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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정식 로제의 노래 원문보기 글쓴이: 로제
희망을 부르는 희망 (공동선 135호)
프롤로그
가는 비 꽃잎에 삽삽이 내리고
강 건너 마을은 비안개로 흐리다
찔레꽃 찬 잎은 발등에 지는데
그리운 얼굴은 어느 마을에 들었는가
젖은 몸 그리움에 다시 젖는 강기슭
(도종환 시 / 김정식 곡 ‘세우’ 가사 전문)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1994년/문학동네)」라는 도종환 시집에 실린 시 ‘세우(細雨)’에는 올 듯 올 듯 오지 않는 희망이 우수(憂愁)로 담겨있다. 희망을 노래하면 희망이 오는가? 답부터 말하자면 ‘반드시 온다’이다. 왜냐하면 그 희망이 올 때 까지 노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눈 앞에 와 있는 희망
며칠 전 휴일을 맞아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망능리에 있는 ‘성요셉의 집’ 마당에서 ‘김정식로제 자연힐링 콘서트’가 있었다.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계신 어르신들을 위해 무료로 운영되는 곳이기에 모시는 분들과 자원봉사자들을 위해 내가 자청해서 마련한 자리였다. 단지 내 노래가 좋아 참석하신 주부 이소영씨가 ‘세우’라는 노래를 신청했는데 그날 나는 ‘보리 팰 무렵’ 까지 두 곡을 이어서 불렀다.
장다리꽃밭에 서서 재 너머를 바라봅니다
자갈밭에 앉아서 강 건너 빈 배를 바라봅니다
올해도 그리운 이 아니 오는 보리 팰 무렵
어쩌면 영영 못 만날 사람을 그리다가 옵니다
(도종환 시 / 김정식 곡 ‘보리 팰 무렵’ 가사 전문)
“도종환 시인은 이 두 편의 시에서 올 듯 올 듯 오지 않는 희망을 말합니다. ‘세우’에서는 ‘그 희망이 어디에 있기에 오지 못하는가?’라며 사무친 그리움을 말하고, ‘보리 팰 무렵’에서는 ‘어쩌면 영영 못 올지라도 끝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결코 오지 않을 것처럼 여겨지더라도 희망을 노래하며 기다리면 반드시 오고야 맙니다. 마침내 올 때 까지 그 희망을 노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디언들이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옵니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그만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기우제를 지내러 산으로 갈 때 가재도구를 챙기고 가축들도 데려 갑니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내려오지 않을 작정을 하고 떠나는 거니까요. 도종환 시인이 노래했던 그 ‘희망’이 와 있습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었는가?’ 혹은 ‘그렇게 선출된 대통령이 얼마나 정치능력이 있는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민의 80% 이상이 ‘나라다운 나라에 대한 희망’을 말하고 있고 그에게 투표하지 않은 유권자들도 지지를 보내고 있으며, 심지어 ‘잘 해도 너무 잘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서정 가득한 시노래를 듣고 우리는 그렇게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을 생각했다.
