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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세례는 옳은가?
손재익 목사 (한길교회)
서론
교계의 신문을 보면 종종 이런 기사가 실립니다. “연무대 5천 명 장병에게 진중 세례”이라는 제목 하에 “본 교단 총회장과 노회장들을 비롯한 교단 지도자 2백 여명이 참석”이라는 기사가 실립니다. 그리고 한국의 많은 교단들은 이러한 일을 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하나님 나라에 큰 보탬이 되는 일을 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진중세례에 대해서 아무런 비판의식이 없습니다. 복음전파를 위해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니까 “그 세례가 과연 성경적인 것인가?” 에는 관심이 없고, “많은 사람”에게 베푼다는 것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이 성경적인 방식이 아니라면 한 번 쯤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그것이 좋은 방법인지, 그것이 과연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는지.
그렇습니다. 진중세례는 성경적인 방식이 아닙니다. 얼마나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는 지 정확한 통계도 없습니다만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본론
1. 세례는 복음 전파의 도구가 아닌 복음 전파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진중세례를 베푸는 분들은 대개 그런 방식으로 복음이 증거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습니까? 사실 세례는 복음전파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복음전파의 결과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그렇게 복음이 열매를 맺고 나면 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세례를 남발하여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28장 19-20절을 보면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제자를 삼아서 세례를 베풀어야 합니다. 세례를 베풀고 나서 제자로 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세례는 복음전파의 결과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세례가 복음전파의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열심히 복음을 전하여, 그 복음을 들은 사람이 중생하고 회심한 뒤에 세례를 베풀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8장 12절에도 보면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도 보면 복음전파의 결과로 세례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복음 전파의 도구가 아니라 결과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세례와 함께 교회의 중요한 성례 중 하나인 성찬 역시 복음전파의 도구가 아니라 복음전파의 결과라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찬에는 복음이 담겨 있습니다. 성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담겨 있습니다. 성찬 안에는 복음의 모든 요소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찬을 아무에게나 베풀지 않습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만 베풉니다. 왜냐하면 성찬은 복음 전파의 도구가 아니라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군대에서는 세례를 베풀려고 하기 보다는 말씀을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초코과자로 군인들을 위로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례는 그 이후의 문제입니다. 세례를 많이 베푼다고 해서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 세례를 받음으로 자기가 이미 구원받았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어 더 이상 복음을 들을 기회를 잃어버릴지 모릅니다.
2. 세례가 의미하는 것 중에 중요한 것은 교회의 가입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성례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약속에 대한 표(表)sign와 인(印)seal의 성격이 있습니다(롬4:11; cf. 창17:7,10).1) 그렇기에 세례는 그것이 상징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례가 무엇을 상징합니까?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씻으심을 상징하고 인칩니다(institutes, Ⅳ, xv, 4;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69,70,72,73문답).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남을 상징합니다(institutes, Ⅳ, xv, 5.).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례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가입하는 외적인 표라는 것입니다(institutes, Ⅳ, xv, 6, 13.). 자연인은 복음을 듣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것을 상징하는 세례를 받습니다. 이렇게 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교회의 회원이 됩니다. 그렇기에 세례는 교회의 회원이 된다는 외적인 표시가 됩니다.
정리하면, 세례는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의 일원으로 인정되기 위해 교회 공동체에 가입되는 입문의 표시the sign of the initiation입니다.2)
그러므로 세례는 교회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세례를 받아 교회원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진중세례는 교회와 연결되지 않습니다. 진중세례를 받은 군인이 곧바로 교회의 회원이 되지 않습니다.
3. 세례 중생론을 믿지 않는다면 세례가 급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통 개신교회가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세례 중생론(baptismal regeneration)을 믿습니다. 그들은 세례는 그 자체로 역사해서(ex opere operato) 곧 자동적으로 중생으로 이어진다고 믿습니다(딛3:5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됨). 그들은 세례를 받으면 원죄와 자범죄, 죄로 인한 형벌도 사함 받으며, 세례를 받으면 구원을 받으며, 천국에 들어간다고 주장합니다.3)
만약 우리가 로마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세례 중생론을 믿는다면 군대에서 하루 빨리 세례를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그들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만이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례 중생론을 믿지 않습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8장 5절). 복음을 모르는 군인들을 구원하는 것은 세례가 아니라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세례가 급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을 전하여야 합니다.
