 원호변이 사간이었는데 원호변은 이홍남의 처형이었고 또, 이들은 모두 이무강과 절친했는데 모두 이기의 부하였다. 원계검은 원호변의 숙부였는데 이들이 모두 선생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간악한 무리였다. 처음 이홍남이 유신현 최하손 사건을 원호변과 원계검에게 말하고 원계검이 이무강에 말하여 구화構禍하자고하니 이무강이 크게 기뻐하여 이기에게 말해서 선생을 무고하게 된 것이다. 이무강은 한때 선생과 같이 사관으로 있었는데 그때부터 선생이 그와 같이 상종하기를 기피했던 것이다. 이무강은 정처正妻를 버리는 무뢰성이 있는 자인지라 평소부터 선생은 그를 싫어하던 터였다. 경술년 명종 오년 우윤으로 경직을 갖자 이기는 선생에게 최하손 사건과 아울러 구수담과 붕비朋比 라고 추론하였다. 구수담이 대사간으로 있을 때 이기를 규탄하였음으로 항상 보복하려든 차에 구수담이 을묘명인을 복직시키고자 상소를 하였다.
이 상소를 계기로 구수담과 붕비라고 한 것은 왕을 격노케 하여 선생의 죄를 확호確乎하게 만들기 위한 허위 날조였다. 원래 선생과 구수담은 내왕이 없었다. 다 같이 정의 충직한 명신으로서 이기와 같은 간악한 무리를 규탄하였을 뿐이다.
마침 명종 오년 칠월 십육일 양사에서 합계로 선생의 유신현 치옥사건을 지적하여 청죄했다. 이 무고 죄목은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 유신옥의 죄인에게 몰수될 전답을 빼돌리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신현 옥사 일로 선생의 죄목이 고발되자 장령 이희손이 찾아와서 선생의 죄목을 알려주자 선생은 미리부터 짐작한 일이며 일이 억울하게 되더라도 나는 비굴하게 죄를 면 하려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또 이때 대사헌 송세형이 만나 보고자 했다. 이 때 선생이 송세형을 찾아가서 부탁을 하고 그들에게 협력하면 죽음을 면할 수 있다고 했으나 선생은 어찌 인신人臣으로 불의인줄 알면서 비굴한 행동으로 죽음을 면하겠는가 하고 끝내 송세형 만나는 것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드디어 이기일당의 책동으로 7월 17일에 추고하라는 전지가 내려지고 8월 3일에 선생은 의금부에서 구금영장이 내려졌다. 이때, 양사에서 유신옥사의 문안을 조사하니 오직 못 쓰는 잡물뿐이라 쓰지 못한다는 표를 해 놓은 것만 있었고 또, 문안에도 필요치 않다고 되어 있었으나 유독 이무강은 짚오래기나 쓰레기라도 어찌 빠뜨리겠느냐고 하여 추고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가족들이 비로소 이 사실을 알고 달려와서 당황하고 놀래어 눈물을 흘리니 선생은 안색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였으며 내가 미리 각오한 것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말하고 의금부 문전에 나와 대명하고 있었다. 이때 많은 친구들이 달려와서 위문하니 도리어 만류하면서 공들이 서로 출입하게 되면 도리어 나의 화가 중하게 될 것이라고 만류하시고 밤 이경에 하옥되었다. 이때 금부당상은 윤원형이었다. 이때, 이무강이 주동이 되어 양사에서 구수담과 같은 죄목으로 장살코자 했다. 이때 유신현감 이치도 하옥되었다. 후임으로 현감이된 유중영(서애 유성룡 부친)은 유신현의 추안문서를 빨리 송부하지 않았다고 해서 파직 당했다. 그 후임으로 이충남이 현감이 되었으니 모두 선생에게는 불리하게 되어 있었다. 이무강은 없는 죄를 자복하라고 하니 선생이 죽음으로 부인하였다. 8월 10일 겨우 감사減死하여 갑산으로 정배定配시키라는 명이 내렸다. 이때, 양사에서 더 추고하자고 했으나 왕이 듣지 않고 정배하기로 하명하였다. 이 옥사에서 이치는 고문에 못 이겨 죽었고 선생의 죄목은 죄인의 재산을 돌려주었다는 것, 공모한 무리들을 기록치 않았다는 것, 그리고 고변 인을 장살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죄목은 이기일당이 선생을 사경에 몰아넣기 위한 허위조작이었다.
이리하여 선생은 다섯 차례나 심한 고문을 당했지만 사람들이 의심할 정도로 신색이 평시보다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물론 극심한 형장의 고통은 표현할 수 없었겠지만 조금도 안색에 나타내지 않고 태연한 자세로 임하였다는 것은 선생의 인격과 초연한 의지의 소산일 것이다.
왕명으로 사형에 처하지 않고 적소로 유배시키라고 하였을 때에 고문에 의한 심한 상처 까닭에 길을 떠날 수 없는 형편을 보고 의금부도사 우언겸이 조금 조리한 후에 떠나는 것이 可 하다고 하였다가 이기일당에 몰리어 큰 화를 입을 뻔하였다.
따라서 치료도 못하고 그해, 8월 12일 서울을 떠나 갑산을 향하는 도중 양주군 미애리 민가에서 14일 고고하고 한 많은 일생을 마치셨다.
정배지로 떠나기 전에 양사에서 일곱 차례나 합계로 선생을 죽이자고 했으나 명종이 듣지 않아서 정배로 정해졌다. 寗, 교 등 두 아들이 집을 모조리 뒤져도 미이곡필목십필米二斛匹木十匹 뿐이었다.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하사받은 채단삼필綵緞三匹과 녹피鹿皮 하나가 있는 줄 알고 채단과 녹피를 팔아서 노자로 보태 쓰려고 했으나 난중에 누가 훔쳐가고 없으며 심부름 하는 사람들에게도 인정 쓸 것이 없어 여러 아들들의 옷을 대신 주었다. 행구가 없어서 아들 영을 시켜서 행구를 갖추어 가지고 뒤에 따라오게 하였다. 선생의 입조 20여년 관직에 있으면서 살림살이가 이렇게 곤궁하였으니 선생의 청렴함을 알 수 있으며 이를 보는 사람들이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선생의 병환은 시시각각으로 더해가서 13일에는 행보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선생은 말없이 오직 시 한수를 가는 목소리로 읊었으니 다음과 같다.
大同江水何時辰
別淚年年添錄皮
이 시는 을사사화 이후 많은 선류善類들이 계속 유배되어 출척黜陟되니 어느 때, 끝일 것인가 하는 뜻이고 서북로로 떠나가는 이별의 눈물이 해마다 더해간다는 상심의 뜻이리라.
이 시 한 수를 읊조리고 말을 못하시고 14일 해시亥時에 양주 민가에서 숨을 거두었다.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양사에서 계청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20일에서야 아들 영, 교 등이 봉상奉喪하여 28일에 조령을 넘어 9월 초에 온계리에 빈소를 차리고 12월 12일에 선생이 거하시던 3리 밖에 있는 연곡에 안장하였다. 아들이 3년 시묘살이를 하니 동민들이 이 마을을 빈소동이라고 불렀다.
6. 선생의 후광과 그 문학
선생이 적로에서 객사한 것은 55세 때 경술년 명종5년 8월 14일이었다. 그 후 선생을 모함한 이기는 곧 영의정에까지 승진했으나 이내 중풍병에 걸렸고 3년 후인 명종 7년에 죽었다. 그 후 명종 20년에는 명종의 모후로서 세력을 부리던 문정왕후가 돌아가고 선생을 무고한 장본인인 윤원형마저 삭탈관직을 당하여 내쫓겼으며 적지인 강음에서 죽었다. 2년 후인 명종 22년에는 명종이 세상을 떠났다. 명종은 승하하기 몇 년 전부터 사화 일으킨 것을 뉘우치기 시작했으나 끝내 사화에 피화된 제현을 설원雪?시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명종을 말년에 가서 선도한 것은 백인걸, 심의겸, 김효겸, 강사상, 김귀영, 유성룡, 기대승, 박순, 이이, 이준경, 심통원, 노수신, 정유길, 이양원, 정철, 홍섬, 이택, 민기, 李黃 등 사림파의 관료들이 적극적으로 권신과 척신을 배척했기 때문이었다. 명종 22년에 명종이 승하하자 사자嗣子가 없었음으로 이준경, 백인걸 등이 하성군을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니 이분이 선조대왕이다.
선조는 처음부터 사림파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음으로 즉위하자마자 명종 때에 피화된 사대부들을 신원시키기 시작하였으니 을사사화 후 피화된 자, 35명을 모두 복관시켜 설원시켰다. 이때 선생도 이들과 같이 관작이 복관되었다. 이때에 선조대왕이 ‘李瀣는 대사헌시에 이기를 논박한 고로 기가 그 분을 갚기 위하여 무고함이라’하시고 그 직첩을 환급하셨다. 이렇게 관작이 복관되자 퇴계선생은 억울하게 사화당한 중형을 생각하여 묘지墓誌와 묘갈墓碣을 찬撰하여 매지입석埋誌立石을 했다.
그 후 효종대왕 갑오년에는 지방 유림들이 선생이 일찍이 우거한 곳인 영주군 치동에 삼봉서원三峯書院을 세워 선생의 위령지로 삼았다. 그 후 현종 8년 정미년에 온계구리溫溪舊里에 청계서원淸溪書院을 세워 또한 선생의 위판을 봉안했으며, 또 숙종 17년에는 당시 대신이 계언해서 증직이 내려졌다. 이때에 贈 自獻大夫 吏曹判書 兼 知經筵 義禁府事 弘文館 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 成均館事 世子左賓客 五衛都摠府 都摠管의 관작이 내려졌다. 이때에 대신은 영상에 권대운이요, 좌상 목래선 우상에 민암이 김경원 후임으로 있었다. 이때 계언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고 대사헌 이해는 선정신先正臣 이황의 형으로 중종 인종 양조의 명신입니다. 헌납 이치와 같이 이기의 정승 됨을 반론했습니다. 이기가 정승이 되자 기유년 명종4년에 선생을 무고하여 마침내 화를 입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퇴계선생의 묘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치는 포상되어 증직이 내려졌는데 홀로 선생만이 아직 그대로 있습니다.』고 했다. 그래서 삼봉서원과 청계서원에서는 유림들이 선생의 위패를 개제봉안하게 되었다. 정조8년 갑진에 시호를 정민貞愍이라고 내리셨다.(守節淸白曰貞 使民悲傷曰愍) 그리고 선생의 후손들에 대하여 말하자면, 선생은 18세 때 연안 김씨 가인의 부흥의 女를 맞이하여 5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복인데 선생이 성절사로 중국을 갈 때 종사랑으로 시종했던 것인데 귀로 통주에서 로병으로 조졸하였다. 그 후 선생의 제2자 영이 가계를 이어 받았다. 영은 진사로서 지례현감을 지냈다. 제 3자는 교로서 대흥현감을 지냈으며 4자는 치이며 5자는 혜로 공조좌랑을 지냈다.