절망 속에서 부르는 희망의 노래
2001년 여름. 생태보전과 인권회복을 위한 사회운동이 정점에 달했다. ‘새만금갯벌 살리기’와 ‘사형제폐지’ 그리고 ‘군의문사 진상 밝히기’ 등,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여러 운동에 투신했지만 어느 일 하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람과 자연의 생명이 달려있는 시급한 일들이어서 쉬지 못하고 강행군을 한 탓에 몸도 마음도 지쳤고 뜻한 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아 상실감도 컸다. 엎친 데 덮친다더니 몸과 마음이 상한 채, 한 여름 40일간 가족과 함께 미국과 캐나다 초청여행을 다녀왔다. 병든 몸으로 드넓은 북미주 땅을 혼자 운전했고, 몇 개의 도시에서 간간히 초청강의를 했으며, 외국여행이 처음인 가족들을 보살피는 일까지 그야말로 삼중고(三重苦)를 겪은 셈이다. 그렇게 지칠 대로 지쳐 돌아온 내게 다시 사회운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생태보전과 인권회복을 위한 전국 투어 콘서트가 교대로 이어졌고, 지치고 상한 몸을 거의 끌고 다니며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던 초가을 어느 날, 그야말로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지구촌을 발칵 뒤집어 놓은 9.11 테러다. 거의 매일 밤낮으로 모든 매체가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는 영상을 무한반복으로 보여주었기에 내 영혼마저 무차별 폭격으로 무너지는 듯 했다. 더구나 불과 2주 전에 가족과 다녀온 곳이어서 더욱 참담한 심정이었다. 그렇게 얼이 빠진 채 사흘을 지내다 대학 후배이며 노래 도반(道伴)이었던 범능 스님(1961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나 2013년 지병으로 입적)이 당시 머물던 대전 대진정사에서 하루 밤을 지내게 되었다. 초청강의와 콘서트로 지방나들이 길에 오가며 들러서 노래 이야기를 자주 나누던 터였다. 그러나 그날 밤 나는 절망으로 지쳐 아무 데나 쓰러져 누워버렸다. 실제로 그로부터 얼마 후 쓰러져서 오랜 투병을 했고 자칫하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뻔 했었다. 그날 밤은 스님의 배려로 잘 쉴 수 있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펼쳐본 시집이 절망 중에도 희망을 노래한 도종환 시인의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였고, 거기 실린 두 편의 시 ‘세우(細雨)’와 ‘보리 팰 무렵’이 쌍둥이 노래가 되어 나왔다. 2001년 9월 14일 밤에.
희망을 부르는 희망
‘자연힐링 콘서트’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리는 다시 그 ‘희망’을 나누었고, 평범한 듯 보이지만 삶은 투철하게 살고 있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주부 이소영씨는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전했다.
“얼마 전 ‘보이스톡’이라는 SNS 메신저 덕분에 미국에 사는 친구에게 무료통화를 했는데, 그 친구가 제게 엄청난 희망을 안겨줬어요. ‘어질고 인품 훌륭한 분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축하차 전화를 했더니 화답을 하듯 이렇게 말하네요.”
대통령 얼굴이 모든 사람이 기다리는 ‘큰 바위 얼굴’과 닮았다.
새로 집권한 진보정당이 한 15년쯤, 아니 최소한 10년만이라도 잘 해주면 적폐청산 가능해져서 북유럽 같은 복지국가가 될 수 있다.
북유럽 국가들이 사회복지 면에서 비교적 이상적인데 지정학적 위치로 볼 때 우리나라도 북유럽과 같은 복지국가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공부는 물론 얼굴마저 예쁜 친구 배상민은 이대 정치외교학과 석사를 거쳐 미국 퍼듀대에서 사형폐지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일리노이 주립대 정치학과 정교수예요. 최근 테뉴어(tenure 연구 실적과 강의능력 평가를 통해 평생직장을 보장해 주는 종신교수직 제도)를 받았고 영어로 많은 저술활동도 했던 그녀가 말한 거여서 더욱 신뢰가 가더라니까요. 그저 짐작이 아니라 탄탄한 연구이론도 뒷받침되어 있기에, 말만 들어도 가슴 설레고 흥분되는 이 심정을 온 국민에게 알리고 싶어요. 그러자면 신빙성이 확보되어야 해서 친한 친구지만 그녀의 신상(身上)을 확인해 뒀다니까요. 남편에게 이 내용을 전했더니 덩달아 기뻐하며 좋아하더라구요.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이니 근거 없는 얘기에 귀를 기울이진 않겠지요. 이렇게 제가 특정학교들을 밝히는 건 희망의 신빙성을 위한 것일 뿐 다른 뜻은 전혀 없어요. 우리나라가 북유럽처럼 복지국가가 된다면 참으로 살맛나고 하루하루가 기다려지는 기쁜 삶이 될 거예요. 또한 젊은이들과 아이들에게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을거구요. 세월호 참사 이후 버스에서 내리는 학생들만 봐도 부끄러웠어요. 이런 나라를 물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니 고개를 못 들겠더라구요. 우리 동네에 사는 결혼 한지 7개월 된 32살 신혼여성은 ‘험한 세상이 두려워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고 해서 놀랍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어요. 그런데 좋은 나라를 물려주게 된다면 떳떳하고 부끄럽지 않으니 참으로 행복한 일이잖아요. 나라 같지 않은 나라를 내 자녀의 자녀에게까지 자자손손 물려줄 생각하면 늘 우울했는데 이제는 괜찮아졌어요.”
