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명으로 풀어본 한국사
● 노원구 상계동의 유래
- 병조의 직할 역참이 있던곳 -
상계동上溪洞은 서울의 동북부를 남북으로 흐르고 있는 중랑천의 상류 부분에 위치한다 하여 유래된 명칭으로 노원구 면적의 28퍼센트(1천6제곱킬로미터)나 되어 가장 광대한 지역을 차지한다. 원래 경기도 양주목 노원면에 있다가 갑오개혁甲午改革 당시 23부제府制를 실시할 때에는 한성부 양주군 노원면에, 1896년 13도제道制에 의해 다시 경기도 양주군 노원면으로, 1911년 면面ㆍ동리洞里를 실시할 때는 노원면 19개 리 중 간촌리間村里가되었다. 1914년 4월 1일에는 일제가 우리나라의부府, 군郡, 면面을 자의로 폐지하고 분합하었는데 이때 노해면 상계리가 되어 처음 상계동이라는 명칭이 등장하였다.
특히 상계동이 오늘날 노원구에 포함되는 것은 고래로 육상 교통의 유일한 수단인 역참驛站으로서 노원역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당시 상계리로 통합된 동리는 간촌리間村里, 온수리溫水里, 갈월동葛月洞, 원터(원기동院基洞) 등이 있다.
당시 노원역은 상계2동과 상계10동 일대에 자리 잡았는데 양주도호부楊州都護府의 관할 구역이나 노원역은 그 중요성으로 병조兵曹의 직할 역에 해당되었으며 대로에 속하여 20결結의 공수전公須田 을 지급 받았다. 원래 공수전20리마다 도로변에 설치한 것이 역인데 노원역은 흥인문 밖 4리에 위치하여 동북 방면의 여러 역로驛路와 연결되었다. 이 역을 관리키 위해 관료들이 이용하는 곳이 역驛과 원院의 기능이었다.
작은 돌을 쌓으며 소원을 빌던 당고개
지하철 4호선의 종점인 당고개는 노원구 상계3동에 있는 고개이면서 동네 이름이기도 하다. 물론 용산구 신계동의 천주교 순교 성지인 당고개와는 별개이다. 용산구에 있는 당고개는 엣날 고개 마루터에 당집이 있었기에 붙은 지명으로 이곳 당고개 형장에서 10명이 순교당하여 서소문 밖 네거리, 절두산, 새남터와 더불어 서울의 4대 천주교 성지 중 하나로 기념탑이 세워진 곳이다.
상계동의 당고개는 지금은 완만해지고 당고개역 쪽으로 많은 주민들이 실고 있지만 예전에는 숲이 울창한 꽤 높은 고개였다. 이곳을 지나면 수락산 자락 남양주시 별내면 덕릉고개와 연결된다.
상계동 천주교회를 지나 5백 미터 떨어진 상계3동 앞 도로변에 표석이 설치되었는데
<옛날 산짐승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돌을 들고 넘었던 고개로서 그 돌을 쌓아둔 서낭당 터가 있던 곳이며 매년 음력 1월 15일 서낭제를 지내던 곳>
이란 글이 있어 자취를 알 수 있다.
당고개에는 원래 미륵당이 있어 당현當峴으로 불렸으며 사람들이 이곳을 넘나들며 작은 돌을 쌓고 소원을 빌던 성황당城隍堂(서낭당)으로 변하면서 당고개라 한 것이다.

멀리 수락산이 바라보이는 상계동 전경
● 노원구 중계동의 유래
-중랑천의 중간에 위치했던 마을-
중랑천의 중간에 위치했다 하여 생긴 지명으로 조선 시대에는 경기도 양주군 노원면의 일부 지역이었다.
서울의 동북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중계동中溪洞은 불암산 아래 학도암鶴到庵 등 많은 사찰이 곳곳에 들어서 있었던 지역이기도한다. 1911년에는 양주군 노원면 광석리로 되었다가 1914년에 노해면 중계리로 되었으며 중계본동에는 은행마을, 광석마을, 납대울 등의 마을이 있었다.
조정에 바치는 조공을 모아놓은 납대울 마을
납대울은 불암산 아래 서남쪽 중턱에 학이 와서 놀 정도로 풍경이 아름다운 곳에 지은 학도암鶴到菴(중계동1번지)바로 아래 있는 마을이다.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음梧陰 윤두수尹斗가 살았던 곳으로 조정에 바치는 조공을 모아 놓은 곳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연로한 어른들의 기억에 의하면 오늘날 원암 유치원 자리가 바로 윤두수의 공관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연립주택이나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어 옛 정취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나마 윤두수의 공관이란 곳에 한옥이 잘 보존되어 경주 김씨가 대대로 살아 왔다. 그리고 현재 중계동 75-95번지 일대의 마을 입구에 '납대울마을'이란 표석標石이 1백 미터 떨어진 동네 슈퍼 앞에 세워져 있지만 물건에 싸여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이지만 원암 유치원 맞은편 쪽은 커다란 바위가 그 위용욜 드러내고 있다.

중계동 104 마을
● 노원구 하계동의유래
-충절의 징표, 최초의 한글 비석-
중랑천의 제일 아래쪽에 위치한 하계동下溪洞은 조선 시대까지 경기도 양주군 노원면 가좌동街左洞, 용동리龍洞里, 상곡上谷, 상곡리, 오목리 일대에 해당된다. 하계동은 한천 변에 위치하고 있어서 예로부터 들판이 넓은 개울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자연 환경을 지닌 하계동은 대부분 농경지로 이용되었고 산촌山村 헝태의 자연 촌락 몇 곳으로 0|루어졌다.
하계동 산12번지에는 이문건李文健이 가문을 찬양하며 부모의 유덕을 추모하여 1536년(중종 31)에 세운 최초의 한글 고비古碑의 주인공인 성주星州 이李씨 이원탁李元濯의 묘와 그 아래로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게 굴복하자 이에 반대하여 강화도에서 자결한 이상길李尙吉의 묘와 신도비가 있어 효와 충절의 징표가 많은 마을이기도 하다.

하계동 산16-1번지에 있는 벽진이씨 충숙공 이상길과 그 아버지 찬성공 이희선의 묘역
자연 마을로 가재울 마울이 있었는데 이곳은 하계동 12번지 일대로 가좌동加佐洞, 가재동街才洞, 개잘리 등의 명칭으로 부르던 곳이다. 하천이 맑고 깨끗해서 가재가 많이 잡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명칭으로 가재울에서 잡히는 가재는 크고 살이 통통하게 배겨서 일품으로 인정해 주었다. 지금은 한글 고비에서 아래쪽에 있는 ′가재울 꽃농원′이란 상호에서 당시 아름다운 마을 이름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하계동과 월계동을 잇는 교량
첫댓글 잘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