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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중매 추천 1 조회 63 11.08.27 14:0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설명이 부족하다는 지적에 따라 보다 상세한 해설을 달았습니다. 많은 참고 바랍니다.- 家苑]

史記世家에 曰孔子ㅣ 名은 丘요 字는 仲尼라 其先은 宋人이라 父는 叔粱紇이오 母는 顔氏이니 以魯襄公二十二年庚戌之歲十一月庚子에 生孔子於魯昌平鄕郰邑하시다

사기세가에 가로대 공자의 이름은 구요, 자는 중니라. 그 선대는 송나라 사람이라. 아버지는 숙량흘이오 어머니는 안씨이니, 노나라 양공 22년 경술년(기원전551년) 11월 경자일에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공자를 나셨다.

紇 : 사람 이름 흘, 질 낮은 명주실 흘 郰 : 고을 이름 추

[해설]
주자는 사마천의 『사기』가운데 「孔子世家」를 인용하여 공자의 일생을 서술하고 있다. 공자의 선조는 본래 송나라에서 살았는데 공자의 6대조인 공보가(孔父嘉)가 송나라 귀족인 내홍중(內訌中)에게 피살되어 그 후손이 화를 피하여 노나라로 피신해왔는데 4대조인 공방숙 대의 일이다. 공방숙의 아들이 백하이고, 백하의 아들이 공자의 아버지인 공흘이다. 字가 숙량이라 흔히 숙량흘이라고도 부른다. 숙량흘은 세습귀족이기는 하였지만 변변한 지위가 없었고, 전쟁에서 공을 세워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지만 그것이 부와 지위를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나이 60이 넘어 안씨 집안의 딸(安徵在)을 재취로 맞아들여 이구산(尼丘山)의 신에게 기도하여 공자를 낳았기에 공자의 이름을 구(丘)라 짓고, 둘째 아들이었기에 字를 중니(仲尼)라 하였다.
공자의 탄생년도에 대해서 『춘추좌전』에서는 기록하지 않고 있다. 다만 애공 16년 여름 4월 기축일에 돌아가셨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두예(杜預, 晉나라 때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저서 『춘추좌씨경전집해』는 춘추학으로서의 좌씨학을 집대성하였고 《좌씨전》을 춘추학의 정통적 위치로 올려놓았다고 평가된다. 이 책은 현재에도 가장 기본적인 주석으로 꼽힌다)는 노나라 양공 22년에 태어나 73세를 살았다고 하고, 공양전(公羊傳)과 곡량전(穀梁傳)은 모두 양공 21년 己酉해에 태어났다고 한다. 오늘날 공자의 생몰년대는 사마천의 『사기』에 의거하고 있다. 서문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려면 『사기』의 「孔子世家」를 참조하기 바란다. 아울러 『공자평전』(천웨이핑 지음, 미다스북스)도 읽어보기를 권한다.

爲兒嬉戱에 常陳俎豆하고 設禮用하며 及長하여 爲委吏하여는 料量平하시고 爲司職吏하여는 畜蕃息이라

아이가 되어 놀이를 할 때에는 항상 제기를 늘어놓고 예로써 베풀었으며, 장성하여 위리(창고지기)가 되어서는 요량(회계)을 공평하게 하시고, 사직리(희생으로 쓸 牛羊을 맡아 기르는 관리)가 되어서는 가축이 번식하였느니라.

嬉 : 즐길 희, 장난할 희 俎 : 도마 조, 제향할 때 희생을 올려놓는 대 俎豆 : 제사 때 음식을 담는 굽이 높은 제기 蕃 : 우거질 번, 많을 번

[해설]
공자가 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어머니는 아버지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주지를 않았고, 추읍 창평향을 떠나 지금 공자의 고택이 있는 궐리로 이사하였다. 공자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어린 시절에는 제기를 늘어놓고 제사지내는 놀이를 하며 위안을 삼았다고 한다. 그 후 공자 나이 17세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아버지의 장례 때 수레를 끈 사람을 찾아내어, 노나라 서울 동쪽의 방산에 있는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 어머니를 함께 합장할 수 있었다.
부모를 모두 잃고 가난과 주변의 멸시 속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공자는 20대초에 대부 계씨의 창고지기가 되었는데 저울질과 회계 관리를 공평하게 잘하여 여러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그 뒤 목장 일을 맡아할 때에도 체계적으로 잘 하여 가축이 매우 번성함에 따라 사람들의 공자에 대한 신뢰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이런 속에서도 공자는 틈틈이 공부를 하였고, 좋은 스승이 있다고 하면 천리 길도 마다않고 찾아가 배웠기에 공자 자신도 좋은 스승이란 명성을 얻게 되었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두게 되었다.
19살에 결혼을 하고, 1년 뒤 아들을 낳았는데, 이때 공자는 박학하고 재주를 가진 사람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러한 소문은 궁궐까지 전해져 공자가 아들을 낳자 이웃들이 축하해주러 왔고, 노나라 소공(昭公)도 사람을 시켜 잉어 한 마리를 보내왔다. 공자는 이 은혜에 감격하여 아들 이름을 잉어라는 뜻의 리(鯉)라 짓고, 호를 첫째 아들을 뜻하는 백(伯)자에 ‘고기 어(魚)를 써서 伯魚라 하였다. 여기에는 물론 자식이 훗날 등용(登龍)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소망이 담겨 있기도 하다.