이상과 같이 선생은 5형제의 자제를 두었으며 그 후손은 수백 년 동안 번성하여 사환과 문한이 속출하여 그 혁혁한 후광은 주지하는바 연보와 자손록에 수록되어 있다.
선생의 유문은 많았으나 선생의 피화로 해서 많이 일실逸失되고 또, 병란을 겪는 동안 많이 없어졌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러나 선생이 복관되자 퇴계선생이 묘갈과 묘지를 지어 세상에 알려졌고 또 숙종 때 와서 증직이 내려지자 후손들은 유적을 찾기 시작했다. 선생의 6세손 진사 지현공 견룡이 가전해 오던 약간의 유문을 정리하고 여기에 여러 문적에서 선생의 문자를 찾아내어 유고 1책 2권을 편집하였고 또, 7세손인 持平公 급級이 세계도와 연보를 편찬編纂하였다. 연보는 한훤당선생의 연보에 준해서 마련되었다.
선생의 문집은 3책인데 그중 1책은 선생의 유문이며 서문은 대산 이상정이 근찬했고 선생의 행장은 눌은 이광정이 지었다. 대산선생 서문이 임진년 3월 술자로 되어 있는바 이는 초판이 영조 48년에 인출된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숙종 17년에 증직이 내려지니 그때부터 원고를 정리하고 행장을 얻고 해서 영조48년에 간행된 것이다. 전질 3책 중 1책은 세계도와 연보로 되어있고 제2책은 선생의 유고로서 1권은 약 80수의 시가 수록되어있고 2권은 습유拾遺와 부賦3편 시6수와 유묵이 수록되어있다. 제3책은 부록으로서 3권, 4권으로 되어있다. 3권은 묘지와 묘갈 그리고 만사輓詞 등이 수록되어있고 4권에는 행장 유사 척록 봉안문 축문 등이 수록 되어있다. 선생의 문집은 정조 8년에 정민貞愍이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또 번암 채제공의 신도비명이 지어지자 다시 중간되었는데 선생 문집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약 80여수의 시중에 대부분이 퇴계선생과 주고받은 시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 선생과 퇴계선생의 관계를 말하는 항에 다시 재론되기 때문에 문집 내용을 따로 解題해제하고 설명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또 행장과 묘갈 묘지 등의 내용에 관해서는 선생의 『가계와 생애』에 언급되었기 때문에 따로 다루지 않기로 했다.
7. 온계선생과 퇴계선생
온계선생은 6세 때 고아가 되었으며 퇴계선생은 생후 1년 만에 고아가 되었다. 두 선생은 모친 박씨 부인의 슬하에서 자랐고 엄하고 인자한 친모와 또 매우 엄격하고 무서운 숙부 송재 선생한테서 같이 글을 배우고 그 훈도 밑에서 자랐다. 퇴계선생의 시(후기)에 『敎嚴慈母斷織機 誨感叔父焚香襄』이라는 시구는 이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6형제 중 유독 온계선생과 퇴계선생은 뛰어나서 송재 선생이 이 두 조카에 크게 장래를 기대했었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금곤옥제이니 금곤옥우이니 하는 말도 이러한데서 얻어진 말인 것이다. 여섯 살의 차이가 나는 형제간이니 형은 아우를 사랑했을 것이고 아우는 형을 따랐을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더욱이 이 두 형제는 다른 형제와 달라서 유달리 학문에 뜻을 두었고 또 도학과 성현지도를 닦는데 뜻을 두었기 때문에 더욱이 밀어주고 당기고 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온계선생은 을유년 30세 때 진사시에 합격했고 퇴계선생은 무자년 28세 때 진사시에 합격했다. 온계선생은 무자년 33세 때 문과에 합격해고 이해에 퇴계선생은 사마시에 합격했고 또 퇴계선생은 34세 때 갑오년에 문과에 합격했으니 온계선생 보다 6년 뒤에 퇴계선생이 문과에 급제한 셈이다. 이렇게 온계는 앞서고 퇴계는 뒤따라서 사마시나 문과에 합격했으니 형은 항상 아우를 이끌어 갔다. 퇴계선생의 연보에 보면 진사시에 합격한 후 퇴계선생은 다시 문과에 응할 생각이 없었으나 온계선생이 모친을 시켜 문과에 응시할 것을 퇴계에게 권하게 하였기 때문에 퇴계선생이 과거에 응해서 합격하게 된 것이다. 물론 형으로서도 권고를 했겠지마는 특히 어머니를 시켜서 과거에 응하게 한 것이 바로 온계선생 이었던 것이다.
온계선생이 을유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이듬해 병술년에 31세 때 성균관에 입학했는데 퇴계선생은 무자년 28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임진년 32세 때 문과 초시에 합격하고 계사년 33세 때 성균관에 입사入舍했다. 이듬해 34세 때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을 얻어 성균관을 떠났지만, 퇴계선생이 성균관 서재西齋에 있을 때 7년 전의 형 온계선생을 생각해서 시 두 수를 남겼다. (註 :「高齋云云」의 시는 온계선생께서 성균관에 있을 때인 병술년 소작所作이니 퇴계선생 28세 때의 작품으로 ‘山居’ 시이고, 「卜築云云」은 ‘芝山蝸舍’시로 퇴계 31세인 신묘년에 지은 것이니, 퇴계선생이 성균관 서재에 있을 때 일은 아니다. 퇴계선생이 성균관에 유학한 것은 33세 때인 계사년(서기 1533년)의 일이다.<편집자 주>) 시는 다음과 같다.
高齋蕭灑碧山傍 抵有圖書萬軸藏
東澗遼門西澗合 南山接翠北山長
白雲夜宿留첨濕 淸月時來滿室凉
莫道山居無一事 平生志願更難量
卜築芝山斷麓傍 形如蝸角祗身藏
北臨墟落心非適 南읍烟霞趣自長
但得朝昏宜遠近 那因向背辨炎凉
己成看月看山計 此外何須更較量
이 시를 지어 보내 온계선생에게 보내니 형 역시 시로서 화답했다고 하는데 그 시는 유고에 보이지 않으니 애석한 일이다.
또 퇴계선생이 성균관에 있을 때 선생 댁을 찾아와 시 삼수를 지어놓고 갔는데 그 시는 관계에 진출하는데 보다도 학문하는데 뜻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때에 퇴계선생이 형님 댁을 찾아와서 책상 위에 지어놓은 시 삼수는 다음과 같다.
劍佩장장滿曉聽 薇坦臣入五雲경
小齋惟有圖書靜 還似當年舊院庭
細兩今朝欲濕泥 南風時復無槐技
我來獨自關門坐 爲賦思君一首詩
風雲漠漠困淵沈 世事經難○素心
從此不如歸舊隱 白雲深處聽溪音
이 시를 우연히 책상 위에서 얻어 보고 선생은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다.
槐乏絲毫補聖聽 居然早退紫宸경
雀羅門外客誰到 午睡醒來雨滿庭
薄雲疎雨不成泥 返照蛛絲閃樹枝
寂寞小齋仍獨坐 晩來淸興動吾詩
紛綸理氣自升沈 窮達元非動此心
莫道從今歸舊隱 人間底處會知音
이때 선생은 목멱 산하 명예방에 살면서 소나무 숲 옆에 소서재小書齋를 지어 운암석실雲巖石室이라고 이름을 지었고 취미翠微라는 당호를 지어 스스로 취미헌翠微軒이라는 호를 가지기도 했다. 여기서 온계선생은 여가 있는 대로 책을 벗 삼아 공부를 하였는데 퇴계선생이 여기를 찾아와 보니 경치 좋고 조용한 곳에 서재가 꾸며져 있으니 퇴계선생도 문득 이러한 곳에서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난 것 같다. 여기에 대해서 온계선생은 과거를 권하고 관계에 나와서도 학문은 할 수 있다고 하는 시를 지어 화답한 것이 있다.
병술년 중종 21년에 선생이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퇴계선생은 모부인을 뫼시고 온계리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다. 이듬해 선생이 문과에 합격한 후 곧 승정원 권지정자의 관직에 처음 올랐는데 퇴계선생도 6년 뒤인 문과 합격 후 바로 이 자리에 첫 출사를 했다. 선생은 서울에서 모부인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문과에 합격했고 퇴계선생도 모부인을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하여 선생을 따라 6년 후에 문과에 합격했다. 이렇게 퇴계는 온계가 걸어가는 길을 따라서 나란히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또 선생은 당시 젊은 사림 중에서도 명망이 있는지라 권신 김안로가 선생을 가까이 하려고 했다. 김안로는 선생의 처족妻族이 된다. 선생을 만나자고 했으나 선생은 성친 차 귀향한다는 핑계로 만나 보기를 거절했던 것인데 퇴계선생 역시 김안로의 유혹을 받았으나 물리쳤던 것이다.
또 모친 박씨 부인이 돌아가기 전 해인 병신년에 선생은 아우 퇴계선생과 같이 안동으로 내려갔는데 이때 선생은 이미 관직이 이조정랑이었고 퇴계선생은 성균관전적으로 있었는데 같이 죽령을 넘으면서 선생이 읊은 시는 이미 소개하였고 또 퇴계선생이 41세 때인 임인년 중종37년에 어사로 다시 죽령을 넘을 때 선생의 소회를 읊은 시에 화답해서 시를 지어 읊었으니 두 형제의 형제지의兄弟之誼는 참으로 두터웠던 것이다. 또 선생의 생애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선생이 12세 때에 송재 선생이 진주목사로 있을 때 선생은 중형되는 훈도공 하와 같이 진주 월아산에 있는 청곡사에서 공부했는데 그 후 계사년 선조 26년에 퇴계선생이 청곡사를 지나면서 중형들이 독서하던 것을 생각해서 시 한수를 남겼다. 이 시는 생애편에 수록하였기에 다시 옮기지 않겠지만 이러한 것을 보면 퇴계선생은 또한 중형을 생각하는 것이 남달리 유별해서 항상 선생을 사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임인년 퇴계선생이 선성 산수간에서 몽유하는 꿈을 꾸고 몽유시를 지어 온계선생에게 보냈다.
霞明洞裏初無路
春晩山中別有花
偶去眞成搜異境
餘齡還欲寄仙家
여기 대하여 온계선생은 다음과 같이 화답하여 시를 지었다.