순박한 그녀의 심성처럼 걸러지지 않은 채 흥분감에 들떠서 말한 것을 녹취하듯 적은 내용에서 타당성이나 객관성을 살피기보다는 그냥 ‘희망’만 생각하고 싶다.
죄인들의 가슴에 스민 희망
말만 들어도 가슴 설레고, 생각만 해도 흥분되는 이 벅찬 희망을 이 천년 전 갈릴래아에서 누린 사람들이 있었다. 유대인들의 주류무대인 예루살렘으로부터 고립되어 있고, 지역적으로도 이방의 땅 사마리아 너머에 위치한 척박한 땅 갈릴래아에, 더 이상 밀려날 곳 없는 천민들이 살고 있었다. 유대인이 규정한 선민(選民)에서 제외되었기에 구원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아무런 희망 없이 그저 목숨만을 부지하며 살다 죽었던 그들에게 기쁜소식(福音)이라는 희망이 선포되었다. 죄를 지어 죄인이 된 게 아니라 천민이라는 신분 자체가 태생 죄인인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죄인들에게 해방과 구원을 선포하신다’는 말은 설령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 가슴 벅찬 행복과 새로운 삶의 희망을 전하고 나누는 동안 ‘하느님 나라 회복’이라는 예수운동이 확산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니 희망이 희망을 낳게 된 것이리라. 주부 이소영씨가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전하고 싶다는 희망 또한 오랜 세월 기다림에 지치고 그리움에 목마른 우리 모두에게 가뭄의 단비처럼 스며들어 벅찬 희망을 이루게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절망을 덮는 희망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가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도종환 시 / 김정식 곡 ‘담쟁이’ 가사 전문)
지난 18대 대선을 앞둔 2012년 9월. 문재인 후보 지지모임인 ‘담쟁이 포럼’에서 ‘그 남자 문재인’ 출판기념회를 하면서 내게 전화를 했다.
“저희가 행사 기획을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하다 선생님께서 작곡하신 ‘담쟁이’라는 노래 동영상을 봤는데요. 저희 행사취지에 꼭 맞는 내용이어서 사용하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문재인 선생님을 좋아하니까 조건 없이 사용하도록 허락하겠습니다.”
“문 후보님을 좋아하신다니 기왕이면 청을 하나 더 드리고 싶습니다. 동영상은 행사 전후에 보여드리기로 하고 오셔서 직접 노래를 불러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문 선생님을 좋아하지만 안철수 후보를 지지하고 있기에 죄송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대신 동영상은 얼마든지 사용하셔도 됩니다.”
마침 곁에서 듣고 계시던 시인 이해인 수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로제, 다시 봐야겠네~. 그런 자리에서 가수를 부르면 대부분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가기 쉬운데 자기 소신을 밝히고 사양을 하다니 대단한데~.”
지난 18대 대선에서, 새로운 정치풍토에 대한 갈망과 정권교체 가능성 때문에 안철수 후보를 지지했다. 후보가 누구건 간에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방식으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고, 반드시 정권교체가 되어야하는데 문재인 후보 보다는 안철수 후보가 가능성이 더 크다고 여겼다. 기성 정치판에 오염되지 않아 신선해 보였고, 미래의 주인공인 젊은이들과 잘 소통하는 모습도 보기 좋았지만, 그가 지닌 경제능력으로 우리나라를 잘 살게 만들어 가난한 북한을 편안하게 도울 수 있을 것 같은 희망도 없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절망 속에서 노래해온 내 희망’을 걸고 싶은 열망은 지지를 넘어서 무한 신뢰에 가까웠다. 실상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했지만 굳이 알고 싶지 않았으니 맹신(盲信)이라고 여겨진다. 또한 말도 안 되는 미신에 가까운 내용이지만 순흥안씨인 그가 벼랑 끝에 서 있는 우리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믿음도 있었다. 성리학을 도입한 고려 후기의 안향(安珦), 안중근(安重根)의사와 도산 안창호(安昌浩) 선생을 비롯하여 대한청년단을 조직하여 많은 독립운동원을 양성하였던 안병찬(安秉瓚) 선생, 화가로써 구국운동을 전개한 안중식(安中植) 선생, 항일운동에 투신한 독립운동가 안명근(安明根)선생, 우리의 하늘을 최초로 비행하여 암울한 식민지 시대 한국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던 안창남 선생, 독립운동가 안재홍 선생 그리고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 등, 어려울 때 구국과 애국에 앞장선 이들 중 순흥안씨가 많았기에 그렇다.