適周에 問禮於老子하고 旣反而弟子益進이라
주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를 묻고, 이윽고 돌아와서는 제자가 더욱 늘어났니라.

[해설]
공자는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않고 찾았는데 한번은 제자인 남궁경숙과 함께 노나라 군주의 허가를 받고 주(周)나라를 방문하여 예(禮, 이른바 周禮)를 배우게 되었다. 이때 공자 일행은 老子를 방문하여 예에 관해 문답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도가들이 강조하는 ‘공자문례(孔子問禮)’다. 산동에 있는 가상무씨(嘉祥武氏)의 묘비에 공자와 노자가 서로 예를 다하여 마주하는 자세의 그림과 함께 ‘孔子見老子’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그만큼 공자의 문덕이 높았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해주는 징표라고 볼 수 있다. 노나라로 다시 돌아온 뒤 공자의 제자는 더욱 늘어났다.
당시에 ‘학문은 관부에 있다(學在官府)’고 하여 귀족 관료들이 교육을 독점하였는데 공자는 최초로 강학(講學)을 시작하여 사학(私學)의 기풍을 새롭게 개척하였다. 바로 공자의 행단강학(杏亶講學)으로 공자는 집안 뜰 안에 은행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고, 그 아래에 강단을 설치하여 강의한 것이다.

昭公二十五年甲申은 孔子 年三十五이라 而昭公이 奔齊하여 魯亂하니 於是適齊하시어 爲高昭子家臣하시니 以通乎景公하시니라 公이 欲封以尼谿之田이나 晏嬰이 不可라 하니 公惑之라 孔子ㅣ 遂行하여 反乎魯하시니라
소공 25년 갑신년(기원전 517년)은 공자 나이 35세라. 소공이 제나라로 달아나 노나라가 혼란하니 이에 제나라로 가시어 고소자의 가신이 되시니 써 경공에 통하셨느니라. 공이 이계의 전(토지)으로써 봉하려 하였으나 안영이 불가하다 하니 공이 미혹되었느니라. 공자가 마침내 떠나 노나라로 돌아오셨느니라.

奔 : 달아날 분

[해설]
공자가 35살 때 노나라의 소공이 사소한 일로 나라 안에서 가장 실력자인 계평씨(季平氏)를 처벌하려 했다. 그 당시 가장 인기 있던 닭싸움에서 계평자는 닭의 머리에 가죽 투구를 씌우고, 후소백은 닭의 다리에 쇠발톱을 끼워 싸우자 계평자는 크게 화를 내면서 후소백의 땅을 빼앗았다. 이에 소공이 계평자를 체포하려 하다가 오히려 계평자에게 당하여, 소공은 제나라로 망명했다. 노나라의 정치질서가 매우 어지러워지자 실망한 공자는 제나라로 가서 대부 고소자의 가신으로 지내게 되었다.
이 당시 제나라는 음악이 매우 발달하였는데, 공자는 음악담당 관리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순임금이 만든 소곡(韶曲)에 깊은 감명을 받고 3개월 동안이나 침식을 잊고 배울 정도였다. 이 소문을 듣고 제나라의 군주인 경공이 공자를 불러 음악과 정치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감명 받아, 공자를 등용해 쓰려 했으나 재상인 안영이 반대하였다.
그 이유로는 ‘대개 유학자는 공리공론을 일삼기 때문에 그 언변에 넘어가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며, 허례허식을 소중히 하여 죽은 사람에 대한 예절을 시끄럽게 떠들어대며,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거창한 장례식을 지내도록 요구하고 있어, 이것이 일반의 관습으로 된다면 큰일이다. 그리고 유학자들이란 입으로만 벼슬을 구해 거지처럼 이 나라 저 나라로 돌아다니는 무리여서 도저히 책임있는 국정을 맡길 수 없다. 더욱이 공자가 얘기하는 예는 평생이 걸려도 다 배울 수 없으니 공자를 기용해서 국내의 풍속을 일신하려는 것은 천만부당하고, 도리어 혼란을 초래할 뿐이다’는 등이었다.
경공은 이에 공자의 발탁을 포기하고, 이후 공자와는 두 번 다시 예에 관해 입에 올리지 않았다. 결국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가려고 경공에게 하직인사를 하였다. 그러자 경공은 공자를 승상 버금가는 대우를 해주겠다고 붙들었으나 이에 반발하는 중신들이 많았고, 심지어 공자를 암살하려는 자까지 있어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가게 되었다.

