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22, 마 6:13,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들 8,
20.7.19, 박홍섭 목사
신앙은 변화입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면 생각이 변하고 꿈이 변하고 목표가 변합니다. 때로는 급진적으로, 때로는 점진적으로 삶의 방식이 변합니다. 무엇보다 기도가 변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외식하는 기도와 이방인들의 중언부언하는 기도와 비교해서 너희들은 그렇게 기도하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주의 백성들이 드리는 바른 기도의 원리와 방향과 내용을 주기도문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성도의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분명한 기도의 대상이 있고 질서와 순서가 있습니다. 성도는 막연한 존재에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구합니다. 구하되 우리의 필요를 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기도의 순서이고 질서입니다. 기도의 질서가 바로 되고 기도의 순서가 바로 설 때 삶의 질서가 바로 될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짐을 구하고 아버지의 나라가 나를 통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구하고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기도로 구하는 사람이 주의 백성들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이 어떻게 땅에서 구현됩니까? 매일 주님을 의지하고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여 탐심을 이기는 주의 백성들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용서하신 것처럼 자기에게 죄지은 형제를 용서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입니다. 다양한 시련과 유혹 앞에서 자신의 힘으로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시험과 악에서 건져달라고 기도하며 나아가 진리로 모든 악을 이기기를 구하는 성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고 펼쳐집니다.
오늘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으로 이루어진 주기도문의 마지막인 부분인 송영을 살필 차례입니다. 특이한 점이 있죠. 송영 부분이 괄호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괄호가 되어 있는 구절은 대부분 사본의 차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원본이 남아 있지 않고, 수많은 사본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본은 거의 일치하는데, 그중에 몇몇 사본은 일치하지 않는 게 있습니다. 오타나 실수 말고, 내용상 약간의 차이가 있거나 아예 들어있지 않는 사본들이 있을 때 괄호 안에 넣어서 표시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부분입니다. 초기사본에 이 부분이 없습니다. 성경 원본에 가장 가까운 고대 사본에는 이 부분이 없고, 그것을 필사한 사본에만 있기에 괄호로 처리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 송영이 주기도문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송영을 주기도문에 넣어서 사용합니다. 이 구절이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우리의 기도에 훨씬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기도를 하든지, 결국은 나의 왕국을 내려놓고 나의 힘을 내려놓고 내가 취하려고 하는 영광도 내려놓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다고 고백하고 찬송하면서 마무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소요리 문답이나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도 송영을 주기도문에 포함 시키면서 그 의미를 그렇게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의 유익을 위해 비록 괄호 안이지만 성경 필사 과정에서 이 구절이 들어가도록 섭리하셨음을 믿습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익히 아는 주기도문과 본문이 다른 점이 있죠? 무엇입니까? ‘대게’가 없습니다. 지금 번역본에도 빠져 있는데 사본의 원문에는 ‘왜냐하면’을 의미하는 ‘호티’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대개’가 옛날 말이지만 ‘결국’ 그런 뜻으로 비슷한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연결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루 먹을 양식을 주옵소서. 왜냐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할 수 있게 하옵소서. 왜냐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옵소서. 왜냐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의 송영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기도의 근거는 철저하게 하나님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거래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조건을 걸고 거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도 우리 기도를 듣고 응답해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그럼, 우리가 우리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께 나라가 있고, 하나님께 권세가 있고, 하나님께 영광이 있기 때문에, 그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위해 일용할 양식과 죄용서의 은총과 시험에서 건져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만약 기도의 근거가 우리 자신에게 있다면 누가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양과 형편과 실력과 수준을 보고 기도할 수 있게 하신다면 아무도 기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지 않고 자신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무너진 사람들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실패한 사람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혹, 우리 가운데 지금 이대로는 기도할 자격이 없다고, 나중에 하나님 볼 면목이 조금 생기면 기도하겠다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생각이 들 때 기도하십시오. 지금 “하나님, 제가 정말 형편없습니다. 내 마음에는 하나님보다 세상이 훨씬 큽니다. 내 삶에는 하나님보다 돈이 더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이 모습 이대로 감히 하나님 앞에서 설 면목이 없지만 두 손 들고 나오니 회복시켜 주옵소서. 다시 생명을 허락하시고, 다시 구원의 감격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제발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 이렇게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국 주기도문을 통해 우리의 삶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배웁니다. 왜 일용할 양식을 구합니까? 그저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이름과 나라와 뜻 때문입니다. 왜 죄 용서를 위해서 간구합니까? 죄책감을 덜어내고 마음 편하게 살려고 죄 용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갖고는 하나님 나라와 뜻을 위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죄지은 형제를 용서하지 않고는 주의 뜻대로 살 수 없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왜 시험에 넘어지지 않도록, 악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합니까? 단순히 나의 실패가 싫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과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의 마지막 송영은 ‘아멘’으로 끝이 납니다. 주기도문의 내용대로, 그 원리와 질서와 방향대로 기도하면 우리 인생이 하나님께 붙잡히게 됩니다. 생각이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을 나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것으로 바꿉니다. ‘아멘’은 그렇게 기도한 나의 기도의 내용에 내가 동의합니다. 그런 뜻입니다.