‘세우’라는 시에 언급된 ‘어느 마을에 들었던 그리운 얼굴’이 그였기를 바랬다. ‘보리 팰 무렵’에 수채화처럼 묘사된 ‘해마다 기다리다 만난 빈 배’를 이번에는 그가 타고 온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가 야권 후보단일화를 외면한 채 돌연 사퇴를 했고, 사퇴 후 행보도 실망스럽기 그지없었으며, 이번 19대 대선에서 보여준 행보 또한 그리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심정이라면 그는 정치보다 다른 분야에서 나라를 돕는 것이 좋으리라 여겨진다. 그에 대한 맹신에 가까운 지지는 절망에 지쳐 신기루를 봤거나 헛것이 보였던 탓이리라.
예술에 담긴 희망
시가 희망을 주는가? 시 뿐 아니라 모든 예술과 문학은 우리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고 여긴다. 지구촌 곳곳에서 있었던 수많은 혁명과 사회운동에 시와 노래를 비롯한 예술이 함께 했다. 그중 가장 가시적 효과가 높은 것이 노래겠지만 가사로 차용되는 시 또한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님을 위한 행진곡(백기완 시/김종률 곡)’ 가창논란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서울 성동구 금호동에 ‘소금창고’라는 재활용 매장이 있다. 버리기 아까운 옷과 신변잡화(생활필수품 및 가재도구)를 기증받아 판매하여 얻은 수익금으로 어려운 이웃과 나누는 다리 역할을 하는 곳이다. 지난 5월 중순 ‘소금창고’ 창립 8주년 기념잔치에 초청되었다. 수원에서 오전 강의를 마치고 부랴부랴 힘들게 도착해 보니 금호동 2~3가동 주민센터 3층 강당을 가득 메운 참석자 대부분이 고령의 어르신들이었다. 동장님을 비롯하여 구청장님과 구의회의원들의 인사 후 이어진 순서들은 잘 알려진 대중가요와 댄스, 색소폰 연주와 한국무용 등 대부분 어르신들의 흥을 돋구어줄 내용들이다. 내 순서가 다가오자 갑자기 난감해지기 시작했다. 고요하고 서정성 짙은 내 노래들은 이런 잔치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으며, 그렇다고 내 노래의 대명사격인 ‘생활성가’를 부른다는 것은 특정 종교인들의 모임이 아닌 다음에야 청중무시에 해당하기 때문에 단연코 금물(禁物)이다. 그래서 선택한 노래가 ‘갈까부다(판소리 춘향가 中)’였다. 대중가요로 편곡된 국악가요지만 판소리 가락이기에 어르신들과 교감하기에 좋았고, 그 느낌을 이어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불렀다.
곱고 희던 그 손으로 넥타이를 매어주던 때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막내아들 대학 시험 / 뜬 눈으로 지내던 밤들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큰 딸아이 결혼식 날 흘리던 눈물방울이
이제는 모두 말라 / 여보 그 눈물을 기억하오
세월이 흘러감에 흰 머리가 늘어가네
모두가 떠난다고 여보 내 손을 꼭 잡았소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어찌 혼자가려하오
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마디 말이 없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김목경 사/곡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가사 전문)
흥에 겨워 들뜨고, 출연자와 함께 몸을 흔들던 어르신들이 순간 모두 숙연해지셨고 눈물을 훔치는 분도 많았다.
“노래 좋으셨지요? 이 노래 들으셨던 적이 있으신가요? 대부분 처음 들으셨나 봅니다. 그런데 이 노래를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무척 좋아합니다. 40~50대는 물론이고 20~30대들에게도 사랑받는 노래인데 그들이 이 노래를 듣고 부르면서 무얼 생각할까요? 노래에 담긴 애상(哀傷)에 젖어 가사를 새기게 되는데 그 가사 안에 우리네 부모님들께서 자식을 키우며 겪었던 애환(哀歡)이 담겨 있습니다. 누가 이런 내용을 젊은이들에게 이토록 간절하게 느끼고 새기게 해줄 수 있겠습니까? 영국 유학 시절 앞집에 살던 노부부를 보고 자신의 부모님을 생각하며 곡을 만들었다는 김목경씨와 애절한 목소리로 잘 표현해준 가수 김광석이 아니라면 어떻게 젊은이들에게 이런 아름다운 내용을 전달할 수 있겠습니까? 이게 바로 예술의 힘입니다.”