定公元年壬辰은 孔子 年四十三이라 而季氏彊僭하고 其臣陽虎가 作亂專政故로 孔子ㅣ 不仕하시고 而退修詩書禮樂하시니 弟子彌衆이라
정공 원년 임진년은 공자 나이 43세라. 계씨가 강하며 참람하고 그 가신인 양호가 난을 일으켜 정치를 오로지 하는 고로 공자가 벼슬하지 아니하시고 물러나 시서와 예악을 닦으시니 제자가 더욱 많아짐이라.

[해설]
기원전 505년 정공 4년에 노 소공을 축출한 계평자가 죽고 계환자(季桓子)가 계승하였지만 여전히 노나라 군주를 조종하였으며, 계씨의 대권은 가신인 양호가 주물렀다. 양호는, 공자가 어머니 장례식을 치르고 얼마 안 되어 계손씨의 잔치에 갔을 때 문전박대를 하여 내쫓은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공자의 명성이 온 천하에 자자해지자 양호는 그의 명성을 빌려 지위를 공고히 하려고 공자를 만나려 하였으나 공자는 번번이 거절하였다. 이에 양호는 공자가 없는 틈을 타 삶은 돼지를 폐백으로 보냈다. 당시의 예를 보면, 주인이 있을 때 선물을 가져오면 그 자리에서 답례품을 보내고, 주인이 없을 때 선물을 가져오면 그 주인이 직접 선물을 갖고 그 집을 방문해야 했다. 공자는 하는 수 없이 양호가 없는 틈을 타 폐백을 갖고 가다가 길거리에서 양호를 만났으나, 관리가 되어 달라는 양호의 청을 거절하였다. 그리고 시서예악 연구와 제자 교육에 매진하였다.

九年庚子는 孔子 年五十一이라 公山不狃ㅣ 以費畔季氏하고 召孔子하니 欲往而卒不行이시니라 定工이 以孔子로 爲中都宰하니 一年에 四方이 則之하니라 遂爲司空하시고 又爲大司寇하시니라
(정공) 9년 경자년은 공자 나이 51세라. 공산불뉴가 계씨를 배반하고 공자를 부르니 가려 하였으니 마침내 가지 못하셨느니라. 정공이 공자로써 중도의 재상으로 삼으니 일 년 만에 사방이 본받았느니라. 마침내 사공이 되시고 또한 대사구가 되셨느니라.

[해설]
현실정치에 몸담아 이상을 펴고자 했던 공자에게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계씨를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킨 가신(家臣)인 공산불뉴가 공자를 초청하였다. 공자가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만 해도 작은 땅에서 출발하여 왕업을 이룩하였다. 나도 이제 그곳에서 한번 시험해볼까 한다’며 가려고 하였다. 그러자 자로를 비롯하여 여러 제자들이 극구만류하여 가지 못했다.
그 후 노나라 정공과 계환자는 각각 삼환씨와 가신들의 세력이 날로 커져 감에 따라 위협을 느끼자 공자의 명예와 다재다능함을 빌려 나라를 안정시키고자 하여 공자를 중도의 재상에 임명하였다. 재상이 되어 중도땅을 다스린 지 일 년 만에 효과가 나타났다. 백성들은 편안히 살면서 자기 일을 즐겨하며 각자가 할 바를 알아서 했다. 노인은 존경 받고, 어린이는 사랑받으며, 강자가 약자를 욕보이지 않고, 남녀간에는 음란하지 않으며, 장사꾼들은 허위로 물가를 올리지 않게 되었다. 사방에서 공자의 다스리는 법을 배우려 하였다. 탁월한 정치력의 발휘로 공자는 중도의 재상에서 사공(司空 ; 요즈음의 건설부장관)이 되고, 오래지 않아 사구(司寇 ; 요즈음의 법무부장관))가 되어 잘 다스렸다.