絶勝林巒窈窕處
無人開落幾春花
相期早晩歸休日
薄業溫溪有兩家
또 병신년 온계선생이 41세 때 7월에 온계선생이 모친의 성친 차 휴가를 얻었고 퇴계선생은 이해에 36세 때인데 역시 7월에 휴가를 얻어 성친 차 온계와 같이 동도 귀향하였다. 이 해에 온계선생은 의정부 검상檢詳으로 있었고 퇴계선생은 성균관 전적겸 중학교수로 있을 때이다. 이해 구월에 퇴계선생은 호조좌랑이 되던 해이다. 온계집에 보면 이 해 같이 성친 차 죽령을 넘은 것으로 되어 있고 또 온계, 퇴계 양선생의 두 연보를 보면 모두 이 해 7월에 성친 차 휴가를 청했다. 그런데 퇴계집 별집1권을 보면 병신7월 회일에 온계 양 선생이 모두 西齋서재에 동숙했다고 되어 있다. 이 때 퇴계선생은 중형 온계와 헤어지는 心懷심회를 시 이수를 지어 표했다.
對牀風雨西齋夜
何事還爲腸斷聲
쇄淚령原悲不盡
分飛又向楚南城
共約靑山映黃髮
何時官爵棄如泥
怪來今夜冬眠處
風轉蕭蕭雨轉凄
『생애』에서도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이 때 중앙에 윤원형 이기 등이 세력을 잡고 있는지라 선생은 자원해서 지방직을 희망했다. 그러나 남쪽을 바랐는데 남쪽을 보내지 않고 어려운 형편에 있는 황해도로 내려 보낸 것이다.
선생이 또 황해감사로 있을 때 아우 景淸 (역자註: 찰방공 징)이 찾아왔다. 선생과 찰방공과 안서객사(감사숙소)에서 밤에 같이 야화시 2수를 지었다.
滄茫歲暮海西天
초○關山雪又連
此夜對牀眞邂逅
喜권之外更凄然
不到桑鄕六載强
田園無主想荒凉
況逢今歲多淋료
漂蕩聞來益可傷
또 함허당야화시 다섯 수도 지었다.
이때 퇴계선생은 서울에서 응교로 있어서 형제간에 서로 오랫동안 만나보지 못한 회포를 푼 구절도 있거니와 두 형제가 끝 동생인 퇴계의 앞날과 앞으로 같이 은거해서 한거한 면학생활을 하기로 뜻을 같이했다는 것이 이 시에 나타나 있다. 즉, 『回鞭季子行當見 苦憶情懷不語同 舊約逍遙在何日 相望落落各西東』의 시는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퇴계선생은 두 중형을 그리워했지만 『身外榮枯更何有 世間址路恐終迷』란 시로써 이미 만년에 한거해서 세속의 영공을 떠나려한 뜻이 역역히 드러나 있으며 또『逍遙風雨雨兩蘇公 黃髮靑山宿願同 此志未酬眞可惜 令人長憶畝南東』이란 시를 지어 일찍부터 퇴계선생은 온계선생과 같이 고향에 돌아가서 한거할 것을 약속했으며 만년의 장수지계를 상약했다는 것이 이 시에 나타나 있다. 이렇게 이 두 선생은 만년에 관직과 영화를 저버리고 오직 고향에서 학문이나 하려고 서로 단단히 약속했던 것이다.
기유년 9월에 형제분이 모두 휴가를 얻어 온계리로 와서 서족敍族 분황焚黃을 올렸다. 이때 온계선생은 충청감사직에 있었고 퇴계선생은 단양군수에서 풍기군수로 전임했는데 같이 고향인 온계리에 왔다. 이때 퇴계선생은 다음과 같은 소회의 시를 지었다.
遊宦來歸見폐廬 眠中兒姪集魚漁
悲風不盡三杯奠 常匠歌成淚泗거
兄專一道弟專城 人比還鄕晝錦榮
富貴一毫何足이 勉修先業永無傾
이러한 시에 대하여 온계선생은 다음과 같이 차운했다.
光動窮村舊폐廬 雕鞍玉節照金魚
○○庭下皆龍種 趨步聯堅又接거
專城換了又專城 兩道觀風分外榮
恩許先塋來奠謁 凄風感淚寫如傾
또 이때에 이 두 형제는 효자암에서 서로 헤어졌다. 형은 서울로 아우는 풍기로 떠나갔다. 효자암은 온계리 서쪽 고개 너머 있다. 去年 9월에 온계선생이 한성우윤으로 은가를 얻어 향리에 돌아 왔을 때에 퇴계선생 역시 단양에서 돌아왔다. 헤어질 대 이 효자암에서 종족宗族들과 서별敍別하였으며 올해도 또 여기에서, 그리고 내년에도....... 세세년년 계속되기 어려움을 생각하고 퇴계선생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去年此地把離杯 一歲分飛又再來
若使年年爲此別 臨기不用重排徊
이에 대해 온계선생은 다음과 같이 차운했다.
相隨拱把去年杯 却喜親朋畢竟來
縱使明年當有約 情深自是更徘徊
이 외에도 선생은 아우 퇴계선생과 주고받은 시가 많다. 우리는 지금 이 두 선생의 관계를 이러한 시로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선생의 많은 유문 중 지금 백여 수의 시문이 전해질 뿐인데 이러한 시에 대하여 대산 이선생은 이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즉, 품격이 높고 운치가 있다고 했다. 더구나 구구절절이 애국충정이었고 애향심이었으며 형제간에서도 권학하는 정신이 깃들고 있어서 이 시문을 통해서 선생의 학행의, 적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으니 어찌 시문이 적게 남아 있는 것이 문제 될 것이냐고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상 거술한 바와 같이 선생은 참으로 강대하고도 준걸한 분이었으며 순정한 충의정신과 지성한 효심 그리고 형제친족간의 우애와 목족睦族은 남달리 뛰어났으며 목민관이 되어서는 인자한 선정에 최선을 다하고 덕화에 주력하여 선생이 가는 곳마다 민심이 순화했으며 대간이 되어서는 소장疏狀이나 계언 하나라도 국가와 민리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공무중이라도 여가만 있으면 자신의 수양에 노력하여 학문과 덕행을 닦는데 힘을 기울였다. 퇴계선생이 손수 지으신 묘지문이나 눌은선생이 지으신 행장과 기타 문적을 보고 선생의 치적을 고찰하여 보면 선생은 참으로 정암 조선생이나 회재 이선생과 같이 학행과 도덕을 닦았으며 이 나라 군주와 백성을 위해서 도의국가를 건설하려다가 간신배의 모함으로 불행한 최후로 일생을 마친 보기 드문 명신이요, 위대한 애국충신이요, 순정하고 격조 높은 도학자였었다.
이러한 선생의 소장疏狀이나 계장啓狀 등 많은 기록과 문적이 있었으나 그간의 화란과 병란 그리고 화재를 만나 많이 소실된 것은 비단 온계선생이나 그 후손을 위해서 뿐 만 아니라 후학의 연구를 위해서도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 논문은 국역國譯 온계전집에 게재되었던 것으로 필자의 양해를 얻어 일부 절록節錄했음을 밝히는 바이다. 열화 제 14호 1993년 (계유년)에서 옮김.
선생의 성은 이씨요, 본관은 진성眞誠이다. 이름은 해瀣요, 자는 경명景明 호號는 온계溫溪로서 세상에서 온계선생 이라고 했다. 스스로 온계를 자호로 삼은 것은 선생이 거한 곳이 온계리이고, 또 이 마을 서쪽에 있는 소계에는 항상 맑은 물이 흐르고 있고, 이 물이 겨울에는 얼지 않기 때문에 온계라고 해서 선생이 온계라 자호하셨다.
선생은 퇴계선생의 넷째 중형이요, 퇴계는 선생의 끝 동생이다. 선생의 육형제중 온계선생과 퇴계선생은 가장 훌륭하시어 이 형제를 금곤옥제金昆玉弟 이니, 금곤옥우金昆玉友 이니해서 온계, 퇴계선생을 같이 높이 평가해 온 것은 널리 세상에 알려진 사실이다.
선생의 선계先系는 여말에 진보현리를 지낸 진사 이석을 시조로 삼는다. 진사공은 은덕이 있는 분으로 子 송안군 자수의 귀貴로서 봉익대부 밀직사로 추봉되었기 때문에 밀직사공으로 불리우고 있다. 자수는 과거에 급제하여, 판전의사라는 관직에 올랐으며 통헌대부의 품계에 이르렀다. 공민왕 때에 홍건적을 토벌한 공으로 안사공신에 녹훈되고 송안군에 봉해졌다.
송안군이 처음 진보에서 안동 마애로 이거하였다가 주촌으로 다시 이주하였다. 송안군의 子는 운후이며 군기시부정을 지냈다. 증손 우의 귀로 통훈대부 사직시정으로 추증되었다. 이 분이 바로 온계선생의 고조이며 고조비는 감찰 증좌의정 권희정의 따님이며 문하시랑 용일의 손녀이니 권태사의 후이다. 증조는 정이다. 음직으로 중직대부 선산부사를 지냈으며 손자 우의 귀로 통정대부 병조참의로 추증되었고 다시 증손 황의 귀로 가선대부 호조참의겸 동지의금부사가 되었다. 선산부사가 되기 전에 영변판관으로 약산성을 개척하였고 청렴 검약한 관리로서 이름이 높았다. 증조비는 평산 부사를 지낸 김정의 따님이다. 이 분이 三子를 두었는데 장자는 우양이니 현감이고 차자는 흥양으로 참군을 지냈으며 삼자는 계양이니 이 분이 선생의 조부 되는 분이다. 활정하고 은조가 있는 분이며 진사로서 그쳤다. 차자 우의 귀로 가선대부병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가 다시 손 황의 귀로 자헌대부 이조판서겸 지의겸부사로 추증되었다. 조비는 사직 김유용의 따님이다. 조부 판서공이 안동에서 예안현 온계리로 이거하였으니 말하자면 예안 입향 시조이다. 이 분이 형제를 두었으니 장자는 식이니 진사공이요, 차자는 우이니 호조참판 송재공이다. 진사공이 선생의 부친이니 처음 온계선생의 귀로 해서 가선대부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가 다시 퇴계선생의 귀로 해서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겸 판의금부사로 추증되었다. 진사공은 의지도 강하고 근학했으나 진사시에 합격한 후 조졸早卒했기 때문에 행직을 가지지 못했다. 모친은 초취에 의성김씨 정랑 한철의 따님이었고 재취는 춘천박씨 사정 치의 따님이다. 선생은 춘천박씨의 소생이다. 당시 숙부 송재공이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호조참판에 올랐으며 문명이 또한 높았으므로 이때부터 선생의 가문은 크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가문에서 선생은 연산군2년 병진년(서기 1496년) 예안현 온계리에서 육 형제 중 4남으로 태어났다. 퇴계선생이 찬한 선생의 묘지에 의하면 선생은 어려서부터 매우 모양이 뛰어나고 아름다웠으며 보통 아이들보다 뛰어나서 부군 찬성공이 특히 사랑했다고 되어있다. 선생 6세시에 아우인 퇴계선생이 태어나고 6세 되던 해에 부친 찬성공이 조졸했으므로 온계, 퇴계선생 등 6형제가 모두 고아가 되었으며 편모의 양호와 숙부 송재 선생의 훈계를 받아가면서 성장했다. 6형제 중 온계, 퇴계 두 선생은 특히 뛰어났다. 선생은 8세 때부터 송재 선생에게 수학했으며 선생과 퇴계선생은 뜻이 같고(志同) 도학이 같아서(道合) 어려서부터 성현의 학에 뜻을 두었으며 형제가 같이 정려 면학하여 송재 선생이 이 형제에게 크게 장래를 기대했으므로 금곤옥우라는 칭찬을 받았다. 12세 되는 해는 중종 2년 정묘(서기 1507)년인데 이때 송재 선생이 진주목사로 있어서 선생은 중형 훈도공 하와 같이 진주 월아산 청곡사에서 공부를 했다.(註 : 온계선생 연보에 의하면 선생이 12세 때인 정묘년(1507)에 훈도공 河와 송재공이 진주 목사로 출임할 때 따라가서 청곡사에서 독서 했다고 기록이 되어있고, 퇴계집 별집 권1 ‘과청곡사過靑谷寺’ 시詩의 서敍에는 정묘 년간에 家兄 의, 해가 고유孤幼로 숙부를 따라서 이 절에서 독서했는데 27년 전의 일이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훈도공 河는 1482년생이니 정묘년에는 이미 나이 26세이고 충순위공 의는 선생보다 두 살 위로 1494년생이므로 정묘년에는 14세가 된다. 따라서 훈도공이라기 보다는 온계선생의 바로 윗형인 충순위공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생각한다.<편집자 주>)그 후 퇴계선생이 청곡사를 지나면서 다음과 같은 시 한수를 남겼다.
