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勝地에 대한 기록은〈鄭鑑錄〉·〈懲毖錄〉·〈遊山錄〉· <道詵秘訣>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십승지는 전쟁이 일어나도 굶주림과 재앙이 없이 안전하게 피란할 수 있는 10군데를 말한다. 장소는 비결마다 조금씩 다르다.
<감결 鑑訣>과 <격암유록 格菴遺錄>에 다음과 같은 장소들을 들고있다.
① 풍기에 있는 其川 車岩 金鷄村으로 북쪽 소백산 아래 두 물골사이에 있다.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에서 소백산 비로사 방향에 있는 금계동, 욱금동, 삼가동으로 추정된다.
“곡식 종자를 태백산과 소백산에서 구할 것이니, 이곳은 병화가 들어오지 않고 흉년이 들지 않고 白衣賊을 만나면 혼인을 하여 형제처럼 되어서 다정하게 이야기하며 즐겁게 지낼 것이다.”라 하였다.
② 花山 북쪽에 있는 召嶺 古基는 내성현 동쪽과 태백 양면이다. 靑陽顯에 있는데 봉화 동쪽 마을로 넘어들어 갔다. 지금의 봉화군 내성면으로 추정된다.
③ 보은 속리산 아래 四甑項(네 시루목이 이어진 곳) 근처로 “난리를 만났을 때 이곳에 몸을 숨기면 만에 하나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대로 보존할 땅은 아니다.”고 하였다.
지금의 보은 증항 부근으로 상주, 함창 방면 40리 충북과 경북의 도계에 있는 시루봉 아래 관기리로 추정된다.
④ 운봉 杏村이다. “두류산 아래에 있는 銅店村 백 리 안은 오래오래 보전할 수 있는 땅이다.”고 하였다. 지금의 지리산 북쪽 임천 유역, 혹은 운봉의 향촌으로 추정된다.
⑤ 예천 金塘村 북쪽으로 “이 땅은 비록 얕게 드러났으나 병난의 해가 미치지 않아 여러해에 걸쳐 평안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 임금의 수레가 닥치면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지금의 예천군 용문면 죽림동의 金塘室 지역이다.
⑥ 공주의 維鳩와 麻谷의 두 물골의 둘레가 100리나 되므로 살육을 피할 수 있다.
공주와 유곡 사이의 100리 사이로 추정되며 한국전쟁 때 많은 피난민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⑦ “영월 정동쪽 상류는 어지러운 일이 생겼을 때 종적을 숨길만하다. 그러나 수염 없는 자가 먼저 들어가면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영월 동쪽 옥동천으로 지금의 영월군 상동읍 석항천 좌우의 연하리 일대로 추정된다.
⑧ 茂朱의 茂風 북동쪽 舞鳳山 북쪽 銅傍 相洞으로 피란 못할 곳이 없다. 무주 무풍 북쪽 덕유산 자락으로 추정된다.
⑨ 부안 “울금바위 壺岩 아래가 가장 기이하다. 또 변산의 동쪽은 몸을 숨기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지만 탐라가 다른 나라 땅이 되면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지금의 부안군 변산 호암이나 자세한 지명은 알 수 없다.
합천 가야산 아래 남쪽 萬壽峯으로 “그 둘레가 200리나 되어 영원히 몸을 보전할 수 있다. 동북쪽은 불가능하다.” 하였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고 지리산 만수동으로 지금의 구품대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