十年辛丑에 相定公하여 會齊侯于夾谷하시니 齊人이 歸魯侵地하고
(정공) 10년 신축년에 정공을 도와 제나라 군주와 협곡에서 만나시니 제나라 사람들이 노나라에서 빼앗은 땅을 돌려주고,

[해설]
공자가 사구로 재임하는 동안 외교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 하나가 ‘협곡회담’의 성과이다. 당시 제나라 대부 여서(黎鉏)는 노나라를 조정해 실리를 취하려다가 상황이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판단하여 제 경공에게 노 정공과의 회담을 갖게 하였다. 이 자리에서 노 정공을 무력으로 누르고 굴복시킬 속셈이었다. 공자는 제나라는 강한 나라이고 노나라는 약한 나라였기 때문에 경계심의 고삐를 단단히 죄고, 수행대신으로 동행하였다. 제 경공은 안영을 대동하였다. 양국간에 협곡에서 만나 술잔을 주고 받았지만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때 제나라측에서 가무를 연주했다. 기를 든 사람, 패를 잡은 사람, 창과 검을 들고 춤추는 사람들이 천둥소리 같은 고함을 지르며, 노 정공에게 다가왔다. 공자가 이러한 작태를 보고 손을 휘두르며 고함을 쳤다. 양국의 군주가 우호적으로 만나는 자리에 야만스러운 오랑캐 가무가 웬 말이냐며 멈추게 했다. 공자의 위엄에 제 경공이 가무를 멈추게 하자 이번에는 다시 제나라 측에서 궁정음악을 연주하겠다며 배우들과 난쟁이들이 시끌벅적하게 북을 치며 나왔다. 그러자 공자가 다시 ‘평민이 제후를 희롱하는 것은 참수형에 해당한다며 책임자를 처벌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분위기가 갑자기 얼어붙었으나 곧 평정되고 순조롭게 회담이 진행되면서 마지막으로 신에게 맹약하려고 할 때 제나라 측에서 맹약에 ‘제나라가 출정할 때, 만약 노나라가 300승의 軍 수레를 따르게 하지 않는다면 맹약을 무조건 파기한다’는 조항을 집어넣자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노나라가 제나라의 속국임을 무조건 인정하라는 뜻이었다. 노나라의 국력을 감안할 때 거절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이때 공자는 임기응변으로 다시 한 조항을 넣게 하였다. 제나라가 빼앗았던 노나라의 세 성지(城池)인 문양(汶陽)지역의 운(鄆) ․ 환(讙) ․ 귀음(龜陰) 을 반환하라고 하였다. 제 경공은 말문이 막혔으나 하는 수 없이 응했다.

十二年癸卯에 使仲由로 爲季氏宰하니 墮三都하고 收其甲兵이나 孟氏ㅣ 不肯墮成하니 圍之不克이라
(정공) 12년 계묘년에 중유(字는 子路)로 하여금 계씨의 가신이 되게 하여 세 도읍의 성을 허물게 하고 그 갑옷과 병기를 거두게 하나 맹씨가 성을 허무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아니하니 포위하여(포위하여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느니라.

[해설]

‘협곡회담’으로 정치적 위상이 높아진 공자는 군주를 농락하는 삼환씨 등의 세력을 꺾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노 정공에게 “주례에 의하면 대신은 사적인 군사를 소유하지 못하고, 대부는 백치지성(百雉之城 )을 소유하지 못한다”고 고하였다. 이는 맹손씨, 숙손씨, 계손씨를 지목하여 한 말인데 이들이 각각 성(郕), 후(郈), 비(費)성을 점거하고 있었다. 노 정공이 마다할 리가 없었고, 삼환 중에 가장 세력이 큰 계손씨 또한 동조하고 나섰다. 왜냐하면 계손의 가신인 공산불뉴가 비성을 점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기회를 빌려 공산불뉴를 제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때 공자는 자신의 제자 중에서 가장 용감하고 군사적 자질이 뛰어난 자로를 계손씨 가문의 총책임자로 파견하여 이른바 ‘삼도성 타도(三都城 打倒)’라고 일컬어지는 대역사를 시작하였다(기원전 498년). 삼환 중에 가장 힘이 약한 숙손씨의 후성을 쉽게 철거하고, 다음 공산불뉴가 점거하고 있는 비성도 몇 번의 각축적 끝에 철거하였으나 맹손씨의 성성만은 쉽게 공략하지 못하였다. 노 정공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성성을 포위하였으나 점령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이미 전통적인 정치질서(忠君尊王)를 재건하는데 어느 정도 목적을 달성하였다.

