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삭 속았수다
백동흠
살을 에는 듯한 매서운 겨울 바다 바람, 나무와 갈대 숲에 흐드러지게 눈 꽃이 피어 있다. 눈이 시릴 만큼 새하얗다. 은빛 되어 빛난다. 겨울 천국이다. 꿈에 그리던 조국 제주도다. 삼십 년 전 신혼 여행 후 처음이다. 뉴질랜드 이민생활 이십여 년 만이다. 장성해서 고국에 들어와 일하고 있는 아들 딸과 함께 모처럼 온 가족 여행이다. ‘혼저옵서! ’제주도인사말이 낯설다.‘ 어서 오세요!’라는 정감이 느껴진다. ‘폭삭 속았수다!’ 멀리서 온 사람한테 웬 무례의 말씀을 하나 싶었다. ‘매우 수고 많으셨어요’라는 뜻이 담겨있다니 허허 웃을 수밖에 없다.
바닷가에 우뚝 솟은 봉우리, 사발 엎어 놓은 듯한 성산 일출봉. 꼭대기 바위에 서서 내려다 본 검푸른 바다와 새하얀 세상이 눈을 얼린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 자연 유산에 등재된 절경답다. 제주 올레길 여러 코스 중 협재 해수욕장 해변로는 너무도 맑고 싸한 느낌이다. 남 태평양이 부럽지 않다. 파란 잉크색 섞인 에머럴드 빛 바다다. 까만 화산암 돌들에 세차게 부서지는 하얀 거품과 푸른 물결… . 검푸른 파도 출렁거림으로 바닷물이 끊임없이 정화 작용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보다 바다 더러 매우 수고하고 있다고 건넬 말이 아닌가. ‘폭삭 속았수다, 바다야!’
겨울 제주의 원초적 갸름한 곡선과 자연 색감이 만들어내는 풍광은 압권이다. 가슴 탁 트이는 시원한 바다 바람과 작열하는 햇빛이 주는 자연 에너지가 넘쳐난다. 치열한 인생 고뇌와 자기 분야의 열정적 세계에 푹 빠진 예술가들에겐 영감이 끊임없이 솟아나는 풍토였나 싶다.
조선 시대 추사 김정희, 소 그림으로 천재적 역량을 보인 이중섭 화가, 그리고 제주의 속살 같은 모습을 이십 여 년간 촬영한 김영갑 사진 작가… . 당시 현실은 참 고달팠어도 혼이 담긴 작품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보듬어 주고 활력 에너지를 채워 준다. 제주 올레길 코스 중 김영갑 두모악 갤러리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불치의 루게릭 병으로 마지막 육 년간은 힘들게 혼자 투병하며 제주도를 혼신의 힘으로 담아내다 두모악에 잠들고 만 사진 작가, 제주도에 미친 김영갑! ‘그 섬에 내가 있었네’에서 그의 목소리가 울려 나온다. ‘시작이 혼자였으니 끝도 혼자다. 울음으로 시작된 세상, 웃음으로 끝내기 위해 하나에 몰입했다. 흙으로 돌아갈 줄 아는 생명은 자기 몫의 삶에 열심이다. 지금 내가 서있는 이 곳이 낙원이요, 현재가 이어도다. 지금 여기서 이 물음에 답을 얻지 못한다면 어디를 가나 방황하고 절망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람들은 또 다른 이어도를 꿈꾸며 살아들 간다.’
한 겨울 눈 보라 칠 때 육십 대 할멈들이 해녀 물질 하는 모습에 다시금 눈이 꽁꽁 얼어붙는다. 그토록 치열하고 진중한 삶의 무게를 어디에 견줄 수 없다.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과 실제 행하는 내면의 깊이는 얼마나 아릿할까? 한 발짝 다가가 연민의 마음으로 들여다 보면 극과 극의 세상은 다 하나로 통한다. 그 내면 속살 드러내는 웃음을 본인보다 이렇게 생생하게 그림으로 그려 내다니, 그래서 예술가다.‘통즉불통, 불통즉통’(痛卽不痛,不痛卽痛). 동의보감에 감전이 되고 만다.‘아픈 것은 통하지 않기 때문이요, 아프지 않은 것은 통하기 때문이다’그러고 보면 예술가들이란 소통의 메신저다. 얕은 껍데기 감정으로 쉽게 좌지우지 하지 않고 한 발짝 깊이 가슴으로 들어가 역지사지(易地思之)한 그 마음이 깊고도 훈훈하다.
제주도에 올레길을 만든 서명숙 씨 이야기를 들어보니 참 가슴 찡한 점이 많다. 뉴스 취재 경쟁과 마감시간의 절대 조건인‘빠름’을 생명으로 산 기자생활 이십 여 년. 시사저널, 오마이뉴스 편집장을 역임한 그녀는 일상에 지쳐 오십세를 한 달 앞두고 빠름에서 탈출한다. 곧바로 머리 식힐 겸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800킬로미터에 도전한다. 스페인의 와랑와랑(제주도 방언‘이글이글’)한 태양아래에서 간세다리(제주도 방언‘게으름뱅이’)처럼 걷는다. 순례 중에 한 여행가로부터 듣는다. ‘당신의 나라에 당신의 길을 만들어 봐요’그 말을 화두로 삼아 산티아고에는 없는 바다를 끼고 걷는 길을 그녀의 고향, 제주에 만든다. 맑고 푸른 제주의 바다와 바람을 안고 걷는 길에‘제주 올레’라는 이름을 붙인다. 바깥 거리에서 대문까지 집으로 통하는 아주 작은 골목길, 올레. 즉 세상으로 나오기 위한 최초의 길, 소통의 길이 바로 이 올레다.
문득 스친 생각, 내가 세상과 통하는 소통의 길은 잘 닦여지고 있는가? 오랜만의 가족 나들이로 발길 닿는 대로 쉬엄쉬엄, 놀멍쉬멍 가는 길, 올레길을 걸었다. 제주도를 한 바퀴 돌면서 쉬고 싶은 곳에 머물며 이야기하고, 은갈치 조림 같은 제주 토산 음식도 먹고, 아이들과 못 다한 이야기도 나누다 보니 밤도 짧았다. 이박 삼일이 바람처럼 흘러 갔다. 실상은 고국에 연로하신 어머님 아버님 뵈러 간 길이었다. 서울에서 일하고 있는 아들 딸이 깜짝 이벤트로 중간에 마련해준 제주도 간세다리 가족 여행이 대미를 장식하게 됐다. 뉴질랜드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고국 산야… . 아쉬움과 고마움이 두모악 갤러리 사진처럼 예술가의 그림처럼 눈앞에 어른거린다.
‘폭삭 속았수다, 아그들아!’
고맙 데이. 언제 다시 올까. 그래도 마음은 제주 올레 다시 올레. *
(200 x 14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