어르신들은 만장일치의 감회를 박수로 표현해 주셨다.
더 늦기 전에 반드시 이루고 싶은 희망 하나
문을 두드립니다.
다시 만나기로 한 약속 되새기며
오늘이 백 년째 입니다.
무정한 사람, 야속한 사람, 비겁한 사람
그런 당신을 사랑하는
내가 더 큰 죄인입니다.
문을 두드립니다.
언젠가 나올 희망을 꿈꾸며
내일이 백 년 하고 하루째입니다.
(이상규 시/김정식 곡 ‘닫힌 문’ 가사 전문)
1992년 1월부터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집회는 25년간 1286번으로써 단일 주제로 개최된 집회로는 세계 최장기간 집회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그렇게 오래 동안 이어졌던 이유는 딱 한 가지다. 가해 당사자인 일본국의 대사관이 한 번도 문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나는 이 수요집회에 네 차례 초대되었고, 그 때 마다 문을 열 것을 노래로써 간절히 요구했지만 굳게 닫힌 그들의 문은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언젠가는 열릴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수요시위가 요구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일본군 '위안부' 범죄 인정, 2.'위안부' 진상 규명, 3.일본 국회의 사죄, 4.법적 배상, 5.역사교과서 기록, 6.위령탑 및 사료관 건립, 7.책임자 처벌. 이런 요구사항에 대해 일본 정부는 아직도 공식적인 반응을 하지 않고 있고, 그러는 동안 대한민국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38분 중 200분 이상이 이미 사망하셨고 39분만 생존해 계신다. 언젠가 나올 거라면 더 늦기 전에 어서 희망의 문을 열고 나오기를 일본 정부와 우리의 새 정부에 간절히 바래본다. 피해자에게도 희망이 필요하지만 어쩌면 가해자에게 더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할머니들이 다 돌아가시면 일본정부는 영원히 용서받을 희망조차 없기에.
또 하나의 희망을 품고
12년 전 가족과 함께 캠핑카로 북유럽 여행을 한 적이 있다. 독일에서 시작하여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땅 끝까지, 큰 배에 캠핑카를 싣고 수없이 피요르드(fjord 빙하가 녹아 만들어진 길고 좁은 만)를 넘나들었다. 잘 발전된 복지국가들을 구경하면서 한없이 부러웠을 뿐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는 것은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는 것만큼이나 공허한 것이었다. 이제 하나의 희망을 만났으니 또 하나의 희망을 품고 싶다. ‘나라다운 나라’로 그치지 않고 반드시 복지국가를 이룰 수 있다는 지정학에 바탕을 둔 배상민 교수의 견해와, 그 견해를 신봉하는 이소영씨 부부의 희망을 따라 나도 온 국민에게 전하고 싶다. 희망은 희망을 낳는다. ‘비안개로 흐린 강 건너 마을에 들었던 그리운 얼굴’은 ‘큰 바위 얼굴’로 돌아와 우리 앞에 서 있고, ‘해마다 기다리다 못 만나고 돌아왔던 그리운 사람’을 만났으니 더 이상 ‘강 건너 빈 배’를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그 배를 타고 강 건너 마을로 한시라도 빨리 그 희망을 만나러가야겠다. 배상민교수도, 이소영 씨 부부도, 도종환 시인도, 큰 바위 얼굴도 모두 함께 그 배를 타고 희망의 복지국가로 고고씽~
에필로그
마음이 울적할 때 저녁 강물 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 그리메처럼 어두워 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낮은 소리로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주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흑 속에서도 다시 먼 길 갈 수 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도종환 시 / 김정식 곡 ‘벗 하나 있었으면’ 가사 전문)
지독한 절망에도 지쳐 쓰러지지 않고 끝까지 희망을 노래해 온 도종환 시인에게 ‘저녁 강물 같은 벗’이 되어주고 싶다.
김정식 곡 비2.7.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