十四年乙巳는 孔子 年五十六이라 攝行相事하시어 誅少正卯하시고 與聞國政하시니 三月에 魯國이 大治라 齊人이 歸女樂以沮之하니 季桓子가 受之하며 郊에 又不致膰俎於大夫하니 孔子ㅣ 行하시니라
(정공) 14년 을사년은 공자 나이 56세라. 재상의 일을 대신하시어 소정묘를 베시고 국정에 참여하여 들으시니 3개월만에 노나라가 크게 다스려짐이라. 제나라 사람들이 여악(기녀)을 보내어 막으니 계환자가 받았으며 교제에 또한 대부에게 번조(제사지낸 고기)를 주지 아니하니 공자가 떠나셨느니라.

[해설]
정공 14년(기원전 496년) 공자 나이 56세 때 공자는 드디어 노나라 재상 일을 섭정하였다. 이때 노나라의 정치를 혼란시킨 대부 소정묘를 처벌하고 적극적으로 정치개혁을 단행했다. 3개월이 지나자 양과 돼지를 파는 사람들이 값을 속이지 않고 남녀가 길을 가도 따로 걸었으며, 길에 떨어진 남의 물건에 손대는 사람이 없어졌다. 또한 노나라를 방문하는 외국인은 일일이 관리에게 허가받지 않더라도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었다. 이렇게 노나라가 안정되어간다는 소문이 제나라 경공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노나라가 천하의 패자가 된다면 이웃한 제나라에게는 큰 위협이 될 것을 불안해 한 제 경공은 미인계를 써서 노나라 군주를 교란시켜 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미녀 80명을 선발하여 관능적인 가무를 배우게 한 뒤 화려하게 장식한 마차 30대에 이들을 태워 노 정공에게 선물하였다.
공자가 곡부의 문 안으로 못 들어오게 하자 계환자가 몰래 나가 훔쳐보더니 미녀들에게 흠뻑 빠져, 노 정공을 순시라는 명목으로 함께 불러내어 종일토록 남문밖에 머물며 미녀들의 가무에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며칠 동안을 정사를 방치하며 미녀들의 춤에 빠졌다가, 교외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난 뒤에는 신하들에게 보내주는 제물을 공자에게는 보내주지 않았다. 노 정공의 태도에 지극히 실망한 공자는 마침내 노나라를 떠났다.

適衛하사 主於子路妻兄顔濁鄒家하시니라 適陳過匡하시니 匡人이 以爲陽虎하여 而拘之하니라 旣解還衛하시고 主蘧伯玉家하시며 見南子하시니라
위나라에 가서 자로의 처형인 안탁추의 집에서 주인을 정하셨느니라(머물렀느니라). 진나라를 가실 적에 광땅을 지나시니 광땅의 사람들이 양호로써 여겨 억류하였느니라. 이윽고 풀려나 위나라로 돌아와 거백옥의 집에 거하시며 남자를 보았느니라.

[해설]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땅을 다시 찾아 나선 공자의 나이는 55살이었다. 이로부터 14년간 공자는 몇몇 제자들과 함께 방랑생활을 하게 된다. 먼저 위나라로 가서 자로의 손위 처남인 안탁추의 집에 머물렀다. 공자가 자기 나라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안 영공(靈公)은 공자를 가까이 두고 노나라에서와 같이 6만두의 녹을 주었다. 그러나 공자가 위험인물이라며 위 영공에서 참언하는 자들이 있는데다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되자 10개월 만에 위나라를 떠났다.
진(陳)나라로 가기로 결정하고 도중에 송나라의 광이라는 지방에 이르자 광 땅의 주민들은, 공자가 자기들을 괴롭힌 계신씨의 가신 양호를 닮았다며 공자를 잡아 가두었다. 모두들 목숨이 위태롭게 되고 제자들이 동요하자 공자는 ‘걱정할 것 없다. 주나라 문왕은 이미 없으나 주나라의 문화가 우리들에게 계승되고 있다. 하늘이 이 문화(斯文)를 없애는 게 아니라면, 저들이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다’라며 오히려 위로하였다.
5일간 억류되었다가 풀려난 공자 일행은 위나라의 포(蒲) 지방에 잠시 머물렀다가 1개월 후에 위나라 서울로 다시 돌아와 대부인 거백옥의 집에 몸을 의탁하였다. 여기에서 공자는 남자(南子)라는 위 영공의 바람둥이 부인을 만나게 된다. 南子는 송나라 왕자를 위나라로 불러들여 공공연히 정을 통하고 있었고 분노한 태자가 그녀를 죽이려 했지만 실패하고 도망친 사건이 있었다. 이런 전력을 가지고 있는 南子가 공자라는 인물에 호기심을 갖고 불러들였다. 제자들이 만류했지만 공자는 ‘만날 생각은 없지만 이것도 예이니 어쩌겠느냐’하며 몇 번을 만났다. 제자들은 스승에게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위나라로 들어온 지 한 달쯤 지났을 무렵, 공자는 영공의 초대를 받았다. 영공은 수레에 부인과 함께 타고 있었는데 환관을 옆자리에 태우고 공자는 뒷자리에 태웠다. 거리를 한 바퀴 돌고 돌아온 공자는 ‘나는 여색을 즐기는 자가 덕을 추구하는 것을 본 일이 없다’며 영공에 환멸을 느껴 즉시 위나라를 떠났다.