金山道上晩逢雨
靑谷寺前寒瀉泉
爲是雪泥鴻亦處
存亡離合一?然
17세 때 선생은 퇴계선생과 같이 송재 선생한테 글을 배웠다. 숙부 송재 선생은 항상 말하기를 형님은 이러한 아들 형제를 두었으니 참으로 후광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18세 때 조효연 오언의 등과같이 청량산에 가서 공부 했으며 이해에 연안김씨 가인의 부흥의 따님을 맞아 결혼했고 이듬해에는 용수사에서 공부했다. 22세 때에 모재 김안국선생이 경상감사가 되어 부임할 때 송재 선생의 집에 들렀다. 이때 온계 퇴계 형제를 불러보시고 찬성공의 자를 부르면서 모는 이런 형제를 두었으니 헛되게 죽지 않았다고 말하고 책과 식량을 많이 주어서 청량산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이해에 숙부 송재 선생이 돌아가셨다. 29세 때에 아우 퇴계선생, 종제 수령, 질 인, 민귀서, 정효종, 손정, 김사문, 민기원 등과 같이 용수사에서 월하시회를 열어 즐겼고 이해 8월에 향시에 합격했다. 30세 되던 을유년 중종 20년(서기 1525)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31세 때 성균관에서 공부했으며 2년 후인 33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 승문원 권지정자로 선임되고 이듬해에 부정자로 승임된 후 선생이 두루 역임한 관직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35세 3월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 4월 승陞 통사랑 6월 승의부위 의흥위사용
36세 정월 승시교 윤유월 승무공랑봉교
37세 12월 승 선무랑
38세 정월 성균관전적겸 남학교수. 2월 세자시강원사서. 사간원정언. 3월 승 선교랑. 4월 겸춘추관기사관. 5월 성균관전적. 사간원정언 겸춘추관기사관. 9월 승훈랑이조좌랑.
39세 윤2월 겸승문원교검. 4월 승봉훈랑
40세 3월 승 봉직랑. 10월 현신교위 호분위사과 성균관전적(불부不赴)
41세 정월 공조정랑겸 승문원교리. 2월 이조정랑겸 승문원 교리. 3월 겸세자시강원문학. 5월 염관북도 복명. 겸 승문원 교리 춘추관 기사관. 6월 의정부검상.
42세 4월 조봉대부. 승 의정부사인겸 춘추관편수관 승정원교감 세자시강원문학. 7월 일본사신 선무사. 9월 홍문관응교겸 경연시강관 춘추관편수관 승문원교감.
44세 12월 복관. 조산대부 의정부사인겸 춘추관편수관 승문원교감(불부不赴).
45세 2월 봉렬대부 홍문관전한 지제교겸 경연시강관 춘추관편수관 승정원참교수. 봉정대부. 6월 사간원사간겸 승문원참교 제용감정 겸직여고. 7월 사복시정 겸직여고. 11월 수중훈대부.
46세 3월 사헌부집의 겸직여고. 4월 종친부전첨典籤겸 승문원교감. 7월 사복시정겸 승문원참교. 11월 종부시 검정 겸 홍문관전한 지제교 겸 경연시강관 춘추지편수관 승문원참교직제학 겸.
47세 정월 경상도 진휼어사, 윤5월 통정대부 승문원 동부승지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10월 좌부승지겸직여고.
48세 도승지 겸 경연찬참관 춘추관수찬관 예문관직제학 내의원제조. 7월 절충장군충무위상호군겸 오위장.
49세 정월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2월 검지중추부사 동지중추부사. 4월 충무위대호군. 5월 동지중추부사. 6월 사간원대사간. 10월 충무위상호군겸 오위장. 12월 예조참판. 사헌부 대사헌.
50세 윤정월 동지중추부사. 3월 충무위상호군. 5월 성절상사 부경赴京.
51세 3월 충무위상호군. 장악원판결사.
52세 황해도 관찰사
53세 동지중추부사 겸 동지춘추관사. 7월 오위도총부부총관. 9월 한성부우윤 겸 동지춘추관사. 10월 충청도 관찰사.
54세 12월 동지중추부사.
55세 4월 겸 동지춘추관사. 6월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복배 한성부우윤.
선생의 연보에 의하면 선생은 입조 20여년(33세~55세, 중종 23~명종 5년)동안에 종9품직에서 종2품직에 올랐으며 요직중의 요직인 이조정랑, 도승지, 문한직 등 내외 요직을 역임하였으니 선생의 환로는 매우 잘 열려졌으나 불행하게도 이기 윤원형 일당의 간독한 모함을 받아 그 높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사헌 한성우윤 등에서 끝나고 55세로 적지謫地의 노상에서 일생을 마친 것은 참으로 애석하고 통탄할 일이다.
2. 선생의 충효정신
선생의 충효정신은 선생의 가학에서 내려 받은 것이다. 진성이씨는 세칭 삼한갑족이라는 구족舊族은 아니나 시조 이후 누대 세록지가로서 입이효立而孝, 출이충出而忠의 가풍 속에서 선생이 자랐기 때문에 선생은 태어남으로서 유염환경하濡染環境下에 있었고 또 선생의 천품이 또한 온아 단정하여 퇴계선생이 묘지에 『자유자상봉수 회출군아 自幼姿狀?秀 ?出群兒』라고 말하셨듯이 아름다웠고 뛰어난 분이었다. 더구나 선생의 모부인이 매우 훌륭해서 선생의 교육에 특별한 배려를 했던 것이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선생이 육세 대에 부친이 돌아갔기 때문에 선생은 어린 나이로 고아가 된 것이다. 부친이 돌아갈 무렵에 퇴계선생은 한 살 되는 유아였고 육형제 중 백형 충순위공 잠潛만이 겨우 성취했을 뿐, 나머지 오형제는 모두 동자로 있었기 때문에 위로 두 형들에게는 계모가 되고, 선생에게는 친모가 되는 박씨 부인은 크게 집을 걱정하고 고아들의 장래를 근심해서 만일 이들이 문호를 지키지 못할까 근심 걱정하여 가난 속에서도 학비를 아끼지 않고 대어 주었기 때문에 선생의 형제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대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박씨 부인은 문예의 숙달에만 유의한 것이 아니라 지신과 근행에 더욱 훈계를 엄하게 하였다고 하니 선생은 참으로 훌륭한 어머님을 모셨으며 선생 역시 편모슬하에서 분발하여 대성도 했거니와 또 어머님에게 효도를 극진히 했던 것이다.
선생이 33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 승문원 권지정자로 출사한 후 3년 만인 36세 때에는 관직에 있으면서도 휴가를 청하여 고향의 모부인을 성친하러 시골을 다녀갔고, 또 38세 때에도 성친 차 귀향했으며 41세 때에도 성친 차 귀향했었다. 이때에는 아우 퇴계선생도 성균관전적으로 유경留京중이었는데 이때에는 온계 선생과 같이 귀향했으며 도중 죽령에 와서 선생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병신, 중종 31년)
楓林翠碧彩屛開
中有淸溪抱石臺
誤近忙途知不幸
了無遊迹到蒼苔
그 뒤 임인년(중종 37년)에 퇴계선생이 충청도 암행어사가 되어 이 죽령을 지나게 되었다. 이때에도 죽령에는 단풍과 벽윤壁潤이 있는지라 퇴계선생은 선생의 죽령 시에 화운和韻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潤樹楓林相映開
彩屛麗句憶銀臺
我今正作忙途客
佳處何綠保釋苔
(이 때에 이미 선생이 은대銀臺에 올랐기 때문에 은대는 선생을 말한다.)
이렇게 온계, 퇴계 양 선생은 형제사이에 우애가 깊거니와 모두 또한 박씨 부인에 대한 효성도 지극했다. 42세 때 시월에 모부인 박씨가 세상을 떠나니 선생은 관직 때문에 편양便養하지 못 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삼았다. 당상當喪해서 가례에 따라 예장한 후 성심으로 집상했으며 탈상하자 곧 관직이 내렸으나 취임하지 않고 이듬해 45세 때 이월에 비로소 다시 출사하였다. 또 일 년이 지난 7월에는 성묘하러 안동을 다녀갔고, 이듬해에도 성묘 차 귀향했으니 부모에 대한 선생의 지극한 효성을 알 수가 있다. 요사이와 같이 교통이 편리해도 매년 성묘 차 귀향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교통수단과 로편이 좋지 않은 당시에 이렇게 매년 성묘 차 예안을 다니러 간다는 것은 보통 효성 가지고는 못하는 일이다. 그러나 선생과 퇴계선생은 사마시에 합격하고 모두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무엇보다도 모부인에게 효도를 다한 것이었다. 더구나 중종 23년 무자년에는 선생이 문과에 급제하던 해요, 또한 퇴계선생이 사마시에 합격하던 해이니 이때에 모부인의 즐거움이 어떠했겠는가. 참으로 말과 글로 다할 수 없다. 퇴계선생의 시에 『兄專一道弟傳城 人比還鄕晝錦榮』이란 것이 있다. 兄이신 온계는 충청도백이요, 弟이신 퇴계는 단양성주이니 참으로 일문의 영광이다. 성현의 말씀에 입신양명立身揚名해서 이현부모以顯父母가 효지종孝之終이라 하였으니 선생의 효도는 이로써 다했으며 이것이 가장 모부인을 즐겁게 해준 것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송재 선생은 선생이 문과에 급제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돌아갔다. 숙부 송재 선생은 형님 없는 조카들을 기르고 가르치느라고 고심하였다. 특히 온계, 퇴계 두분에게는 크게 기대하면서 훈도하였는데 겨우 선생의 결혼하는 것만 지켜보고 돌아갔다. 칭찬도 하고 격려도 하고 꾸짖기도 한 숙부의 입장 눈물어린 지도와 교육을 다했다. 선생이 결혼하던 이듬해 19세 때 선생이 용수사에서 공부할 때 송재 선생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보내면서 선생의 앞날을 크게 기대했던 것이다.