동시에 ‘아멘’은 동의의 뜻과 더불어 내가 정말로 그렇게 받아들인다는 결단과 고백도 포함됩니다. 객관적인 동의만이 아니라, 주관적인 결단과 고백까지 포함된 뜻이 ‘아멘’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아멘’으로 끝맺는 것도 그런 의미입니다. 그냥 습관적으로 ‘아멘’하지 않고 이렇게 고백하고 결단하는 겁니다. “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위해 살기로 결단합니다. 나는 하루 먹을 양식과 죄 사함의 은혜와 시험과 악의 유혹에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기로 다짐합니다. 인생은 나에 관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에 관한 것임을 고백합니다. 나는 정말로 그렇게 믿고 살겠습니다. 아멘” 이런 뜻입니다.
간혹 저에게 목사님은 왜 ‘아멘’하라고 안 하십니까? 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아멘’은 감정적으로 혹은 군대처럼 명령에 의해서 강제되는 제창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객관적으로 동의할 뿐만 아니라, 주관적으로 그 내용에 대한 나의 고백과 결단이 함께 있을 때, 마음을 담아 화답하는 것이 ‘아멘’입니다. 어떤 분들이 ‘아멘’ 안 하는 교회는 죽은 교회이고, ‘아멘’ 잘하는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아멘’은 그렇게 남발할 용어가 아닙니다. 그 의미를 잘 살펴서, 자기 삶을 걸고 동의할 때, 하는 겁니다. 그러니 기계적으로 너무 남발해도 문제고 너무 안 해도 고백과 결단이 없으니 문제입니다. ‘아멘’의 의미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나의 동의와 고백과 결단을 담아서 ‘아멘’할 수 있는 한우리 식구들 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주기도문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살폈습니다. 우리는 타락한 종교성을 따라 막연하게 자기를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의 원리와 질서와 방향과 내용을 주님께 배워서 기도합니다. 그러나 바른 기도를 하려고 너무 기도를 조심해서는 안 됩니다. 주기도문을 배우고 나서 이렇게 기도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 기도하지 않으면 잘 못 배운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더 바르게 기도하기 위해서 배운 것입니다. 기도 안 하려고 배우지 않고 기도를 더 잘하려고 배운 것이므로 이 기도를 배운 사람은, 이제 더 바르게 더 깊이 더 간절하게 기도해야 할 의무가 생긴 겁니다.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각종 좋은 것을 베푸시는 우리의 아버지 되심을 믿는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그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그냥저냥 잘 살아지니 기도하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별문제 없이 살아지기에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분들은 사실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봐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참된 생명의 삶이 아니라 목숨을 부지하며 사는 것에 불과합니다. 바빠서 기도하지 못한다는 말도 사실이 아닙니다. 마음이 없고, 믿음이 없고, 은혜가 없어서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경건의 능력을 경험할 수도 없고, 은혜의 달콤함을 맛볼 수 없고, 기쁨과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기도를 경건의 표지라고 불렀습니다. 신앙 서적을 많이 읽으면,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성경을 열심히 읽으면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전도하고 구제하면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한 번 그렇게 해보십시오. 기도하지 않은 채, 책을 읽고, 기도하지 않은 채, 성경을 보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더 교만해지고, 더 잘난 척하고, 더 허무해질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모든 경건 활동에 생명을 공급하는 산소와 핏줄 같은 겁니다. 영혼의 호흡입니다. 기도는 경건의 표지인 동시에 은혜의 방편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늘의 은총을 누릴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신앙생활도 사람 앞에서 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지 못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죄를 이길 수 없으며 기도하지 않고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으며 기도하지 않으면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지 못하며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을 이길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위해 살 수 없고 늘 자신의 울타리에 갇혀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로 하늘과 연결되어 땅을 살되 하늘처럼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