去適宋하시니 司馬桓魋가 欲殺之하니 又去適陳하시니라 主司城貞子家하시고 居三歲而反于衛하시나 靈公不能用하니라
(위나라를) 떠나 송나라로 가시니 사마환퇴가 죽이려고 하니 또다시 떠나 진나라로 가셨느니라. 사성정자의 집을 주인으로 삼으시고 삼년을 거하시다가 위나라로 돌아오셨으나 영공이 능히 등용하지 아니하였느니라.

蘧 : 풀이름 거, 술패랭이꽃 魋 : 사람이름 퇴, 몽치 추

[해설]
공자 일행은 다시 조나라를 지나 송나라로 들어갔다. 어느 날 나무 그늘에서 제자들에게 예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을 때 일찍이 공자에게 창피를 당한 적이 있는 송나라의 무관인 사마환퇴(사마환퇴는 사회적 격동기에 지위가 급상승한 벼락부자로 죽은 후에도 영생을 추구하고자 3년이 넘도록 석관을 만들고 있었다. 공자는 이와 비슷한 성향의 계씨가 팔일무로 주례를 모욕한 것을 공개적으로 신랄히 지적한 바가 있는데, 이 때문에 환퇴는 공자에게 원한을 품었다)가 한 무리의 병력을 이끌고 와서 공자를 죽이려고 나무를 찍어 쓰러뜨리며 위협하였다. 겨우 몸을 피해 정(鄭)나라로 들어갔으나 일행을 잃고 주민으로부터 ‘집 잃은 강아지(喪家之狗)’같다는 얘기도 들으며 陳나라로 갔다.
진나라에서 사성정자의 집에 머무르면서 3년을 지냈으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진 민공(湣公)은 매우 평범한 군주로 원대한 뜻도 없었기에 공자를 한갓 박학다식한 학자로 존경했을 뿐이었다. 晉나라와 楚나라가 서로 세력을 겨루다가 陳으로 쳐들어보고 吳나라까지 가담하자 공자는 제자들을 거느리고 귀국을 결심하였다.
진나라를 떠나서 포 지방을 지나다가 때마침 위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공숙씨의 군사에게 포위당했다. 제자인 공양유의 용기있는 행동으로 바로 풀려나 다시 위나라에 갔으나 영공은 공자의 토벌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국정도 게을리하였다.

晉趙氏家臣佛肸이 以中牟畔으로 召孔子하니 孔子欲往하나 亦不果라 將西見趙簡子하야 至河而反하시고 又主蘧伯玉家라가 靈公이 問陳하니 不對而行하시고 復如陳하시니라
진나라 조씨(조간자)의 가신인 필힐이 중모로써 배반하고(중모를 점거하고) 공자를 부르니, 공자가 가고자 하였으나 또한 그리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장차 서쪽에서 조간자를 보고 황하에 이르러 돌아가시고 또 거백옥의 집을 주인으로 삼았다가 영공이 진나라에 대해 물으니 대답하지 아니하고 가시고 다시 진나라로 가셨느니라.

佛 : 부처 불, 도울 필, 성할 발, 여기서는 ‘성 필’ 肸 : : 떼지어날 힐, 웃을 힐

[해설]
공자가 광성(匡城)에서 풀려난 후 晉나라에 들어갈 생각으로 잠시 변경에 머물 때였다. 계손씨가 노나라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듯이 晉나라는 대부 조간자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 조간자가 어질고 지혜로운 명독(鳴犢)과 두주(竇犨)를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때 조간자의 가신인 필힐이 중모를 점거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이는 노나라의 공산불뉴가 비성을 점거하고 계손씨에게 반항한 것과 흡사했다. 필힐은 공자가 조간자에게 불만이 있음을 알았으므로, 공자에게 사람을 보내 서로 돕자고 제안했다. 공자는 그 요청에 응하려고 하였으나 자로가 극구 비난하며 만류하였다. 그리하여 공자는 황하강가에 우두커니 서서 갈등하다가 끝내는 중모로 가지 않았다.
그리고 衛나라로 다시 들어가 거백옥의 집에 머물렀다. 이때 태자가 南子를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晉나라로 도망가자 위 영공은 태자를 무력으로 처벌하려 하고 공자에게 계책을 물었다. 그러자 공자는 ‘제사에 관한 일이라면 잘 알지만, 전쟁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고 대답하며, 더 이상 위 영공과 정치를 논할 수 없다고 보고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가셨다. 환갑의 공자였다.