碧嶺圍屛雪打樓
佛幢深處可焚油
三多足使三冬富
一理當從一貫求
經術莫言靑紫具
藏修須作立揚謀
古來業白俱要早
槐市前頭歲月주猶
송재 선생이 선생에게 기대하고 가르치던 숙부의 사랑에 못지않게 선생도 또한 평생을 두고 송재 선생을 잊지 않고 추모했던 것이다. 선생은 이렇게 집에서는 효를 다하고 나아가서는 군주와 국가에 충을 다했던 것이다. 선생의 충성은 선생 官界관계 생활을 통해서 다각도로 발휘되었음으로 다시 언급하겠다. 특히 중형 의가 조사早死하자 선생은 그 조카를 데려다가 양육하였으니 이는 모두 선생의 의리의 대도大道를 손수 실천한 학행의 한 표본이었다.
3. 관계를 통한 선생의 업적
선생은 33세 때 중종 2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정자의 말직에서 출발하여 5년이 지난 38세 때 계사년에 사간원 정언으로 승진되었는데 이것이 첫 대간직臺諫織이었다. 그 후 49세 때 중종 39년 갑진해에 사헌부 대사헌직에올랐다. 실로 20여 년 동안 대각臺閣에 출입하면서 계언啓言하고 상소上疏한것이 모두 훌륭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선생이 말년에 화변을 입어 적로에 일생을 마쳤고 또 그 후에 자손들이 수차 병란을 겨는 동안에 계언 이나 소문 하나도 보존되지 않고 산일되어 전하지 않아서 지금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것이 매우 유감 된 일이다. 이렇게 20여년이나 조정에서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나 스스로 근행자지勤行自持하고 교유를 삼가서 악인과 사귀지 않았으며 목멱 산하 명례방에 조그마한 초가에서 검소한 생활로 자족하였으며 그 적은 서재를 운암석실 이라고 해서 저녁때 퇴조하거나 여가가 있으면 경서를 읽어서 학덕을 쌓았다.
선생의 교우로서는 송강 조사수, 죽창 안정, 송강 권응연, 묵암 권응창 등과 교유하면서 도의를 상마하였다. 선생이 이좌랑吏佐郞이되자 처족인 김안로가 선생을 만나 보고자했다. 그러나 선생은 김안로의 인품을 아는지라 끝내 김안로의 유혹을 물리치고 성친 환향하여 그 수중에 잡히지 않았다. 이를 보면 선생은 교유를 신중히 했으며 또 출세나 세도에 관심이 없이 오직 도에 살고 의에 살아서 충성으로 국가에 봉사하고자 했던 것이다.
선생이 41세 때 이조정랑으로 세자시강원문학을 겸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관북도안찰사로 임명되었다. 오월이라 벌써 염서인데도 불구하고 하루도 지체하지 않고 멀고 험한 산길을 걸어가서 발이 부풀고 터져도 쉬지 않고 부임하였으며 손수 방방곡곡마다 민정을 살피고 고락을 백성과 같이 했던 것이니 이러한 것이 모두 선생의 충성심에서 우러나는 처사였었다.
또 선생이 47세 되던 해에 삼도에 큰 재앙이 있어 선생은 진휼어사가 되어 경상도로 내려가게 되었다. 선생이 안동 일직현에 와 있을 때 중종대왕은 유서를 승정원을 통해 내려 보내서 공경하게 받았다. 이때 내려진 치하유서에 의하면 선생은 일일이 촌마을까지 다니면서 열심히 진구하는데 진력했기 때문에 이러한 보고가 왕에게까지 전해져서 선생의 노고를 격려하는 유서였다. 이때 선생은 백성 대하기를 마치 어진 부모가 자식 대하듯 자비하였으며 명산경승의 곳을 다니면서도 조금도 산수의 경치를 즐기는 마음은 가지지 않고 오직 이재민의 구휼에만 힘써서 많은 성과를 거두어고 선생이 가는 곳마다 굶는 이가 없게 하고 민심을 안정시켰으니 선생은 정성껏 소임을 다했다.
오월에 선생이 복명하였는데 이때 중종대왕께서 사정전에 불러 보시고 상세한 기민의 진구사항을 복명 받았다. 이때 선생의 복명으로 풍기군수 주세붕과 안동부사 김광철과 선산부사 어영진도 모두 표창되었다.
49세 때에 중종대왕이 승하하니 국가로 보나 선생의 입장에서 보나 이는 매우 불행한 일이었다. 오십 세 때 성절사聖節使로 연경燕京을 다녀왔는데 이때, 사신일록인 조천록을 남겼으나 전하지 않으니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때 아들 복을 데리고 갔는데 귀로 통주에서 아들 복을 잃었으니 선생의 상심이 어떠하랴. 그러나 왕명을 받은 몸이라 억지로 식사를 하고 건강을 보살펴 귀국 복명하여 진충보국의 정성을 다하였다.
이때에 또한 권문세가에서 자녀의 혼담이 있었으나 선생은 위란한때에 권귀지문權貴之門과 결연함은 싫다고 하여 거절하였으니 선생의 고결함은 참으로 숙연하였다. 52세 때 사월에 특히 황해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이때 황해도 일대에는 크게 기민과 질병이 있어 관찰사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선생이 그 고역을 맡게 되었다. 이때에 감사로 부임함에 신재 주세붕이 시를 지어 전송餞送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須知惟簡在王心
隨處摩民白日臨
이때에 선생은 중앙정계에 간신들이 충량忠良을 모략함에 싫증을 느껴 지방에 내려갈 생각을 했는데 희망한 경상도로 내려 보내지 못하고 어려운 황해도로 내려 보내 주었다. 이때에 또 퇴계선생도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위로해 주었다.
辰韓杖節且不論
乞暇南來那易得
황해도로 내려간 후 정사를 맑고 간결하게 하여 백성을 평안하게하고 극력 기민을 진구해서 치적을 많이 올렸다. 그 후 여러 경직을 거친 다음 오십 삼세 시월에 충청도 관찰사로 전임되었다. 인종 원년에 있었던 을사사화와 명종 이년에 있었던 정미사화이후 중앙정계는 매양 선생에게는 불안해서 선생 자신이 희망해서 외직을 구해 나간다는 것이 결국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내려왔는데 이때에 충주옥사가 일어나서 이것이 결국 선생을 불행하게 만들었고 이것이 화근이 되어 억울하게 적로에서 일생을 마치고 말았다.
선생의 관직을 통해서 일관된 자세는 정正과 직直 그리고 충忠과 성誠이었다. 대사헌으로 이기를 논핵論劾한 것은 직이요, 지방 수령이나 어사로 가서 치적을 올린 것은 충과 성이었다. 그리고 간악한 무리들과 교결을 끊은 것은 정이다. 선생은 누차 간악배의 유혹이 있었으나 끝내 악과 타협을 거절하고 정의에 살다 죽음을 택하였으니 선생의 일생은 오직 정과 직, 그리고 충과 의가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면에서 선생은 정암 조선생과 회재 이선생과 같은 입장과 운명에 놓여 있었다고 하겠다. 또한 청빈으로 일생을 보냈으니 관계생활의 모범으로 백세의 사표가 되었다. 대산 이선생이 서문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선생은 참으로 강대剛大하고 준위俊偉한 인물로서 참으로 국가에 크게 기여할 인물이었으나 중도에 간악한 무리의 횡액에 걸리어 불행한 죽음을 당하였으니 참으로 우리는 역사상에 간혹 이러한 일이 있음을 슬퍼할 뿐이다’ 라고 하였으니 선생을 사모하여 통한할 일이다.
4. 을사사화와 선생
중종대왕이 재위 삼십 구년에 승하하고 세자가 왕위에 오르니 이 분이 인종대왕이다. 인종은 왕위에 오르면서 유관, 이언적, 유인숙 등을 등용하고 선생을 대사헌으로 등용하여 크게 사림을 요직에 앉히고 계모 되는 문정왕후의 마음을 평안히 하기위하여 문정왕후의 친정동기인 윤원형을 공조참판의 자리에 앉혔다. 그뿐만 아니라 윤원형의 복심인 이기를 우의정에 등용하려했다. 이때 대사헌으로 있던 선생은 이기의 우상右相 등용은 부당하다고 공박하여 우상 취임을 못하게 했다. 이때부터 선생은 윤원형 이기 일당의 정적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조정에는 대윤 소윤의 대립이 있었으니 대윤은 윤임을 중심으로 모이고 소윤은 윤원형을 중심으로 모였다. 윤임은 장경왕후의 동생이요,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동생이었다. 장경왕후는 인종모후요, 문정왕후는 명종의 모후였는데 장경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나니 계비로서 문정왕후가 들어서게 되었다. 새로 즉위한 인종이 인자했고 또 사림을 가까이 했음으로 인종대왕이 즉위하자마자 정치가 쇄신될 것이라는 기대가 컸는데 느닷없이 소윤당인 소인 이기가 우상에 오르게 되니 사림들이 모두 그 취임을 반대해서 좌절되자 사화士禍의 씨가 뿌려진 것이었다. 이때 선생은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헌납 이치와 합계해서 이기의 등용을 극력 반대하니 윤원형 등 소윤 일당이 선생을 구적으로 삼았다. 물론 이언적, 유관, 유인숙, 송인수, 권발 백인걸, 노수신 등 많은 사림들도 모두 소윤당의 등용을 반대하니 윤원형, 이기, 임백령, 정순붕 등은 백방으로 사림을 해칠 마음을 품고 없는 사실을 꾸미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해 을사년 칠월에 인종이 승하하니 대윤당은 일시에 불운이 닥치게 되었다. 인종의 이복 아우인 명종이 즉위하니 나이 겨우 12세였다. 정사는 모후인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윤원형 등 소윤 일당은 대윤당을 몰아내기 위하여 대윤당이 명종 추대를 반대하고 봉성군(중종의 8자)을 신왕으로 추대하려 했다고 모함하여 대윤일당을 역모로 몰아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을 사사케 하고 많은 사림과 대윤당을 축출하고 혹은 파면시켰다. 이것을 을사사화라고 한다. 이때부터 정권은 윤원형, 이기 일당이 쥐고 있었고 왕명은 문정왕대비의 일언으로 좌우되었다. 대윤당을 몰아낸 소윤당은 그 여세를 몰아 명종 6년경까지 살육 또는 축출이 계속 되었다. 피화인물이 일백 여명에 달했으니 을사사화가 얼마나 규모가 큰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또 명종 이년 에는 양재역벽서사건을 일으키어 이것을 구실삼아 봉성군, 송인수, 이약수, 권발, 이언적, 유희춘, 노수신, 정자 등을 을사잔당이라고 하여 모두 죽이고 귀양 보내니 세상에서 정미사화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소윤당의 천하가 되니 선생의 입장은 점점 더 난처해졌다. 인종대왕이 세자로 있을 때 선생은 세자시강원 문학직에 뽑히어 동궁의 총애를 받은지라 인종대왕이 오래 재위했더라면 선생은 참으로 좋은 시절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왕이 일찍이 돌아가니 선생에게 이러한 불행이 없었다. 그리하여 이기 등의 간악한 무리가 선생을 모해할 의사를 가졌고 또 선생 역시도 간악한 무리와 조정에 같이 있기가 싫어서 외직을 원하였던 것이다.