4. 세례는 성찬과 연결되어야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생활을 해 보면 알겠지만 세례는 성찬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세례식과 성찬식을 함께 합니다. 세례를 주고, 그 세례를 받은 사람이 성찬식에 바로 참여합니다. 그리고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이 성찬식에 참여합니다. 이런 점에서 세례와 성찬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군대에서의 세례는 성찬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특히 훈련소에서의 세례가 성찬으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성찬이 집례되는 곳에서라야 세례가 시행될 수 있습니다. 성찬을 주일 공예배에서 베풀지 않는 교회는 굳이 세례를 베풀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군대에서의 진중세례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5. 세례는 반드시 신앙고백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세례는 복음전파의 결과입니다. 그렇기에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가 과연 복음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그 사람이 참으로 거듭난 사람인지, 그가 과연 앞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지, 그가 교회의 회원으로서의 의무와 권리를 다할 것인지, 그가 교회의 질서에 순종할 것인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혹 그에게 어떤 문제는 없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다니는 교회에서는 세례를 줄 때에 항상 확인을 합니다. ‘세례 문답’이라는 것을 합니다. 세례를 베푸는 주체인 당회가 세례 대상자를 불러서 신앙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신앙을 확인하기에 앞서 아주 최소한의 조건을 답니다. 교회 출석한지 1년 이상 되어야 하고, 성경을 1독 이상 해야만 줍니다. 그런데 사실 이 조건은 “최소한”의 조건이지 “최대한”의 조건이 아닙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교회 출석 1년이 마지노선이라는 것입니다. 1년 되었다고 다 주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회심의 증거가 분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1년은 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1년이라는 기준도 현대교회에서 상당히 약화된 기준이지, 사실 초대교회의 기준에서는 3년은 되어야 합니다. 3년은 되어야 복음의 증거가 확실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례문답을 통하여 자기 자신이 죄인인 줄을 깨닫는 사람인지, 그래서 그 죄가 자기 자신을 영원한 심판으로 인도하게 된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사람인지,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으며, 그 멸망받을 죄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므로 하나님을 여호와로 믿는 사람인지, 오직 한 분 하나님을 위하여 살겠다고 다짐하는 사람인지를 확인합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베푸는 것이 세례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그 위대하고 존귀하신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종종 세례문답을 통과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정상적인 교회에서는 목사와 장로가 세례 받을 이들을 심각하게 문답하여 그들의 신앙과 중생 여부를 살핍니다. 문답의 결과 아직 중생한 사람이라는 뚜렷한 증거가 없다면 좀 더 공부하며 기다리도록 합니다.
그러나 군대에서의 세례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들이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지 않아도 아무 상관없이 세례를 주고 있습니다. 최소한의 외적 조건인 교회 출석 1년은 커녕 교회에 나온지 4주도 채 되지 않아서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지도 않고 하나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성경은 창세기 1장 1절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줍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아야 할 사람에 대하여 바른 교육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6. 세례는 치리회의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살짝 언급했습니다만, 세례의 주체는 치리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합니다. 세례를 목사가 베푸는 것이라고. 물론 세례는 목사가 베풉니다. 베푸는 행위의 주체는 목사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세례의 주체는 치리회입니다. 세례는 사사로운 개인이 시행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4)
앞서 언급한 대로 세례를 받는 것은 교회에 가입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개인이 스스로 결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즉 어떤 사람이 세례를 받기 원한다고 해서 그에게 세례를 베풀어서는 안 됩니다. 세례를 베풀기 위해서는 반드시 장로들의 모임인 당회의 적절한 교육과 더불어 문답을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전체 교회의 보증이 있은 후에 세례가 베풀어져야 합니다. 그런 과정이 무시된 채 시행되는 세례는 올바른 것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목사라 하더라도 치리회의 허락과 동의없이 베풀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이 당회장이 아닌 경우에는 당회장의 허락과 동의없이 세례를 베풀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군대에서의 세례는 치리회의 허락과 동의가 없습니다. 군대의 교회는 사실상 치리회가 없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상당수의 군인교회는 노회에 소속된 교회가 아닙니다. 대개가 국가에 소속된 독특한 형태의 교회입니다. 그렇기에 군대에서는 굳이 세례를 베풀 필요가 없습니다. 정 필요하다면, 군대 안에서 복음을 전한 결과로 회심한 사람에 대하여 그 사람이 전역을 하고 나면 출석할 교회를 연결해 주고 그 교회를 통해서 세례를 받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결론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어떤 것, 그것도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이의없이 받아들여지던 것에 대해서 틀렸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게 기억할 것은 진중세례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진중세례는 제3계명 위반입니다. 왜냐하면 세례란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푸는 것(마28:19)인데, 진중세례는 세례를 헛되게(망령되게) 베푸는 행위이므로 제3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군대에서의 세례가 틀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앞으로 모든 교회는 세례를 아무에게나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군대에서 베푸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매주일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에게 그냥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원입교인으로 등록을 받을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세례교인으로 등록받아야 할 것입니다. 더 이상 세례문답이라는 것을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논리적으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1) 개혁주의 신학은 은혜언약의 표와 인에 근거해서(롬4:11), 성례에 대하여 표와 인이라고 표현한다. Robert L. Reymond, A New Systematic Theology of the Christian Faith (Nashville: Thomas Nelson, 1998), 922, n.24. 이러한 표현의 사용은 교회의 오랜 역사에 근거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표’라는 표현은 사용은 어거스틴에서부터 비롯되었다(De Doctrina Christiana, II, iv; De Civitate Dei, X, 55). 고재수, 『교의학의 이론과 실제』(천안: 고려신학대학원출판부, 20012), 336-355.
2) institutes, Ⅳ, xv, 1; John Murray,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vol 2.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76-1982), 박문재 역, 『조직신학 Ⅱ』(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1), 384.
3)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Libreria Editrice Vaticana, 1994, 1997), para. 1215, 1257, 1263, 1265, 1277, 1279; 조영엽, 『가톨릭 교회 교리서 비평』(서울: CLC, 2010), 161-3.
4) institutes, Ⅳ, xv, 20. 침례 이외의 세례 방식과 유아세례에 대해 지나치게 거부반응을 보이는 침례교주의자인 그루뎀은 세례를 베푸는 자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도 일반적이지 않다.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An Introduction to Biblical Doctrine (Grand Rapids: Zondervan, 1994), 노진준 옮김, 『조직신학(하)』(서울: 은성, 1997), 218-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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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의 친한 친구가 얼마전에 물어온 질문에 대한 답을 여기에 올려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