季桓子ㅣ 卒에 遺言謂康子에 必召孔子라 하나 其臣이 止之하고 康子는 乃召冉求라 孔子ㅣ 如蔡及葉하시니 楚昭王이 將以書社地封孔子하나 令尹子西가 不可라 하니 乃止라 又反乎衛時에 靈公已卒하니 衛君 輒欲得孔子爲政하며 而冉求가 爲季氏將與齊戰有功하니 康子乃召孔子而孔子ㅣ 歸魯하시니 實哀公之十一年丁巳으로 而孔子 年六十八矣라
계환자가 죽을 때에 강자에게 유언으로 이르기를 반드시 공자를 부르나 하나 그 신하들이 저지하고, 강자는 이에 염구를 불렀느니라. 공자가 채나라에서 섭에 이르시니 초나라 소왕이 장차 공자에게 서사의 땅으로써 공자에게 봉하려 하였으나 영윤인 자서가 불가하다 하니 이에 그침이라. 또 다시 위나라에 돌아왔을 때 영공이 이미 죽으니 위나라 군주인 첩이 공자를 얻어 정치를 하고자 하였으며, 염구가 계씨의 장군이 되어 제나라와 싸움에 공이 있으니 강자가 이에 공자를 불러 공자가 노나라에 돌아가시니, 실로 애공 11년 정사년으로 공자 나이 68세라.

葉 : 잎 엽, 여기서는 ‘고을이름 섭’ 輒 : 문득 첩, 여기서는 ‘성 첩’

[해설]
노나라의 대부인 계환자가 죽으면서 계강자에게 반드시 공자를 불러 함께 정사를 의논하라고 하였으나, 모두가 반대하자 대신 염구(字는 子有, 혹은 冉有)를 불렀다. 염구는 진채절량(陳蔡絶糧)의 시기에 공자와 생사를 함께 했지만 공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떠났다. 진채절량의 시기란 陳나라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자 남쪽의 채(蔡)나라로 피신할 때 겪었던 매우 어려운 상황을 말한다. 일행은 도중에 오나라와 초나라의 병사들에게 잡혀 진퇴양난의 지경에 이르렀다.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의 광야에서 가져온 양식도 다 떨어져 굶주림에 지치게 되었다. 7일간 극도의 상황을 겪은 공자는 만년에 이때 함께 한 열 명의 제자를 기억하는데 세상에서는 흔히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고 부른다.
염구에 이어 자공도 계강자에게 발탁되어 가고 공자 일행은 방랑을 계속한다. 위 본문에서 주자는 ‘孔子ㅣ 如蔡及葉’이라고 표현하고 있어 마치 채나라에서 섭땅에 도착한 것처럼 표현하는데 정확히는 초나라 변경 지역인 부함(負函)에 이른 것이다. 여기에서 초나라의 대장인 반제량(潘諸梁)을 만나는데 그가 일찍이 섭읍(葉邑)의 장관을 지낸 바 있어 섭공이라고도 부른다. 다시 말해 부함에서 섭공을 만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섭공은 공자에게 가르침을 청했고 공자를 좀더 잘 이해하고 싶어 자로에게 공자에 대해 묻기도 했다. 나중에 재상인 영윤(令尹)을 대리해 정치를 하기도 했지만 공자를 초나라 소왕에게 추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왕은 공자를 중용할 뜻을 갖고 서사의 땅 7백리를 봉지로 주려고 했으나 영윤인 자서가 반대하였다. 그 이유는 공자의 정치적 이상이 주공의 사업을 실현하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초나라는 불행을 당한다는 것이다. 이에 초 소왕은 원래의 계획을 취소했고, 그 해 가을 병으로 죽었다. 정권을 장악한 자서는 공자가 초나라 도성에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공자는 초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다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공자의 제자 중 많은 이가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희망을 품고 돌아가려고 했다. 길에서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이라는 은자(隱者)들을 만나 사상적 충격을 받기도 하였다. 공자 나이 63살 때인 기원전 489년, 공자는 위나라에 도착했다. 위 영공은 이미 죽고 손자인 출공(出公)이 군주가 되어 공자에게 중요한 직책을 맡겨 정사를 돕게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출공은 아버지가 귀국하면 양위를 해야 하는데 그럴 의지가 없었다. 正名論을 주장하며 이상정치를 실현하려 했으나 다시금 벽에 부딪혔다.
위나라에서 5년간을 머무르다가 고향땅인 노나라로 다시 돌아가기로 결심을 굳혔다. 염구가 계씨의 장군이 되어 제나라와의 싸움에서 공을 세우니 계강자는 공자를 마침내 불렀다. 염구, 자공, 유약을 대표로 파견하여 공자를 예로써 후하게 영접하였으니 애공 11년(기원전 484년) 공자 나이 68세였다.