5. 충주옥과 선생의 최후
선생이 오십 사세 때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 오월에 충주에 옥사가 생겼다. 이홍남은 이약빙의 아들이었다. 이약빙은 이약수와 이약해의 아우로서 정미사화에 사사당한 분이다. 이약빙 역시 정미사화 때 사사되었다. 이러한 정의에 목숨을 바친 두 형을 가진 분이다. 그런데 아들 이홍남도 연좌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 뒤 이홍남은 아우 이홍윤이 진사 강유선과 공모하여 모산수를 왕으로 추대한다는 무고를 했던 것이다. 원래 홍남 홍윤 형제는 사이가 좋지 않아서 홍윤을 이렇게 모략했는데 정부에서는 아우를 고발한 것은 멸친滅親하여 대의를 지켰다고 해서 홍남의 죄를 풀어주고 특히 서용하여 장단부사로 임명하였다. 이때 충주는 역적의 주州라고하여 강주降州 하여 유신현이 되었고 죄 없는 많은 사람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었다. 이때 홍남은 모친의 상중喪中인데도 관직을 받았고 또 아우 홍윤의 남은 재산을 몰수했다. 선생이 이를 알고 홍남은 악인이라고 중인衆人 앞에서 조소하였더니 홍남이 이를 듣고 선생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즉, 처음에 홍윤이 죄인이 됨에 그 가산을 몰수 하였던 바, 홍남이 유신현감 이치한테 물어오기를 이러이러한 가재家財를 몰수했느냐고 묻고, 그 가재家財는 실은 자기의 재산이라고 하여 반환해 갔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안 감사였던 선생은 형이 아우를 무고로 몰고 그 가재마저 뺏아 가려고 하니 그를 패륜으로 여기고 고약한 놈이라고 했던 것인데 이 말이 홍남에게 전해졌던 것이다. 이때부터 홍남은 백방으로 선생을 무고하기 시작했다. 물론 뒤에 시비가 가려져서 아우를 무고한 사실이 탄로되어 홍남은 관직을 삭탈 당했지만 선생은 홍남의 무옥誣獄으로 크게 화를 입는 일이 생겼다. 충주 유신현민 최하손의 무옥사건이 그것이다. 최하손은 관장官長에게 공손치 못하다는 죄를 짓고 의주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홍남이 아우를 무고해서 풀려나는 것을 보고 자기도 몰래 도망쳐 와서 홍남과 같이 역모 사를 고변해서 죄에서 풀려나려고 했다. 유신현에서는 홍윤의 여당을 열심히 찾아내는 판국인데 최하손이라는 자가 관청에 있는 품관 있는 향회의 회의록을 훔쳐가지고 서울로 달아나서 무고하려 했으나 때마침 유신현 나졸에게 붙잡혔다. 이때 충주읍 성주 이치가 이를 영문에 보고해오니 감영에서는 이를 중앙에 보고하는 한편 법에 따라 치죄하는데 한번 초사招辭를 받은 다음 죽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일년이 지난 오십 오세 때 선생이 한성 우윤으로 있을 때 이 일을 구실로 양사에서 선생을 청죄하게 되었다.
이때 대사헌은 송세형 이었고 원호변이 사간이었는데 원호변은 이홍남의 처형이었고 또, 이들은 모두 이무강과 절친했는데 모두 이기의 부하였다. 원계검은 원호변의 숙부였는데 이들이 모두 선생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간악한 무리였다. 처음 이홍남이 유신현 최하손 사건을 원호변과 원계검에게 말하고 원계검이 이무강에 말하여 구화構禍하자고하니 이무강이 크게 기뻐하여 이기에게 말해서 선생을 무고하게 된 것이다. 이무강은 한때 선생과 같이 사관으로 있었는데 그때부터 선생이 그와 같이 상종하기를 기피했던 것이다. 이무강은 정처正妻를 버리는 무뢰성이 있는 자인지라 평소부터 선생은 그를 싫어하던 터였다. 경술년 명종 오년 우윤으로 경직을 갖자 이기는 선생에게 최하손 사건과 아울러 구수담과 붕비朋比 라고 추론하였다. 구수담이 대사간으로 있을 때 이기를 규탄하였음으로 항상 보복하려든 차에 구수담이 을묘명인을 복직시키고자 상소를 하였다.
이 상소를 계기로 구수담과 붕비라고 한 것은 왕을 격노케 하여 선생의 죄를 확호確乎하게 만들기 위한 허위 날조였다. 원래 선생과 구수담은 내왕이 없었다. 다 같이 정의 충직한 명신으로서 이기와 같은 간악한 무리를 규탄하였을 뿐이다.
마침 명종 오년 칠월 십육일 양사에서 합계로 선생의 유신현 치옥사건을 지적하여 청죄했다. 이 무고 죄목은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 유신옥의 죄인에게 몰수될 전답을 빼돌리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신현 옥사 일로 선생의 죄목이 고발되자 장령 이희손이 찾아와서 선생의 죄목을 알려주자 선생은 미리부터 짐작한 일이며 일이 억울하게 되더라도 나는 비굴하게 죄를 면 하려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또 이때 대사헌 송세형이 만나 보고자 했다. 이 때 선생이 송세형을 찾아가서 부탁을 하고 그들에게 협력하면 죽음을 면할 수 있다고 했으나 선생은 어찌 인신人臣으로 불의인줄 알면서 비굴한 행동으로 죽음을 면하겠는가 하고 끝내 송세형 만나는 것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드디어 이기일당의 책동으로 7월 17일에 추고하라는 전지가 내려지고 8월 3일에 선생은 의금부에서 구금영장이 내려졌다. 이때, 양사에서 유신옥사의 문안을 조사하니 오직 못 쓰는 잡물뿐이라 쓰지 못한다는 표를 해 놓은 것만 있었고 또, 문안에도 필요치 않다고 되어 있었으나 유독 이무강은 짚오래기나 쓰레기라도 어찌 빠뜨리겠느냐고 하여 추고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가족들이 비로소 이 사실을 알고 달려와서 당황하고 놀래어 눈물을 흘리니 선생은 안색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였으며 내가 미리 각오한 것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말하고 의금부 문전에 나와 대명하고 있었다. 이때 많은 친구들이 달려와서 위문하니 도리어 만류하면서 공들이 서로 출입하게 되면 도리어 나의 화가 중하게 될 것이라고 만류하시고 밤 이경에 하옥되었다. 이때 금부당상은 윤원형이었다. 이때, 이무강이 주동이 되어 양사에서 구수담과 같은 죄목으로 장살코자 했다. 이때 유신현감 이치도 하옥되었다. 후임으로 현감이된 유중영(서애 유성룡 부친)은 유신현의 추안문서를 빨리 송부하지 않았다고 해서 파직 당했다. 그 후임으로 이충남이 현감이 되었으니 모두 선생에게는 불리하게 되어 있었다. 이무강은 없는 죄를 자복하라고 하니 선생이 죽음으로 부인하였다. 8월 10일 겨우 감사減死하여 갑산으로 정배定配시키라는 명이 내렸다. 이때, 양사에서 더 추고하자고 했으나 왕이 듣지 않고 정배하기로 하명하였다. 이 옥사에서 이치는 고문에 못 이겨 죽었고 선생의 죄목은 죄인의 재산을 돌려주었다는 것, 공모한 무리들을 기록치 않았다는 것, 그리고 고변 인을 장살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죄목은 이기일당이 선생을 사경에 몰아넣기 위한 허위조작이었다.
이리하여 선생은 다섯 차례나 심한 고문을 당했지만 사람들이 의심할 정도로 신색이 평시보다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물론 극심한 형장의 고통은 표현할 수 없었겠지만 조금도 안색에 나타내지 않고 태연한 자세로 임하였다는 것은 선생의 인격과 초연한 의지의 소산일 것이다.
왕명으로 사형에 처하지 않고 적소로 유배시키라고 하였을 때에 고문에 의한 심한 상처 까닭에 길을 떠날 수 없는 형편을 보고 의금부도사 우언겸이 조금 조리한 후에 떠나는 것이 可 하다고 하였다가 이기일당에 몰리어 큰 화를 입을 뻔하였다.
따라서 치료도 못하고 그해, 8월 12일 서울을 떠나 갑산을 향하는 도중 양주군 미애리 민가에서 14일 고고하고 한 많은 일생을 마치셨다.
정배지로 떠나기 전에 양사에서 일곱 차례나 합계로 선생을 죽이자고 했으나 명종이 듣지 않아서 정배로 정해졌다. 寗, 교 등 두 아들이 집을 모조리 뒤져도 미이곡필목십필米二斛匹木十匹 뿐이었다.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하사받은 채단삼필綵緞三匹과 녹피鹿皮 하나가 있는 줄 알고 채단과 녹피를 팔아서 노자로 보태 쓰려고 했으나 난중에 누가 훔쳐가고 없으며 심부름 하는 사람들에게도 인정 쓸 것이 없어 여러 아들들의 옷을 대신 주었다. 행구가 없어서 아들 영을 시켜서 행구를 갖추어 가지고 뒤에 따라오게 하였다. 선생의 입조 20여년 관직에 있으면서 살림살이가 이렇게 곤궁하였으니 선생의 청렴함을 알 수 있으며 이를 보는 사람들이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선생의 병환은 시시각각으로 더해가서 13일에는 행보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선생은 말없이 오직 시 한수를 가는 목소리로 읊었으니 다음과 같다.
大同江水何時辰
別淚年年添錄皮
이 시는 을사사화 이후 많은 선류善類들이 계속 유배되어 출척黜陟되니 어느 때, 끝일 것인가 하는 뜻이고 서북로로 떠나가는 이별의 눈물이 해마다 더해간다는 상심의 뜻이리라.