然이나 魯終不能用孔子하니 孔子ㅣ 亦不求仕하시니라 乃敍書傳禮記하시며 刪詩正樂하시고 序易彖繫象說卦文言하시니라 弟子 蓋三千焉하니 神通六藝者ㅣ 七十二人이라 十四年庚申에 魯西狩獲麟하니 孔子ㅣ 作春秋하시니라 明年辛酉에 子路ㅣ 死於衛하고 十六年任戌四月己丑에 孔子卒하시니 年七十三이라 葬魯城北泗上하고 弟子 皆服心喪三年而去하고 惟子貢이 廬於冢上하니 凡六年이라 孔子 生鯉하시니 字는 伯魚라 先卒이라 伯魚가 生伋하니 字는 子思라 作中庸하셨노라
그러나 노나라는 끝내 능히 공자를 등용하지 아니하니 공자 또한 벼슬을 구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이에 서전과 예기를 서술하시며 산시와 정악을 하시고 주역에 단전과 계사전(상전, 하전) 대상전 소상전 설괘전 서괘전 잡괘전 문언전(건괘, 곤괘)을 다셨느니라(十翼傳). 제자가 대략 3천명인데 육예에 신통한 자가 72명이었노라. (애공) 14년 서쪽 땅에서 기린이 잡히니 공자가 춘추를 지으시고 다음해인 신유년에 자로가 위나라에서 죽고, 16년 임술년 4월 기축일에 공자가 돌아가시니 나이 73세라, 노나라의 성 북쪽 사수(오늘날의 孔林이다)위쪽에 장사지내고 제자들이 모두 심상(상복을 입지 않되 상제와 같은 마음으로 哀慕함) 삼년을 치루고 돌아갔는데 오직 자공만이 무덤 위쪽에 오두막살이를 하니(오두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니) 무릇 육년이라. 공자는 리를 낳으니 자는 백어라. 먼저 죽었노라(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온 지 1년만에 공리의 나이 50살 되던 해). 백어는 급을 낳으니 자가 자사라, 중용을 지으셨노라.

[해설]
그러나 노나라는 공자를 끝내 등용하지 아니하였고, 공자 또한 더 이상은 벼슬을 구하지 아니하였다. 제자들과 더불어 강론을 하며 집필에 몰두하였다. 서전과 예기를 서술하고 시와 노랫말들을 모아 시경을 편찬하였으며, 노래를 수집하여 악경을 정리하였다. 가죽끈이 세 번 끊어질 만큼(韋編三絶) 주역을 읽었지만 문왕과 주공이 지은 글에 더 이상 손댈 수 없음을 깨닫고, 후학들을 위해 상세히 설명을 붙이니(述而不作) 바로 십익전(十翼傳)이다. 최후의 역작인 춘추를 지으면서 서쪽 땅에서 기린이 잡혔다(西狩獲麟)는 소식을 듣고 공자는 자신의 천명이 다했음을 알고 붓을 놓았다(獲麟絶筆, 麟筆).
이듬해 공자를 그림자 같이 따르던 자로가 위나라에서 죽고 소금에 절여졌다는 얘기를 듣고 일체 젓갈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공자를 따르던 제자들이 모두 3천여명에 달했고, 그 가운데 육예에 신통한 제자가 72명이었으나 공자에 앞서간 제자들도 많았다. 실의와 좌절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이상을 실현하려 했던 불굴의 공자도 천명에 불려가니 73세였다. 오늘날 산동성 곡부의 공림에 장사지내고 제자들은 마치 부모가 죽은 것처럼 3년을 애모하였으며, 자공은 공자의 무덤 옆에 오두막을 짓고 3년을 더 시묘살이를 하였다. 공자의 자식으로는 백어가 있으나, 공자보다 앞서 갔고, 백어의 아들인 급이 바로 중용을 지은 자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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