이 시 한 수를 읊조리고 말을 못하시고 14일 해시亥時에 양주 민가에서 숨을 거두었다.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양사에서 계청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20일에서야 아들 영, 교 등이 봉상奉喪하여 28일에 조령을 넘어 9월 초에 온계리에 빈소를 차리고 12월 12일에 선생이 거하시던 3리 밖에 있는 연곡에 안장하였다. 아들이 3년 시묘살이를 하니 동민들이 이 마을을 빈소동이라고 불렀다.
6. 선생의 후광과 그 문학
선생이 적로에서 객사한 것은 55세 때 경술년 명종5년 8월 14일이었다. 그 후 선생을 모함한 이기는 곧 영의정에까지 승진했으나 이내 중풍병에 걸렸고 3년 후인 명종 7년에 죽었다. 그 후 명종 20년에는 명종의 모후로서 세력을 부리던 문정왕후가 돌아가고 선생을 무고한 장본인인 윤원형마저 삭탈관직을 당하여 내쫓겼으며 적지인 강음에서 죽었다. 2년 후인 명종 22년에는 명종이 세상을 떠났다. 명종은 승하하기 몇 년 전부터 사화 일으킨 것을 뉘우치기 시작했으나 끝내 사화에 피화된 제현을 설원雪?시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명종을 말년에 가서 선도한 것은 백인걸, 심의겸, 김효겸, 강사상, 김귀영, 유성룡, 기대승, 박순, 이이, 이준경, 심통원, 노수신, 정유길, 이양원, 정철, 홍섬, 이택, 민기, 李黃 등 사림파의 관료들이 적극적으로 권신과 척신을 배척했기 때문이었다. 명종 22년에 명종이 승하하자 사자嗣子가 없었음으로 이준경, 백인걸 등이 하성군을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니 이분이 선조대왕이다.
선조는 처음부터 사림파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음으로 즉위하자마자 명종 때에 피화된 사대부들을 신원시키기 시작하였으니 을사사화 후 피화된 자, 35명을 모두 복관시켜 설원시켰다. 이때 선생도 이들과 같이 관작이 복관되었다. 이때에 선조대왕이 ‘李瀣는 대사헌시에 이기를 논박한 고로 기가 그 분을 갚기 위하여 무고함이라’하시고 그 직첩을 환급하셨다. 이렇게 관작이 복관되자 퇴계선생은 억울하게 사화당한 중형을 생각하여 묘지墓誌와 묘갈墓碣을 찬撰하여 매지입석埋誌立石을 했다.
그 후 효종대왕 갑오년에는 지방 유림들이 선생이 일찍이 우거한 곳인 영주군 치동에 삼봉서원三峯書院을 세워 선생의 위령지로 삼았다. 그 후 현종 8년 정미년에 온계구리溫溪舊里에 청계서원淸溪書院을 세워 또한 선생의 위판을 봉안했으며, 또 숙종 17년에는 당시 대신이 계언해서 증직이 내려졌다. 이때에 贈 自獻大夫 吏曹判書 兼 知經筵 義禁府事 弘文館 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 成均館事 世子左賓客 五衛都摠府 都摠管의 관작이 내려졌다. 이때에 대신은 영상에 권대운이요, 좌상 목래선 우상에 민암이 김경원 후임으로 있었다. 이때 계언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고 대사헌 이해는 선정신先正臣 이황의 형으로 중종 인종 양조의 명신입니다. 헌납 이치와 같이 이기의 정승 됨을 반론했습니다. 이기가 정승이 되자 기유년 명종4년에 선생을 무고하여 마침내 화를 입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퇴계선생의 묘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치는 포상되어 증직이 내려졌는데 홀로 선생만이 아직 그대로 있습니다.』고 했다. 그래서 삼봉서원과 청계서원에서는 유림들이 선생의 위패를 개제봉안하게 되었다. 정조8년 갑진에 시호를 정민貞愍이라고 내리셨다.(守節淸白曰貞 使民悲傷曰愍) 그리고 선생의 후손들에 대하여 말하자면, 선생은 18세 때 연안 김씨 가인의 부흥의 女를 맞이하여 5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복인데 선생이 성절사로 중국을 갈 때 종사랑으로 시종했던 것인데 귀로 통주에서 로병으로 조졸하였다. 그 후 선생의 제2자 영이 가계를 이어 받았다. 영은 진사로서 지례현감을 지냈다. 제 3자는 교로서 대흥현감을 지냈으며 4자는 치이며 5자는 혜로 공조좌랑을 지냈다.
이상과 같이 선생은 5형제의 자제를 두었으며 그 후손은 수백 년 동안 번성하여 사환과 문한이 속출하여 그 혁혁한 후광은 주지하는바 연보와 자손록에 수록되어 있다.
선생의 유문은 많았으나 선생의 피화로 해서 많이 일실逸失되고 또, 병란을 겪는 동안 많이 없어졌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러나 선생이 복관되자 퇴계선생이 묘갈과 묘지를 지어 세상에 알려졌고 또 숙종 때 와서 증직이 내려지자 후손들은 유적을 찾기 시작했다. 선생의 6세손 진사 지현공 견룡이 가전해 오던 약간의 유문을 정리하고 여기에 여러 문적에서 선생의 문자를 찾아내어 유고 1책 2권을 편집하였고 또, 7세손인 持平公 급級이 세계도와 연보를 편찬編纂하였다. 연보는 한훤당선생의 연보에 준해서 마련되었다.
선생의 문집은 3책인데 그중 1책은 선생의 유문이며 서문은 대산 이상정이 근찬했고 선생의 행장은 눌은 이광정이 지었다. 대산선생 서문이 임진년 3월 술자로 되어 있는바 이는 초판이 영조 48년에 인출된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숙종 17년에 증직이 내려지니 그때부터 원고를 정리하고 행장을 얻고 해서 영조48년에 간행된 것이다. 전질 3책 중 1책은 세계도와 연보로 되어있고 제2책은 선생의 유고로서 1권은 약 80수의 시가 수록되어있고 2권은 습유拾遺와 부賦3편 시6수와 유묵이 수록되어있다. 제3책은 부록으로서 3권, 4권으로 되어있다. 3권은 묘지와 묘갈 그리고 만사輓詞 등이 수록되어있고 4권에는 행장 유사 척록 봉안문 축문 등이 수록 되어있다. 선생의 문집은 정조 8년에 정민貞愍이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또 번암 채제공의 신도비명이 지어지자 다시 중간되었는데 선생 문집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약 80여수의 시중에 대부분이 퇴계선생과 주고받은 시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 선생과 퇴계선생의 관계를 말하는 항에 다시 재론되기 때문에 문집 내용을 따로 解題해제하고 설명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또 행장과 묘갈 묘지 등의 내용에 관해서는 선생의 『가계와 생애』에 언급되었기 때문에 따로 다루지 않기로 했다.
7. 온계선생과 퇴계선생
온계선생은 6세 때 고아가 되었으며 퇴계선생은 생후 1년 만에 고아가 되었다. 두 선생은 모친 박씨 부인의 슬하에서 자랐고 엄하고 인자한 친모와 또 매우 엄격하고 무서운 숙부 송재 선생한테서 같이 글을 배우고 그 훈도 밑에서 자랐다. 퇴계선생의 시(후기)에 『敎嚴慈母斷織機 誨感叔父焚香襄』이라는 시구는 이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6형제 중 유독 온계선생과 퇴계선생은 뛰어나서 송재 선생이 이 두 조카에 크게 장래를 기대했었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금곤옥제이니 금곤옥우이니 하는 말도 이러한데서 얻어진 말인 것이다. 여섯 살의 차이가 나는 형제간이니 형은 아우를 사랑했을 것이고 아우는 형을 따랐을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더욱이 이 두 형제는 다른 형제와 달라서 유달리 학문에 뜻을 두었고 또 도학과 성현지도를 닦는데 뜻을 두었기 때문에 더욱이 밀어주고 당기고 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온계선생은 을유년 30세 때 진사시에 합격했고 퇴계선생은 무자년 28세 때 진사시에 합격했다. 온계선생은 무자년 33세 때 문과에 합격해고 이해에 퇴계선생은 사마시에 합격했고 또 퇴계선생은 34세 때 갑오년에 문과에 합격했으니 온계선생 보다 6년 뒤에 퇴계선생이 문과에 급제한 셈이다. 이렇게 온계는 앞서고 퇴계는 뒤따라서 사마시나 문과에 합격했으니 형은 항상 아우를 이끌어 갔다. 퇴계선생의 연보에 보면 진사시에 합격한 후 퇴계선생은 다시 문과에 응할 생각이 없었으나 온계선생이 모친을 시켜 문과에 응시할 것을 퇴계에게 권하게 하였기 때문에 퇴계선생이 과거에 응해서 합격하게 된 것이다. 물론 형으로서도 권고를 했겠지마는 특히 어머니를 시켜서 과거에 응하게 한 것이 바로 온계선생 이었던 것이다.
온계선생이 을유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이듬해 병술년에 31세 때 성균관에 입학했는데 퇴계선생은 무자년 28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임진년 32세 때 문과 초시에 합격하고 계사년 33세 때 성균관에 입사入舍했다. 이듬해 34세 때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을 얻어 성균관을 떠났지만, 퇴계선생이 성균관 서재西齋에 있을 때 7년 전의 형 온계선생을 생각해서 시 두 수를 남겼다. (註 :「高齋云云」의 시는 온계선생께서 성균관에 있을 때인 병술년 소작所作이니 퇴계선생 28세 때의 작품으로 ‘山居’ 시이고, 「卜築云云」은 ‘芝山蝸舍’시로 퇴계 31세인 신묘년에 지은 것이니, 퇴계선생이 성균관 서재에 있을 때 일은 아니다. 퇴계선생이 성균관에 유학한 것은 33세 때인 계사년(서기 1533년)의 일이다.<편집자 주>) 시는 다음과 같다.
高齋蕭灑碧山傍 抵有圖書萬軸藏
東澗遼門西澗合 南山接翠北山長
白雲夜宿留첨濕 淸月時來滿室凉
莫道山居無一事 平生志願更難量
卜築芝山斷麓傍 形如蝸角祗身藏
北臨墟落心非適 南읍烟霞趣自長
但得朝昏宜遠近 那因向背辨炎凉
己成看月看山計 此外何須更較量
이 시를 지어 보내 온계선생에게 보내니 형 역시 시로서 화답했다고 하는데 그 시는 유고에 보이지 않으니 애석한 일이다.
또 퇴계선생이 성균관에 있을 때 선생 댁을 찾아와 시 삼수를 지어놓고 갔는데 그 시는 관계에 진출하는데 보다도 학문하는데 뜻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때에 퇴계선생이 형님 댁을 찾아와서 책상 위에 지어놓은 시 삼수는 다음과 같다.
劍佩장장滿曉聽 薇坦臣入五雲경
小齋惟有圖書靜 還似當年舊院庭
細兩今朝欲濕泥 南風時復無槐技
我來獨自關門坐 爲賦思君一首詩
風雲漠漠困淵沈 世事經難○素心
從此不如歸舊隱 白雲深處聽溪音
이 시를 우연히 책상 위에서 얻어 보고 선생은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다.
槐乏絲毫補聖聽 居然早退紫宸경
雀羅門外客誰到 午睡醒來雨滿庭
薄雲疎雨不成泥 返照蛛絲閃樹枝
寂寞小齋仍獨坐 晩來淸興動吾詩
紛綸理氣自升沈 窮達元非動此心
莫道從今歸舊隱 人間底處會知音
이때 선생은 목멱 산하 명예방에 살면서 소나무 숲 옆에 소서재小書齋를 지어 운암석실雲巖石室이라고 이름을 지었고 취미翠微라는 당호를 지어 스스로 취미헌翠微軒이라는 호를 가지기도 했다. 여기서 온계선생은 여가 있는 대로 책을 벗 삼아 공부를 하였는데 퇴계선생이 여기를 찾아와 보니 경치 좋고 조용한 곳에 서재가 꾸며져 있으니 퇴계선생도 문득 이러한 곳에서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난 것 같다. 여기에 대해서 온계선생은 과거를 권하고 관계에 나와서도 학문은 할 수 있다고 하는 시를 지어 화답한 것이 있다.
병술년 중종 21년에 선생이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퇴계선생은 모부인을 뫼시고 온계리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다. 이듬해 선생이 문과에 합격한 후 곧 승정원 권지정자의 관직에 처음 올랐는데 퇴계선생도 6년 뒤인 문과 합격 후 바로 이 자리에 첫 출사를 했다. 선생은 서울에서 모부인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문과에 합격했고 퇴계선생도 모부인을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하여 선생을 따라 6년 후에 문과에 합격했다. 이렇게 퇴계는 온계가 걸어가는 길을 따라서 나란히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또 선생은 당시 젊은 사림 중에서도 명망이 있는지라 권신 김안로가 선생을 가까이 하려고 했다. 김안로는 선생의 처족妻族이 된다. 선생을 만나자고 했으나 선생은 성친 차 귀향한다는 핑계로 만나 보기를 거절했던 것인데 퇴계선생 역시 김안로의 유혹을 받았으나 물리쳤던 것이다.
또 모친 박씨 부인이 돌아가기 전 해인 병신년에 선생은 아우 퇴계선생과 같이 안동으로 내려갔는데 이때 선생은 이미 관직이 이조정랑이었고 퇴계선생은 성균관전적으로 있었는데 같이 죽령을 넘으면서 선생이 읊은 시는 이미 소개하였고 또 퇴계선생이 41세 때인 임인년 중종37년에 어사로 다시 죽령을 넘을 때 선생의 소회를 읊은 시에 화답해서 시를 지어 읊었으니 두 형제의 형제지의兄弟之誼는 참으로 두터웠던 것이다. 또 선생의 생애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선생이 12세 때에 송재 선생이 진주목사로 있을 때 선생은 중형되는 훈도공 하와 같이 진주 월아산에 있는 청곡사에서 공부했는데 그 후 계사년 선조 26년에 퇴계선생이 청곡사를 지나면서 중형들이 독서하던 것을 생각해서 시 한수를 남겼다. 이 시는 생애편에 수록하였기에 다시 옮기지 않겠지만 이러한 것을 보면 퇴계선생은 또한 중형을 생각하는 것이 남달리 유별해서 항상 선생을 사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임인년 퇴계선생이 선성 산수간에서 몽유하는 꿈을 꾸고 몽유시를 지어 온계선생에게 보냈다.
霞明洞裏初無路
春晩山中別有花
偶去眞成搜異境
餘齡還欲寄仙家
여기 대하여 온계선생은 다음과 같이 화답하여 시를 지었다.
絶勝林巒窈窕處
無人開落幾春花
相期早晩歸休日
薄業溫溪有兩家
또 병신년 온계선생이 41세 때 7월에 온계선생이 모친의 성친 차 휴가를 얻었고 퇴계선생은 이해에 36세 때인데 역시 7월에 휴가를 얻어 성친 차 온계와 같이 동도 귀향하였다. 이 해에 온계선생은 의정부 검상檢詳으로 있었고 퇴계선생은 성균관 전적겸 중학교수로 있을 때이다. 이해 구월에 퇴계선생은 호조좌랑이 되던 해이다. 온계집에 보면 이 해 같이 성친 차 죽령을 넘은 것으로 되어 있고 또 온계, 퇴계 양선생의 두 연보를 보면 모두 이 해 7월에 성친 차 휴가를 청했다. 그런데 퇴계집 별집1권을 보면 병신7월 회일에 온계 양 선생이 모두 西齋서재에 동숙했다고 되어 있다. 이 때 퇴계선생은 중형 온계와 헤어지는 心懷심회를 시 이수를 지어 표했다.
對牀風雨西齋夜
何事還爲腸斷聲
쇄淚령原悲不盡
分飛又向楚南城
共約靑山映黃髮
何時官爵棄如泥
怪來今夜冬眠處
風轉蕭蕭雨轉凄
『생애』에서도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이 때 중앙에 윤원형 이기 등이 세력을 잡고 있는지라 선생은 자원해서 지방직을 희망했다. 그러나 남쪽을 바랐는데 남쪽을 보내지 않고 어려운 형편에 있는 황해도로 내려 보낸 것이다.
선생이 또 황해감사로 있을 때 아우 景淸 (역자註: 찰방공 징)이 찾아왔다. 선생과 찰방공과 안서객사(감사숙소)에서 밤에 같이 야화시 2수를 지었다.
滄茫歲暮海西天
초○關山雪又連
此夜對牀眞邂逅
喜권之外更凄然
不到桑鄕六載强
田園無主想荒凉
況逢今歲多淋료
漂蕩聞來益可傷
또 함허당야화시 다섯 수도 지었다.
이때 퇴계선생은 서울에서 응교로 있어서 형제간에 서로 오랫동안 만나보지 못한 회포를 푼 구절도 있거니와 두 형제가 끝 동생인 퇴계의 앞날과 앞으로 같이 은거해서 한거한 면학생활을 하기로 뜻을 같이했다는 것이 이 시에 나타나 있다. 즉, 『回鞭季子行當見 苦憶情懷不語同 舊約逍遙在何日 相望落落各西東』의 시는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퇴계선생은 두 중형을 그리워했지만 『身外榮枯更何有 世間址路恐終迷』란 시로써 이미 만년에 한거해서 세속의 영공을 떠나려한 뜻이 역역히 드러나 있으며 또『逍遙風雨雨兩蘇公 黃髮靑山宿願同 此志未酬眞可惜 令人長憶畝南東』이란 시를 지어 일찍부터 퇴계선생은 온계선생과 같이 고향에 돌아가서 한거할 것을 약속했으며 만년의 장수지계를 상약했다는 것이 이 시에 나타나 있다. 이렇게 이 두 선생은 만년에 관직과 영화를 저버리고 오직 고향에서 학문이나 하려고 서로 단단히 약속했던 것이다.
기유년 9월에 형제분이 모두 휴가를 얻어 온계리로 와서 서족敍族 분황焚黃을 올렸다. 이때 온계선생은 충청감사직에 있었고 퇴계선생은 단양군수에서 풍기군수로 전임했는데 같이 고향인 온계리에 왔다. 이때 퇴계선생은 다음과 같은 소회의 시를 지었다.
遊宦來歸見폐廬 眠中兒姪集魚漁
悲風不盡三杯奠 常匠歌成淚泗거
兄專一道弟專城 人比還鄕晝錦榮
富貴一毫何足이 勉修先業永無傾
이러한 시에 대하여 온계선생은 다음과 같이 차운했다.
光動窮村舊폐廬 雕鞍玉節照金魚
○○庭下皆龍種 趨步聯堅又接거
專城換了又專城 兩道觀風分外榮
恩許先塋來奠謁 凄風感淚寫如傾
또 이때에 이 두 형제는 효자암에서 서로 헤어졌다. 형은 서울로 아우는 풍기로 떠나갔다. 효자암은 온계리 서쪽 고개 너머 있다. 去年 9월에 온계선생이 한성우윤으로 은가를 얻어 향리에 돌아 왔을 때에 퇴계선생 역시 단양에서 돌아왔다. 헤어질 대 이 효자암에서 종족宗族들과 서별敍別하였으며 올해도 또 여기에서, 그리고 내년에도....... 세세년년 계속되기 어려움을 생각하고 퇴계선생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去年此地把離杯 一歲分飛又再來
若使年年爲此別 臨기不用重排徊
이에 대해 온계선생은 다음과 같이 차운했다.
相隨拱把去年杯 却喜親朋畢竟來
縱使明年當有約 情深自是更徘徊
이 외에도 선생은 아우 퇴계선생과 주고받은 시가 많다. 우리는 지금 이 두 선생의 관계를 이러한 시로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선생의 많은 유문 중 지금 백여 수의 시문이 전해질 뿐인데 이러한 시에 대하여 대산 이선생은 이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즉, 품격이 높고 운치가 있다고 했다. 더구나 구구절절이 애국충정이었고 애향심이었으며 형제간에서도 권학하는 정신이 깃들고 있어서 이 시문을 통해서 선생의 학행의, 적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으니 어찌 시문이 적게 남아 있는 것이 문제 될 것이냐고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상 거술한 바와 같이 선생은 참으로 강대하고도 준걸한 분이었으며 순정한 충의정신과 지성한 효심 그리고 형제친족간의 우애와 목족睦族은 남달리 뛰어났으며 목민관이 되어서는 인자한 선정에 최선을 다하고 덕화에 주력하여 선생이 가는 곳마다 민심이 순화했으며 대간이 되어서는 소장疏狀이나 계언 하나라도 국가와 민리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공무중이라도 여가만 있으면 자신의 수양에 노력하여 학문과 덕행을 닦는데 힘을 기울였다. 퇴계선생이 손수 지으신 묘지문이나 눌은선생이 지으신 행장과 기타 문적을 보고 선생의 치적을 고찰하여 보면 선생은 참으로 정암 조선생이나 회재 이선생과 같이 학행과 도덕을 닦았으며 이 나라 군주와 백성을 위해서 도의국가를 건설하려다가 간신배의 모함으로 불행한 최후로 일생을 마친 보기 드문 명신이요, 위대한 애국충신이요, 순정하고 격조 높은 도학자였었다.
이러한 선생의 소장疏狀이나 계장啓狀 등 많은 기록과 문적이 있었으나 그간의 화란과 병란 그리고 화재를 만나 많이 소실된 것은 비단 온계선생이나 그 후손을 위해서 뿐 만 아니라 후학의 연구를 위해서도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 논문은 국역國譯 온계전집에 게재되었던 것으로 필자의 양해를 얻어 일부 절록節錄했음을 밝히는 바이다. 열화 제 14호 1993년 (계유년)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